원문

스탈린 치하 동성애의 재범죄화: 새로운 사료, 새로운 답변

인물아돌프 히틀러, 보리스 니콜라옙스키, 니콜라이 부하린, 에른스트 룀, 예브게니 파슈카니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막심 고리키, 이반 아쿨로프, 요한 바프티스트 폰 슈바이처, 라자르 카가노비치,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카를 마르크스, 니키타 흐루쇼프, 블라디미르 레닌,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미하일 바흐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니콜라이 크릴렌코, 파울 힌덴부르크, 카를 라데크, 이오시프 스탈린, 블라디미르 베흐테레프, 안드레이 비신스키, 빌리 뮌첸베르크, 겐리흐 야고다, 미하일 쿠즈민, 리우리크 이브네프, 니콜라이 류비모프, 라인하르트 마우라흐, 세르게이 불라토프, 에른스트 토르글러, 블라고이 포포프, 바실 타네프, 마르크 세레이스키, 니콜라이 쿠르샤코프, 카를귄터 하임조트, 지크문트 프로이트, 해블록 엘리스 용어소련 남색죄 사건소련의 낙태 합법화·금지와 남색죄 재범죄화, 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유럽의 성개혁 운동과 1930년대의 반동 (1885~1941)

숙청: 공격받는 레닌그라드의 동성애자 공동체

1930년대 초, 동성애를 금지하는 형사 법규가 없었는데도 레닌그라드의 동성애자들은 OGPU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러한 감시는 자의적 기소와 감시 강화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조치들은 소비에트 당국이 “위험”하다고 여기거나 단지 수상하다고 본 집단들에 대한 탄압이 확대되던 더 넓은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34] 1930년대 초 레닌그라드와 다른 지역에서 OGPU는 서로 알고 지내며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겨냥한 이른바 “집단 사건”에 적극적으로 착수했다.[35] 이들 대부분은 지식인이었으며, “출판물, 공연, 예술가”와 여러 “반소비에트 요소” 집단에 대한 감시를 전문으로 하던 신설 OGPU 제4비밀정치부에 의해 기소되었다.[36] 1933년 여름까지 레닌그라드의 남성 동성애자들은 조직적인 방식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33년 8월 OGPU가 옛 수도에 사는 남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첫 체포에 착수하면서 갑작스레 바뀌었고, 이 작전은 늦가을까지 계속되었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동성애 남성들의 삶과 그들의 사교, 그리고 이후 1933년 레닌그라드 사건에서의 기소를 살펴보기 위해 이 글에서 사용한 주요 사료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연방보안국(FSB)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9권짜리 문서철이다.[37] 이 문서는 지금까지 거의 분석된 적이 없다.[38]

레닌그라드에서 체포된 남성들은 모두 공식적으로 “반혁명분자”로 취급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58조 외에도 일부 남성은 1926년에 채택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형법의 다음 조항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았다. 150조(성병 전파), 151조(성적 성숙에 이르지 않은 사람과의 성행위), 155조(매춘 알선)가 그것이다. 실제로 일부는 매독에 감염되어 있었고 심문 과정에서 이를 인정했으며, 다른 이들은 교도소 의료진의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문서철에는 미성년자 유혹이나 매춘 알선이라는 혐의가 어떤 증거로 뒷받침되었다거나 추가로 조사되었다는 표시가 없다. “정치적” 조항인 58조에 따라 기소된 남성은 모두 1989년부터 1993년 사이에 소비에트와 러시아 당국에 의해 복권되었다.[39] 150조, 151조, 155조에만 해당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은 오늘날까지 복권되지 않았는데, 국가가 이들을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가 아니라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로 보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동성애가 재범죄화된 뒤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수천 명의 남성에게도 적용된다. 포스트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이들은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공식적으로 범죄자로 분류되어 있다.

1930년대 초 레닌그라드에서 동성애 남성을 기소한 일에 관해 포괄적인 서술과 분석을 내놓는 것은 역사가들에게 여전히 상당한 과제로 남아 있다. 가용한 사료는 단편적이며, 내부 OGPU 문서(지령, 보고서, 내부 서신 포함)처럼 가장 핵심적인 자료는 거의 확실히 FSB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곳은 연구자들이 접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레닌그라드 사건에 관한 9권짜리 사건 파일은 도움을 준다. 1933년 여름과 가을에 심문받은 남성들이 이전에 체포되었던 친구들을 떠올려 언급한 덕분에, OGPU 탄압의 초기 희생자 가운데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레닌그라드 동성애자들 가운데 OGPU의 첫 희생자 중 하나는 표도르 폴루야노프(1887년생)로, 해당 공동체 안에서 이름이 알려진 재능 있는 배우였다. 공공연히 퀴어였던 무용수이자 배우인 폴루야노프는 1921년에 자신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내 별명은 피파인데, 그 이유는 거의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달랐다(신경 쇠약, 히스테리, 여자와 남자에 대한 무관심). 어릴 때 나는 블라디미르 베흐테레프 교수에게 데려가졌다. 나는 남성 간 성행위를 한 적이 없지만 자위를 하는데, 혼자서도 하고 다른 남자들과도 한다. 평생 여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왜인가? 설명할 수 없다.”[40] 1920년대에 폴루야노프는 패러디와 소품으로 유명했던 혁신적 레닌그라드 극장, 비뚤어진 거울의 스타로 명성을 얻었다(그림 1). 여성 인물을 연기한 것으로 명성을 떨친 폴루야노프의 이름은 그 극장의 간판스타로서 언론과 광고판에 자주 등장했다. 1930년, 그의 요란한 퀴어성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무대를 평론하던 주요 연극 잡지 가운데 하나인 노동자와 극장(Rabochii i Teatr)에서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비뚤어진 거울의 폴루야노프는 두 가지 성을 체현하여, 자신을 반은 무용수, 반은 발레리나로 묘사한다. 그는 두 인물을 대표한다. 그는 자기 자신과 모순되고 있다.”[41]

그의 예술에 대한 비판이 노골적인 탄압으로 번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31년 2월 15일, OGPU는 반혁명 활동 혐의로 폴루야노프를 체포하여 솔로베츠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10년형을 선고했다.[42] 1933년의 대규모 체포 과정에서 나중에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이전에 알던 이들 가운데 폴루야노프를 언급하며 그가 “정치적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말했으나, 자신들이 바로 같은 이유로 수감되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은밀히 진행된 이 작전의 첫 체포는 1933년 8월에 있었고 9월까지 이어졌다. 조사 과정에서 이 남성들은 도심에 있는 예비구금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피고인들은 자신의 사생활, 그중에서도 성관계에 관한 세부까지 자발적으로 털어놓았다. “반혁명 활동” 혐의로 체포된 신세였는데, 그 자체로 위험할 만큼 중한 죄명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성적 경험에 관한 모든 것을 밝혀, 그것이 자신들을 어떤 반소비에트 행위와도 분명히 무관한 사람으로 보이게 해 주기를 바랐다. 진술 기록은 레닌그라드에 우정과 지인의 연결망, 사교 모임과 파티로 유지되던 활기차고 긴밀하게 얽힌 동성애 하위문화가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남성들의 관심은 여가를 넘어서, 오늘날 우리가 퀴어 의제라고 부를 만한 영역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런 성격의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1926년 마그누스 히르슈펠트가 레닌그라드를 방문한 일이었다. 그는 이 방문에서 레닌그라드의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여, 바이마르 독일의 동성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 주었다.[43] 이 강연은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인 1877년생 니콜라이 에프레모프가 주선했으며, 도브롤류보프 대로에 있던 그의 아파트에서 열렸다.[44]

Figure 1

도판 1. 배우 표도르 폴루야노프의 삽화. 출처: 미카엘로, “비뚤어진 거울,” 베체르냐야 모스크바, 1927년 5월 27일, 2면.

그러나 남성들의 정기적인 사교 모임은 대체로 지적인 성격보다는 사교적인 성격이 강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 레닌그라드 동성애 남성들의 일상은 대체로 평범했고, 이미 취약해진 자유가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가운데 사회적 유대를 유지하는 일이 그 중심에 있었다. 농민 출신의 서른다섯 살 바텐더 파벨 체르니셰프는 1930년대 초에 열린 “가족의 밤”에 관해 자세히 진술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이런 모임에는 대개 스물다섯에서 서른 명 남짓한 남성들이 모였고, 그중 일부는 여장을 하고 아코디언 가락에 맞춰 춤을 추었다. 또 다른 이들은 짧은 촌극을 선보여 모임의 활기차고 연극적인 분위기를 더했다.[45] 이런 모임은 즉흥적으로 열리지 않았고, 주최자들이 입장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보통 50코펙에서 1루블이었다.[46] 이들은 새해 전야도 함께 보냈다. 1888년생으로 레닌그라드 전기기계 공장의 경제 전문가였던 알렉산드르 갈라메이는 1929년 새해 파티를 사진으로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일을 회고했다.[47] 시각 자료든 편지 자료든 이 같은 증거물은 1933년 체포 과정에서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가 모두 압수했고, 수색 조서에 꼼꼼히 기록되었다.[48] FSB 기록보관소 직원들에 따르면 이 자료들은 보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후에 폐기되었다. 그 결과 레닌그라드 동성애 커뮤니티의 물질문화에는 커다란 공백이 남게 되었다.

농민 출신의 52세 웨이터인 니콜라이 가가예프는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 요원들이 심문할 때 자신의 동성애를 숨기지 않았다. “나는 1911~1912년 군 복무 중이던 때부터 남성 동성애를 해 왔습니다.”[49] 체포 당시 가가예프는 동갑인 파트너 메포디 줄리코프(Mefodii Zhulikov)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기억나는 친구들을 모두 이름을 댔는데, 그 가운데 대부분은 커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진술을 마쳤다. “나는 앞서 언급한 남성 동성애자들을 모두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우리는 서로 집을 방문했고 잘 지냈습니다.”[50] 한편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동성애 남성들에게는 공중변소 근처에서 상대를 물색하거나 모이는 것과 같은 거리 활동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1930년대 초 이런 거리 교류는 해방의 한 형태였으며, 동시에 법 집행 기관의 눈에 띄기 쉬워 위험의 원천이기도 했다. 거리 활동은 동성애자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수를 늘리는 데 계속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대 내내 상대 물색은 제정 말기부터 알려져 있던 중심가 장소에서 더 크고 더 공개적인 모임으로 점차 발전했다. 동성애가 비범죄화되어 있었고 이 정책을 뒤집으려는 논의도 없었는데, 그들에게 무엇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니콜라이 벨로프(Nikolai Belov, 1902년생)는 레닌그라드 핀란드 역의 카페테리아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1933년 8월에 체포된 벨로프는 “1925년부터 남성 동성애자였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51]라고 서슴지 않고 확인했다. 그가 표현한 대로, “예카테리나 광장의 모임은 격한 성격을 띠었고, 남성 동성애자들의 행동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식당 프롤레타리에서 일하던 27세 바텐더 블라디미르 파울손(Vladimir Paul'son)은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남성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곳은 드라마 극장 앞 예카테리나 정원입니다. 여기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은 서로 만나 관계를 맺고 새로운 상대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노래하고, 거칠게 장난치고, 행인들에게 성기를 드러냈으며, 변소에 들어가 성교를 하곤 했습니다. 우연히 들어온 사람들의 성기를 움켜쥐고 그들에게 오줌을 누었습니다.”[52] 1905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1930년 고등예술기술학교를 졸업한 미술가 표도르 파트리케예프(Fëdor Patrikeev)는 그러한 장소를 자주 찾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고정적인 파트너가 없었습니다. 보통 거리나 변소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대부분 소비에트 기관의 직원이거나 당 간부였습니다.”[53]

남성 동성애자들의 거리 활동은 경찰과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54] 그러나 레닌그라드 사건 자료는 1933년 OGPU 수사관들이 남성 동성애자들의 거리 활동이나 그들의 사생활 그 자체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음을 시사한다. 레닌그라드 사건 기록보관 파일 안에 이 사건과 관련된 OGPU 내부 문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된 남성들의 진술은 검사들의 궁극적 목표를 분명히 보여 준다. 검사들은 이 사람들을 그들의 동성애를 매개로 독일 민족사회주의자들과 연결 짓거나, 적어도 그들의 소위 “반혁명 활동”에 관한 자백을 끌어내고자 했다. 수사 당국은 이 활동을 그들의 동성애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된 결과로 규정했다. 1933년 10월 초 첫 심문에서 1899년 사마라에서 태어난 배관공 니콜라이 벨레르는 OGPU에 “1925년부터 남성 동성애를 해 왔으며” “항상 남성에게 끌렸다”고 말했다.[55] 그는 자신의 성생활에 관해 이야기한 것 외에는 별다른 내용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 뒤 두 번째 심문에 이르렀을 때 그의 진술은 크게 달라져, 정치색이 짙어지고 소비에트 당국을 비판하는 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자신과 친구들이 “소비에트 당국의 잘못된 정책”을 논의했다고 말한 데 더해 “독일 연계”도 꺼냈다. “나는 독립을 기반으로 남성 동성애자들의 정착을 조직할 필요성을 놓고 많은 시간을 들였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는데, 그곳의 남성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클럽과 다른 기관들을 갖고 있다. 우리는 모임을 가질 때 독일에서 그들이 처한 생활 조건을 활발히 논의하면서, 그것을 소비에트 연방에서 우리가 처한 비참한 상황과 비교했다.”[56] 벨레르는 그들이 읽곤 하던 “독일 남성 동성애자 잡지”도 언급했다. 이것은 강요되거나 날조된 자기고발의 요소였는가, 아니면 OGPU가 체포된 이들에게서 얻으려 한 음모 서사와 편리하게 맞아떨어지는 실제 사실이었는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귀족 출신의 서른다섯 살 드미트리 렌스키-오볼렌스키는 레닌그라드 풍자희극극장에서 배우로 일했다(그림 2). 그는 1933년 8월에 처음 심문을 받았다. 다른 많은 체포된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렌스키-오볼렌스키도 자신의 동성애를 분명히 밝혔다. “나는 1922–23년부터 남성 동성애를 해 왔고, 체포되기 전까지 발레 무용수 브론스키와 함께 살았다. 나는 우리의 관계를 일기에 자세히 썼는데, 그 일기는 수색 중에 압수되었다.”[57] 두 번째 심문은 두 달 뒤인 11월에 이루어졌다. OGPU가 그를 압박해 자신들이 원하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이 간격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두 번째 심문에서 그의 진술은 개인적인 세부가 빠져 있었고, 이데올로기 색채가 강한 언어로 가득 찬 격식 있는 어조를 띠었다. “레닌그라드의 남성 동성애 환경을 분석해 보면 조직성, 단결, 집단적 책임, 그리고 음모의 순간들(momenty konspiratsii)이 분명히 드러난다.” 파트너에 대한 사랑을 일기에 적어 두었던 교양 있는 남자는 1933년 가을 두 번째 심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성 동성애는 그 추함과 불결함,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이 결합된 상태로,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 시기에 반혁명적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58] 당시 OGPU는 신체적 폭력을 아직 합법화하지도 않았고 널리 행사하지도 않았다. 사료에 따르면 남성들은 신체적으로 구타당하지는 않았으나 독방 감금과, 명백히, 심리적 학대를 당했다.[59]

적절한 형식으로 작성된 자기고발이 확보되자, 수사관들은 체포된 자에게 수사가 끝났다고 통보했다. 거의 200명에 달하는 남성 가운데 한 사람은 끝까지 응하지 않을 용기를 보였고, 그 거부는 놀랄 만큼 완강했다. 이반 블리노프(Ivan Blinov)는 농민 출신의 47세 요리사로 군의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1933년 9월 3일 체포된 블리노프는 OGPU에 간결하고 단호하게 답했다. “나는 학교 때부터 동성애 활동에 관여해 왔다. 정치적 이유로 나와 관련된 사람들이나 내 동성애 활동 일반에 대해 논평하기를 거부한다.”[60] 블리노프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사악한 반혁명적 동성애자라는 서사가 이미 다른 남성들의 진술을 통해 교묘하게 엮여 있었으므로, 그의 침묵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체포된 남성 전원은 1933년 12월과 1934년 1월 초에 두 집단으로 나뉘어 반혁명죄로 선고받았다.[61] 동성애 활동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은 몇몇 예외를 빼면 체포 전에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레닌그라드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1933년 초에 시작된 여권 발급 운동 기간에 여권을 받은 사람들이었다.[62]

Figure 2

도판 2. 배우 드미트리 렌스키-오볼렌스키(1898–1947), 1928년. 출처: 메모리얼 아카이브(모스크바), f. 1, op. 3, d. 3604, l. 67.

주목할 만한 점은 OGPU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었음에도 동성애 남성은 그보다 훨씬 적게 체포했다는 사실이다. 체포된 이들은 자신의 성생활을 상세히 진술했고, 레닌그라드와 그 밖의 지역에 사는 옛 연인·친구·지인 등 여러 동성애 남성에 대한 증언을 제공했다. 예컨대 시인 미하일 쿠즈민과 리우리크 이브네프는 “남색자”로 지목되었다.[63] 당시 둘은 모두 레닌그라드에 살고 있었으므로 쉽게 체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둘 다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쿠즈민은 이미 노인이던 1936년에 병사했고, 이브네프는 1981년까지 살았다. 적어도 직접적인 체포는 피한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는 니콜라이 쿠르샤코프였다. 체포된 남성 가운데 한 명이 쿠르샤코프를 이름으로 언급하면서 그의 “반혁명적 견해”를 지적했다.[64] 188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저명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쿠르샤코프는 1920년대에 이미 자리를 잡은 경력을 갖추고 보로네시 국립대학 의학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65] 그는 1898년생으로 직업이 배우였던 세르게이 골리친 공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66] 골리친은 1938년 외국 정보기관을 위한 간첩 행위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이는 스탈린의 국가에서 구 귀족 출신자들에게 드문 운명이 아니었다.[67] 그러나 쿠르샤코프는 탄압을 면했을 뿐 아니라 경력도 크게 번창했다. 1935년 모스크바로 전근되어 여러 권위 있는 학술 직위를 맡았다. 게다가 1943년에는 스텝 전선의, 이후에는 제2우크라이나 전선의 수석 군의관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의 의학 전문가로 임명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 재판은 소비에트 연방이 참여한 가장 세간의 주목을 받은 국제 재판 절차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왜 1933년에 어떤 남성들은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똑같이 눈에 띄던 다른 남성들은 건드려지지 않았는가? 이 선별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박해가 체계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부 개인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무작위성이다. 둘째는 이 작전의 제한된 범위가 의도된 것이었고, 애초에 전면적일 생각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어느 설명도 1933년 체포 과정에서 확보된 정보가 이후 특정 인물에 대한 압박, 협력 강요, 비공식적 통제 유지에 쓰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당국이 1933년의 진술 내용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쿠르샤코프에 대한 콤프로마트로 보관했으며, 국가가 그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뉘른베르크로 파견했을 가능성도 있다.[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