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낙태 합법화·금지와 남색죄 재범죄화
혁명 직후 소비에트 러시아는 왜 세계에서 처음으로 낙태를 합법화하고 남성 간 동성애를 형법에서 지웠는가? 그리고 10여 년 뒤 같은 국가는 왜 남색죄를 되살리고 「모성의 기쁨」을 내세워 낙태를 금지했으며, 이 역전은 여성과 동성애자의 삶에 무엇을 남겼는가?
제정 러시아는 낙태를 엄하게 처벌했지만 거의 집행하지 않았고, 의사들은 혁명 전부터 비범죄화를 주장했다. 보건·사법 인민위원부는 1920년 11월 낙태를 무료로 합법화했고, 1922년과 1926년 형법은 합의된 남성 간 성관계를 처벌하지 않았다. 1920년대에는 낙태에 위원회 심사 같은 제한이 붙었고, 성 도덕 논쟁 속에 금욕과 가족을 앞세우는 목소리가 커졌으며, 동성애는 질병으로 규정되었다. 1933년 OGPU의 일제 체포와 야고다의 보고를 거쳐 1934년 남색죄가 부활했고, 제노트델이 해체되고 출생률이 떨어진 가운데 1936년 6월 27일 법령이 의학적 사유 없는 낙태를 금지했다.
혁명 이전: 낙태 금지와 남색죄, 그리고 폐지론
러시아 정교회는 트룰로 공의회 제91조와 대 바실리우스 제8조를 근거로, 태아를 떨어뜨리는 약을 주거나 먹은 여성을 살인자와 같이 다스렸다. 17세기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칙령은 낙태를 영아 살해와 같은 죄로 보고 사형으로 처벌했고, 이 사형은 1715년 표트르 1세가 없앴다. 1845년 형벌·교정 처벌 법전 제1462조는 「범죄적 태아 축출」을 처벌하면서 낙태를 시술한 사람과 임신부를 모두 죄인으로 삼았다. 시술자가 의학 교육을 받았다면 오히려 가중 사유가 되었고, 의사는 4~10년의 강제 노동을, 여성은 4~6년의 유형이나 징역을 받았다. 제1462·1463조 위반자는 시민권을 빼앗기고 유형이나 강제 노동에 처해질 수 있었다. 1 2
법은 엄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제국 전체에서 낙태로 내려진 유죄 판결은 139건뿐이었고, 해마다의 판결 수는 1910년 20건, 1911년 28건, 1912년 31건, 1914년 60건에 머물렀다. 그사이 낙태는 늘어났다. 모스크바에서는 1909년부터 1914년 사이 낙태가 두 배 반으로 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1897년부터 1912년 사이 그보다 훨씬 가파르게 늘었다. 시술은 대개 전문 의사가 아니라 민간 의술을 하는 산파, 곧 「바브키」가 맡았다. 이들은 의사가 없는 농촌에서 간호사와 산파 노릇을 함께 한 사람들이었고, 출산을 돕는 일과 함께 낙태도 했다. 1 2
19세기 말부터 의사와 법률가들이 낙태 처벌을 풀고 피임을 보급하자고 나섰다. 목적은 낙태를 덜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운동이 서유럽과 다른 길로 생겨났다고 본다. 프랑스처럼 정치 무대에서가 아니라 의학계에서 지지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1889년 러시아 의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피로고프 학회의 제3차 대회가 처음 낙태의 비범죄화를 논의했다. 1911년 러시아 산파 학회 제4차 대회, 1913년 피로고프 학회 제12차 대회, 1914년 국제 범죄학회 러시아 분과가 잇달아 비범죄화를 지지하고 나섰다. 볼셰비키가 1920년 법령을 낼 때 기댄 것은 이렇게 혁명 전에 쌓인 의사들의 논의였다. 2 1
제정 러시아는 남성 사이의 성관계도 처벌했다. 독일 형법을 본뜬 니콜라이 1세의 법전이 1835년 1월 1일부터 처음으로 민간인 전체의 「남색」을 범죄로 삼아 모든 신분 권리 박탈과 태형, 유형을 매겼고, 1845년 형벌·교정 처벌 법전은 여기에 교회 참회를 더했다. 1874~1904년 남색 혐의로 재판받은 남성 1066명과 여성 4명 가운데 44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880년대부터 법률가들 사이에 폐지 논쟁이 일었고, 훗날 입헌민주당을 함께 세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성인이 자기 몸을 다룰 권리에 국가가 끼어들 수 없다며 비범죄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1903년 형법은 합의된 관계의 형을 3개월 이상의 징역으로 낮추는 데 그쳤고, 그나마 발트 지방 밖에서는 시행되지 못했다. 3

1920년 11월: 세계 첫 낙태 합법화
10월 혁명 직후의 법령들은 여성의 법적 지위를 크게 바꾸었다. 1917년 10월 29일(신력 11월 11일) 8시간 노동 법령은 여성의 야간 노동을 금지했고, 11월 14일(27일) 법령은 출산 휴가와 출산 수당을 정했으며, 임금과 노임 법령은 성별과 상관없는 최저 임금과 남녀 동일 임금을 세웠다. 12월 18일(31일) 민사혼 법령은 가족과 혼인에서 여성의 권리를 남성과 같게 했고, 1918년 7월 10일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헌법은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었다. 볼셰비키는 종교혼을 민사혼으로 바꾸고 이혼을 쉽게 했으며, 혼외자와 혼인 안의 자녀가 법 앞에서 같은 권리를 갖게 하고 미혼모를 특별히 보호했다. 4 5
혁명과 내전 뒤의 기근과 궁핍은 뒷골목 낙태를 늘렸다. 의사와 법률가들의 압력 속에 보건 인민위원부와 사법 인민위원부는 1920년 11월 공동 결정 「여성 건강 보호에 관하여」를 냈다. 날짜는 자료에 따라 11월 16일 또는 18일로 적히며, 1936년 금지 법령의 서문은 11월 18일로 적는다. 결정은 낙태를 무료로, 여성의 뜻에 따라 받을 수 있게 했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로써 낙태를 합법화한 세계 첫 나라가 되었다. 국립 병원에서 여성이 무료로 낙태를 받을 권리를 얻은 것도 역사상 처음이었다. 보건 인민위원은 1918년 7월부터 1930년 1월까지 이 자리를 지킨 니콜라이 세마슈코였고, 사법 인민위원은 1918년부터 1928년까지 재임한 드미트리 쿠르스키였다. 5 6 1 7 8 9 10
낙태 합법화를 밀어붙인 것은 당 중앙위원회 여성부, 곧 제노트델이었다. 제노트델은 1919년 이네사 아르만트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세웠고, 아르만트가 1920년까지 초대 책임자를, 이어 콜론타이가 책임자를 맡았다. 그러나 정부와 의료계 안의 논쟁은 치열했다. 반대론자들은 낙태가 인구 증가를 해치거나 여성의 몸에 너무 해롭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합법화를 일시적인 필요로 보았다. 거의 10년에 걸친 불안과 전쟁, 혁명, 내전 끝에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여성들이 어차피 낙태를 찾을 것이고, 낙태는 합법일 때에만 국가가 관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낙태는 여성이 자기 생식을 결정할 권리라기보다 경제적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악으로 여겨졌고, 1920년대 전반의 관리와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사회악」으로 불렸다. 7 4 2 5 1
연구자들은 이 법령을 여성 선거권이나 강제 결혼 금지처럼 당시 러시아에서 여성의 권리를 넓혀 가던 흐름의 일부로, 또 임신을 종교적으로 보던 의료 윤리에서 벗어난 변화로 함께 읽는다. 법은 러시아 공화국에 이어 1921년 7월 5일 우크라이나에서 시행되었고, 다시 다른 공화국들로 퍼졌다. 우크라이나의 낙태사 서술은 그 역사가 낙태할 권리를 여성의 기본권으로 본 레닌의 법령에서 시작한다고 쓴다. 정부가 특히 바란 것은 바브키 대신 훈련받은 의사가 안전한 곳에서 시술하게 하는 일이었다. 1 2 11
보건 인민위원부 안에서 이 정책을 맡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1918년부터 1929년까지 모성·영아 보호국을 이끈 의사 베라 레베데바였다. 1907년부터 볼셰비키였던 그는 망명지 제네바의 대학 산부인과에서 일하다 1917년 돌아왔고, 탁아소와 유치원마다 소아과 의사를 두어 아이의 건강을 살피고 부모에게 조언하는 세계 첫 영아 사망 감소 사업을 세웠다. 1922년 모성·영아 보호 연구소를 세웠고, 사회적 사유에 따른 낙태를 적극 옹호해 그 정당성을 다각도로 논증한 A. B. 겐스의 『농촌의 낙태』를 엮어 냈다. 낙태 합법화를 일하는 여성을 돕는 긍정적인 정책으로 본 그는, 자신들이 가난 속에서도 영아 사망률을 거의 절반으로 낮췄다고 말했다. 1928년에는 세마슈코와 함께 『여성 노동자와 농민 여성이여, 건강을 지켜라』를 냈다. 12 13
1918~1928년: 형법에서 빠진 남색죄
혁명은 낙태와 함께 남성 사이의 합의된 성관계에 대한 처벌도 없앴다. 1918년 좌파 사회혁명당의 법무인민위원 이사크 시테인베르크가 낸 형법 초안은 1903년 형법을 거의 그대로 옮기면서 합의된 동성 관계의 처벌만 뺐다. 1920년 쿠르스키가 법무인민위원일 때 나온 미치슬라프 코즐롭스키의 초안도 프랑스 혁명 형법을 본떠 이를 처벌하지 않았다. 이 초안이 1922년과 1926년 러시아 공화국 형법의 바탕이 되었다. 영국과 독일은 그때도 동성애자를 처벌하고 있었다. 3 14
보건 인민위원부는 이 결정을 알리고 다녔다. 1923년 1월 세마슈코가 이끈 대표단이 베를린의 히르슈펠트 성과학 연구소를 찾았고, 1921~1930년 국제 성과학 회의에서도 소련 대표들은 성인 사이의 합의된 동성 관계를 합법화하자고 했다. 모스크바 사회위생 연구소장 그리고리 바트키스는 1923년과 1925년 『러시아의 성혁명』에서, 소비에트 법은 성을 사생활로 보아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으며 동성애는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썼다. 14 3 15
그러나 관용은 고르지 않았다. 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압하지야 형법은 제정 시대의 처벌을 이어 갔고, 우즈베크 공화국은 1926년 형법의 「지방 관습 범죄」 장에 남성 간 성교를 처벌하는 조항을 두었다. 반종교 운동의 성직자 재판에서는 동성애 혐의가 「노동자·농민과 무관한 타락」의 증거로 쓰였다. 1920년대 말 동성애는 질병이자 정신 장애로 규정되었고, 세마슈코는 지지를 줄였으며, 바트키스 등 성 연구자들은 1928년 앞선 견해를 철회했다. 3 14
1920년대 낙태의 실제: 병원과 위원회, 그리고 농촌
도시에서 낙태 합법화의 효과는 컸다. 1925년 모스크바에서는 낙태의 75%가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소련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합법화로 낙태에 따른 여성 사망률은 4%에서 0.28%로 떨어졌다. 1925년 대도시에서는 인구 천 명당 평균 6건의 낙태가 기록되었고, 1926년 한 해에만 40만 건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의사도 교통도 없거나 둘 다 없는 농촌에서는 효과가 훨씬 작았다. 여성들은 낙태가 합법이 된 뒤에도 전통 의술에 기대어 바브키와 산파, 이발사, 간호사 등에게서 시술을 받았다. 2 6 1 5
1920년대 중반이 되자 병원이 낙태 시술로 붐벼 병상을 비우려고 전용 진료소를 따로 열어야 했다. 시술 수가 엄청나게 늘자 많은 의사가 우려했고, 제한이 하나둘 생겼다. 임신 3개월이 지나면 시술을 제한했고, 너무 가난하거나 미혼이거나 이미 아이가 여럿인 여성에게 우선권을 주었으며, 첫 낙태와 둘째 낙태 사이에는 6개월이 지나야 했다. 1924년에는 생명이나 건강이 위험하거나 강간으로 임신한 경우처럼 사유를 따지는 특별 위원회가 사례마다 심사하게 했고, 위원회의 허가 없이는 시술할 수 없었다. 1926년 이 제한은 풀렸지만 첫 임신의 낙태와 반년 안에 다시 하는 낙태는 완전히 금지되었고, 1930년부터 낙태는 유료가 되었다. 2 1
낙태 합법화와 함께 무허가 낙태 시술자 단속도 시작되었다. 합법 낙태가 생기자 바브키는 핑계를 잃었고 적지 않은 수가 붙잡혀 처벌받았다. 단속은 1930년대 초 집단화 운동 동안 잠시 뒤로 밀렸다. 한편 피임은 거의 보급되지 않았다. 초기 소련에서 가장 흔한 피임법은 질외 사정이었고, 고무가 모자라 콘돔과 페서리를 구할 수 없었으며, 정치인들은 피임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낙태 기술에서는 진전이 있었다. 1927년 러시아 의사 S. G. 비코프가 흡입 낙태술을 개선했고, 이 방법은 1920~1936년 낙태가 자유롭던 시기에 쓰였다가 뒤에 중국과 일본을 거쳐 1960년대에야 영국과 미국에 들어갔다. 2 5 16
성 도덕 논쟁과 1926년 혼인법
낙태와 이혼이 자유로워진 1920년대에는 새로운 성 도덕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물 한 잔 이론」은 사랑을 부정하고 남녀 관계를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듯 「부르주아적 관습」 없이 채워야 할 본능적 욕구로 낮추는 견해였다. 이 비유는 1920년대에 가장 인기를 얻어 신문에 오르고 콤소몰 토론회의 주제가 되었다. 흔히 콜론타이나 체트킨이 창시자로 지목되지만 둘 다 사랑을 물 한 잔에 비긴 적이 없고, 콜론타이는 오히려 “사회는 모든 형태의 혼인 관계를, 그것이 아무리 낯선 윤곽을 지녔더라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그는 1923년 잡지 《젊은 근위대》에 「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 (노동하는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었다. 17 18
당 지도자들은 이 이론에 냉담했다. 체트킨의 회고에 따르면 레닌은 물 한 잔 이론을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고 게다가 반사회적”이라고 했다. 그는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 길바닥 진흙에 엎드려 웅덩이 물을 마시거나 열 사람의 입술이 닿은 잔으로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도 1926년 12월 레닌그라드 강연에서 이 이론을 비판하며, 사회주의에서는 부르주아의 방탕과 「허무주의자」의 벌거벗은 성욕관 대신 진지하고 깊이 절제된 아름다운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1926~1929년 물 한 잔 이론은 큰 비판과 탄압을 받았고, 1929년은 흔히 볼셰비키 성혁명이 끝난 해로 꼽힌다. 1935년 포르노그래피를 처벌하는 법이 생기면서 성혁명이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17
1924년 정신과 의사 아론 잘킨트가 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12가지 성 계율」은 이런 흐름을 정리한 행동 지침이었다. 계율은 너무 이른 성생활을 삼가고 사회적·생물학적으로 성숙한 20~25세에 결혼하기 전까지 금욕하며, 일부일처로 살고, 성관계 때마다 아이가 생길 수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마지막 계율은 계급이 혁명의 합목적성을 위해 구성원의 성생활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고 못박았다. 프롤레타리아의 에너지를 역사적 사명에 쓸모없는 성관계에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 요지였다. 계율은 법이 아닌 교육용 권고였고 실제로 늘 지켜지지는 않았다. 제노트델에서도 보수적인 목소리가 커졌다. 1922년 콜론타이를 밀어내고 1924년까지 여성부를 이끈 소피야 스미도비치는 콜론타이의 자유연애와 가족 해체론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대등한 동반자의 건강한 가족과 미혼모의 처지에 힘을 쏟자고 했다. 19 17 20 21
1926년 혼인·가족법전은 이런 사회 문제에 대한 응답이었다. 1918년 법이 사회주의적 가족관을 향해 사회를 이끌려 했다면, 1926년 법은 당장의 어려움, 특히 여성과 아이의 생계를 해결하려 했다. 1921년 한 해에만 집 잃은 아이가 7백만 명에 이르러 1926년 법은 입양을 되살렸다. 신경제정책으로 노동 징용이 끝나자 여성 실업이 치솟았는데, 수십만 명의 실업 여성이 혼인 신고 없이 살다 헤어지면 아무 보호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1926년 법은 신고하지 않은 사실혼도 합법으로 인정해 사실상의 아내에게 위자료를 받을 길을 열었고, 혼인 중 얻은 재산을 공유 재산으로 나누게 했으며, 아버지를 판사가 정하게 했다. 법률가들은 이를 사회주의에서 물러서는 이념 전환이 아니라 공동 돌봄이 마련될 때까지의 「임시」 조치로 보았다. 5
1930년대 초의 전환: 제노트델 해체, 출생률, 낙태 단속
5개년 계획과 함께 여성 운동의 자리는 좁아졌다. 1923년 제12차 당대회 결의는 이미 여성부가 「페미니즘적 편향」의 토양이 되어 일하는 여성을 전체 계급 투쟁에서 떼어 놓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26년 여성 조직 사업이 지역 공장 노조로 넘어갔고, 1927년 정치국은 제노트델이 당의 다른 부서 일을 되풀이하며 자원을 낭비한다고 보았다. 1930년 1월 제노트델은 해체되어 선동·대중 운동부의 여성 분과로 바뀌었고, 이 분과도 1934년까지만 남았다. 같은 무렵 스탈린은 소련에서 「여성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선언했다. 공업화가 요구한 것은 「여성을 생산 현장으로!」라는 구호 아래 여성을 노동에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4 7
그사이 출생률은 계속 떨어졌다. 도시화와 공업화 속에 한 가족의 자녀 수는 1925년 6.8명에서 1940년 4.25명으로 줄었다. 1935년 러시아의 합계 출산율은 1927년보다 거의 40% 낮았고, 자연 증가율은 1000명당 21명에서 11명으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1920~1930년대 집단화와 공업화로 여성이 대거 사회 기반 시설 건설에 동원되자 1930년대에는 여성 한 명당 아이가 평균 한 명이 안 되었다는 서술도 있다. 정부는 이를 위기로 보고 가족 정책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1935년 피임 기구 생산이 멈추었다. 22 23
스탈린은 인구 증가를 체제의 성과로 내세웠다. 1934년 1월 26일 제17차 당대회 보고에서 그는 인구가 1930년 말 1억 6050만 명에서 1933년 말 1억 6800만 명으로 늘었다고 했고, 1935년 12월 1일 콜호스원 회의에서는 “삶이 나아지고 즐거워져” 해마다 핀란드 하나만큼인 3백만 명씩 인구가 늘고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의 말대로라면 1937년 인구는 1억 8천만 명에 이르러야 했다. 그러나 1926년 다음 차례로 1933년에 하려던 인구 조사는 거듭 미뤄졌는데, 1932~1933년 기근의 인구 결과를 드러내기 꺼린 탓으로 보인다. 24
국가는 불법 낙태에 대한 단속을 다시 조였다. 1934년 불법 낙태를 더 엄하게 처벌하는 법이 생겼고, 러시아 공화국 검찰청은 지방 검사들에게 무허가 낙태와의 싸움을 강화하라는 회람을 돌렸다. 회람은 한 농촌 지구에서 바브키가 여성들에게 끼친 해를 고발한 익명 시민의 편지를 근거로 들었고, 큰 신문들이 이를 크게 다뤘다. 한 달 뒤 《이즈베스티야》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낙태 시술자의 문을 두드린 젊은 여성들의 처지를 고발하는 기사를 실었다. 망명 중인 트로츠키가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1935년 우랄의 한 지구 농촌 병원 한 곳에만 「산파에게 몸을 망친 여성」 195명이 실려 왔다. 그 가운데 노동자가 33명, 사무원이 28명, 콜호스원이 65명, 가정주부가 58명이었다. 2 25

1933~1934년: 남색죄의 부활
1차 5개년 계획과 함께 생물학 대신 사회 환경을 앞세우는 학문이 힘을 얻으면서, 동성애는 「질병」에서 「범죄적 사회 악덕」으로 옮겨 갔다. 집단화와 경제 붕괴로 사람들이 대거 떠돌자, 정권은 국내 여권제와 「도시의 사회적 청소」로 매춘부·걸인·부랑자와 함께 거리에 드러난 동성애자들을 겨냥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1931년 나치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의 동성애가 알려졌고, 사회민주당에 이어 공산당도 이를 정치 공격에 썼다. 3
1933년 2월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른 네덜란드인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를 나치는 공산주의 테러범으로 선전했다. 그해 8월 파리에서 빌리 뮌첸베르크 등 망명 공산주의자들이 펴낸 『국회의사당 방화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책』은 그가 룀의 측근 게오르크 벨을 통해 룀에게 소개된 남창이었고, 불은 에드문트 하이네스가 이끈 동성애자 돌격대원들이 질렀다고 주장했다. 근거는 없었다. 코민테른은 판데르루버와 선을 그으려고 그를 나치의 협력자이자 룀의 성적 노리개로 부르는 공격적인 동성애 혐오 수사를 썼다. 26 3
이 선전은 소련 안으로도 들어왔다. 역사가 댄 힐리에 따르면 1934년 1월 레닌그라드의 군 방첩 기관은 그곳 동성애자들을 수사하다가 「모스크바와 하리코프의 동성애자들이 마리뉘스 판데르루버 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라는 문건을 손에 넣었다고 주장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조작을 강하게 의심하지만, 당시 이 문건은 동성애자들의 국제 조직, 이른바 「호민테른」이 반소련적이라는 증거로 쓰였다. 27
1933년 8~9월 합동국가정치보안부(OGPU)는 레닌그라드·모스크바·하리코프에서 동성애자 수백 명을 체포했다. 9월 15일 부의장 겐리흐 야고다는 「남색자 결사」가 간첩 조직으로 바뀌어 청년과 군을 타락시킨다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올렸고, 스탈린은 「본보기로 처벌하고 법에 지침을 넣으라」며 카가노비치에게 넘겼다. 칼리닌은 법 대신 OGPU의 재판 밖 처리를 주장했으나, 정치국은 12월 16일 야고다의 안을 승인했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는 12월 17일과 1934년 3월 7일 결정으로 각 공화국 형법에 새 조항을 넣게 했다. 3 14
우크라이나가 1934년 1월 11일 가장 먼저 남색죄 조항을 받아들였고, 러시아 공화국은 4월 1일 형법에 제154a조를 넣었다. 처벌의 하한을 정한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일이었다. 3
제154a조. 남성과 남성의 성교(남색)는 3년 이상 5년 이하의 자유 박탈에 처한다. 폭력을 쓰거나 피해자의 의존적 지위를 이용해 저지른 남색은 5년 이상 8년 이하의 자유 박탈에 처한다. 3
154-а. Половое сношение мужчины с мужчиной (мужеложство) — лишение свободы на срок от трёх до пяти лет. Мужеложство, совершённое с применением насилия или с использованием зависимого положения потерпевшего, — лишение свободы на срок от пяти до восьми лет. 3
모스크바에서는 영국 공산당원 해리 화이트가 남색죄 조항에 맞섰다. 에든버러 출신의 스물일곱 살 기자로, 1931년 영국 공산당에 들어가 1932년부터 미하일 보로딘이 이끄는 영자 신문 《모스크바 데일리 뉴스》에서 일했고, 1933년 편집진 책임자가 되었다. 자신과 관계를 맺던 사람이 체포되자 그는 OGPU와 법무인민위원부, 정신과 의사들에게 법의 근거를 물었으나 엇갈린 답만 들었다. 1934년 5월 그는 스탈린에게 「동성애자는 공산당원이 될 수 있는가?」라는 긴 편지를 보내, 3월 7일 결정이 삶의 사실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칙 모두에 어긋난다고 썼다. 28
화이트는 노동계급 동성애자의 처지가 자본주의 아래 여성, 제국주의에 억압받는 유색 인종, 히틀러 치하의 유대인과 같다고 보았다. 그는 타고난 동성애자와 궁핍이나 방탕 때문에 그리된 사람을 나누고, 과학이 밝힌 대로 타고난 동성애자는 인구의 2% 안팎이어서 소련에만 200만 명이 있을 텐데 그들을 모두 감옥에 넣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자본주의는 「총알받이」와 산업 예비군이 필요해 출생률을 위협하는 동성애를 탄압하지만, 그 수가 적은 타고난 동성애자는 사회주의 국가의 출생률을 위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파시즘이 「남색자 판데르루버」를 도발의 무기로 쓰면서 히르슈펠트의 해방 운동을 짓밟았다고 지적하고, 동성애자인 앙드레 지드가 프랑스 대중의 신망을 잃지 않은 예를 들었다. 귀족의 남색 추문을 「정치적인 일이 아니다」라고 한 엥겔스의 편지와, 개인 생활의 「평준화」를 「반동적 어리석음」이라 한 스탈린 자신의 제17차 당 대회 보고를 끌어와 법이 원칙을 바꾼 기회주의라고 비판하며 「권위 있는 답」을 청했다. 28
답은 오지 않았다. 스탈린은 편지 첫 장에 「문서고로. 백치이자 타락한 자. 스탈린」이라고 적었다. 러시아어 원문의 «идиот и дегенерат»에서 「дегенерат」는 19세기 말 퇴화론에서 온 말로, 정신적·도덕적으로 퇴화해 타락한 자를 가리킨다. 편지는 대통령 문서고에 묻혀 있다가 1993년 잡지 《이스토치니크》에 「비밀 문서고의 유머」라는 난으로 처음 실렸다. 그 무렵인 1934년 5월 23일, 스탈린의 주문으로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에 함께 실린 고리키의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은 「동성애자를 없애면 파시즘이 사라진다」는 말을 퍼뜨렸다. 한 달 뒤인 6월 30일 독일에서는 장검의 밤이 일어나 히틀러가 룀과 돌격대 지도부를 살해했다. 1936년 3월 법무인민위원 크릴렌코는 동성애를 착취 계급의 도덕적 타락의 산물로 규정하고, 동성애가 타고난 것이라는 생각을 「서구 부르주아 학파」의 학설로 물리쳤다. 28 3 14 29
1936년 6월 27일: 낙태 금지 법령
1936년 3월 9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낙태를 금지하고 산모를 돕고 탁아소와 보육원을 늘리는 법안을 만들 위원회를 꾸리기로 결정했다. 1934년 2월부터 러시아 공화국 보건 인민위원을 맡고 있던 그리고리 카민스키는 합법 낙태를 받을 수 있는 의학적 사유의 긴 목록을 내놓았다. 더 많은 여성이 안전한 낙태를 받게 해 불법 낙태를 줄이려는 뜻이었지만, 이는 스탈린의 못마땅함을 샀다. 카민스키는 세마슈코와 함께 소련 예방 의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사람이었고, 그해 7월 20일 소련 보건 인민위원도 겸하게 된다. 30
낙태 금지 법안은 이른바 「전 인민 토론」에 부쳐졌고, 소련 언론의 촘촘한 체를 거치고도 많은 쓰라린 불만과 억눌린 항의가 터져 나왔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토론은 시작될 때처럼 갑자기 끊겼다. 혼인 문제 전문가인 최고 법원의 아론 솔츠는 실업자가 없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모성의 기쁨」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며 금지를 정당화했고, “우리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트로츠키는 이를 헌병의 권한까지 갖춘 사제의 철학이라 부르고, 노동하는 수백만 여성이 입을 막히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친절하게도 당신이 직접 낳아 보시라”고 답했을 것이라고 썼다. 25
1936년 6월 27일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는 「낙태 금지, 산모에 대한 물질적 지원 확대, 다자녀 가족에 대한 국가 지원 제정, 산원·탁아소·유치원망 확충, 양육비 미지급에 대한 형사 처벌 강화, 이혼법의 일부 개정에 관하여」라는 긴 이름의 결정을 냈다. 서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어머니이자 시민으로서 시민을 낳아 기르는 크고 책임 있는 의무를 진 여성이 소련에서만큼 존중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이어 1920년 11월 18일의 낙태 허용은 「과거의 도덕적 잔재와 현재의 어려운 경제 조건」 때문이었다고 돌아보고, 착취가 사라지고 생활이 나아진 지금 그 결정을 다시 볼 때가 되었다고 했다. 낙태를 다룬 것은 제1장의 네 조항이다. 10
제1장 낙태 금지에 관하여
1. 낙태의 해로움이 확인되었으므로 병원과 전문 의료 기관에서든, 의사의 집이나 임신부의 개인 주택에서든 낙태 시술을 금지한다. 낙태는 임신을 이어 가는 것이 임신부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건강에 중대한 손상을 줄 우려가 있는 경우와 부모에게 유전되는 중병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병원과 산원에서만 허용한다.
2. 병원 밖에서, 또는 병원 안이라도 위의 조건을 어기고 낙태를 시술한 의사는 1년 이상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낙태를 시술하거나 전문 의학 교육을 받지 않은 자가 시술한 경우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3. 여성에게 낙태를 강요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4. 이 금지를 어기고 낙태한 임신부에게는 형사 처벌로서 공개 견책을 가하고, 낙태 금지법을 다시 어긴 경우에는 300루블 이하의 벌금을 매긴다. 10
I. О запрещении абортов
1. В связи с установленной вредностью абортов, запретить производство таковых как в больницах и специальных лечебных заведениях, так и на дому у врачей и на частных квартирах беременных. Производство абортов допустить исключительно в тех случаях, когда продолжение беременности представляет угрозу жизни или грозит тяжелым ущербом здоровью беременной женщины, а равно при наличии передающихся по наследству тяжелых заболеваний родителей и только в обстановке больниц и родильных домов.
2. За производство абортов вне больниц или в больнице, но с нарушением указанных условий, установить уголовное наказание врачу, производящему аборт, — от одного года до двух лет тюремного заключения, а за производство абортов в антисанитарной обстановке или лицами, не имеющими специального медицинского образования, установить уголовное наказание не ниже трех лет тюремного заключения.
3. За понуждение женщины к производству аборта установить уголовное наказание — тюремное заключение до двух лет.
4. В отношении беременных женщин, производящих аборт в нарушение указанного запрещения, установить, как уголовное наказание, — общественное порицание, а при повторном нарушении закона о запрещении абортов — штраф до 300 рублей. 10
1936년 법령은 낙태 금지만 담지 않았다. 사회보험에 든 산모가 받는 신생아 용품 수당은 32루블에서 45루블로, 수유 수당은 달마다 5루블에서 10루블로 올랐고, 사무직 여성도 노동자 여성처럼 출산 전후 56일씩의 휴가를 받게 되었다. 임신을 이유로 채용을 거부하거나 임금을 깎으면 형사 처벌을 받았다. 여섯 아이를 둔 어머니는 아이를 더 낳을 때마다 5년 동안 해마다 2000루블을, 열 아이를 둔 어머니는 아이마다 5000루블의 일시금과 이듬해부터 4년 동안 해마다 3000루블을 받았다. 이혼은 어려워져 두 당사자가 모두 출석하고 수수료를 내야 했으며, 양육비를 내지 않는 사람은 엄하게 처벌받았다. 법령은 가족을 북돋우는 선전의 폭발과 함께 나왔다. 모성은 스타하노프 노동처럼 애국적인 일로 찬양되었고, 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며 아이와 가족의 기쁨을 기렸다. 스타하노프 운동가들과의 만남에서 스탈린은 세상의 모든 귀중한 자본 가운데 가장 귀중하고 결정적인 자본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10 2 5
낙태 금지의 결과: 불법 낙태와 인구 조사
낙태 금지 법령은 도시 여성들의 분노와 반발을 샀다. 국가가 여성의 교육과 취업을 적극 장려하던 때에, 경력을 쌓으려는 여성에게 아이를 낳는 일은 불가능할 때가 많았고 집과 양육 물자도 모자랐다. 실제 집행은 제정 때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바브키는 잡힐 위험이 적다는 것을 알고 계속 일했고, 시술이 잘못되어 병원에 실려 온 여성이 많았지만 유산인지, 스스로 한 낙태인지, 바브카의 시술인지 가려내기 어려웠다. 여성들 사이의 불문율 같은 연대도 굳건해, 바브키를 당국에 고발하는 일은 드물었다. 2
낙태 금지는 불법 낙태와 스스로 하는 낙태를 크게 늘렸다. 러시아 도시에서 낙태와 그 후유증으로 죽은 여성은 1935년 451명에서 1936년 910명으로 곧바로 늘었고, 1940년까지 꾸준히 늘어 2천 명을 넘었다. 농촌에서는 이런 통계조차 잡히지 않았다. 영아 살해도 늘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기록된 낙태는 백만 건이 넘었고, 시술자 가운데 전문 의사와 간호사는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금지 기간에 출생률은 올랐지만 다른 악조건 때문에 그 폭은 작았고, 연구자들은 금지가 출생률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본다. 1935~1940년에는 불법 낙태로 다친 여성들이 건강한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면서 영아 사망률이 올랐다. 6 1 2
출생률 회복에 기대를 건 지도부는 곧 인구 조사의 숫자와 마주쳤다. 1937년 1월 6일의 인구 조사는 인구가 1926년의 1억 4700만 명에서 1억 6200만 명으로 늘었음을 보여 주었지만, 공식 출생·사망 기록이 예고한 1억 7000만~1억 7200만 명에도, 스탈린의 기대에도 크게 모자랐다. 1월 24일 중앙 국민경제 통계국장 이반 크라발은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내무 인민위원부와 국방 인민위원부 집계분 등을 뺀 첫 잠정치로 1억 5600만 명을 보고했다. 열흘 만에 조사 결과는 「해독 행위」로 규정되었고, 조사를 맡은 책임자들은 체포되어 탄압받았다. 24 31
카민스키도 무사하지 못했다. 1937년 6월 25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발언한 바로 그날 체포되었고, 이튿날 「신뢰할 수 없는 자」로 중앙위원 후보와 당에서 쫓겨났다. 1938년 2월 8일 소련 최고 법원 군사부는 형법 제58조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는 2월 10일 총살되어 코무나르카에 묻혔다. 1955년 3월 2일 사후 복권되었다. 그사이 1936년 법의 노선은 이어졌다. 1942년 독신자와 자녀 없는 부부에게 세금이 매겨졌고, 1944년 가족 법령은 신고한 혼인만 인정하고 이혼을 법원 재량에 맡겼다. 같은 해 7월 8일 아이를 열 명 이상 낳아 기른 어머니에게 주는 「영웅 어머니」 칭호와 훈장이 생겼다. 30 5 32
1955년: 낙태의 재합법화
1936년의 금지에도 낙태는 줄지 않았다. 1944년 소련에서는 임신 100건당 낙태가 약 30.5건,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46.2건이었고, 전쟁 뒤에도 높은 수준이었다. 1950년에는 백만 건 넘게 기록되었고 그 가운데 90%가량이 불법이었다. 지하 낙태의 합병증으로 해마다 약 4천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혼 여성의 취업을 장려하면서 주택과 소비재보다 중공업과 국방을 앞세운 경제 정책 아래 여성들은 계속 불법 낙태를 찾았다. 그러나 낙태로 시작된 형사 사건의 상당수는 법정까지 가지 않았다. 보건 인민위원부는 1945년 8월 16일 회의 뒤 설명 사업과 다자녀 가족 장려로 낙태를 막으려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1 2
스탈린이 죽은 뒤 낙태 정책은 풀리기 시작했다. 1951년 낙태를 허용하는 의학적 사유가 넓어졌고, 1954년 8월 5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 명령으로 낙태한 여성에 대한 형사 처벌이 없어졌다. 1955년 11월 23일 명령 「낙태 금지의 폐지에 관하여」는 여성이 원하면 의료 기관에서 임신 12주까지 낙태를 받을 수 있게 다시 허용했다. 의료 기관 밖의 시술은 여전히 처벌받았지만 낙태한 여성 자신은 처벌받지 않았다. 소련의 낙태 통계는 1980년대 말까지 국가 기밀이었고, 소련은 출생아 대비 낙태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낙태는 1964~1965년 한 해 550만 건 안팎으로 정점에 이르렀고, 192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에서 이루어진 낙태는 2억 6천만 건이 넘었다. 1 6 33 2
1934~1993년: 남색죄의 집행과 폐지
남색죄 조항이 나오기 전부터 OGPU는 대도시에서 「여권 작전」의 하나로 동성애자들을 잡아들였다. 레닌그라드에서 체포된 175명 가운데 사무직이 89명, 예술가가 29명, 노동자가 24명이었다. 일부는 반혁명을 다루는 제58조로 판결받았고, 1934년 이 죄로 판결받은 외교관 드미트리 플로린스키와 음악학자 보리스 프시비셰프스키는 1937년 간첩 혐의로 총살되었다. 1939년 예조프 숙청의 죄목에도 「남색」이 들어갔다. 굴라그에서 이 죄로 들어온 이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가장 천대받는 계층으로 떨어졌다. 3
1960년 러시아 공화국 새 형법은 형의 하한만 없앤 제121조로 남색 처벌을 이어 갔다. 1960~1970년 판결은 40% 늘었고, 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같은 반체제 인사에게도 쓰였다. 거의 60년 동안 판결받은 사람은 2만 5000~25만 명으로 추정되며 흔히 6만 명으로 본다. 조항은 1993년 4월 29일 러시아 연방법으로 폐지되어 5월 27일 발효했고, 이때 야고다와 스탈린의 서신과 화이트의 편지가 비밀 해제되었다. 낙태 금지는 1955년 풀렸지만 남색죄는 그보다 38년을 더 살아남았다. 3

평가: 해방과 「테르미도르」 사이
낙태 금지 법령이 나온 1936년, 노르웨이에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에서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궁핍과 가정의 곤경 속에서 낙태할 권리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시민적·정치적·문화적 권리 가운데 하나이며, 혁명 권력이 바로 그 때문에 이 권리를 주었다고 썼다. 국가는 낙태할 수밖에 없는 여성에게 필요한 의료와 위생을 제공할 능력이 없음을 드러내자 방향을 틀어 금지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는 처벌받는 것은 주로 노동자와 하녀, 농민 아내일 것이고 「우리 여성들」은 너그러운 사법의 코앞에서 하던 대로 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에게 이 법은 「테르미도르 반동」의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열매였고, 사회주의는 여성을 낙태로 내모는 원인을 없애야지 경찰의 개입으로 「모성의 기쁨」을 강요해서는 안 되었다. 25 34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의 혼인·가족법이 한때 혁명의 정당한 자부심이었으나 이제 부르주아 나라들의 법전에서 대거 빌려 온 것들로 고쳐지고 훼손되고 있다고 보았다. 예전에 이혼과 낙태의 무조건적 자유를 옹호하던 「여성 해방」, 「인격의 권리 옹호」, 「모성 보호」라는 논거가 이제 그 제한과 전면 금지를 위해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가족 숭배를 낳은 가장 강력한 동기가 위계의 안정과 청년의 규율을 바라는 관료층의 필요라고 썼다. 연구자들도 1936년 가족법을 혁명적 가족관과 결별한 이념 전환으로 본다. 사회주의에서 가족과 법과 국가가 시든다는 「사멸」 이론은 이제 저주받았고, 어머니 노릇은 남성과 똑같은 노동 의무에 더해진 사회주의적 의무가 되어 여성에게 이중의 짐을 지웠다. 25 5 23
1920년대의 소련은 낙태 금지에 맞선 서유럽 운동가들에게 하나의 기준점이었다. 독일에서는 형법 제218조 아래 낙태가 불법으로 이루어졌고, 1926년 제45차 독일 의사 대회는 해마다 50만~80만 건의 낙태가 일어나며 그 가운데 1만 명가량이 죽는다고 추산했다. 1929년 9월 6일 베를린 레싱 극장에서 초연된 프리드리히 볼프의 희곡 「청산가리」는 제218조를 둘러싼 넓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1929/1930년 시즌 가장 성공한 독일어 연극이 되었다. 소련이 세계 첫 합법화 국가라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낙태 법제사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법이 두 번 바뀌는 동안 피임 보급은 뒤처졌고, 낙태가 출산 조절의 주된 수단이 되는 이른바 「낙태 문화」가 자리 잡았다. 35 16 2
남색죄의 부활도 같은 역전의 일부였다. 1930년대 초 인간의 성은 정치의 의제가 되었고, 동성애는 생물학이 설명할 「질병」에서 사회 환경이 낳은 「범죄적 악덕」으로, 다시 「반혁명 분자」의 표지로 바뀌었다. 1936년 법이 가족의 「사멸」론을 버리고 출산과 가족을 국가의 과제로 삼았듯, 남색죄도 출생률과 「건강한」 성을 앞세운 같은 흐름 속에 있었다. 화이트가 짚었듯 이는 1920년대 소비에트 법이 스스로 세운 원칙, 곧 국가가 성인의 성생활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뒤집은 것이었다. 3 5 28
남색죄 부활의 동기를 두고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애를 파시즘의 표지로 그린 선전과 함께, 반대파를 겨냥한 정치적 도구였다는 설명, 나치 독일에 맞선 결속을 다지려 했다는 설명, 야고다의 보고처럼 동성애자 집단을 간첩망으로 본 비밀경찰의 의심이 꼽힌다. 1930년대 모스크바의 알려진 재판에서 피고는 대부분 노동자와 사무원이었고, 굴라그에서 이 죄수들에게 찍힌 낙인은 소련 사회 전체로 퍼졌다. 연구자들은 21세기 러시아의 동성애 혐오가 이 스탈린 시기 탄압의 직접적인 유산이라고 본다. 14 15 3
결과
낙태 금지는 출생률을 잠깐 올렸을 뿐 불법 낙태와 스스로 하는 낙태를 크게 늘렸고, 러시아 도시의 낙태 사망은 1935년 451명에서 1940년 2천 명을 넘었다. 1937년 인구 조사 결과는 「해독 행위」로 묻혔고 안전한 낙태를 지키려 한 카민스키는 1938년 총살되었다. 낙태는 1955년 11월 23일 다시 합법화되었다. 남색죄는 1960년 형법 제121조로 이어져 2만 5000~25만 명을 처벌한 뒤 1993년에야 폐지되었다. 트로츠키는 낙태 금지를 「테르미도르 반동」의 열매라 불렀고, 소련에는 낙태가 출산 조절의 주된 수단이 되는 「낙태 문화」와 굴라그에서 굳어진 동성애 혐오가 남았다.
연표와 지도
- 1845형벌·교정 처벌 법전
제1462조가 낙태 시술자와 임신부를 함께 처벌하고, 의사에게는 4~10년의 강제 노동을 매겼다.
- 1913피로고프 학회 제12차 대회
1889년 제3차 대회에 이어 의사들이 낙태 비범죄화를 지지했다.
- 1917.11.27출산 수당 법령
소비에트 정부가 출산 휴가와 출산 수당을 정했다(구력 11월 14일).
- 11919.09제노트델 창설
당 중앙위원회가 이네사 아르만트와 콜론타이가 추진한 여성부 설치를 승인했다.
- 21920.11「여성 건강 보호에 관하여」
보건·사법 인민위원부의 공동 결정으로 낙태가 무료로 합법화되었다. 세계 처음이었다.
- 31921.07.05우크라이나 시행
러시아 공화국에 이어 우크라이나가 낙태를 합법화했다.
- 41922러시아 공화국 형법
합의된 동성 관계를 처벌하는 조항 없이 형법이 시행되었다. 1926년 형법도 같았다.
- 51923.01세마슈코 대표단의 베를린 방문
보건 인민위원 세마슈코가 이끈 대표단이 히르슈펠트의 성과학 연구소를 찾았다.
- 1924낙태 위원회와 12가지 성 계율
사례마다 특별 위원회가 낙태를 심사하게 되었고, 아론 잘킨트가 금욕과 일부일처를 권하는 12가지 성 계율을 냈다.
- 1926혼인·가족법전
사실혼을 인정하고 위자료를 넓혔다. 같은 해 첫 임신의 낙태가 금지되었다.
- 61929.09.06「청산가리」 초연
프리드리히 볼프의 희곡이 베를린에서 초연되어 독일 형법 제218조 논쟁을 불렀다.
- 71930.01제노트델 해체
여성부가 해체되어 선동·대중 운동부 여성 분과로 바뀌었다. 같은 해 낙태가 유료가 되었다.
- 81933.09.15야고다의 보고서
OGPU 부의장 야고다가 「남색자 결사」를 간첩 조직으로 몰아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스탈린은 입법을 지시했다.
- 91933.12.17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 결정
합의된 남성 간 성관계를 처벌하는 새 조항을 각 공화국 형법에 넣게 했다.
- 1934불법 낙태 단속 강화
불법 낙태 처벌이 강화되고 러시아 공화국 검찰청이 단속을 독려하는 회람을 돌렸다.
- 101934.04.01형법 제154a조
러시아 공화국 형법에 남색을 3~5년, 가중 사유가 있으면 5~8년 자유 박탈로 처벌하는 조항이 들어갔다.
- 111934.05.23고리키의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가 「동성애자를 없애면 파시즘이 사라진다」는 말을 실었다.
- 121935.12.01스탈린의 인구 증가 연설
스탈린이 삶이 나아져 해마다 3백만 명씩 인구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 131936.03.09법안 위원회
정치국이 낙태 금지법 위원회를 꾸렸다. 카민스키의 넓은 허용 사유 목록은 스탈린의 반대에 부딪혔다.
- 141936.06.27낙태 금지 법령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가 낙태를 금지하고 다자녀 수당과 이혼 제한을 함께 정했다.
- 151937.01.06인구 조사
인구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1억 6200만 명으로 나오자 결과가 「해독 행위」로 규정되었다.
- 161937.06.25카민스키 체포
보건 인민위원 카민스키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발언 직후 체포되었다. 1938년 총살되었다.
- 171944.07.08「영웅 어머니」
아이를 열 명 이상 기른 어머니에게 주는 칭호와 훈장이 생기고 가족 법령이 이혼을 더 어렵게 했다.
- 181955.11.23금지 폐지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 명령으로 의료 기관에서의 낙태가 다시 합법화되었다.
관련 인물 24명
지도부3
1933년 야고다의 보고에 남색자를 「본보기로 처벌하라」며 입법을 지시했다. 인구 증가를 체제의 성과로 내세웠고, 1936년 법안 위원회에서 카민스키의 넓은 허용 사유 목록에 반대했다. 그의 지도 아래 6월 27일 낙태가 금지되었다.
인민위원회의 의장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1920년 낙태 합법화는 그가 이끈 정부에서 이루어졌다. 체트킨의 회고에 따르면 「물 한 잔 이론」을 반사회적이라고 했다.
보건 인민위원 (1918~1930)니콜라이 세마슈코1874–19491920년 11월 사법 인민위원부와 함께 낙태를 합법화한 보건 인민위원부를 이끌었고, 모성·영아 보호 체계의 토대를 놓았다.
집행 · 지휘4
1920년 낙태 합법화 결정을 함께 낸 사법 인민위원부의 수장이었다.
러시아 공화국·소련 보건 인민위원그리고리 카민스키1895–19381936년 법안 위원회에 합법 낙태 사유의 넓은 목록을 내 안전한 낙태를 지키려 했으나 스탈린의 반대에 부딪혔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OGPU 부의장겐리흐 야고다1891–19381933년 동성애자 일제 체포를 지휘하고, 「남색자 결사」를 간첩 조직으로 몰아 형사 처벌 입법을 제안했다.
법무인민위원니콜라이 크릴렌코1885–19381936년 3월 동성애를 착취 계급의 도덕적 타락으로 규정하고, 「비밀 소굴」을 반혁명으로 몰았다.
참여11
1919년 콜론타이와 여성부를 세워 1920년까지 이끌었다. 여성부는 볼셰비키를 설득해 낙태를 합법화하게 했다.
제노트델 책임자 (1920~1922)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여성부를 이끌며 가족과 성 도덕의 변혁을 주장했다. 1923년 「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을 썼고, 흔히 「물 한 잔 이론」의 창시자로 잘못 지목된다.
제노트델 책임자 (1922~1924)소피야 스미도비치1872–19341922년 콜론타이를 밀어내고 여성부를 맡아 자유연애와 가족 해체론을 거부하고 대등한 가족과 미혼모 문제를 앞세웠다.
정신과 의사, 「12가지 성 계율」 저자아론 잘킨트1887–19361924년 금욕과 일부일처, 계급의 성생활 간섭권을 내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12가지 성 계율」로 1920년대 성 도덕 논쟁을 정리했다.
최고 법원 판사아론 솔츠1872–1945실업 없는 사회주의에서 여성은 「모성의 기쁨」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며 “우리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금지를 옹호했다.
모스크바 사회위생 연구소장그리고리 바트키스1895–19601923년 『러시아의 성혁명』에서 소비에트 법이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는 까닭을 설명했으나 1928년 견해를 철회했다.
법무인민위원 (좌파 사회혁명당)이사크 시테인베르크1888–19571918년 합의된 동성 관계의 처벌을 뺀 첫 형법 초안을 냈다.
당 중앙위원회 서기라자르 카가노비치1893–1991야고다의 보고서를 넘겨받아 입법을 준비하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았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의장미하일 칼리닌1875–1946정치국 논의에서 법을 만들지 말고 OGPU가 재판 밖에서 처리하자고 했다.
작가막심 고리키1868–19361934년 5월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에서 동성애를 파시즘과 묶어 남색죄 도입을 정당화했다.
망명 독일 공산주의자빌리 뮌첸베르크1889–19401933년 8월 판데르루버를 룀의 남창으로 그린 『갈색책』을 펴낸 집단에 속했다.
반대 · 저항1
대상 · 피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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