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야 니콜라예브나 스미도비치

Софья Николаевна Смидович

콜론타이에 이어 제노트델을 이끌며 「자유연애」에 맞서 가정과 미혼모 보호를 앞세운 볼셰비키

1922년 콜론타이를 밀어내고 당 중앙위원회 여성부(제노트델)장이 되어, 콜론타이의 자유연애론과 가족 해체론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툴라의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볼셰비키 혁명가. 열여덟 살에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형 플라톤과 결혼했고, 외국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의 노동해방단을 만나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다.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툴라에서 《이스크라》 연락과 1903년 첫 노동자 정치 시위를 맡았고 툴라 위원회를 이끌었다. 1911년 표트르 스미도비치와 재혼했다. 1919~1922년 모스크바 당 위원회 여성부장, 1922~1924년 당 중앙위원회 여성부장을 지내며 콜론타이의 자유연애론에 맞서 대등한 부부 관계와 미혼모 보호를 내세웠다. 그 뒤 중앙통제위원으로 일했고, 1934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다른 이름: 소피야 루나차르스카야 · 소피야 체르노스비토바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여성부와 「자유연애」 논쟁

툴라의 변호사 니콜라이 체르노스비토프의 딸로, 어머니 쪽 영지인 베뇨프 군 슈추예 마을에서 자랐다. 자유주의자인 아버지는 딸이 농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학교를 지어 주었다. 열여덟 살에 의사 플라톤 루나차르스키와 결혼했고, 1894~1898년 남편과 외국에 머물며 노동해방단의 플레하노프·자술리치를 만나 확신에 찬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소개로 안나 울랴노바엘리자로바와 사귀어 울랴노프 집안과 우정을 맺었다.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1901년 체포되어 툴라로 쫓겨난 뒤 시립 도서관에서 일하며 《이스크라》와의 연락을 맡았다. 1903년 9월 14일 툴라의 첫 노동자 정치 시위를 준비하고 이끈 뒤 다시 체포되었고, 1904년 풀려나 남편과 키예프로 갔다가 남편이 숨지자 툴라로 돌아와 당 툴라 위원회를 이끌었다. 1911년 표트르 스미도비치와 재혼했고, 1914년부터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모스크바 지역국에서 일하며 2월·10월 혁명에 참여했다. 1919~1922년 모스크바 당 위원회 여성부장을 지냈고, 1922년 콜론타이를 밀어내고 1924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여성 노동자·농민 여성부를 이끌었다. 혁명 뒤 그는 볼셰비키 여성 활동가 가운데 보수적인 쪽에 서서 콜론타이의 자유연애와 가족 해체 구상을 공개적으로 거부했고, 가정은 대등한 동반자의 건강한 관계여야 한다며 미혼모의 처지에 힘을 쏟았다. 콜론타이는 회고록에서 스미도비치와의 관계를 「말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럽다」고 적었다. 그 뒤로도 「방종한 성 풍조」를 거침없이 비판했다. 1925~1930년 중앙통제위원회 기구와 중앙위원회 당 기율 위원회에서 일했고, 제13~15차 당 대회에서 중앙통제위원으로 뽑혔다. 1929년 집단화 때는 여성부가 농민 여성들의 집단화 지지를 끌어내는 데 더 큰 몫을 맡게 해 달라고 당에 요청했다. 1931~1932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여성 노동·생활 개선 위원회 부의장으로 일하고 옛 볼셰비키 협회에서 활동했으며, 1933년 「노동자·농민 여성의 공산주의 교육」에 이바지한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4년 11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