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키,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 (1934)
인물막심 고리키, 이오시프 스탈린,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표트르 스톨리핀, 미하일 게르셴존 용어소련 남색죄, 1933년 나치 분서, 만주국, 돌격대 (SA) 사건소련의 낙태 합법화·금지와 남색죄 재범죄화
“세계는 병들었다.” 볼셰비키만 이렇게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서정적인 기분에 젖은 인문주의자들도 이렇게 단언한다. 그들은 마침내 “인간애”, “자비”, “관용”, 그리고 두 발 달린 맹수들이 자기의 늑대 같은 “본성”을 가리려 애써 온 그 밖의 감정들이 현실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감정은 상품으로 바꾸기 어렵고, 소비자를 찾지 못하며, 상공업 이윤의 증대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세계는 미쳐 버렸다.” 근로자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의 무책임하고 비인간적인 권력을 지키고 정당화하는 일, 곧 주인들이 노동자의 에너지를 무제한으로, 이제는 무의미하게 착취하는 것을 지키는 일을 생업으로 고른 자들이 점점 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의 “병”의 역사는 부르주아지가 기운이 다한 봉건 영주들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은 바로 뒤에 거의 곧바로 시작된다. 이 병을 처음 알아차리고 그것에 대해 필사적으로 소리친 사람은 카를 마르크스와 같은 시대를 산 프리드리히 니체였다고 할 수 있다. 우연이란 없다. 삶의 모든 현상에는 근거가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몰락의 필연성,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필연성을 과학적으로, 반박할 수 없게 논증하던 바로 그 무렵에, 니체가 병들고 겁에 질린 광신자의 광포함으로 “금발의 야수”[1]가 지닌 권력의 정당함과 무한함을 설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니체보다 앞서 막스 슈티르너[2]가 부르주아 국가와 종교와 도덕을 부정하고 개인이 무제한의 이기주의를 누릴 권리를 주장했다. 이 아나키스트의 부정 밑에는 실은, 부르주아지가 이미 중세에, 곧 봉건제와 봉건 영주들의 이념적 지도자인 교회에 맞선 투쟁을 시작할 무렵부터 다듬기 시작한 그 “휴머니즘”에 대한 부정이 숨어 있다. 부르주아지는 이 “휴머니즘”이 자기의 일상적 실천에서 거북하고 모순된다는 것을 아주 일찍 깨달았다. 루터와 칼뱅 같은 이들의 교회 개혁이 그것을 증언한다. 이 개혁은 본질적으로 “인도적인” 복음서를 성경으로 갈아 치우는 데 그쳤다. 성경은 부족들 사이의 적대, 사람의 몰살, 약탈, 기만,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가 그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 밖의 모든 비슷한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길 뿐 아니라 찬양하기까지 한다. 루터 이전에 교회는 문화를 건설하는 막일꾼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받고 참으라고 가르쳤다. 루터는 사제들에게는 없던 단도직입적인 태도로, 16세기에, 곧 혁명적 봉기의 시대에 농민과 수공업자들에게 가르쳤다. 왕과 남작들이 너희를 다스리기 쉽고 즐겁도록 살고 일하라. “참고, 양보하고, 너희의 몸도 재산도 내어 주며, 윗사람과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 맞서 일어나지 말라.”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거짓과 위선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는 파시즘을 조직하면서 자기의 휴머니즘을, 이제는 맹수의 낯짝을 가려 주지 못하는 낡은 가면처럼 스스로 내던지고 있다. 휴머니즘이 자기 분열과 부패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내던지는 것이다. 위에서 든 사실들이 말해 주듯,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이 세상의 추악함을 보고 불안해져 그 추악함을 누그러뜨리거나 웅변으로 덮으려는 순진한 열망에서 인간애를 설교할 때마다, 삶의 주인인 장사치들은 그 설교를 오직, 가난과 무권리와 억압 같은, 장사치들의 세계적인 “문화” 활동이 피할 수 없이 낳는 결과들에 화가 난 사람들을 달래는 시도로서만 허용했다. 그러나 노동 대중의 이 분노가 사회혁명의 형태를 띠자마자, 부르주아지는 “작용에는 반동으로” 응수했다.
우리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도 이 법칙에 기꺼이 복종했다. 그들은 1905~1906년의 사건 뒤에 참회의 논문집 『이정표』[3]에서 공공연히 선언했다. “우리는 총검으로 인민의 분노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권력에 감사해야 한다.” 그때 권력은 장관 스톨리핀[4]의 손에 있었고, 그는 독재자처럼 행동하며 노동자와 농민 5천 명 넘게 목매달았다.
오늘날 그 권력 앞에 역사적·과학적으로 근거를 갖춘, 참으로 전 인류적인, 마르크스—레닌—스탈린의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이 위협적으로 일어섰다. 이 휴머니즘의 목적은 모든 인종과 민족의 근로 인민을 자본의 쇠발톱에서 완전히 해방하는 것이다. 이 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학설은, 자본의 쇠발톱을 만드는 것이 노동자들이며, 바로 프롤레타리아가 권리 없는 빈민으로 남은 채 자본가에게 “아름다운 삶”을 지어 준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게 증명했다.
이 혁명적 휴머니즘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본주의에 맞선 무자비한 투쟁의 권리, 부르주아 세계의 가장 추악한 모든 토대를 부수고 없앨 권리를 역사적 근거와 함께 준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참된 인간애가 창조적인 힘으로 조직되고 있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소수의 비인간적이고 무의미한 권력에서 수억의 근로 인민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수억의 사람들에게, 바로 이 노동이 문화의 모든 가치를 창조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가치에 기대어 세계에 근로 인민의 우애와 평등을 흔들림 없이 세울 새로운 전 인류적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 보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휴머니즘은 공상도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적이고 용감하며 영웅적인 실천이다. 이 실천은 예전의 부르주아적이고 농민적이며 “야만적”이고 여러 종족이 뒤섞인 러시아에서 종족들의 우애와 평등이 실제로 실현되었고, 막대한 양의 육체적 에너지가 지적 에너지로 바뀌는 과정이 실제로, 의심할 여지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
모든 나라의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법의식이 자라나는 데에 무엇을 맞세우는가?
10억 근로 인민에 대한 권력을 지키려고, 노동을 무의미하게 착취할 자유를 지키려고 마지막 힘을 짜내며 자본가들은 파시즘을 조직한다. 파시즘이란, 기진맥진한 부르주아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육체적·도덕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층을 자본이 동원하고 조직하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와 매독 환자의 어린 후손들을 동원하는 것이고, 1914~1918년 전쟁의 인상에 상처 입은 히스테리에 걸린 아이들, 곧 소부르주아지의 아이들, 패배와, 부르주아지에게 패배 못지않게 파괴적이었던 승리에 “복수하려는 자들”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 소년들의 심리는 이런 종류의 사실로 드러난다. 올해 5월 초 독일 에센에서
열네 살 소년 하인츠 크리스텐이 친구인 열세 살 소년 프리츠 발켄호르스트를 죽였다. 살인자는 친구를 위해 미리 무덤을 파 두고 그를 산 채로 던져 넣은 다음 발켄호르스트가 숨이 막혀 죽을 때까지 그의 얼굴을 모래 속에 눌러 두었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발켄호르스트가 가진 히틀러 돌격대원 제복이 몹시 갖고 싶었다는 것을 살인의 동기로 댔다.
파시스트들의 행진을 본 사람은 그것이 구루병에 걸리고 연주창을 앓고 폐병에 걸린 젊은이들의 행진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 젊은이들은 병자의 온 갈망을 다해 살고 싶어 하며, 독이 든 피가 곪아 끓어오르는 것을 드러낼 자유를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 수천의 잿빛 핏기 없는 얼굴 사이에서 건강하고 혈색 좋은 얼굴은 수가 적어서 유난히 눈에 띈다. 물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계급의 적이거나, 소부르주아지 출신의 모험가들, 곧 어제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크게 되고 싶은 작은 장사치들의 얼굴이다. 독일 파시즘의 지도자들은 장사치들에게 땔감과 감자를 조금 공짜로, 곧 노동자와 농민의 몫으로 나눠 줌으로써 그들의 표를 산다. 수석 웨이터들은 제 작은 식당을 갖고 싶어 하고, 좀도둑들은 큰 도둑들의 권력이 합법화한 도둑질을 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파시즘의 “간부”다. 파시스트들의 행진은 자본의 힘의 행진이자 동시에 약함의 행진이다.
눈을 감지 말자. 파시스트들 가운데에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결정적인 힘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노동자들도 적지 않다. 우리 스스로에게 숨기지 말자. 세계의 기생충인 자본주의는 아직 꽤 강하다. 노동자와 농민이 무기와 빵을 그 손에 맡겨 둔 채 여전히 자기의 살과 피로 그것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격동하는 현대의 가장 슬프고 부끄러운 현상이다. 이렇게 순순히 적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역겹다. 노동계급 안에서 이것을 길러 낸 것은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며, 그들의 이름은 이제부터 영원히 누렇고 기름진 치욕의 후광에 둘러싸여 있다. 실업이 늘고 임금이 내리고 소부르주아지의 구매력마저 떨어지는 동안 시장 가격을 일정한 높이로 지키려고 식료품을 없애 버리는 것 같은 사실 앞에서, 실업자와 굶주린 사람들의 인내심은 놀랍다.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인간적 존엄은 실업자 형제들을 냉소적으로 조롱하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깊이, 적극적으로 분개해야 마땅할 것 같다.
영국 도시 서리에 세계 최초의 개 전용 과자점이 문을 열었다. 어떤 개든 이 과자점에서 케이크를 얻을 수 있고, 집 없고 굶주린 개들에게는 먹이와 잠자리가 제공된다. 이 과자점은 몇 주 전 브록허스트에서 죽은 제임스 패터슨 씨의 돈으로 문을 열었다.
이런 종류의 뻔뻔하고 냉소적인 짓이 “귀족 인종”의 나라 영국에서 점점 잦아지고 있다. 이런 짓 밑에는 패터슨 같은 자들이 자기들의 몰락을 피할 수 없다고 느끼는 감정이 숨어 있고, 이런 짓은 삶을 떠나면서 할 수 있는 한 앙갚음으로 삶을 더럽혀 놓으려는 패터슨 같은 자들의 귀족적 열망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자본가들은 소년과 청년들을 권총 말고도 낡아 빠진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사상으로 무장시키고,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냉소주의와 살인과 파괴에 대한 가학적 열정을 길러 주면서, 이 젊은이들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선 경찰의 투쟁을 돕는 조수로 조직할 뿐 아니라, 현대적인 기계식 인간 살육 기술로 무장한 노동자·농민 군대의 핏속에 흘려 넣을 독으로 가공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짐승 같은 병영에서 훈련받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1918~1920년에 보여 준 것을 잘 기억한다. 계급의 적에게 바치는 그들의 무의미하고 자살적이며 기계적인 복무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를 넘으면, 곧 수백만 노동자와 농민이 서로를 죽이고 불구로 만든 뒤에는, 총검과 대포가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기를 그친다는 것을. 물론 “늦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계급의 적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정당하게 자기의 정직한 손을 그에게 들어 올리기 전에 노동자를 없애 버린다.
수십이 아니라 수백 가지 사실이 유럽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파시즘의 파괴적이고 타락시키는 영향을 말해 준다. 그 사실들을 늘어놓는 것은 역겹고, 기억도 부르주아지가 점점 더 열심히, 점점 더 넘치도록 지어내는 오물을 담기를 거부한다. 그래도 지적해 두자. 프롤레타리아트가 용감하고 성공적으로 살림을 꾸려 가는 나라에서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범죄이며 처벌받을 일로 인정되었는데[5], 위대한 철학자와 학자와 음악가의 “문화적인” 나라에서는 동성애가 자유롭게,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활개 친다. 벌써 이런 빈정거리는 속담이 생겼다. “동성애자를 없애면 파시즘이 사라진다.”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셈족, 곧 필요하다면 자기들의 순수성을 자랑할 수도 있는 인종의 사람들, 인류에게 참으로 위대한 문화의 거장들을 그토록 많이 주었고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참된 메시아 카를 마르크스를 준 이 사람들이 독일의 파시스트 부르주아지에게 쫓겨나고 있다. 그리고 영국의 파시스트들도, 셈족이 적잖이 “권력의 키”를 잡았고 많은 셈족이 귀족에 편입된 그 영국에서, 영국의 파시스트들도 부끄러운 반유대주의를 설교하기 시작하고 있다.
같은 때에, 권력이 노동계급에 속한 나라에서는 유대인들의 자치 공화국, 곧 유대인 자치주가 조직되었다[6].
각 민족의 자본가 집단들은 새로운 세계 전쟁을 서둘러 준비하고 있으며, 노동자와 농민의 노동을 더 넓고 편하게 착취하려고 세계를 새로이 다시 나누려 한다. 작은 나라들은 다시 “강대국들”의 쇠 같은 포옹에 갇힐 위험에 놓였고, 그들에게서 자기 문화를 자유롭게 발전시킬 권리를 다시 빼앗으려 한다.
여러 언어와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속에 제국주의와 파시즘은 민족적 불화, 인종적 멸시와 경멸이라는 나쁜 씨앗을 뿌린다. 그 씨앗은 인종적 증오로 자라나, 근로자의 세계에서 계급적 이해가 하나라는 의식이 자라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다. 그것은 구원의 의식, 곧 미쳐 버린 장사치들의 무방비하고 권리 없는 노예라는 처지에서 전 세계 노동자와 농민을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의식이다. 장사치들의 민족적 상공업 적대는 인종적 적대와 인종 전쟁의 설교로 쉽게 자라날 수 있고, 이미 자라나고 있다. 오늘 그들은 반유대주의를 설교하고 이미 비열한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내일은 몸젠과 트라이치케[7] 같은 자들이 슬라브인에 대해 품었던 부끄러운 견해를 떠올리고, 폴란드인, 포메라니아인, 체코인이 독일 문화에 얼마나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을 주었는지는 잊은 채 반슬라브주의의 설교로 돌아갈 것이다. 유럽의 모든 공장주와 장사치가 같은 상품을 만들어 팔기 때문에, 게르만 인종이 라틴 인종에 맞서, 또 앵글로색슨 인종에 맞서 적대하고 전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동맹들이 있다. 그러나 팔아야 한다면, 팔아넘기는 것을 무엇이 막겠는가? 이를테면 영국과 일본의 동맹이 있지만, 일본인들은 런던에서 비단 양말을 3펜스에, 곧 한 켤레에 5코페이카에 판다. 이것은 물론 사소한 일이지만, 일본의 “덤핑”은 황인종에 대한 적대와 증오가 생겨나기에 충분한 이유다. 만주와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벌이는 일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8]은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아주 솔깃한 일이다.
인종 이론은 숨이 넘어가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이데올로기적” 예비군이다. 그러나 그 썩은 숨결은 건전한 사람들마저 중독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중무장한 유럽의 백인들이 무장하지 않은 인도인, 중국인, 흑인을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노예로 삼는 광경을 오랫동안 보아 오며 타락했기 때문이다.
자기 계급 형제들을 비열하게,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약탈하라는 유혹에 중독되지 않고 버틸 힘은 오직 단일 전선을 이룬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만 있다.
마르크스—레닌의 이데올로기로 길러지고, 그 지도자 스탈린이 그 이데올로기를 현실에서 현명하게 실현하고 있는 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여러 종족이 사는 자기 나라에서 모든 종족과 인종이 삶과 노동과 자기 문화를 발전시킬 권리에서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을 세계에 증명했다. 글을 모르고 문자도 없던 반(半)야만의 사람들에게 러시아 노동자는 지식에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에는 문화에 대한 갈망과 문화를 받아들일 능력을 증명하지 않은 종족이, 수가 아무리 적더라도 하나도 없다…
소비에트 연방 주민의 빠른 문화적 성장은 모든 나라의 정직한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이 사실을 인정한 이상 그에 걸맞은 아주 단순한 도덕적·위생적 결론을 끌어내야 할 것 같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사회적 질병에 치명적으로 감염되어 멸망을 선고받은 환경보다 건강한 환경에서 사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훨씬 정직하다는 결론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적 창조의 능력을 지녔음을 인정한다면, 그 지식욕과 재능, 그리고 1억 7천만이 사는 나라에서 이미 실현하기 시작한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의식이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속에서 자라도록 온갖 방법으로 돕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문화의 거장들, “휴머니스트들”의 자존심은, 장사치들이 문화를 부정하는 사실들, 사람을 몰살하도록 만들어진 군사 기술 말고는 모든 기술의 성장에 맞서는 장사치들의 공세에 깊이 분개해야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부르주아 문화의 거장들이 분개하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파시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불태우는 일[9]에도, 민족 이론과 인종 이론의 뜻에 담긴 인간 증오의 설교에도, 새로운 광포한 전쟁의 준비, 곧 가장 건강한 사람 수백만을 무의미하게 몰살하고, 수백 년 된 문화적 가치를 다시 불로 없애고, 도시를 파괴하고, 공장을 세우고 들판을 일구고 다리와 길을 놓은 대중의 고된 노동의 결실을 없애 버릴 준비에도 그들이 분개하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맹수들의 광기는 웅변으로 고칠 수 없다. 호랑이와 하이에나는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
“휴머니스트들”에게 참된 인간애가 있다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이 이 시대의 가장 크고 영웅적인 비극성을 느끼고, 바로 누가 이 시대의 영웅인지를 이해한다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코끼리처럼, 미쳐서 우왕좌왕하는 장사치들의 개미집을 밟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 밟아서 짓뭉갤 때가. 이것은 피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보잘것없는 소수가 창조적으로 노쇠하고, 삶에 대한 두려움과 병적이고 고칠 수 없는 이윤욕으로 썩어 간다고 해서 멸망할 수는 없다. 이 소수의 멸망은 가장 위대한 정의의 행위이며, 역사는 이 행위를 수행하라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명한다. 이 위대한 행위에 이어 세계 민족들의 전 세계적이고 화목하며 형제다운 노동, 곧 새로운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게 창조하는 노동이 시작될 것이다.
이것은 신앙인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신앙과 지식이 거짓과 진실처럼 서로 적대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하는 곳, 모든 것이 그 힘센 손으로 만들어지는 곳에는 지식과 신앙이 다툴 자리가 없다. 거기서 신앙은 인간이 자기 이성의 힘을 깨달은 결과이며, 이 신앙은 영웅들을 만들어 내지만 신들은 만들어 내지 않고, 앞으로도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 주
- “금발의 야수”(die blonde Bestie)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1887)에서 쓴 표현이다. ↩
- 막스 슈티르너(1806~1856)는 독일 철학자로, 『유일자와 그 소유』(1844)에서 국가·종교·도덕을 부정하고 개인의 절대적 자기 주권을 주장했다. ↩
- 『이정표』(Вехи, 1909)는 1905년 혁명 뒤 러시아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인텔리겐치아의 혁명 노선을 반성하며 낸 논문집이다. 인용된 말은 미하일 게르셴존의 글에 나오는 구절을 고리키가 줄여 옮긴 것이다. ↩
- 표트르 스톨리핀(1862~1911)은 1906~1911년 러시아 제국 총리로, 1905년 혁명 뒤의 혁명 운동을 야전 군사 재판으로 진압했다. ↩
- 1933년 12월 17일과 1934년 3월 7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 결정으로 남성 간 동성애가 다시 처벌 대상이 된 것을 가리킨다. 러시아 공화국 형법에는 1934년 4월 1일 제154a조로 들어갔다. 이 글은 그 두 달 뒤에 실렸다. ↩
- 유대인 자치주는 1934년 5월 7일 극동의 비로비잔 지역에 세워졌다. 이 글이 실리기 두 주 전이다. ↩
- 19세기 독일 역사가 테오도어 몸젠(1817~1903)과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1834~1896). ↩
- 1931년 만주 사변과 이듬해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가리킨다. ↩
- 1933년 나치 분서를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