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청산가리」로 형법 제218조 반대 운동에 불을 붙인 의사이자 공산주의 극작가
1931년 2월 낙태 시술 혐의로 엘제 킨레와 함께 체포되자 전국적 항의가 일었고, 풀려난 뒤 베를린 스포츠궁전 집회 등에서 제218조 폐지를 외쳤다.
노이비트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의사·작가·극작가. 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나갔다가 반전론자가 되었고, 1918년 드레스덴 노동자·병사 평의회에 들어갔다. 1928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1929년 희곡 「청산가리」로 낙태죄 조항 논쟁을 일으켰다. 1931년 2월 엘제 킨레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대규모 항의 속에 풀려났다. 1933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1943년 자유독일 국민위원회 창립에 참여했다. 1945년 귀국해 사회주의통일당원이 되었고, 1949~1951년 동독의 초대 폴란드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53년 숨졌다. 마르쿠스 볼프와 영화감독 콘라트 볼프의 아버지다.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예술은 무기다」: 「청산가리」에서 동독까지
노이비트의 유대인 상인 막스 볼프의 아들로 태어나 1907~1912년 하이델베르크·뮌헨·튀빙겐·본·베를린에서 의학과 철학, 미술사를 공부했다. 1914년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군의관으로 일하다 여러 차례 다친 뒤 1916년부터 확고한 반전론자가 되었고, 1917년 첫 산문을 냈다. 1918년 11월 드레스덴 노동자·병사 평의회에 들어갔다. 1921~1928년 헤힝겐과 보덴 호숫가 마을에서, 1928~1933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업의로 일하며 1928년 자연요법 대중서 『의사이자 조력자인 자연』을 펴냈다. 1928년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작가 동맹에 들어가 소책자 「예술은 무기다」를 썼다. 1929년 희곡 「청산가리」는 낙태죄 조항 제218조를 둘러싼 넓은 논쟁을 열었고, 에리히 케스트너, 쿠르트 투홀스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뒤따라 이 조항을 문학으로 공격했다. 1931년 2월 그는 슈투트가르트의 의사 엘제 킨레와 함께 영리적 낙태 시술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대규모 항의와 보석금 납부 끝에 풀려났다. 나치 기관지 《민족의 관찰자》는 2월 27일 그를 「가장 위험한 동유럽 유대 볼셰비즘의 대표자」라 불렀다. 4월 15일 그와 킨레는 공산당이 조직한 베를린 스포츠궁전의 대집회에 섰고, 같은 해 보건인민위원의 초청으로 함께 소련을 여행했다. 「청산가리」는 뉴욕·도쿄·모스크바·파리에서도 무대에 올랐다. 1932년 봄 슈투트가르트에서 아마추어 배우들의 공산주의 선동극단 「남서 극단」을 세웠다. 1933년 오스트리아·스위스·프랑스를 거쳐 소련으로 망명해 모스크바 방송에서 일했고, 1937년 독일 국적을 박탈당했다. 스탈린의 테러 속에서 「여기서 체포되기를 기다리지 않겠다」며 1937년 국제여단의 의사로 스페인으로 향했으나 1938년 프랑스에 머물렀고, 1939년 개전과 함께 파리에서 체포되어 르 베르네 수용소에 갇혔다. 1941년 소련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소련 국적을 얻었고, 1943년 7월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의 공동 창립자가 되었다. 독일에 남은 가족 일부는 1942년 학살되었다. 1945년 귀국해 영화사 데파 창립에 참여하고 1946년 사회주의통일당에 들어갔으며, 1949~1951년 동독의 초대 폴란드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49년 「마믈로크 교수」로 국민상을 받았고, 1953년 10월 5일 레니츠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아들 마르쿠스 볼프는 동독 대외 정보부 책임자, 콘라트 볼프는 영화감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