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투홀스키

Kurt Tucholsky
독립 활동 사회민주주의 독일 (1933년 국적 박탈) 유대계 독일인 1890–1935 ✕ 수면제 과다 복용 (자살 추정)

《벨트뷔네》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대와 사법부를 고발한 언론인·작가

1931년 8월 4일 《벨트뷔네》에 이그나츠 브로벨이라는 필명으로 실린 글 「감시받는 전장」에 그는 “병사는 살인자다”라고 썼다. 편집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가 국방군 모욕으로 기소되었다가 1932년 무죄를 받았다.

베를린의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 박사가 되었다. 1913년부터 지크프리트 야콥존의 주간지 《샤우뷔네》(1918년 《벨트뷔네》로 개명)에 글을 썼고, 이그나츠 브로벨·테오발트 티거·페터 판터·카스파어 하우저라는 필명을 함께 썼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반군국주의자가 되어 돌아왔고,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에 들어갔다. 군부와 우익 편향 사법부, 정치 살인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1924년부터 주로 외국에 살았고 1929년 스웨덴으로 옮겼다. 1933년 나치는 그의 책을 불태우고 국적을 박탈했다. 1935년 예테보리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었다.

다른 이름: 이그나츠 브로벨 · 테오발트 티거 · 페터 판터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투홀스키는 《벨트뷔네》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엇을 공격했나

《벨트뷔네》(세계 무대)는 지크프리트 야콥존이 펴낸 좌파 자유주의 주간지로, 1918년까지는 《샤우뷔네》(무대)라는 연극 잡지였다. 투홀스키는 1913년 1월 여기에 첫 글을 실은 뒤 평생 이 잡지의 대표 필자였다. 25년 동안 100곳 가까운 지면에 3천 편 넘는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 1,600편가량이 이 잡지에 실렸다. 한 사람이 너무 많이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그는 1913년부터 이그나츠 브로벨, 테오발트 티거, 페터 판터라는 필명을 함께 썼고, 1918년 12월부터는 카스파어 하우저라는 이름도 썼다. 정치 논설과 법정 기사, 풍자, 시, 서평, 카바레 노래까지 그가 쓰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다.

첫 표적은 군대였다. 1919년 1월 시작한 연재 「밀리타리아」에서 그는 전쟁으로 더 거칠어진 빌헬름 시대 장교단의 정신이 공화국 안에서 그대로 살아 있다고 공격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의 평화 단체인 전쟁참전자 평화동맹을 세우는 데 참여했다.

다음 표적은 사법부였다. 공화국 초기에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발터 라테나우,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같은 좌파·자유주의 정치인들이 잇따라 살해되었다. 투홀스키는 우익 비밀 처단 조직원들의 재판을 지켜보며 판사들이 대개 피고의 군주제·민족주의 견해를 공유하고 그들에게 동정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1927년 4월 세 차례 연재한 「독일 판사들」에서 그는 공화국의 반동적 사법부를 고발했고,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려면 두 번째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아 1928년 “독일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썼다. 1926년 12월 야콥존이 죽자 잡지를 맡았지만 곧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넘겼다.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1931년 8월 4일 《벨트뷔네》 평화 특집호에 이그나츠 브로벨이라는 이름으로 실린 「감시받는 전장」에 있다. 전선 뒤에서 탈영병을 죽이던 야전 헌병대를 비판한 이 글에서 그는 “병사는 살인자다”라고 썼다. 국방장관 빌헬름 그뢰너가 국방군 모욕으로 편집인 오시에츠키를 고소했지만, 법원은 1932년 7월 이 문장이 국방군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스웨덴에 있던 투홀스키는 기소되지 않았다. 그는 나치에게 붙잡힐 것을 두려워해 재판에 오지 않은 일을 죽기 며칠 전까지 후회했다.

투홀스키는 성 개혁 운동에서 어떤 편에 섰나

투홀스키에게 성 문제는 국가가 형법으로 시민의 사생활에 얼마나 들어올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1927년 제국의회에 제출된 형법 개정 초안은 남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을 새 법전의 제297조로 옮기면서 오히려 처벌을 더 엄하게 하려 했다. 1929년 리하르트 린제르트가 이 초안에 맞서 엮은 논집 『제297조 「남성 간 음행」?』에 그는 이그나츠 브로벨이라는 필명으로 짧은 글을 실었다.

그는 초안의 이유서가 반대 근거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하다”고 하고 이 조항이 무고한 사람을 해치고 파멸시킬 수 있다고까지 인정하면서도 처벌을 더 엄하게 한다고 꼬집었다. 마그누스 히르슈펠트가 여러 해 동안 철학자·사회학자·의사·교육자를 불러 이 문제를 이야기하게 했지만, 입법자들은 그들에게 거의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은 남성 간 성관계를 잘 상상하지 못한다고 털어놓으면서도, 자기 감정을 도덕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 그 감정을 나누지 않는 사람을 범죄자로 처벌할 수는 없다고 했다. “성의 여러 양태가 사회를 해치지 않는 한 사회는 개입할 권리가 없다”, “형법전은 도덕 교본이 아니다.” 그는 또 보통 남성에게는 허용되는 행위가 절망 끝에 몸을 파는 실업자에게는 처벌된다며, 사회 문제를 형벌로 다루는 법을 비판했다. 글은 “이 초안은 수치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같은 해 낙태를 처벌하던 형법 제218조를 둘러싼 싸움이 절정에 이르자, 그는 「태아」라는 글로 케테 콜비츠, 알프레트 되블린, 프리드리히 볼프 등과 함께 이 논쟁에 참여했다. 그는 또 헬레네 슈퇴커가 펴낸 성 개혁 잡지 《새로운 세대》에 글을 실어 그의 활동을 지지했다. 그의 소설 『라인스베르크』와 『그립스홀름 성』의 여성 인물들은 낡은 도덕에 매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성을 사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그려졌다.

1933년 나치 학생들은 히르슈펠트와 투홀스키의 책을 함께 “치욕의 기둥”에 못 박았고, 5월 10일 베를린 분서 때 그의 책은 마르크스, 하이네, 프로이트의 책과 함께 불길에 던져졌다.

스웨덴의 투홀스키는 왜 침묵했고 어떻게 죽었나

오시에츠키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보며 투홀스키는 독일에서 비판적 언론이 설 자리가 크게 줄었다고 느꼈다. 1929년 그는 스웨덴 예테보리 근처 힌도스로 거처를 옮겼다(독일 인물 사전 NDB는 이주를 1930년 1월로 적는다). 1931년부터 그는 차츰 글을 줄였고, 《벨트뷔네》에 실린 마지막 큰 글은 1932년 11월 8일의 단상 모음이었다.

1933년 나치는 《벨트뷔네》를 금지했고, 5월 그의 책을 불태웠으며, 8월 첫 국적 박탈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는 망명 언론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1924년부터 이미 외국에 살았으니 자신은 망명자가 아니라고 여겼고, 1934년 1월 스웨덴 귀화를 신청하려 이력서를 써 두기도 했다.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그만둔 독일인”, “그만둔 시인”이라 불렀다. 많은 망명자와 달리 히틀러 독재가 곧 무너지리라는 환상을 품지 않았고, 독일인 다수가 독재와 타협했으며 외국도 히틀러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몇 해 안에 전쟁이 나리라 예상했다.

그래도 그는 강제수용소에 갇힌 오시에츠키를 위해 뒤에서 움직였다. 1934년부터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자는 운동을 도왔고, 오시에츠키는 1936년 1935년도 평화상을 받았지만 투홀스키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1935년 12월 15일 팔레스타인으로 간 작가 아르놀트 츠바이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독일 유대인들이 나치 정권에 저항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1935년 10~11월 위장병으로 입원한 뒤 그는 바르비투르산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했다. 12월 20일 저녁 힌도스의 집에서 베로날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고, 이튿날 혼수상태로 발견되어 예테보리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1일 저녁 숨졌다. 망명자들 사이에서는 나치가 그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전기 작가 미하엘 헵은 술과 겹친 사고였을 가능성도 보았다. 그러나 그가 전에도 자살할 생각을 내비친 적이 있어, 오늘날에는 자살이 가장 유력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재는 1936년 여름, 소설 『그립스홀름 성』의 무대인 마리프레드의 그립스홀름 성 가까운 참나무 아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