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낙태 시술로 체포되어 형법 제218조 반대 대중운동의 상징이 된 독일의 의사
1931년 2월 프리드리히 볼프와 함께 체포되어 단식 투쟁 끝에 3월 28일 풀려났고, 4월 베를린 스포츠궁전의 1만 명 넘는 집회에서 연설했다.
하이덴하임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독일의 의사·작가. 1918년 튀빙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해 1924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박사가 되었고, 슈투트가르트에서 피부과·성형외과 의사로 개업했다. 산아 조절 상담소를 이끌며 낙태죄 조항에 반대했고, 1931년 2월 낙태 시술 혐의로 프리드리히 볼프와 함께 체포되어 대규모 항의 운동을 낳았다. 단식 투쟁 끝에 풀려나 전국 집회에서 연설했고, 1932년 『여자들: 한 여의사의 일기에서』를 펴냈다. 그해 가을 다시 체포될 위험을 피해 프랑스로 달아났고, 미국에서 성형외과 의사로 일하다 1970년 뉴욕에서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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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70
독립 활동대표
과학·기술
관련 역사 사건
제218조에 맞선 여의사
하이덴하임의 상급 실업학교 교사 오토 콘라트 킨레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쪽 첼러 집안은 대대로 의사를 낸 집안이었다. 에슬링겐의 김나지움에서 첫 여학생 가운데 하나로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아버지의 반대를 할머니가 꺾어 준 덕에 1918년 10월 튀빙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킬과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1923년 12월 국가시험에 붙었고 1924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박사가 되었다. 외과는 아직 남자들의 영역이어서 슈투트가르트 시립병원 피부·성병과에서 일했고, 카타리나 병원의 「경찰 병동」, 곧 성병으로 신고된 성매매 여성들을 가두어 치료하는 병동의 조수 의사가 되었다. 1929년 7월 은행가 슈테판 야코보비츠와 결혼해 슈투트가르트에 피부·비뇨기·미용 전문의원을 열고 작은 병실에서 흉터와 구순구개열 같은 재건 수술을 했다. 산아 조절·성위생 제국연맹의 무료 상담소를 이끌며 강연을 다녔다. 1930년 12월 익명으로 고발되어 1931년 2월 19일 작가이자 의사인 프리드리히 볼프와 함께 영리적 불법 낙태 혐의로 체포되었다. 독방에서 210건의 사례에 대해 날마다 몇 시간씩 심문받았고, 3월 21일 단식 투쟁을 시작해 27일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으며, 이튿날 구금을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공산당은 석방 동의안을 냈지만 그의 페미니즘을 못마땅해해 볼프보다 훨씬 덜 지원했고, 나치는 두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구금을 지지했다. 풀려난 뒤 그는 볼프와 함께 「투쟁위원회」의 연사로 전국 집회를 돌았고, 1931년 4월 15일 베를린 스포츠궁전 집회에는 1만 명이 훨씬 넘게 모였다. 5월에는 소련 의사·작가 단체의 초청으로 볼프와 소련을 다녀왔고, 프랑크푸르트에 새 의원을 열어 낙태 시술을 이어 갔다. 1932년 『여자들: 한 여의사의 일기에서』를 펴내, 성평등도 사회보장도 없는 사회에 출산을 강요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썼다. 1932년 3월 그가 낙태를 시술한 젊은 유대인 여성이 4월 병원에서 원인 모르게 숨진 뒤, 가을에 재체포 경고를 받고 자르브뤼켄을 거쳐 프랑스로 달아났다. 슈투트가르트 재판은 1933년 1월 잠정 중단되었지만 그는 1940년까지 수배되었다. 미국인 조지 라로와 결혼해 뉴욕으로 건너가 의사 면허를 다시 따고 파크 애비뉴에서 피부과·성형외과 의사로 이름을 얻었다. 첫 남편 야코보비츠의 프랑스 탈출기는 프란츠 베르펠의 희곡 「야코보프스키와 대령」이 되었다. 1957년 자서전 『여성 외과의』를 냈고 1970년 7월 19일 뉴욕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