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12가지 성 계율」을 쓴 소련의 정신과 의사이자 아동학 운동 지도자
1924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12가지 성 계율」에서 혼전 금욕과 일부일처를 내세우며 성은 모든 면에서 계급에 복종해야 한다고 썼다.
하리코프에서 태어난 소련의 정신과 의사·심리학자·정신분석가·아동학자. 1911년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를 마치고 1차 세계대전 때 군의관으로 일했다. 혁명 뒤 교육인민위원부에서 공산주의 교육학을 맡았고, 1924년 「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서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잇고자 했다. 같은 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12가지 성 계율」에서 혼전 금욕과 일부일처를 요구했다. 1928년 잡지 《아동학》의 첫 편집장이 되었으나 1931년 말 「멘셰비키적 관념론」과 프로이트주의로 비판받아 자기비판을 하고 연구소장과 편집장에서 물러났다. 1936년 7월 비판 회의 뒤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전한다.
주요 활동과 소속
관련 역사 사건
성 계율에서 아동학의 몰락까지
하리코프에서 태어나 1911년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서 정신의학을 마쳤고, 1914~1917년 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다. 혁명 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예비학부장과 교육인민위원부 예비학부 부장(1919~1921)을 거쳐 공산주의 교육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 1924년 「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와 「신경질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정신분석의 장단점을 따지며 마르크스주의와의 공통점을 찾으려 했고, 공산당 활동가의 90%에게 신경증·고혈압·대사 저하가 겹친다는 「당 3징후」를 내세우기도 했다. 같은 해 나온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12가지 성 계율」은 지나치게 이른 성생활을 막고 20~25세 혼인 전까지 금욕하며, 일부일처를 지키고, 배우자를 계급적·혁명적 목적에 따라 고르며, 계급은 혁명의 이익을 위해 구성원의 성생활에 끼어들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이 계율은 법이 아니라 권고였지만 「물 한 잔 이론」이 퍼진 혁명 초의 성 풍조를 누르려는 대표적 문헌이 되었다. 그는 1927년 12월~1928년 1월 제1회 전연방 아동학 대회를 주재하고, 1928년 교육인민위원부 부처 간 아동학 계획 위원회 의장과 잡지 《아동학》 초대 편집장이 되었으며, 1930년 행동 대회를 이끌었다. 같은 해 프로이트의 『환상의 미래』 러시아어판에 적대적인 서문을 썼는데, 이는 소련 시기 마지막으로 번역된 프로이트 저작이었다. 1931년 심리학·아동학·정신공학 연구소장이 되었으나 그해 말 「멘셰비키적 관념론적 절충주의」, 프로이트주의, 「업무 왜곡」으로 비판받았고,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했지만 12월 연구소장과 《아동학》 편집장에서 물러났다. 1936년 7월, 그의 아동학 지도를 비판한 회의가 끝난 뒤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졌다고 딸이 전했으며, 자살일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