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턴우즈 체제의 성립과 붕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연합국은 왜 전후 세계경제의 규칙부터 짰나? 케인스안과 화이트안은 무엇이 달랐고, 달러를 금에, 각국 통화를 달러에 묶은 고정환율 체제는 어떻게 작동했나? 소련은 왜 서명하고도 가입하지 않았나?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떠받친 이 체제는 왜 1960년대 금 위기를 거쳐 1971~1973년에 무너졌나?
1944년 7월 연합국 44개국은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1930년대의 환율 전쟁과 무역 붕괴를 되풀이하지 않을 전후 통화 질서를 세웠다. 각국 통화는 달러에, 달러는 온스당 35달러로 금에 고정되었고, 자본 통제가 허용되었으며,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만들어졌다. 협상은 국제청산동맹을 내세운 케인스안보다 미국의 화이트안 쪽으로 기울었다. 소련은 서명하고도 비준하지 않았고, 마셜 플랜을 거부한 뒤 코메콘을 세웠다. 체제는 달러 갭과 마셜 플랜을 거쳐 1958년에야 온전히 작동했고, 포드주의와 복지국가가 맞물린 전후 황금기를 떠받쳤다. 그러나 미국의 적자로 해외 달러가 금을 넘어서자(트리핀 딜레마) 1960년대 금 풀과 드골의 금 태환 요구, 1968년 금 위기가 이어졌고, 1971년 8월 닉슨의 금 태환 정지와 스미스소니언 협정을 거쳐 1973년 3월 주요 통화가 변동환율로 넘어갔다.
왜 전쟁 중에 전후 세계경제의 규칙부터 짜려 했나?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과 영국의 관료들은 전쟁이 끝난 뒤 나라와 나라 사이의 돈과 무역을 어떤 규칙으로 움직일지부터 의논했다. 바탕에는 1930년대의 기억이 있었다. 대공황 때 각국은 관세를 높이고, 수출을 늘리려고 자기 통화의 값을 경쟁적으로 깎았으며(평가절하), 차별적인 무역 블록을 쌓았다. 평가절하는 자기 나라 물건을 외국에서 싸게 만들어 수출을 늘리지만, 다른 나라가 똑같이 따라 하면 아무도 이득을 보지 못하고 무역만 줄어든다. 미국 국무부 역사실은 이런 정책들이 경제를 살리지 못한 채 국제 환경만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 경험이 반추축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경제 협력만이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룰 길이라는 결론을 남겼다고 정리한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코델 헐 국무장관은 자유무역이 번영뿐 아니라 평화도 가져온다는 윌슨식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 2
이 구상은 1941년 8월 루스벨트와 처칠이 발표한 대서양 헌장에 처음 담겼다. 헌장의 넷째 항은 승전국과 패전국을 가리지 않고 모든 나라가 무역과 원자재에 평등하게 접근하게 하겠다고 했고, 다섯째 항은 노동 기준과 경제 발전, 사회 보장을 위한 경제 협력을 약속했다. 1942년 2월 무기대여(렌드리스) 협정의 제7조에서 영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는 대가로 국제 상거래의 모든 차별을 없애고 무역 장벽을 낮추는 데 협력하기로 했다. 영국은 1930년대에 제국 안에서만 낮은 관세를 매기는 제국 특혜 관세로 미국 상품을 막아 왔으므로, 이 조항은 전후 영국 제국 시장을 미국에 여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미국 쪽 계산도 분명했다. 전쟁 특수가 끝나면 다시 1930년대 같은 실업이 올 수 있다는 걱정이 컸고, 그러려면 유럽과 파운드 지역의 나라들이 미국 상품을 사 갈 수 있어야 했다. 미국이 자유무역과 통화의 자유로운 교환을 앞세운 까닭이다. 1 2
케인스안과 화이트안은 무엇이 달랐나?
새 체제의 설계도는 두 사람이 따로 그렸다. 영국 재무부 고문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미국 재무부의 국제 담당 경제학자 해리 덱스터 화이트다. 두 안 모두 환율을 고정하는 쪽을 택했다. 환율이 크게 출렁이면 무역업자가 미래의 대금을 가늠할 수 없어 무역이 위축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두 안 모두 국제수지 적자에 몰린 나라에 단기 자금을 빌려주는 기구를 만들어, 그 나라가 보호무역이나 경쟁적 평가절하로 내몰리지 않게 하려 했다. 국제수지 적자란 한 나라가 수입과 해외 지출로 내보내는 외화가 수출 등으로 벌어들이는 외화보다 많은 상태를 말한다. 적자가 이어지면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 고정 환율을 지킬 수 없게 된다. 3 1
차이는 적자의 부담을 누가 지느냐에 있었다. 케인스는 1941년부터 국제청산동맹이라는 일종의 세계 중앙은행을 구상했다. 이 은행은 「방코르」라는 새 국제 통화를 발행해 나라 사이의 결제를 장부 위에서 처리하고, 나라마다 방코르 당좌대월(마이너스 통장)을 열어 준다. 적자국이 한도를 넘으면 이자를 물지만, 흑자가 지나치게 쌓인 나라도 이자를 물고 해마다 한도를 넘는 흑자는 몰수당한다. 흑자국이 수입을 늘리거나 적자국에 공장을 짓거나 원조를 주어 균형을 맞추도록 압박하는 장치였다. 케인스는 전후 미국에 다시 공황이 오면 다른 나라들이 적자에 빠져 국내 안정과 환율 안정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을 걱정했다. 적자국에만 조정을 강요하면 그 나라는 긴축과 실업으로 수입을 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 3 2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될 미국은 이 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이트는 흑자국 부담 조항에 대해 “우리는 그 점에서 완강했다.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안정기금안은 새 통화를 찍지 않고 각국이 낸 금과 자국 통화를 모은 한정된 기금으로 움직이며, 국제수지 균형의 짐을 적자국에 지우고 흑자국의 흑자에는 한도를 두지 않았다. 브레턴우즈에서 채택된 것은 화이트안에 가까웠다. 케인스의 걱정에 대한 양보로, 어떤 흑자국의 통화가 세계 무역에서 부족해지면 기금이 그 통화를 배급하고 흑자국으로부터의 수입을 제한할 수 있게 하는 「희소 통화 조항」이 들어갔고, 기금의 규모도 늘었다. 경제사가 브래드 디롱은 케인스가 미국에 밀린 거의 모든 쟁점에서 훗날 사건들이 케인스가 옳았음을 보여 주었다고 평했다. 4 3 2
브레턴우즈 협정은 어떻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나?
1944년 7월 1일부터 22일까지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의 마운트워싱턴 호텔에 44개 연합국 대표 730명이 모였다. 정식 이름은 국제연합 통화금융회의였고, 의장은 미국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였다. 국제통화기금을 다룬 제1위원회는 화이트가, 국제부흥개발은행을 다룬 제2위원회는 케인스가 이끌었다. 회의는 날짜를 사흘 늘려 7월 22일 최종 의정서에 서명했다. 모겐소는 폐회사에서 두 기구의 설립이 경제 민족주의의 끝을 뜻한다고 말했다. 각국이 국익을 지키되 무역 블록과 경제적 세력권을 그 수단으로 삼지 않게 되리라는 뜻이었다. 4 3
협정의 핵심은 「고정되었지만 조정할 수 있는」 환율이었다. 각국은 자국 통화의 기준 가치(평가)를 달러로 정하고, 시장 환율이 평가의 위아래 1% 안에 머물도록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고팔아야 했다. 미국은 따로 달러를 금 1온스 = 35달러에 묶고, 외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내미는 달러를 그 값에 금으로 바꾸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다른 통화는 달러에, 달러는 금에 묶인 이중 구조가 생겼다. 환율을 지키려면 각국은 개입에 쓸 외환을 넉넉히 쌓아 두어야 했고, 같은 까닭에 나라 사이의 자본 이동이 너무 커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협정은 무역 대금처럼 경상거래에 쓰이는 통화의 교환은 자유롭게 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자본 이동을 각국이 통제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허용했다. 「근본적 불균형」이 있을 때만 평가를 바꿀 수 있었고, 10%를 넘는 변경에는 기금의 동의가 필요했다. 다만 근본적 불균형이 무엇인지는 끝내 정의되지 않았다. 2 4 5
국제통화기금은 회원국이 금과 자국 통화로 낸 출자금(쿼터)을 모아 적자국에 외화를 빌려주는 기금이었다. 원래 쿼터 총액은 88억 달러로 정해졌고, 출자의 25%는 금이나 금으로 바꿀 수 있는 통화, 75%는 자국 통화로 냈다. 표결권도 1국 1표가 아니라 쿼터에 비례했다. 미국은 처음에 전체 쿼터의 3분의 1을 쥐어 혼자서도 협정 개정을 막을 수 있었고, 본부도 워싱턴에 두었다. 국제부흥개발은행(세계은행)은 수권 자본 100억 달러로 전후 재건과 개발 자금을 빌려주게 되었다. 기금은 경상수지 적자에만 돈을 빌려줄 수 있고 재건 자금에는 쓸 수 없었다. 협정은 회원국의 80% 쿼터에 해당하는 비준이 모인 1945년 12월 27일 발효했고, 기금은 1947년 3월 1일 첫 거래를 시작했다. 이 체제가 경제 정책을 묶는 방식은 금본위제와 닮았다. 금이 빠져나가는 나라는 금리를 올려 자금을 끌어들이고 통화량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2 4 6 5
소련은 왜 서명하고도 가입하지 않았나?
루스벨트와 모겐소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의 다섯 대국이 모두 브레턴우즈 체제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소련 대표단은 회의에 참석해 최종 의정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까지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1946년 3월 8~18일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에서 열린 두 기구의 창립 총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소련은 금과 나란히 달러를 체제의 중심에 두는 것을 거부했고, 새 기구들을 「월가의 지점」이라 불렀다. 소련은 끝내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그 후신인 러시아 연방이 1992년에 가입했다. 서방 문헌은 소련의 정확한 동기를 추측의 대상으로 남겨 둔다. 체제 설계자들도 세계의 알려진 금 보유고 가운데 상당 부분이 소련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4 2
갈라섬은 1947년 마셜 플랜을 두고 굳어졌다.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외무상 회의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유럽 경제를 짤 운영위원회가 각국 주권을 침해하고 유럽을 두 국가군으로 가를 것이라며 영국·프랑스 안을 거부했다(「몰로토프의 파리 회담 성명」).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폴란드는 원조에 관심을 보였지만, 원조에는 교환 가능한 통화와 시장경제라는 조건이 따랐고 스탈린은 7월 이들 정부에 파리 회의에서 빠지라고 지시했다. 이어 1949년 1월 5~8일 모스크바 경제 회의에서 소련·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가 상호경제원조회의(코메콘)를 세워 마셜 플랜과 유럽경제협력기구(OEEC)에 맞섰다. GATT의 무차별 무역 원칙은 사회주의 연대와 맞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코메콘 나라들은 의미 있는 환율도 시장경제도 없이 세계 시장 가격을 기준으로 삼되 그 가격을 몇 년씩 고정해 계획에 맞추었고, 결제는 뒤에 도입된 「이전 루블」로 했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달러와 시장 환율로 묶인 세계라면, 코메콘은 계획끼리 맞추는 별도의 세계였다. 국제통화기금 안에서도 같은 선이 그어졌다. 폴란드는 1950년 탈퇴했고(소련의 압력이 있었다고 한다) 1986년에 돌아왔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1954년 요구된 자료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명되었다가 1990년에 재가입했다. 6 7 2
소련 경제학 안에서는 전후 자본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그 자체로 논쟁거리였다. 1927년부터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를 이끈 예브게니 바르가는 1946년 저서 『2차 세계대전 종전기 자본주의의 경제적 변화』에서, 서방 정부들이 전쟁 동안 자본주의 경제를 관리하는 큰 권한을 쌓았고 그것이 이 경제들을 사회주의 경제에 가깝게 만들어 더 오래 버티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방의 소련 관찰자들은 그를 마셜 플랜의 「옹호자」로까지 불렀지만, 자본주의가 극단적이고 어쩌면 마지막일 공황으로 가고 있다고 믿던 소련의 보수파에게 이 함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7년 5월 경제학자 회의가 그의 책을 비판했고, 그의 연구소는 문을 닫고 고스플란에 흡수되었다. 국가가 관리하는 전후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인정하느냐는 물음은 냉전기 소련 경제학에서 정치적 무게를 지녔다. 8
체제는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돌아갔나?
설계자들은 길어야 5년의 과도기를 거치면 체제가 제대로 돌아가리라 예상했다. 현실은 달랐다. 전쟁 뒤 미국은 세계 금의 약 65%인 260억 달러어치를 쥐고 막대한 무역 흑자를 냈고, 폐허가 된 유럽은 식량과 연료, 기계를 미국에서 사 올 달러가 없었다. 이른바 「달러 갭」이다. 국제통화기금의 신용은 서유럽의 거대한 적자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작았고, 기금은 재건 자금을 빌려줄 수도 없었다. 세계은행도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은 미국이 낸 5억 7천만 달러뿐이었고, 채권을 팔 곳이 보수적인 월가뿐이어서 상환이 확실할 때만 대출했다. 1947년이면 두 기구 스스로 국제 통화 체제의 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세계은행의 첫 대출은 1947년 5월 9일 프랑스에 준 2억 5천만 달러였다. 요청액의 절반이었고 균형 예산과 세계은행 채무의 우선 상환이라는 엄격한 조건이 붙었으며, 미국 국무부는 그에 앞서 프랑스 정부에 공산당 각료를 내보내야 한다고 알렸다. 프랑스 정부는 그렇게 했고 대출은 몇 시간 만에 승인되었다. 2 9 5
미국은 대출 대신 대부분 무상 원조로 이 틈을 메웠다.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1947년 6월 5일 하버드 대학 연설에서 유럽이 앞으로 3~4년 동안 필요한 외국 식량과 필수품이 지불 능력을 훨씬 넘어서므로 상당한 도움이 없으면 매우 심각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악화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설에 앞서 국무부 안에서 정책기획실과 클레이턴 차관이 쓴 각서가 원조의 골격을 잡았다(「마셜 플랜의 두 각서」). 유럽부흥계획(마셜 플랜)으로 미국은 1948~1954년 서유럽 16개국에 170억 달러를 무상으로 주었다. 1947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은 원조와 군사비, 해외 투자로 일부러 달러를 밖으로 흘려보냈고, 1950년부터는 국제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하려고 국제수지 적자를 감수했다. 미국은 또 유럽 나라들이 달러에 대해 자기 통화를 평가절하하도록 권해 수출로 달러를 벌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 나라들은 디플레이션을 견디며 교환성을 회복해야 했을 것이다. 2 5
무역 쪽의 세 번째 기둥은 계획대로 서지 못했다. 브레턴우즈 회의는 재무부 대표들의 회의여서 무역 협정은 다루지 않았고, 대신 각국에 무역 장벽을 줄이는 협정을 맺으라고 권고했다. 그 결과 고용·상품 협정·투자 규칙까지 아우르는 국제무역기구(ITO) 헌장이 1948년 3월 아바나에서 채택되었으나, 미국 의회의 반대로 1950년 트루먼 정부가 비준 요청을 포기하면서 기구는 생기지 못했다. 그사이 23개국이 1947년 10월 30일 제네바에서 맺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임시 협정으로 1948년부터 세계 무역의 규칙이 되었다. 첫 협상에서 4만 5천 건의 관세 양허가 세계 무역의 약 5분의 1에 이르는 100억 달러어치 교역에 적용되었다. 유럽 통화의 경상거래 교환성은 1958년 12월에야 회복되었고, 그때부터 브레턴우즈 체제는 설계대로 완전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엔은 1964년에 뒤따랐다. 10 11 12 4 2
「황금기」의 고성장은 무엇이 떠받쳤나?
브레턴우즈 체제가 작동한 시기는 서방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고성장기와 겹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실질 국내총생산은 1950년대에 해마다 평균 4% 넘게, 1960년대에는 5% 가까이 늘었다. 1970년대의 3%, 1980년대의 2%와 견주면 두드러진다.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들이 오히려 더 빨리 자랐다. 서독의 「경제 기적」에서는 1950~1957년 공업 생산이 두 배가 되고 국민총생산이 해마다 9~10%씩 늘었으며, 프랑스는 1947~1973년 평균 5% 성장한 이 시기를 「영광의 30년」이라 부른다. 1950년 미국인 평균 소득의 55%이던 프랑스인의 평균 소득은 1973년 80%가 되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보급 기지가 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시작했다. 경제사가들은 대체로 이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를 1950년 무렵에서 1973년까지로 잡는다. 13
성장의 바탕에는 「포드주의」라 불리는 생산과 소비의 짝이 있었다. 헨리 포드는 1908년 모델 T를 내놓고 이동식 조립 라인으로 표준화된 차를 대량으로 만들어 값을 떨어뜨렸으며, 1914년 노동자 대부분의 임금을 두 배 넘게 올리는 일당 5달러를 내걸었다. 복잡한 작업을 단순 작업으로 쪼개 숙련이 필요 없게 만들고, 그 대신 노동자가 자기가 만든 물건을 살 수 있을 만큼 임금을 주는 방식이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1934년 옥중 수고 「아메리카니즘과 포드주의」에서 이 말을 쓴 뒤 주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쓰였다. 1970년대 프랑스의 조절 학파는 전후 황금기를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맞물린 「포드주의 축적 체제」로 설명했다. 생산성이 오르면 임금이 따라 오르고, 늘어난 소득이 수요와 투자를 다시 늘리는 「선순환」이 화폐·임금·경쟁·국가·국제 체제의 형태 같은 제도의 묶음(조절 양식)으로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14 15 16
국가의 역할도 달라졌다. 영국의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는 결핍·질병·무지·불결·나태의 「다섯 거인」과 싸우자며, 일하는 나이의 모든 사람이 국민보험료를 내고 아프거나 실업하거나 은퇴하면 급여를 받는 체계를 제안했다. 1945년 선거에서 이긴 애틀리 노동당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1948년 7월 5일 국민보험법·국민부조법·국민보건서비스법을 시행해 영국 복지국가의 뼈대를 세웠다. 베버리지는 실업률 3% 이하의 완전고용을 이 복지 계획의 축으로 보았다. 미국은 1946년 고용법으로 완전고용·완전생산·물가 안정을 정부 목표로 삼았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이런 수요 관리 정책이 전후 호황을 낳았다고 보며, 다른 쪽에서는 거대한 군비 지출이 세계 경제를 안정시켰다는 「영구 군비 경제」론, 곧 「군사 케인스주의」로 설명한다. 낮은 명목 금리와 인플레이션으로 전쟁 부채의 실질 부담을 덜어 준 「금융 억압」과 값싼 석유도 원인으로 꼽힌다. 17 18 13
성장의 몫이 어떻게 나뉘었는가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미국에서는 성장이 계층 사이에 비교적 고르게 돌아갔고, 이를 1950년대에 정점에 이른 노동조합의 힘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 서독에서는 노동조합이 임금 인상을 미루고 파업을 줄이며 기술 현대화를 지지했고, 대기업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를 두는 공동결정제와 함께 이것이 오랜 성장에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마르크스주의 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전후 질서의 바탕에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일종의 계급 타협」이 있었다고 보았다. 국내의 평화를 지키려면 국가가 완전고용과 경제 성장, 시민의 복지에 힘을 쏟고, 필요하면 시장에 개입하거나 시장을 대신해야 한다는 데 세계적인 합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보수당도 이 노선을 받아들여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고, 이를 「전후 합의」라 불렀다. 세계 쪽에서 보면 동구권도 같은 시기에 빠르게 자랐다. 소련은 1950년대 전쟁 폐허를 복구한 뒤 10년 동안 빠른 성장을 이어 가 첫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1960년대 중반 성장이 느려지다가 1960년대 후반 8차 5개년 계획 동안 다시 빨라졌다. 황금기는 1970년대 초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 1973년 석유 위기, 1973~1975년 경기 후퇴와 함께 끝났다. 13 19
달러는 어떻게 「부족」에서 「과잉」으로 바뀌었나?
브레턴우즈 체제의 국제 준비 자산은 결국 금과 달러였다. 그런데 세계 무역이 1950년대 내내 빠르게 늘어나는 동안 금 생산은 거의 늘지 않았다. 각국이 환율을 지키는 데 쓸 준비금이 늘어나려면 미국이 국제수지 적자를 내어 달러를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미국의 국제수지는 1950년 적자로 돌아섰고, 1958년 유럽 통화가 교환성을 되찾은 뒤에는 미국 기업과 투자자들의 대규모 유럽 투자로 적자가 커지며 금 유출이 빨라졌다. 1959년이면 해외에 풀린 달러가 그것을 뒷받침하는 미국의 금보다 많아졌고, 1961년에는 외국이 가진 달러 청구권이 미국 정부의 금 보유량을 넘었다. 미국이 약속대로 1온스 35달러에 금을 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약속이 깨질 가능성이 보이는 순간, 달러를 가진 쪽에서는 먼저 금으로 바꾸는 편이 유리해진다. 은행의 예금 인출 사태와 같은 구조다. 2 5 20 21
벨기에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은 1959년 미국 의회 증언과 1960년의 분석에서 이 모순을 짚었다. 미국이 적자를 멈추면 세계는 유동성을 잃어 무역과 성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체제가 멈춘다. 미국이 적자를 계속 내면 쌓이는 달러가 금 태환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어 준비 통화로서의 달러가 흔들린다. 이것이 훗날 「트리핀 딜레마」로 불렸다. 연방준비제도 역사 서술의 표현으로는 「달러 준비가 더 늘지 않으면 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더 늘면 체제는 불안정해진다」. 케인스가 방코르를 제안한 것은 바로 한 나라의 통화가 세계의 준비 통화가 될 때 생기는 이 어려움을 내다본 것이었다. 1960년 가을 미국 대통령 선거전 와중에 런던 금 시장에서 금값이 1온스 40달러를 넘어 공식 가격 35달러와 벌어지자, 차익을 노린 금 매입의 유혹은 더 커졌다. 2 22 20 21 23
같은 시기 미국 밖에는 「유로달러」라는 새 달러 시장이 자랐다. 유로달러는 미국 바깥의 은행에 맡겨진 달러 예금으로, 미국 정부의 규제와 예금보험 밖에 있었다. 기원담 가운데 하나는 헝가리 혁명 뒤 자산 동결을 걱정한 소련이 1957년 2월 28일 런던의 모스크바 나로드니 은행으로 80만 달러를 옮긴 일이다. 이름은 파리에 있던 소련계 은행 BCEN의 전신 주소 「유로방크」에서 왔다. 유로달러 시장은 1957년 이전 사실상 없던 데서 1972년 800억 달러로 커졌다. 큰돈이 국경을 넘나들자 각국이 자본 이동을 통제하려던 노력은 갈수록 무력해졌다. 공식 환율이 시장 사정과 동떨어질수록, 약한 통화에서 강한 통화로 돈을 옮겼다가 평가 조정이 없으면 손해 없이 돌아오는 투기는 사실상 위험이 없는 내기가 되었다. 24 2
1960년대의 금 방어는 어떻게 무너졌나?
케네디·존슨 정부는 35달러를 지키려고 여러 임시방편을 썼다. 1961년 11월 1일 미국과 영국·서독·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이탈리아·프랑스의 중앙은행이 「런던 금 풀」을 만들었다. 런던 시장의 금값이 오르면 모아 둔 금을 팔고 내리면 사들여 시장 가격을 35달러 근처에 묶는 장치로, 미국이 금의 절반을 댔다. 1962년부터 연방준비제도는 외국 중앙은행과 통화 스와프(서로 상대 통화를 일정 기간 빌려주는 약정)를 맺어 그들이 원치 않는 달러를 금으로 바꾸지 않게 했다. 1962년 말 스와프 상대는 9개 중앙은행, 총액은 9억 달러였다. 미국은 해외 직접투자와 은행의 해외 대출도 제한했다. 이런 조치들은 국제수지가 스스로 고쳐질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지만, 연방준비제도 역사 서술의 표현대로 「피할 수 없는 일을 미루는 것」이었다. 25 23 5 26
가장 정면으로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프랑스였다. 재무장관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이 체제를 「미국의 과도한 특권」이라 불렀다. 다른 나라는 100달러를 얻으려면 100달러어치 물건을 내놓아야 하지만, 미국은 지폐를 찍어 그 값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58년부터 드골의 경제 고문이던 자크 뤼에프는 1960년대에 금본위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달러를 준비 통화로 쓰면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1965년 2월 샤를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가 가진 달러 준비를 공식 가격에 금으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1966년 외국 중앙은행이 가진 달러는 140억 달러였는데, 미국의 금 보유고는 132억 달러였고 그 가운데 외국 보유분에 쓸 수 있는 것은 32억 달러뿐이었다. 미국은 서독 등을 설득해 달러를 금으로 바꾸지 않게 했지만 프랑스는 예외였다. 1967년 6월 프랑스는 금 풀에서 빠지고 많은 금을 뉴욕에서 파리로 옮겼다. 27 28 29 5 23
마지막 방아쇠는 파운드였다. 1967년 11월 18일 영국은 파운드를 14.3% 평가절하했고, 곧이어 금 매입 사태가 다시 일어났다. 1968년 3월 14일 목요일 저녁 미국의 요청으로 영국은 이튿날 런던 금 시장을 닫았고, 금 시장은 2주 동안 열리지 않았다. 그 주말 워싱턴 회의를 거쳐 미국 의회는 3월 18일 달러 발행에 금 준비를 두게 한 요건을 없앴고, 런던 금 풀은 끝났다. 남은 일곱 회원은 「이중 가격제」로 옮겼다. 중앙은행끼리의 결제에서는 금을 35달러로 계속 쓰되 민간 시장에는 금을 팔지 않기로 한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의 한 역사 서술은 이로써 체제가 금값이 고정된 사실상의 금본위제에서 「달러 본위제」로 바뀌었다고 본다. 그에 앞서 국제통화기금은 1967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금과 달러를 보충할 새 준비 자산인 특별인출권(SDR)에 합의했고, SDR은 1969년 실제로 만들어졌다. 1 SDR은 금 0.888671그램, 당시 1달러에 해당했다. 23 25 5 6 2
그사이 미국 안의 사정이 압력을 키웠다. 1964년 케네디 감세가 통과되면서 실업률 4%의 완전고용을 국가 목표로 삼는 정치적 합의가 섰고, 연방준비제도는 국제수지를 이유로 금리를 올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존슨 정부는 베트남 전쟁과 「위대한 사회」 사회 정책의 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하지 않았고,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1965년 초 2% 미만에서 1969년 말 6%로 올랐다. 고정 환율 아래에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그대로 다른 나라로 옮겨 갔다. 외국 중앙은행은 쏟아져 들어오는 달러를 사들여 환율을 지켜야 했고, 그 대가로 자국 통화가 풀려 물가가 올랐다. 1960년대 말 달러는 고평가되고 마르크와 엔은 저평가되었지만, 서독과 일본은 수출이 비싸지는 절상을, 미국은 신뢰가 무너지는 절하를 피하려 했다. 5 21 2
체제는 어떻게 끝났나?
1971년 5월 서독이 더는 달러를 사들이지 않겠다며 마르크를 띄웠고, 8월 9일 스위스가 뒤따랐다. 1971년 상반기에만 220억 달러의 자산이 미국을 빠져나갔고, 8월 11일에는 체제를 함께 세운 영국마저 30억 달러어치 금을 요구했다. 8월 13~15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존 코널리 재무장관, 아서 번스 연방준비제도 의장 등과 비밀 회의를 열었고, 8월 15일 일요일 밤 텔레비전 연설에서 「새 경제 정책」을 발표했다. 90일 동안의 임금·물가 동결, 모든 과세 수입품에 대한 10% 추가 관세, 그리고 외국 중앙은행에 대한 달러의 금 태환 정지, 이른바 「금 창구 닫기」였다. 국제 통화 체제의 다른 회원국과도, 자국 국무부와도 상의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 「닉슨 쇼크」의 배경과 그것이 연 1970년대의 위기는 따로 다룬다. 28 26 25 2 30
닉슨은 다른 나라들이 통화를 절상하기를 바랐지만 달러를 금에 대해 절하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몇 달의 협상 끝에 1971년 12월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열린 10개국 그룹(G10) 회의가 「스미스소니언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금값을 1온스 38달러로 올려 달러를 금에 대해 약 8%(달러 가치로는 7.9%) 내렸고, 엔은 16.9%, 마르크는 13.6% 절상되었다. 환율 변동 폭은 위아래 1%에서 2.25%로 넓어졌고, 미국은 추가 관세를 거두었다. 다른 주요 통화에 대한 달러의 평균 절하 폭은 약 10.7%였다. 닉슨은 이를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통화 협정」이라 불렀지만, 금 태환이 없는 고정 환율은 오래가지 못했다. 21 31 26
연방준비제도는 국내 완전고용을 위해 금리를 계속 내렸고, 기대했던 달러의 귀환 대신 유출이 이어졌다. 외국 중앙은행들은 밀려드는 달러를 계속 사들이며 인플레이션 압력을 떠안았다. 1972년 하반기 잦아들던 투기 압력은 1973년 초 다시 거세졌고, 2월 달러는 다시 10% 절하되었다. 몇 주 뒤 달러가 또 압박을 받자 이번에는 아무도 체제를 떠받치려 하지 않았다. 1973년 3월 10개국 그룹은 유럽공동체 6개국이 서로의 통화를 묶은 채 달러에 대해 함께 변동하는 방안을 승인했고, 일본도 엔을 띄웠다. 이로써 주요 공업국 사이의 고정 환율 체제는 사실상 끝나고 변동 환율 시대가 열렸다. 체제의 종언은 1976년 자메이카 협정에서 국제통화기금 협정을 고치며 공식화되었다. 5 26 31 2 6
브레턴우즈 체제를 어떻게 평가하나?
주류 경제사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설명은 배리 아이켄그린의 것이다. 그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까닭을 세 가지로 꼽았다. 낮은 국제 자본 이동성, 엄격한 금융 규제, 그리고 미국과 달러의 압도적인 경제·금융적 지위다. 이 셋이 모두 1960년대에 흔들렸다. 유로달러 시장과 다국적 은행이 자본 통제를 비켜 갔고, 유럽과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으면서 1970년 미국이 가진 국제 준비 자산은 16% 아래로 줄었다. 체제가 지속된 기간의 금융 안정도 두드러졌다. 1945~1971년의 27년 동안 세계에서 일어난 금융 위기는 38건이었지만, 1973~1997년의 24년 동안에는 139건이었다. 이 대비는 자본 이동을 묶어 둔 체제와 그것을 푼 뒤의 세계를 견주는 근거로 자주 쓰인다. 2 13
케인스주의 쪽의 평가는 체제의 설계 원리에 무게를 둔다. 자본 통제와 조정 가능한 환율은 각국이 높은 고용을 위한 국내 정책의 자율성을 지키면서도 무역을 열어 둘 수 있게 했다. 영국의 완전고용과 미국의 자유무역을 한데 묶은 셈이다. 미국 정치학자 존 러기는 1982년 이 질서를 「배태된 자유주의」라 불렀다. 칼 폴라니가 19세기에 사회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본 시장을 다시 국가의 규제 틀 안에 묻어 넣었다는 뜻이다. 케인스와 화이트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각국의 독자적 경제 정책과도, 반고정 환율과도 부딪친다고 보았고, 그래서 자본 통제가 허용되었다. 다른 한편 케인스가 요구한 흑자국의 조정 의무가 빠지면서 조정의 짐이 적자국에만 지워졌다는 비판이 남았다. 2008년 금융위기 뒤 중국인민은행 총재 저우샤오촨은 체제가 무너진 까닭 가운데 하나로 케인스의 방코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꼽으며 특별인출권을 세계 준비 통화로 키우자고 제안했다. 19 4 6 20
비판적 시각에서는 브레턴우즈를 무엇보다 미국 헤게모니,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의 제도로 읽는다. 체제가 달러에 기대면서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 적은 제약 속에서 무역·재정 적자를 낼 수 있었고, 다른 나라들이 달러를 쥐고 있는 한 군사비와 대외 원조 같은 정치적 목적의 해외 지출을 국제수지 걱정 없이 할 수 있었다. 영국 쪽에서도 체제가 금융 권력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음을 보여 준다고 보았다. 잉글랜드 은행의 한 고위 관리는 브레턴우즈 합의를 「전쟁 다음으로 영국이 맞은 가장 큰 타격」이라 불렀다. 남반구의 정책 담당자들은 이 체제를 국가 주도 발전 전략에 맞지 않는 「북반구 주도의 장치」라고 비판했고, 1980년대 이후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대출 조건은 개발도상국에 무거운 짐을 지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소련이 붙인 「월가의 지점」이라는 이름은 이런 비판의 가장 이른 형태였다. 2 32 4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1968년 금 위기 한가운데서 이 체제를 분석했다. 그는 1929~1932년 같은 파국이 되풀이될 것을 두려워한 자본주의 나라들이 브레턴우즈에서 통화량을 금 보유고에 자동으로 맞추는 장치를 없앤 「금환본위제」로 옮겨 갔다고 보았다. 그러나 달러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공황을 피하려는 「신자본주의」의 수단들, 곧 군비와 전쟁 정책, 민간의 신용 거품, 국가·기업·가계의 부채 증가에 있었다. 그래서 달러는 미국과 자본주의 세계의 공황에 맞서는 무기이면서 동시에 국제 통화 체제의 준비 통화라는, 풀 수 없는 모순을 안았다고 그는 썼다. 만델은 달러에 대한 불신이 미국 자본의 유럽 공장 매입 때문이라는 드골파의 주장을 「신화」라고 물리치고, 그 원천을 베트남 전쟁과 여러 독재 정권에 대한 군사 원조 같은 미국 정부의 해외 지출에서 찾았다. 그 달러는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제국주의 체제 전체」를 유지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33 34
결과
1973년 3월 주요 통화가 달러에 대한 고정을 버리고 변동환율로 넘어가면서 브레턴우즈 고정환율 체제는 끝났고, 1976년 자메이카 협정이 이를 IMF 협정문에 반영했다. 금은 공식 통화 체제에서 물러났지만 달러는 금 없이도 세계의 준비 통화로 남았다. IMF와 세계은행은 살아남아 국제수지 위기와 개발도상국 대출로 역할을 바꾸었고, 1980년대에는 구조조정 조건을 붙인 대출로 비판받았다. GATT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로 이어졌다. 자본 통제가 풀리면서 금융위기는 훨씬 잦아졌고, 고성장과 완전고용의 황금기도 1970년대의 위기 속에 끝났다.
연표와 지도
- 1941.08대서양 헌장
루스벨트와 처칠이 대서양 회담을 마치며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넷째 항은 모든 나라가 무역과 원자재에 평등하게 접근하게 한다고 약속했다.
- 11942.02무기대여 협정 제7조
영국은 미국의 무기대여 원조를 받는 대가로 국제 무역의 모든 차별을 없애고 무역 장벽을 낮추는 데 힘쓰기로 했다.
- 1944.04.21국제통화기금에 관한 전문가 공동성명
미국과 영국 관리들이 협상해 다듬은 「국제통화기금 설립에 관한 전문가 공동성명」이 연합국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 21944.07.01브레턴우즈 회의 개막
연합국 44개국 대표 730명이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의 마운트워싱턴 호텔에 모였다. 모겐소 재무장관이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 31944.07.22브레턴우즈 최종의정서 서명
예정보다 사흘 늦게 회의가 끝나며 국제통화기금과 국제부흥개발은행의 협정을 담은 최종의정서에 서명했다. 소련 대표단도 서명했다.
- 41945.12.27브레턴우즈 협정 발효
쿼터의 80%를 차지하는 나라들의 비준이 모여 협정이 발효했다. 소련은 비준하지 않았다.
- 51946.03.08–
18 서배너 창립 총회조지아주 서배너에서 IMF와 세계은행의 창립 총회가 열렸다(3월 18일까지). 소련은 참석하지 않았다.
- 61947.03.01IMF 업무 시작
국제통화기금이 금융 업무를 시작했다. 5월 8일 프랑스가 처음으로 기금에서 돈을 빌렸다.
- 71947.05.09세계은행 첫 대출
세계은행이 프랑스에 2억 5천만 달러 대출을 승인했다. 승인 전 미국 국무부는 공산당 각료를 먼저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 81947.06.05마셜의 하버드 연설
조지 마셜 국무장관이 하버드 대학 연설에서 유럽이 지불 능력을 넘는 식량과 필수품을 들여와야 하므로 상당한 원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91947.07.02몰로토프의 마셜 플랜 거부
파리 3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몰로토프가 영국·프랑스 안을 거부하며, 유럽 경제를 조직할 운영위원회가 각국 주권을 짓밟고 유럽을 두 진영으로 가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 101947.10.30GATT 서명
23개국이 제네바에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은 1948년 1월 1일부터 잠정 적용되었다.
- 111949.01.05–
08 코메콘 창설모스크바 경제 회의에서 소련·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가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세웠다(1월 8일까지).
- 1958.12유럽 통화의 경상 태환 회복
유럽 각국 통화가 경상거래에서 자유롭게 바꿀 수 있게 되면서 브레턴우즈 체제가 설계대로 온전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 121960.10런던 금값 40달러 돌파
미국 대통령 선거전 속에 런던 시장의 금값이 공식 가격 35달러를 크게 넘는 온스당 40달러를 넘었다.
- 131961.11.01런던 금 풀 결성
미국·영국·서독·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이탈리아·프랑스 중앙은행이 금을 모아 런던 금값을 35달러 가까이 묶기로 했다. 금의 절반은 미국이 댔다.
- 141965.02드골의 금 태환 선언
샤를 드골 대통령이 프랑스가 보유한 달러 준비금을 공식 가격으로 금과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 151967.06프랑스의 금 풀 탈퇴
프랑스가 런던 금 풀에서 빠지고 뉴욕에 있던 금을 대량으로 파리로 옮겼다.
- 161967.11.18파운드 평가절하
영국이 파운드를 14.3% 평가절하했다. 투기의 화살은 다음 차례로 달러로 향했다.
- 171968.03.15런던 금 시장 폐쇄
미국의 요청으로 영국이 런던 금 시장을 닫았다. 3월 17일 워싱턴 회의 뒤 금 풀은 끝나고, 중앙은행끼리만 35달러로 금을 쓰는 「이중 가격제」로 바뀌었다.
- 181969특별인출권(SDR) 창설
1967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합의된 새 준비 자산 특별인출권이 IMF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 1971.05서독 마르크 변동
서독이 달러를 더 사들이는 대신 마르크를 변동시켰다. 8월 9일 스위스가 뒤따랐다.
- 191971.08.15닉슨의 「신경제정책」 발표
닉슨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 비밀 회의 뒤 텔레비전 연설로 임금·물가 동결, 10% 수입 과징금, 달러의 금 태환 정지를 발표했다.
- 201971.12스미스소니언 협정
10개국 그룹이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협회에서 금값을 온스당 38달러로 올리고 주요 통화를 재조정했으며, 변동 폭을 2.25%로 넓혔다.
- 1973.02달러의 두 번째 평가절하
1973년 초 투기 압력이 다시 일자 달러가 10% 더 평가절하되었다.
- 1973.03주요 통화의 변동환율 이행
10개국 그룹이 유럽공동체 6개국의 달러 대비 공동 변동을 승인했고, 일본도 엔을 변동시켰다. 브레턴우즈 고정환율은 사실상 끝났다.
관련 인물 18명
지도부5
미국 측 안(화이트안)을 짜고 브레턴우즈 회의 IMF 위원회 의장으로 회의를 주도했다. 1946~1947년 IMF 미국 이사를 지냈다.
영국 대표단 단장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국제청산동맹과 방코르를 제안했고 브레턴우즈 회의의 세계은행 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미국 재무장관헨리 모겐소1891–1967브레턴우즈 회의 의장. 폐막 연설에서 두 기관의 설립이 경제 민족주의의 끝을 뜻한다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1945대서양 헌장을 발표했고, 5대 강국을 모두 브레턴우즈 체제에 넣으려 했다.
미국 대통령리처드 닉슨1913–19941971년 8월 15일 달러의 금 태환을 정지했고, 그해 12월 스미스소니언 협정을 받아들였다.
참여4
1947년 6월 5일 하버드 연설로 유럽 원조를 제안해 달러 갭을 메운 마셜 플랜의 길을 열었다.
미국 대통령존 F. 케네디1917–1963그의 임기 첫해인 1961년 런던 금 풀이 만들어졌고, 1962년부터 연준의 통화 스와프가 시작되었다.
미국 대통령린든 B. 존슨1908–1973베트남 전쟁과 위대한 사회 정책의 비용을 세금으로 대지 않아 인플레이션과 달러 유출이 커졌다.
영국 총리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그의 노동당 정부가 베버리지 보고서를 받아들여 1948년 복지국가의 뼈대가 된 법들을 시행했다.
반대 · 저항5
1947년 7월 2일 파리 회의에서 마셜 플랜의 공동 계획을 주권 침해라며 거부했다.
소련 지도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소련은 최종의정서에 서명하고도 비준하지 않았고, 1949년 동구권과 함께 코메콘을 세웠다.
드골의 경제 자문자크 뤼에프1896–1978달러를 준비 통화로 쓰는 체제가 세계적 인플레이션을 낳는다며 금본위 복귀를 주장했다.
프랑스 재무장관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1926–2020달러의 지위를 미국의 「터무니없는 특권」이라 불렀다.
프랑스 대통령샤를 드골1890–19701965년 2월 달러 준비금의 금 태환을 선언했고, 1967년 프랑스를 금 풀에서 빼냈다.
목격 · 기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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