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1929년 월가의 주가 폭락은 어떻게 10년 동안 이어진 세계적 공황이 되었나? 은행 붕괴와 디플레이션, 금본위제와 관세 전쟁은 각각 어떤 역할을 했나? 미국·영국·독일·일본은 어떤 길로 공황에서 빠져나오려 했고, 계획경제의 소련과 코민테른은 이 위기를 어떻게 읽었나? 그 원인을 두고 경제학자들의 해석은 어떻게 갈리나?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의 폭락 뒤 미국에서는 1930~1933년 네 차례의 은행 공황으로 9천여 개 은행이 쓰러지고 통화량과 물가가 무너져 실업률이 25%에 이르렀다. 금본위제는 공황을 세계로 옮겼다. 1931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은행 위기, 영국의 금본위 이탈이 이어졌고, 스무트-홀리 관세법과 보복 관세, 통화 블록으로 세계 무역은 3분의 2가 줄었다. 금본위를 일찍 떠난 나라일수록 빨리 회복했다. 미국은 뉴딜로 은행과 노동·사회보장 제도를 바꾸었고, 일본은 다카하시 재정으로, 나치 독일은 노동조합 해체와 재무장으로 실업을 줄였다. 소련은 계획경제의 고속 공업화를 공황과 대비했고, 코민테른은 이를 자본주의 붕괴의 「제3기」로 읽었다.
1929년 10월 월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1920년대 미국은 자동차와 전화, 전기 같은 새 기술이 퍼지며 「광란의 20년대」라 불린 호황을 누렸다. 호황의 이윤 상당 부분은 주식 투기로 흘러갔다. 주식을 살 때 값의 10%만 내고 나머지를 증권사에서 빌리는 신용 거래가 흔했고, 산 주식이 곧 빚의 담보였다. 주가가 오르는 동안에는 빚을 내 더 사는 것이 이득이었으므로 빌린 돈이 증시로 쏟아졌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1921년 8월 63에서 1929년 9월 3일 381로 여섯 배가 되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는 투기가 생산에 쓰일 자금을 빨아들인다고 보고 1929년 8월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할인율을 6%로 올렸다. 금본위제로 각국 금리가 묶여 있었으므로 이 인상은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도 금리를 올리게 만들어 세계 경기를 식혔다. 1 2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주가가 개장과 함께 11% 떨어졌다. 대형 은행가들이 공개적으로 주식을 사들여 진정시키려 했지만 실패했고, 28일 「검은 월요일」에 다우지수는 13% 가까이, 이튿날 「검은 화요일」에 다시 12% 가까이 떨어졌다. 신용으로 주식을 산 투자자들은 증권사의 추가 담보 요구를 감당하지 못해 주식을 내던졌고, 그 매도가 주가를 더 떨어뜨렸다. 하락은 1932년 7월 8일 다우지수 41.22로 바닥을 칠 때까지 이어져 정점보다 89% 낮아졌다. 다우지수가 1929년 수준을 되찾은 것은 1954년 11월이었다. 2 1
그러나 주가 폭락 자체가 대공황은 아니었다. 경기 후퇴는 이미 1929년 8월에 시작되었고, 폭락은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자동차 같은 값비싼 물건을 할부로 사던 것을 멈추게 해 그 후퇴를 깊게 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폭락 직후 국채를 사들이고 대출을 넓혀 은행에 자금을 대 주었고, 덕분에 폭풍의 한가운데 있던 뉴욕의 은행들은 문을 닫지 않았다. 연방준비제도 역사 서술은 1930년 가을이면 회복이 다가오는 듯 보였으나, 금융 체계의 다른 쪽에서 터진 문제가 짧고 급한 경기 후퇴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을 미국 역사상 가장 길고 깊은 불황으로 바꾸었다고 정리한다. 그 문제가 은행이었다. 1 3
은행은 왜 줄줄이 무너졌고, 물가 하락은 왜 재앙이었나?
은행은 예금의 일부만 현금으로 두고 나머지는 대출로 내준다. 그래서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으러 오면 멀쩡한 은행도 현금이 바닥난다. 이웃 은행이 망했다는 소문만으로 예금자들이 몰려가 돈을 빼는 것을 「뱅크런」(예금 인출 사태)이라 한다. 1930년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에 가입한 은행이 8천여 곳, 가입하지 않은 은행이 1만 6천 곳 가까이 있었고, 비가입 은행은 위기 때 중앙은행의 돈을 빌릴 길이 막혀 있었다. 1930년 11월 테네시주 내슈빌의 금융 지주회사 콜드웰 앤드 컴퍼니가 무너지자 거래 은행들이 연쇄로 문을 닫았고, 12월 11일에는 뉴욕시 4위 은행인 뱅크 오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가 예금자들의 쇄도 끝에 폐쇄되었다. 1930년 11~12월에만 608개 은행이 문을 닫았다. 4 2
연방준비제도의 대응은 지역마다 달랐다.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은 위기에 빠진 은행에 돈을 서둘러 빌려주었고 그 지역의 경기 후퇴는 누그러졌지만,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은 비가입 은행 지원을 거부했고 그 지역에서는 수백 개 은행이 쓰러졌다. 공황을 막을 「최종 대부자」, 곧 위기 때 마지막으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 되라고 만든 중앙은행이 그 일을 하지 못한 것이다. 연방준비제도 지도부 안에서는 경기가 나쁠 때는 돈을 덜 풀어야 한다는 「진성어음주의」와 공황 때는 아낌없이 빌려주어야 한다는 견해가 맞섰다. 1930년 가을부터 1933년 겨울까지 통화량은 30% 가까이 줄었다. 4 3
통화량이 줄면 물가가 떨어진다. 이를 「디플레이션」이라 한다. 물가 하락은 소비자에게 좋아 보이지만, 빚진 사람에게는 재앙이다. 빚의 액수는 그대로인데 소득과 물건값이 떨어지니 갚아야 할 빚의 실제 무게가 커진다.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이를 「부채 디플레이션」이라 불렀다. 빚진 사람들이 빚을 갚으려고 물건과 자산을 헐값에 팔면 물가가 더 떨어지고, 그래서 빚은 더 무거워진다. 피셔의 말대로 빚진 사람이 많이 갚을수록 더 많이 빚지게 되는 역설이었다. 물가와 소득이 20~50% 떨어지는 동안 기업과 농민이 쓰러졌고, 살아남은 은행은 대출을 줄여 하강을 더 부추겼다. 1930년대 동안 미국에서 9천 개 은행이 망했고, 1933년 실업률은 25%에 이르렀으며 농민 셋 가운데 한 명꼴로 땅을 잃었다. 2 3
마지막 고비는 1932년 말부터 왔다. 1931년 가을 영국이 금본위제를 버리자 외국인들은 미국도 그러리라 보고 달러를 금으로 바꿔 갔고, 연방준비제도는 금 유출을 막으려고 오히려 금리를 올렸다. 1932년 1월 의회가 부흥금융공사(RFC)를 세워 은행에 돈을 빌려주게 했지만, 1933년 초 다시 전국적 공황이 일었다. 주들이 차례로 은행 휴업을 선포했고(1932년 10월 31일 네바다가 처음), 2월 14일 디트로이트 은행들이 구제받지 못한 미시간주의 휴업 뒤 금 유출이 빨라졌다. 3월 4일에는 연방준비은행 열두 곳마저 문을 잠갔다. 이틀 뒤 취임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국 은행 휴업을 선포하면서 붕괴가 멈추었다. 5 6
금본위제는 어떻게 공황을 세계로 퍼뜨렸나? {austria} {germany}
금본위제는 나라마다 자기 화폐를 일정량의 금과 바꿔 주겠다고 약속하는 제도다. 1차 세계대전 때 대부분 정지되었다가 1920년대에 되살아났고, 영국은 1925년 전쟁 전과 같은 1파운드 4.86달러의 비율로 돌아갔다. 이 제도 아래에서 금이 빠져나가는 나라는 화폐를 금으로 바꿔 줄 약속을 지키려고 금리를 올리고 통화량을 줄여야 했다. 물가가 떨어지고 실업이 늘어도 그래야 했다. 한 나라의 긴축은 금리 차이를 따라 금을 끌어당겨 다른 나라에도 긴축을 강요했다. 그래서 경제사가들은 금본위제를 대공황의 주된 전달 통로로 본다. 7 2
1920년대 독일은 전쟁 배상금을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치렀다. 폭락 뒤 미국 은행들이 새 대출을 끊자 이 고리가 끊어졌다. 1931년 5월 11일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 크레디탄슈탈트가 1930년 결산을 발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오스트리아 은행 자산의 27%를 쥔 은행이었다. 공황은 독일로 번져 6월 첫째 주에만 라이히스방크에서 1억 5천만 마르크가 빠져나갔다. 6월 20일 후버 대통령이 배상금과 전쟁 채무 지불을 1년 미루자고 제안했지만, 배상금에 기대던 프랑스가 반발하는 사이 독일 2위 은행인 다나트 은행이 쓰러졌고 정부는 7월 13일 은행 휴업을 선포하고 외환을 통제했다. 1932년 로잔 회의는 배상금을 90% 가까이 깎았다. 8 2 9 10 11
위기는 영국으로 넘어갔다. 1931년 7월 메이 위원회 보고서가 실업수당 삭감을 포함한 대규모 지출 감축을 권고했고, 금이 하루 250만 파운드씩 런던을 빠져나갔다. 은행가들이 균형 예산을 요구하자 램지 맥도널드의 노동당 내각은 실업수당 삭감을 두고 쪼개졌고, 8월 24일 맥도널드는 보수당·자유당과 거국 내각을 세웠다. 노동당은 그를 배신자로 규정해 제명했다. 9월 10일 긴급 예산이 공무원 급여와 실업수당을 10% 깎았지만 금 유출은 멈추지 않았고, 9월 21일 영국은 금본위제를 정지했다. 잉글랜드 은행 총재 몬터규 노먼은 그해 「극적인 조치가 없으면 문명 세계 전체의 자본주의 체제가 1년 안에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12 2 5 13
영국을 뒤따라 스칸디나비아 나라들과 일본(1931년 12월)이 금본위제를 떠났고, 미국은 1933년, 프랑스가 이끈 「금 블록」은 1935~1936년까지 버텼다. 금본위제를 떠나면 화폐 가치가 떨어져 수출이 쉬워지고, 중앙은행은 금 걱정 없이 금리를 내리고 은행에 돈을 댈 수 있었다. 뒤의 연구들은 일찍 떠난 나라일수록 불황이 얕고 회복이 빨랐음을 수십 개 나라에서 확인했다. 1931년에 떠난 영국과 북유럽은 오래 버틴 프랑스와 벨기에보다 훨씬 먼저 회복했고, 은본위제였던 중국은 공황을 거의 비켜 갔다. 2 7 14
관세 전쟁과 통화 블록은 세계 무역을 어떻게 쪼갰나?
1930년 6월 17일 후버 대통령은 2만 개가 넘는 수입품의 관세를 올린 스무트-홀리 관세법에 서명했다. 원래 농민을 돕겠다는 공약에서 시작한 법안이 산업계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며 부풀어 오른 결과였고, 경제학자 1,028명이 거부권을 행사하라는 청원을 냈다. 캐나다를 비롯한 교역국들이 보복 관세로 맞섰다. 미국의 대유럽 수입은 1929년 13억 3,400만 달러에서 1932년 3억 9천만 달러로, 대유럽 수출은 23억 4,100만 달러에서 7억 8,400만 달러로 줄었고, 세계 무역은 1929년부터 1934년 사이 약 66% 줄었다. 무역 감소의 대부분은 각국 생산이 무너진 탓이었고 관세가 얼마나 더 보탰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지만, 미국 국무부 역사 서술의 말대로 이 법은 1930년대 「이웃 나라를 거지로 만드는」 정책의 상징이 되었다. 15 16
금본위제가 무너진 뒤 세계 경제는 몇 개의 블록으로 나뉘었다. 영국과 그 자치령, 식민지는 1932년 캐나다 오타와 회의에서 「국내 생산자가 먼저, 제국 생산자가 둘째, 외국 생산자는 마지막」이라는 원칙의 제국 특혜 관세를 맺었고, 영국은 제국 밖 수입품에 10% 관세를 매겼다. 영국과 무역이 많던 나라들은 화폐를 금 대신 파운드에 묶어 「스털링 블록」을 이루었다.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이탈리아·폴란드 등 「금 블록」은 금본위를 지키는 대가로 관세와 수입 할당을 높이고 디플레이션을 견뎠다. 독일은 외환 통제 아래 남동유럽 나라들과 물물교환에 가까운 양자 청산 협정을 맺어 그 지역을 자기 경제권으로 묶어 갔다. 17 12 18 14 19
협조의 마지막 시도는 1933년 6월 12일부터 7월 27일까지 66개국이 모인 런던 경제 회의였다. 유럽 나라들은 환율 안정을 원했지만, 막 금본위를 떠나 달러 가치를 낮추던 루스벨트는 7월 3일 회의에 메시지를 보내 환율 안정 논의를 비난하고, 한 나라 화폐의 환율보다 국내 경제가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회의는 아무 합의 없이 끝났다. 1936년 9월 미국·영국·프랑스는 경쟁적 평가절하를 삼가자는 3국 통화 협정을 맺었고, 프랑스가 평가절하하면서 금 블록의 남은 나라들도 금본위를 버렸다. 1931년부터 이어진 통화 전쟁은 여기서 일단 멈추었지만, 무역과 통화를 함께 다스릴 국제 질서는 2차 세계대전 뒤에야 만들어진다. 20 21 14
독일은 어떻게 디플레이션에서 재무장 경기로 넘어갔나?
1930년 3월 총리가 된 중앙당의 하인리히 브뤼닝은 배상금 부담을 벗는 것을 첫째 목표로 삼고 긴축으로 공황에 맞섰다. 제국의회가 그의 정책을 거부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밀어붙였다. 공무원 급여는 25% 깎였고 실업 수당과 사회부조도 크게 줄었다. 1923년의 초인플레이션을 겪은 독일 정부는 돈을 풀면 그 악몽이 돌아온다고 두려워했다. 실업자는 1929년 9월 140만 명에서 1930년 말 500만 명, 1932년 2월 612만 명으로 늘었다. 그는 「굶주림의 총리」로 불렸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주변 정당이던 나치당은 18.3%를 얻었고, 공산당도 표를 늘렸다. 22 23 2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다. 나치 정부는 처음에는 슐라이허 정부가 1932년에 준비한 공공사업을 이어받았고, 3월 얄마르 샤흐트를 라이히스방크 총재로 앉혔다. 6월의 라인하르트 계획은 감세와 수로·철도·도로 투자를 묶었고, 건설업 고용은 1933년 66만 6천 명에서 1936년 200만 명 넘게 늘었다. 그러나 나치 정부를 이전 정부와 가른 것은 재무장이었다. 1933년 6월 샤흐트는 8년 동안 350억 라이히스마르크를 군비에 쓰는 계획에 동의했는데, 1933년 독일 국민소득 전체가 430억 라이히스마르크였다. 돈은 실체 없는 회사 「메포」 앞으로 발행한 어음으로 마련했다. 기업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돈처럼 쓰다가 은행을 거쳐 라이히스방크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이 어음은 예산서에 나타나지 않아 베르사유 조약을 어긴 재무장을 숨겨 주었다. 19 24 25
실업은 대공황기 어느 나라보다 빨리 줄어 1938년에는 거의 사라졌다. 그 바탕에는 노동계급의 패배가 있었다. 나치는 1933년 모든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나치당이 통제하는 독일노동전선으로 대신했으며 파업을 금지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실질 주급은 19% 올랐지만 이는 주로 노동시간이 늘어서였고 시간당 임금은 바닥 수준에 머물렀다. 은행과 철강 대기업 등 공황 중 국유화된 기업들은 다시 민영화되었다. 1934년 9월 샤흐트의 「신계획」은 수입을 외환 허가로 통제하고 양자 청산 무역을 넓혔다. 1936년이면 군사비가 국민총생산의 10%로 민간 투자보다 커졌고, 외환과 식량 수입이 막히자 히틀러는 군비를 줄이라는 샤흐트 대신 괴링에게 「4년 안에 전쟁할 수 있는 경제」를 만드는 4개년 계획을 맡겼다. 역사가 이언 커쇼는 이 길이 영토 확장, 곧 전쟁 없이는 일부밖에 이룰 수 없었다고 본다. 19 25 2
일본은 왜 가장 먼저 공황에서 빠져나왔고, 그 대가는 무엇이었나?
일본은 이미 1927년 금융 공황으로 37개 은행이 쓰러지고 그 자리를 5대 재벌의 은행이 차지한 상태에서 세계 공황을 맞았다. 주요국 가운데 마지막까지 금본위에 돌아가지 않았던 일본은 하마구치 내각의 이노우에 준노스케 대장대신 아래 철저한 긴축 예산을 짜고, 1930년 1월 11일 전쟁 전의 옛 평가로 금 수출 금지를 풀었다. 물가를 끌어내려 일본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고 산업을 정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1929년 12월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물가가 내리고 또 내려 좋은 설을 맞겠다며 흐뭇해하는 봉급생활자」라는 제목으로 디플레이션을 반겼지만, 그때는 이미 월가 폭락 뒤였다. 1930년 3월 상품 시장이 폭락해 생사·철강·농산물 값이 곤두박질쳤고, 그해에만 823개 회사가 도산했다. 26 27 28
가장 큰 타격은 농촌에 왔다. 생사의 대미 수출이 급감한 데다, 디플레이션 정책과 1930년의 풍작, 조선과 타이완에서 들어오는 쌀 때문에 쌀값이 무너졌다. 1931년 9월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이듬해 만주국이 세워졌다. 그해 12월 13일 이누카이 내각의 대장대신이 된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취임 당일 금 수출을 다시 금지해 금본위에서 벗어났다. 엔화는 1932년 11월까지 달러에 대해 60% 떨어졌고, 1932년 11월 25일부터 일본은행이 정부의 장기 국채를 직접 인수했다. 1932~1935년에 발행된 국채의 82%를 일본은행이 인수했고, 그 가운데 약 90%를 시장에 되팔아 통화가 지나치게 풀리지 않게 했다. 정부는 이 돈으로 치수·도로·항만 같은 농촌 구제 공공사업(시국광구사업)과 만주 전비를 댔다. 27 29 30
일본의 광공업 생산과 도매물가는 1932년에 이미 오르기 시작했다. 금본위를 지킨 나라나 외환 통제를 한 나라보다 빠른 회복이었다. 1932~1935년의 연평균 실질 성장률은 7.2%였다. 엔화 약세로 일본 직물이 수출 시장에서 영국 직물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무엇이 회복을 이끌었는지는 지금도 논쟁이다. 국채로 마련한 재정 지출을 중심에 두는 연구와 다른 정책 경로를 강조하는 연구가 맞서고, 수요를 만든 것이 군사비였는지 농촌 구제 공공사업이었는지도 의견이 갈려, 어느 한쪽만을 수요 창출책으로 보는 평가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카하시는 1934년부터 경기 과열을 우려해 군사비를 억제하려다 군부와 부딪쳤고, 1936년 2월 26일 반란 장교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뒤 일본은행 인수는 군비 조달의 수단이 되었고 인플레이션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일본은행은 1982년 이 시기의 국채 인수를 「1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실수」라고 평가했다. 29 2 30
뉴딜은 무엇을 바꾸었고 무엇을 바꾸지 못했나?
1933년 3월 4일 취임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취임 연설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이틀 뒤 전국 은행 휴업을 선포했고, 3월 9일 의회는 긴급은행법을 통과시켜 건전한 은행만 다시 문을 열게 했다. 4월 5일 행정명령 6102호로 개인의 금 보유를 금지했고, 4월 20일 금본위제를 공식 정지했다. 1934년 1월 30일 금준비법은 금 1온스 값을 20.67달러에서 35달러로 올려 달러의 금 가치를 59%로 낮추었다. 1933년 은행법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세워 예금을 보장하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갈라놓았다. 예금이 보호된다는 믿음이 생기자 뱅크런이 멈추었다. 31 6 32 33 34
「첫 100일」 동안 의회는 루스벨트의 요구를 모두 통과시켰다. 전국산업부흥법은 업종별 「공정 경쟁 규약」으로 가격과 임금의 하한을 정해 디플레이션을 멈추려 했고, 농업조정법은 생산을 줄이는 농민에게 보조금을 주어 농산물값을 올렸다. 민간자원보존단은 젊은이들을 공공 토지의 노동에 고용했고,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는 댐과 발전소를 지었다. 연방준비제도의 공업생산지수는 1933년 3월 54.3에서 7월 85.5로 넉 달 만에 57% 뛰었다. 1935년 대법원이 전국산업부흥법을 위헌으로 판결한 뒤 시작된 「두 번째 뉴딜」은 공공사업진흥국(WPA)으로 850만 명을 고용해 도로와 학교, 병원을 짓게 했고, 와그너법으로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했으며, 1935년 8월 14일 사회보장법으로 연금과 실업보험을 만들었다. 노동조합원이 크게 늘었고 더 급진적인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가 생겨나, 노동은 뉴딜 정치 연합의 큰 축이 되었다. 34
그러나 뉴딜은 실업을 끝내지 못했다. 1937년 연방준비제도가 은행 지급준비율을 두 배로 올리고 재무부가 들어오는 금을 통화로 바꾸지 않고 묶어 두었으며, 같은 해 사회보장 급여세가 처음 걷히면서 경기가 다시 꺼졌다. 1937년 5월부터 1938년 6월까지 실질 국내총생산이 10%, 공업생산이 32% 줄었고 실업률은 다시 20%에 이르렀다. 이 조치들을 되돌리고 지출을 늘리자 회복이 이어졌지만, 1940년에도 실업률은 약 15%였다. 케인스는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내 주장을 증명할 만큼 큰 규모로 지출을 조직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면 정치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고 썼다. 뉴딜의 혜택도 고르지 않았다. 민간자원보존단에서 많은 흑인이 인종별로 분리된 부대에서 일했고, 농업조정법은 대부분 백인인 지주를 도우면서 흑인 소작농과 분익농을 밀어냈다. 35 2 34
뉴딜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도 갈린다. 뉴딜을 지지하는 쪽은 루스벨트가 수천만 명에게 희망을 주고 노동조합을 키웠으며, 은행과 철도를 쉽게 국유화할 수도 있었던 첫 임기에 자본주의를 구했다고 보고, 여러 나라가 독재로 넘어가던 위기의 시대에 미국 민주주의를 지켰다고 평가한다. 보수파는 연방정부와 부채를 키우고 공황을 늘였다고 비판하며, 신좌파 역사가들은 은행과 기간산업을 국유화할 기회가 왔을 때 오히려 자본주의를 구출했다고 비판한다. 역사가들은 노동조합을 키운 것 말고는 뉴딜이 미국 자본주의 안의 권력 배분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34
케인스와 칼레츠키는 공황에서 무엇을 읽어 냈나?
공황이 시작될 때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만든다는 「세이의 법칙」을 믿었다. 시장에 맡겨 두면 임금과 물가가 내려 결국 완전고용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공황이 부실한 기업과 투자를 청소하게 두라는 「청산주의」가 흔한 입장이었다. 미국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이 강경한 청산주의자였고,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은 모두 이 입장이었다. 프리드먼은 훗날 런던의 하이에크와 라이어널 로빈스가 「바닥이 빠지도록 내버려 두어야 저절로 낫는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케인스는 1925년 처칠 재무장관이 옛 평가로 금본위에 돌아가자 『처칠 씨의 경제적 귀결』을 써서 그 디플레이션 효과를 비판했고, 1936년 2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펴냈다. 2 36 37
케인스의 핵심 주장은 고용량이 임금 수준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출, 곧 소비와 투자의 합이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업이 판매를 기대하는 총수요를 「유효수요」라 불렀다. 사람들이 소득이 늘어도 그만큼 다 쓰지 않고, 기업의 투자는 미래 이윤에 대한 불안정한 기대에 달려 있으므로, 경제는 대량 실업을 안은 채 균형에 머물 수 있다. 여기서 정부가 지출을 늘려 수요의 빈자리를 메워야 한다는 처방이 나왔다. 그는 『일반이론』 끝에서 「투자의 상당히 포괄적인 사회화」가 완전고용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일 것이라고 쓰면서도,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이 이론과 그 뒤의 흐름은 「케인스주의」 항목에서 자세히 다룬다. 37 38 39 40
같은 생각에 다른 길로 먼저 이른 사람들도 있었다. 폴란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미하우 칼레츠키는 1933년 폴란드어 논문 「경기순환 이론 시론」에서 유효수요 이론의 기초를 세웠고, 스웨덴의 스톡홀름 학파도 1930년대에 비슷한 개념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정책은 『일반이론』보다 몇 해 먼저 같은 처방을 실행한 사례로 꼽힌다. 칼레츠키는 계급 분석을 더해, 완전고용이 노동계급을 자신감 있게 만들어 자본가의 반발을 부를 것이므로 케인스식 정책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고 내다보았다. 41 40 30
소련과 코민테른은 공황을 어떻게 보았나?
코민테른은 1928년 제6차 세계대회에서 1920년대 중반 자본주의의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안정」이 끝나 가고 경제 붕괴와 노동계급의 급진화가 오는 「제3기」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1년 뒤 월가가 무너지자 이 예측은 들어맞은 것처럼 보였다. 코민테른 대회의 경제 보고를 도맡은 헝가리 출신 경제학자 예브게니 바르가와 그의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는 각국의 공식 통계로 생산과 투자, 고용의 흐름을 세밀하게 추적했다. 스탈린은 1930년 6월 제16차 당대회 보고에서 이번 공황을 「과잉생산 공황」이라 규정했다. 시장이 흡수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상품이 생산되었고, 자본가들은 가격을 지키려고 남는 곡물과 직물을 창고에 묵히거나 없애면서 노동자를 해고한다는 것이었다. 42 43 44 45
스탈린은 공황의 근원을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물의 자본주의적 취득 형태 사이의 모순」에서 찾았다.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이기려고 설비를 늘리고 착취를 강화하지만, 상품을 살 대중의 구매력, 곧 「유효수요」는 낮게 묶여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전후 첫 세계 공황이며, 공업 공황과 농업 공황이 겹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공황을 없애려면 자본주의를 없애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1934년 1월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는 1913년을 100으로 한 공업생산이 1933년 소련은 391.9, 미국은 110.2, 영국은 85.2, 독일은 75.4라는 표를 내보이며, 자본주의는 공황의 바닥을 지났지만 새 호황으로 이어지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불황」에 들어섰고 소련에서는 실업이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45 46
자본주의 세계가 위기에 빠진 시기에 투자를 쏟아부은 소련 중공업이 빠르게 성장하자, 서방의 많은 지식인이 소련 체제를 호의적으로 보게 되었다.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소련의 공업·건설·운수 노동자는 460만 명에서 1,260만 명으로 늘었고, 공황 초기에는 핀란드에서만 1만~1만 5천 명이 소련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소련 경제도 공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공업화 자금을 대던 곡물과 원료 수출이 국제 가격 폭락으로 손해를 보아, 1934년 소련은 1929년보다 많은 양을 수출하고도 수입은 절반밖에 얻지 못했다. 같은 시기의 강제 집산화와 1932~1933년 기근은 330만~700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2 47
「제3기」 노선은 정치 전술로도 이어졌다. 공산당들은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즘」, 곧 파시즘의 온건한 날개로 규정하고 그 지도부와의 협력을 거부했으며, 실업자를 조직하는 일에서는 성과를 냈다.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공산당의 당원과 영향력이 커졌다. 그러나 독일에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갈라진 사이 나치가 집권해 독일 공산주의 운동을 짓밟았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노선이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다고 비판했다. 코민테른은 1934년부터 방향을 틀어 1935년 제7차 대회에서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이 전환은 「코민테른의 인민전선 전환」 사건에서 다룬다. 42
공황의 원인을 두고 어떤 해석들이 맞서 있나?
1963년 밀턴 프리드먼과 애나 슈워츠는 『미국 화폐사』의 「대수축」 장에서 은행 붕괴로 은행 셋 가운데 하나가 사라지고 통화량이 35% 줄어든 것이 평범한 경기 후퇴를 대공황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했다.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내리고 국채를 사서 은행에 돈을 댔다면 공황은 훨씬 짧았으리라는 것이다. 이 「통화주의」 해석은 널리 받아들여져, 2002년 연방준비제도 이사 벤 버냉키는 두 사람에게 「대공황에 관해서는 당신들이 옳습니다. 우리가 그랬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버냉키 자신은 피셔의 부채 디플레이션론을 이어, 은행이 무너지며 신용을 공급하는 기능 자체가 사라진 것을 강조했다. 48 2
케인스주의 해석은 신뢰가 무너지며 투자와 소비 지출이 갑자기 줄어든 것을 원인으로 본다. 경제학자들은 통화 요인과 지출 감소 가운데 어느 쪽이 주된 원인인지를 두고 거의 반반으로 갈려 있다. 국제적 시각의 해석도 있다. 찰스 킨들버거는 1973년 『대공황의 세계』에서 영국이 더는 세계 경제를 떠받치지 못하는데 미국은 그 역할을 맡기를 주저한 것이 공황을 길고 깊게 했다며 「세계 경제가 안정되려면 안정자, 하나의 안정자가 있어야 한다」고 썼다. 배리 아이켄그린은 1992년 『황금 족쇄』에서 금본위제가 디플레이션을 나라에서 나라로 옮기고 각국이 은행 공황에 대응하지 못하게 묶었다고 보았다. 반대로 하이에크와 오스트리아 학파는 1920년대의 지나친 신용 팽창이 지속될 수 없는 호황을 만든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2 49 50 7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황을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한 불안정의 결과로 본다. 그 안에도 갈래가 있다.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공식 설명처럼 생산 능력과 대중의 구매력 사이의 간극, 곧 과잉생산을 강조하는 쪽이 있고, 1929년 헨리크 그로스만이 『자본주의 체제의 축적 법칙과 붕괴』에서 되살린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을 근본 원인으로 보는 쪽이 있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질수록 이윤율이 떨어지고, 공황이 자본 가치를 파괴하고 나서야 수익성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같은 해 일본의 구루마 사메조도 공황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제국주의 전쟁을 「최고 형태의 공황」이라 불렀다. 이 밖에 1920년대 소득 불평등이 구매력을 묶어 과잉 투자를 낳았다는 해석도 있었는데, 훗날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된 매리너 에클스가 이 생각에 가까웠다. 2 51 45 7
공황은 어떻게 끝났고 무엇을 남겼나?
경제사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대공황이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끝났다는 것이다. 1937~1939년 유럽에서는 재무장이 경기를 끌어올렸다. 영국은 1936년부터 대규모 재무장에 나서 1937년 실업자가 150만 명으로 줄었고, 1939년 전쟁이 시작되자 인력 동원이 실업을 없앴다. 미국에서는 1941년 말부터 약 1천만 명이 민간 노동력에서 군으로 옮겨 갔고, 정부가 미국 산업 자본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40년 5%에서 1943년 67%로 뛰었다. 대공황이 실업을 해결하지 못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결국 실업을 없앤 것은 전쟁 준비와 전쟁이었다. 2 12
정치적으로 공황은 여러 나라를 오른쪽으로 밀었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민주정이 독재나 권위주의 통치로 넘어갔고 그 가장 유명한 예가 1933년의 독일이었다. 미국 국무부 역사 서술은 공황이 미국을 고립주의로 더 깊이 몰아넣어, 일본의 만주 점령,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독일의 팽창에 미국이 성명 말고는 거의 대응하지 않았다고 정리한다. 수출 원자재에 기대던 식민지와 주변부 나라들은 가격 폭락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았고, 국제연맹은 정부 수입의 80%를 구리와 질산염 수출에 기대던 칠레를 공황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나라로 꼽았다. 반대로 멕시코는 수입이 반으로 줄자 국내 공업이 그 자리를 채우는 수입 대체로 1931년 뒤 성장했다. 2 52 53
공황의 경험은 전후 제도에 새겨졌다. 1934년 호혜통상협정법부터 미국은 관세를 협상으로 내리는 쪽으로 돌아섰고, 2차 세계대전 뒤에는 이것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으로 이어졌다. 대공황 동안 대부분 버려진 금본위제는 2차 세계대전 뒤 브레턴우즈 체제 안에서 제한된 형태로 되살아났고, 1971년 미국이 달러의 금 태환을 끊을 때까지 이어졌다. 예금보험과 은행 분리, 정부가 수요를 관리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는 전후 수십 년 동안 서방 경제 정책의 기본이 되었다. 15 7 40 54
결과
대공황은 2차 세계대전의 재무장과 동원으로 끝났다. 공황은 독일의 나치 집권을 비롯해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민주정이 독재로 넘어가는 데 힘을 보탰다. 경제학에서는 케인스의 『일반이론』이 거시경제학을 열었고, 예금보험과 은행 규제, 사회보장, 정부의 수요 관리가 전후 서방 경제 정책의 기본이 되었다. 대부분 버려진 금본위제는 전후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제한된 형태로 되살아났고, 관세를 협상으로 내리는 방식은 전후 무역 체제로 이어졌다.
연표와 지도
- 11929.10.24검은 목요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기록적인 1,290만 주가 거래되며 주가가 폭락했다. 주요 은행가들이 시세보다 비싸게 주식을 사들여 짧은 반등을 끌어냈다.
- 21929.10.29검은 화요일
약 1,600만 주가 거래되는 투매 속에 다우 지수가 11.73% 떨어졌다. 전날의 12.82% 하락과 합쳐 이틀 동안 23.05%가 빠졌다.
- 31930.01.11일본의 금 수출 해금
하마구치 내각이 전쟁 전의 옛 평가로 금 수출 금지를 풀어 일본이 금본위에 돌아갔다.
- 41930.06.17스무트-홀리 관세법 서명
후버 대통령이 2만여 품목의 관세를 올리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에 서명했다. 경제학자 1,028명이 거부권을 요청한 뒤였다.
- 51930.06.27스탈린의 제16차 당대회 보고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 제16차 대회 정치 보고에서 세계 공황을 「과잉생산 공황」으로 규정했다.
- 61930.12.11미국은행 폐쇄
뉴욕시 4위 은행인 미국은행(Bank of United States)이 합병 협상이 깨진 뒤 뱅크런을 맞아 영업을 멈추었다.
- 71931.05.11크레디탄슈탈트 위기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 크레디탄슈탈트가 1930년 결산을 발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중부 유럽 전체로 예금 인출이 번졌다.
- 81931.06.20후버 모라토리엄 제안
후버 대통령이 배상금과 전쟁 채무 지불을 1년 동안 미루자고 제안했다.
- 91931.07.13독일 은행 위기
다나트 은행이 지급을 멈추었고, 독일 정부는 은행 휴업을 선포하고 외환 통제에 들어갔다.
- 101931.08.24영국 거국 내각 구성
실업수당 삭감을 두고 노동당 내각이 갈라지자 램지 맥도널드가 사임한 뒤 보수당·자유당과 거국 내각을 꾸렸다.
- 111931.09.21영국의 금본위 이탈
금 유출을 견디지 못한 영국이 파운드의 금 태환을 정지했다.
- 121931.12.13일본의 금 수출 재금지
이누카이 내각의 대장대신이 된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취임 당일 금 수출을 다시 금지해 일본이 금본위에서 벗어났다.
- 131932.07.08다우 지수의 바닥
다우 지수가 41.22로 마감해 1929년 9월 정점에서 89% 떨어진 바닥을 찍었다.
- 141933.01.30히틀러 총리 임명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총리로 임명했다.
- 151933.03.06미국 전국 은행 휴업
3월 4일 취임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국의 은행을 닫는 은행 휴업을 선포했다.
- 161933.03.09긴급은행법
의회가 긴급은행법을 통과시켜, 심사를 거친 건전한 은행만 다시 문을 열게 했다.
- 171933.04.20미국의 금본위 정지
루스벨트 대통령이 포고로 금본위제를 공식 정지했다.
- 181933.07.03루스벨트의 「폭탄 메시지」
루스벨트가 런던 경제 회의에 통화 안정 협정을 거부하는 메시지를 보내, 회의는 성과 없이 끝났다.
- 191934.01.26스탈린의 제17차 당대회 보고
스탈린이 자본주의 세계가 「특별한 종류의 불황」에 들어섰고 소련에서는 실업이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 201934.01.30금준비법
금준비법이 제정되었고, 이튿날 금값이 1온스 20.67달러에서 35달러로 정해졌다.
- 211935.05.27전국산업부흥법 위헌 판결
연방대법원이 셰크터 판결에서 전국산업부흥법의 규약 제도를 만장일치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 221935.08.14사회보장법 서명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령연금과 실업보험을 만드는 사회보장법에 서명했다.
- 231936.02『일반이론』 출간
케인스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펴냈다.
- 241936.02.26다카하시 고레키요 피살
2·26 사건을 일으킨 반란 장교들이 군사비 억제를 추진하던 대장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살해했다.
- 1936.093국 통화 협정
미국·영국·프랑스가 경쟁적 평가절하를 삼가고 통화를 안정시키기로 한 3국 협정을 맺었다.
- 1937.05–
1938.06 1937~1938년 경기 후퇴 시작미국 경기가 다시 꺾여 1938년 6월까지 실질 국내총생산이 10% 줄고 실업률이 20%로 올랐다.
관련 인물 14명
지도부5
폭락과 은행 공황 시기의 대통령. 스무트-홀리 관세법에 서명했고, 1931년 배상금·전쟁 채무 지불 유예를 제안했으며 재건금융공사를 세웠다.
미국 대통령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19451933년 3월 취임해 은행 휴업, 금본위 정지, 뉴딜을 이끌었다.
영국 총리램지 맥도널드1866–19371931년 8월 노동당 내각이 실업수당 삭감을 두고 갈라지자 거국 내각을 꾸렸고, 그 내각에서 영국은 금본위를 떠났다.
독일 총리하인리히 브뤼닝1885–19701930~1932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임금과 지출을 깎는 디플레이션 정책을 폈고, 그사이 실업자는 600만 명을 넘었다.
독일 총리아돌프 히틀러1889–19451933년 1월 총리가 되어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공공사업과 재무장을 앞세운 경기 회복을 이끌었다.
집행 · 지휘4
루스벨트의 측근으로 공공사업진흥국을 맡아 수백만 명을 공공 근로에 고용했다.
잉글랜드 은행 총재몬터규 노먼1871–19501920~1944년 잉글랜드 은행 총재. 1925년 옛 평가의 금본위 복귀를 이끌었고 1931년 금 유출 위기를 맞았다.
라이히스방크 총재·경제장관얄마르 샤흐트1877–1970메포 어음으로 재무장 자금을 숨겨 조달했고, 1934년 「새 계획」으로 쌍무 청산 무역과 수입 통제를 짰다.
대장대신다카하시 고레키요1854–19361931년 12월 금 수출을 다시 금지하고 일본은행의 국채 인수로 재정 지출을 늘려 일본의 빠른 회복을 이끌었다. 군사비 억제를 시도하다 1936년 2·26 사건 때 살해되었다.
참여4
당대회 보고에서 공황을 과잉생산 공황으로 규정하고, 소련의 공업 성장과 실업 소멸을 자본주의 세계와 대비했다.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 소장예브게니 바르가1879–1964코민테른 대회의 경제 보고를 맡아 각국 통계로 공황의 흐름을 추적했다.
경제학자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1925년 금본위 복귀를 비판했고 1936년 『일반이론』에서 유효수요의 부족이 대량 실업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자미하우 칼레츠키1899–19701933년 폴란드어 논문에서 케인스와 따로 유효수요 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자료 5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자료 14자료 15자료 16자료 17자료 18자료 19자료 20자료 21자료 22자료 23자료 24자료 25자료 26자료 27자료 28자료 29자료 30자료 31자료 32자료 33자료 34자료 35자료 36자료 37자료 38자료 39자료 40자료 41자료 42자료 43자료 44자료 45자료 46자료 47자료 48자료 49자료 50자료 51자료 52자료 53자료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