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주의
Keynesianism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6년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내놓은 이론과 그 뒤를 이은 경제학·정책의 흐름. 생산과 고용의 수준은 사회 전체의 지출, 곧 총수요(케인스의 말로 「유효수요」)가 결정하며, 총수요는 저절로 완전고용 수준에 맞추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경기 후퇴와 공황 때는 정부의 재정 지출과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으로 수요를 떠받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세
케인스 이전의 고전파 경제학은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만든다는 「세이의 법칙」에 기대어, 임금과 물가가 충분히 내려가면 시장이 완전고용으로 돌아온다고 보았다. 대공황의 대량 실업은 이 생각을 흔들었다. 케인스는 『일반이론』 3장에서, 기업이 고용을 늘려 기대할 수 있는 총수요와 총공급이 만나는 점을 「유효수요」라 부르고 이것이 고용량을 정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소득이 늘어도 그만큼 다 쓰지 않으며, 투자는 미래 이윤에 대한 불안정한 기대에 달려 있으므로, 경제는 대량 실업을 안은 채 균형에 머물 수 있다.
처방의 핵심은 정부 지출이다. 1931년 리처드 칸은 정부가 실업자를 고용해 지출한 돈이 다른 사람의 소득이 되어 다시 지출되는 연쇄를 「비율」로 계산했고, 케인스의 제안으로 이것이 「승수」라 불리게 되었다. 공황 때 정부가 적자를 내더라도 지출을 늘리면 그 몇 배의 수요와 고용이 생긴다는 논리다. 케인스는 『일반이론』 24장에서 은행 정책만으로는 적정한 투자를 이끌어 내기 어려우므로 「투자의 상당히 포괄적인 사회화」가 완전고용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일 것이라고 쓰고, 이자로 사는 계층의 「안락사」를 말했다. 그러나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같은 생각이 다른 곳에서도 나왔다. 폴란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미하우 칼레츠키는 1933년에 유효수요 이론의 기초를 세웠고, 스웨덴의 스톡홀름 학파도 1930년대에 비슷한 개념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일본의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일반이론』보다 앞서 적자 지출과 평가절하를 실행했다.
케인스주의는 신고전파 종합의 일부로서 대공황 후반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45~1973년의 전후 팽창기 동안 선진국의 표준 거시경제 모형이었다. 1970년대 석유 파동과 스태그플레이션 뒤 영향력을 크게 잃었고, 1970년대 말부터 신자유주의가 지배적 경제 패러다임 자리를 차지했다. 그 뒤 새케인스학파가 주류 거시경제학의 일부가 되었고, 2008년 금융위기 때 각국 정부는 다시 케인스식 처방에 기댔다.
비판은 여러 방향에서 나왔다. 하이에크와 미제스 같은 오스트리아 학파와 프리드먼 같은 통화주의자는 케인스식 정책이 신용 팽창과 적자 지출로 가격 신호를 비틀어 과잉 투자, 인플레이션, 지속 불가능한 공공 부채를 낳는다고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 쪽에서 폴 스위지는 1946년 『일반이론』의 유효수요 분석에 쓸 만한 것이 많다고 인정하면서도, 케인스가 자본주의를 하나의 총체로 보지 못했고 계급투쟁을 가볍게 다루었으며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역할을 놓쳤다고 보았다. 칼레츠키는 1943년 「완전고용의 정치적 측면」에서, 완전고용이 노동계급을 자신감 있게 만들고 기업가의 사회적 지위를 약하게 하므로 자본가들이 정치적 힘을 써서 케인스식 정책을 무너뜨리리라고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