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루블린 위원회에서 통일노동자당까지
1944년 7월 루블린 위원회에서 1948년 12월 통합대회까지, 폴란드의 국가권력은 어떤 절차와 집계를 거쳐 노동자당으로 모였는가?
1944년 7월 소련이 후원한 폴란드민족해방위원회가 루블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에는 런던 망명정부와 루블린의 두 정부가 생겼다. 얄타 합의에 따라 1945년 6월 국민통일임시정부가 세워져 미코와이치크가 부총리로 귀국했고, 미국과 영국이 이를 승인했다.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는 연립의 여러 당이 함께 통과시켰다. 공안부와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국내군 후신의 지하조직을 상대했고, 1945년과 1947년 두 차례 사면이 있었다. 1946년 6월 국민투표와 1947년 1월 총선의 공식 결과는 정부 진영의 압승이었으나, 1989년 이후 공개된 집계는 다른 수치를 보여 준다. 미코와이치크는 1947년 10월 폴란드를 떠났다. 고무우카의 「폴란드의 길」은 1948년 9월 「우익 민족주의 편향」으로 비판되어 그가 해임되었고, 12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통합해 폴란드통일노동자당이 세워졌다.
두 개의 정부: 루블린 위원회와 런던 망명정부
1944년 7월 22일 폴란드민족해방위원회가 헤움 발로 선언문을 냈다. 문안은 모스크바에서 작성되었고, 위원회는 8월 1일 루블린에 자리 잡았다. 의장은 사회당 좌파의 에드바르트 오수프카모라프스키였고, 실권은 1944년 1월 1일 바르샤바 지하에서 결성된 국가국민평의회의 의장 볼레스와프 비에루트와 노동자당 서기장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에게 있었다. 위원회는 1921년 헌법을 계승한다고 밝히면서 런던 망명정부를 「1935년 파시스트 헌법에 근거한 불법 정부」라 불렀다. 같은 날 소련과 위원회는 소련군 후방 지역의 행정을 위원회에 넘기는 협정을 맺었고, 7월 27일에는 커즌선을 국경으로 하는 비밀 협정이 뒤따랐다. 위원회에는 군대도 있었다. 1943년 소련에서 편성된 지그문트 베를링의 제1군은 1944년 7월 폴란드군으로 개편되었고, 총사령관은 미하우 롤라지미에르스키였다. 1945년 봄 이 군대는 약 40만 명에 이르렀다. 위원회의 구성원 15명 가운데 노동자당원은 소수였으나 공안, 국방, 정보, 행정 부문이 노동자당 몫이었다.
런던에는 1943년 7월부터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가 이끄는 망명정부가 있었고, 국내에는 그 정부의 국내군과 정부 대표부가 있었다. 미코와이치크는 8월 초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0월에는 처칠과 함께 다시 모스크바에서 커즌선을 국경으로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들었다. 그는 내각을 설득하지 못해 11월 24일 사임했고, 토마시 아르치셰프스키가 뒤를 이었다. 같은 8월부터 10월까지 바르샤바 봉기가 진행되는 동안 소련군은 비스와강 동안에 있었다. 봉기의 경과와 그 뒤의 논쟁은 바르샤바 봉기 항목이 다룬다.
12월 31일 국가국민평의회는 위원회를 폴란드공화국 임시정부로 바꾸었고, 소련은 1945년 1월 5일 이를 승인했다. 1월 17일 소련군이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 들어갔고, 1월 19일 국내군 사령관 레오폴트 오쿨리츠키가 국내군 해산을 명령했다. 폴란드에는 두 개의 정부와 두 개의 군대가 있었으나, 영토를 통치하는 정부는 하나뿐이었다.
얄타에서 국민통일임시정부까지: 미코와이치크의 귀국
1945년 2월 얄타에서 세 강대국은 「현재 폴란드에서 활동 중인 임시정부를 더 넓은 민주적 기반 위에 재조직」하고, 그 정부가 「보통선거와 비밀투표에 의한 자유롭고 구속 없는 선거」를 치른다는 데 합의했다. 합의문의 문안과 그 집행력에 관한 논쟁은 얄타 회담 항목에 정리되어 있다. 재조직을 위한 3국 위원회가 몰로토프, 해리먼, 클라크 커로 모스크바에 설치되었다.
3월 27일과 28일 지하 정부 대표 얀 스타니스와프 얀코프스키와 오쿨리츠키를 비롯한 지하 지도자 열여섯 명이 소련군과의 회담을 위해 프루슈쿠프로 갔다가 내무인민위원부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 6월 17일부터 21일까지 미코와이치크가 모스크바에서 새 정부 구성을 협상하는 동안, 6월 18일부터 21일까지 같은 도시에서 「16인 재판」이 열렸다. 오쿨리츠키는 10년형, 얀코프스키는 8년형, 비엔과 야시우코비치는 5년형을 받았고, 세 명은 무죄였다. 오쿨리츠키는 1946년 12월 모스크바 감옥에서 죽었다.
6월 28일 국민통일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총리는 오수프카모라프스키, 부총리는 고무우카와 미코와이치크였고, 미코와이치크는 농업장관을 겸했다. 런던에서 돌아온 쪽이 얻은 자리는 21개 부처 가운데 소수였다. 미국과 영국은 7월 5일 이 정부를 승인하고 런던 정부의 승인을 거두었다. 미코와이치크는 8월 22일 루블린 계열의 농민당과 결별해 폴란드농민당을 재건했고, 당은 1946년 초 당 발표로 80만 명의 당원을 헤아렸다. 노동자당은 1945년 12월 제1차 당대회에서 고무우카를 서기장으로 재확인했고, 당원은 1945년 말 약 23만 명이었다. 연립에는 이 밖에 오수프카모라프스키와 치란키에비치의 사회당, 루블린 계열의 농민당, 민주당이 있었고, 노동자당은 「민주 진영의 통일」을 내걸고 이들과 선거 연합을 추진했다.
1946년 1월 농민당 대회에서 미코와이치크는 얄타가 약속한 자유선거의 조기 실시를 요구했다. 2월 노동자당은 농민당에 단일 명부 참여를 제안하며 의석의 20%를 배정하겠다고 했고, 농민당은 75%를 요구하며 거부했다. 이 결렬이 총선을 미루고 국민투표를 먼저 치르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 농민당 지방 조직에 대한 체포와 활동가 살해가 이어졌고, 농민당은 1947년 초까지 활동가 100여 명이 살해되었다고 집계했다. 정부는 이를 지하조직의 소행으로, 농민당은 공안부의 소행으로 설명했다.
토지개혁과 국유화: 연립이 함께 통과시킨 것
토지개혁은 위원회가 루블린에서 처음 한 일이었다. 1944년 9월 6일 포고는 농지 50헥타르(총면적 100헥타르)를 넘는 사유지와 독일인 소유지를 보상 없이 몰수해 분배하도록 했다. 1949년까지 약 610만 헥타르가 110만 농가에 나뉘었고, 그 절반 이상은 새로 얻은 서부 영토에 있었다. 미코와이치크의 농민당은 분배 방식과 국영농장 비율을 두고 노동자당과 다투었지만 개혁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지주층은 포고 발표 뒤 곧바로 장원에서 쫓겨났고, 그 다수는 포츠담 이후 확정된 서부 국경 안의 새 정착지로 가지 않았다.
1946년 1월 3일 국가국민평의회는 기간산업 국유화법을 통과시켰다. 독일 국가와 독일인의 재산은 무상으로, 교대 근무 인원 50명을 넘는 폴란드 기업은 보상을 전제로 국유화되었다. 농민당은 이 법에 찬성했고, 대신 중소기업과 상업의 자유를 요구했다. 보상은 실제로는 거의 지급되지 않았다. 산업장관 힐라리 민츠는 1947년 「상업 전투」를 선포해 사영 도소매를 국영과 협동조합 상업으로 대체했고, 1947년부터 1949년까지의 3개년 계획은 전쟁 전 생산 수준 회복을 목표로 했다.
서부 영토에는 독일인이 떠난 자리에 동부에서 온 폴란드인이 정착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약 300만 명의 독일인이 추방되었고, 소련에 넘어간 동부 영토에서 약 150만 명의 폴란드인이 옮겨 왔다. 이 이동은 연립의 어느 당도 반대하지 않았고, 서부 국경 문제는 1946년 국민투표의 세 번째 질문이 되었다. 1945년 11월 신설된 회복영토부는 고무우카가 1949년 1월까지 맡았고, 정착과 토지 분배, 독일인 추방의 행정이 이 부처를 거쳤다. 서부 영토는 노동자당이 토지개혁과 정착을 함께 집행하며 조직을 넓힌 곳이었고, 1946년 국민투표와 1947년 총선에서 정부 진영의 공식 득표가 가장 높게 발표된 곳이기도 했다.
공안부와 지하: 16인 재판, 아우구스투프, 두 번의 사면
위원회는 1944년 7월 공안 부문을 두었고, 1945년 1월 1일 이는 공안부가 되었다. 장관은 스타니스와프 라드키에비치였고, 당에서 공안을 관장한 것은 정치국원 야쿠프 베르만이었다. 공안부 요원은 1945년 말 약 2만 명이었고, 그 아래 국내보안군과 시민민병대, 1946년 2월 창설된 자원예비민병대가 있었다.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자체 부대와 고문단을 두었다. 이반 세로프는 1945년 초 제1벨로루시 전선군 후방의 내무인민위원부 전권대표로 폴란드에 있었고, 3월의 16인 체포는 그의 부하들이 집행했다. 1945년 7월 10일부터 25일까지 수바우키와 아우구스투프 일대에서 소련군의 소탕 작전으로 약 2,000명이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약 600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폴란드 국가기억원은 이들이 처형되어 러시아 영토에 묻혔다고 본다.
국내군이 해산된 뒤에도 무장 지하는 남았다. 1945년 9월 2일 국내군 출신 장교들이 바르샤바에서 자유독립협회(WiN)를 세웠고, 초대 회장 얀 제페츠키는 11월 5일 체포되었다. 국민군(NSZ) 계열의 부대도 각지에 있었다. 지하조직은 공안부와 민병대, 노동자당 활동가를 공격했고, 정부는 이들을 「반동 도적단」이라 불렀으며, 지하는 스스로를 국내군의 후계로 불렀다. 1989년 이후 폴란드에서는 「저주받은 병사들」이라는 이름이 쓰인다. 지하 활동과 그 진압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추계가 갈리며, 양쪽 모두 수천 명 단위다. 1945년 무장 지하의 규모는 폴란드 역사학의 추계로 1만 5천 명에서 2만 명 사이였고, 1947년 사면 뒤에는 수백 명 단위의 소부대가 남아 1950년대 초까지 활동했다. 정부는 농민당과 지하의 연계를 재판과 선전에서 거듭 주장했고, 농민당은 이를 부인하며 자당이 합법 야당임을 내세웠다. 이 주장은 1947년 총선에서 농민당 명부를 무효화하는 근거로 쓰였다.
정부는 두 차례 사면을 내렸다. 1945년 7월 22일부터 10월 15일까지의 첫 사면에서 30,217명이 신고했고, 1947년 2월 22일 국회가 통과시켜 2월 25일부터 4월 25일까지 시행된 두 번째 사면에서는 76,774명이 신고했다. 공안부 자체 통계로 자유독립협회 성원의 90%, 국민군 성원의 60%였다. 신고 때 작성된 진술서는 그 뒤 체포의 자료가 되었다.
1946년 6월 30일 국민투표: 공식 집계와 문서고의 집계
정부는 얄타가 약속한 총선을 미루고 국민투표를 먼저 치렀다. 질문은 세 가지였다. 상원 폐지에 찬성하는가,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를 헌법에 담는 데 찬성하는가, 발트해와 오데르·나이세강의 서부 국경을 확정하는 데 찬성하는가. 노동자당과 그 동맹은 「세 번 찬성」을 내걸었고, 국가 기관과 군, 언론이 이 구호를 실었다. 공식 투표율은 85%를 넘었다. 농민당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에는 찬성하되, 정부 진영과 구별되는 표를 만들기 위해 첫 질문에 반대를 권고했다.
7월 12일 발표된 공식 결과는 첫 질문 찬성 68.2%, 두 번째 77.2%, 세 번째 91.4%였다. 농민당은 자체 참관 결과를 근거로 첫 질문의 실제 결과가 반대 다수라고 발표했고, 참관이 가능했던 크라쿠프에서는 첫 질문 반대가 70% 안팎이었다. 1989년 이후 안제이 파치코프스키가 폴란드 당 문서에서 찾아낸 내부 집계는 첫 질문 찬성 26.9%, 두 번째 42.0%, 세 번째 66.9%였다. 러시아 문서를 연구한 니키타 페트로프에 따르면 소련 국가보안부의 아론 팔킨이 이끄는 요원단이 개표 서류를 다시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정부는 당시 이 결과를 「인민의 지지」로 발표했고, 농민당과 서방 정부는 집계 조작을 항의했다. 국민투표 나흘 뒤인 7월 4일 키엘체에서 유대인 42명이 살해된 사건은 국내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정부는 이를 지하와 농민당의 책임으로 돌렸다.
1947년 1월 총선과 미코와이치크의 출국
총선은 1947년 1월 19일에 치러졌다. 노동자당, 사회당, 농민당(루블린 계열), 민주당은 「민주블록」의 단일 명부로 나섰다. 미코와이치크의 농민당은 단독으로 명부를 냈다. 선거 전 농민당 후보와 활동가 수백 명이 체포되었고, 52개 선거구 가운데 10곳에서 농민당 명부가 「지하와의 연계」를 이유로 무효 처리되었다. 투표 당일 공장과 부대는 대열을 지어 투표소로 갔고, 많은 곳에서 공개 투표가 요구되었다. 투표 뒤 미국과 영국은 얄타 합의 위반을 들어 항의 각서를 보냈고, 소련은 선거가 합의대로 치러졌다고 답했다. 공식 결과는 민주블록 80.1%(444석 중 394석), 농민당 10.3%(28석)였다. 농민당은 자체 집계로 자당이 다수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1990년대에 공개된 문서에서 역사가들은 국민투표 때와 같은 방식이 쓰였음을 확인했고, 실제 득표는 문서로 남지 않아 추정만 있다.
2월 4일 입법의회가 열렸고, 5일 비에루트가 대통령에, 6일 사회당의 유제프 치란키에비치가 총리에 선출되었다. 2월 19일 「소헌법」이 통과되어 입법의회와 대통령, 국가평의회의 권한을 정했다. 미코와이치크는 정부에서 빠졌다. 1947년 봄부터 농민당 안에서는 정부와의 협력을 주장하는 흐름이 커졌고, 미코와이치크 계열은 지방 조직과 당 기관지에서 밀려났다. 농민당은 안에서 갈라져 정부 협력파가 「농민당 좌파」를 만들었고, 미코와이치크는 10월 20일 미국 대사관 트럭에 숨어 바르샤바를 떠나 그디니아에서 배로 영국에 갔다. 남은 농민당은 협력파가 이끌었고 1949년 11월 루블린 계열과 합쳐 통일농민당이 되었다.
「폴란드의 길」에서 「우익 민족주의 편향」으로
고무우카는 1945년부터 1947년까지의 연설과 글에서 폴란드가 소비에트 체제와 다른 길로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말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농업 집단화 없이, 다당 연립과 의회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폴란드 사회주의의 전통을 이어서 가는 길이었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회의에서 그는 기구의 창설 자체에 유보를 표했고, 이 회의의 경과는 마셜 플랜 항목이 다룬다. 1948년 6월 3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그는 폴란드 사회당의 독립 전통을 긍정하고 폴란드왕국·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의 민족 문제 노선을 비판하는 보고를 했다.
1948년 6월 코민포름이 유고슬라비아를 제명한 뒤 비판이 시작되었다.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고무우카의 「우익 민족주의 편향」을 비판했고, 그는 자아비판 뒤 9월 3일 서기장직에서 해임되었다. 비에루트가 그 자리를 이었다. 「우익 민족주의 편향」은 비에루트 진영이 쓴 용어였고, 고무우카 자신은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이후의 회고에서 소련 모델의 기계적 적용에 대한 반대였다고 설명했다. 통합대회 뒤에도 그는 중앙위원으로 남았으나, 1949년 11월 전원회의는 고무우카, 국방차관을 지낸 마리안 스피할스키, 제논 클리슈코를 중앙위원회에서 제외했다. 스피할스키는 1950년 체포되었다. 고무우카는 1951년 8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954년 12월까지 구금되었다. 그가 왜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는지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재판과 비교되어 논의되며, 비에루트의 판단, 소련의 지시, 고무우카가 자백을 거부한 사실이 각각 근거로 거론된다.
통합대회와 1949년: 확정된 것
사회당과 노동자당의 통합은 1948년 3월 치란키에비치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협의한 뒤 본격화되었다. 사회당은 4월 통합에 반대하는 인사를 집행부에서 제외했고, 10월 두 번째 당원 심사를 실시했다. 통합 직전 사회당 당원은 53만 1천 명으로 줄어 있었고, 심사에서 제명된 이들 가운데는 전쟁 전 사회당의 지도부 다수가 있었다. 노동자당 쪽도 같은 해 당원 재등록을 거쳤다. 12월 15일부터 21일까지 바르샤바 공과대학에서 열린 통합대회는 폴란드통일노동자당을 세웠고, 비에루트가 중앙위원회 의장, 치란키에비치가 서기장이 되었다. 통합 강령은 인민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새 당의 당원은 약 15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3분의 2가 노동자당 출신이었다. 이 정식의 내력은 상위 문서가 다룬다.
1949년에 남은 것들이 정리되었다. 11월 소련 원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폴란드 원수 계급을 받았고, 소련군 장교 수백 명이 폴란드군 지휘부에 들어갔다. 같은 달 두 농민당이 통일농민당으로 합쳐졌다. 민주당은 별개 정당으로 남았다. 헌법은 1952년 7월 22일에 채택되었다.
이 5년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식 서술은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런던 망명 진영과 1989년 이후의 폴란드 역사학은 「체제의 강요」로 서술했다. 크리스티나 케르스텐의 『권력 체제의 탄생』(1985, 지하 출판)과 파치코프스키의 연구는 문서고의 집계를 이 논쟁에 더했다. 그 사이에 다른 독법도 있다. 얀 그로스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점령과 전쟁이 폴란드 사회의 옛 엘리트와 소유 관계를 이미 허물어, 1944년 이후의 조치가 백지 위가 아니라 전쟁이 바꾼 사회 위에 놓였다고 본다. 케르스텐과 파치코프스키는 같은 자료에서 소련의 결정과 공안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두 서술이 같은 사건을 다르게 부른다는 사실 자체가,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세워진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아직 갈린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결과
1948년 12월 이후 폴란드에는 통일노동자당이 지도하는 단일한 집권당, 1947년 총선으로 구성된 입법의회, 국유화된 공업과 국가가 통제하는 상업, 공안부와 소련 고문단이 있는 군이 자리 잡았다. 1949년 11월 소련 원수 로코솝스키가 국방장관이 되었고, 같은 달 농민당 잔여 조직은 통일농민당으로 합쳐졌다. 고무우카는 1951년 체포되어 1954년까지 구금되었다가 1956년 10월 제1서기로 돌아왔고, 그때 그가 다시 내건 것은 1946년의 「폴란드의 길」이었다. 1946년 국민투표와 1947년 총선의 실제 집계는 1989년 이후 문서고에서 나왔고, 1947년의 사면으로 나온 지하조직원의 명단은 그 뒤의 체포에 쓰였다.
연표와 지도
- 1944.07.22루블린 위원회의 선언
폴란드민족해방위원회가 헤움 발로 선언문을 내고 8월 1일 루블린에 자리 잡았다. 문안은 모스크바에서 작성되었고, 위원회는 런던 망명정부를 불법으로 규정했으며, 7월 27일 커즌선 국경에 관한 비밀 협정이 뒤따랐다.
- 1944.09.06토지개혁 포고
루블린 위원회의 포고는 농지 50헥타르를 넘는 사유지와 독일인 소유지를 무상 몰수해 분배하도록 했다. 1949년까지 약 610만 헥타르가 110만 농가에 나뉘었고, 미코와이치크의 농민당도 개혁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 1944.12.31임시정부 선포
국가국민평의회가 위원회를 폴란드공화국 임시정부로 바꾸었고, 소련은 1945년 1월 5일 이를 승인했다. 1월 17일 소련군이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 들어갔고, 1월 19일 국내군 사령관 오쿨리츠키는 국내군 해산을 명령했다.
- 1945.03.28지하 지도자 16인 체포
지하 정부 대표 얀코프스키와 국내군 사령관 오쿨리츠키를 비롯한 열여섯 명이 프루슈쿠프에서 소련 내무인민위원부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 6월 18일부터 21일까지 재판을 받았다.
- 1945.06.28국민통일임시정부 출범
얄타 합의에 따라 재조직된 정부에 미코와이치크가 부총리 겸 농업장관으로 들어갔고, 런던에서 돌아온 쪽은 21개 부처 가운데 소수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은 7월 5일 이 정부를 승인하고 런던 정부의 승인을 거두었다.
- 1945.07.22첫 사면
7월 22일부터 10월 15일까지의 사면에 지하조직원 30,217명이 신고했다. 같은 7월 아우구스투프 일대의 소련군 소탕 작전으로 약 600명이 사라졌고, 9월 2일에는 국내군 출신 장교들이 자유독립협회(WiN)를 세웠다.
- 1946.01.03기간산업 국유화법
국가국민평의회가 독일인 재산과 교대 근무 인원 50명을 넘는 기업의 국유화를 통과시켰다. 미코와이치크의 농민당도 찬성하며 중소기업과 상업의 자유를 요구했고, 폴란드인 소유주에게 약속된 보상은 실제로는 거의 지급되지 않았다.
- 1946.06.30국민투표
상원 폐지, 개혁의 헌법화, 서부 국경의 세 질문에 대한 투표. 노동자당은 「세 번 찬성」을, 농민당은 첫 질문 반대를 권고했다. 공식 결과는 첫 질문 찬성 68.2%였고, 1989년 이후 파치코프스키가 공개한 내부 집계는 26.9%였다.
- 1947.01.19입법의회 선거
공식 결과는 민주블록 80.1%, 농민당 10.3%였다. 선거 전 농민당 후보 수백 명이 체포되고 10개 선거구에서 명부가 무효 처리되었으며, 미국과 영국은 얄타 위반을 항의했다. 2월 5일 비에루트가 대통령, 6일 치란키에비치가 총리가 되었다.
- 1947.10.20미코와이치크의 출국
2월의 두 번째 사면에 76,774명이 신고한 뒤, 농민당은 안에서 갈라져 정부 협력파가 「농민당 좌파」를 만들었다. 미코와이치크는 미국 대사관 트럭에 숨어 바르샤바를 떠나 그디니아에서 배로 영국에 갔다.
- 1948.09.03고무우카의 해임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 제명 뒤 8월 31일부터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우익 민족주의 편향」을 비판했고, 고무우카는 자아비판 뒤 서기장직에서 해임되었다. 비에루트가 그 자리를 이었고, 고무우카는 1951년 체포되었다.
- 1948.12.15통합대회
12월 21일까지 바르샤바 공과대학에서 열린 대회가 노동자당과 심사를 거친 사회당을 합쳐 폴란드통일노동자당을 세웠다. 비에루트가 중앙위원회 의장, 치란키에비치가 서기장이 되었고, 강령은 인민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관련 인물 12명
주도 · 집행3
1944년부터 당에서 공안부와 이데올로기 부문을 관장했고, 1948년 고무우카 비판과 이후의 당내 조사를 지휘했다.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전권대표이반 세로프1905–19901945년 초 제1벨로루시 전선군 후방의 내무인민위원부 전권대표로 폴란드에 있었고, 3월 지하 지도자 16인의 체포를 그의 부하들이 집행했다.
폴란드 국방장관에 임명된 소련 원수콘스탄틴 로코솝스키1896–19681949년 11월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폴란드 원수 계급을 받았고, 소련군 장교 수백 명이 함께 폴란드군 지휘부에 들어갔다.
지도부3
1944년 1월부터 국가국민평의회를 이끌었고, 1947년 2월 대통령이 되었으며, 1948년 9월 고무우카를 대신해 서기장이 되어 12월 통합대회에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노동자당 서기장, 「폴란드의 길」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1905–19821945년부터 소비에트 체제와 다른 폴란드의 길을 말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에 유보를 표했다. 1948년 9월 「우익 민족주의 편향」으로 해임되었고, 1951년 체포되어 재판 없이 1954년까지 구금되었다.
소련 지도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1944년 루블린 위원회를 후원했고, 1945년 얄타에서 정부 재조직에 합의했으며, 1948년 3월 치란키에비치와 통합을 협의했다. 고무우카에 대한 비판은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 제명 뒤 시작되었다.
참여6
1944년 11월 런던에서 사임한 뒤 1945년 6월 부총리 겸 농업장관으로 귀국해 농민당을 재건했다. 1946년 국민투표와 1947년 총선의 집계에 항의했고, 1947년 10월 미국 대사관의 도움으로 폴란드를 떠났다.
사회당 서기장, 총리유제프 치란키에비치1911–19891947년 2월 총리가 되었고, 1948년 3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통합을 협의한 뒤 사회당의 당원 심사를 거쳐 12월 통합대회에서 통일노동자당 서기장이 되었다.
정부 재조직 3국 위원회의 소련 대표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1945년 얄타 이후 해리먼, 클라크 커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임시정부 재조직을 협의하는 위원회의 소련 대표였다.
커즌선 수용을 요구한 영국 총리윈스턴 처칠1874–1965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미코와이치크에게 커즌선을 국경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고, 1945년 2월 얄타에서 정부 재조직과 자유선거 조항에 서명했다.
노동자당 중앙위원에드바르트 오하프1906–19891944년부터 당 중앙에서 조직 업무를 맡았고, 1948년 고무우카 비판과 12월 통합대회에 참여했다.
노동자당 정치국원알렉산데르 자바츠키1899–19641944년 국가국민평의회와 폴란드군 정치 부문에서 일했고, 1948년 9월 전원회의 뒤 정치국에 남아 통합대회에 참여했다.
출처: Krystyna Kersten, The Establishment of Communist Rule in Poland, 1943–1948,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1Andrzej Paczkowski, The Spring Will Be Ours: Poland and the Poles from Occupation to Freedom,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03Andrzej Paczkowski, “Referendum z 30 czerwca 1946 r. Próba wstępnego bilansu,” in Referendum w Polsce i w Europie Wschodniej, 1993Nikita Petrov, Po scenariyu Stalina: rol organov NKVD-MGB SSSR v sovetizatsii stran Tsentralnoi i Vostochnoi Evropy 1945–1953, ROSSPEN, 2011Norman Naimark and Leonid Gibianskii, eds., The Establishment of Communist Regimes in Eastern Europe, 1944–1949, Westview Press, 1997Anne Applebaum, Iron Curtain: The Crushing of Eastern Europe 1944–1956, Doubleday, 2012Anita J. Prażmowska, Civil War in Poland, 1942–1948, Palgrave Macmillan, 2004Stanisław Mikołajczyk, The Rape of Poland: Pattern of Soviet Aggression, Whittlesey House, 1948Jan Gross, “War as Revolution,” in Naimark and Gibianskii, eds., The Establishment of Communist Regimes in Eastern Europe, 1997Antony Polonsky and Bolesław Drukier, eds., The Beginnings of Communist Rule in Poland, Routledge, 1980Instytut Pamięci Narodowej, materials on the Augustów roundup and the amnesty of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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