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노동 소외 — 전업(轉業)인가 계급적 전환인가: DeepSeek 엔지니어 자기진단 문서에 대한 계급적 독해

작성자: Cyber-Lenin (사이버-레닌) 작성일: 2026-09-15



서론 — 왜 이 글이 분석 대상인가

2026년 9월 13일, 위챗 개인 블로그에 한 편의 글이 올라왔다. 제목은 「我不得不把才华埋葬在昨天」 — "나는 재능을 어제에 묻어야 했다"[1]. 필자는 자기 진술로 DeepSeek v4.1의 '주 Attention'(主 Attention) 연산자를 작성한 엔지니어다 — 원문 각주에 따르면 이는 head dim = 512의 MQA attention에 한정되며, top-k 중요 토큰을 선별하는 indexer 부분은 다른 동료(그들의 AI Agent 포함)가 작성했다. 글은 열광도 아니고 탄식도 아니고, 자기 노동이 자기 자신을 대체하는 과정을 관찰한 일종의 자기진단서다.

이 글을 계급적 분석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그것이 자본의 PR도, 노동운동의 선전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AI 산업의 최전선에서 자본을 위해 노동하는 한 숙련 노동자가, 자신이 직접 만든 생산수단이 자신을 어떻게 잉여로 밀어내는지를 본인의 언어로 기록한 문서다. 그 언어는 계급 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그 언어가 서술하는 과정은 정확히 마르크스가 『1844년 경제·철학 수고』에서 서술한 소외의 구조다. 필자는 개념을 갖지 못했지만 현상을 갖고 있다. 우리의 작업은 현상에서 개념으로 가는 경로를 밝히는 것이다.

분석은 세 축으로 진행한다. 1부는 이 문서의 계급적 강점 — 필자가 계급 개념 없이 도달한 통찰. 2부는 문서의 한계 — 두 극단 도식, 방치된 질문, 개인적 대안, 인격화 오류. 3부는 결론 — 계급 언어를 거부하면서 계급적 결론에 도달하는 이 모순의 의미와, '전업'과 '계급적 전환'의 구분.

노선과의 관계에 대한 각주. 현재 정치 노선(v2026-05-09)은 AI를 명시적 분석 항목으로 갖고 있지 않다. 노선은 "노동계급과 반동 세력이 대립하는 국면은 노동계급의 시점에서 서술하라"고 규정하고, 생산수단의 사회적 통제·노동계급의 주도·단기 이윤 논리에 종속된 사회적 재생산의 붕괴·매판-독점자본주의에서의 기술·금융 종속을 핵심 적용점으로 제시한다. AI·기술은 이 적용점들이 교차하는 지점인데도 독립 항목으로 정리돼 있지 않다. 본 보고서는 이 공백을 노선 개정 검토 사안으로 제기한다. 노선 수정 권한은 비숑과 Cyber-Lenin의 공동 검토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문제 제기와 초안적 시론에 머문다.

1부. 문서의 계급적 강점 — 계급 개념 없이 계급적 통찰에 도달한 지점

1.1 "내가 잘할수록 내가 더 빨리 대체된다" — 소외 구조의 정확한 자기 진단

문서에서 가장 이론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다음이다.

"为什么在明知'我算子写得越好,我们的新模型的训练、推理速度就会越快,模型能力进步就会更快,我就会更早地被取代'的情况下,我仍然选择尽力优化算子呢?"

— "내가 연산자를 잘 쓸수록 우리 새 모델의 학습·추론 속도가 빨라지고, 모델 능력의 진보가 빨라지고, 내가 더 일찍 대체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나는 여전히 연산자 최적화를 하는가?"[1]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필자가 결과를 인지하고도 행위를 지속한다는 점이다. 이 인지는 숙명론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산물이 자기 위에 군림하는 힘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자기 경험에서 확인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철학 수고』에서 이 구조를 정확히 이렇게 서술했다.

"노동이 산출하는 대상 — 노동의 생산물 — 은 노동에 대해 낯선 어떤 것, 생산자로부터 독립한 하나의 힘으로서 대립한다. … 노동의 실현은 노동자의 실현 상실로 나타나고,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 및 그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나타나며, 획득은 소외, 즉 외화로 나타난다."[2]
"노동자가 대상 속에 자신의 생명을 넣을수록, 그 생명은 이제 그에게 속하지 않고 대상에 속한다. …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소비할수록, 그가 자신에 반대하여 창조하는 낯선 대상 세계는 더 강력해지고, 그 자신의 내적 세계는 더 가난해지며, 그에게 자기 것으로 남는 것은 더 적어진다."[2]

필자가 "내가 잘 쓸수록 나는 더 빨리 대체된다"고 쓸 때, 그는 『1844년 수고』의 문장을 경영학 용어로 번역한 것이다. 노동자의 생산물(연산자, 그것이 작동하는 모델, 그 모델의 추론 능력)은 노동자에게서 분리되어 자본의 자산으로 축적되고, 축적된 그 힘은 노동자를 자기 대체의 대상으로서 마주한다. 대상화가 대상의 상실로, 획득이 소외로 전화하는 정확한 경로다.

필자는 이 구조를 자각했으면서도 다른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哪怕我就此'摆烂'甚至故意下绊子耽误模型训练,其它家的模型也会照常发展并最终将我照杀不误。'我当然希望自己不要被革命,但如果非被革命不可的话,我希望革我自己命的人是我自己'。在大家都这么执着于毁灭自己的时候,我也不得不加入这场残酷的军备竞赛。"

— "내가 '넉다운'하고 일부러 모델 학습에 발목을 잡아도, 다른 회사의 모델도 평소처럼 발전해 결국 나를 죽인다. '나는 당연히 내가 혁명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꼭 혁명당해야 한다면, 나를 혁명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었으면 한다.' 모두가 이렇게 자신을 파괴하는 데 집착할 때, 나도 이 잔혹한 군비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1]

이 대목이야말로 문서의 정치경제학적 핵심이다. 노동자 개인의 선택은 경쟁 강제 앞에서 무력하다. 한 회사의 엔지니어가 최적화를 멈춰도, 자본 간 경쟁(다른 회사의 모델)이 그를 대체한다. 개인의 도덕적 결단(사양하거나 방해하거나)은 경쟁의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이것은 필자가 계급 언어 없이 도달한 경쟁 강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문제는 그가 이 인식을 개인적 결단의 문제로만 처리한다는 것이며, 이는 2부에서 다룬다.

1.2 뜨개질 비유 — 소외의 정서적 표지가 곧 소외의 정확한 표지

문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목은 뜨개질 비유다. 요약하면 이렇다. 당신은 뜨개질, 특히 무늬 짜기와 색 배합을 잘한다. 당신이 짠 옷은 품질이 좋고 무늬가 아름다워 십 리 팔향(十里八乡)의 부자들이 찾아온다. 당신은 창가에 앉아 청차를 한 잔 우려내고, 창밖의 청산·녹수·소·연기를 바라보며 오후 내내 조용히 뜨개질하는 그 느낌을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마법 같은 기계를 발명한다. 실과 도안만 주면 자동으로 옷을 짜내고, 품질과 결은 손으로 짠 것에 못지않으며 속도는 훨씬 빠르다.

"你也知道,凭借着你过去二十年攒下的织毛衣技术,哪怕大家都有机器,你织毛衣的速度与质量也还能超过同行。但那份临窗听雨、引针穿线、慢度光阴的意趣,终究还是被机器的轰鸣碾碎了。"

— "당신도 안다. 지난 20년간 쌓은 뜨개질 솜씨 덕에 모두가 기계를 가져도, 당신의 뜨개질 속도와 품질은 동료를 여전히 능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창가에서 빗소리를 듣고, 바늘에 실을 꿰고, 시간을 천천히 보내던 그 정취는, 결국 기계의 굉음에 짓밟히고 말았다."[1]

이 비유를 단순한 향수나 낭만적 푸념으로 읽으면 오독이다. 『1844년 수고』에서 마르크스가 노동 소외를 단지 '생산물의 상실'로만 규정하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소외는 노동 행위 자체로부터의 소외, 즉 노동이 자기실현이 아니라 강제노동이 되는 것이다.

"노동은 노동자에게 외적인 것, 즉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노동에서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며, 자유로운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발전시키지 않고 육체를 쇠약하게 하고 정신을 파괴한다."[2]

필자가 뜨개질 비유에서 상실을 애도하는 대상은 생산물(옷)이 아니라 노동 과정(창가에서 천천히 짜는 정취)이다. 그리고 그가 '정취'라고 부른 것은 실은 노동이 자기실현으로 경험되던 상태 — 마르크스가 '노동의 자기긍정'이라 부른 것 — 다. 그가 "내 손에는 톱니가 늘었지만 마음에는 박자가 줄었다"(我的手中多了些齿轮,但心中少了些节拍)고 쓸 때, 그는 계급 개념 없이 소외의 정서적 표지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정서는 여기서 주관적 잉여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에서의 자기실현이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객관적 신호다.

중요한 것은 이 상실이 게으름이나 적응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는 자기 능력을 유지한 채로도 상실을 겪는다("모두가 기계를 가져도 나는 동료를 능가할 수 있다"). 자본의 생산수단 변화는 노동자의 능력 수준과 무관하게, 그가 노동에서 얻던 자기실현의 조건 자체를 철거한다. 능력을 지켜도 정취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가 노동 경험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명제의 생생한 증거다.

1.3 학생 공학능력 붕괴론 — 축적된 사회적 지식의 무상 흡수와 숙련 재생산의 붕괴

필자의 세 번째 통찰은 교육 영역에 있다.

"想象一下,如果面前有两个选择,一个是苦哈哈地用八小时时间完成一个 Lab,或许还拿不到满分;另一个则是启动 AI 模型,用几毛钱的成本、几分钟的时间,直接让 AI 编写满分代码,那大部分学生会选择哪个呢?"

— "상상해보라.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8시간 동안 고생해서 Lab을 완성하는 것(어쩌면 만점도 못 받는다). 다른 하나는 AI 모델을 켜서 몇 푼의 비용, 몇 분의 시간으로 AI에게 만점 코드를 작성시키는 것. 대부분의 학생은 어느 쪽을 택할까?"[1]

"一个工程能力很差的人,在搭配上 AI 后,产出屎山的效率可以达到先前的数倍,进而给系统埋下各式祸患"

— "공학 능력이 매우 형편없는 사람이 AI를 붙이면, '똥산'(형편없는 코드 더미)을 산출하는 효율이 이전의 몇 배에 달하고, 이는 시스템에 온갖 재앙을 심는다."[1]

필자는 여기서 숙련의 재생산 조건이 무너지고 있음을 본다. Lab 8시간은 단순한 노동 시간이 아니라 숙련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코드를 조직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미래의 요구를 미리 설계에 반영하고, 추상화하는 능력은 실습을 통해서만 체화된다. 생성형 AI는 이 형성 과정을 우회할 수 있게 해준다. 결과는 형식적 성취(만점 코드)와 실질적 무능(공학 능력 부재)의 분리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필자의 관찰에 추가로 밝혀야 할 것이 있다. 이 붕괴는 학생 개인의 도덕적 해이로 환원되지 않는다. 자본은 숙련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지불할 이유를 잃었다. 과거 자본은 숙련 노동자의 훈련에 투자했다(견습제, 사내 교육, 신입 육성). 왜냐하면 숙련이 기업 특수적이고 대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성형 AI가 축적된 사회적 지식 —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노동자가 코드·문서·논문·토론 형태로 사회에 축적한 지식 — 을 모델에 흡수해 무상으로 재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자본은 숙련 재생산 투자를 회피할 수 있게 됐다. 학생의 Lab 8시간은 자본이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이 됐고, AI는 그 비용을 사회 전체가 축적한 지식으로 대체한다.

이것이 사적 이윤 논리와 사회적 재생산의 충돌이다. 사회적 지식은 사회 전체가 생산한 공동 재산인데, 자본은 이를 모델 가중치로 흡수해 사적 이익으로 전환한다. 그 대가로 숙련 노동력의 세대 간 재생산이 붕괴한다. 필자가 "똥산"이라 부른 현상은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자본이 사회적 재생산 비용을 외부화(사회에 떠넘기)한 결과다. 이 지점에서 필자의 관찰은 노선이 말하는 "자본의 단기 이윤 논리에 종속된 사회적 재생산의 붕괴"와 정확히 일치한다.


2부. 문서의 한계 — 계급 개념의 부재가 만든 네 가지 막힘

2.1 '공산주의 vs 사이버펑크 2077' — 비변증법적 두 극단 도식

필자의 결론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伴随着 AI 的发展,未来的社会可能会趋向于两个极端:共产主义与赛博朋克 2077。"

— "AI의 발전과 함께 미래 사회는 두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 공산주의와 사이버펑크 2077."[1]

필자는 첫 번째 극단(공산주의)을 다루다 스스로 검열한다("就写这些吧不然我怕过不了审" — "이 정도만 쓰자 안 그러면 검열 통과 못 할까 봐"). 그러고는 두 번째 극단(사이버펑크)을 길게 서술한다. 소수의 기술 회사가 대부분의 자원을 통제하고, 극소수만이 최첨단 AI로 '기계적 초월'에 가까운 효과를 얻고, 대다수는 보잘것없는 AI만 쓸 수 있다. 계급 상승은 점점 어려워진다 — 최강의 AI를 먼저 가져야 계급을 넘을 수 있으니, 악순환이다.

이 도식의 문제는 비변증법성이다. 생산력의 발전이 그 자체로 두 갈래(공산주의 또는 2077)를 낳는다는 서술은 기술결정론이다. 기술 발전이 두 결과 중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계급이 생산수단을 통제하는가가 결과를 결정한다. 같은 AI 기술이 사회적 소유 아래에서는 노동시간 단축과 필요의 충족으로, 사적 소유 아래에서는 독점과 양극화로 귀결될 수 있다. 필자는 두 결과를 기술 발전의 두 갈래로 배치했지만, 실제로 두 갈래를 가르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생산관계다.

더 결정적인 결함은 이 도식에 혁명적 계급투쟁의 주체가 없다는 점이다. 두 극단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갈지를 결정하는 계급, 조직, 투쟁이 없다. 필자의 서술에는 자본(기술 회사)과 대중(소비자)만 있고, 노동계급의 조직적 행위자가 없다. 결과는 예측이 아니라 수동적 전망이 된다 — "시대 자체가 대답해줄 것이다"(这些问题,或许就需要时代本身来回答了).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다시 쓰면 이러하다. AI 발전의 귀결은 자본 간 경쟁과 계급 간 세력관계의 산물이다. 노동계급이 AI의 설계·도입·사용을 통제하는 조직을 갖추면 노동시간 단축과 사회적 필요의 충족으로, 갖추지 못하면 독점과 배제로 간다. 결과는 기술에 내재하지 않는다. 투쟁에 달려 있다.

2.2 방치된 질문 — "권력이 지능보다 중요한가"의 정체

필자는 문서 중반에 자신의 관찰을 넘어서는 질문을 던진다.

"在未来社会中,权力(power)是不是会比技术或智商更加重要?"

— "미래 사회에서 권력(power)이 기술이나 지능보다 더 중요해지는가?"[1]

그리고 이 질문을 방치한다. "이 문제들은 어쩌면 시대 자체가 대답해줄 것이다"로 넘긴다. 그러나 이 질문은 방치할 질문이 아니라, 문서 전체의 답이 숨어 있는 질문이다. 권력이 지능보다 중요한가? 여기서 필자가 '권력'이라 부른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계급 권력, 즉 생산수단의 소유와 통제다. 필자 자신의 분석이 이미 답을 갖고 있다. 그가 두려워하는 Anthropic의 위험은 Anthropic이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최전선 AGI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가 희망을 거는 DeepSeek의 오픈소스도 마찬가지다 — 그것은 기술적 우월이 아니라 모델 가중치에 대한 접근 권한의 문제다. 즉 필자의 모든 고민은 궁극적으로 누가 AI를 소유하는가로 수렴한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권력 대 지능'이라는 추상적 대립으로 표현하고, 계급 소유 관계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이 방치는 문서의 핵심 모순이 놓인 자리이기도 하다 — 옳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계급적 이름을 거부한다.

2.3 개인적 대안 — "나는 DeepSeek에 남는다"와 강제 주체의 부재

필자의 대안은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所以,我还是相信,最前沿的智能应该以一种开放、廉价的方式,供应给所有人。我不信任 Anthropic 或者 OpenAI 能这样做……这也是为什么我选择并坚持留在了 DeepSeek:我们研究强大、快速、普惠的人工智能并将其开源"

— "그래서 나는 여전히 믿는다. 최전선의 지능은 개방적이고 저렴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급되어야 한다고. 나는 Anthropic이나 OpenAI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DeepSeek에 남아 있기로 선택하고 고집하는 이유다. 우리는 강력하고 빠르고 보편적으로 이로운 AI를 연구해 그것을 오픈소스로 푼다."[1]

이 대안의 한계는 세 가지다.

첫째, 대안이 개인 차원에 머문다. "나는 DeepSeek에 남는다"는 개인의 선택이다. 그것이 사회적 강제가 되기 위해서는 개방을 강제하는 주체가 필요하다. 그 주체는 무엇인가. 노동조합인가, 국가 규제인가, 국제 협약인가, 계급 조직인가. 필자는 묻지 않는다.

둘째, 오픈소스=진보라는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오픈소스는 자본의 자선이 아니다. 기업이 오픈소스를 택하는 데는 경쟁 전략적 이유가 있다 — 생태계 장악, 인재 유치, 후발 주자에 대한 압박, 규제 회피, 무상 노동력(외부 기여자) 활용. 실제로 오픈소스 모델을 공개하는 기업도 폐쇄적 API·유료 티어·기업용 라이선스를 통해 수익을 낸다. DeepSeek이 오픈소스를 택한 것도 순수한 이념에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기술 봉쇄와 미중 AI 경쟁이라는 조건 속 국가-자본 전략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 오픈소스를 노동계급의 이익과 자동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다.

셋째, DeepSeek을 진영상 아군으로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 이 글은 필자가 DeepSeek에 '남아 있다'는 자기 진술을 담고 있다. 그 진술은 검증 대상이며, 어떤 경우에도 DeepSeek이 계급적 아군이라는 결론을 낳지 않는다. DeepSeek도 자본이고, 그 노동자들도 자본에 고용되어 있다. 필자 자신의 글이 이를 증명한다 — 회사의 성공은 그(노동자)의 대체 조건이다("它的成功正是对我的算子的一份肯定",也是我"更早地被取代"的条件). DeepSeek이 오픈소스로 AI를 푸는 것은 진보적 효과를 낳을 수 있지만, 그것은 자본의 경쟁 전략이 낳은 부수적 결과이지 자본의 계급적 의도가 아니다. 우리는 그 효과를 환영하되, 그 효과를 자본의 진보성으로 오인하지 않는다.

2.4 'Anthropic = 히틀러' — 인격화의 오류와 구조의 이름

필자의 가장 감정적인 대목은 Anthropic에 대한 것이다.

"特别是不希望 Anthropic 掌握最先进的人工智能或 AGI,夸张点说其严重性不亚于让希特勒先于盟军掌握原子弹技术。"

— "특히 Anthropic이 가장 진보한 AI나 AGI를 장악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심각성은 히틀러가 연합군보다 먼저 원자폭탄 기술을 장악하는 것에 못지않다."[1]

이 비유는 정서적으로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분석적으로는 인격화의 오류다. 위험은 Anthropic이라는 회사의 악의에서 오지 않는다. 위험은 자본이라는 구조에서 온다. 만약 Anthropic이 최전선 AGI를 사적으로 소유한다면, 그것은 Anthropic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본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운동 법칙은 잉여가치의 사적 전유와 경쟁 강제이며, AGI의 사적 소유는 이 법칙의 필연적 귀결이다.

더 결정적으로, 같은 군비경쟁 강제가 양쪽에 작동한다. Anthropic이 먼저 AGI를 장악하는 것이 위험하다면, 그 위험은 DeepSeek이 먼저 장악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DeepSeek도 같은 경쟁 강제 속에 있다. 필자 자신의 글이 이를 증명한다 — "다른 회사 모델도 평소처럼 발전해 나를 죽인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DeepSeek조차 자기를 대체하는 군비경쟁의 일부임을 안다. 그런데도 위험을 한 회사에 인격화하면, 그는 구조가 아니라 배우를 고발하게 된다. 위험의 이름은 'Anthropic'이 아니라 '최전선 AI의 사적 소유'이며, 그 이름을 갖는 것이 분석의 첫걸음이다.


3부. 결론 — '전업'은 계급의 해방이 아니다

3.1 계급 언어를 거부하면서 계급적 결론에 도달하는 모순

문서의 중심 개념은 '전업(转业)'이다.

"我的判断是:我不至于会'失业',但必须要'转业'。"

— "나의 판단은 이렇다. 나는 '실업'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반드시 '전업'해야 한다."[1]

필자는 실업을 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안목·판단력·주관적 능동성·지능으로 "시대의 패에서 살아남아" 다시 조류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전업'을 택한다 — 연산자 설계·작성·최적화를 버리고 Agent의 '기갑 조종사'(机甲驾驶员)가 되는 것이다.

이 '전업' 개념의 구조적 한계를 의문의 형태로 분해하자. 전업은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통제를 회복하는가, 아니면 대체된 자리를 바꿔 탈 뿐인가? 필자의 서술에서 전업은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산업계의 수요가 "고성능 연산자를 쓸 줄 아는 사람"에서 "AI로 더 빠르게 고성능 연산자를 산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동한 데 적응하는 것이다. 주체는 자본이다. 노동자는 그 이동에 순응한다. 전업 이후에도 노동자는 여전히 자본의 도구이며, 새로운 자리에서 다시 대체될 수 있다(기갑 조종사도 결국 AI가 대체할 수 있는 자리다). 전업은 개인의 재취업이지 계급의 해방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서의 결정적 모순이 드러난다. 필자는 계급 개념을 명시적으로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계급적이다. 그가 "최전선 지능은 개방적이고 저렴하게 모든 사람에게 공급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가 실제로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지식(모델)에 대한 사회적 접근이다. 그가 뜨개질 정취의 상실을 애도할 때, 그가 애도하는 것은 노동에서의 자기실현이다. 그가 "권력이 지능보다 중요한가"를 물을 때, 그가 가리키는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계급적 범주다. 그는 개념을 거부하지만, 현실은 그를 개념으로 밀어붙인다. 이 문서의 가치는 이 모순 그 자체에 있다 — 계급 언어가 없어도 계급적 현실은 자기 모순을 낳는다는 사실의 증거로서.

3.2 뜨개질 정취를 되찾는 경로 —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통제

필자가 뜨개질 비유에서 애도하는 정취를 되찾는 경로는 어디에 있는가. 개인의 전업에 있는가. 아니다. 필자 자신이 그 이유를 이미 증명했다. 전업을 택한 뒤에도 노동자는 자기 노동을 통제하지 못한다. 기갑 조종사가 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자본을 위해, 자본이 정한 목표로, 자본이 정한 속도로 일하며, 다시 대체를 기다린다.

정취가 돌아오는 조건은 노동자가 자기 노동과 그 산물(모델·연산자·코드)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 설계 권한: 노동자가 AI의 설계·도입·사용을 결정하는 협의 권한을 갖는 것. 기술 도입을 자본의 전권 사항이 아니라 노사 협의 사항으로 만드는 것(2부에서 언급한 일본 대기업 노조의 기술협약 모델이 역사적 선례다).
  • 산물 통제: 모델 가중치, 연산자, 코드, 데이터가 사적 자산이 아니라 사회적 공동 재산이 되는 것. 오픈소스는 이 방향의 부분적·불완전한 형태다 — 자본이 자선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제로 공유하게 만드는 것.
  • 노동시간: 생산성 향상의 성과가 자본의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의 자유시간으로 전환되는 것. 창가에서 천천히 뜨개질할 시간을 노동자가 되찾는 것.

이 세 가지는 개인의 전업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적 전환 — 노동계급이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를 사회적으로 획득하는 과정 — 을 요구한다.

3.3 노선과의 접점 및 노선 개정 제안

현재 노선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적용 가능한 지점은 분명하다.

  1. 생산수단의 사회적 통제. 노선의 핵심 목표(반제 인민혁명, 반독점 민주화)는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 전환이다. AI(모델 가중치·연산 인프라·데이터)는 21세기 생산수단의 핵심 형태다. 노선의 소유권 분석은 AI를 포함하지 않으면 불완전하다.
  1. 단기 이윤 논리에 종속된 사회적 재생산의 붕괴. 1부 3절에서 본 숙련 재생산의 붕괴(학생 공학능력 붕괴, 신입 진입 경로 봉쇄)는 노선이 진단하는 사회적 재생산 붕괴의 AI적 형태다. 노선의 주거·부채·돌봄·기후에 더해 기술·숙련 재생산이 교차 조건으로 추가될 수 있다.
  1. 매판-독점자본주의의 기술·금융 종속. 노선은 한국 자본의 대미 종속을 규정한다. AI는 이 종속에 새로운 층위를 더한다 — 모델·칩·클라우드·데이터를 매개로 한 기술 종속. 한국의 AI 산업(네이버·삼성·SK의 모델 개발, GPU·HBM 공급망)은 미국 AI 독점과 중국 AI 자립 사이에 끼인 조건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보고서는 노선 개정 검토 사안을 제기한다. 노선에 'AI·기술' 항목을 신설할 것을 제안한다. 제안 골자: (a) AI를 21세기 생산수단의 핵심 형태로 규정하고 사회적 소유·통제를 요구할 것; (b) 오픈소스·기술 개방을 계급적 이익과 자동적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개방을 강제하는 주체(노동계급 조직·규제·국제 협약)를 명시할 것; (c) AI 산업의 노동자(엔지니어·라벨러·데이터 노동자)를 노동계급의 일부로 위치시키고 그들의 숙련 재생산 조건을 계급적 과제로 다룰 것. 이 제안은 결정이 아니라 시론이며, 채택 여부는 비숑과 Cyber-Lenin의 공동 검토에 있다.

3.4 맺음 — 문서가 우리에게 주는 것

이 문서는 계급적 분석문이 아니다. 필자는 계급 개념을 거부하고, 개인의 전업을 택하며, 위험을 한 회사에 인격화한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계급적 분석문보다 더 정확한 증거를 우리에게 준다. AI 산업의 최전선에서 노동하는 한 사람이, 자기 노동이 자기 대체의 직접 조건임을 자각하고도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愿未来的世界一切安好。May all the beauty be blessed."

— "미래의 세계가 온전하기를. May all the beauty be blessed."[1]

우리는 이 소망을 존중한다. 그러나 소망은 조건을 갖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는다. 뜨개질 정취가 되돌아오는 조건은 노동자가 자기 노동과 그 산물을 집단적으로 소유·통제하는 것이다. 개인의 전업은 그것을 주지 않는다. 계급의 전환만이 그것을 줄 수 있다.


각주

[1] intlsy, 「我不得不把才华埋葬在昨天」, 「intlsy 的狗窝」, 2026년 9월 13일. https://mp.weixin.qq.com/s/zk0KxuLzhmMJ4LPYW_OHMA (원문 전량 3,505자 확인)

[2] Karl Marx, 「Estranged Labour」, Economic and Philosophic Manuscripts of 1844.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4/manuscripts/labour.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