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연대노조와 계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공산권 최초의 독립노조를 어떻게 낳았고, 왜 군사정권이 되어 그것을 짓밟았는가?
1980년 여름, 식료품 가격 인상에 맞선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은 21개 요구를 내건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으로 발전했고, 8월 31일 정부와의 협약을 통해 동구권 최초의 공인 독립노조인 '연대'(Solidarność)가 탄생했다. 1,000만 명이 가입한 연대노조는 16개월 동안 단순한 노동조합을 넘어 자치공화국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되었으나, 소련의 압박과 경제 파탄 속에서 당 제1서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1981년 12월 13일 계엄을 선포하고 군사평의회를 세워 연대를 불법화했다. 수만 명의 군경이 통신망을 차단하고 지도부를 구금했으며, 부이크 탄광에서는 특수진압대가 파업 광부 9명을 사살했다.
한 번의 총격, 한 번의 항복, 그리고 산 채로 썩어가는 약속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1970년대 내내 같은 대본을 반복해 왔다. 정부가 식료품 값을 올린다.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선다. 군경이 발포한다. 당이 서기를 교체하고 가격을 되돌린다. 모든 것이 진정되는 듯하다가, 몇 년 뒤 더 큰 빚과 더 낡은 공장, 더 분노한 국민을 안고 같은 지점으로 돌아온다.
1970년 12월,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정권이 육류와 유제품 가격을 대폭 인상하자 발트 해안 도시들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들이 당 청사를 불태웠고, 그디니아에서는 군대가 출근하던 노동자들의 열차를 향해 사격해 최소 44명이 사망했다. 고무우카는 물러났고, 상부 실레지아 탄광지대 출신의 테크노크라트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제1서기로 취임했다. 그는 그단스크와 슈체친을 직접 찾아가 노동자들에게 사과하고 가격 인상을 철회했다.
기에레크의 해법은 서방 차관이었다. 미국과 서독 은행에서 대규모로 빌려 새 공장을 짓고, 서방 기술을 수입하며, 소비재를 공급해 대중의 인내심을 샀다. 1971-1975년 국민소득은 연평균 9% 성장했고, 연 20만 호가 넘는 아파트가 지어졌으며, 폴란드는 피아트 126의 면허 생산으로 자동차를 가진 최초의 동구권 국가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빚으로 지탱된 소비였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서방 시장이 수축하자 폴란드 수출은 막혔고, 1971년 12억 달러에 불과했던 대외부채는 1979년 205억 달러로 불어났다. 단기 부채와 코메콘 채무까지 합하면 270억 달러에 달했으며, 원리금 상환액만 수출 총액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1979년 국민소득은 폴란드 전후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2.3%)을 기록했고, 육류와 설탕 같은 기초 식료품은 만성적인 공급 부족 상태였다.
1976년 6월 24일, 총리 피오트르 야로셰비치가 다시 가격 인상을 발표했다. 버터 33%, 육류 70%, 설탕 100%. 다음 날 라돔과 우르수스를 비롯한 전국에서 파업이 터졌다. 라돔에서는 2만 명이 당 청사를 점거하고 가구와 TV를 창밖으로 던졌으며 붉은 깃발을 내리고 백적 국기를 게양했다. 정부는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진압했고, 수천 명이 해고되고 구속되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랐던 것은 진압 이후의 일이었다.
1976년 9월, 14명의 지식인들이 「노동자방어위원회」(KOR)를 결성했다. 예지 안제예프스키, 야체크 쿠론, 얀 유제프 립스키 등이 서명한 창립 호소문은 구속 노동자 가족에 대한 법률·의료·재정 지원을 선언했다. KOR는 정보지를 발행하고, 독립출판사 NOWA를 세워 조지 오웰 등 금서들을 찍어냈으며, 1978년에는 '비행대학'을 조직해 검열 바깥에서 역사와 철학을 가르쳤다. 노동자 파업과 지식인 저항을 잇는 이 가교는 동구권에서 전례 없는 것이었다. 1977년 대사면 이후 KOR는 사회자위위원회(KSS-KOR)로 개편되어 더 넓은 시민권 운동으로 전환했다.
정권은 다른 적도 안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였다. 폴란드는 동구권에서 유일하게 집단농장화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교회를 파괴하는 데도 실패한 나라였다.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은 1953-1956년 가택연금을 견뎌낸 후, 교회를 국가로부터 분리된 유일한 대중조직으로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기에레크는 교회와의 공존을 선택했고, 1970년대 내내 새 성당이 건축되고 신학교가 운영되는 유일한 공산권 국가로 남았다.
1978년 10월 16일, 크라쿠프 대주교 카롤 보이티와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었다. 폴란드 공산당 정치국은 충격에 빠졌다. 기에레크는 각료들에게 "하느님 맙소사,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교황은 이듬해 6월 2일부터 9일간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 그니에즈노, 쳉스토호바, 아우슈비츠, 고향 바도비체를 돌았다. 전국 인구 3,600만 명 중 1,100만 명이 그를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바르샤바 승리광장에서 그는 "성령이여, 이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고, 수십만 명의 군중이 침묵 속에 들었다. 교황은 봉기를 호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정권이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임을 눈으로 확인했다. 역사가 파베우 스키빈스키의 표현대로, 이 순례는 "눈사태를 시작한 작은 돌멩이"였다.
겨울이 얼리고 교황이 깨운 나라
1978년 12월 말,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려온 한랭고기압이 폴란드를 덮쳤다. 섭씨 영하 25도, 적설량 84센티미터(수바우키), 바르샤바에는 70센티미터의 눈이 쌓였다. '세기의 겨울'로 불린 이 한파는 단순한 기상 이변이 아니었다. 철로가 갈라지고 선로전환기가 얼어붙으면서, 화력발전소에 공급되어야 할 석탄이 광산에서 나오지도, 실려 나가지도 못했다. 바르샤바의 트램은 멈추었고, 1천 대의 택시 중 가동된 것은 열두 대뿐이었다. 송유관 동파로 도시 전체가 난방과 온수를 잃었다.
이미 1970년대 초 기에레크가 서방 차관으로 추진한 '역동적 발전' 전략은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삐걱대고 있었다. 1971년 12억 달러였던 대외순부채는 1979년 205억 달러로 불어났고, 여기에 단기부채 20억 달러와 동구권 차관까지 더하면 실질 부채는 270억 달러에 육박했다. 부채상환비율(원리금/수출액)은 1971년 12.4%에서 1980년 81.8%로 치솟아, 국제통화기금(IMF)이 '관리가능'하다고 보는 40%를 두 배나 넘겼다. 1979년에는 전후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소득이 마이너스 성장(-2.3%)을 기록했다. 1976년 6월 가격 인상 시도가 라돔과 우르수스에서 유혈 진압된 후 브레즈네프가 '더 이상의 가격 조작은 하지 말라'고 경고한 터라, 정부는 우회로를 택했다. 더 나은 품질의 육류를 '상업 상점'(sklepy komercyjne)으로 돌려 시장가격에 가깝게 판매한 것이다. 이 상업 판매 비중은 1978년 전체 소매의 8%에서 1979년 18%로 뛰었다.
바로 이 즈음, 하나의 사건이 폴란드 사회의 자기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1978년 10월 16일, 콘클라베는 크라쿠프 대주교 카롤 보이티와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1522년 이후 처음으로 이탈리아인이 아닌 인물이, 그것도 소비에트 블록 국가 출신이 베드로의 좌에 오른 것이다. 폴란드 당국은 당혹스러웠다. 1966년 밀레니엄 기념 때는 바오로 6세의 입국을 두 번이나 거부했지만, 이번에는 자기 나라 출신 교황의 방문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1979년 6월 2일부터 9일간 이어진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폴란드 순례는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니었다. 바르샤바 승리광장(현 피우수트스키 광장)에서 드린 첫 미사에만 3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9일 동안 그를 본 폴란드인은 총 1,1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광장에서 교황은 폴란드의 역사 전체를 그리스도라는 열쇠로 읽어내며, "그리스도 없이는 폴란드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마지막에 그가 외친 "당신의 영이 내려오소서, 이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었다. 수십만 명이 "우리는 하느님을 원한다"고 화답하는 순간, 공산당 정권이 35년간 주조해 온 이데올로기적 독점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허물어졌다. 요제프 나이가 말한 '소프트 파워'가 폴란드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 간부들은 교황의 방문이 통치 능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에게 납득시키려 했지만, 그 9일 이후 폴란드인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1979년 겨울의 충격에서 간신히 회복한 경제는 1980년 들어 다시 급속히 악화되었다. 1979년 여름 가뭄과 1979-80년의 또 한 번의 혹독한 겨울이 겹치면서 농업 생산은 곤두박질쳤다. 산업 생산성은 1979년과 1980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980년 6월 30일, 정부는 '육류 공급 체계 개편'이라는 명목으로 더 나은 품질의 고기를 전면 상업 상점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실질적으로 40-60%의 가격 인상이었다. 다음날인 7월 1일, 바르샤바의 우르수스 트랙터 공장과 미엘레츠 통신기기 공장, 산노크의 아우토산 버스 공장, 체프의 폴모 공장 등에서 파업이 터져 나왔다. 이어 7월 8일, 루블린 외곽 시비드니크의 국영항공공장(WKS)에서 구내식당 돼지고기 커틀릿 가격이 10.20즈워티에서 18.10즈워티로 80% 오른 것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기계 스위치를 내렸다. 7월 중순까지 루블린 지역에서만 150개 사업장 5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고, 철도 노동자들은 소련과 동독 주둔 소련군을 잇는 철도를 마비시켰다. 정부는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 부총리를 파견해 평균 10% 임금 인상으로 달랬지만, 불길은 이미 바르샤바, 포즈난, 우치, 오스트루프비엘코폴스키로 번져 있었다. 이 파업들은 아직 독립노조를 요구하지 않았고 당국은 '매수' 전략으로 대응했지만, 1970년, 1976년과 달리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가지 않고 공장을 점거하는 새로운 투쟁 방식을 습득했다. 바로 이 루블린 7월의 경험 위에, 3주 후 발트 해안에서 21개 요구를 내건 그단스크 조선소 파업이 서게 된다.
문 앞의 세 여자,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바뀐 파업
1980년 8월 14일 아침,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는 멈춰 섰다. 5개월 후 정년퇴직 예정이던 크레인 기사 안나 발렌티노비치가 8월 7일 해고되자, 해안자유노조(WZZ) 활동가 보그단 보루세비치가 동료들인 보그단 펠스키, 예지 보로프차크, 루드비크 프론진스키와 함께 파업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새벽부터 조선소 정문에서 전단을 뿌렸고, 오전 6시가 지나자 작업장 단위로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했다. 요구는 단순했다: 발렌티노비치 복직, 1,000즈워티 임금 인상, 그리고 1970년 12월 희생자 기념비 건립. 독립노조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WZZ 핵심 인사들은 파업을 띄우는 일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고, 10년 전 총격의 기억이 생생한 조선소에서 '너무 멀리 가는' 구호는 피를 부를 수 있었다.
파업은 빠르게 번졌다. 15일에는 시내 전차 기사인 헨리카 크지보노스가 전차를 중앙 교차로에 세워 도심 교통을 마비시키면서 다른 사업장으로 소식이 퍼져나갔다. 16일이 되자 조선소 인근의 공장과 항만 노동자들까지 합세했다. 바로 그날 오후, 조선소 경영진이 임금과 복직 요구를 수용하자 파업위원회는 파업 종료를 선언했고, 바웬사는 노동자들에게 귀가를 알렸다. 수천 명이 정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발렌티노비치와 간호사 알리나 피엔코프스카, 에바 오소프스카 세 여성이 정문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빠지면 다른 공장들은 혼자 남는다. 그들은 짓밟힐 것이다." 이들은 귀가하는 노동자들을 막아세우며 이미 파업에 합류한 주변 사업장들과의 연대를 호소했다. 바웬사는 설득되어 연대파업으로 전환을 선언했고, 조선소에는 수백 명만 남았지만 그날 밤, 21개 사업장 대표들이 모여 공장간파업위원회(MKS)를 결성했다. 보루세비치가 수석 고문으로 참석한 가운데, MKS 간부진은 안제이 그비아즈다, 보그단 리스, 안제이 코워지에이 등 해안자유노조에서 수년간 함께 활동해 온 인물들로 채워졌다. 서로 신뢰하는 이들로 지도부를 구성한 것은 1970년대 파업들이 분산된 지도력 때문에 무너졌던 경험에서 나온 전략적 선택이었다.
8월 16-17일 밤, MKS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회문서 중 하나가 될 21개 요구를 작성했다. 첫 번째 요구는 충격적이었다: "당과 기업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노조를 인정하라." 국제노동기구(ILO) 제87호 협약을 근거로 내세운 이 조항은 레닌주의 국가의 근간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바르샤바의 반체제 지식인들은 이 요구가 무모하다고 보았다. 야체크 쿠론은 훗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니,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아담 미흐니크는 "그것이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러 그단스크에 가려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단스크 노동자들은 바르샤바 지식인들을 앞질렀다. 1970년 12월 해안 봉기 때부터 '독립노조'라는 말을 입에 올렸던 것은 지식인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들이었다.
요구 목록은 정치적 요구(1-5번)를 전면에 배치하고 경제·사회적 요구(6-21번)를 뒤에 배치하는 전략적 구성을 취했다. 21개 요구는 나무 판자에 손으로 쓰여 조선소 2번 정문에 걸렸는데, 그 문은 1970년 12월 노동자들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바로 그 장소였다. 검은 성모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초상이 걸린 이 문은 금세 전 세계 언론의 아이콘이 되었다.
한편 슈체친에서는 마리안 유르치크가 이끄는 MKS가 8월 30일 정부와 협정에 먼저 서명했다. 그러나 이 슈체친 협정은 경제적 양보는 얻어냈지만 독립노조에 관한 조항은 명시하지 못했다. 그단스크 MKS는 이 소식을 접하고 끝까지 버티기로 결심했다. 8월 31일,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 부총리가 이끄는 정부위원회와 바웬사의 MKS 사이에 그단스크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문서는 ILO 87호 협약에 따른 독립·자주 노조의 설립을 명시했고, 파업권 보장, 정치범 석방, 검열 완화, 토요일 휴무 등을 담았다. 바웬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이 새겨진 대형 볼펜으로 서명했다. 정부는 이 대가로 신생 노조가 정당으로 활동하지 않을 것과 헌법의 사회주의 원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실질적으로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사상 최초로 당의 통제 밖에 있는 대중조직을 공인한 셈이었다.
9월 17일, 전국 각지의 노동자 대표들이 모여 전국노조 '연대'(Solidarność)를 공식 출범시켰다. 그단스크 협정은 16일 만에 지역 파업에서 체제 균열로, 빵 문제에서 권력 독점의 종말로 전환된 20세기의 가장 드문 정치적 순간 중 하나였다.
빚으로 산 번영이 누구의 위기가 되었나
기에레크의 퇴진은 단순히 한 당 지도자의 교체가 아니었다. 1970년 발트해 연안 노동자들의 피를 본 뒤 집권한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임금을 올리고 서방에서 차관을 끌어와 소비재와 산업설비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다시 세우려 했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1973년 석유파동 뒤 수출 수입은 기대만큼 늘지 않았고, 외채 상환은 생산과 식량 수입을 압박했다. 1980년 여름의 가격 인상은 이 실패의 청구서를 노동자에게 넘기는 조치였다. 파업이 번지자 기에레크는 9월 5일 실각했고, 당은 대중의 분노를 달래면서도 국가계획과 당의 지배를 보존할 후임자를 찾았다.
새 지도자 스타니스와프 카니아가 내세운 해법은 처음부터 양면적이었다. 연대노조를 당장 무력으로 없애면 1970년식 유혈사태와 소련의 개입 위험이 커진다. 반대로 독립노조가 생산현장뿐 아니라 언론, 지방행정, 경찰 통제까지 문제 삼으면 당국의 명령 체계가 비어 버린다. 그래서 정부는 등록과 협상을 허용하고 임금·식량 문제를 일부 조정하는 한편, 파업을 자제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헌정 질서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연대의 활동가들에게 이는 후퇴가 아니라 노동자가 국가를 무너뜨리지 않고 사회를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자기제한적 혁명’이었다. 그러나 공급 부족과 인플레이션 속에서 협상은 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줄, 배급, 생산 중단의 비용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먼저 치렀고, 정부가 약속한 개혁은 당 관료기구의 거부와 경제의 물질적 한계에 부딪혔다.
1981년 2월 9일 국방장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총리가 된 것은 이 교착을 군의 질서 개념으로 관리하려는 선택이었다. 그는 ‘90일간의 평화’를 말하며 파업 중단과 생산 회복을 호소했다. 그 입장에서 이는 내전을 피하고 국가가 식량과 연료를 배분할 시간을 벌자는 현실주의였다. 하지만 군대가 총리직을 차지한 순간, 협상은 동등한 사회세력 사이의 조정이 아니라 언제든 비상통치로 전환될 수 있는 유예가 되었다. 훗날 공개된 미국 국가안보문서 보관소의 자료는 당시 위기를 소련 침공의 전조로만 본 서방의 오독과 달리, 폴란드 당·군 지도부가 사회 통제 회복을 위한 국내 군사해법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경제 파탄과 소련의 압력이 허구였다는 뜻은 아니다. 바로 그 압력 속에서 지도부는 노동자의 요구를 수용해 생산 기반을 회복할 정치적 선택보다, 위기의 비용을 다시 노동자에게 부과할 국가 권력을 선택했다.
비드고슈치에서 총파업 직전까지, 폭력의 책임을 묻는 방법
비드고슈치의 쟁점은 단순히 경찰이 시위대를 때렸다는 데 있지 않았다. 농민들은 국가가 정한 공식 농업조직이 아니라 독립적인 개별농민노조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3월 16일부터 그들은 통합농민당 지방청사를 점거했고, 비드고슈치 연대 지부장 얀 룰레프스키는 도시 노동자 조직을 이 요구와 결합시켰다. 당 지도부의 눈에는 이것이 또 하나의 임금분쟁이 아니라 농촌까지 독립조직이 뻗어가는 사건이었다. 카지미에시 바르치코프스키는 협상이 실패하면 점거를 끝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겠다고 했고, 제1서기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는 비드고슈치를 ‘당국을 굴복시키려는 새로운 시도’로 불렀다. 반면 룰레프스키와 농민 활동가 로만 바르토슈체가 보기에 점거는 약속을 지키게 하는 마지막 공개 수단이었다. 그들의 요구가 지방의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자, 3월 19일 대표단은 회의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시민민병대와 ZOMO가 회의장을 비웠다. 룰레프스키, 바르토슈체, 그리고 마리우시 라벤토비치가 구타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정부는 ‘질서 회복’을 의도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과는 협상의 비용을 몸으로 지불하게 한 폭력이었다. 더구나 당시 공영매체가 사건을 즉시 보도하지 않자 연대의 지역조직과 지하 인쇄물이 소식을 전국으로 퍼뜨렸다. 3월 24일 연대는 총파업을 결정했고, 27일 경고파업에는 약 250만 명이 참여했다. 이 동원은 지도부가 통제할 수 있는 압박이면서도, 자칫 국가기구와의 전면충돌로 넘어갈 수 있는 힘이었다. 레흐 바웬사는 폭력을 인정받고 농민노조 협상을 열기 위해 파업을 사용하려 했지만, 일부 활동가들은 정부가 힘으로만 양보한다면 더 큰 파업만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보았다.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와 바웬사의 3월 25일부터의 협상은 이 두 계산을 임시로 접합했다. 3월 30일 바르샤바 협정에서 정부는 비드고슈치 사건을 텔레비전에서 연대 대표들이 직접 설명하게 하고, 노조가 지켜보는 조사와 농민 요구에 관한 후속 협상을 약속했다. 대신 연대는 31일 총파업을 철회했다. 이것은 경찰의 유죄를 즉시 확정한 승리가 아니었다. 정부는 책임자를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고, 농민노조의 법적 등록도 그 자리에서 보장하지 않았다. 바웬사에게는 국가를 마비시키지 않고 공개성을 얻는 후퇴였지만, 룰레프스키 계열의 활동가들에게는 피 흘린 뒤 얻은 모호한 문구였다. 소련과 폴란드 당내 강경파는 이를 국가가 다시 노조에 밀린 사례로 읽었다. 따라서 협정은 위기를 끝낸 것이 아니라, 누가 폭력을 행사하고 누가 양보의 한계를 정하는지를 둘러싼 다음 대결의 규칙을 잠시 정했을 뿐이었다.
노조가 국가를 다시 설계하려 할 때
연대의 전국대회는 단순히 새 지도부를 뽑는 자리가 아니었다. 1981년 9월 5일부터 10일, 9월 26일부터 10월 7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그단스크에서 열린 대회에는 약 1,000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896명의 대의원이 모였다. 이 규모 자체가 당국의 곤경을 드러냈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당원보다 훨씬 넓은 조직이 이제 공개적으로 국가 운영의 원리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흐 바웬사는 1차 투표에서 55퍼센트를 얻어 의장에 선출되었지만, 안제이 그비아즈다와 얀 룰레프스키 같은 경쟁자들이 보여준 이견은 개인 간 다툼만이 아니었다. 바웬사는 협상 가능한 단일 지도부로 정권과 충돌을 관리하려 했고, 다른 흐름은 지역 대표와 조합원의 통제를 더 강하게 보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바웬사의 승리는 연대가 국가를 대신하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노동자 집단을 한 조직 안에 묶어둘 타협이었다.
대회가 채택한 강령 「자치공화국」은 그 타협이 향한 제도적 상을 구체화했다. 강령은 국가를 폐지하자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폴란드가 사회주의 국가이자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구성원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노동자가 직장평의회를 통해 기업을 공동 관리하고 지방자치와 사회적 통제로 국가를 민주화하자고 했다. 국가 재산을 맡은 기업의 책임자를 노동자평의회가 선임하고 해임할 수 있어야 하며, 당 관료가 인사와 경제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강령의 논리는 내부에서 설득력을 가졌다. 파업으로 얻은 협약을 지키고 식량과 난방의 붕괴를 막으려면, 명령만 내리는 관료 대신 실제 생산을 아는 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강령은 점진성을 강조했다. 유럽의 세력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군대와 외교와 동맹을 당장 뒤집지 않고 사회가 국가를 통제하는 영역부터 넓히려 했다.
그러나 9월 8일 발표된 「동유럽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은 그 조심스러운 국내 구상을 국경 밖으로 밀어냈다. 알바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독일민주공화국, 루마니아, 헝가리와 소비에트연방의 노동자들에게, 연대는 자신들이 거짓 선전 속의 소수가 아니라 파업으로 세워진 1,000만 노동자의 조직이라고 알리고 언젠가 노조 경험을 나누자고 썼다. 연대 대의원에게는 노동자 국제주의와 연대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폴란드 당 지도부에게는 다른 나라 노동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독립조직을 만들라는 초대였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9월 10일 정치국에서 이를 “위험하고 도발적인 문서”라 부르며 사회주의 국가들에 혼란을 뿌리려 한다고 말했다. 당국이 이 문서를 두려워한 이유는 연대가 무장봉기를 계획해서가 아니라,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노동자 조직이라는 형태 자체가 당의 독점권을 국경 너머에서 시험했기 때문이다.
이 충돌 속에서 스타니스와프 카니아의 중간 노선은 버티기 어려워졌다. 카니아와 일부 당 간부는 소련군 개입을 피하려면 연대와 제한적으로 공존하며 경제를 수습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당내 강경파와 크렘린은 대회가 이미 허용할 수 없는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10월 18일 카니아가 물러나고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당 제1서기까지 맡은 것은 단순한 인사 교체가 아니었다. 총리와 국방장관이던 장군에게 당까지 집중되면서, 협상으로 사회를 통합하려던 정치적 통로보다 군과 행정의 지휘계통이 앞에 섰다. 이는 연대가 급진화해서만 생긴 결과가 아니었다. 연대의 강령이 요구한 사회적 통제와 당의 독점 사이에는 타협으로 봉합할 수는 있어도 없앨 수 없는 구조적 충돌이 있었고, 야루젤스키의 등장은 그 충돌을 협상보다 강제로 처리하겠다는 선택이었다.
국가를 구한다는 명령은 누구를 향했나
야루젤스키는 계엄을 ‘내전과 국가 붕괴를 막는 자기방어’로 제시했다. 1981년 12월 13일 아침 방송에서 그는 “조국이 나락의 벼랑에 서 있다”고 말하며, 파업과 대립이 생산과 행정을 마비시켰고 사회가 폭력으로 미끄러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리는 당 관료와 군 지휘부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소련의 직접 침공은 폴란드 민족주의와 노동자 저항을 폭발시킬 위험이 있었으므로, 폴란드 군대가 질서를 회복한다는 선택은 주권을 지키면서도 체제를 보존하는 길처럼 보였다. 실제로 소련 정치국은 12월 10일 폴란드에 군대를 보내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인했고, 야루젤스키는 외부 개입보다 국내 군사행동을 택했다. 그러나 ‘구국’의 방법은 협상이 아니라 사회의 목을 죄는 것이었다. WRON은 헌법 밖의 군사기구였고, 군인과 ZOMO는 전략 사업장을 장악했다. 첫날 밤 3,000명 이상, 첫 주가 끝날 때까지 약 5,000명의 연대 활동가가 재판 없이 구금되었다. 전화와 전신은 끊겼고, 통행과 파업은 금지되었으며, 언론은 군의 통제를 받았다. 라디오 자유유럽의 기록이 전한 마지막 전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두렵다. 최악의 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불안이었다. 이 단절은 단지 정보를 차단한 조치가 아니었다. 전국 노동자들이 서로의 저항 규모를 알지 못하게 해 총파업이라는 집단적 힘을 작동시키지 못하게 한 조치였다.
그 계산이 광산에서 피를 만났다. 카토비체 부이크 탄광의 노동자들은 12월 13일 밤 연대 사업장위원장 얀 루드비차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4일부터 그의 석방과 다른 구금자들의 석방, 계엄 철회를 요구하며 지하 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은 국가를 전복하려고 무장한 집단이 아니라, 체포된 동료를 되찾고 자신들의 노조를 지키려는 작업장 노동자들이었다. 당국은 이를 다른 사업장에 보여줄 본보기로 읽었다. 12월 15일 마니페스트 리프초비 광산에서 이미 경찰이 광부들에게 발포해 네 명을 다치게 한 뒤, 16일 부이크에는 경찰·군 2,231명, 전차 22대, 장갑차 44대가 투입되었다. 약 3,000명의 광부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쇠막대와 공구로 맞섰고, 물대포와 최루탄 뒤에 장갑차가 담장을 무너뜨렸다. 정오 무렵 기관단총을 든 ZOMO 특수소대가 사격해 여섯 명을 현장에서 죽였고, 부상자 셋이 뒤에 숨졌다. 희생자는 모두 아홉 명, 부상자는 23명이었다. 가장 어린 안제이 펠카는 19세였다.
당국은 즉시 ‘질서 회복’이라고 불렀지만, 사망자들의 복부·가슴·머리에 남은 총상과 압도적인 병력은 우발적 충돌이라는 설명을 약화시켰다. 파업 지도자 스타니수와프 프와테크는 1982년 4년형을 받았고, 사격한 소대원들이 처벌받기까지 27년이 걸렸다. 2008년 소대장 로무알트 치에시라크에게 6년형이 선고되었지만, 누가 정치적으로 발포를 명령했는지는 끝내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부이크는 계엄이 ‘사회 전체를 위한 임시 수술’이었다는 국가의 자기 설명과, 노동자의 조직을 겁주어 해체하려고 국가 폭력을 선택했다는 문서와 결과가 충돌하는 장소다. 파업은 그날 끝났지만, 총탄은 연대를 없애지 못하고 그것을 지하조직으로 밀어 넣었다.
결과
계엄은 1983년 7월까지 지속되었고 연대는 지하운동으로 전환했으며, 약 1만 명이 구금되고 91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조직망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고, 서방의 제재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지 속에 연대는 살아남아 1989년 원탁회의와 반자유선거로 집권하게 된다. 이 사건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사문화되었음을 증명했고, 소련이 더는 위성국 내부의 체제 전복 위기에 군사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 전환점이었다.
연표
- 1979.06교황의 첫 폴란드 방문
요한 바오로 2세가 9일간 폴란드를 방문해 1,100만 명과 만난다. 공산정권 아래에서도 국민이 하나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순례는 1년 뒤 연대의 탄생을 위한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 1980.07.01식료품 가격 인상
정부가 육류 가격을 대폭 인상하면서 전국적으로 파업이 촉발된다. 이미 230억 달러의 대외부채와 만성적 공급 부족에 시달리던 폴란드 경제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 1980.08.14그단스크 조선소 파업
레닌 조선소에서 해고된 크레인 기사 안나 발렌티노비치의 복직을 요구하며 파업이 시작된다. 전기공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공장간파업위원회는 곧 21개 요구를 내걸고 조선소를 점거했다.
- 1980.08.31그단스크 협정과 연대노조의 탄생
정부 대표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가 조선소를 찾아 바웬사와 협정에 서명한다. 독립노조 결성권, 파업권, 정치범 석방, 검열 완화 등을 약속한 이 협정으로 '연대'가 공식 출범했다.
- 1980.09.06기에레크 실각
당 제1서기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해임되고 스타니스와프 카니아가 후임에 오른다. 서방 차관으로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그 차관이 정권을 무너뜨린 셈이었다.
- 1981.02.09야루젤스키 총리 취임
국방장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총리를 겸하게 된다. '90일간의 평화'를 호소하며 연대의 파업 자제를 촉구했지만, 동시에 계엄 계획 수립을 가속화했다.
- 1981.03.19비드고슈치 사건
비드고슈치 지방의회 청사를 점거한 연대와 농민 활동가들이 시민민병대에 구타당해 중상을 입는다. 연대는 3월 27일 260만 명이 참여한 경고파업으로 대응했고, 이는 연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다.
- 1981.03.30바르샤바 협정
바웬사와 부총리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가 극적으로 타협하여 3월 31일 총파업을 철회한다. 그러나 이 양보는 연대 내부의 불만을 키웠고, 모스크바에는 또 한 번의 굴욕으로 비쳤다.
- 1981.09연대 제1차 전국대회
그단스크에서 열린 대회는 바웬사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자치공화국' 강령을 채택했으며, 동유럽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회원 수는 1,000만 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 1981.10.18카니아 퇴진, 야루젤스키 당 서기장 취임
소련 지도부의 압력으로 카니아가 물러나고 야루젤스키가 당 제1서기까지 겸한다. 이제 한 사람이 당, 정부, 군대를 모두 손에 쥐었다. 소비에트 정치국은 이때 이미 폴란드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 1981.12.13계엄 선포
야루젤스키가 국가평의회의 승인을 얻어 계엄을 선포하고 군사구국평의회(WRON)를 수립한다. TV 연설에서 '조국이 나락의 벼랑에 서 있다'고 말한 그날 새벽, ZOMO 진압대와 보안국이 통신을 차단하고 연대 지도부를 일제히 체포했다.
- 1981.12.16부이크 탄광 유혈 진압
카토비체 부이크 탄광에서 파업 중이던 광부들에게 ZOMO 특수진압대가 발포해 9명이 사망한다. 계엄 기간 중 가장 참혹한 유혈사태였다. 12월 28일 피아스트 탄광의 1,200명 농성으로 마지막 직장파업이 끝났다.
관련 인물 21명
주도 · 집행3
지도부2
참여15
1980년 8월 22일 KOR 지식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바르샤바를 떠나 검문소를 뚫고 그단스크에 도착, 파업 중인 MKS에 협상 자문을 제공했으며 이후 연대노조 고문단을 이끌었다.
파업 계획 입안자, MKS 공동 설립자보그단 보루세비치1949–그단스크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21개 요구안을 정리했으며 MKS를 공동 설립했다.
연대 파업 전환의 주도자알리나 피엔코프스카1952–20021980년 8월 16일,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하자 노동자들을 붙잡아 연대 파업으로 전환시켰다.
파업을 촉발한 해고 노동자안나 발렌티노비치1929–20101980년 8월 레닌 조선소에서 해고되었고, 이 사건이 연대노조로 이어진 파업의 도화선이 되었다. 피엥코프스카와 함께 파업을 연대 파업으로 전환했다.
연대노조의 정신적 후원자카롤 요제프 보이티와1920–20051979년 폴란드 순례가 국민의식을 고양해 연대노조 가능성을 열었다.
교회의 수호자이자 협상자스테판 비신스키1901–19811953~56년 가택 연금을 겪고, 지에레크 체제와 공존을 협상하며 교회의 자율성을 지켰다.
조선소 파업의 최초 발동자예지 보로프차크1957–1980년 8월 14일 아침, 두 동료와 함께 조선소 안에서 파업을 시작했다.
슈체친 협정 서명자마리안 유르치크1935–2014슈체친 MKS 지도자로서 1980년 8월 30일 협정에 서명했고, 그단스크보다 하루 앞섰다.
비드고슈치 연대 지도자얀 룰레프스키1944–농민 요구를 대표하다 폭행당했고, 사건을 전국 파업 위협으로 확대시켰다.
파업 확산을 이끈 전차 운전사헨리카 크지보노스1953–1980년 8월 15일 그단스크 시내에서 전차를 세워 조선소 파업 소식을 알렸고, 이후 MKS 위원으로 그단스크 협정에 서명했다.
농민연대 활동가, 피격 피해자로만 바르토슈체1946–2015비드고슈치 점거 투쟁에 참여했으며 3월 19일 폭행을 당했다.
당권을 잃은 전당 서기장스타니스와프 카니아1927–2020연대노조에 타협하려다 소련의 압력으로 실각했다.
MKS 공동 설립자안제이 그비아즈다1935–8월 16일 조선소에 도착해 MKS를 공동 창립했고, 초기 지도부에서 핵심 인물이었다.
KOR 공동창립자이자 연대노조 고문야체크 쿠론1934–2004계엄 첫날 밤 체포되어 총탄이 난무한 지하실에서 처형될 뻔했다.
협상에 나선 당 서기장타데우시 피슈바흐1935–그단스크 당 서기장으로 파업 중 협상을 시도했고, 후에 내부 혼란을 회고했다.
관련 용어
출처: Andrzej Paczkowski,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Poland, 1980–1989: Solidarity, Martial Law, and the End of Communism in Europe (Boydell & Brewer, 2015).Tomasz Kozłowski, 'The Long December Night', Polish History (IPN).Tomasz Kozłowski, 'March 1981: Solidarity at the Height of Its Power', Polish History (IPN).Karol Nawrocki, 'The Night of Martial Law', IPN Collected Content: Martial Law in Poland 1981–1983.UNESCO Memory of the World: Twenty-One Demands, Gdańsk, August 1980 — The Birth of the SOLIDARITY Trades Union.Katarzyna Ścierańska, 'The Introduction of Martial Law in Poland', European Network Remembrance and Solidarity (ENRS), 2015.Soviet reaction to the Polish crisis of 1980–1981 (based on declassified Soviet archives and the 1997 Jachranka conference procee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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