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말리아
Greater Somalia
소말리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려는 범소말리주의 구상이다. 1969년 쿠데타와 1970년 사회주의 선언 이전부터 독립 소말리아 정치의 핵심 의제였고, 이후 군사정권의 오가덴 개입으로 이어졌다.
상세
개념과 지리
대소말리아(Greater Somalia)는 소말리인이 살고 역사적으로 거주해 온 아프리카의 뿔 지역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는 구상이다. 소말리어로는 Soomaaliweyn, 아랍어로는 al-Sumal al-Kubra라 한다. 미국 의회도서관 국가연구는 이를 "모든 소말리인 거주 지역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는 것, 즉 범소말리주의 혹은 대소말리아로 규정되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범소말리주의는 이 지역들을 재통합해 단일 소말리 민족국가를 만들려는 구상의 좁은 표현이다.
이 구상의 지리는 식민 분할에서 나왔다. 아프리카 분할 시기에 소말리인 거주 지역은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 나뉘었고, 독립 소말리아에게 통일은 핵심 목표가 되었다. 1960년 영국령과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합병되었으나,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와 케냐의 북부국경지구, 오가덴은 독립 전 통일 시도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 아래에 남았다.
요구의 범위와 제도적 표현
주장된 다섯 지역은 옛 이탈리아령·영국령 영토, 오가덴, 지부티, 북부국경지구(NFD)다. 1961년 승인된 헌법 전문은 "소말리아 공화국은 법적·평화적 수단으로 영토의 통일을 촉진한다"고 밝혔고, 거주지와 무관하게 모든 소말리인은 공화국의 국민이었다. 국민의회의 정확한 의석수는 법으로 정하지 않아 분쟁 지역 대표를 포함시킬 수 있게 했으며, 국기는 다섯 갈래 별로 주장 지역을 나타냈다. 공식적으로 소말리아는 인접 영토에 대한 주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소말리인에게 자기결정권을 부여하라고 요구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법적 공식은 국기와 헌법의 통일 조항, 훗날의 오가덴 침공과 병존했다.
독립 이전의 기원과 전후의 전개
통일 프로그램이 조직적으로 표현된 가장 이른 사례는 1943년부터 1948년 사이에 있다. 1943년 창립된 소말리아청년동맹은 독립과 통일 이전 시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 중 하나였고, 1946년에는 대소말리아의 장래 수도로 하라르를 제안하고 모가디슈의 유엔 사무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즉 이 구상은 1960년의 합병과 1969년 정권보다 거의 20년 앞선다.
소말리 민족주의의 기원에 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다. 한 서술은 그 뿌리를 중세의 아달 술탄국과 아주란 술탄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지만, 같은 문헌은 현대적 형태의 시기를 20세기 초로 잡는다. 이 심층 기원설은 확정된 연대로 다루지 않고 논쟁적 주장으로 표시해 둔다. 소말리 민족주의의 현대 시기는 흔히 무함마드 이븐 압달라 하산("미친 물라")에게서 출발점을 찾는다.
1960년부터 소말리인 거주 지역의 통일은 소말리아 공화국(1960–1969)과 소말리아민주공화국(1969–1991)의 국가 목표였다. 두 정권은 북부국경지구와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의 통합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주된 관심은 오가덴 지역이었다. 1960년 이후 에티오피아와 케냐에서 자기결정권을 요구한 소말리인들은 소말리아의 지원을 받아 무장투쟁을 벌였고(시프타 전쟁), 이는 1964년 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과 1977년 오가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군사정권과 사회주의 노선의 분리된 시간표
대소말리아 문제는 1969년 쿠데타 이전부터 독립 후 소말리아 정치의 "가장 중요한 정치 문제"였다. 정치인들은 소말리 영토를 점유한 이웃 나라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 정부는 무너질 것이라고 전제했다. 최고혁명평의회는 집권 뒤 "분쟁 지역에 대한 소말리아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지역 데탕트의 지속"을 약속했다. 영토 요구는 1969년 쿠데타를 거쳐서도 이후의 사회주의 전환과 무관하게 유지되었다.
사회주의 노선은 별개의, 더 늦은 궤적이었다. 쿠데타 1주년인 1970년 10월 20일 시아드 바레는 "소말리아가 사회주의 국가임"을 선언했다. 당시 소말리아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계급 갈등 역사가 없었다. 공식 이념은 자력갱생,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이슬람을 결합한 "과학적 사회주의"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도, 시아드 바레 정권은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경제적 목표보다 오가덴을 '해방'한다는 정치적 목표에 관심을 옮기고 있었다".
대외 정렬도 이 프로그램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소말리아의 공산권 정렬과 과학적 사회주의 선언은 "소말리아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는 빈번한 비난"을 낳았고, 소련에 대한 의존은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규정했다. 그러나 소련 고문들이 군대에 있었지만 "쿠데타가 소련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었고", 쿠데타를 부추긴 소련 유학파 하급 장교들은 "혁명 정권의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오가덴 전쟁과 국제적 충돌
1977년 7월 "바레 정권이 소말리인이 주로 사는 오가덴 지역을 범소말리적 대소말리아에 편입하려 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소련과 쿠바의 개입 이후 소말리아는 패배했고 미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동시대의 다른 평가도 기록해 둔다. 에티오피아 황제는 소말리아의 대소말리아 열망이 "나세르주의 선동에 의해 움직였다"고 보았고, 소말리아 공화국이 결국 에티오피아 제국에 편입되기를 바랐다.
이 프로그램은 민족적 합의라기보다 주변국과의 갈등을 낳았다. "아프리카통일기구 회원국 대부분은 소말리아의 영토수정주의에 소원해졌고", 자국 내 소수민족이 그 선례를 따를까 두려워했다. 영토 요구는 조모 케냐타와 하일레 셀라시에에게 도전이었다. 대소말리아 구상은 소말리 민족주의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안에서 자체적인 "라 그란데 소말리아" 구상을 밀어붙였고, 무솔리니는 1940년 영국령 소말릴란드 정복으로 거의 모든 소말리 지역이 통일되었다고 자랑했다.
제도적 축소와 붕괴
1981년 시아드 바레는 나이로비에서 케냐의 대니얼 아랍 모이에게 "소말리아가 북부국경지구에 대한 영토 요구를 중단한다"고 밝혔고, 1988년 모가디슈와 아디스아바바는 상호 영토 보전을 존중하기로 하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1991년에는 1960년에 합병되었던 북부 지역이 소말릴란드로 독립을 선언했고, 소말리아가 자치적 씨족 기반 지역으로 갈라지면서 "범소말리 통일 운동에 관한 논의는 당분간 뒷전으로 밀렸다". 내전 이후 대소말리아 구상은 지지가 줄었고, 일부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완전한 통일보다 자치나 분리를 주장한다.
이어진 언급과 논쟁
알샤바브는 대소말리아를 지지한다고 밝히며 에티오피아-소말리아 국경을 '인공적'이라고 묘사했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소말리아 대통령 하산 셰이크 모하무드는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에티오피아의 소말리주, 케냐의 북동주, 지부티를 "나머지 세 개의 사라진 부분"이라고 언급하며 "한때 전쟁을 시작했던 꿈을 되살렸다"고 한다. 이 보도는 대통령이 그 의미를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이는 공식 기록이 아니라 언론의 전언이며, 해당 문장도 공식 문서가 아닌 매체의 받아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