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도선
38th parallel
38도선은 1945년 8월 일본 항복을 앞두고 미국이 북위 38도 부근에 그어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 구역 경계로 삼은 선으로, 소련이 즉시 받아들였다. 대개는 신탁통치까지의 임시 조치로 여겨졌으나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사실상의 경계로 굳어졌다. 1950년 6월 조선인민군이 이 선을 넘어 남진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고, 1953년 정전협정이 군사분계선을 새 경계로 세우면서 실효적 분단선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선을 고른 시점과 경위, 그리고 애초에 선행 계획이 있었는지는 사료마다 엇갈린다.
상세
두 개의 용법
'38선'은 두 가지를 함께 가리킨다. 하나는 북위 38도라는 위선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1945년부터 남북을 갈랐던 실효 경계다. 이 항목의 기간 표기인 1945–1953은 뒤쪽에 적용되며, 위선 자체는 전쟁과 무관하게 계속 존재한다.
선은 어떻게 그어졌는가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진격하자,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것을 우려한 미국이 점령 구역 획정을 서둘렀다. 한 문헌은 국무부·육군부·해군부 기관원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의 위원장 제임스 던이 1945년 8월 11일 육군부 작전국(OPD)에 소련군 남진에 대응해 서울·인천을 점령할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고,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중령이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에 38선을 그어 보고한 것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에게 전달되었다고 서술한다. 두 사람 모두 한국 전문가가 아니었고 한국 전문가의 자문은 없었다.
다만 세부는 사료마다 어긋난다. 러스크 본인의 1991년 회고록은 지도 작업을 '1945년 8월 14일, 일본 항복일 밤'으로 적었고, 그때 그가 알고 있던 것은 서울을 미국 구역에 두어야 한다는 점과 미군이 과도한 점령 면적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고 술회했다. 다른 서술은 두 사람이 8월 10일에 임무를 받았다고 적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3부 조정위원회의 지시를 8월 11일로 적으며,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8월 10일에 분할선을 38선으로 하기로 결정했다고 적는다. '두 명의 젊은 장교'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한 출처는 두 사람을 젊은 장교로 부르지만, 다른 출처는 두 사람을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중령으로 적는다.
'사전 계획이 없었다'는 서술의 한계
38선이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골라졌다는 점은 여러 사료가 지지하지만, 한반도를 분할해 점령한다는 구상 자체가 처음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1945년 7월 미국 육군부 작전국이 미·소·영·중 4국에 의한 한반도 분할 점령 계획안을 이미 마련했고, 8월에는 합동전쟁계획위원회(JWPC)의 'JWPC 385/1'이 주요 전략지점에 4국이 주둔하는 분할관리 계획을 담았다. 다만 이 안은 군사적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미 군부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고, 9월 22일 수정안 'JWPC 385/5'에서야 38도선 분할, 영국·중화민국 배제, 미·소 2국 분할이 확정되었다. 러스크와 본스틸이 그린 선은 그렇게 이미 검토되던 구상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채택될 수 있었다.
언제 결정되었는가: 출처 간 충돌
선의 결정 시점과 장소를 두고 권위 있는 출처가 엇갈린다. 브리태니커는 '포츠담 회담(1945년 7월)에서 미군 기획자들이 선택했다'고 서술한다. 미국 국무부 사무국(Office of the Historian)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 철수를 감독하기 위해 38도선에서 한국을 일시적으로 분할하는 데 합의했다'고만 적는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1945년 8월 10일에 분할선을 38선으로 하기로 합의했다고 적는다. '포츠담'과 '8월 10~14일 워싱턴'은 양립하기 어렵다. 얄타 회담(1945년 2월)과 포츠담 회담(1945년 7~8월)의 문서 어디에도 한국을 38도선에서 나누는 합의는 없었고, 이 문제는 두 회담의 의제가 아니었다.
러스크가 남긴 증언과 그 한계
러스크는 38선이 '경제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한국이 천 년 가까이 지리적 연속성과 통일을 누려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냉전 하에서 '군사적 편의'가 우선했다고 서술했다. 한국사를 알았더라면 '거의 확실히' 다른 선을 골랐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한 가지 덧붙여 둘 것은, 38선 선택 이전에 일본과 혁명 전 러시아가 같은 위선을 따라 한국을 공유하는 방안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는 서술이 있으나, 1945년의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이 전례를 선의 신중한 검토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고, 오히려 결정의 부주의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도 출처를 두고도 세부가 갈린다. 러스크의 회고록 인용문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를 사용하여'라고만 적지만, 같은 자료를 다룬 다른 서술들은 '작은 축척의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라고 적는다.
임시 조치에서 분단으로
분할은 처음부터 영구적이지 않았다. 미국은 소련과 신탁통치를 협의하기 위해 한국을 미·소 점령 구역으로 나눌 것을 제안했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는 한국에 대한 5년간 4국 신탁통치에 합의했다. 그러나 미·소 양자 협상이 실패하면서 통일 한국 수립의 유일한 합의 틀이 무효화되었다. 1946년 5월에는 허가 없이 38도선을 넘는 것이 불법화되었고, 1946년과 1947년의 미·소 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 내 반대와 냉전 격화로 진전하지 못했다. 1945년 기록 가운데는 소련 정부가 애초 영구 분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하는 자료도 있다. 남쪽에는 이승만 정권, 북쪽에는 김일성 정권의 별개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할이 고착화했다.
선이 갈라놓은 것은 영토만이 아니었다. 분할선은 하천이나 산맥을 따르지 않아 마을과 가족과 기관을 갈랐고, 방어가 어려운 '뜨거운 경계'가 되어 국경 충돌이 빈발했다. 분할선은 약 절반씩 나누어 1,600만 명을 미국 구역에, 900만 명을 소련 구역에 두었다. 러스크는 미군 가용 병력의 부족과 시간·공간적 제약 때문에 소련군이 진입하기 전에 북쪽 깊이 도달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전쟁과 정전
38선은 전쟁 발발 전부터 이미 '뜨거운 국경'이었고, 1949년에는 국경 분쟁이 정점에 달했다. 조선 측은 남측의 무장 침투가 2,600건을 넘었다고 주장했다. 이 전선에서의 교전이 1950년 6월 전면전으로 확대되었고,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진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인민군은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전쟁은 국제전이자 내전적 성격을 지니며, 개전의 원인과 성격은 출처마다 논쟁적이다.
유엔군 사령부는 38선 회복을 목표로 개입했으나, 이승만은 조선의 공격으로 경계가 무효화되었다고 주장했고 맥아더도 한국을 통일할 의사를 밝혔다. 1950년 10월 1일 남측 군대가 38선을 넘었고 미군과 유엔군이 일주일 뒤 뒤따랐으며, 이는 중국의 개입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정전 교섭에서도 이 선이 쟁점이었다. 공산 측은 38선을 기준으로 한 정전선을 지지했고, 유엔 측은 쌍방 점령 지역을 기준으로 한 군사적으로 방어 가능한 선을 지지했다.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처음에 정전선이 38선에 남기를 기대했으나, 결국 38선이 아닌 군사 접촉선인 캔자스 선을 경계로 삼는 데 동의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체결된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MDL)과 폭 4km의 비무장지대(DMZ)를 설정해 남북을 가르는 새 경계로 삼았다. 정전협정은 어느 국가도 서명자가 아닌 '군사 문서'이며,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무력통일 요구 때문에 서명하지 않았고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최종적 평화 정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전선은 38선과 다르다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계선은 위도상 북위 38도 부근에 있지만 38선과 달리 서쪽은 남하하고 동쪽은 북상한다. 이에 따라 38선 이남의 황해도 옹진군·연백군과 개성시·개풍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38선 이북의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양양군은 대한민국에 속하게 되었고 고성군은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민족 내부의 문제가 외부 강대국의 이해에 의해 결정된 국면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역할을 마쳤다'는 서술의 한계
군사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새 경계가 된 뒤에도 38선이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상징성과 분단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이유로 현재도 군사계선을 '38선'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남아 있다. 따라서 '38선이 실효적 분단선으로서의 역할을 마쳤다'는 규정은 실체적 경계로서는 맞지만 명칭과 상징의 층위에서는 부분적으로만 맞다. 또한 한국어 위키백과는 38선의 존속 기간을 1945년 9월 2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로 명시하며, 실효 경계로서의 38선은 1950년 6월 이미 기능하지 못했다고 본다. 반면 정전협정 체결 시점까지를 기간으로 보는 서술도 있으므로 종료 시점은 층위에 따라 달리 잡힌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The division of Korea at the 38th parallel, the August 1945 decision by Rusk and Bonesteel, and the subsequent hardening into separate states.
- 위키백과 (한국어) Korean Wikipedia: 38선 as the boundary between Soviet and American occupation zones, the 1948 de facto border, and its replacement by the MDL in 1953.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38-я параллель as the line dividing zones of influence, agreed 10 August 1945.
- nationalgeographic.com National Geographic: Dean Rusk's firsthand account of choosing the 38th parallel using a National Geographic map, with no Korea experts consulted.
- johndclare.net Account of Rusk and Bonesteel drawing the line on a National Geographic map on the night of 10 August 1945.
- 위키백과 (한국어)
- 위키백과 (영문)
- nationalgeographic.com
- 위키백과 (한국어)
- britannica.com
- history.state.gov
- 위키백과 (러시아어)
- johndclare.net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