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lement · 13세기–1790년

고등법원 (앙시앵 레짐)

Parlement (Ancien Régime)

앙시앵 레짐 프랑스의 지역 항소법원이자 최고법원으로, 영국의회를 뜻하는 parliament와 철자가 비슷하지만 입법부가 아니었다. 국왕의 법률·칙령은 각 고등법원이 등록(반포)해야 관할구역에서 효력을 가졌고, 법원은 등록을 거부하고 간언을 올릴 수 있었다. 법복귀족 출신 재판관으로 구성되었으며 1789년 전역에 13개가 있었고 파리 고등법원이 가장 중요했다.

상세

기원과 구성

고등법원은 봉건 왕의 회의인 콰리아 레기스(curia regis)에서 비롯했다. 필리프 4세가 1302년 파리에 법원을 고정시켜 왕국회의로부터 1307년 공식 분리했고, 파리 고등법원은 시테섬의 중세 왕궁에서 회의를 열었다. 법복귀족 출신 재판관들은 대체로 직위를 사거나 상속했으며(라 폴레트 세금으로 세습), 전역에 1100여 명의 재판관이 있었다. 프랑스어권 정의에 따르면 파를망은 왕의 이름으로 일정 영역에 재판권을 행사한 항소법원이었고, 최상급 심급은 왕의 재판권을 지닌 왕국회의(Conseil du roi)였다.

등록과 간언

국왕이 발표한 법률·칙령은 고등법원이 등록(반포)해야 해당 관할구역에서 효력이 있었다. 고등법원은 등록을 거부하거나 간언(remontrances)을 제출할 수 있었고, 이에 국왕은 강제 등록 명령(lettre de jussion)을 보내거나 친림재판(lit de justice)으로 법원의 권한을 일시 정지시켰다. 루이 14세는 1667년 간언 횟수를 1회로 제한하고 1673년 간언을 등록 후에만 가능하게 했다.

왕권과의 갈등

파리 고등법원은 1648~1649년 제1차 프롱드에서 왕국 재정 통제권을 요구하며 주요 역할을 했다가 루이 14세의 승리로 굴욕을 당했다. 1715년 루이 14세 사후 섭정 필리프 도를레앙이 그들의 권한을 회복시켰고, 1750년부터는 조세 평등 원칙 등 왕권의 개혁을 저지했다. 1766년 3월 3일 '채찍질 회의'에서 루이 15세는 주권이 오로지 자신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1770~1774년 재상 모푸가 왕권 강화를 위해 파리 고등법원을 폐지하려 했고(1771년 간언권 제한·관할을 6개 상급회의로 분할), 루이 15세가 죽은 뒤 1774년에 복원되었다. 루이 16세는 1774년 11월 12일 첫 친림재판을 열어 고등법원을 복원했고, 이후 그들의 반대에 매번 물러섰다.

혁명과 폐지

고등법원은 1780년대 혁명 전야의 정치 동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왕의 전제에 맞서 국민을 보호한다고 주장하며 민중 일부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귀족 특권과 앙시앵 레짐 제도를 보존하려는 집착 때문에 세제 개혁 등 단순한 개혁조차 가로막았고, 그 혁명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역사가 알프레드 코반은 고등법원이 혁명 이전 모든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자 프랑스 왕권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고 평가했다. 1789년 11월 국민의회가 고등법원을 휴회시켰고, 3백 년 넘게 존재한 고등법원은 1790년 마침내 완전히 폐지되어 선출·봉급 지급 판사로 대체되었다(영어 출처는 제헌국민의회가 1790년 9월 6일 파를망을 폐지했다고 명시한다). 파를망의 행태는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법원이 법을 창설하고 입법부처럼 행동하는 것이 금지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출처

  1. 위키백과 (한국어)
  2. 위키백과 (영문)
  3. fr.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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