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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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당·국가 기구

‘두 흐름’ 이론

teoria dwóch nurtów

‘두 흐름’ 이론은 1956년 포즈난 봉기를 노동자의 정당한 항의와 ‘도발자·범죄자’의 폭력으로 나누어 설명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식 선전·수사 도식이었다. 이 구분은 당국이 노동자 다수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일부 참가자를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하는 책임 관리 방식으로 기능했다.

1857–1867(1868년 프랑스어판) 이념·이론

《종》

Колокол

알렉산드르 게르첸과 니콜라이 오가료프가 국외에서 발행한 러시아 최초의 검열 없는 혁명적 신문. 1857년 7월 1일 연감 《북극성》의 증보판 형식으로 런던에서 창간되어 1858년부터 월 2회, 이후 주간에서 월간으로 나왔고, 1865년 제네바로 옮겨 1867년 7월 1일자로 러시아어판을 끝냈다(통권 245호).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부른다'(Vivos voco)를 제사(題詞)로 내걸고 밀반입망을 통해 러시아 전역에서 읽혔으며, 농노제와 검열, 관료의 전횡을 폭로하는 공개 고발장 구실을 해 한때 궁정에서까지 읽히는 신문이 되었다. 1861년 농노해방 이후 개혁의 평가를 둘러싸고 젊은 급진 세대와 멀어지면서 발행부수가 줄었고, 1867년 러시아어판 종간 뒤 1868년 프랑스어판 시도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917 민족문제

「러시아 여러 인민의 권리 선언」

Декларация прав народов России

10월 혁명 직후인 1917년 11월 2일(신력 15일) 인민위원회가 발표한 민족 정책 선언이다. 레닌과 민족문제인민위원 스탈린이 서명했고, 네 가지 원칙을 담았다. 러시아 여러 인민의 평등과 주권, 분리와 독립국가 수립에 이르는 자유로운 자결권, 모든 민족적·종교적 특권과 제한의 폐지, 소수민족과 소수 인종 집단의 자유로운 발전이다. 짧은 문서지만 소련 민족 정책의 출발점이자, 뒤에 공화국들이 연방을 떠날 때 되짚어 든 근거였다.

1988년 10월 경제·계획

「주류 판매 제한 완화에 관한 각료회의 결정」(1988년 10월)

Постановление Совета Министров СССР «Об устранении очередей за винно-водочными изделиями»

1988년 10월 12일 CPSU 중앙위원회 결정에 뒤이어 소련 각료회의가 채택한 결정. 1985년 5월부터 시행된 고르바초프 반알코올 캠페인을 사실상 종결시킨 문서로, 과도한 생산 축소와 판매 제한이 예산 적자, 줄서기, 사밀주 제조 폭증, 설탕 부족을 초래했음을 인정하고 주류 생산량을 대폭 늘려 대기열을 해소하도록 지시했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각료회의 의장이 주도했으며, 캠페인을 '행정적 과잉'으로 규정한 중앙위원회 결정의 실무적 후속 조치였다.

1905년 당·국가 기구

10월 선언

Манифест 17 октября 1905 года (Октябрьский манифест)

1905년 10월 17일(구력) 니콜라이 2세가 전국적 총파업에 굴복해 반포한 선언으로, 시민적 자유와 입법 두마를 약속하며 러시아 전제정치가 헌법군주제로 전환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세르게이 비테가 기초한 이 문서는 신체의 불가침, 양심·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두마의 승인 없이는 어떤 법률도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으나, 차르는 두마 해산권과 거부권을 유지했다. 선언 직후 파업은 일시 소강되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이 양보에 만족한 반면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무장해제하려는 '종잇조각'으로 간주했으며, 약속된 개혁이 제한적으로 이행되면서 1907년 6월 쿠데타까지 혁명은 계속되었다.

1956 국제 운동

16개조

16 pont

1956년 10월 22일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학생들이 작성하여 다음날 헝가리 혁명의 시위대가 채택한 16개조 요구 목록. 소련군 철수, 너지 임레 중심의 새 정부 구성, 라코시 체제 청산, 비밀선거와 복수정당제, 언론·라디오 자유, 스탈린 동상 철거, 3·15 국경일 지정, 폴란드 민주화 운동과의 연대 등을 담았다. 이 요구들은 공산당 금지나 사회주의 폐기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자유선거 요구를 통해 사실상 일당독재의 종식을 전제했다.

1789년 8월 4~11일 경제·계획

1789년 8월 법령

1789년 8월 4일 밤 제헌국민의회 회의에서 시작해 8월 11일까지 확정된 19개 조의 법령으로, 봉건 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선언하고 영주 재판권·십일조·관직 매매·신분과 지방의 특권을 없앴다. 인적 예속에 속하는 권리는 배상 없이 폐지했지만 그 밖의 영주적 부담은 되사야 하는 것으로 남겼다.

1791년 9월~1792년 당·국가 기구

1791년 프랑스 헌법

Constitution française du 3 septembre 1791

1791년 9월 3일 제헌국민의회가 제정한 헌법으로, 국민주권과 대표제를 선언하면서 왕에게 행정권을 맡기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했다. 1792년 8월 10일 봉기와 9월 왕정 폐지로 그 체제가 끝났다.

1793년 6월 24일 채택, 시행되지 않음 당·국가 기구

1793년 프랑스 헌법

Constitution du 24 juin 1793 (Constitution de l'an I)

1793년 6월 24일 국민공회가 채택하고 국민투표로 승인된 프랑스 공화국 헌법으로, 남성 보통선거와 새 권리 선언을 담았다. 같은 해 10월 10일 국민공회가 평화가 올 때까지 정부를 혁명적으로 운영하기로 하면서 시행되지 않았다.

1914년 8월 4일과 12월 2일 국제 운동

1914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쟁공채 표결

Bewilligung der Kriegskredite (1914)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독일 제국의회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이 당 규율에 따라 전원 전쟁공채에 찬성한 1914년 8월 4일 표결과,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홀로 반대표를 던진 12월 2일 두 번째 표결을 가리킨다.

1920–1921 당·국가 기구

1920-21년 소비에트 공화국 간 조약 체계

Союзные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ие договоры 1920–1921 гг.

1920년 9월부터 1921년 1월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소비에트 공화국과 각각 체결한 일련의 양자간 군사·경제 동맹 조약이다. 이 조약들은 군사령부, 경제계획, 재정, 교통, 노동 등 핵심 행정 부문을 통합하여 RSFSR 주도의 단일한 통치 구조를 만들어냈으며,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수립의 직접적인 제도적 선례가 되었다. 이 체계는 '조약 연방주의'로 불리며, 형식상으로는 각 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했으나 실제로는 모스크바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장치였다.

1922년 2월–5월 억압·사법

1922년 교회 귀중품 몰수

изъятие церковных ценностей 1922 года

1922년 2월부터 5월까지 소비에트 정권이 볼가 기근 구호를 명분으로 정교회 등 종교 시설의 금은·보석 전례 용품을 강제 몰수한 캠페인이다. 레닌은 3월 19일 비밀 서한에서 이 기회에 '흑백파 성직자들을 무자비하게 분쇄하라'고 지시했고, 슈야 발포 사건과 231건의 재판을 거쳐 약 2천 명의 성직자와 신자가 처형되었다. 몰수한 450만 금루블 상당 귀중품 중 실제 기근 구호에 쓰인 것은 100만 루블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캠페인 비용과 횡령으로 소진되었다.

1934–1956 억압·사법

1934년 12월 1일 법

Постановление ЦИК СССР от 1 декабря 1934 года

1934년 12월 1일 키로프 암살 직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CEC) 상임간부회가 채택한 비상법령으로, 테러 행위 혐의 사건에 대해 수사 10일 제한, 재판 전날 기소장 교부, 변호인 없는 비공개 재판, 상소 및 사면 청구 불가, 사형 선고 즉시 집행을 규정했다. 야고다가 초안을 쓰고 스탈린이 수정했으며, 1956년 4월 19일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과정에서 폐지될 때까지 대숙청의 핵심 법적 기반으로 작동했다.

1934년 이후 당내 분파

1934년 2월 6일을 둘러싼 역사학적 논쟁

débat historiographique sur le 6 février 1934

이 개념은 1934년 2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반의회주의 시위를 통일된 파시스트 쿠데타로 볼 것인지, 서로 조정되지 않은 우익 리그들의 폭력적 폭동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역사학적 논쟁을 가리킨다. 연구자들은 각 리그의 목표와 지휘 체계, 시위의 실제 전개, 의회 장악을 입증하는 문서의 존재를 함께 검토한다.

1940년 5~6월 국제 운동

1940년 대탈출

l'Exode de 1940

1940년 5~6월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으로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프랑스 민간인 수백만 명이 전선을 피해 남부와 서부로 이동한 대규모 피란을 가리킨다. 프랑스 정부의 군사적 붕괴가 예상보다 빨랐고 대피 계획이 부족해 도로와 도시 행정이 마비되면서, 이 이동은 프랑스의 군사적 패배를 민간인 위기와 국가 통치의 위기로 확장했다.

1943년 9월 국제 운동

1943년 9월 이탈리아 항복과 유고슬라비아 내 무장 해체

Italian surrender in Yugoslavia, September 1943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국과의 휴전으로 전쟁에서 이탈하자 유고슬라비아의 이탈리아 주둔군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파르티잔은 여러 주둔군과 협상해 무기·탄약·보급품과 일부 병력을 넘겨받았다. 이 전환은 달마티아와 서부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지역에서 해방운동의 세력을 크게 넓혔지만, 독일군의 이탈리아군 무장 해제와 재점령으로 성과는 지역별로 제한되었다.

1949년 3월 25일–28일 억압·사법

1949년 3월의 추방

Операция «Прибой», Мартовская депортация

1949년 3월 25일부터 28일까지 소련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서 약 9만 5천 명의 민간인을 시베리아와 북부 변경지로 강제추방한 작전이다. 암호명은 '프리보이(파도)'이며, 집단화를 가속화하고 '숲의 형제들' 무장 저항의 사회적 기반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실행되었다. 이주민의 70% 이상이 여성과 16세 미만 아동이었으며,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를 인도에 반한 범죄로 규정했다.

1953년 6월 16~17일 국제 운동

1953년 6월 동독 봉기

Volksaufstand vom 17. Juni 1953

1953년 6월 16일 동베를린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해 동독 전역으로 번진 노동자·시민 봉기다. 노동할당량 10% 인상에 대한 항의는 자유선거와 정부 퇴진 요구를 포함한 정치적 저항으로 확대됐고, 소련군이 무력으로 진압했다.

1970년 12월 당내 분파

1970년 12월 봉기

Wydarzenia Grudnia 1970

1970년 12월 14일부터 22일까지 폴란드 발트해 연안의 노동자들이 식료품 가격 인상과 임금 문제에 항의해 벌인 파업과 시위다. 당국은 민병대와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고 최소 44명이 사망했으며, 그 결과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실각하고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뒤를 이었다.

1980~1981년 경제·계획

1980~1981년 폴란드 경제위기

kryzys gospodarczy w Polsce 1980–1981

1980~1981년 폴란드 경제위기는 기에레크 시기의 서방 차관과 수입 중심 성장의 한계가 외채 상환 부담, 생산 및 에너지 투입 부족, 물자 공급 붕괴로 이어진 위기다. 임금 인상 요구와 파업은 상점의 식량·생필품 부족 및 배급 확대와 충돌했고, 화폐소득이 상품 공급을 앞지르면서 국가의 계획·분배 능력과 사회적 정당성이 함께 흔들렸다.

1988–1991 경제·계획

1988년 협동조합법

Закон СССР «О кооперации в СССР»

1988년 5월 26일 소련 최고소비에트가 채택하고 그해 7월 1일 발효한 법률(제8998-XI호)로, 협동조합을 성원이 자발적으로 결합해 자체 소유·임차·무상사용 재산을 바탕으로 자율·자치·자립회계로 운영하는 조직으로 정의했다. 재화·용역을 생산하는 생산협동조합과 성원 및 시민의 상거래·생활서비스·주택·다차 수요를 충족하는 소비협동조합 두 유형을 인정했으며, 가격·임금 결정과 비성원 노동계약 고용의 자율권을 부여해 금지되지 않은 모든 활동을 허용했다. 네프 종결 이후 수십 년 만에 사적 기업 활동과 고용 노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장 급진적인 경제 입법이었다.

1989–1990 국제 운동

1989년 11월 30일 아덴 협정

اتفاق لقاء قمة عدن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과 예멘인민민주공화국(남예멘)이 1989년 11월 30일 아덴에서 맺은 통일 협정이다. 북측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과 남측 예멘사회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알리 살림 알비드가 서명했다. 양측 지도부는 1981년 12월 30일 공동 헌법위원회가 완성한 통일국 헌법 초안을 승인하고, 그 비준과 국민투표 절차를 정했다. 원문 표제는 '아덴 정상회담 협정'이며 11월 30일 협정으로도 인용된다.

1994년 국제 운동

1994년 부다페스트 문서

Budapest Document: Towards a Genuine Partnership in a New Era

1994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정상회의가 채택한 결정과 문서 모음이다. 이 결정은 CSCE를 1995년 1월 1일부터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로 부르기로 하면서도 기존 CSCE 공약의 성격과 CSCE 및 그 기관의 법적 지위를 바꾸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1929–1932 경제·계획

2만5천인대

двадцатипятитысячники

1929년 11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에 따라 농업집단화를 추진하기 위해 주요 공업도시에서 농촌으로 파견된 약 2만 7천 명의 선진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지원자는 7만 명을 넘었으며, 선발된 인원의 약 70%가 당원이었고 절반 이상이 30세 미만이었다. 이들은 집단농장(콜호스) 의장, 기계트랙터정거장(MTS) 간부, 촌소비에트 당조직 등에 배치되었으나, 쿨라크와 지역 관료의 저항에 직면했고 40%만이 할당된 임기를 마쳤다.

1935–현재 이념·이론

2월 혁명의 자발성 논쟁

спор о стихийности Февральской революции

1917년 2월 혁명이 지도자 없는 자발적 폭발이었는지, 아니면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조직적 개입의 산물이었는지를 둘러싼 역사학 논쟁이다. 윌리엄 챔벌린은 1935년 저서에서 2월 혁명을 '역사상 가장 지도자 없는, 자발적이고 익명의 혁명'이라고 규정했고, 이 서사는 냉전기 서방 역사학의 통설로 자리잡았다. 제임스 화이트, 마이클 멜란콘, 에두아르트 부르잘로프 등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비보르크 구의 볼셰비키 노동자 간부들과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이 파업 확산, 무장봉기 조직, 구호 형성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이며 '사회주의적 행위주체성' 테제를 제기했다.

1955년 문화·교육

300인의 편지

Письмо трёхсот

1955년 10월 11일 소련 과학자 300여 명이 당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에 제출한 청원서로, 트로핌 리센코의 독점적 지배 아래 파괴된 소비에트 생물학을 정상화할 것을 요구했다. 21쪽 분량의 이 문서는 리센코 학설의 반과학성, 유전학 연구의 전면적 탄압, 농업에 대한 실질적 피해를 구체적으로 적시했으며, 물리학자 란다우·탐·사하로프와 수학자 켈디시 등 비생물학 분야의 저명 과학자들도 서명해 항의의 폭을 넓혔다. 흐루쇼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는 리센코의 퇴진을 촉발했고, 소련 과학사에서 집단적 학문 자유 투쟁의 상징으로 남았다.

1945–1953 한국 정치경제

38도선

38선 (三八線), 38-я параллель

38도선은 1945년 8월 일본 항복을 앞두고 미국이 북위 38도 부근에 그어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 구역 경계로 삼은 선으로, 소련이 즉시 받아들였다. 대개는 신탁통치까지의 임시 조치로 여겨졌으나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사실상의 경계로 굳어졌다. 1950년 6월 조선인민군이 이 선을 넘어 남진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고, 1953년 정전협정이 군사분계선을 새 경계로 세우면서 실효적 분단선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선을 고른 시점과 경위, 그리고 애초에 선행 계획이 있었는지는 사료마다 엇갈린다.

1922–1925 당내 분파

3두체제

тройка

3두체제(트로이카)는 레닌 투병기인 1922년부터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세 사람이 이룬 비공식 지도 연합을 가리킨다. 정치국 안건을 사전에 조율해 트로츠키를 고립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고, 레닌의 유언 공개를 막은 것도 이 연합이었다. 1925년 스탈린이 부하린 쪽으로 기울면서 해체되었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신반대파로 돌아섰다.

1923 당내 분파

46인 선언

Декларация сорока шести (Заявление 46-ти)

1923년 10월 15일, 46명의 저명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정치국에 비밀리에 보낸 서한으로, 트로츠키가 일주일 전 제기한 당내 관료화 비판에 동조하며 당내 민주주의 회복과 분파 금지 조치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이 선언은 좌익 반대파 형성의 기초가 되었으며, 서명자 대다수는 대숙청기에 처형되었다.

1964– 경제·계획

4개 현대화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라는 국가 목표. 1964년 저우언라이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처음 제시했고 1975년 다시 내걸었으나 급진파의 반대로 묻혔다. 1978년 11기 3중전회가 당의 중심 과제를 계급투쟁에서 4개 현대화로 옮기면서 개혁개방의 공식 목표가 되었다. 웨이징성이 「제5의 현대화」로 민주를 요구한 것은 이 구호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덩샤오핑은 「4항 기본원칙」으로 정치적 한계를 그었다.

1917년 4월 이념·이론

4월 테제

Апрельские тезисы

레닌이 1917년 4월 스위스 망명에서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한 직후 볼셰비키 당에 제시한 10개 조항의 행동 강령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일체의 지지 거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 제국주의 전쟁의 즉시 종식, 토지 국유화와 은행 통합, 당의 명칭을 공산당으로 바꿀 것 등을 주문했으며, 부르주아 민주혁명이 끝났고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7차 전러시아 당협의회(4월)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 볼셰비키의 공식 노선이 되었고, 7월 사태와 10월 혁명으로 이어지는 전략적 전환의 출발점이 되었다.

1966–1976 당내 분파

4인방

문화대혁명기 마오쩌둥의 급진 노선을 대변한 장칭·장춘차오·야오원위안·왕훙원의 상하이계 정치국 그룹. 선전과 문화를 장악하고 저우언라이·덩샤오핑의 정상화 노선에 맞섰으며, 1976년 4월 톈안먼 사건 뒤 덩샤오핑 재실각을 이끌었다. 마오 사망 한 달 뒤인 10월 6일 화궈펑·예젠잉·왕둥싱이 이들을 체포했고, 1980~1981년 특별법정에서 문화대혁명의 죄를 이들에게 집중시킨 재판이 열렸다. 「4인방」이라는 이름은 마오가 1974년 이들을 경고하며 쓴 말이다.

1990 경제·계획

500일 계획

Программа «500 дней»

1990년 8~9월에 작성되어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한 소련의 시장경제 이행 계획. 러시아어 정식 명칭은 샤탈린-야블린스키 프로그램이며, 「500일」로 통칭된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발의와 공동 결정으로 작업반이 구성되었고, 샤탈린이 계획을 제안하고 그의 작업반이 완성했으나 저자를 야블린스키 한 사람에게 돌리는 오해가 흔하다. 국유재산 사유화, 경제 관리의 분권화, 자유 가격 형성으로의 이행, 사적 기업 활동을 위한 조건 조성을 핵심으로 삼았다. 500일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리시코프 정부는 「기본 발전 방침」 대안을 내고 고르바초프는 절충을 시도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영어권에서는 '충격요법' 프로그램으로 소개된다.

1927–1961 억압·사법

58조

58-я статья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 공화국 형법 제58조는 '반혁명 활동'을 처벌하는 조항군이었다. 1926년판 형법이 1927년 1월 1일 발효되면서 시행되었고, 국가범죄에 관한 연방 법규가 1927년 2월 25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승인되면서 그 적용 근거가 정비되었다. 58-1조는 소비에트 권력의 전복·약화를 목표로 하는 모든 행위를 반혁명으로 규정했고, 58-1a~58-14조가 반역·간첩·경제 파괴·선동·불고지 등을 규율했다. 형량은 6개월 징역부터 재산 몰수를 동반한 총살형까지였다. 1961년 1월 1일 새 공화국 형법 시행과 함께 폐지되었다.

1928–1991 경제·계획

5개년 계획

пятилетний план, пятилетка

소련에서 국가경제 발전을 5년 단위로 계획한 중앙집권적 계획 체계.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가 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전국 단위로 수립했으며, 1928년 제1차 계획부터 1991년까지 총 13차에 걸쳐 시행되었다. 1차 계획은 중공업 우선의 초고속 공업화를 제도화했고, 이후 중국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이 방식을 채택했다.

1907년 6월 3일 당·국가 기구

6·3 쿠데타 (트레티예이윤스키 페레보로트)

Третьеиюньский переворот

1907년 6월 3일(구력) 러시아 제국에서 제2국가두마가 강제 해산되고 선거법이 일방적으로 개정된 사건이다. 니콜라이 2세와 스톨리핀 내각은 두마의 동의 없이 선거제도를 바꾸었으며, 이는 기본법 제87조를 위반한 헌정 쿠데타였다. 이 사건은 1905년 혁명의 종결로 간주되며, 새 선거법은 지주와 부유층에 유리하게 재편되어 제3두마에서 보수적 다수를 낳았다.

1950–1955 경제·계획

6개년 계획 (1950–1955)

Plan sześcioletni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두 번째 중앙집중식 경제계획으로 3개년 계획(1947–1949)에 이어 1950년 7월 21일 의회에서 채택되었다. 노바 후타의 레닌 제철소, 그단스크·슈체친 조선소 등 중공업 부문에 국영 자금을 집중했으며, 소비재·식품·서비스 부문 투자는 억눌렀다. 급격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속에서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물자 부족과 배급제가 되살아나 노동자들의 불만을 쌓았으며, 계획은 수차례 수정되었으나 결국 목표를 채우지 못했다.

1907–1915 당·국가 기구

6월 3일 체제

Третьеиюньская система

1907년 6월 3일 스톨리핀이 제2국가두마를 해산하고 선거법을 개정한 친위쿠데타로 수립된 러시아 제국의 정치 체제. 토지 소유 귀족과 부유한 도시 계층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선거권을 재편해 제3·제4두마에서 정부에 협조적인 보수 다수를 확보했으며, 자의적 통치와 제한된 의회주의를 결합한 '두마 군주제'의 성격을 띠었다. 1915년 진보블록이 결성되며 사실상 붕괴했다.

1917년 7월 당·국가 기구

7월 사태 (1917년 러시아)

Июльские дни

1917년 7월 3~5일(구력) 페트로그라드에서 제1기관총연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 공장 노동자 수십만 명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구호로 무장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케렌스키 공세의 참패와 카데트 장관들의 사퇴로 촉발된 이 봉기는 임시정부 충성 부대의 발포로 유혈 진압되었고, 이후 볼셰비키에 대한 탄압이 전개되어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하고 트로츠키 등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중권력의 종식과 평화적 소비에트 권력 이양 가능성의 소멸, 그리고 무장 봉기 노선으로의 전환을 예비한 분수령이었다.

1987–현재 한국 정치경제

87년 체제

87년 체제 (八七年體制)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형성된 한국의 정치·경제·노동체제로, 권위주의체제의 종식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화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변동을 통칭하는 담론이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세력 사이에 일정한 힘의 균형이 형성된 가운데 대통령 직선제가 제도화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에 토대하는 노사 자율주의와 재벌 중심 성장 구조가 지속되었다. 노동 영역에서는 전노협이 창출한 전투적 조합주의의 원형인 기업별 노조 체제가 확립되었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 확대, 노동자 내부 격차 심화를 겪으며 장기 위기 담론의 대상이 되었다.

1917년 11월 11일 경제·계획

8시간 노동제 법령

Декрет о восьмичасовом рабочем дне

1917년 10월 혁명 나흘 뒤인 11월 11일(구력 10월 29일) 인민위원회의가 채택한 법령으로, 사업장 내부 규칙이 정하는 노동시간을 1일 8시간·주 48시간을 넘지 못하게 했다. 같은 달 평화 법령·토지 법령과 함께 새 정부의 첫 법령 가운데 하나였다. 6시간 노동 후 최소 1시간 휴식, 14세 미만 고용 금지, 18세 미만 1일 6시간 제한, 야간노동 규제, 주 42시간 휴식을 규정했다. 임시정부 노동부 초안을 그대로 옮겼다는 서술은 초안 작성자로 지목된 뷔코프 본인의 주장에 근거한 것으로, 확정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1936~1941년 당·국가 기구

8월 4일 체제

Καθεστώς της 4ης Αυγούστου

8월 4일 체제(그리스어: 카테스토스 티스 4is 아브구스투)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가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의 지지 아래 1936년 8월 4일 의회와 헌법 조항을 정지하고 수립해 1936~1941년 그리스를 통치한 독재 체제다. 반공주의와 초국가주의, 검열과 정치적 탄압을 결합했으나 이탈리아·독일과 달리 영국과의 연계를 유지했다. 권위주의적 보수 독재라는 평가와 파시즘적 요소를 강조하는 평가가 갈리며, 1941년 4월 해체되고 1942년 2월 왕명으로 공식 폐지됐다.

1912–1914 당내 분파

8월 블록

Августовский блок

1912년 8월 12(25)~20일(9월 2일) 빈에서 트로츠키의 발의로 열린 협의회에서 결성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안의 여러 파벌과 조류의 연합체다. 정치 총강령을 기초로 삼았는데 트로츠키가 작성한 이 결의는 사회민주주의 과업의 통일성을 내세워 합법 의회 활동과 지하 혁명 투쟁을 결합시키고, 청산주의로 알려진 노동운동 합법화 노선을 확인했다. 결성 직후부터 구성 집단들 사이의 정치적 불일치가 드러났고, 1914년 2월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SDLK)가 청산파와의 결별을 요구하며 대표를 철수한 데 이어 트로츠키도 떠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1966–1970 경제·계획

8차 5개년 계획 (황금의 5개년)

Восьмая пятилетка, Золотая пятилетка

소련의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으로, 코시긴 개혁과 병행되어 소련 역사상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황금의 5개년'이라 불렸다. 국민소득이 42% 증가하고 연평균 7.7~7.8%의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공업 총생산은 51%·농업은 21% 증가했다. 그러나 이 성장이 개혁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기존에 투입되지 않았던 비축 자원의 일회적 방출에 의한 것인지는 소련 경제사의 핵심적인 논쟁으로 남아 있다.

1991 당·국가 기구

9+1 성명

Совместное заявление о безотлагательных мерах по стабилизации обстановки в стране и преодолению кризиса («9+1»)

9+1 성명은 1991년 4월 23일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RSFSR,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9개 공화국 정상들이 모스크바 근교 노보-오가료보에서 서명한 「무질서 극복과 정세 안정을 위한 긴급 조치에 관한 공동 성명」으로, 노보오가료보 과정의 출발점이 된 문서다. 이 성명은 헌정 질서 회복, 신연방조약 초안의 조속한 완성, 반위기 경제 조치의 공동 시행을 골자로 했으며, 연방 중앙을 공화국들과 대등한 '9+1' 협상의 한 축으로 규정함으로써 소련의 평화적 재편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일시적 타협이자 협력의 순간이었으나, 양측 해석 차이는 이후 모든 협상의 긴장으로 작동했다.

1963–1964 국제 운동

9평

九评苏共中央的公开信

중국공산당이 1963년 9월부터 1964년 7월까지 《인민일보》와 《홍기》에 게재한, 소련공산당 공개서한에 대한 9편의 논평이다. 중소 이념 논쟁의 정점을 이룬 이 문건들은 흐루쇼프의 평화공존·평화경쟁·평화이행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정하고, 스탈린 문제·전쟁과 평화·유고슬라비아의 성격 등 9개 주제에서 소련의 노선을 전면 비판했다. 제9평 「흐루쇼프의 가짜 공산주의와 세계사적 교훈」은 자본주의 복벽 방지 15개 조항을 제시했으며, 이는 훗날 문화대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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