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포르모브치
Cominformists
코민포르모브치(이베오브치)는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유고슬라비아 당국이 실존하거나 의심되는 스탈린 지지자에게 붙인 멸칭이다. 이 명칭은 코민포름(공산당정보국)의 세르보크로아트어 이름 '인포름비로'의 머리글자에서 나왔으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내부의 파벌적 현상이었다. 코민포르모브치로 등록된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직된 운동의 일원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상세
명칭과 기원
코민포름(공산당·노동자당 정보국)은 1947년 유럽 공산당들을 연결한 소련 주도 기구였고, 1948년 6월 28일 루마니아에서 열린 제3차 회의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축출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이 기구의 세르보크로아트어 이름 '인포름비로'가 그대로 통용되었고, 여기서 시기 이름(인포름비로 시기)과 집단 이름(인포름비로브치, 이베오브치)이 나왔다. 이 명칭은 처음부터 멸칭이었다.
숙청의 전개
결별 이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부는 당내 충성 문제에 직면했고, 내무장관 알렉산다르 란코비치는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가장 가까운 동지가 이제는 적일 수도 있다'고 적었다. 란코비치는 국가보안국(우드바) 안에 반코민포름 전담 참모진을 설치해 숙청을 지휘했다. 1948~51년에만 당원 5만 5,663명, 1948년 당원의 19.52퍼센트가 코민포르모브치로 등록되었으며, 세르비아 본토에서 절대 수가, 몬테네그로에서 인구 대비 비율이 가장 높았다.
수감·처벌 규모는 사료마다 다르다. 라도반 라돈지치(1983)는 1만 6,288명이 체포·유죄판결을 받았고 그중 2,616명이 당 지도부 각급에 속했다고 밝혔으며, 란코비치 자신은 5만 1천 명이 살해·수감·강제노동으로 보내졌다고 주장했다. 다수는 재판 없이 판결되었다. 실존하거나 의심되는 스탈린 지지자들을 위한 특수 수용소가 1949년 무인도인 골리 오토크와 스베티 그르구르에 세워졌고, 스타라 그라디슈카와 우스타샤 수용소를 전용한 야세노바츠에도 수감자가 있었다.
골리 오토크
골리 오토크는 1949~1956년 극비 정치범 수용소 겸 노동수용소로 운영되었고, 여성 수용소는 스베티 그르구르에 있었다. 수감자들은 채석장과 도자기·목공 작업장에서 극심한 더위와 보라 바람 속에 강제노동을 했다. 수용소 내부 위계는 수감자들끼리 때리고 모욕하고 밀고하고 배척하게 만들었으며, 협조한 사람은 더 나은 처우를 받으며 위계에서 올라갈 수 있었다. 수감자 수와 사망자 수는 논쟁적이다. 약 1만 6천 명이 수감되었다는 기록과 1948~51년의 약 1만 3천 명 추산이 있으며, 사망자는 400~600명이라는 설명과 약 4천 명이라는 설명이 함께 존재한다. 소련과의 관계가 정상화된 뒤 수용소는 크로아티아 관할로 넘어갔고, 유고슬라비아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 금기 주제로 남아 첫 여성 수감자 증언이 1990년에야 나왔다.
인물과 세력
명명된 사례만으로도 숙청의 범위를 볼 수 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당내 논의에서 스탈린을 공개 지지한 유일한 중앙위원이었고, 전 공업장관 안드리야 헤브란그와 함께 일주일 안에 체포되었다. 헤브란그의 경우는 코민포르모브치 혐의가 조작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란코비치는 헤브란그가 1942년 포로 생활 중 우스타샤 간첩이 되었고 이후 소련이 그것을 빌미로 협박했다는 혐의를 조작했으며, 헤브란그는 1949년 6월 11일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군부와 보안기구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드바 요원·장교 1,72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군사 체포 규모는 라돈지치의 4,153명(장교·병사) 추산과 질라스의 장교 7,000명 추산으로 갈린다.
구분과 논점
코민포르모브치는 제도로서의 코민포름과 구분되어야 한다. 코민포름은 공산당들의 조정 기구였으며, 기관지 발간과 상호 합의에 따른 경험 교환·활동 조정 이상의 권한을 갖지 않았다. 또한 코민테른과도 다르다. 코민포름은 1943년 해산된 코민테른의 후신은 아니었으나 그 일종의 계승체로 여겨졌다. 코민포르모브치라는 명칭은 골리 오토크 수감자 전체를 가리키지도 않는다. 이 수용소에는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마케도니아계·불가리아계·알바니아계 등 반공 민족주의자와 일반 형사범도 있었고 사형수도 있었다.
코민포르모브치는 유고슬라비아 밖의 관련 탄압과 함께 존재했다. 동구권에서는 '티토주의자'와 코민포름 결의 지지자로 의심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숙청되었는데, 알바니아의 코치 조제는 1948년 6월 10일 처형되었고 헝가리의 러이크 라슬로는 1948년 6월 15일 체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국내에서도 무장 반대가 있었다. 1948년 몬테네그로에서 일리야 불라토비치가 이끈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우드바 사단 전체가 투입되었고, 1950년에는 코르둔·리카·바노비나와 차진 부근에서 봉기가 있었으나 당국은 이를 코민포름주의로 규정했다. 국외에서는 1949년 말 페로 포피보다가 이끄는 망명 반대 세력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스스로를 '티토-란코비치 파당과 제국주의 노예 상태로부터 유고슬라비아 인민을 해방하기 위한 유고슬라비아 애국자 동맹'이라 불렀다.
역사서술 자체가 오랫동안 이 주제를 비껴갔다. 유고슬라비아 연구는 이베오브치를 멸칭으로 다루며 규모와 모스크바의 역할을 축소했고, 1963년 기록물 이용에 관한 법률이 1947년 이후 문서 열람을 막아 연구가 더디게 진행되었다. 코민포르모브치에 대한 처벌 수치가 사료마다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1955년 6월 2일 베오그라드 선언으로 인포름비로 시기는 관례적으로 막을 내렸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Comprehensive article on the Informbiro period (1948–1955): coining of the term 'Cominformists'/'ibeovci,' 55,663 KPJ members registered as Cominformists (19.52% of 1948 party membership), 16,288 arrested and convicted, establishment of Goli Otok camp, and purges of the military and security apparatus.
- creees.stanford.edu Stanford CREEES event abstract: confirms around 13,000 real or alleged Stalin supporters jailed on Goli Otok from 1949 to 1956, subjected to hard labour and violent 're-education' in a camp system combining elements of Nazi camps and the Soviet Gulag.
- yuhistorija.com Academic volume 'The Tito-Stalin Split 70 Years After' (Zagreb–Ljubljana, 2020): confirms the Informbiro period purges, the Cominformist phenomenon, and includes chapters on Cominform supporters across Yugoslav republics and the Goli Otok camp system.
- dokumen.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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