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사태 (1917년 러시아)
July Days (1917, Russia)
1917년 7월 3~5일(구력) 페트로그라드에서 제1기관총연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 공장 노동자 수십만 명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구호로 무장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케렌스키 공세의 참패와 카데트 장관들의 사퇴로 촉발된 이 봉기는 임시정부 충성 부대의 발포로 유혈 진압되었고, 이후 볼셰비키에 대한 탄압이 전개되어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하고 트로츠키 등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중권력의 종식과 평화적 소비에트 권력 이양 가능성의 소멸, 그리고 무장 봉기 노선으로의 전환을 예비한 분수령이었다.
상세
배경
1917년 7월 초 페트로그라드는 전시 경제 파탄과 사회 양극화 속에 있었다.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축출된 뒤 성립한 이중권력 구도에서, 자유주의 지식인·산업가 중심의 임시정부와 멘셰비키·사회혁명당이 주도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권력을 나눠 가졌다 [P229]. 노동자와 병사들은 임시정부의 전쟁 지속, 밀가루·육류 가격 폭등, 공장 대피령 소문, 해고 공포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이는 볼셰비키 지지로 이어졌다 [P230]. 6월 18일(구력 7월 1일) 소비에트가 정부 지지 시위로 계획한 마르스 광장 행진은 약 50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전쟁을 끝내라' 구호 아래 진행되어, 소비에트 지도부와 수도 대중 사이의 균열을 드러냈다 [P65][P230]. 같은 날 남서부 전선에서 개시된 공세는 초기 이득 뒤 독일군 반격으로 무너졌고, 이 소식이 수도에 퍼지면서 병사들의 동요가 커졌다 [P14][P232].
직접적 계기는 두 가지였다. 7월 2일 정부 대표단이 우크라이나 중앙라다와 체결한 협정과 우크라이나 문제 선언에 반발해 카데트 장관들이 사퇴하면서 연립정부가 해체 직전에 놓였고 [P73][P234], 곧이어 군 상부가 제1기관총연대에 예비 30개 기관총대를 즉시 전선에 보내라고 명령했다 [P64]. 부대는 창설 이래 매주 행군 중대를 전선에 보내온 곳이어서 이 명령은 특히 반발을 샀고, 6월 21일(구력 7월 4일) 연대위원회는 전쟁이 혁명적 성격을 띠기 전에는 행군 중대를 내보내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P64][P70]. 7월 2일 아나키스트-공산주의자 지도부는 다음날 아침 제1기관총연대를 기반으로 병사들을 봉기로 이끌기로 결정했다 [P74].
7월 3~5일(구력)의 전개
7월 3일 아침 제1기관총연대 병영에서 집회가 열렸고 아나키스트 이. 블레이흐만 등이 무장 행동을 주장했다 [P81]. 낮에 르보프 총리가 카데트 장관들과 그 밖의 각료들이 내각에서 이탈했음을 언론에 알리자, 병사와 노동자들은 '자본가 장관'들이 빠져나간 지금이 권력을 넘겨받을 시점이라고 해석했다 [P82]. 연대는 대표단을 크론시타트에 보내 무장해 페트로그라드로 진군할 것을 요청했고, 크론시타트에도 시위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P85].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오후 4시경 사태를 접하고 시위 불참을 결정했으나, 이를 전달받은 기관총병 대표자들은 당을 탈퇴할지언정 연대 결정에 어긋나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P86]. 카메네프는 크론시타트에 전화해 제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P87].
기관총병들의 행동은 저녁 7시경 시작되어 오후 8시 무렵 키셰신스카야 저택 앞에 도착했다 [P89][P92]. 밤 11시 무렵 고스티니 드보르 앞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총격이 시작되어 사상자가 나는 가운데, 중앙위원회와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군사조직, 구역간 위원회는 '평화적이지만 무장한 시위'를 7월 4일 아침부터 지도하기로 결정했다 [P93][P94]. 《프라우다》에서 제지 호소문이 조판에서 빠지면서 이튿날 신문에는 빈 자리가 남았다 [P94]. 4일 아침 크론시타트 수병 약 2만 명이 배를 타고 페트로그라드에 상륙해 키셰신스카야 저택 앞으로 행진했고, 스베르들로프·루나차르스키·레닌이 저택 발코니에서 연설했다. 레닌의 이 연설은 10월 혁명 승리 전까지 그의 마지막 공개 연설이었다 [P100]. 곧 제2기관총연대와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도 합류해, 타브리다 궁전 앞 광장은 가톨릭 성당 등 7개 연대 병사와 수병, 노동자 수만 명으로 메워졌다. 이 군중은 소비에트도, 군구 사령부도, 볼셰비키도 통제하지 못했다 [P107][P108]. 시위 규모는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기까지 추산이 엇갈린다 [P103].
농업장관 차관이 아니라 농업장관인 사회혁명당원 체르노프가 시위대에 붙잡혀 차에 태워졌다. 한 노동자가 주먹을 들이대며 '주면 받아라'고 외쳤고, 트로츠키의 연설로 풀려났다 [P117][P119]. 라빈오비치는 크론시타트의 친볼셰비키 수병들이 체르노프를 붙잡았다고 보았고 [P121][P122], 트로츠키는 반혁명적·형사적 요소들의 소행으로 보았지만 근거가 약했다 [P117][P120].
성격과 책임을 둘러싼 논쟁
라빈오비치에 따르면 봉기는 7월 1일(구력 7월 14일)부터 제1기관총연대가 전선 파견에 반대해 계획한 무장 시위에서 비롯되었고, 중앙위원회와 레닌은 지지 기반의 강도를 확신하지 못해 6월 10일(구력 6월 23일)의 무장 시위 계획을 이미 취소한 상태에서 자제를 요구했다 [P239]. 그러나 이탈리아 소재 아카이브와 《프라우다》 등이 밝힌 정황, 그리고 7월 4일 새벽에 당 지도부가 사후적으로 이 행동을 평화적 무장 운동으로 지도하기로 한 사실은 지도부의 통제력이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볼셰비키 군사조직과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그리고 현장의 당원들은 참여를 적극 밀어붙였고, 중앙위원회는 시위 취소를 결정하고도 현장에서 그것을 관철하지 못했다 [P29][P239].
리처드 파이프스는 이 사건을 레닌이 권력을 장악하려 한 초기 시도로 평가하며, 마지막 단계인 정부 전복·체포 작전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준비 부족이 아니라 레닌의 우유부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P191][P239]. 알렉산더 라빈오비치와 사회사 연구자들은 레닌의 정치적 계산을 강조하는 시각에 반대하며, 볼셰비키 조직 내부의 동요와 분열을 지적한다 [P239]. 다비드 만델은 노동자들이 폭력을 의도하지 않았고 행진로에서 도발자들이 쏘아댄 데 대한 자기방어로 무장했다고 본다 [P239]. 라빈오비치는 평화적 시위라는 규정 자체를 반박하며, 아나키스트-공산주의자의 영향을 받은 기관총병들의 정부 전복 요구와 무장한 시위자들의 총격, 우익 세력과 도발자, 그리고 만연한 공포가 충돌의 원인이라고 본다 [P239]. 이처럼 사건의 성격, 즉 평화적 시위였는지 무장 봉기였는지, 그리고 누가 그 책임을 지는지는 오늘날까지 역사학계의 쟁점으로 남아 있다 [P53][P190]. 사건을 둘러싼 명칭도 '무장 시위', '7월 반란', '7월 쿠데타', '7월 리허설' 등으로 갈린다 [P190][P191].
진압과 탄압
7월 4일 오후 볼린 연대가 타브리다 궁전 방어를 위해 출동했고 [P106], 레빈데르 대령이 이끄는 코사크·기마포병 부대가 샤팔레르나야 거리에서 포격을 가하면서 시위대가 흩어졌다. 이 충돌로 코사크 6명, 기마포병 4명이 죽고 다수가 다쳤다 [P125][P127]. 7월 3~4일 사이 진압 과정에서 수백 명이 죽었다고 보는 추산도 있다 [P24]. 라비노비치의 연구는 언론 보도와 문서, 회고록을 종합해 충돌의 책임을 시위대, 도발자, 우익 세력, 그리고 공황과 혼란에 나눠 지우고, 어느 쪽 하나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P105].
크론시타트 수병 등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농성했으나 7월 6일 항복했고 [P131][P139], 트로츠키는 자신을 체포해 달라고 요구해 '크레스티'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변호하려 했던 인물로, 대중의 분노로부터 볼셰비키를 변호한 소수의 비당원 중 하나였다 [P187].
7월 5일 아침 융커들이 《프라우다》 편집부와 인쇄소를 점거했고, 레닌은 그 몇 분 전에 그 자리를 떠났다 [P134]. 7월 7일 임시정부는 레닌의 체포 명령을 내렸고, 레닌은 지하로 숨었다가 핀란드로 넘어갔다 [P24][P151]. 정부가 작성한 체포 대상자 명단에는 레닌·지노비예프·루나차르스키·콜론타이·라스콜니코프·로샬 등이 올랐다 [P140]. 아레스티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약 800명의 볼셰비키가 체포되었고, 당사무소와 인쇄소, 지구 사무소가 파괴되었다 [P186][P243]. 당기관지 《프라우다》는 폐간되고 《라보치 이 솔다트》 등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나왔으며, '옥세프나야 프라우다' 등 병영 신문은 유통이 금지되었다 [P170]. 제1기관총연대는 해산되거나 전선으로 보내졌고 [P171], 붉은 근위대는 무장해제되었으며 [P172], 7월 12일에는 전선 병사에 대한 사형제가 부활했다 [P36].
결과와 의의
임시정부는 한동안 소비에트를 압박하며 '이중권력' 체제를 사실상 축소했다. 7월 8일 케렌스키가 총리가 되었고 [P33], 소비에트는 새 내각을 '혁명 구원 정부'로 승인했다 [P163]. 멘셰비키의 다은은 '오늘 볼셰비키 위원회가 폭로되었으니 내일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의심받고, 모레는 혁명과의 전쟁이 신성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시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레닌의 반역 혐의를 사실상 외면했고,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성향의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볼셰비키를 '잘못된 길로 들어섰으나 정직한 투사'라고 규정했다 [P174].
1936~1938년 테러가 절정에 달했을 때, 대부분의 옛 야당 지도자들은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가 되었다. 부하린·리코프·라데크 등은 1938년 3월 처형되었고,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1936년에, 피아타코프·라데크는 1937년에 처형되었다. 트로츠키는 1940년 멕시코에서 살해되었고, 스탈린 자신도 1953년에 사망했다 [P1].
7월 사태가 남긴 결과는 이중적이었다. 사회주의 혁명 정파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일시적으로 흔들렸고, 볼셰비키에 대한 공개 활동의 자유도 제약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불안정 부대를 해산하지 못했고, 볼셰비키 조직들은 곧 활동을 재개했다 [P243]. 동시에 이 사건은 임시정부가 대중의 요구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드러냈고, 소비에트를 통한 평화적 권력 이양이라는 기대를 꺾었으며, 군사독재냐 프롤레타리아 독재냐라는 선택지를 전면에 세웠다 [P243]. 실제로 7월 초 레닌이 지지했던 것처럼 보이는 무장 행동은 며칠 만에 실패했고, 당은 7월부터 8월까지 지하로 내려가 활동했다. 8월의 코르닐로프 사건을 거치면서 사병과 노동자들은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쿠데타 세력에 맞서 소비에트를 무장 방어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다수 대중의 요구가 되었다. 10월 혁명은 바로 이 경험 위에서 성립했다 [P2].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general account of the July Days: background, demonstrations, Bolshevik involvement, and aftermath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detailed chronology, role of the First Machine Gun Regiment, Bolshevik internal debates, and aftermath
- encyclopedia.1914-1918-online.net Siobhan Peeling, 'July Crisis 1917 (Russian Empire)', 1914-1918-online: scholarly overview of origins, demonstrations, historiography of Bolshevik involvement, and legacy
- encyclopedia.1914-1918-online.net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