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의자법
Law of Suspects (1793)
1793년 9월 17일 프랑스 국민공회가 의결한 법령으로, 반혁명 「혐의자」의 범주를 넓게 정하고 이들을 재판 없이 체포해 평화가 올 때까지 가두게 했다. 공포정치의 법적 토대가 되었다.
원문
1793년 9월 17일 혐의자 체포를 명하는 법령.
국민공회는 지난 8월 12일 법령의 집행 방식에 관한 입법위원회의 보고를 청취한 후 다음과 같이 법령을 제정한다.
제1조. 본 법령의 공포 직후, 공화국 영토 내에 있으며 아직 자유로운 상태인 모든 혐의자는 체포 상태에 놓인다.
제2조. 다음은 혐의자로 간주된다.
1. 행동, 관계, 발언 또는 글을 통해 폭정이나 연방주의의 지지자이자 자유의 적으로 드러난 자.
2. 지난 3월 21일 법령이 규정한 방식에 따라 생계 수단과 시민적 의무의 이행을 증명할 수 없는 자.
3. 공화국에 대한 충성 증명서 발급이 거부된 자.
4. 국민공회 또는 그 위원들에 의해 직무가 정지되거나 해임되었으며 복직되지 않은 공직자, 특히 지난 8월 14일 법령에 따라 해임되었거나 해임되어야 하는 자.
5. 이전의 귀족들과, 망명자의 남편, 아내, 아버지, 어머니, 아들 또는 딸, 형제 또는 자매, 대리인 가운데 혁명에 대한 애착을 지속적으로 표명하지 않은 자.
6. 1789년 7월 1일부터 1792년 4월 8일 법률 공포 사이의 기간에 망명한 자로, 이 법령이 정한 기한 내에 또는 그 이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하더라도 이에 해당한다.
제3조. 지난 3월 21일 법률에 따라 설립된 감시위원회, 또는 군대와 도(département)에 파견된 인민대표의 행정명령이나 국민공회의 특별 법령에 따라 이를 대체한 위원회는 각자의 관할 구역에서 혐의자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며, 이들의 서류를 봉인할 임무를 맡는다.
이 영장을 교부받은 공권력 지휘관들은 해임의 형벌을 조건으로 이를 즉시 집행해야 한다.
제4조. 위원회 구성원들은 7인 이상이 모이지 않고 절대다수의 찬성이 없으면 어떤 개인의 체포도 명령할 수 없다.
제5조. 혐의자로 체포된 개인들은 먼저 구금 장소의 구치소로 이송된다. 구치소가 없을 경우 각자의 거처에서 감시를 받는다.
제6조. 다음 8일 이내에 이들은 도 행정부가 본 법령을 접수한 직후 이 목적을 위해 지정하고 준비해야 하는 국가 건물로 이송된다.
제7조. 구금자들은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구를 이 건물들로 옮길 수 있다. 이들은 평화가 올 때까지 그곳에 감시 상태로 남는다.
제8조. 감시 비용은 구금자들이 부담하며, 이들 사이에 균등하게 분담된다. 이 감시는 가장과 국경에 있거나 국경으로 향할 시민들의 친척에게 우선적으로 맡겨진다. 그 급여는 감시인 1인당 하루 반의 노동 가치로 정해진다.
제9조. 감시위원회는 체포한 사람들의 명단, 체포 사유, 혐의자로서 이들에게서 압수한 서류를 지체 없이 국민공회 일반안전위원회에 보낸다.
제10조. 민사 및 형사 법원은 불기소 처분을 받거나 제기된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은 범죄 피의자들을 필요할 경우 구금 상태로 유지하고 앞서 명시한 구금 시설로 보낼 수 있다.
상세
1793년 여름 공화국은 안팎에서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7월 마인츠와 발랑시엔이 적에게 항복했고 리옹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8월 28일 툴롱은 영국 함대에 항구를 넘겼다. 9월 5일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로 몰려든 날, 비요바렌은 「모든 반혁명가와 혐의자」를 체포하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가 9월 17일 메를랭 드 두에와 캉바세레스의 안으로 국민공회가 의결한 이 법령이다. 흔히 「법」이라 부르지만 형식은 국민공회의 법령(décret)이고, 8월 12일에 이미 결의한 혐의자 체포를 어떻게 집행할지 정한 것이다.
법령은 혐의자의 범주를 넓게 잡았다. 행동만이 아니라 인적 관계와 말과 글로도 혐의자가 될 수 있었고, 생계 수단을 증명하지 못하거나 공민증을 거부당한 것, 귀족이나 망명자의 가족으로서 혁명에 대한 애착을 「꾸준히」 보이지 않은 것도 혐의 사유가 되었다. 체포는 법원이 아니라 지역 감시위원회가 맡아 명단을 만들고 영장을 냈으며, 붙잡힌 사람은 「평화가 올 때까지」 갇혀 있어야 했다. 혐의자 구금은 재판이 아니라 행정 처분이었고, 풀려나려면 혐의자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 했다.
혐의자법은 사람을 잡아 가두는 법이었지 재판하는 법이 아니었다. 반혁명 범죄를 재판한 혁명재판소는 이보다 반년 앞선 1793년 3월에 이미 세워져 있었다. 혐의자법은 그때 정한 좁은 혐의자 정의를 크게 넓혔을 뿐, 재판소를 새로 만들거나 재판 절차를 바꾸지 않았다. 재판 절차를 바꾼 것은 1794년 6월 10일의 프레리알 22일법이다. 이 법은 혁명재판소에서 피고의 변호인과 증인 신문을 없애고 판결을 무죄와 사형 두 가지로 줄였다.
법이 시행되자 혐의의 기준은 더 넓어졌다. 10월 11일 파리 코뮌의 쇼메트는 혐의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자유에 반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자유를 위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라는 유명한 구절은 흔히 이 법의 조문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구금된 사람의 수는 추정이 크게 엇갈린다. 도널드 그리어는 지방 연구를 모아 50만 명으로, 알베르 마티에는 30만 명으로, 루이 자코브는 7만 명으로 보았다. 파리에서만 테르미도르 직전에 8천 명이 넘게 갇혀 있었다.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반동 뒤 국민공회는 8월 5일 아무 혐의도 없는 수감자를 풀어 주기로 했고, 8월 24일에는 구역마다 있던 혁명위원회를 디스트릭트마다 하나씩 두는 감시위원회로 바꾸었다. 법은 차츰 쓰이지 않게 되었고, 1795년 10월 총재정부가 들어서면서 폐지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1858년에 만든 일반 치안법도 「혐의자법」이라고 불렸지만 이 법과는 다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