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bhadda Xoreynta Somali Galbeed (WSLF) · 1973–1989 (창설·개시 연도는 사료마다 다름)

서소말리아 해방전선

Western Somali Liberation Front

소말리아 민족주의 운동으로, 에티오피아령 오가덴의 독립과 소말리아와의 통일을 내걸고 무장투쟁을 벌였다. 1977~1978년 오가덴 전쟁에서 소말리아 정규군과 함께 싸운 반군이다.

상세

서소말리아 해방전선(WSLF)은 에티오피아령 오가덴의 소말리아계 주민이 세운 민족주의 무장조직으로, 오가덴의 독립과 소말리아와의 통일을 내걸었다. 오가덴에서 활동했고 소말리아계 지역을 하나의 국가로 묶는 '대소말리아' 구상을 지지했다.

뿌리와 결성

조직의 기원은 1960년대 초 에티오피아 제국 통치에 저항한 소말리아계 반군 네트워크다. 1963~1965년 오가덴 봉기(나스랄라, 오가덴 해방전선)는 훗날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의 토대가 되었다. 당시 반군은 1965년 무렵 대부분 진압됐지만, 잔존 세력은 1973년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이 결성될 때까지 활동을 이어 갔다. 1963년 에티오피아 제국군은 하라르를 근거지로 소말리아인 마을을 불태우고 가축을 대량 학살했으며, 항공기 기총소사로 급수처를 막아 물 이용을 끊었다. 수천 명이 난민이 되어 오가덴을 떠나 소말리아로 갔다. 1963~1965년 봉기는 소말리아청년동맹 창립 구성원이던 무크탈 다히르가 이끌었는데, 호다요에서 나스랄라 부대 300명이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1964년 휴전 뒤 그는 휴전을 무시하겠다고 선언하며 "나의 민족은 누구의 관할 아래에도 있지 않고 나 외에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창설 연도는 사료마다 갈린다. 1976년 1월 모가디슈 북서쪽 100km 지점에서 서소말리아 사회 각계 대표 회의가 열려 25인 위원회가 선출됐고, 이 회의에서 조직이 공식 결성되며 압둘라히 하산 마흐무드가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반면 창설 시점을 1974년 또는 1975년으로 보는 기록도 있어 '1974년 또는 1975년, 사료가 엇갈린다'는 정리가 있다. 1976년 무장공격을 시작할 때까지 이 조직에 관한 당대 기록은 거의 없었다.

일부 연구자는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의 출범을 옛 조직의 재가동으로 보지만, 지도자도 이름도 하급 대원 대부분도 달랐으므로 UCDP는 이를 별개의 독립 행위자로 분류한다.

조직과 이념

서기장 겸 군사 지휘관은 압둘라히 하산 마흐무드였다. 1977년 8월 24일 그는 분쟁의 쟁점이 '대(大)오가덴'의 지위이며 주민이 소말리아 합병과 독립 중 하나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운동의 독립에 대한 태도는 완전 독립과 소말리아 내 자치 사이에서 흔들렸다. 1977년 9월 4일 서기장은 요구 영토를 밝혔는데, 모얄레(에티오피아-케냐 국경)에서 아와시(아디스아바바 동쪽 약 100마일)를 거쳐 엘 아데(지부티 국경)에 이르는 선의 동쪽 전역이며, 그 지역에 소말리아인이 산다고 주장했다. 조직은 소말리아계가 중심이었으나 에티오피아 무슬림 인구 가운데 하라리인과 오로모인도 상당수 참여해 소말리아 측을 지지했다.

무장투쟁과 오가덴 전쟁

게릴라전은 1976년 초 북부와 남부에서 동시에 시작돼 그해 말 남동부 발레와 시다모로 번졌다. 소말리아 공화국에서 침투한 게릴라는 정부 청사를 파괴하고 경찰과 민간 행정을 공격해 국가의 존재를 해체했다. 조직은 '아파르 가스'라 불리는 4개 여단을 두었다.

UCDP는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의 무력 사용 개시일을 1975년 12월 14일로 기록한다. 대부분의 사료는 1975년 말부터 반군이 국경을 넘어 에티오피아로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데 동의하며, 첫 전투 사망은 1976년 1월 3일로 잡힌다. 이와 달리 활동 개시를 1974년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1977년 6월 고데, 데게하부르, 케브리다하르 공세는 큰 손실을 내며 격퇴됐다. 고데에서만 게릴라 300명과 소말리아 정규군 고위 장교 14명이 죽었다. 이 실패 뒤 소말리아는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정규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UCDP에 따르면 소말리아는 그전에도 물질 지원을 제공하고 하르게이사에 주된 후방기지를 두게 했으며, 1977년 중반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을 반군과 함께 싸우도록 파견했다. 1977년 7월 13일에는 소말리아국가군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소말리아 정부는 선전포고를 거부하고 모든 군사 행동은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이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77년 9월까지 소말리아군과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은 오가덴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지지가를 점령했다. 그러나 1978년 초 에티오피아 정부는 새로 들여온 소련 장비와 쿠바 전투부대를 앞세워 이들을 밀어냈다.

전쟁의 확대는 냉전 진영 정렬과 얽혀 있었다. 소련은 소말리아의 침공에 반발해 소말리아 지원을 철회하고 에티오피아를 지원했다. 에티오피아는 10억 달러 규모의 공수, 쿠바 군인·항공병 12,000명 이상, 소련 고문 1,500명으로 위기를 넘겼다. 오가덴 전쟁 기간 민간인 25,000명이 죽고 에티오피아 내 소말리아계 주민 500,000명이 이주한 것으로 기록된다.

당대의 국제 중재에서 에티오피아는 이 조직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1977년 8월 리브르빌 회담은 소말리아가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을 협상에 포함시키자고 요구하고 에티오피아가 이를 거부하면서 결렬됐다. 에티오피아는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을 '소말리아 정규군이 자금을 대고 통제하며 인력을 채운 하나의 희극'으로 규정했다.

UCDP는 전쟁을 두 개의 병행하는 분쟁으로 구분한다. 에티오피아 대 소말리아의 국가 간 분쟁과, 이후에도 아디스아바바 정권과 계속 싸운 내부 분쟁이다. 즉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의 반란 단계는 국가 간 전쟁과 구별되며, 조직은 '전자의 보조 부대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분열, 진압, 소멸

조직의 내부 분열은 전쟁 수행을 제약했다. 9개 씨족 기반 부문으로 구성돼 서로 '격렬하게 경쟁'했고, 정부군의 공격을 받을 때 서로 돕기를 주저하는 일이 잦았다. 1979년에는 이사크계 부문 '아프라드'가 한 대원의 강간 사건이 살인과 추가 폭력으로 번지면서 오가덴계 주력 부문과 충돌했다.

에티오피아 국가의 대응은 민간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국제 구호 관계자들에 따르면 에티오피아군의 대응은 '민간인에 대한 조직적 테러와 폭력 작전'이었다. 1979년 말에는 주민이 '보호 마을'에 강제로 이주됐고, 그 밖의 모든 사람과 경제 자산을 겨냥한 공세가 이어졌다. 1980년 8월에는 쿠바 기계화 여단의 지원을 받은 '라시 작전'이 반군을 에티오피아 밖 북부 소말리아로 몰아냈다. 이 작전에는 6개 사단, 60,000명이 투입됐고 1980년 12월에는 오가덴에서 반군이 정리된 것으로 보고됐다. 1978년 6월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은 고데를 되찾아 에티오피아·쿠바 군인 300명을 죽이고 그 지역 유일의 항공기지를 무력화했다. 1970년대 말 그 규모는 18,000명으로 추산되어 에티오피아에서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 다음가는 반군이었다. 1980년대 초 에티오피아 정부는 오가덴을 거대한 군사구역으로 만들고 무차별 공중폭격과 강제 이주를 감행했으며, 데르그는 소말리아계 저항을 약화시키려 인위적 가뭄과 기근을 조성했다.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은 에티오피아가 후원한 소말리아계 대리 세력에게도 공격받았다. 에티오피아는 새로 결성된 소말리아구원민주전선(SSDF)을 동원해 서소말리아 해방전선 대원을 추격했고, 1982~1984년에는 에티오피아의 지원을 받은 소말리아민족운동(SNM)이 북서부 소말리아에서 서소말리아 해방전선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1984년 12월 SNM의 공세로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은 북부 소말리아의 후방기지에서 밀려났다.

정치적으로도 균열이 났다. 1981년 회의에서 모가디슈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결'을 추구하려는 젊은 급진파가 압둘라히 하산 마흐무드와 부지도자 압디 나시르가 이끄는 원로 중앙위원회를 누르고 승리했다. 새 집행부가 선출되어 모하메드 디리예 우르도흐가 서기장이 되었고, 중앙위원 수는 25명에서 50명으로 늘었다.

조직으로서의 서소말리아 해방전선도 폭력 행위의 주체였다. 1979년 하라르 군정장관은 정부가 휴전 협의 초청을 수락한 뒤 반군과 만날 10인 대표단을 지정했다. 그러나 회담 대신 매복한 서소말리아 해방전선 부대가 대표단 7명을 죽이고 3명을 사로잡았으며, 인질 확보가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이 정치·군사적 요인으로서 끝난 것은 국가 간 합의와 연결된다. 1988년 4월 에티오피아-소말리아 협정으로 소말리아 정부가 지원을 철회하고 조직을 제한하면서 활동이 끝났다. 시아드 바레는 '서소말리아'(오가덴)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서소말리아 해방전선 활동을 금지했다. 서소말리아 해방전선, 오가덴해방전선(ONLF) 등 해방조직들은 모가디슈의 새 대외노선을 규탄했고, 1988년 협정은 오가덴 씨족 내부에서 바레에 대한 반발을 키웠다. 1989년까지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은 에티오피아 안에서 유효한 게릴라 조직으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990년대 초에도 수백 명이 스스로를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이라고 밝혔다.

전쟁 이후 많은 지지자가 모가디슈 의존 심화에 환멸을 느끼고 오가덴 투쟁이 에티오피아-소말리아 국경 문제로만 취급되는 데 불만을 품었다. 서소말리아 해방전선 청년 분파의 일부가 1984년 오가덴해방전선(ONLF)을 결성했고, 이는 시아드 바레 정부에 의해 즉시 금지됐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countrystudies.us
  3. ucdp.uu.se
  4. 위키백과 (영문)
  5.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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