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 군사정권과 사회주의 선언
군사정권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언어·경제·권력 구조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시아드 바레의 최고혁명평의회는 1970년 과학적 사회주의를 선언했다. 군부는 의회·행정부의 권력을 집중하고 국가 주도의 사회개조를 추진했다.
1969년의 정변과 군정
1960년 독립한 소말리아는 서로 다른 식민 행정권에서 나온 북부와 남부를 통합해야 했다. 의회정치 아래에서도 정당 분열과 후견주의, 부패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1969년 10월 대통령 압디라시드 알리 셰르마르케가 암살된 뒤 시아드 바레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집권했다. 군부는 부패 청산과 국민 통합을 내세웠지만 의회·헌법·정당 활동을 중단시키고 최고혁명평의회에 권한을 모았다. 근거 1 · 근거 2
과학적 사회주의와 종교·민족주의
1970년 지도부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공식 노선으로 제시했다. 시아드 바레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을 양립 가능한 것으로 설명하고, 씨족 분열을 넘어 국민을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조직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념은 개발계획과 국유화를 정당화하는 언어였으며 소련의 군사·기술 지원과도 연결됐다. 그러나 정권의 사회주의는 종교가 사라진 사회나 소련 제도의 완전한 복제와 같지 않았다. 근거 3
국유 부문과 목축경제의 차이
정부는 은행·보험·석유 유통과 주요 제조업을 국가 통제 아래 두고 개발계획을 추진했다. 하지만 목축민의 낙타와 가축 무리를 전면 국유화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적 기업 부문과 생활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적 목축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운영됐다. 국유화의 범위만으로 경제 전체가 동일한 계획체제로 바뀌었다고 판단하면 실제 소유관계와 생산 방식을 놓친다. 근거 4
농업·어업 협동조합과 정착 사업도 확대됐다. 1974~1975년 가뭄은 가축과 생계를 파괴했고 정부는 국제 원조와 수송을 조직해 일부 목축민을 남부 농업·어업 정착지로 옮겼다. 이러한 사업은 구호와 사회개조를 함께 추구했으나 지속적인 생산·수익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실패를 목축민의 보수성만으로 설명하기보다 기술·시장·관리 역량, 기후 충격과 전쟁 비용을 함께 살펴야 한다. 근거 4 · 근거 5
소말리어 표준화와 문해교육
1972년 라틴문자에 기반한 소말리어 표기법 채택은 식민지 언어가 지배하던 행정과 교육을 바꾸는 전환점이었다. 공무원에게 새 표기법 학습이 요구됐고 교재가 제작됐다. 1974년 농촌 문해운동에는 학생과 교사들이 동원돼 유목민 공동체로 들어갔다. 이는 도시의 교육받은 계층과 농촌 사이의 지식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였고, 언어에 따른 공직 진입 장벽을 바꾸었다. 근거 6
다만 단기간의 동원 성과를 장기적 문해력의 완성으로 볼 수는 없다. 가뭄과 이후 전쟁, 학교 체계의 지속 가능성에 따라 성과가 달라졌다. 교육 접근의 확대와 정부의 이념 교육·충성 요구는 함께 진행됐으므로, 문해운동의 사회적 의의와 군정의 정치적 통제를 나누어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근거 6 · 근거 3
1976년 단일 정당과 권력의 연속성
1976년 소말리아 혁명사회당이 만들어지고 최고혁명평의회는 공식 해산됐다. 민간 인사가 당 조직에 들어왔지만 실제 결정권은 시아드 바레와 기존 군 지도부에 남았다. 씨족주의를 폐지한다는 구호 아래에서도 특정 친족·씨족 연결망이 핵심 직위를 차지했고 개인숭배가 강화됐다. 군정에서 정당국가로의 명칭 변경은 권력의 사회적 기반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뜻하지 않았다. 근거 7 · 근거 3
1977~1978년 오가덴 전쟁은 다음 단계의 사건이다. 군비 부담과 소련과의 결별은 초기 개발사업의 재정·기술 조건을 바꾸었고, 이후 서방·국제금융기구와의 관계가 중요해졌다. 따라서 소말리아의 1969~1976년 개혁과 1980년대 위기, 1991년 국가 붕괴를 하나의 변화 없는 체제로 압축해서는 안 된다. 근거 5
소련의 압력과 정당으로의 외양 전환
군사평의회가 정당으로 변신한 것은 내부의 민주화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소련의 압력에서 비롯됐다. 모스크바가 무기에 더해 계속된 원조와 차관의 최대 제공자로 자리 잡자, 소련은 일당 체제의 코뮤니스트당 구조를 갖추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시아드 바레는 이미 1971년에 일당 국가를 만들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평의회는 ‘혁명의 선봉’이라 불리는 간부 집단을 조직하는 데 들어갔는데, 여기에는 군부와 민간 양쪽에서 뽑힌 일종의 사회주의 엘리트가 참여했다. 후에 1973년 국정정치국으로 개칭된 국민홍보처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기구로 설치됐고, 전국에 세워진 교화센터를 통해 정보·국정지도부의 지원 아래 이념을 전파했다. 교화센터는 대개 지역 주민의 자조 노력으로 지어졌다. 1976년 6월, 평의회는 혁명사회당 창립대회를 소집해 평의회 자체를 새 정당의 중앙위원회로 전환하기로 의결했다. 위원회에는 평의회를 이루던 장교 19명에 더해 민간 고문과 각 부처 수장, 공인들이 합류해 모두 73명이 됐고, 그 과반은 민간인이었다. 1976년 7월 1일 평의회는 스스로를 해산하고 정부 권력을 혁명사회당, 곧 최고위원회의 지도 아래 공식 이양했다. 1977년 에티오피아와의 대립이 격화되기 전 짧은 기간 동안 혁명사회당은 소련공산당과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같은 외국 공산당들과 관계를 발전시켰고, 소련공산당은 혁명사회당 당학교 지원 계획을 시작했다. 창립대회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고 바레가 당 총서기가 됐다.
오가덴 침공과 소련의 배신
오가덴 전쟁은 시아드 바레 정권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노선의 담지자로 내세웠던 동맹 전체를 한 번에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1977년 7월 소말리아 국민군은 서소말리아 해방전선의 게릴라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두 달 만에 오가덴의 90퍼센트를 점령했다. 지지가 분명해 보였다. 소말리아는 소련의 무기로 무장한 군대였고, 바레 자신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출신 장교들이 짠 작전에 기댔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이미 저울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를 몰아낸 데르그, 곧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체제를 소련은 ‘진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로 판단했고, 1977년 4월부터 비밀리에 원조를 시작했다. 두 동맹국이 서로 싸우자 소련은 중재를 시도했으나, 1977년 3월 아덴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마련한 에티오피아-소말리아-남예멘 연방 구상도, 7월 모스크바의 정전 중재도 모두 무산됐다. 바레는 오가덴의 자결을 요구했고 멩기스투는 그 땅이 에티오피아의 ‘불가분의 일부’라고 답했다.
결정은 가을에 났다. 9월 소련은 에티오피아에 무기 제공을 시작하며 소말리아에 대한 공급을 끊었고, 11월 13일 바레는 소련-소말리아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모든 소련 고문의 7일 내 추방과 소련 해군기지 사용 중단을 명령했으며 쿠바와도 단교했다. 소말리아 지휘부는 소련 무기 재고로 6개월은 버틸 수 있다고 계산했지만, 그 계산은 소련이 반대편에 서리라고는 상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뒤이은 소련의 대규모 항공 수송과 만 2천 명이 넘는 쿠바 병력, 바실리 페트로프 장군의 지휘 아래 짜인 반격은 1978년 1월 하라르에서 소말리아군을 막아냈고, 3월 5일 지지가 함락되며 전쟁은 끝났다. 소말리아 국민군은 정규 병력의 약 3분의 1, 기갑 부대의 8분의 3, 공군의 절반을 잃었다.
그 대가는 전장 너머에서 지불됐다. 패전은 바레 정권이 독립 이후 저지른 가장 큰 전략적 오판으로 기록됐고, ‘대소말리아’ 통일의 꿈은 사실상 포기됐다. 에티오피아의 학살과 보복으로 1980년까지 약 130만 명의 난민이 소말리아로 넘어왔는데, 바레는 같은 다로드 씨족 출신인 오가덴 난민을 우대해 북부 이사크 지역민의 분노를 샀고, 이는 훗날 내전의 한 뿌리가 됐다. 패전에 불만을 품은 장교들은 1979년 에티오피아의 후원 아래 소말리아구국민주전선을 결성했다.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그럴듯한 외피는 남았지만, 그것을 떠받치던 소련 원조와 개발의 지평은 이 한 번의 전쟁으로 모두 소진됐다.
무엇이 남았고, 무엇이 풀리지 않았는가
과학적 사회주의 실험이 남긴 것을 헤아릴 때, 학계가 거의 이견 없이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문자 하나 뿐이다. 1972년 10월 라틴문자 표기법 채택은 행정·교육·법률의 표준으로 정착해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되돌려지지 않았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제도다. 문해운동의 성과 수치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정부는 유엔 상임대사를 통해 문해율이 12~16퍼센트에서 86퍼센트로 올랐다고 했고, 운동 말미에는 600만 인구 가운데 약 200만 명이 읽고 쓰기를 배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운동 전 문해율 5퍼센트라는 기준치 자체가 의심받는다: 코란학교 등 종교 교육으로 얻은 아랍문자 문해를 통계가 빠뜨렸기 때문이다. 즉 성과의 크기뿐 아니라 비교의 기준선마저 다툼거리다.
더 깊은 이견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 자체가 진짜였는가에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펴낸 지역 연구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갈등이 없는 소말리아에서 씨족이 계급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쓰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공감은 소말리아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그 이념은 소련에 대한 경제·군사 의존을 이어붙일 가장 편리한 못이었다. 이와 대비되는 관찰은, 씨족 정치를 뿌리 뽑겠다던 정권이 권력 핵심을 다시 씨족으로 채웠다는 데서 나온다. 국민들은 정권을 모드(MOD)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는데, 이는 바레의 씨족인 마레한, 어머니 쪽인 오가덴, 국가안보국을 이끄는 사위 아흐마드 술라이만 압둘라의 씨족 둘바한테의 머리글자였다. 1975년 최고혁명평의회 위원 20명 가운데 10명이 이 세 씨족이 속한 다루드 씨족연합 출신이었고, 두 하천 사이 농경지대의 디길과 라한웨인 씨족연합에서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가장 날카로운 평가는 아흐메드 이스마일 사마타르가 1988년 펴낸 『사회주의 소말리아: 수사와 현실』에서 나왔다. 그는 이 정권의 본질을 ‘내부의 군사주의와 외부에 대한 아첨’으로 요약했다. 그의 근거는 1976년 당 창건 이후에 드러났다: 1982년 개인 권력의 비대화를 비판한 중앙위원 7명이 반역죄로 체포되어 재판 없이 구금됐고, 1984년 총선에서는 집권당 후보가 99.8퍼센트를 득표했다. 이 수사와 현실의 틈을 어디까지 정권의 위선으로, 어디까지 냉전하 소국의 생존 전략으로 읽을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시기에 소말리아어 문자라는 지울 수 없는 자산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씨족·개인 권력의 그림자와 나란히 이어졌다는 것, 이 둘을 함께 놓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
1969년 군사정권은 의회정치를 폐지하고 국유화·문해교육·국가개발을 추진했으며 1976년 단일 정당 체계를 만들었다. 소말리어 공용화는 중요한 제도 변화였지만, 개인 권력과 씨족 편중은 평등주의적 구호와 병존했다. 이후 오가덴 전쟁과 대외 동맹 전환은 초기 개혁의 조건을 크게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