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코시긴 개혁
1965년 총리 코시긴은 기업의 자율성과 이윤·수익성 지표를 확대하는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경제학자 리베르만의 제안에서 출발한 이 개혁은 계획경제의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이 개혁의 위험성을 부각시키고 브레즈네프와 보수파가 제동을 걸면서 개혁은 흐지부지됐다.
남예멘 독립과 사회주의 국가의 변천
1967년 영국의 철수 뒤 남예멘은 독립국가가 됐다. 1969년 급진파의 부상과 1970년 인민민주공화국으로의 개편,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은 사회주의 체제 형성의 주요 단계였다.
문화대혁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밀려난 마오는 1966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치자며 학생 홍위병을 동원해 류사오치·덩샤오핑과 당 조직을 무너뜨렸다. 1967년 파벌 무장 충돌 뒤 군이 질서를 회복했고, 1971년 후계자 린뱌오의 죽음은 운동의 명분을 흔들었다. 1972년 닉슨 방중과 1976년 저우언라이·마오의 죽음, 4인방 체포로 10년이 끝났다.
콩고인민공화국과 일당체제의 전환
마리앵 응구아비 지도부는 1969년 콩고노동당을 창설하고 콩고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브라자빌의 이 국가는 이웃 콩고민주공화국과 다른 역사적 국가다.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둡체크가 이끈 개혁운동이다. 검열 완화, 표현과 이동의 자유 확대, 경제 개혁을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진영 이탈로 규정하고,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 5개국 군대를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소말리아 군사정권과 사회주의 선언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시아드 바레의 최고혁명평의회는 1970년 과학적 사회주의를 선언했다. 군부는 의회·행정부의 권력을 집중하고 국가 주도의 사회개조를 추진했다.
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
데탕트(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은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과 소련이 냉전의 긴장을 낮추고 핵무기 증강을 통제하려 한 10년간의 노력이다. 1960년대 후반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미국과의 전략적 균형에 도달하면서, 양측은 무한정한 군비경쟁보다 제한이 더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1972년 모스크바에서 서명한 SALT I은 탄도미사일 방어체제(ABM)를 제한하는 조약과 공격용 미사일 발사대 숫자를 동결하는 잠정협정으로 이어졌다. 뒤이은 SALT II 협상은 블라디보스토크 합의(1974년)를 거쳐 1979년 빈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의 서명으로 정점에 도달했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 상원 비준이 무산되며 데탕트는 종말을 맞았다.
마다가스카르의 군정과 사회주의 제2공화국
1972년 이후 마다가스카르의 군사정부는 프랑스와의 관계 및 식민지에서 이어진 경제구조를 재검토했다. 정권 내부의 방향 차이와 지도부 교체가 이어졌다.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수립
1975년 12월 라오스의 군주제가 폐지되고 인민민주공화국이 수립됐다. 파테트라오의 군사·정치적 우세가 연립정부를 대신하는 일당 국가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베냉 인민공화국과 국민회의 전환
1972년 쿠데타로 집권한 마티외 케레쿠는 1974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언했고 1975년 국호를 베냉인민공화국으로 바꿨다. 일당 체제와 국유 부문 확대가 뒤따랐다.
에티오피아 혁명과 데르그의 권력투쟁
1974년 군부 위원회 데르그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폐위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사회적 불만과 군대의 동요에서 출발한 혁명은 군사 통치와 급진적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헬싱키 협정
헬싱키 협정(1975년 8월 1일)은 유럽 33개국과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명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최종의정서'이다. 소련은 1954년부터 유럽 전후 국경의 공식 승인을 목표로 유럽안보회의를 추진해 왔고, 1970년대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서방이 마침내 응했다. 1972년 사전 협의, 1973~1975년 제네바 실무 협상을 거쳐 35개국 정상이 헬싱키에 모였다. 최종의정서는 정치·군사(제1바스켓), 경제·과학(제2바스켓), 인권·인도적 협력(제3바스켓) 등 세 갈래로 구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국경 불가침 원칙을 관철시켰다고 판단했으나, 제3바스켓의 인권 조항은 소련과 동구권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정부가 스스로 서명한 약속을 근거로 활동할 발판을 제공했다.
앙골라 독립과 MPLA 정권 형성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은 해방운동 세력 간 내전과 외국의 군사 개입 속에서 이루어졌다. MPLA는 루안다에서 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아고스티뉴 네투가 대통령이 됐다.
민주캄푸치아와 1979년 정권 교체
1975년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한 뒤 민주캄푸치아 정권은 도시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강제노동·식량 통제를 시행했다. 처형·박해·기근·질병으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모잠비크 독립과 사회주의 노선
모잠비크는 1975년 포르투갈 식민통치에서 독립했다. FRELIMO 지도자 사모라 마셸이 대통령이 되었고, 독립정부는 교육·보건과 경제의 국가적 재편을 추진했다.
베트남 전쟁 종결과 국가 통일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졌고,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수립으로 국가 통합이 제도화됐다. 군사적 전쟁 종결과 법적 통일은 서로 다른 단계였다.
중월전쟁
1975년 통일 뒤 베트남은 소련과 동맹하고 화교를 추방했으며, 1978년 말 중국의 동맹인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덩샤오핑은 미국 방문 직후 「교훈을 가르치겠다」며 1979년 2월 17일 약 20만 명으로 베트남 북부를 공격했다. 중국군은 3월 6일 랑선을 점령한 뒤 징벌을 선언하고 16일 철수했으며, 국경 충돌은 1980년대 내내 이어졌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년 12월, 소련은 흔들리는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해 군사 개입을 결정했다.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우스티노프·그로미코가 주도한 이 결정은 짧은 안정화 작전으로 기획됐으나, 무자헤딘의 저항과 미국·파키스탄의 지원 속에서 10년에 걸친 소모전이 됐다.
개혁개방: 덩샤오핑 시대
4인방 체포 뒤 화궈펑의 「양개범시」와 덩샤오핑의 「실사구시」가 맞섰고,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는 당의 중심을 경제건설로 옮겼다. 안후이의 농가생산책임제, 광둥의 경제특구, 국유기업 개혁과 가격 이중제가 이어졌으며 민주의 벽과 「자산계급 자유화」 비판이 정치적 경계를 그었다. 1989년의 후퇴 뒤 1992년 덩의 남순강화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확정했다.
폴란드 연대노조와 계엄
1980년 여름, 식료품 가격 인상에 맞선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은 21개 요구를 내건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으로 발전했고, 8월 31일 정부와의 협약을 통해 동구권 최초의 공인 독립노조인 '연대'(Solidarność)가 탄생했다. 1,000만 명이 가입한 연대노조는 16개월 동안 단순한 노동조합을 넘어 자치공화국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되었으나, 소련의 압박과 경제 파탄 속에서 당 제1서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1981년 12월 13일 계엄을 선포하고 군사평의회를 세워 연대를 불법화했다. 수만 명의 군경이 통신망을 차단하고 지도부를 구금했으며, 부이크 탄광에서는 특수진압대가 파업 광부 9명을 사살했다.
1983년의 위기
1983년의 위기는 1981년 소련이 미국의 핵 선제공격 탐지를 위해 개시한 사상 최대 평시 정보작전 RYaN에서 시작되어, 1983년 11월 NATO의 핵전쟁 지휘통제 훈련 Able Archer 83에서 정점에 달한 냉전 최고의 긴장 국면이다. 페르싱 II 미사일의 서유럽 배치, KAL 007기 격추, 페트로프 중령의 조기경보 오경보 대처, 레이건 행정부의 심리전과 함대 훈련이 겹치며 소련 지도부는 NATO 훈련이 실제 선제공격을 위장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련은 동독과 폴란드에서 항공기에 핵탄두를 탑재하고 전투태세를 상향했으며, 1990년 미 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는 '소련군 일부가 Able Archer를 엄호로 한 NATO 공격을 선제하거나 역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1985년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침체한 경제와 경직된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내걸었다. 야코블레프가 설계한 글라스노스트는 검열을 풀고 과거의 범죄를 드러냈으며, 셰바르드나제의 외교는 냉전을 끝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개혁은 보수파와 급진파 사이에서 통제를 잃어 갔다.
반알코올 캠페인
고르바초프 지도부가 집권 두 달 만에 시작한 첫 대규모 사회 개혁이었다. 1985년 5월 「음주와 알코올 중독 퇴치 조치」가 공포되면서 보드카 생산이 감축되고 판매 시간이 제한되었으며 주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정치국에서는 리가초프와 솔로멘체프가 캠페인을 가장 강경하게 밀어붙였고, 실적 경쟁 속에 몰도바·크림·그루지야의 포도밭까지 갈려 나갔다.
체르노빌 참사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4호기가 폭발해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유럽으로 퍼졌다. 초기에 사고를 축소·은폐한 관성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한 새 지도부의 시험대가 됐다. 리시코프가 이끄는 정부위원회가 수습에 나섰고, 수십만 명의 「청산인」이 피폭을 무릅쓰고 동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