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다이르의 함락

인물알렉산드르 말리시킨, 보리스 필냐크 사건내전과 열강의 개입

I

석유등들이 한밤중에 타오르고 있었다. 위층 참모부 전신실에서는 기계들이 쉴 새 없이 두드렸다. 테이프는 끝없이 기어 나오며 짧고 다급한 말들을 외쳤다. 사방 수십 베르스타, 십일월의 밤 속에 군대가 있었다. 십만의 몸뚱이로 치켜든 일격이었다. 군대는 지켜보고 있었고, 얼어붙은 큰길로 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었고, 농가마다 뒹굴고 있었고, 숲 사이에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고, 초원의 무덤 언덕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무덤 언덕 너머에서 바다가 웅웅거렸다. 무덤 언덕 너머에 검은 바위로 등을 구부린 지협이 바다 속으로, 축복받은 푸른 섬의 안개 속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군대는 무덤 언덕 뒤, 등 굽은 검은 바위 앞에 누워, 눈 밝은 포복 초소들로 그 바위를 지키고 있었다.

한밤중에 타오르는 등불, 미쳐 가는 참모부의 불면, 전신기 속으로 외치는 공화국, 초원의 십만 발 구르는 소리. 이것은 펼쳐 들었으나 아직 내리치지 않은 일격이었다. 바위를 향한, 대륙에서 반도로 내던져진 적의 마지막 군대들을 향한 일격이었다.

십만의 실이 모이는 군사령부에서는 밤마다 석유등 아래 일하며 일격을 준비했다. 거기서 십만은 벽에 비친 그림자가 되어 부챗살 같은 행군로를 따라 움직였고, 촉수를 둥글게 오므려 놓아주지 않는 죽음의 조임을 만들고 있었다. 승마바지 차림의 젊은이들이 배를 대고 벽을, 거대한 꽃밭 같은 지도를 기어다니며 무덤 언덕과 바위와 지협 너머의 은밀한 움직임을 표시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선과 색과 기호가 추상적으로 도드라진 그 벽에 이런 것이 있었다.

푸른 남쪽 바다의 등고선 속에 거대한 마름모꼴 반도가 있다. 마름모는 길이 스물다섯 베르스타의 좁은 지협으로 대륙과 이어져 있다.

지협에서 서쪽으로 백 베르스타 지점에 마름모에서 대륙으로 뻗은 가느다란 뭍의 실이 또 하나 있는데, 한가운데가 해협으로 끊겨 있다.

대륙 쪽 지협 앞에는 붉은 깃발들이 울긋불긋 떼 지어 있다. N군이다. 끊긴 가는 실 맞은편의 붉은 깃발들은 이웃한 자볼가군이다. 그리고 이쪽과 저쪽 모두의 맞은편, 반도 쪽에 하늘색 깃발들의 꽃밭이 있다. 다이르의 백군이다.

붉은 군대들의 길은 막혀 있었다. 지협에서는 다이르의 바위가 만에서 만까지 여덟 베르스타 너비를 온통 가로막았고, 거기에 철조망과 기관총좌와 프랑스 기술자들이 세운 중포대 콘크리트 진지의 그물이 쳐져 있어, 북쪽으로, 붉은 군대 쪽으로 깎아지른 단구에 다가갈 수 없었다. 자볼가군 앞에는 해협이 있었다. 해협은 건너편 기슭의 대포로 강화되었고, 폭파된 철교의 악몽 같은 잔해로 막혀 있었다. 방어선 너머에 마지막 남은 자들이 있었다. 나라는 마지막 남은 자들을 없애라고 요구했다.

석유등들은 자정이 넘도록 타올랐다. 한 시 반에 전화가 울렸다. 전신실에서 온 전화였다. 전선군이 전투 지령을 보내고 있었다. 승마바지들은 허둥지둥 벽에서 내려와 참모장과 군사령관에게 보고하러 달렸다. 기계 앞에는 나라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군사령관이 지나갔다. 근시로 눈을 찡그리고 해골처럼 꼿꼿하며 머리를 짧게 친, 돌 같고 엄숙한 군사령관 N, 대륙에서 전차 여덟 대를 빼앗고 적의 군단을 섬멸한 사람이었다. 전신실로 이어지는 참모부의 낡고 삐걱거리는 복도에는 메아리가 울렸다. 벽 너머로 바람이 울부짖고, 나무들이 몸을 비틀며 휘청거리고, 밤이 검은 혼돈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폭풍의 구름과, 어디선가 움직이는 대중의 굉음과 더불어, 시간이 예언의 긴장 속에 숨을 죽이고 멈춰 선 것만 같았다……

전선군 사령관으로부터

비밀. 최우선. N군, 자볼가군, 기병파르티잔군 사령관들에게.

지령에 덧붙여 명령함.

11월 7일 새벽 공격 개시.

자볼가군은 도하 가능한 안타르 해협에 양동 공격 실시 적의 주의와 병력 유인할 것.

기병파르티잔 두 개 사단 증강된 N군은 다이르 단구 요새 돌파 퇴각하는 적에 바짝 붙어 다이르 돌입 바다로 몰아낼 것.

기병파르티잔군은 전선군 예비로 이동. N군은 신속히 반도로 진출 적의 협상국 함선 퇴로 차단할 것.

적 병력 완전 섬멸까지 전투할 것.

군사령관 집무실에서 작전과로 짧게 끊어지는 벨 소리가 날아갔다.

“바람은?”

승마바지들이 박차를 쩔렁이며 공손하게 전화기로 몸을 숙였다.

“북서풍, 구 등급입니다.”

이마의 돌 같은 주름이 녹아내려 딱딱하고 빈정거리는 미소가 되었다. 단구 너머의 저 먼 자들을 향한 미소였다. 행복한, 운명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승리의 바람이었다.

참모장은 명령서를 들고 집무실에서 전신실로 달렸다. 명령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리를 바다로, 지협으로 집결시키기 시작할 것. 망치가 되어 바위 위에 드리울 것…… 기계들이 공간 속으로, 밤 속으로, 짧고 위압적으로 두드렸다.

밤 속에는 들판과 들판이 있었다. 검은 땅이 말없이 누워 있었다. 바람이 밭둑을 따라 불었고, 보이지 않는 골짜기 관목을 따라, 포탄에 베여 나간 농장 자리였던 자갈 벌판을 따라, 이제는 죽어 고요해진 수천의 수천이 밟아 다진 길을 따라, 땅에 몸을 묻고 살아서 경계하며 누운 자들이 있는 더없이 고요한 선까지 불었다. 그 앞 덤불 속에도 또 배를 깔고 누운 자들이 있었다. 비밀 초소였다. 바람은 그리로 불어 갔다.

그래도 검은 밤 속, 앞쪽에서, 눈이 아닌 다른 무엇이 보았다. 태곳적부터 솟아 있는 시커먼 덩어리를, 사납고 가시 돋친 것을 보았고, 그 너머의 기적 같은 다이르를, 골짜기의 푸른 안개와 꽃피는 도시들과 별 가득한 바다를 보았다……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단구 너머에 기적 같은 것은 없었고 똑같은 들판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단구 너머 동굴과 토굴에는 구리 단추 달린 영국제 외투에 견장을 단 사람들이 앉아 담배를 피웠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몇몇은 전화기 곁에서 당직을 섰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다른 것이 보였다. 눈 없는 무서운 것, 침묵으로 무서운 것이 단구 너머 검은 들판에서 머리 위로 드리워 왔다. 거기 누군가 있어 기다리고 있었고, 어쩌면 벌써 어둠 속을 기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런 모습으로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이제 한순간이면 웃음도 이야기도 등잔불 비친 벽도 불현듯 꺼지리라. 그리고 아아아아!…… 비명을 지르고, 머리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곧장 저리로, 공포 속으로, 눈도 없이 기다리는 그것 속으로 달려가, 타격 아래, 도끼 아래 뇌와 몸뚱이를 내밀리라……

더 멀리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아직 잠들지 않은 마을들 너머로, 영국제 외투의 병사들을 가득 실은 열차들이 삐걱거리는, 불빛 타오르는 역들 너머로, 사람들이 열병처럼 기차를 기다리다 기차와 함께 어둠 속으로 덜컹이며 사라지는 승강장 너머로, 그것은 점점 멀리 번져 갔다. 아무 소식도 모르는 막막함으로, 기어드는 불안으로.

그리고 터널 속에 웅웅 울리며 기차와 함께 더 남쪽으로 굴러갔다. 거기서는 바다가 절벽을 둔중하게, 예언처럼 두드렸고, 수천의 불길로 타오르는 공간이 밤을 꿰뚫고 서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광장들의 웅웅거리는 순환, 빛의 타오름 속에서. 맵시 있는 자동차 타이어의 스치는 소리, 깊은 가슴에서 나오는 경적, 푸른 불꽃 바늘 속에 엇갈리는 전차의 종소리, 경주마 발굽의 쇳소리, 그 모든 것을 꿰뚫는 군중의 흐름이 앞으로 뒤로 흘러, 낮게 뜬 태양들의 빛 아래로 얼굴들을 내던졌다. 빛으로 분칠한 납작한 얼굴들, 찾아 헤매는 눈들, 졸린 눈들, 권태를 산책시키는 눈들, 미친 눈들, 그리고 또, 마차 위에서, 연필로 윤곽을 그린 시들어 가는 아름다운 눈들. 모든 것이 질주했다. 건물 정면들 속으로, 돌 건축물의 가로수 길 속으로, 밤의 대낮으로 끓어오르는 공간 속으로, 터키석빛 불꽃의 무리와 떠오른 태양들 속으로.

다이르.

안에서부터 타오르는 거대한 건물들의 거울 같은 현관이 열렸고, 끓어오르는 보도의 움직임 속에서 태어나고 녹으며 사람들이 내리고 걸어 내리고 다시 오르곤 했다. 카페에서 나온 미인은 입술에 발그레한 빛을 띠고 타조 깃털을 자랑스럽게 뒤로 젖혔다. 면도한 얼굴이 바람에 그을린 기병 대위는 튀어나온, 지치고 냉혹한 눈으로 거울 같은 군도를 끌고 간다. 저기 저 나이 지긋하고 뚱뚱한 사내는 최신 유행의 회색 외투에 실크해트를 쓰고, 탐식가의 턱을 내밀었고, 뒤로 벌건 뒷덜미가 처졌다. 또, 또 있었다. 밤의 대낮의 소용돌이와 굉음에 휩싸여, 빛으로 눈먼 높이에서 마천루의 벽들이 불로 외치는 가운데, 호화로운 품목 므시외 니부아…… 황실 납품…… 서둘러 확인하시라……, 그들은 눈부신 진열창들을 지나갔다. 거기에는 무광 은기와 정교한 타원형 물건들이 절묘하게 드문드문 놓여 있었고, 그것들에는 물릴 대로 물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군주들의 손이 닿을 터였다. 그리고 생명 없는 매혹적인 밀랍 인형들을 지나갔다. 지나치게 동화 같은 속눈썹과 뺨을 지닌 그것들에서 비단이 숨결처럼, 동방처럼 숨 쉬었다. 그리고 호수 같은 창들을 지나갔다. 위로, 십일월 남쪽의 별들까지 곧게 번져 오르는 식료품점. 촉촉한 꽃가루 같은 분을 쓰고 포도가 흐려지고, 단단히 살찐 갈색 배와 주황빛 딸기 바구니와 붉고 서늘하고 쌉쌀한 봄날의 무언가가 향기를 풍겼다…… 그렇게 줄곧 지나쳐 네거리로 갔다. 거기 불빛을 뒤집어쓰고, 수많은 머리의 물결 위에 유명한 트리움프의 풍자화가 빛나고 있었다.

그림 속에서는 눈썹까지 납작하게 눌린 둥글고 민머리인 두개골에, 이마 밑으로 작은 짐승 눈을 번득이며, 별 달린 구겨진 군모와 찢어진 외투와 무쇠처럼 무거운 장화 차림의 누군가가 걷고 있었다.

밤 속에서, 거리에서 구경하는 물결이 밀려왔다. 벌어진 입들이 굳어 있었고, 활짝 열린 눈동자들이 꼼짝하지 않았으며, 푸른 불빛에 얼굴들이 밀랍 같았다. 뒤에서는 군중을 돌아가던 행인들이 까치발을 하고 또 들여다보았다. 눈 없는 것이 까치발로 빛 속으로, 거리 속으로, 미소 속으로 기어들었다. 가슴을 저미는 거친 불안으로……

“못 와요, 어림도 없지.”

“연합국 기술자들이 만들었어요. 이제는 수백만을 쏟아부어도 못 뺏습니다!”

“그 반카들더러 해 보라죠, 헤헤!”

“그런데 들으셨어요? 듣자 하니…….”

“무슨 말씀을, 무슨 말씀을!……”

“쉿, 이건 아-무-한-테-도…… 끔찍합니다…… 끔찍해요!……”

거리에는 사람들이 걷고 달렸다. 행복을 따라 서두르는 듯했고, 둘씩 가로수 길로 녹아들었다. 거기로 별빛 어린 물결의 움직임이 비쳐 보였다. 마천루의 흐린 벽 높은 곳에서 불타는 탐조등이 외치고 있었다.

총사령부 전황 공보

다이르 단구 요새에 대한 적군의 공격은 포격으로 손쉽게 격퇴되고 있음.

전 전선 평온함.

II

타긴카 마을에 두 사단의 사령부가 있었다. 병력과 무기가 풍부하여 거의 군 하나에 맞먹는 철의 사단이 한 주일 전 군사령관 N의 지령을 수행하여 백군 군단을 격파하고 전차 여덟 대를 빼앗았다. 그리고 펜자 사단. 이 사단은 철의 사단이 복잡한 우회로 기동하는 동안, 피투성이가 되어 절반쯤 궤멸한 채 땅에 몸을 묻고 적의 무거운 타격을 받아 낸 부대였다.

학교로 쓰던 농가, 철의 사단 사령부에서, 사단장들과 참모장들이 있는 자리에서 군사령관은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적의 군대는 수가 더 적었으나, 단련된 장교단과 완비된 군사 기술의 힘으로 강했다. 붉은 군대에게는 무리가 있었다. 무리로 마지막 남은 자들의 앙심 어린 완강함도, 문화의 간계도 짓눌러야 했다.

적군은 반도로 가는 모든 길을 가로지르는 난공불락의 단구 요새 뒤에 있었다. 단구를 넘어야 했다. 대중을 단구 너머로 던져 넣는 것은 이미 승리를 뜻했다.

적의 포병과 기관총의 태풍 같은 포화 아래 분노하여 단구를 공격하는 군대는 시체 더미가 될 것이었다. 남은 길은 오래 걸리는 공병 공격이나 번개 같은 기동뿐이었다. 그러나 나라는 마지막 남은 자들을 지금 없애라고 요구했다. 기동이 남았다.

북서풍이 불고 있었다. 첩보에 따르면 바람이 만의 물을 바다로 몰아내 수 베르스타에 걸쳐 바닥이 드러났다. 무리를 단구를 돌아 말라붙은 깊은 곳으로 내던져 곧장 지협의 낮은 동쪽 기슭으로 보내고, 거기로 포까지 끌고 가서, 공포와 포화와 짓밟는 십만의 발로, 쇠와 돌 속에 숨은 간사한 자들의 후방을 덮친다.

“바람이 바뀌어 물이 들어차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군사령관이 말했다. “총공격은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밤으로 정합니다. 군의 나머지 부대는 동시에 단구를 정면에서 공격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적은 피로 장벽을 뚫을 수 있습니다.”

모인 이들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펜자 사단장, 시골 부제 같은 야위고 가슴 꺼진 사내(그는 전쟁 전에 실제로 부제였다)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을 깜빡였다.

“계획은 옳습니다, 사령관 동무,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 애들은 물을 건너서라도 어떻게든 밀고 갈 겁니다. 다만 제가 보고드렸듯이, 하나같이 맨발에 맨몸입니다. 철의 사단은 작전 뒤에 다 옷을 차려입었지요. 아시다시피 창고를 먼저 차지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애들은 왜 고생만 했습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피복 문제는 알고 있습니다.” 군사령관이 말했다. “그러나 중앙에서 내린 배정이 없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공화국에 있을 턱이 없지요. 단구 너머에서 다들 입게 될 겁니다!”

그는 일어섰다. 돌 같았고, 농가의 평화로운 어스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작전에 수정할 점은 없습니까?”

분명히 없었다. 모두 말이 없었다. 계획은 받아들여졌다. 계획은 들판의 먹먹한 집중 위에 드리워 있었다. 들판은 있을 수 없는 불타는 밤을 꿈꾸고 있었다.

흐린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헛소리 속처럼 어딘가 먼 데서 말과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군사령관은 거리로 나갔다.

수많은 모닥불에 묽게 떨리는 어스름 속으로, 군장에 등이 굽은 사람들이 군데군데 궐련 불빛을 뿜으며 걸어갔다. 발걸음에, 짐수레의 무게에 땅이 웅웅 울렸다. 보이지 않는 가축들이 투덜거리며 음매 울었다. 농가마다 사람들이 악취가 나도록 포개져 들어찼다. 등잔의 흔들리는 희미한 빛 속에 그들이 농가마다, 짚을 겨우 덮은 바닥에 뒹구는 것이, 또 등잔가에 머리를 맞대고 서서 속옷을 뒤집어 벌레를 찾는 것이 보였다. 농가들 사이에 모닥불이 타올랐다. 거기 앉고 누워 반합에 멀건 국을 끓여 먹었고, 바로 거기 어둠 속에 쪼그려 앉아 뒤를 보았다. 거리를 따라 모닥불은 타고 또 탔으며, 산 것들로 미어터진 농가들이 왁자지껄했고, 장화와 발 땀과 위장 가스의 악취 나는 연기가 문에서 기어 나왔다. 그것은 아름다운 시대를 정복하러 가는 무리의 야영지였다.

군사령관은 모닥불로 다가갔다. 둘레의 통나무에 몇몇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등을 구부리고 반합을 숟가락으로 젓고 있었다. 바람에 그을린 얼굴이 퉁퉁한 젊은이는 추위에도 허리까지 벗어붙이고 누더기에서 이를 찾아 열심히 모닥불에 던지고 있었다. 모닥불 곁에는 오스트리아 군복과 군모 차림의 나이 지긋한 사내가 슬프게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불을 보며 누워 있었다. 얼굴 없는 자들이 또 누워 있었다. 멀고 잃어버린 떠돌이 길에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집 없는 모닥불을 보았을까…… 어둠 속에서 군사령관이 다가오자, 그들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세상은 넓고 길은 끝없으며, 많은 사람이 집 없는 모닥불로 다가온다…… 웃통 벗은 자가 얘기하고 있었다.

“거기 쇠로 된 벽이 있는데, 가로로 바다까지 가서 박혔어. 단구라고 해. 그 너머 고장은 빛나는 모래, 안개 어린 산이야. 우리 정찰병들이 갔다 왔는데 말이지, 일 년 내내 여름이고 봄밀을 두 번씩 뿌린대! 그 너머에 사는 건 너구리 털외투 입은 바로 그 분자들이야, 턱수염을 뾰족하게 깎은 놈들. 온 러시아에서 거기로 몰려들었어. 재산은 또 어-떻-고! 옛 체제 때 있던 게 지금 다 한 무더기로 끌려가 있다니까!”

“그리고 또 놈들이 주인이지.” 모닥불가에 누운 자가 말했다.

웃통 벗은 자는 성이 나서 누더기로 땅을 후려쳤다.

“주인이지, 그 영혼을 씹을 놈들!……”

“기다려, 집에 가면 너도 주인이 될 거야!”

“지-이-입!…… 그런데 만약 여기 이 사람처럼,” 젊은이는 군모 쓴 나이 지긋한 사내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집도 없고 사방에 인터네셔날만 남았으면? 어쩔 건데?”

누워 있던 자가 흐리고 선한 눈을 그에게 들었다.

“가난한 사람은 집이 음써. 한 식구, 한 집, 인터내셔널이여.”

“이야, 친구!” 젊은이가 그의 등을 탁 치고 히힝 웃었다. “맨날 책만 읽더니, 똑똑하-다!”

반합 곁의 등 굽은 자가 킥킥 웃었다.

“미케신, 너는 맨날 먹는 얘기지? 군복은 어디 갔어? 아이고, 먹는 데는 힘이 장사야, 영락없는 황소야!”

“황소가 맞지.” 누운 자들이 맞장구쳤다.

“우리 마을 삼촌네도 황소가 있었는데, 저렇게 먹는 데 독해서, 때려-잡-았어!”

“하하하!……”

미케신도 튼튼한 이가 박힌 넓은 입을 벌리고 웃었다.

“차플레보에 주둔했을 때는 말이지,” 그가 말했다. “그때는 먹였다니까. 밀빵이고, 비계고, 돼지고기고, 그냥 거저였어. 그렇게 먹였어! 그런데 이제 사람을 몰아다 놔서 우리 패가 싹 먹어 치웠어. 어디, 그 너구리 놈들 한번 더듬어 보자고, 기다려, 놀아 보-자!……”

누운 자 가운데 누군가가 데워진 추위 속에 몸을 웅크리고 놀라며 흐릿하게 꿈꾸었다.

“하느님 맙소사, 그런 고장이 있다니!……”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몰라.” 다른 하나가 침울하게 말했다. 둘은 팔꿈치를 괴고 누워 생각에 잠겨 눈을 떼지 않고 불을 보았다.

등 굽은 자가 불에 손을 쬐는 군사령관을 위로 치켜뜬 눈으로 보고 물었다.

“이보시오, 배운 사람인 것 같은데, 말 좀 해 보시오. 우리가 그 마지막 놈들을 잡으면, 거기 재물이 하도 쌓여서 온 가난한 계급이 먹고도 남는다는 게 정말이오? 어떻소?”

군사령관은 돌 같은 미소를 짓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랴?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밤 위에 또 다른 밤이 오리라는 것을, 불타는, 있을 수 없는 밤이 오리라는 것을. 불꽃의 눈멂 속에서 세계가, 악취 나는 유목에서, 피 위에 세워진 시대들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돌아보았다. 모닥불가에 웃통 벗은 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반합에서 후루룩거리며 어둠 쪽을 가리키고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 기적의 나라 다이르 얘기일 터였다. 농가마다 문이 쾅쾅 닫혔고, 누군가 악취 나는 온기를 지키며 소리쳤다. “들락거리기만 하고, 문은 차르가 닫아 주냐?……” 마을 어귀 너머 어둠 속에, 노을로부터 기적 같은 터키석빛 띠가 피어 있었다. 거리에는 먼 옛 세기처럼 쇠와 사람과 수레와 가축이 쿵쿵거리고 웅웅거렸다. 그리고 그래야 했다. 거친 땅을 따라 움직이는 야영지의 굉음, 어둠 속에 어른거리는 낙원, 거기에 세계적인 것이, 진실이 있었다.

III

온종일 군대가 지나갔다.

새벽부터 기병파르티잔 사단들이 움직였다. 길을 메우며 기관총 실은 수레와 오토바이와 사령부와 사무실을 태운 자동차가 용암처럼 굴러갔고, 창과 소총과 곤봉을 든 기병들이 눈 밝고 짓궂은 눈으로 고개 너머에 연기가 없나 살피며 덜컹덜컹 달렸다. 연기가, 마을이 보이면 모든 것이 한 덩어리로 쏟아졌고, 뒤의 자들이 달리던 기세로 앞의 자들을 들이받았다. 창을 꼬나 쥐고 “내-애-놔-아!” 하는 고함과 함께 연기로, 마을 어귀로 거친 질주가 시작되었다. 금세 텅 비는 거리에서 그들은 달리는 말에서 배를 대고 미끄러져 내려와 허둥지둥 불을 피우고, 지하 창고를 뒤지고, 양을 삶아 먹고, 밀주를 찾아 쏘다니고, 처녀들을 쫓아다녔다. 그리고 다시 말에 뛰어올라 바람에 날리듯 수 베르스타 저편으로, 얼어붙은 먼지 속으로 떠났다.

앞서 소문이 달렸다. 기병이 온다.

다리 곁에는 밤부터 농부들이 짐수레를 대고 서 있었다. 다리를 건널 수 없어 물결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농부들은 거기 눌러앉아 말을 풀고, 양동이에 먹을 것을 끓이고, 잠을 자거나, 지루함에 서로 욕을 하며 어슬렁거렸다. 뒤에서 또 수레들이 와서 멈췄다. 다리 곁 들판은 왁자지껄 장터처럼 들끓었다.

타긴카에서 군의 자동차들이 달려와 그 자리에 급히 멈췄다. 차에서 오는 자들에게 코앞에서 쉰 소리로 겁주는 경적을 울렸다. 부관이 말발굽에 밟힐 뻔하면서 다리 위를 뛰어다니며 권총을 흔들어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먹먹한 힘이 벽처럼 뭉쳐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며 다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부르카를 걸친 검은 콧수염 사내가 안장에서 군사령관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뻔뻔하게 눈을 찡긋하며 소리쳤다.

“앉아 있어, 형씨! 담배나 피워! 하!”

끓어오르며 날아가는 물결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돌아가려고 타긴카로 되돌아갔다. 곧 두 차가 도망치듯 내달렸다. 곧 뒤에서 함성이 무너져 내리고 휘파람이 울리고 수천의 목구멍이 포효했다. 뒤처진 자들이 말을 후려치며 자동차로, 가까운 연기로 내달았다. 군사령관이 돌아보았다. 군중에게서 떨어져 나온 자동차들이 길의 아가리 속으로 떨어지고, 그 뒤로 지도자들에게 이끌리기라도 하듯 갈기와 창과 바람에 나부끼는 누더기의 구름이 내달았다. 지도자들의 자동차는 거칠고 겁에 질려 울부짖었다. 패거리는 서로 수레 축을 부딪치고 울타리와 낡은 앞마당 난간을 쓰러뜨리며 질주했고, 거리는 쩔렁이는 쇠와 탬버린의 울부짖음과 말의 비명 속에 잠겼다. 군사령관은 일어서려 애썼으나 바람에 넘어졌고, 바람 속으로, 함성 속으로 성나서 외쳤다.

“장하다! 눈부신 기병 돌격이야!……”

자동차들은 마을을 줄 그으며 빈 통로로, 초원으로 빠져나갔다. 사단 사령부에서는 어리둥절하여 내다보았다. 사령부에서는 일을 내던지고 창에 달라붙었다. 모두 믿기지 않는 전설의 공포와 아름다움에 싸인 그 이름난 연대들을 보고 싶어 했다. 거리에는 먼지와 왁자지껄함이 휘돌았다. 먼지와 왁자지껄함 너머에서 한낮에 사단의 사료 창고가 털렸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뒷마당을 쏘다니며 농부들에게서, 사령부 부대에서 말을 찾았다. 살찐 말은 자기들이 가져가고, 대신 땀에 젖고 달리기에 시달린 제 말을 두고 갔다. 숨이 찬 자들이 쉴 새 없이 사단장 집무실로 달려와 보고했다. 집무실에서는 발을 구르며 영혼과 혁명을 들어 욕을 해 댔다. 거리에는 먼지와 왁자한 웃음과 신음이 휘돌았다. 악마들이 사령부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질주했다.

골목에서 그들은 정치위원에게 말을 대어 주던 전령 페투호프를 세웠다. 말없이 칠 입힌 마차에 타자기와 기관총을 옮겨 싣고, 그 위에 외투 입은 곰보 처녀를 앉히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페투호프는 콧방귀를 뀌려 했다.

“이봐, 농담도 적당히 해야지!…… 내가 개다리인 줄 알아! 나는 사령부 정치위원 사람이야, 나 건드리면 네가 책임져야 돼, 형씨!……”

그날 아침 페투호프는 새 군복 상의와 승마바지로 차려입었고, 타긴카 처녀들의 부러움을 사려고 일부러 외투를 안 입었으며, 팔꿈치를 멋지게 벌리고 몰고 있었다. 기병들은 짓궂게 웃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야, 전선의 용사 납셨네, 어!……”

부르카를 걸친 검은 콧수염 사내가 말을 춤추듯 몰아 달려오더니, 고양이처럼 몸을 틀어 말들을 채찍으로 끊어 치듯 후려쳤다.

“하!……”

말들은 뒷다리로 일어섰다가 내려앉아 내달렸다. 곧 뒤에서 함성과 휘파람이 일어나고, 무너져 내리며 벽처럼 내달았다. 금방이라도 덮쳐 짓밟고 먼지로 날려 버릴 것 같았다. 눈앞이 흐려졌다. “말이 내뺀다, 맹세코 내뺀다.” 페투호프는 생각하고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불현듯, 악에 받쳐선지 미친 기쁨에선지, 일어서서 두 말을 긴 채찍으로 다시 한번 후려쳤다……

“꽉 잡아!” 그는 야유와 휘파람 속으로 울부짖었다. “다 날려 버린다! 박살 낸다, 이 곰보 반두라야!……”

그렇게 모두 초원으로 실려 갔다.

보병들의 연기 자욱한 야영지 위로 뿔나팔이 울렸다. 얼어붙은 거리에서 솥가에 몰려들어 길 떠나기 전에 실컷 먹었다. 솥과 입들이 김을 뿜었다. 모닥불은 안개를 들판으로 깔았다. 먹구름 아래 하늘은 꺼져 갔고, 날은 거칠고 바닥 없고 끝나지 않은 날이 되었다. 몸은 포만감에 무거웠는데 아직도 바람 부는 수 베르스타를, 끝없는 잿빛 미지를 밀고 또 밀고 가야 했다. 빛나는 모래, 안개 어린 산은 대체 어디 있는가?

미케신은 심심해서 비계를 좀 씹다가, 책을 들고 흙담 곁에 누운 눈 꺼진 군모 쓴 사내에게 다가가 시름겹게 말했다.

“유제프, 너는 왜 자꾸 땅바닥에 몸을 대는 거야? 어제 저녁에도 누워 있더니…… 땅이 끌어당기냐? 그거 안 좋은 징조야, 죽을까 봐 그래.”

유제프는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게 어때서, 나는 아무도 음써. 아배도 어매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죽는 건 좋아, 나 자신이 가난했으니께.”

마을 어귀를 벗어나자 뒤에서 바람이 덮쳐 와 목도리 밑으로, 구멍 난 재킷 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케신은 곁에서 걷는 유제프를 보았다. 그 기이한 눈을 땅으로 내리깔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 생각은 끝나지 않은 날 속에, 바닥 없고 찌푸린 들판 속에, 세상을 빙빙 도는 듯했다. 무엇에 대한 생각일까?…… 저 멀리 지평선으로 전봇대들이 떨어졌고, 짐수레 행렬과 대대의 잿빛 낟알과 대포들이 기어갔다. 길을 따라, 골짜기를 따라, 비탈을 따라 수많은 무리가 가고 또 가고 또 갔다……

더 북쪽으로 백 베르스타, 전쟁에 짓밟히고 불탄 들판 속으로 철길의 바퀴 자국을 남기며 러시아가 끊어지는 곳, 바람이 밭둑을 따라, 작은 숲을 따라, 아직 벌거벗은 잿빛 강의 얼음을 따라 잿빛 눈보라를 까는 곳, 초원의 흐린 안개 속에 기적과 경적으로 살아 있는 분기역이 있는 곳에, 구겨지고 졸리고 씻지 않은 사람들이 들끓으며 들판과 아스팔트에 뒹굴었다. 선로에는 잿빛으로 들끓는 산 것들로 무거운 군용 열차와 대포, 취사차, 사료, 부교를 실은 무개차들이 서 있었다. N군의 후방과 예비대가 남쪽으로, 단구로 가고 있었다.

더 북쪽에서도 삐걱거리고 철컥거리며 짐을 실은 열차들이 왔다. 무게에 기울고 레일을 땅으로 짓눌렀으며, 왁자지껄함과 소동과 노래가 함께 왔다. 화차에서 분필로 쓴 글이 외치고 있었다. 다이르를 내놔라! 열차들은 북쪽에서, 러시아에서, 도시들에서 왔다. 도시들에는 굶주림과 추위가 있었고, 울타리를 뜯어 땠고, 옛날의 풍요를 담았던 곳간들은 판자로 꽁꽁 막혀 있었으며, 유리창은 깨지고 거미줄이 쳐졌고, 장터는 텅 비어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굶주리고 추운 도시들에서도 무언가 샘처럼 솟았고, 끓어올랐고, 살아났고, 이제 거대한 열차들을 남쪽으로 토해 내고 있었다. 빵을 찾아, 온기를 찾아, 미래를 찾아. 북쪽에서 대원정으로 도시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몸뚱이로 화강암 바위를 뚫으러 왔다. 그 너머에 다이르의 나라가 있었다.

더러운 화물차에서 연기가 쏟아졌다. 벽돌 위 바닥에 곧바로 모닥불을 피워 굴뚝 없이 땠고, 추우면 숯불 위에 배를 대고 누웠다. 그러나 남쪽으로 갈수록 북쪽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알아볼 수 없이 기적처럼 변해 갔다. 이미 꿈속에 잃어버린 옛 풍요가 넘쳤다. 남쪽의 문턱인 분기역에서는 오랫동안 못 본 것을 팔았다. 흰 빵, 비계, 소시지였다. 혁대를 푼, 그을음투성이인 자들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돌아와 숨을 헐떡이며 화차 안의 동료들에게 외쳤다. “형제들, 가자, 여기는 자유 거래다, 맹세코!” “장은 어디 있는데?” “저기 급수탑 너머에……” 급수탑 너머에는 고기와 통짐승을 실은 수레들이 서 있었고, 아낙들이 단지와 접시를 들고 서 있었는데, 거기에는 따뜻한 것, 고기 든 기름진 보르시가 있었다. 비계와 밀전병과 우유와 밀빵 덩어리를 들고도 서 있었다…… 열차에서 사람들이 떼 지어 속옷과 잡동사니를 팔뚝에 감아 내보이며 거기로 달려갔다. 급수탑 너머에서 곧바로 처분하고 먹어 치웠으며, 쪼그려 앉아 따뜻한 보르시를 후루룩거리고, 비계와 고기와 빵 덩어리를 화차로 끌고 왔다. 화차에는 변소가 없었으므로, 푸짐한 음식에 늘어지고 뱃속이 터질 듯한 자들이 그 자리에서 제동기 밑과 도랑으로 기어들었다.

기차는 남쪽으로만 갔고, 북쪽으로는 힘으로 막아 기관차를 내주지 않았다. 북쪽으로 가는 자들은 몇 주일씩 역에서 살며 옷이 해지고 돈이 떨어지고 이투성이가 되었으며, 승강장과 들판에 오래 누워 얼이 빠졌지만, 떠날 희망은 역시 없었다. 군사 수송국 대표, 까맣고 열성적이며 코안경에 가죽옷 차림인 그가 역을 뛰어다니고, 전화를 걸고, 전신실 기계에 매달리고, 급한 나머지 혀를 내밀고 써 댔지만 헛일이었다. 분기역은 막혔음, 분기역에 파국적 상황과 사보타주, 기관차 무단 연결, 무기로 위협. “책임자를 혁명 재판소에 회부 바람, 유일한 조치는 총살”…… 승강장에서 그를 붙드는 성나고 맥 빠지고 굶주린 군중에게 입에 거품을 물고, 지금 차고에서 수리 중인 바로 그 첫 기관차가 북쪽으로 간다고 외쳤지만 헛일이었다. 모든 것은 제 차례대로, 어김없고 괴물 같은 일격으로 남쪽으로 떨어지는 무리의 망치가 바라는 대로 흘러갔다. 북쪽으로 배정되어 차고에서 닦이고 있는 기관차의 무쇠 가슴에서도 분필 글씨가 이미 외치고 있었다. 다이르를 내놔라! 차고 곁에는 소총을 꼬나 쥔 엄하고 거친 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기다렸다. 승강장에서도 기다리며 선로의 틈을 게걸스럽고 꺼지고 반쯤 미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흐린 안개와 시름과 절망뿐이었다……

포만감에 무거워진 열차에서는 쿵쾅거리며 발을 굴렀다. 문에서 검고 독한 연기가 선로로 기어 나왔고, 연기 속에서 외쳤다.

“오호호! 베즈구브니가 외투를 팔아넘겼다! 비계 반 푸드, 밀주 사분의 삼 통! 놀-자!”

검댕 묻은 자가 혁대를 풀고 군복 깃을 열어젖힌 채 연기 나는 모닥불 위에서 춤췄다. 화물차 안을 곰들이 걷는 듯했다.

“밟아, 베즈구브니! 아, 빛나는 모래, 안개 어린 산! 달궈라! 걱정 마, 거기 가면 외투 없이도 더울 테니!……”

“따뜻한 별장으로 가는 거야!……”

차고에서 기관차가 묵직하게 씩씩거리며 굴러 나왔다. 기관사는 발판 위로 몸을 숙이고 담배를 피우며 침울하게 기다렸다. 승강장은 자루와 보따리를 든 북행객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짐승처럼 되어 주먹과 어깨로 밀치며, 늦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선로로 비집고 갔다. 소총을 들고 기다리던 자들이 기관차를 회전대로 몰고 가서 레버를 잡더니 무쇠 가슴을 남쪽으로 돌렸다. 열차장이 허리띠에서 나강 권총을 꺼내 기관사에게 말했다. “십일 번 선의 열차로 대.” 기관사는 항의하려다 생각을 고쳐먹고, 성이 나서 꽁초를 던지고는 몰고 갔다. 조수는 그 사이 달아났다.

열차를 따라 돌며 사람들이 외쳤다.

“어이, 화부로 탈 사람? 동-무-드-을!”

“베즈구브니 데려가, 작년 여름에 나리네 탈곡기를 몰아서 기계라면 다 알아! 외투 없이 몸도 좀 녹이고!”

“베즈-구브-니-이-이!”

기관차가 열차 앞에 섰다. 승강장에서 울부짖음이 일어났다. 속은 자들이 욕을 퍼붓고 주먹을 휘두르며, 레일로 뛰어나왔고, 역의 유리창을 흔들어 대며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까만 자가 화차를 따라 뛰어다니다 코안경을 떨어뜨리고 미친 듯 소리쳤다.

“이건 강도질이오! 약탈이오! 당신들이 운행표를 다 망쳐 놨소, 철도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있소! 기억하시오,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요!…… 전신으로 특별부에 알리겠소!”

“꺼져!” 열차장이 손을 내저었다. “내게는 스물네 시간 안에 위치에 도착하라는 전투 명령이 있소. 당신네 운행표에는 침을 뱉지. 당직, 출발!”

“총살이오!……” 까만 자가 울부짖었다.

열차들에서 쩔렁쩔렁 덜컹덜컹 소리가 나더니, 천 개의 입으로 “우라”를 터뜨리며 온 거리가 통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애-애-놔-아!……”

역 너머 오르막에서 기관차는 헛돌았다. 짐을 너무 실은 열차는 힘에 부쳤다. 혁대를 푼 자들이 연기와 소란 속에서 둑으로 뛰어내려 손톱으로 언 모래를 긁어 레일에 뿌려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끙끙거리며 어깨로 밀고 받치면서, 그와 동시에 밀빵 덩이를 물어뜯어 불룩한 볼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브릴로, 돌려! 끌어, 내 사랑!”

“베즈구브니-이, 더 넣-어-어!……”

“고고고!…… 가브류샤, 돌려!……”

“끌-어!……”

작은 숲 사이로, 흐린 눈보라 속으로 붉은 거대한 덩치를 어깨로 끌고 갔다. 앞에서는 눈에 불을 가득 담은 검은 놈이 힘겹게 씩씩거리며 쉰 굉음으로 초원에 외치고 있었다. 내-애-애-놔-아!……

IV

단구 너머에서도 준비하고 있었다. 다이르에서는 기병 중대를 전선으로 배웅했다. 그들의 희망, 가장 용감하고 눈부신 자들, 그 성씨들이 몇 세기의 지배와 영광을 말해 주는 자들이었다.

아침이면 그들은 초원으로 떠나, 오보로비치 장군의 “죽은 자들”의 기병 군단으로 갈 터였다. 이렇게 말한 바로 그 장군이었다.

“전투에 나설 때 우리는 이미 러시아를 위해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

다이르에 잊을 수 없는 저녁이 있었다. 저녁은 축제의 다이아몬드빛 공작빛 노을로 일어섰고, 광기와 쾌락의 온갖 무지개로 영웅의 길에 빛나고자 했다. 악단들의 음악이 저녁을 노래했다. 군중의 흐름이 달렸다. 질주하는 거리의 불빛 속에, 흔들리는 가로수 길 속에서 여자들의 부드러운 눈이 순종하며 젊은이들을 향해 열렸다. 작별의 외침과 인사와 호기심과 애무 속에 젊은이들은 거울 같은 군도를 거만하게 끌며 아스팔트를 지나갔다. 저녁 속에, 젊은이들 속에 영광과 살인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리고 연설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바다가 피할 수 없는 먹먹한 운명으로 웅웅거렸다. 그리고 도취와 시름의 밤이 지나갔다.

사랑들의 윤무가 있었다. 진열창 곁에서, 파사주의 빛나는 거울 곁에서, 거리의 초록빛 도는 응접실에서, 광장의 어스름한 기념비 곁에서 만났다. 아가씨들은 걸어가며 모피 속에서 가늘고 값진 손을 내밀었다. 별 같은 눈이 부드럽고 애처롭게 웃었다. 그들은 끌어안겨 가로수 길의 흔들리는 어둠 속으로 이끌려 갔고, 씩씩하고 시름겨운 남자들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마지막 밤이오. 얼마나 아픈지…….”

수정 같은 눈을 불태우며 자동차들이 유성처럼 질주했다. 타오르는 전망의 꽃줄을 지나, 반도들의 축축한 바람 속으로, 레스토랑의 불빛이 바다에 되풀이되는 곳으로(거기서 바이올린이 집시의 난봉에 메아리쳐 운다……), 나뭇가지와 공원의 휘파람 같은 철썩임 속으로. 그들은 흐린 안개 속으로, 벼랑으로 내려갔다. 거기서는 태곳적의 것이 어둠이 되어 몸부림치며 물에 비친 별들을 싣고 다녔고, 바람 위로 흔들리는 베일이 사각거렸다. 바람에 조금 차가워진, 미소와 시름이 가득한 입술을 서로 맞대었다. 파도는 은밀하고 먹먹했고, 파도는 돌풍처럼 모피 속의 깨지기 쉬운 값진 것을 그에게, 떠나는 그에게 내던졌다. 아가씨는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오늘 밤 바다가 무서워요…… 깊은 곳이 보여요, 미끄럽고 차가워요.”

그러자 그가, 어쩌면 사랑하는 여자와 바다로 간 이 남자가, 어쩌면 저기 도시에서 어스름한 기념비 곁에 있는 다른 남자가, 어쩌면 또 다른 셋째와 백째가, 눈부신 레스토랑 거울 속에서 서두르며 숨 가쁘게 되풀이했다.

“내 사랑, 이 밤은 영원이오. 이 밤에 사는 거요. 삶을 찬란하게 마십시다! 사랑한다는 건 아름답게 타오르는 것, 모든 걸 잊는 것이니…….”

다시 따뜻하고 축축한 안개 속으로 경적이 외쳤고, 교외 구역들, 빈민굴과 석유 가로등이 뒤로 쓰러지며 날아갔다. 축축한 안개가 비쳐 보이며 엷어지더니 갈라졌다. 금빛 노을 속에 거리의 밤의 대낮이 자라고 넓어졌다. 전망이 열렸고, 거기로 의지를 잃은 자동차들이, 우윳빛 푸른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구체들의 아치 속으로 내달았다.

여기가 도레다.

매끄러운 날개의 비상이 느려졌다. 한 번 더 흔들리고, 다이아몬드 깃 장식을 까딱이며 멈췄다. 또 또다시 반원을 돌아 자동차들이 흘러들었다가 떠나갔다. 오래 앉아 있던 몸뚱이들, 맵시 있게 허리를 조인 실크해트들, 사절단의 깃털 장식들, 값진 망토들, 고귀한 분들의 견장 술이 아스팔트로 날아 내리고 걸어 내려왔다. 저기, 기념비처럼 돌아가는 거울의 아가리 속으로.

양탄자와 식물과 부드러운 빛으로 지어진 안락한 계단. 면도한 뚱뚱한 사내, 뒤로 올리브빛 목살이 처진 그의 작은 외투를 날아가듯 받아 든 하인들의 세련되게 공손한 절. 돌아가는 곳의 거울 앞에서 눈부신 여자 동반자의 짧은 멈춤, 그리고 그 뒤로 턱을 내민 저 사내의 쩝쩝거리며 외알 안경 너머로 찡그린 시선이, 공단 옷의 파인 가슴께로, 장밋빛 운명의 온기 속으로 들어갔다.

동행한 사내는 손으로 군도를 움켜쥐었다. “이 뻔뻔한 놈!” 소리치려 했지만, 아가씨가 애원하듯 부드럽게 팔꿈치를 꼭 쥐었다.

“저 사람은 그 유명한…… 파리의…… Z예요……” 장교는 거의 멈춰 서서 기가 눌렸다. 칠 입힌 구두 코끝에서 장난스레 웃으며 흔들리는 것은 미친 다이아몬드 광맥이었고, 세계의 석유였다…… 웃어야 했다. 건방지게라도 상냥하게, 찡그리고 시험하듯 보는 외알 안경에, 셔츠 가슴의 다이아몬드 단추에. 우리는 야만인이 아닙니다, 므시외!

휘장 너머로 빛나는 우주가 열렸다. 가르마, 난초, 가슴의 흰 눈, 다이아몬드, 축복받은 무사태평으로 날아가는 맨어깨, 시가의 날숨, 근심 없는 자들의 웃음과 말소리. 현악기가 노래하는 홀들이 취해 갔다. 도레의 저녁이었고, 살아야 할 시간이었다……

입들이 벌어져 뜨거운 입천장으로 즙 흐르는 과일의 부드러운 살을 짓눌렀다. 달아오른 입들이 가늘고 맵고 빛 속에 값지게 어른거리는 포도주를 빨아들였다. 욕정의 경련으로 조여든 턱들이 부드럽고 기름지고 향긋한 것을 쩝쩝거리며 빨아들였다.

현악기가 세계를 감쌌다.

어디선가 떠올랐다. 어디서일까? 평온과 저녁의 풍요로 가득한 것들이, 노을 속의 사랑이, 조용한 집이. 취한 머리들이 생각에 잠겨 흔들렸다. 어딘가로 떠난 빈 눈들이 슬퍼했고, 현악기는 백치 같은 흔들림 속에 괴로워했으며, 세계는 축복받은 침으로 흘러내렸다. 미쳐 가며 속삭였다.

“내 사랑, 우리는 나중에 영원히, 영원히 함께할 거요…… 타브리아에 당신네 공원과 연못과 햇살이 있을 거요…… 우리 둘뿐이오! 공원, 당신 눈의 별들…… 삶을 얼마나 잊고 싶은지, 내 사랑!……”

“그럼 내일은요?”

그리고 불현듯 깊은 곳에서 불안이 출렁였고, 현악기들이 베는 듯 시름겹게 외쳤다. 넋 없이 빛나는 홀의 공간으로 재앙의 입김이 스쳐 갔다. 턱을 내민 뚱뚱한 사내가 몸을 떨며 공포에 질려 먼 탁자에서 일어나 흐려지는 눈을 굴렸다……

……그리고 수 베르스타 북쪽, 밤의 수풀 너머, 밤의 수풀 속에서 소총을 든 영국제 외투 차림의 두 사람이 달려와, 얼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키며 억눌린 소리로 외쳤다. “저기…… 온다…… 종대로…… 공격……” 엄폐호 막사에서 사령부로 전화가 불안하게 울렸고, 밤중에 전령들이 예비대를 깨우러 마을로 말을 달렸다. 중포들의 아가리가 돌아가며 어둠을 향해 경계하며 입을 벌렸다. 적군 세 개 사단이 짙은 용암이 되어 단구로 기어 오고 있었다. 한밤중에 잠에서 끌려 나온 사령부에서 전화가 왔다. 즉시 공격자들에게 태풍 같은 사격을 개시하고, 도랑의 지뢰를 터뜨리라고. 그리고 밤을 향해 단구 너머에서 태풍이 쏟아져 나갔다. 수백 정의 기관총과 소총이 모두 노래했다. 그보다 더 크게 치명적인 열병 속에 이빨들이 부딪쳤다. 탐조등이 불의 촉수가 되어 높은 곳에 꽂혔다가, 내려와 땅에 눕고, 무서운 것에, 기어 오는 자들의 드러낸 이빨에 닿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빈 덤불이 십일월의 바람에 파닥거렸고, 사람 없는 밤이 푸른 안개로 푸르렀으며, 불의 태풍은 빈 들판에서 미쳐 소용돌이쳤다.

“거짓 경보다!” 창백한 자들이 전화기에 대고, 사령부로 외쳤다. 밤 속에서 달려온 그 두 사람은 바로 그 자리, 사단장 막사 곁에 쓰러져 누웠다. 나강 권총으로 뒤통수를 쏘인 것이다.

그런데 벽에서, 높은 데서 드리워 자라더니…… 불현듯 거만한 지배인의 손 아래 불이 꺼졌고, 어디선가 징이 날카롭게 울렸다. 공포에 떠밀려 뚱뚱한 사내는 포크를 가슴에 대고 몸을 내던져, 짧고 미친 걸음으로 통로까지 달려가 그르렁거리며 쓰러졌다. 징이 울부짖었고, 홀은 꺼졌으며, 무대가 마법의 식물 그물 사이로 진홍빛 지상에 없는 광채로 타올랐다. 그리고 그 유명한 무희가 동화 속에서, 나른한 달들에서 헤엄쳐 나왔다. 붉은 옷에 맨팔을 머리 뒤로 젖혔다…… 소리 없는 하인들이 누운 자에게 달려가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어깨를 흔들어 깨웠지만 늦었다. 시체의 입술에서 피가 엉겨 붙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취하고 탐욕스럽고 시름겨운 숨결 속으로 끌어당겨졌을 때, 아가씨는 지치고 축축한 눈으로 말했다. 네, 뭐든 좋아요.

안에서부터 타오르는 검은 층들의 덩어리. 자정 넘어 비고 귀 밝은 거리의 돌 가로수 길.

가로등 곁에 멈춰 서서, 깊이 없는 허공 속의 그 고요하고 억지스러운 빛을 바라본다. 불길한 침묵 너머에서 은밀하고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것 같지 않은가? 그들에게도 이 시각에, 소리 없는 자동차의 날개로 달리는 그들에게도, 잔치에서 떠내려오는 불안이 심장을 조였다.

호텔의 거울 아가리가 열렸고, 방의 휘장이 젖혀져 잠자러 돌아오는 자들을 맞았다. 지치고 쾌락에 입을 벌린 자들을. 소리 없는 연인들의 그림자가 거울 문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실크해트, 발그레한 입술, 군도의 억눌린 소리, 눈썹까지 내려온 콜롱빈의 검은 비단. 그리고 별실에서는, 반쯤 감긴 도취한 눈 속에, 마지막 밤의 포옹 속에, 꺼져 가는, 저물어 가는 세기들의 노을이 있었다……

푸른 가로등의 거대한 촛대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또 구역들의 가로등이 엇갈리고 마지막 경주마가 구역으로 날아가며 쟁쟁하게 사람 없이 또각또각 지나간 그곳에서, 깊이 없는 고요가 높은 데로, 세계의 공간으로 올라갔다. 우주의 밤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파멸이 정해진 광장들의 흐릿함 속에, 가로등에 세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순종하며 축 처진 머리로, 검은 눈구멍으로 제 가슴을 들여다보며……

거울 문 앞에 경주마들이 실어다 놓았다. 두 사람이 어렴풋한 약한 빛으로 흐려진 검붉은 끝없는 양탄자로 올라갔다. 어둠과 낯선 이들, 사랑하고 떠나간 이들의 희미한 향기가 가득한 휘장 너머에서, 그것이 불현듯 되풀이되었다. 깊이 없는 데로 뒤집힌 광장, 매달린 세 사람, 그리고 어딘가 검은 심연 속의 그 자정, 공포와 치욕으로 소름 끼치는 자정…… 아가씨는 뛰는 관자놀이에 손바닥을 댔다. 고통과 숭배를 담아 다가오는 눈을 향해, 불현듯 힘이 빠지며 조용히 웃었다……

밤은 가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동화 속에서 쓰라린 난봉으로 무희의 탬버린이 울부짖었다. 혹은 꺼져 가는 낙원의 공간들이 지상의 마지막 저녁놀의 초록빛 안개 속에서 끝없이 울리고 있었다……

……흐릿하게 밝아 오는 창에 고동이 울었다. 낮이 태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영원으로 이어지는 낮이었다. 창을 활짝 열었다. 높은 데의 초록빛으로, 새벽의 찬 놀이로. 고동이 울었다. 아스팔트 위로, 골목에서, 구역에서, 빈민굴에서 얼굴 없는 아침의 사람들이 나직이 서로 부르며 걸어갔다. 고동을 향해 걸어갔다.

꺼지지 않은 방의 등불 속에 어제의 그림자들이, 깨어나지 않은 것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침대에는 여자 동반자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었고, 제 속으로 돌아간 속눈썹의 값진 윤곽이 지친 푸른빛 속에 둥글었다.

일출의 냉혹한 맑음 속에 빛이 있었다. 아침의 사람들은 아스팔트의 어스름 속으로 걸어갔고, 그들 뒤에 평일의 또렷함이, 삶이 있었다. 누군가 잠든 여자의 손에 조심스레 입 맞추며, 흐려지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낮이 죽음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V

해안에서는 적군 부대 사열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쪽에서 군과 사단의 자동차들이 참모부를 싣고 왔다. 무덤 언덕 너머로 연병장이 펼쳐졌다. 옛 초원 왕국들이 남긴 반쯤 타고 녹슨 요새 밑의 모래밭이었다. 거기 깃발들과 대대의 잿빛 사각형이 들판처럼 바람에 일렁였다. 농가들이 이룬 가장자리에서부터 구경꾼들이 둥글게 몰려 있었다. 전투 전날이었고, 알 수 없는 앞날 속에 찌푸린 날이었다……

들판 가운데 단으로 모자도 안 쓴 텁수룩한 검은 수염의 격렬한 사내가 뛰어올랐다. 외투가 바람에 밀려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털 많은 맨팔이 군복에서 튀어나와 들판으로, 군중에게, 끝없는 바람의 날에게 외쳤다.

“도옹-무-드-을!”

마지막 검은 세력에 대해, 태양의 국경에 대해, 그 너머의 행복과 빵과 황금빛으로 익어 가는 호밀 같은 저녁들에 대해. 찌푸린 대대들은 말이 없었다. 지평선의 노란 빛 속에 단 밑에서 깃발들이 소리 없이 철썩였다. 지평선에는 붉고 비고 차가운 들판이 누워 있었고, 흐린 안개로 떠나가는 물의 끝없는 납빛이 있었다. 거기에 어머니들이 애곡한 소름 끼치고 사나운 경계가 있었다.

단 뒤로 거대한 화폭이 일렁였다. 유령처럼, 잿빛 바람의 낮 속에 붉은 기사와 검은 기사가 높은 데서 불타는 눈으로 미친 듯 일어선 말들의 가슴을 맞부딪쳤다. 들판의 어스름 속에서, 죽음의 싸움에서 누가 누구를 짓누를 것인가…… 그들 뒤로 밤이 물러나고, 황금빛으로 익어 가는 붉은 호밀의 새벽이 어른거린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결전이다……[1]

악단들이 연주했다. 드넓은 곳이 힘차게 생각에 잠겨 열렸고, 느리고 노래하는 바람이 슬픔으로 밀려왔다. 굳어 선 대대들의 깃발이 일렁였다. 가슴에 혁대를 엇갈려 맨 중대장들이 대열 앞을 종종걸음 쳤다. 군사령관 곁, 원의 중심에 사단장들과 참모장들이 모였다. 펜자 사단장이 언 눈꺼풀을 깜빡이며 몸을 숙여 서운한 듯 말했다.

“제 멋쟁이들 좀 보아 주십시오, 사령관 동무. 병사가 아니라 맨발 부대입니다! 공정함이 어디 있습니까, 예?”

대열에서 억눌린 호령이 날아왔다.

“우-로-오-나-란-히!”

그러고 움직임이 굳은 정적 뒤에 불현듯 북과 나팔의 포효로 두 악단이 일제히 내리쳤다. 대대들이 소대별 종대로 걸어갔다. 수천의 발이 모래를 일정하고 또렷하게 쳤다. 구리 악기들의 노래에 초원이 메아리로 신음했다. 목 깊고 슬프게, 폭풍과 아름다운 시대를 노래했다.

시대의 경계에 들판의 노란 낮이 있었고, 그 속에 한때 호화롭던 초원 왕국의 잿더미 위에서 벌이는 군중의 엄숙한 의식이 있었다. 군사령관과 참모들이 다가오는 것에 전율하며 몸을 곧추세웠고, 바람이 있었고, 아직 살아 보지 못한, 아직 뒤흔들리지 않은 날들의 미지가 있었다……

목 깊고 엄숙한 팡파르의 노래 속에 군사령관은 보았다. 대열들이 그의 가슴을 곁눈질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앞에 두 사람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만난 이들이었다. 그들은 붉은 낮처럼, 얼어붙은 빈 들판처럼 영영 기억에 남았다. 맨 끝의 키 큰 젊은이는 바람에 그을린 붉은 얼굴에 기운 검은 재킷을 입고 다 떨어진 장화를 신었으며, 구멍 난 붉은 목도리로 목을 감았다. 그 곁은 단정한 오스트리아 외투와 군모 차림에 콧수염을 기른 나이 지긋한 사내로, 크고 투명한 눈을 지녔다.

나팔이 노래했고, 수천의 발이 모래를 쳤고, 끝없는 들판이 노랗게 비쳐 보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걸어갔다(그들 뒤로 또 수천과 수천이). 팡파르의 노래 속에 도취하여, 아름다운 시대에 대한 동화의 날개를 타고 걸어갔다. 구멍 난 목도리의 젊은이는 고개를 젖히고 독수리처럼 앞을 보았다. 다른 이는 크고 꺼진 눈꺼풀을 내리고, 먼 곳의 튀어 오르는 꿈속에 잠겼다……

펜자 사단의 고참들이 지나갔다. 군사령관은 이 상처 입고 피 흘린 생존자들을 알고 있었다.

“고맙소, 동무들!”

“혁…… 명…… 을…… 위…… 해…… 복-무-함!”

천정에서 쇠로 된 새들이 웅웅거렸다. 먼 국경 너머의 노을이 구름 속에, 새의 날개 위에 붉은 금빛 떨림으로 떨렸다. 바람처럼, 끝없고 얼굴 없는 대열이 미지로, 망각의 물결로 끌려갔다. 그러자 불현듯 저녁이 아름다워졌다. 아니, 팡파르의 전환이 기적 같았다. 내일 죽어야 할 자들은 이미 없는 듯했고, 몇 세기가 지나간 듯했고, 모든 폭풍이 소리 내고 지나갔고 모든 글자가 지워졌고, 편안하고 아름다운 시대에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반쯤 잊힌 그림자들에 대해 기적 같은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철의 사단 부대가 기묘하게 갖가지로 차려입고 지나갔다. 경기병 저고리를 입은 자들, 강철빛 장교 외투를 입은 자들이었다. 전투와 행군으로 거칠어진 눈들이 군사령관에게 꽂혔다. 그 눈에도 그 자신에게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있었다. 뜯겨 나온, 안락을 모르는, 집 없는 무엇이었다. 낯짝 뭉툭한 장갑차들이, 눈 없고 사람 없이, 기관총 촉수를 맹목으로 돌리며 지나갔다. 거대한 궤도로 으르렁거리며 덩어리지고 마디 진 전차들이 기어갔다. 소비에트 무전이 그것을 빼앗았다고 파리에 조롱하듯 외쳤던 바로 그 전차들이었다. 안에는 멱 따인 백군 전차병들의 피가 아직 씻기지 않았다. 살아남은 백군 전차병들이 사열 행진으로 전차를 몰았다. 군사령관 앞에 이르자 그들은 땅을 뒤흔드는 괴물 같은 몸체를 팽이처럼 돌렸다. 전차들이 군사령관에게 경례하고 있었다. 그리고 헛된 일들의 헛된 소동이 이어졌다. 신문 기자들이 옆 농가로 달려가고, 지하 창고로 내려가 사진기에 필름을 넣었으며, 사람들은 구경하며 탄성을 질렀다. 어스름이 떨어져 모래를 어둡게 했다.

저녁이 되며 대열들은 먼 곳으로, 검붉은 먼지 속으로, 영원 속으로 떠나갔다. 바람은 더 엄하게 끈질기게 만으로 불었다. 파도 속으로, 흐린 안개 속으로 나팔들이 목 깊게 슬퍼하며 끝없는 곳으로 떠나갔다.

VI

또 하루가 지나갔다.

저녁이 되자 다이르에 불의 글자가 떠올랐다.

총사령부 전황 공보

적군은 진지전으로 전환함.

아군 부대는 볼셰비키 군대의 다음 격멸을 준비하며 재편성을 마무리하고 있음.

전 전선 평온함.

그리고 다시 잠시 뒤.

도레

비할 데 없는 안젤리카 아스티 발레! 아침까지 열린 무대! 우아한 별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미 해안의 붉은 용암 소식을 알아냈다. 은밀하고 잡히지 않는 거래소에서는 총사령관 집무실 금고에 든 비밀 철수 계획에 이름을 올리려고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미친 값을 치렀다. 공황의 속삭임이 거리에 사각거렸다. 정박지에서는 드레드노트들이 수수께끼처럼 침울하게 연기를 뿜었다.

밤에 초원의 작은 도시에서 횃불이 타올랐고, 오보로비치 장군의 군단이 정렬했다. 별 아래 모자를 벗고 장군이 말했다.

“잘들 가게, 형제들. 기억하게. 전투에 나설 때 우리는 이미 러시아를 위해 죽은 자로 여겨야 하네.”

군단은 전투 예비로 갔다. 결정적 순간을 위해 아껴 둔 것이었다. 맨 앞에서 장교 기병 중대가 초원으로 달렸다. 무사태평한 호기로 웃음을 터뜨리며 그들은 황야로 사라졌고, 그 뒤로 밤이 영영 닫혔다……

그리고 더 늦게, 만의 북쪽 기슭 페르보니콜라옙카 마을에서는 이러했다.

적군 병사 미케신은 소대가 묵는 면 집행위원회의 타오르는 난로 앞에 앉아, 마지막 비계를 작은 칼로 단정하게 잘라 먹고, 헝겊으로 입을 닦고, 이를 쪽쪽 빨며, 바닥에 배를 대고 누운 동무에게 말했다.

“다 먹었어, 유제프카. 이야, 비계 한번 맛있네, 염병할…….”

그리고 곁에 누웠다.

농가로 집행위원회 서기가 들어왔다. 옆 골방에서 병사들의 이에게 뜯기던 애꾸눈 상이군인이었다. 잠이 안 와서 내일 축일, 기념일을 위해 뭘 좀 해 보기로 하고, 벤치를 밟고 올라가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닦았고, 그러고는 사무실 찬장에서 빨간 두루마리 둘을 꺼냈다.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구호 거는 것 좀 도와주게, 어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자고 있거나, 게으르게 눈을 찡그리며 궐련을 빨았다. 애꾸는 창 위로 현수막 하나를 걸었지만, 다른 것은 자리가 모자랐고, 혼자 일하는 것도 싫어졌다. 미케신이 머리를 들고 할 일 없이 글자를 읽었다.

우리는 - 세계에 - 길을 - 보여 주리라 - 새로운……

서기는 난로 곁 따뜻한 데 앉아 깜빡 졸았다. 자정에 모이라는 명령이 내렸다. 소대는 선두 종대로 가게 되었고, 철조망 자를 가위와 수류탄을 나눠 주었다. 미케신은 혁대를 조이고, 잠든 서기를 보더니, 눈을 찡긋하며 남은 빨간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밤은 바닥도 끝도 없었다. 온기 뒤라 졸리고 떨리는 추위가 들었다. 중대장이 돌며 사람을 셌다.

“첫째, 형제들, 소리 내지 말 것, 찍소리도…… 그놈을 난로 위에서 산 채로 잡는다! 호령을 들어…….”

바닥 없는 검은 속에서 하얀 불길들이 멀리 멀리 놀았고, 떨렸고, 흔들렸고, 불빛으로 번뜩였다. 오른쪽 단구 너머에서 탐조등과 조명탄으로 밤을 더듬으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다. 만과 앞쪽에는 먹먹한 어둠이 서 있었고, 어딘가에서 땅만 사각거리며 불안하게 웅웅거렸다. 해안 마을들에서 수많은 무리가 포를 끌며 기슭으로 가는 것이었다.

“소대…… 앞으로…….”

시커먼 짚가리들을 지나 마을 어귀를 벗어나, 비탈 밑으로 기어 내려갔다. 비탈 너머로 바람에 말라붙은 바다 바닥이 시작되었다. 미케신은 옆으로 비켜나서, 다 떨어진 장화를 벗고, 걸어가며 재빠르게 현수막으로 다리를 감았다. 낡은 각반은 삭았고, 형제들 말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앞쪽 땅 위로 검붉은 그림자들이 일렁였다. 뒤쪽 기슭에서 가는 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피운 모닥불이었다.

오른쪽 멀리 멀리 하얀 불길들이 움직이며 흔들렸다. 아무도 가지 않는 빈 들판을 비추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무리가 마른 바다로 기어 내려왔고, 벌써 포들이 쇠붙이 소리를 내며 비탈을 덜컹거렸고, 부드럽고 먹먹한 말 울음 아래 아무도 가 보지 않은 어둠 속으로 굴러 내려갔다. 선두는 멀리 갔다. 차츰 모닥불이 사라졌고, 그 불그림자만 속이듯 유령처럼 타고 있었다. 미케신은 유제프에게 말했다. “서로 꼭 붙어 가자, 형제.” 그러자 모든 것이 먹먹하고 검고 죽은 듯해졌다. 바닥에 있는 것처럼.

한 시간 뒤 소대장이 앞에서 무언가를 감지하고 쉿 소리를 냈다. “엎드려!” 그러자 땅에 몸을 숙이고 이를 악물고 더 기어갔다.

그렇게 군사령관 N의 유명한 일격이 시작되었다.

밤새 기계들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새벽부터 흐린 구름이 바다에서 뭍으로 움직였다. 공간 속으로 구름의 대군이 소리 없이, 힘차게, 바닥 없이 기어갔다. 새벽에 불안에 찬 자들이 군사령관 집무실로 전화했다. “남쪽 방위의 바람이 붑니다, 팔 등급……” 잠들지 않은 집무실에서 어김없고 또렷한 발소리가 복도의 어스름 속을 지나 기계로 갔다. 납빛 새벽이 창을 들여다보았다. 새벽인가, 낮인가, 세월인가? 그리고 다시.

“만 너머 부대와 연락 없음. 해안에서 포성이 들림……”

단구 앞 북쪽에 연대들이 누워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곧 그래야 했다. 먼 데서, 단구 너머에서 부름과 불길이 번쩍이고, 혼란에 빠져 아직 믿지 못하는 적의 뒤에서, 바다에서부터 웅웅 울려야 했다. 그때 북쪽에서 곤두선 물결이 되어 단구로 포효하며, 비명으로, 가루로, 마주 달려들어야 했다.

그러나 무겁게, 침울하고 사나운 덩어리를 핥는 구름 속에 벌써 새벽이 오고 있었다. 덩어리 너머에 적은 간사하고 경계하며 계속 누워 있었고, 그 뒤에서는 모든 것이 잠잠했다…… 새벽에 기다리다 못해, 분노하며 조심스레 땅에 몸을 숙인 자들의 물결이 단구로 몰아쳤고, 돌에 부서졌다. 물러나며, 도랑에, 전진 기지의 안개 낀 평면에 사람의 무더기로 쌓였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었다.

바다에서 시내가 되어, 잿빛 더러운 호수가 되어 달려왔다. 흐린 하늘의 진창이 되어 달려왔고, 수천의 발에 파헤쳐진 만의 바닥을 잠기게 했다. 진창 속에서, 시시각각 깊어지는 호수 속에서, 떠난 자들을 뒤쫓아 던져진 예비대가 철벅거렸다. 물은 납빛 띠가 되어 기슭에 섰고, 물속에 길이 가라앉았다. 길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즉시, 군사령관 명령으로……”

“모든 수단 소진. 연락 없음……”

새벽에 바다 너머에서 우레가 뚫고 왔다. 저들, 기슭에 몰린 무리가, 바다로 몰린 자들이, 안개 속으로 우레를 쳤다. 바다로 예비대가 무릎까지 물에 잠겨 기진맥진해 들어갔다. 대륙에서는 마을들을 물로 몰아내 둑을 쌓게 했다. 바다를 막으라고. 마을들은 장터처럼 물속에서 철벅거렸고, 게으르고 빠져드는 수레들로 뒤엉켰다. 둑이 자랐다. 미끄럽고 흔들리는 하얗게 센 둑이 자라다 금세 녹았다. 바람과 물이 그것을 삼켰다.

군사령관은 기계 곁에 서 있었다. 쇠 같은 불면의 밤으로 그림자처럼 잿빛이었다. 어쩌면 생애에, 그리고 역사에 단 한 번인 밤이었다. 기계들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먼 데서, 뚫고 나온 눈부신 꿈에서 우레로 외쳤다.

“됐음. 12시 총성 없이 단구 돌파. 적은 후방 적군 사단의 위협을 받아 도주. 합류한 부대들 엔슌 요새 제1선 공격 중.”

군대는 단구 너머에 있었다. 경계를 넘은 것이다. 연대들은 지협의 소금 평지에 누웠다. 호수들의 좁은 협로를 휘감은 마지막 삼중 장애물 앞이었다. 육십 베르스타의 먼 데를, 쇠 철조망의 테를, 전투의 탄내를 뚫고 군사령관도 이미 골짜기의 행복한 푸른빛을 보고 있었다……

군의 자동차들이 단구로 내달았다. 아직 만에서 꾸물거리던 기병파르티잔 사단들에는 명령이 내렸다. 단구를 거쳐 지협으로 집결하라고. 그러나 단구까지는 열두 베르스타의 행군이었다. 지협에서는 벌써 굉음과 대지의 떨림이 숨 쉬고 있었다. 거기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자 조바심과 악에 받쳐 그르렁거리며 기병들은 기슭 밑으로 쏟아져 내려갔고, 무리가 되어 물속으로, 끓어오르는 흐린 물속으로 끓어 들어갔다.

VII

그날이 있었다. 삶에서인가, 꿈에서인가? 그날의 안개 속에 남은 것은 파도의 하얗게 센 철썩임, 누군가에게는 이해되었을 안개 낀 기슭에서의 앞으로 뒤로의 움직임, 선을 넘은 자들의 막다른 운명, 신음, 짐승이 된 자들의 욕지거리, 쉼 없는 타타타 소리, 불붙은 농장들의 새벽에 창백한 불길이었다. 농가에서, 잠깐, 미케신은 엉덩이를 바닥에 쿵 내려놓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내고, 숨을 무겁게 쉬며 반합에서 물을 마셨다.

“이야, 여기 물 한번, 유제프카! 짜고 또 짜서 마시면 더 마시고 싶어! 쇠 맛도 나고…… 이런 고장 봤나, 참!……”

그리고 유제프가 곁에, 언덕 뒤에, 푸른 호수들이 저녁 빛으로 물드는 가운데 누워, 이 빠른 사격의 타닥거림에 제 몫을 보탰다. 귀를 개머리판에 대고, 지치고 꺼진 눈꺼풀을 겨우 열면서. 그 뒤에 무슨 꿈이, 무슨 아픔이 있을까?…… 앞에서는 호수 너머로 쇠붙이가 울부짖고 터졌고, 뒤에서, 물 없는 소금밭에서 터지고 태풍이 불었다. 불길로 먼지가 곤두섰고, 먼지의 휘장 속에, 먼지와 연기의 밤들 속에, 마디 진 잿빛 거대한 것들이 둔하고 게으르게 호수의 푸른빛으로 기어갔다.

“저 덩치들 봐라!” 미케신이 흐느끼듯 말했다. “이제 볶아 주겠구먼! 버텨, 유제프카!……”

전차들이 협로의 제1선을 뚫으러 갔다. 뒤로 다섯 베르스타 떨어진 농장에 군사령관이 사단장들과 사단 참모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전차는 그의 의지였다. 전차를 따라 전군을 돌파구로 던져 넣는다. 마지막 곳으로, 다이르 초원으로. 잠시 먼 곳에서 수백 정 기관총의 타타타 소리가 잠잠해졌고, 땅속에서 쇠의 굉음만 쿵쿵 숨 쉬었다. 전차들이 참호에 다가갔고 호수 너머 박격포가 쉼 없이 쳤다. 그러다 불현듯 왼쪽에서 드르륵거리고 노래하더니 구리 실이 비명을 지르며 높이 솟았다. 그리고 초원에서, 호수 쪽으로, 언덕 뒤에서 일어서는 자들이 달렸다. 몸을 숙이고 듬성듬성한 흐름이 되어, 전차가 뼈와 나무와 쇠를 납작하게 짓누르는 비명과 굉음 속으로 달렸다. 언덕 뒤에서 또 몸을 숙인 자들이 다가와 달렸고, 그 뒤로 또 끝없는 대중의 들판이 일렁였다. 초원 끝까지, 저물어 가는 흐린 만까지. 그것은 저녁이었다. 11월 7일의 역사적 저녁이었다. 엔슌 협로 좌익의 첫 돌파였다.

일 베르스타 축척 지도 위에 군사령관은 수학적으로 계산한 움직임의 포물선을 그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으로 이미 끝이다, 종결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호수 너머에 싱싱하고 소모되지 않은 오보로비치 장군의 군단이 서 있었다. 마지막을 위해 아껴 둔 것이었다. 이제 때가 왔다. 피투성이가 되어 부서진 백군 좌익이 둘째 가시 철조망 뒤로 기어들고, 보병이 쇠붙이와 황소처럼 숙인 이마와 전차 덩어리로 그들을 덮치고 있을 때, 군단은 우익에서 몸을 내던져, 기병 팔랑크스의 먹구름이 되어 드넓은 곳으로 흘러 퍼졌다. 살인적으로 돌아가는 칼날과 흐린 찬 눈빛으로, 살아 있고 따뜻하고 짓눌리는 몸뚱이들의 틈 속으로, 이미 죽은 자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우익 맞은편 보병의 얇은 막은 순식간에 뚫렸다. 기병들은 벌써 뒤로 흘러 퍼져, 미쳐 날뛰는 수레 행렬로, 행진하는 예비대로,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뒤집힌 자들의 물결로 달렸다. 군단은 군의 측면을 돌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른쪽 어깨를 돌며 군의 후방으로 나왔다. 군 위로 필사의 일격이 치켜들려 있었다.

진격하는 군의 후방, 길 위에 불안이 드리웠다. 골짜기에서 대중의 등이 몸부림쳤고, 비명과 함성이 언덕 너머에서 떠내려왔다. 사령부가 있는 농장 곁에서 전령 말들이 고삐를 끊으려 날뛰고 뒷다리로 일어서며 자동차의 칠한 흙받이를 발굽으로 찼다. 군사령관이 나와 초원을 바라보았다. 거기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단은 군의 후방으로 나와, 군을 협로와 만 사이의 자루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군단 앞에서 호기롭고 무사태평한 자들의 장교 중대가 웃으며 죽음 속으로 내달았다. 콧구멍이 탐욕스럽게 벌렁거렸다. 가까운 파멸 속에, 저녁 속에, 짐승처럼 흔들리는 대중 속에 날카로운 삶이 있었고, 취하게 하는 타는 듯 어지러운 포도주가 있었다. 뒤로 몇 세기의 지배가 단단히 굳어 있는 그들은 기동의 천재성을 믿었고, 소리치며 몸부림치는 거친 머리 없는 것들에 대한 승리가 쉬우리라 믿었다.

군사령관은 침착했다. 어쩌면 대중의 법칙을 알기 때문이었다. 군사령관에게서 전령들이 기병파르티잔 사단들로 말을 달렸다. 즉시 나서 부대들을 지원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미처 닿지 못했다. 사단들은 이미 제 발로 오고 있었다. 피로와 물에 젖어, 수레와 기관총을 바다 건너 끌고 온 사단들이 왔다. 젖과 고기와 꿀이 있는 유목지로 가는 길을 뚫으러 왔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은 물을 마시고 싶었다.

지평선에 검은 톱이 되어 흔들리며, 만에서 만까지, 말과 부르카와 수레와 치솟는 갈기의 용암이 저물어 가는 곳으로 무겁게 질주했다. 끝이 오고 있었다. 만과 군 무리 사이에 입 벌린 돌파구 맞은편에서 수레들이 거대한 반원으로 펼쳐지며, 질주하는 팔랑크스의 미친 낙하 앞에 제 몸을 내밀었다.

좌익에는 이제야 후방의 불안이 닿았다. 보병들은 어디로 갈지 몰랐다. 덩어리진 거대한 것들은 기관총으로 으르렁거리며 뒤로 기어갔고, 거의 코앞까지 굴러온 대포가 곧바로 그것들을 쳤다. 소용돌이 속에 미케신이 서 있었다. 커다랗게, 고집스럽게 벌린 다리에 피처럼 붉은 각반을 감고, 기어 오는 것들을 향해 외쳤다.

“유제프, 유제프, 어디 있어? 서로 꼭 붙어야지! 달아난다, 들려, 유제프!……”

둘째 선 너머에서 짐승이 된 자들이 물러가는 자들을 뒤쫓아 기어 나왔다. 굉음이 때렸고, 코앞에서 산탄으로 쏘아 대는 강철 아가리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우주의 헛소리 속에, 땅 위에, 수천의 장화 밑에 유제프가 누워 있었다. 옆으로, 몸을 웅크린 채, 흙빛으로, 잠든 듯이…… 아니, 그가 아니라 또 다른 수백의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들 위에서 미케신이 쉰 목으로 외쳤다. 굉음 속에 입만 소리 없이 벌어지는 듯했다.

“형제, 설마 맞은 거야, 어? 친구! 들려, 유제프! 아, 얼마나 좋은 친구였는-데……”

호수 쪽으로 돌아서서 소총을 휘둘렀다.

“개새끼들!…… 너희들!…… 마지막에 저 사람까지, 아아아!……”

곁에서, 어스름 속에서, 중대장인 민머리 수병이 달아나는 자들을 막아서며 마우저를 흔들고 빽빽거렸다.

“달아나? 제 가죽만 아끼는 놈들! 겁쟁이들!…… 그럼 혁명은, 이 신의 어미를 씹을 놈들아? 맨 먼저 달아나는 놈은 그 자리에서…… 내가 직접!…… 돌아서!……”

그 순간 수레들의 반원이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을 그르렁거리며 기병 중대들이 그 위로 덮쳤다. 그러자 불이 뿜어져 나갔다. 수레에서, 무섭게 움직이고 흩어지며, 보이지 않는 기관총의 칼날로 베어 내는 수레에서. 기병의 먹구름 속에서 수레의 탄환 줄기가 엇갈렸고, 베고, 잘라 내고, 달리는 도중에 꺾어, 종대째 땅에 눕혔다. 탄 사람 없이 빈 말들이 비명을 지르고 머리를 휘두르며 거칠게 흐린 안개 속으로 내달았다. 부서진 뼈들이 흩어졌고, 어제 애인들이 입 맞춘 입들이 검게 변했다. 발에 짓밟힌 피의 죽 속으로 거리들이, 빛의 분수들이, 문화의 우아함이, 지배의 엄숙한 찬가들이 쏟아져 떨어졌다…… 수레들은 녹슬어 삐걱거리는 축으로 누운 자들 위로 앞으로 뒤로 질주했다. 페투호프가 마차를 타고, 군복 상의만 입고 이빨에 궐련을 물고 팔꿈치를 멋지게 벌리고 질주했다. 뒤에서 곰보 처녀가 이를 악물고 쇠붙이로 드르륵 박았다. 콧소리 나는 비명으로 죽음이 울리고 노래했다.

측면에서, 수레 뒤에서 기병들이 튀어나와 내달았다. “내-애-놔-아!”를 외치며, 밤 속에 보이지 않는 대중이 치켜든 주먹과 창과 부르카와 치솟는 갈기로. 피를 흘리며 군단은 우익으로 돌아갔다. 좌익으로는, 뚫린 데로 또다시 수병과 미케신이 달렸고, 그 뒤로 땀에 젖고 그르렁거리며 갈증으로 성난 자들의 무더기가 달렸다. “내-애-놔-아!” 그러다 둘째 선에서 수병이 쓰러져 철조망에 걸렸고, 뒤통수가 거의 땅에 닿았다. 우익에서는, 비명 지르며 미쳐 날뛰는 말 떼 속에 달리던 그자, 부르카의 검은 콧수염 사내가 쓰러졌다. 말과 함께 쓰러져, 박살 난 머리를 말의 목 밑에 박았다. 그들을 넘어, 그들 뒤로, 이를 드러낸 철조망과 구덩이와 엄폐호의 그물 속으로 수레들이 내달았고, 보병들이 달렸고, 기병들이 뛰었다. 호수 저 너머에서는 마지막 남은 자들의 잔여가 이마를 갈기에 대고, 흐리고 튀어나온 눈으로 뒤를 돌아보며 떠나고 있었다.

끝.

밤이 되어 요새를 지나, 비탈 밑 초원의 작은 강에서 민물을 마셨다. 미케신은 배를 대고 누워 개머리판으로 얼음을 깨고 마시더니, 바로 그 기슭에서 돌처럼 잠들었다. 또 무리가 누워 잠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불길과 소름과 피를 뚫고, 안개 속에 빛들이 위안으로 빛났다.

밤에, 동쪽으로 백 베르스타, 안타르 곶에서 또 다른 무리가 움직여 자정에 해협을 건넜다. 허리까지 물에 잠겨 걸었고, 기슭에는 모닥불이 떼 지어 타올랐으며, 곤두선 다리의 틈에서는 석유통이 횃불처럼 타올라 불길의 활로 밤을 꿰뚫었다. 적은 떠났다. 불길 속에 군대는 해협을 건넜고, 무리는 건너편 기슭에서 민물을 마셨으며, 돌처럼 쓰러져 적의 발로 아직 따뜻한 땅에서 잠들었다.

먼 농가에서 군사령관은 말 덮개 위에, 외투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자는 듯 안 자는 듯, 심연에 걸린 불길을, 검은 꿈에서 세기들 속으로 걸어가는 자들을 보았다.

VIII

밤사이 적은 뒤쫓는 선두 부대를 떼어 내고 초원으로 사라졌다. 기병파르티잔 사단들이 앞으로 던져졌다. 물러나는 적을 따라잡아 배에 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단구 너머 북쪽에서 예비대가 어깨에 외투를 걸치고 뒤뚱뒤뚱 왔고, 뒤로 끝없는 짐수레 행렬이 소금밭을 끌려왔다. 예비대는 사흘의 행군과 전투에 지친 부대들을 교대하러 왔다. 그러나 전투 부대들은 온 자들을 욕설과 조롱으로 맞으며 교대를 마다했다. 앞에는 이미 다이르의 우윳빛 푸른 골짜기가 빛나고 있었다. 예비 여단들도 후방에 남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연대들은 펜자 연대와 철의 연대 사이로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갔고, 새벽에 삐걱거리고 천 개의 목소리로 웅웅거리며 군대는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쏟아져 내려갔다.

우익의 자볼가군도 오른쪽 어깨로 돌아 다이르로 가는 간선 도로에 나왔다. 기동 때문에 늦은 그 군대는 거기서 멀리 앞서간 N군의 짐수레 행렬과 부딪쳤다. 그러나 군대는 꼴찌로 오고 싶지 않았다. 군대는 샛길로 빠져 짐마차와 수레로 내달렸고, 걸어서 헐떡였으며, 포를 속보로 끌고 가다가 초원 개울의 흔들리고 무너지는 다리 앞에 빠진 대포를 버렸다. 후방에서는 기병파르티잔군이 움직였다. 곧장 아무도 가 보지 않은 데로, 가을에 깎이고 백군의 말굽에 다져진 데로. 세 군대가 섬 같은 먼 곳으로 앞을 다투어 달렸다. 버려진 도시들의 재물이 점점 가까이 어른거렸다. 동화에서 지붕의 금빛이 타올랐다…… 입이 바싹 마른 채, 땀에 젖고 기진맥진하여 꿈에 이끌린 유목민들이 달렸다……

저 멀리 앞에서 초원의 반지름을 따라 흩어지며 적의 군대들이 굴러갔다. 배를 향해. 경멸의 웃음과 함께 길에서 벗어나 오보로비치의 죽은 자들 가운데 마지막 남은 자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산에 숨어 북쪽에서 오는 자들을 기다렸다. 덮치고, 죽이고, 한 번 더 죽으려고.

더 멀리, 날뛰는 흐린 안개 속에서 도망자들의 배가 빙빙 돌았다. 기슭에서는 아직 짐을 싣고 있었다. 군중이 버려진 보따리와 꾸러미를 밟으며 방파제로 달렸고, 달리는 자들 밑에서 잔교가 흔들리며 처지고 쩍쩍 소리를 냈다. 기슭에서 남겨진 자들이 외치고 저주했다. 고동이 기슭에서 드리워 오는 소름 끼치는 처형과 죽음을 향해 침울하게 외쳤다. 배들의 검은 연기가 물결에 가라앉지 않고 밤의 연기가 되어 기슭을 기어갔다. 거칠고 혼란스러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밤 속에 먼 자들의 굉음이 있었다. 모닥불의 달아오른 그림자가 되어 점점 가까이 도시들로 밀려왔다.

군사령관은 새벽 속으로, 초원으로 차를 몰았다.

빈 들판이 있었고, 부서진 농장 폐허에 녹아 가는 서리가 있었고, 무덤 언덕 너머에 희미하고 거대하게 떠오르는 노을이 시대의 경계처럼 있었다. 밤은 등 뒤에서 꿈꾸고 있었다. 높은 데까지 일어선 검고 조는 문 같았다. 모터가 먹먹하게 웅웅거리며 커다란 날개로 공간을 삼켰다. 말 시체가 줄줄이 늘어선 어른거리는 길이 현기증 나게 뒤로 달렸다. 시체…… 옆구리가 부풀고 턱을 드러낸 시체들, 지평선 너머에 또 시체, 물건처럼 꼼짝 않는…… 수천, 수천으로 된 복도…… 소리를 듣자 시체 먹는 개 떼가 배를 땅에 대고 들판으로 기어 물러나, 입맛을 다시며 욕정으로 흐린 보랏빛 핏빛 눈으로 길을 쳐다보았다……

역사의 어스름 속에, 반쯤 든 잠 속에 빈 들판이 누워 있었다. 끝없고, 오목하여, 심연에서 노을로 내민 사발 같았다……

어떻게 말했던가? 러시아여, 너는 벌써 언덕 너머에 있구나?……[2] 끝없는 곳에서 무덤 언덕들이 노을 위의 검은 투구처럼 떠나갔다. 뒤로, 어스름 속으로, 역사 속으로…… 어딘가 뒤쪽 새벽 속에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피와 비명과 탄내로 헛소리를 하는 전장이. 텅 버려진 채, 아직 마을 사람들이 땔감으로 훔쳐 가지 않은 가시 그물의 말뚝이 서 있었고, 살인자들의 쇠붙이와 뼈와 짐승 똥과 어스름으로 입 벌린 구덩이가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쇠 가시에 걸린 부르카 누더기를 흔들었다. 미친 듯 기울어 앞으로 날아가던 그 모습 그대로…… 전장 위로 고요가 떠갔다. 황폐한 낮의 고요가. 잡히지 않는 망각의 지층으로 부스러지며 시대가 떠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어스름이 오기 전에 전위대가 다이르로 돌입했다. 광장에 말발굽이 텅 비게 쟁쟁 울렸다. 전위대는 세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로 달려갔다. 거기 돌길의 잔물결 위로 마천루 벽에서 붉은 깃발들이 쇠붙이처럼 흔들림 없이 드리워 있었다. 혁명위원회였다. 발코니 밑에서 창을 흔들며 전위대는 거칠고 기쁜 도전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높은 데 난간 뒤에서, 재킷 차림에 모자도 안 쓴 미칠 듯 재빠른 작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몸을 숙이고, 손을 흔들며, 창을 곤두세우고 밀려드는 저 아래를 향해 외쳤다.

“……환영합니다……”

“……세계의 억압받는 대중이 들을지어다!……”

“……만세!……”

먼 데서, 전망 속에서 파도처럼 기병들이 질주해 왔고, 거리에 수레의 비명과 말발굽 소리를 흩뿌렸다. 아래에서 모자를 흔들었고, 뒤로 젖힌 얼굴들에서 수천의 타오르는 눈이 높은 데를 올려다보았다. 드리운 붉은 깃발을, 꺼져 가는 마천루의 설화석고 괴물을, 문화의 돌 아치를. 거기서 악단이 영광의 물결을 불어 왔다. 벌어져 바싹 마른 목구멍에서, 함성으로 조여든 가슴에서 울부짖음이 터졌다.

“……아아아아!……”

변두리에서, 부두에서, 빈민굴에서 땅에서 일어선 자들이 왔다. 무리로 거리를 짓누르며, 머리 수천의 일렁이는 바다 위에 붉은 누더기를 흔들며 왔다. 그들에게서, 아직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서, 어스름한 깊은 곳에서 신음이 울렸다.

“……아아아아!……”

항구에는 터진 창고와 곳간의 풍요가 덩어리와 둑으로 쌓여 있었다. 꾸러미, 상자, 숨 막히게 달아나던 자들이 버린 기계 뼈대. 기병의 사슬이 사람들을 밀어 내고 기슭과 항구를 지키며, 담배를 피우며, 처음 보는 천 년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물결은 지평선 너머의 노을인 듯 초록빛으로 빛나며 그리로 갔다.

거리들이 끝없이 달아나는 푸른 불빛으로 타올랐다. 빛 속에서 수천의 놀라고 웃는 눈이 아침처럼 바라보았다. 층층에서, 유리 현관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이 나와 아스팔트로 내려왔다. 다정하고 겁먹은 미소로 일그러진 얼굴로 지팡이를 흔들었다. “우리도 기쁩니다, 우리도 여기 있습니다!……” 대담해진 분 바른 여자들이 달콤한 열기의 눈으로 나와, 소곤거리며, 바람에 그을려 사납게 이를 드러낸 승마바지들에게 웃어 주었다. 흐리고 무지개빛 도는 늪의 눈으로 어제가 꺼져 가며 바라보았다……

기병들이 침울하게 말없이 둘러싼 검은 골목의 저택에서, 산속 폭파된 터널 곁에서 잡힌 마지막 남은 자들을 재판했다. 사람 없는 골목 너머로, 새벽을 알리는 굉음과 외침이 넓어졌다. 문 곁 어둠 속에서 트럭이 날카롭고 소름 끼치게 덜컹거렸다.

그리고 밤에 연대들이 왔다. 대열의 쇠 같은 밀어붙임 앞에 대중이 갈라졌다. 오른쪽 맨 앞에 키 큰 사내가 걸었다. 바람에 그을린 붉은 얼굴에 새 영국제 외투, 다리는 피처럼 붉었다. 눈은 깜빡이지 않고 도취하여 앞을, 군중의 외침을, 나팔의 노래를, 문화의 빛을 바라보았다. 목구멍들에서 힘찬 날숨으로 포효가 터졌다.

군주제는 필요 없다,
차르도 필요 없다,
부르주아를 쳐라!
동무들, 우라!

초원에서 달려온 자동차가 연대들에 막혀 느려지더니 네거리에 멈췄다. 끝없는 행렬을 배경으로, 공간의 빛을 배경으로, 뾰족한 투구 쓴 돌 같은 사내의, 준엄한 일을 생각하는 옆얼굴이 꼼짝 않고 있었다. 반쯤 열린 입이 부르짖듯 위압적으로 외치려 했다.

군대가, 군사령관이 다이르로 들어가고 있었다.

타브리아, 1920~1921

주석

  1. 「인터내셔널」의 후렴 첫 구절. ↩
  2. 12세기 러시아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에서 되풀이되는 탄식의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