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범죄 피해 여성들의 모임을 만들자
인물이오시프 스탈린, 펠릭스 제르진스키 용어АЛЖИР (악몰린스크 조국반역자 아내 수용소), 조국반역자 가족, 굴라크, 대숙청 사건대숙청
“1930~[판독 불가]년대에 탄압받은 사람들의 가족이 수천 명씩 군대처럼 있었다는 것, ‘아내’라는 법적·정치적 현상, ‘아내 수용소’를 아는 오늘날의 독자는 많지 않다.” 『라보트니차』 편집부에 온 편지 가운데 지난해 10호에 실린 한 통을 쓴 갈리나 콜도마소바의 이 말은 마음을 뒤흔드는 답장을 수없이 불러왔다. 역시 수용소를 거친 사람들과 그 자녀, 손주들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들은 겪은 일을 털어놓고, 세상을 떠난 가족의 자세한 사정을 알아내려는 바람에서, 그 비극의 시절에 끊긴 벗들과의 연을 다시 잇고 싶어서 편지 필자와 연락하기를 원한다.
그중 한 통을 싣는다.
솔직히 그 시절 이야기는 하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악몰린스크 근처 맨땅뿐인 초원으로 실려 갔고, 그 평평하고 텅 빈 곳에 ‘살림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전에는 여기가 엄중 체제 수용소였어요. 편지도, 라디오도, 우리에게 허락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큰아들이 보낸 첫 편지를 전쟁 중에야 받았어요. 아들은 그때 독일에 있었지요. 그 편지를 온 수용소가 돌려 읽었습니다. 우리를 그곳으로 보낼 때 자식도 남편도 다시는 못 볼 거라고 했거든요. 저는 남편이 체포되고 몇 달 뒤인 1937년 9월에 체포되었고, 38년 여름에 제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끔찍했던 건 호송길과 중간 감옥이었습니다. 수용소에 닿았을 때 저는 완전히 영양실조로 뼈만 남아 있어서 작업에도 데려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침 침상 옆자리 여자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빵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저를 몰래 먹여 주기 시작했고, 저는 금세 기운을 차렸어요. 젊었으니까요. 곧 일하러 나갔습니다. 짐마차꾼, 물 나르는 사람, 짐꾼을 했고 공사장에서도 일했어요. 한번은 말들이 저를 태운 채 초원으로 내달리다가 짐마차가 뒤집혔습니다. 다들 이제 못 일어나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열흘쯤, 그 이상은 아니고 누워 있다가 다시 일하러 나갔어요.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배식도 하다가, 그 뒤에는 — 어쩌면 제 사건을 다시 들여다봤는지도 모르겠어요 — 창고 일을 맡았고, 나중에는 창고장이 되었습니다. 형기 마지막 날까지 거기서 일했고, 그 뒤 모스크바로 떠날 때까지는 자유 고용으로 일했지요…
제가 체포될 때 작은아들은 두 살이었는데,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1942년에 저는 아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규정대로 보내는 사람 주소 자리에는 사서함 번호를 적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아이가 도망을 쳤습니다! 열 살이었는데, 어떻게 했는지 악몰린스크까지 와서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 사서함을 찾았어요. 아시겠어요, 말 그대로 우체통을 찾아다닌 겁니다! 아이는 붙잡혀 돌려보내졌습니다. 고아원에서는 도망친 벌로 아이를 징벌방에 가뒀어요. 저는 물론 그런 일은 하나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제 형기가 끝나서 저는 자유 정착민이 되었어요. 저는 상관에게 아들을 데려오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했습니다. 사무소에서 일하던 우리 직원 한 사람이 출장을 가면서 제 부탁으로 고아원에서 아이를 데려왔어요. 아이가 악몰린스크에서 끌려 돌아온 게 바로 그 전날이었어요. 그 사람이 이틀만 일찍 갔더라도 우리는 영영 못 만났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악몰린스크에서 만났는데, 아들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저를 만졌다가는 손을 홱 빼곤 했지요. 제 방으로 데려왔을 때 — 그때는 저도 아주 작은 방이 하나 있었어요 — 사진을 보여 줬습니다. 이분이 할머니, 이게 나, 이게 형, 이게 너란다. 그제야 아이가 저를 믿었어요. 그 아이는 나중에 다 자라서 원자력 쇄빙선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남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개인 연금을 신청할 때 서류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총살당했다는 걸요. 아직 남편 소식을 하나도 모르던 때, 한번은 꿈을 꾸었어요. 남편이 저를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남편 위로 칼을 치켜듭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걸 못 봐요. 그 꿈을 꾼 날짜를 기억해 두었습니다. 1938년 8월 26일이었어요. 여러 해가 지나서, 바로 그날 남편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는 걸 알았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정말 그랬어요…
수용소에서는 전쟁이 일어난 걸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바깥 소식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으니까요. 알고 나서는 얼마나 울었는지! 아시겠어요, 누가 우리한테 “전선으로 가라, 가라” 하고 한마디만 했어도 — 우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위생병으로든 병사로든 나갔을 겁니다. 이런 일도 기억나요. 사라토프의 감옥에서 우리 육백 명쯤을 커다란 방, 전에 봉제 작업장이던 곳에 몰아넣었어요. 그런데 여자 둘이 조용히 “넓구나, 나의 조국이여” 하고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자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발작, 울음, 소름 끼치는 비명, 미친 듯한 웃음. 경비병도 의사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이해해 주세요, 그때 우리가 무엇을 느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떻게든 이해하고 깨달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지금 설명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남에 대해서야 제가 모르는 게 있을 수 있었겠지만, 저 자신에 대해서는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저를 체포하러 왔다면 그건 끔찍하고 비극적인 실수라는 뜻이었지요. 남편도 그랬어요… 볼셰비키였고, 지하 활동가였고, 제르진스키와 함께 일한, 정말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폴란드 사람들이 남편을 고문하고 불로 지졌는데도 남편은 견뎌 냈고, 꺾이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이 인민의 적일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음 아주 깊은 곳에는, 이제 와서 보니, 비극적으로 순진한 희망이 살아 있었어요. 스탈린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철벽 너머에 있다는.
수용소 동무였던 나스탸 호흘롭키나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많은 일을 겪었어요. 우리는 석방될 때까지 줄곧 함께였고, 그 뒤에도 자유 고용 노동자로 함께 살며 일했습니다…
…그 세월 동안 저는 용감하고 고결하게 정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나스탸 호흘롭키나도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주 작고 가냘프고 수수한 여자였지만, 마음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체포되기 전에는 모스크바에 살다가 그 뒤 친척들이 있는 심페로폴로 갔어요. 거기 딸이 남아 있었고, 아들은 — 열여섯 살이었는데 — 독일로 끌려갔습니다. 그 일로 무척 괴로워했어요. 그 괴로움을 시에 쏟아 냈지요. 언젠가 우리가 이미 풀려난 뒤에 저는 그중 몇 편을 옮겨 적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싸움터에서 멀리 있네,
머리 위로 수류탄이 터지지 않고,
하늘에서 적기의 울부짖음이
저주받은 우리의 평온을 깨뜨리지도 않네.길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도 —
고요한 밤의 갑작스러운 경보도 우리를 깨우지 않네.
머리 위엔 지붕. 우리의 벽은 튼튼하고,
나날은 지루하고도 엄격하게 재어져 있네.싸움도 장례 잔치도 우리에겐 닿지 않으리.
사건의 폭풍은 곁을 스쳐 지나가고,
누군가 우리 목숨을 지켜 주네,
쓸모없고 모두에게 잊힌 목숨을.수많은 다른 이들처럼 우리도 바칠 수 있네,
조국을 위해 피도 목숨도.
우리에게 단 한마디만 해 다오,
어떤 싸움에서든 우리를 시험해 다오.1942년
저는 그 사람을 심페로폴로 떠나보냈습니다. 그 뒤로는 소식을 하나도 모릅니다. 어쩌면 연락이 닿을지도, 대답이 올지도 모르지요…
요즘 제가 생각하는 게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아마 이제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 거예요. 저도 벌써 여든네 살입니다. 세월이 우리를 흩어 놓았고, 운명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했어요. 많은 사람이 벗들만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 남편과 자식을 잃었고, 어쩌면 아직도 그들을 찾고 있을지 모릅니다. 외롭고, 흔히 가난의 문턱에 선 노년이 제 동무들 가운데 아주 많은 이의 몫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하나로 뭉쳐 서로를 찾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저 하나만은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여성들이 가장 많이 읽는 잡지 가운데 하나인 『라보트니차』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요?
클라브디야 알렉산드로브나 나우요카이티스
모스크바
편집부에서
우리는 클라브디야 알렉산드로브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 말이 수백만 독자 가운데 많은 이의 마음에 닿기를 바란다. 『라보트니차』도 이 생각이 이루어지도록 힘닿는 데까지 애쓸 것이다. 그 생각이란 스탈린 범죄의 피해자가 된 여성들, 탄압받은 사람들의 아내들을 하나로 묶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스스로는 하지 않을 말도 하려 한다. 우리가 해야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고통과 쓰라림 속에서 스탈린 체제가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새로 되찾고 있다. 그 기억 없이는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잃어버린 수백만 목숨과 짓밟힌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에 대한 슬픔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노이자 부끄러움이며, 그것 없이는 정화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소? —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 언제까지 상처를 후벼 팔 거요?” 아, “평온의 수호자들”은 사회의 신경과 이성을 건드릴까 봐 얼마나 두려워하는가!
그러나 11월 말 모스크바 전구 공장(MELZ) 문화회관을 찾은 3만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은 잔혹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바로 이곳에서 잡지 『오고뇨크』의 발의로 「양심 주간」이 열렸다. 그것은 스탈린 탄압의 희생자들을 위한 레퀴엠이었다. 우리의 양심을 향한 레퀴엠이었다.
행사 내내 메모리알 회원들이 일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방에서 사람들은 벽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벽에는 위에서 아래까지 명단이 붙어 있었다. 메모리알 회원 디마 유라소프가 문서고에서 모은 수천 명의 성(姓)이었다. 수백, 수천의 눈이 한 줄 한 줄 가족의 이름을 찾았다… 사람들은 몇 시간씩 「기억의 벽」 앞에 서서 역사의 메마른 기록을 읽고 또 읽었다. 편지, 일기장에서 뜯어낸 종이, 그리고 증명서, 타자기로 찍은 증명서들 — “사후 복권”. 기나긴 세월 동안 그것만이 사회가 건넨 유일한 참회의 말이었다…
지금 우리는 빚을 갚고 있다. 양심에, 기억에. 추모 기념관도 우리가 진 빚이다. 과거에 대해서, 그리고 망각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야 할 미래에 대해서. 그래서 지금 탄압 희생자 기념관 건립 기금이 불어나고 있다. 양심 주간 동안에만 5만 7천 루블이 넘게 모였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빚이 하나 더 있다. 사람의 삶으로는 담아낼 수도 견뎌 낼 수도 없을 것 같은 시련을 거쳐 온 사람들은 이 빚을 결코 우리에게 일깨워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찌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수용소의 굶주림과 추위, 고문의 고통과 굴욕을 뒤에 둔 노년이 얼마나 가혹한지, 연금이 얼마나 적은지, 그리고 스탈린 체제가 떠안긴 외로움 때문에 많은 이가 제 자식의 부양조차 바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그렇다, 탄압의 잔혹함과 그 뒤 수십 년의 무관심한 침묵을 몸소 겪은 사람들에게 국가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쓰러진 이들을 위한 기념비에 쓸 돈을 사람들에게서 모으고 있다면, 살아 있는 이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클라브디야 알렉산드로브나 나우요카이티스는 탄압의 피해자가 된 여성들이 하나로 뭉치면 서로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이가 힘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평생 자발적으로, 대가 없이 그렇게 해 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모임에 자체 기금이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과 우리가 이 여성들 곁에 선다면 — 적어도 그것으로 우리가 진 빚의 작은 일부나마 그들에게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기금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시라, 생각해 보시라!
여러분의 편지를, 어떤 제안이든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