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파블류코프, 『예조프: 전기』 한국어 번역
제4부. 스탈린의 징벌검
제17장 루뱐카의 복도에서
제18장 전광석화 같은 공격
제19장 ‘병행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앙’ 사건
제20장 2·3월 전원회의
제21장 경비병 교대
제22장 사령부를 향한 포화
제23장 생존의 기술
제24장 명령 제00447호
제25장 ‘민족계층’의 운명
제26장 정치국 후보위원
제27장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제28장 슬루츠키의 죽음
제29장 수출되는 테러
제30장 ‘반소비에트 우익·트로츠키 블록’ 재판
17. 루뱐카의 복도에서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지 며칠 뒤, L. M. 카가노비치는 키슬로보츠크에서 휴양 중인 정치국원 G. K. 오르조니키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최근 소식은 예조프의 임명이다.
우리 어버이가 내린 이 훌륭하고 현명한 결정은 당과 국가에서 대단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야고다는 이 역할을 수행하기에 분명히 약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건설사업의 조직자가 되는 것*과 정치적으로 성숙하여 적을 제때 찾아내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예조프라면 틀림없이 일이 잘될 것이다.
- 수감자 노동력을 이용하여 야고다의 지휘 아래 건설된 모스크바·볼가운하 등의 대형 경제시설을 말한다.
카가노비치가 말한 극소수는 아마 야고다와 가장 가까웠던 NKVD의 국장과 부서장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예조프가 부임하면서 자신의 처지가 대단히 불안정해졌음을 이해했다.
소비에트 기관에서는 새 책임자가 임명된 뒤 인사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야고다가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으므로, 그의 부하들도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나누어 져야 했다.
그러나 카가노비치가 정확하게 썼듯이 예조프의 임명을 환영한 체키스트들도 있었다.
야고다가 NKVD를 이끌고, 그전에는 병든 V. R. 멘진스키를 대신해 OGPU를 사실상 지휘한 세월 동안 체키스트들 사이에는 그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게 쌓였다.
야고다는 뛰어난 조직가이자 유능한 경제관리자였지만 부하들을 거칠게 대했다.
반박을 견디지 못했고, 자주 부당하게 행동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신속하게 처분했다.
그들을 국가의 외딴 지역으로 ‘유형’시키거나 아예 보안기관에서 해고했다.
반면 아첨꾼과 총애받는 사람들은 전문적 능력이 직책에 충분히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의 보호를 받고 승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야고다가 제거되자 많은 체키스트, 특히 중·하급 직원들은 이 소식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가피한 인사개편은 승진을 위한 제법 좋은 기회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예조프가 물려받은 조직은 대단히 방대하고 통제하기 어려웠다.
인민위원부의 토대는 서로 연관성이 거의 없는 일곱 개 총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국가보안총국
- 국경·내무경비총국
- 노동자·농민민경총국
- 수용소·노동정착지·수감시설총국
- 소방총국
- 도로총국
- 국가측량·지도제작총국
이 밖에도 NKVD에는 서로 독립적인 여러 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크렘린 경비사령관국, 행정경제국, 특별건설국, 도량형국이었다.
주민등록부, 재정부, 토목건설부, 이주부, 정보원 등록 중앙카드부 같은 독립부서도 있었다.
지역에서 소련 NKVD의 지부 역할을 맡은 곳은 각 연방공화국의 내무인민위원부, 즉 우크라이나·벨로루시 NKVD 등이었다.
러시아공화국에서는 각 주·변경·자치공화국의 NKVD국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중앙 인민위원부와 사실상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작전업무에서는 중앙에 예속되었지만, 일부 문제에서는 현지 당기관과도 활동을 조정해야 했다.
전연방 내무인민위원부의 가장 중요한 부서는 당연히 소련 NKVD 국가보안총국, 약칭 GUGB NKVD, 즉 과거의 OGPU였다.
당시 국가보안총국에는 여덟 개 부서가 있었으며, 각 부서는 체제를 내부와 외부의 적에게서 보호하는 구체적인 임무를 맡았다.
비밀정치부는 이른바 반소비에트 정당들, 정확히는 정당 자체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으므로 그 전 구성원들,과 싸우는 일을 전문으로 했다.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내부의 반대파를 감시하고, 창작지식인·성직자·이른바 ‘구인간’들을 관찰했다.
도시와 농촌 주민의 정치적 신뢰성도 통제했다.
특별부는 군대, 국경수비대와 내부경비군의 반소비에트적 움직임을 감시했다.
또한 방첩업무, 즉 소련 영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정보기관과의 투쟁도 수행했다.
작전부는 중요시설과 당·국가기구의 지도간부를 경호했다.
이 밖에도 미행, 수색, 체포와 우편검열 등을 조직했다.
경제부는 계급의 적이 파괴공작을 통해 사회주의 경제의 여러 분야에 피해를 주려는 시도에 대응해야 했다.
운수분야는 별도의 운수부가 관리했다.
해외부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소련 밖에서 활동했다.
국가 지도부가 관심을 갖는 정치·경제정보와, 가능하다면 군사정보까지 수집했다.
순수한 군사첩보는 적군 총참모부 정보국이 전문으로 했다.
또 해외에서 활동하는 백위군·트로츠키주의 조직 등 소비에트체제에 적대적인 정당과 단체를 상대로 싸우는 것도 해외부의 임무였다.
특수부는 국가기밀을 보호했다.
국가기관과 당조직에서 비밀문서가 어떻게 보관되는지를 통제했다.
그러나 핵심업무는 암호작성과 해독,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등록문서부는 국가보안기관의 감시대상이 된 사람들을 등록했다.
통계업무와 종결된 수사사건 및 기타 문서자료의 처리와 보관도 담당했다.
국가보안총국의 부서들은 가장 중요한 기업·기관·교육기관을 관리하고, 가장 중대한 사건을 직접 수사해야 했다.
나머지 시설과 피의자는 지역 내무인민위원부나 NKVD국 산하 국가보안부의 같은 부서들이 담당했다.
NKVD의 다양하고 거대한 조직을 익히는 것은 어떤 신임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조프는 이전까지 이처럼 큰 집단을 지휘해본 경험도 없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조직능력뿐이었다.
예조프는 우선 사소하거나 부차적인 문제를 직접 처리하지 않아도 되도록 부인민위원들에게 넘기는 조치를 취했다.
앞에서 말했듯 야고다에게서 제1부인민위원 Ya. S. 아그라노프를 물려받았다.
예조프는 NKVD에 들어온 첫 몇 주 동안 스탈린에게 부인민위원 세 명을 추가로 받아냈다.
수용소총국장 M. D. 베르만, 국경·내무경비총국장 M. P. 프리놉스키, 노동자·농민민경총국장 L. N. 벨스키였다.
공식적인 보조역인 부인민위원들 외에 비공식 보좌관도 절실히 필요했다.
체키스트 업무의 ‘주방’을 소개하고, 사람들과 그들의 관계, 장점과 약점을 알려주며, 예조프가 새로운 역할에 적응할 때까지 실무문제의 해결을 도와줄 사람이었다.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은 내무인민위원 작전비서 Ya. A. 데이치였다.
데이치는 1920년부터 국가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처음 11년은 북캅카스에서 복무했다.
캅카스전선 체카 특별부의 평범한 수사관으로 시작하여 비밀작전국장, 북캅카스변경 OGPU 전권대표 부대표까지 올랐다.
이후 모스크바주 OGPU 전권대표부 부대표로 일했다.
1935년에는 칼리닌주 NKVD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1936년 3월 장기질병 뒤 소련 NKVD의 처분 아래 보내졌고, 그를 위해 새로 만든 내무인민위원 작전비서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에서 데이치는 예조프의 부임을 맞았다.
짧은 기간 안에 데이치는 예조프의 오른팔이 되었다.*
예조프는 원칙적인 결정이나 인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와 먼저 논의하고 조언을 받으려 했다.
데이치는 국가보안총국 부서장들의 보고, 지방 NKVD국장들의 접견과 보고에도 참석했다.
여러 기관의 지도자들은 예조프를 만나러 가기 전에 데이치를 먼저 찾아가 문제를 논의하려 했다.
- 1936년 11월 말 Ya. A. 데이치는 소련 NKVD 서기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데이치는 체키스트 업무의 풍부한 경험과 NKVD 내부의 모든 ‘가족비밀’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상부에 제출할 매끄러운 보고서를 작성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 능력도 그를 대체할 수 없는 보좌관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데이치는 예조프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퇴근할 때 함께 이동했다.
예조프 주변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는 당시 NKVD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의 눈에 띄었다.
많은 체키스트는 데이치의 급속한 출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야고다가 심어놓은 사람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예조프가 총애하는 그의 개인적 성격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체키스트 사회에서는 그를 ‘인민위원의 총고문’ 또는 ‘왕관 없는 부인민위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데이치 외에도 예조프가 처음부터 완전히 신뢰할 수 있었던 사람 세 명이 있었다.
그가 직접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당통제위원회에서 예조프의 지휘 아래 일했던 S. B. 주콥스키, 중앙위원회 서기국에서 조직국 업무와 간부선발을 담당했던 V. E. 체사르스키, 중앙위원회 배치부에서 예조프의 부부장이었던 M. I. 리트빈이었다.
리트빈은 배치부에서 OGPU 간부도 담당했다.
예조프가 NKVD로 이동할 당시 리트빈은 하리코프주 당위원회 제2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예조프는 스탈린을 설득하여 그를 NKVD 인사부장으로 임명했다.
1936년 10월 14일 정치국 결정으로 이 임명이 승인되었다.
S. B. 주콥스키는 행정경제국장에 임명되었다.
V. E. 체사르스키는 내무인민위원 직속 특별전권대표라는, 그를 위해 새로 만든 자리를 받았다.
예조프가 NKVD에 들어온 뒤 실시한 중요한 조직개편 가운데 하나는 국가보안총국 구조의 재편이었다.
1936년 11월 27일 정치국 결정으로 승인되었다.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 수사를 통해 음모자들의 암살대상이 될 뻔했다고 ‘밝혀진’ 당·국가 지도자를 더욱 잘 보호하기 위해, 작전부의 경호부문을 독립된 경호부로 만들기로 했다.
또 다른 신설부서는 외국정보기관과의 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체키스트들이 최근 받아낸 수많은 진술에 따르면, 외국정보기관들은 국내 반혁명세력과 협력하여 소련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외국정보기관의 활동을 경제부와 특별부 두 부서가 동시에 상대하자 불필요한 경쟁이 발생하고 역량이 분산되며 기능도 중복되었다.
따라서 경제부와, 외국정보기관 대응을 전문으로 하던 특별부 일부 조직을 바탕으로 독립 방첩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반혁명범죄의 피의자와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 가운데 ‘특히 위험한 인물의 적절한 격리를 보장할 체제’를 만들기 위해, 국가보안총국 안에 독자적인 교도부를 설치했다.
이곳에는 과거 행정경제국에 속했던 특별목적교도소, 이른바 정치격리소와 굴라크 체계에 속하던 일부 교도소가 배속되었다.
예조프의 개편으로 국가보안총국 부서 수는 여덟 개에서 열 개로 늘어났다.
1937년 봄과 여름에는 수상운수부, 도로·통신부, 작전기술부 등 두 개 부서가 추가되었고, 이 구조는 1938년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국가보안총국장에는 마침내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 Ya. S. 아그라노프가 공식 임명되었다.
아그라노프는 1935년 말부터 스탈린의 구두지시에 따라 이 총국의 업무를 책임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임명된 것은 아니었다.
야고다가 인민위원인 동안에는 사실상 야고다가 국가보안총국을 지휘했다.
이제 NKVD 권력이 바뀌었으므로 아그라노프는 이 책임 있는 직책에 가장 적합한 후보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적과 진정으로 싸울 수 있는 아그라노프의 능력에 이미 의심을 품기 시작했던 듯하다.
예조프는 지도자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어느 정도 노력해야 했다.
바로 이때 내무인민위원 특별전권대표가 된 V. E. 체사르스키는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예조프의 보좌관 역할도 잠시 계속했다.
그는 자프란 사건을 둘러싼 당 차원의 조사를 진행하고, 모스크바주 NKVD국 부국장 A. P. 라지빌롭스키가 이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조사했다.
대화 중 체사르스키는 라지빌롭스키에게 예조프 앞으로 진정서를 쓰라고 권했다.
한편으로는 G. G. 야고다와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 G. A. 몰차노프가 여러 트로츠키주의 사건을 방해했다고 비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그라노프의 역할을 가능한 한 크게 부각하라는 것이었다.*
- 라지빌롭스키는 아그라노프의 사람이었다. 1920년대 말부터 OGPU 비밀부, 이후 비밀정치부에서 아그라노프의 지휘를 받았고, 그 뒤 모스크바주 OGPU 전권대표부에서도 함께 일했다.
아마도 아그라노프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음모’ 수사에 참여한 내용을 강조하려 한 듯하다.
당시 아그라노프와 그를 도운 라지빌롭스키 덕분에 E. A. 드레이체르에게서 중요한 자백을 받아냈고, 이것이 재판의 성공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식이었다.
라지빌롭스키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예조프는 그의 진정서를 스탈린에게 보여주었고, 아그라노프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다만 훗날 드러났듯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예조프는 NKVD에 들어오자마자 야고다 시대에 형성된 폐쇄성과 특권집단 의식을 끝내겠다고 새 부하들에게 선언했다.
인민위원부 지도간부들이 참석한 초기 회의 가운데 하나에서 그는 참석자들에게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업무에서 잘못된 일을 한다면, 체키스트이자 당원인 여러분은 중앙위원회에 가도 되고 정치국에 가도 된다.
우리에게는 당 이외의 어떤 것도 없다.
우리 당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영예와 찬사를 보낸다.”[205]
물론 누구도 이 말의 진실성을 시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예조프는 자신이 중앙위원회, 정확히는 스탈린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사실이었다.
예조프가 선언한 당성 강화라는 구호는 체키스트의 실제 업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부임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적극적 심문방법의 장려는 NKVD 업무에 진정한 혁명을 일으켰다.
예조프 이전의 수사관들은 체포자에게 비교적 온건한 영향을 주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설득, 위협, 가족에 대한 협박, 수감환경 악화, 부분적인 수면제한 등이었다.
체포자가 비교적 적고, 한 사람씩 공들여 다루어 원하는 상태로 만들 시간이 있을 때에는 이런 전술도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예조프가 부임한 뒤 ‘인민의 적’은 갈수록 늘어났고 수사관의 부담도 커졌다.
상부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려던 많은 수사관은 체포자에게 신체적 강제방법을 간헐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사기간을 단축했을 뿐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얻기 어려운 결과도 만들어냈다.
이른바 강도 높은 심문에서 피의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범죄까지 자백했고, 수많은 ‘공범’의 이름을 말했다.
그 가운데에는 대단히 유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결과는 지도부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성과를 거둔 직원은 다른 사람의 모범으로 제시되었고, 새로운 업무방식은 점점 널리 확산되었다.
다만 처음에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사용했다.
심문이 이루어지는 사무실들에 예조프가 수사교도소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돌면, 구타당한 수감자들을 급히 당직자에게 넘겨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조프의 방문이 아무 문제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체포자들이 불법적인 수사방법을 사용당했다고 호소해도 예조프는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자백을 얻어내는 일을 장려했다.
1936년 말 업무 때문에 모스크바에 와 있던 이바노보주 NKVD국 부국장 M. P. 시레이데르는 당시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에서 일하던 옛 동료 V. N. 일린과 나눈 대화를 훗날 회상했다.
“새 인민위원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빅토르는 그의 민주적이고 소탈한 태도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모든 수사관의 방을 직접 돌며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핀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물었다.
‘자네 방에도 왔나?’
‘물론 왔지.
들어왔을 때 내 앞에는 피의자가 앉아 있었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는 자백하느냐고 물었고, 내가 아니라고 하자 갑자기 몸을 돌려 그자의 얼굴을 후려쳤어……
그러고는 설명했지.
이렇게 심문해야 한다고!’
그는 마지막 말을 열광적으로 했다.”[206]
시레이데르는 계속 썼다.
“나는 당혹감과 무거운 심정으로 그와 헤어졌다.
펠릭스 에드문도비치 제르진스키 시절에는 오랫동안 모든 체키스트에게 체포자를 때리는 것은 물론이고 목소리조차 높이지 말라고 엄격히 요구했다.
그런데 이제 ‘스탈린의 인민위원’이 직접 체포자를 때리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는 원칙적으로 부도덕한 일이었다.
또한 나는 순전히 직업적인 이유에서도 속으로 항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술을 ‘때려서 얻었다면’,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허위고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눈앞의 사람이 적인지, 아니면 구타와 학대로 약해진 무고한 사람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207]
물론 제르진스키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인 1931년에도 OGPU 부의장이자 병든 V. R. 멘진스키를 대신한 사실상의 책임자였던 야고다는 「모든 체키스트에게」라는 유명한 편지에서 피의자들의 진정을 언급하며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적의 방법을 조금이라도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당과 노동계급은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수감자에 대한 모욕, 구타와 그 밖의 신체적 강제방법은 모든 백위군 세력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OGPU는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관과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방법을 언제나 혐오하며 거부했다.
체포자에게 아주 작은 모욕이라도 가하고, 진술을 강요하려는 암시라도 허용한 체키스트는 체키스트가 아니라 우리 사업의 적이다.”[208]
1936년 말에는 이러한 신중함이 명백한 시대착오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고지도부가 물리적 강제방법을 공개적으로 장려하는 것은 여전히 대단히 이례적으로 보였다.
이후 체키스트들은 새 인민위원에게서 특정 피의자를 ‘가혹하게’ 심문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도 받기 시작했다.
중앙기구에는 이런 목적을 위해 레포르토보 감옥이, 모스크바 NKVD국에는 부티르카 감옥이 배정되었다.
그 감옥으로 들어간 수감자에게는 해당 절차가 사실상 보장되었다.
때로는 수사관이 이 감옥 가운데 하나로 옮기겠다고 협박하기만 해도 필요한 진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도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 첫 반년 동안에는 물리적 압박수단이 그렇게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빠른 결과가 필요하거나 수사에 중요한 인물에게 도달해야 할 때 주로 적용되었다.
NKVD 중앙기구에서 ‘적극적 방법’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4월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조프의 구두지시에 근거했다.
이후 체포자 구타는 합법화되어 전국적으로 퍼졌다.
예조프 자신도 자신이 참여한 심문에서 자주 폭력을 사용했다.
그런 심문 가운데 하나, 전 쿠이비셰프주·보로네시주 당위원회 서기 A. A. 레빈과 M. E. 미하일로프의 대질심문,는 B. V. 로도스가 훗날 묘사했다.
예조프와 부인민위원 프리놉스키가 거의 열 명의 NKVD 지도간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심문했다.
“대질심문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프리놉스키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체포된 레빈과 미하일로프는 책상 앞의 깊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예조프는 소파에 옆으로 누워 있었는데, 당시 나는 그 모습에 놀랐다.
다른 NKVD 지도간부들은 서 있었고, 일부는 의자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출입문 곁에 서 있었다.
예조프와 프리놉스키가 체포자들에게 질문했다.
대질심문 도중 예조프는 소파에서 일어나 미하일로프에게 빠르게 다가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여러 차례 때렸다.
그 뒤 프리놉스키와 참석한 NKVD 지도간부 가운데 한 명이 미하일로프에게 달려들어 손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사무실은 혼란스러워졌다.
안락의자에서 일어난 미하일로프를 이쪽저쪽으로 밀쳤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나까지 맞을까 두려워 복도로 나갔다.”[209]
M. P. 프리놉스키는 예조프가 과거의 친구 L. E. 마리야신을 심문한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예조프와 마리야신은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에서 함께 일했다.
“예조프는 마리야신 사건 수사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직접 수사를 지휘했고 여러 차례 심문에 참석했다.
마리야신은 내내 레포르토보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잔혹하게 구타당했다.
다른 체포자는 자백할 때까지만 구타했지만, 마리야신은 수사가 끝나고 더 이상 진술을 받지 않을 때에도 맞았다.
어느 날 예조프와 함께 심문실을 돌아보던 중, 당시 예조프는 술을 마신 상태였다, 우리는 마리야신의 심문실에 들어갔다.
예조프는 마리야신이 아직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특히 일반적인 테러와 자신, 예조프,을 대상으로 한 테러행위를 암시했다.
이어서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릴 것이다’라고 선언했다.”[210]
예조프의 이런 행동은 프리놉스키가 알지 못한 사정 때문에 발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조프에게 일정한 가학적 성향이 있었다는 점은 의심하기 어렵다.
원했다면 그는 ‘더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그 일을 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보여준다.
18. 전광석화 같은 공격
1936년 9월 10일 소련 검찰이 부하린과 리코프에 대한 수사를 종결한다는 결정을 발표한 뒤, 언론에서 우익파를 공격하는 글은 사라졌다.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한 듯한 인상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모든 일이 평온하지 않으며, 국가기구 깊숙한 곳에서는 외부의 눈에 띄지 않게 체제의 적들에게 새로운 공격을 가하기 위한 긴장된 준비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첫 신호가 나타났다.
1936년 11월 29일 열린 제8차 임시 소비에트대회에서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인 V. M. 몰로토프가 한 발언이었다.
새 헌법초안을 다룬 연설에서 몰로토프는 당과 인민의 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언급하다 갑자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들에게는 우익 이탈분자 가운데에도 장단을 맞춰주고 돕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혁명의 쓰레기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고 있다.”[211]
실제로 소련 검찰이 부하린과 리코프를 사실상 혐의에서 벗어나게 한 결정을 내렸음에도, 이들을 불리하게 만들 자료를 찾는 작업은 단 하루도 중단되지 않았다.
예조프는 1936년 가을 내내 바로 이 일에 몰두했다. 물론 자신의 다른 관리대상인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 차원에서 이 업무를 수행했고, 이후에는 내무인민위원의 자격으로 계속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조작된 혐의로 여러 교도소와 유형지에 흩어져 있던 전 우익반대파 참가자들을 모스크바로 데려와, 이들이 반혁명활동에 참여했다는 진술을 ‘짜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짜내다’라는 표현은 다소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1937년식 수사방법이 예외적으로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수사관들은 피의자들의 어떤 항변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밤낮으로 우익파의 반혁명활동, 특히 테러활동에 관한 정보를 요구했다.
이런 진술은 우익반대파를 최종적으로 분쇄하는 데 필요하다고 이들을 설득했다.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중앙 재판이 보여주었듯이 어떤 반대파 집단도 조만간 테러의 길로 굴러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수사관들은 체포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여전히 자신을 공산당원이라고 생각한다면, 당 지도자들을 향한 암살의 위험을 막기 위해 남아 있는 반대파 집단을 제거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실제로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대의를 위해 자백해야 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두려워할 것도 없다고 수사관들은 주장했다.
당과 프롤레타리아 법정은 최근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중앙 재판에 넘겨진 자들과 같은 진짜 적들만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수사에 중요한 진술을 해야 할 수감자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허위로 고발하는 행위가 정말 당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의심하면, 중앙위원회 서기이자 당통제위원장인 예조프가 직접 필요한 보증을 해주기도 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체포자 가운데 이 단계에서 이미 저항이 무너지는 사람 열 명이나 스무 명 정도는 언제나 골라낼 수 있었다.
이들이 가장 좋은 증인이었다.
나중에 강요 때문에 거짓진술을 했다는 이유로 자기 말을 철회하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설득당해서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 자신의 거짓말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게 되었고, 더 이상 진술을 철회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계속 완강히 저항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할 경우 다른 영향수단을 사용할 수 있었다.
1930년에 분쇄된 이른바 ‘좌우 블록’의 참가자 L. A. 샤츠킨은 1936년 10월 말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방법 가운데 일부를 묘사했다.
“나의 주임수사관 겐딘은 내가 테러를 자백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네 쪽 분량으로 작성했습니다.
그 자백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면 다음과 같은 일을 당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재판 없이 총살하거나, 수사관의 집무실에서 열리는 군사합의부의 15분짜리 형식적 절차를 거쳐 총살한다. 그 자리에서는 내가 ‘예’와 ‘아니요’로만 대답할 수 있다.
부티르카교도소의 일반범죄자 감방에서 조직적으로 구타당하게 한다.
고문을 적용한다.
어머니와 누이를 콜리마지방으로 유형 보낸다.
두 차례 밤새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서명할 때까지’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밤에 열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심문하면서 수사관이 ‘일어나! 안경 벗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내 얼굴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일어나! 펜을 들어! 서명해!’라고 소리쳤습니다.”[212]
샤츠킨은 다음과 같은 말도 들었다.
“우리는 당신이 테러를 자백하게 만들 것이다.
반박은 저세상에 가서 해라.”[213]
여러 방법을 사용한 결과, 1936년 12월 초가 되자 예조프는 스탈린이 보기에 우익파와 그 지도자들의 문제를 당 동지들의 심판, 즉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넘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진술을 확보했다.
전원회의는 1936년 12월 4일 개막했다.
첫 번째 의제는 「소련 헌법 최종안의 검토」였다.
참석자들은 이 문제를 빠르게 처리하고 같은 날 전원회의가 주로 소집된 이유인 두 번째 의제로 넘어갔다.
예조프는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조직과 우익조직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했다.
그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통합중앙’ 재판 이후의 기간에, 당시 공개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조직의 예비중앙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정보가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트로츠키파에서는 Yu. L. 퍄타코프, K. B. 라데크, L. P. 세레브랴코프가, 지노비예프파에서는 G. Ya. 소콜니코프가 이 중앙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이들의 주요 파괴활동을 설명한 뒤, 보고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전 우익반대파 인사들의 반소비에트활동에 관해 중앙위원들에게 알렸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들에게도 부하린·리코프·톰스키가 이끄는 독자적인 반혁명중앙이 있었다.
이들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의 테러준비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 지도부와의 투쟁에서 개인테러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예조프는 그 근거로 전 트로츠키주의 반대파 참가자 L. S. 소스놉스키의 진술 등을 인용했다.
소스놉스키는 최근까지 부하린이 이끌던 『이즈베스티야』에서 일했으며,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중앙’ 재판이 끝난 뒤 해고된 인물이었다.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데 『이즈베스티야』에는 이런 쓰레기가 넘칠 만큼 많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가운데 열 명쯤은 체포한 것 같습니다.”[214]
예조프의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전 우익반대파 지도자들은 권력투쟁의 수단인 테러에 이론적인 호감을 보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신들의 동조자들 사이에 당 지도자 암살을 준비하는 전투집단을 만들도록 장려했다는 것이다.
예조프의 보고를 듣던 부하린은 아마 자신이 이 사람을 얼마나 잘못 판단했는지를 여러 차례 놀라워했을 것이다.
과거 두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부하린의 아내 A. M. 라리나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부하린은 예조프가 물론 교양이 부족하고, 모든 기구관료가 그렇듯 스탈린에게 아첨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정직한 사람이고 당에 진심으로 헌신하며 선한 마음과 깨끗한 양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다.[215]
라리나는 부하린과 예조프가 개인적으로 만나는 모습을 두어 차례 목격했다.
“두 번 모두 나는 부하린과 함께 크렘린을 걷고 있었다.
예조프는 멀리서 부하린을 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회청색 눈은 정말로 선량해 보였고, 얼굴에는 썩은 이빨들이 드러나는 넓은 미소가 번졌다.
‘잘 지내나, 동명이인? 어떻게 사나?’
그는 부하린의 손을 힘껏 잡으며 인사했다.
두 사람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216]
1936년 2월 스탈린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문서보관소를 구입하기 위해 부하린을 해외에 보냈다.
4월 초 부하린은 파리에서 모스크바의 예조프에게 전화했다.
당시 임신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던 아내가 그리우니 파리로 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예조프는 해외출장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었으며, 이를 처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뒤 그는 라리나에게 전화했다.
“외무인민위원부에 가서 파리행 비자를 준비하시오.
사랑에 빠진 당신 남편이 외로워서 젊은 아내 없이는 살 수 없는 모양이오.”[217]
라리나는 그 저속한 말투가 자신들과의 기존 관계에 어울리지 않아 불쾌하게 놀랐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예조프는 파리행 허가가 났다는 소식을 우호적인 태도로 전하는 듯했다.
1936년 9월 말 야고다를 대신해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도 부하린은 이 소식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
예조프는 사건을 조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부하린 앞에는 그가 전혀 알지 못했던 예조프가 서 있었다.
예조프가 보고하는 내용은 부하린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라리나의 증언이 맞다면, 어느 순간 부하린은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입 다물어!”[218]
물론 그것으로 예조프를 멈출 수는 없었다.
예조프의 보고가 끝난 뒤 L. M. 카가노비치와 V. M. 몰로토프가 토론에 나서, 예조프의 혐의에 추가적인 세부사항과 자신의 해석을 보탰다.
부하린과 리코프에게도 발언권이 주어졌다.
자신들을 향해 쏟아진 날조에 충격을 받았고, 자신들을 고발한 진술서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두 사람은 기억나는 사례를 들어 몇 가지 혐의를 반박하려 했다.
부하린은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마지막 숨결”에 걸고 예조프의 보고에는 진실이 한마디도 없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자신을 중상한 사람들과 대질심문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날은 금요일이었다.
전원회의의 다음 회의는 12월 7일 월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예조프는 토요일과 일요일 내내 대질심문에 내보낼 피의자들을 준비했다.
스탈린은 부하린의 발언에 끼어들면서 그를 고발하는 진술이 1천 건이나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혐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시간 안에 제대로 손질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부하린을 고발할 사람 세 명을 내세우기로 했다.
첫 번째는 전 우익반대파 참가자 E. F. 쿨리코프였다.
그는 1929년 부하린과 관계를 끊었고, 그 뒤에는 1931년 길거리에서 우연히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두 번째는 앞에서 언급한 L. S. 소스놉스키였다.
세 번째는 이른바 ‘예비, 또는 병행 트로츠키주의 중앙’의 주역인 Yu. L. 퍄타코프였다.
세 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증인은 쿨리코프였다.
마지막 날인 12월 6일에야 수사관들은 그에게서 1931년 부하린을 만났을 때 스탈린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자백’을 얻어냈다.
부하린도 다음 전원회의를 준비했다.
그는 기억에 의존해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를 정리한 뒤 논리적인 반박문을 작성했다.
이를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전원에게 배포하고 전원회의 속기록에도 포함시켜달라고 요청했다.
12월 7일 낮, 정치국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하린과 리코프가 쿨리코프·소스놉스키·퍄타코프와 대질심문을 했다.
먼저 쿨리코프가 들어왔다.
그는 1931년 봄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부하린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제거해야 한다.”[219]
그러나 이후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으므로 이 정보는 다소 낡은 것이었다.
두 번째 증인 L. S. 소스놉스키는 K. B. 라데크에게서 부하린이 반혁명조직의 활동에 참가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또 1934년 유형에서 돌아온 뒤 부하린이 자신을 『이즈베스티야』 편집부에 취업시키고 여러 방식으로 지원했다고 말했다.
특히 자신이 쓰는 기사에 가능하면 스탈린의 이름을 넣으라고 권했다고 했다.
소스놉스키는 말했다.
“이 모든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 그는 내가 존경을 얻고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 했다.
이것이 당의 신임을 거짓되고 인위적인 외교술로 얻은 뒤, 뒤에서는 다른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220]
마지막으로 심문받은 Yu. L. 퍄타코프는 1932년 베를린에서 트로츠키에게 받았다는 지령에 관해 부하린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당 지도부를 향한 테러전술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령이었다.
부하린이 특별히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퍄타코프는 당시 그가 이미 다른 경로로 이를 알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퍄타코프는 부하린과 반혁명조직의 문제를 논의한 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완전한 실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결과였다.
같은 날 저녁 대질심문 결과를 전원회의에 보고한 스탈린은 제기된 혐의를 추가로 확인해야 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피의자들의 진술 가운데 부하린과 리코프가 특정한 테러집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스탈린은 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어떻게든 덮기 위해, 부하린을 고발한 다른 체포자 대여섯 명과 다시 대질심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 세 사람은 비교적 덜 중상한 사람들이었다.”[221]
이 말을 들은 참석자들은 더 심각한 증인이 있다면서 왜 ‘덜 중상한’ 사람들과 먼저 대질심문을 했는지 의아해했다.
스탈린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근 발생한 사건들과 관련하여 부하린과 리코프를 신뢰할 수 없으므로, 이들을 중앙위원회에서 축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형성되었다.
이 조치가 불충분할 수도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엄격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정치국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리코프와 부하린의 문제는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추가적인 검증과 대질심문을 계속하고, 이 사건의 결정은 다음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까지 연기한다.”[222]
12월 전원회의는 부하린과 리코프의 문제를 전광석화처럼 기습하여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예조프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다만 아직 자신들에게 제안된 절차에 참가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고, 맡은 역할에도 익숙하지 않은 피의자들을 더 오랫동안 세심하게 다뤄야 했다.
그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에는 예비중앙, 또는 병행 트로츠키주의 중앙의 재판을 준비하는 일을 계속해야 했다.
19. ‘병행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앙’ 사건
앞서 이야기했듯 예조프는 1936년 9월 6일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K. B. 라데크와 Yu. L. 퍄타코프의 운명을 논하며, 새 공개재판을 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간소화된 비공개 재판으로 문제를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재판에서 저지른 실수를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했다.
전 반대파 인사들이 정치적 암살까지 마다하지 않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상당수 시민에게 동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현실적 생활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스탈린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따라서 막 끝난 재판이 국내에서 만들어낸 선전효과는 기대보다 훨씬 작을 수 있었다.
재판이 끝난 지 두 주가 지난 1936년 9월 6일, 소치에서 휴양 중이던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프라우다』는 지노비예프파와 트로츠키파 재판에 관한 기사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이 악당들이 타락해가는 과정, 그들의 사회·정치적 본질과 진정한 강령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하는 기사를 단 한 편도 내놓지 못했다.
『프라우다』는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했다.
권력을 장악하려는 악한 사람이 있고, 권력을 가진 선한 사람이 있다는 식의 보잘것없는 뒤범벅을 독자에게 먹였다.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야 했다.
스탈린·보로실로프·몰로토프·즈다노프·코시오르 등에 맞선 투쟁은 소비에트에 맞선 투쟁이고, 집단화와 공업화에 맞선 투쟁이다.
즉 도시와 농촌에서 자본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투쟁이다.
스탈린과 다른 지도자들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이들은 소련 사회주의의 모든 승리, 집단화와 공업화, 소련 문화발전의 구현자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를 분쇄하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달성하려는 노동자·농민·근로 지식인의 노력을 구현한다.”[223]
새로운 재판을 열면 이런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특히 퍄타코프와 소콜니코프가 경제 관련 인민위원부에서 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재판의 주요주제를 이른바 파괴공작으로 삼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반대자들이 스탈린 자신과 측근들을 살해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공업시설에서 파괴공작을 벌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무 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국가에 보여주어야 했다.
모든 소비에트 시민은 체제의 적이 곧 자기 자신의 적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했다.
또 급속한 공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고와 재난이 실제로는 현 정권의 반대자들이 벌인 파괴활동의 결과였다는 점도 이해해야 했다.
그러한 사고 가운데 하나가 1936년 9월 23일 쿠즈바스의 ‘첸트랄나야’ 탄광에서 일어났다.
메탄가스 폭발로 노동자 열 명이 사망하고 열네 명이 중상을 입었다.
Yu. L. 퍄타코프는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석탄산업의 상황을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고를 공개하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파괴공작 사례로 묘사하기로 했다.
새 공개재판의 준비를 시작한다는 결정은 스탈린이 1936년 10월 초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는 10월 8일 『프라우다』에 「끝까지 굴러떨어졌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설이었다.
“과거 부르주아지는 우리의 공업과 농업에서 파괴공작을 벌이고, 사회주의 경제와 근로자들의 복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자기 패거리를 따로 만들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공산당원이라 불렀던 타락자들이 이런 비열한 일까지 맡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최근 트로츠키·지노비예프 패거리의 재판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오만하게 태연한 얼굴로 키로프 살해를 조직하고 재촉한 사람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확인했다.
이제 사실 앞에 몰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비에트 공업, 운수와 콜호스 건설에서 파괴활동을 벌이기 위해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있다.
그 목적은 우리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공장과 탄광, 철도와 건설현장, 농업에서 이루어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반혁명적 파괴공작은 이제 입증되었고, 가장 저명한 트로츠키주의자 여러 명도 이를 인정했다.”
- 공장에서 일하던 이른바 ‘구인간’ 출신 기술자들이 볼셰비키의 집권으로 재산을 빼앗긴 과거 소유주의 지령에 따라 파괴공작과 사보타주를 벌였다는 주장을 말한다. 이러한 ‘범죄’를 폭로하기 위해 샤흐티 재판, 1928년,과 산업당 재판, 1930년,이 열렸다.
사설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저명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악당들은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기들의 제국주의·파시스트 주인을 찬양하며 소련에서 간첩과 파괴공작원의 임무를 수행했다.
소련의 패배를 바라는 입장에 선 트로츠키주의 간첩·파괴공작망은 다가올 우리나라와의 전쟁에서 제국주의·파시스트 군대가 승리하도록 돕기 위해 이미 소련 근로자들의 무덤을 파고 있었다.”
익명의 사설 작성자는 마지막에 물었다.
“트로츠키주의 악당의 무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자비를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스스로 답했다.
“우리나라 근로자와 전 세계 소련의 친구들이 내릴 수 있는 답은 단 하나다.
혁명적 응징이다.”
『프라우다』가 진술을 인용한 ‘가장 저명한 트로츠키주의자’는 우선 과거 트로츠키주의 반대파 참가자 A. A. 셰스토프와 Ya. N. 드로브니스였다.
셰스토프는 케메로보주의 살라이르 아연광산 소장이었고, 드로브니스는 케메로보 ‘힘콤비나트스트로이’ 부소장이었다.
서시베리아변경 NKVD국은 두 사람을 각각 1936년 7월 말과 8월 초에 체포했다.
9월 말까지 이들에게서 받아낸 자백은 이미 체포되어 있던 Yu. L. 퍄타코프에게 직접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진술을 ‘첸트랄나야’ 탄광의 실제 폭발사고와 연결하면, 트로츠키주의 파괴공작원들의 공개재판을 열기 위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다.
수사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반혁명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당 지도자들을 향한 테러준비와 함께, 스탈린 지도부의 사회주의 공업화정책을 불신하게 만들기 위해 전국의 공업기업에서 파괴공작을 벌이는 것을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퍄타코프에게서 받고 트로츠키와 합의했다는 지시에 따라 쿠즈네츠크분지의 중공업기업들에서 생산을 혼란에 빠뜨릴 구체적인 계획도 만들어졌다고 했다.
계획에는 케메로보 발전소에서 파괴공작을 벌여 여러 탄광을 침수시키는 일, 케메로보 코크스화학공장의 작업을 방해하여 우랄의 야금공업을 타격하는 일, 최신 특수화학공장의 가동을 지연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퍄타코프는 공범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했다.
“우리가 권력을 잡으면 공업은 바로잡을 수 있고 빠르게 바로잡을 것이다.
지금은 투쟁 중이므로 모든 수단이 좋은 수단이다.”[224]
수사가 발견한 이 ‘좋은 수단’에는 외국기업 대표로 위장하여 쿠즈바스 공장에서 활동하며 간첩·파괴공작을 벌였다는 독일 정보요원들과의 협력도 포함되었다.
트로츠키의 아들 레프 세도프가 독일에서 보냈다는 지시에 따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독일요원들에게 쿠즈바스 공업의 현황과 발전계획을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함께 파괴공작의 대상도 선정했다고 했다.
1936년 9월 23일 이전에 받아낸 진술에는 당연히 ‘첸트랄나야’ 탄광이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이 누락은 수정되었다.
셰스토프의 진술에 따르면 바로 이 탄광에 “트로츠키주의 조직 참가자들의 가장 강력한 핵심”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파괴공작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밝혀졌다.’
서시베리아변경 NKVD국이 수사하던 ‘첸트랄나야’ 탄광 폭발사건은 독립된 사건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수사가 끝난 뒤 모스크바의 대형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의 하나로 별도의 재판을 열기 위해서였다.
이 방법은 구체적인 기업을 사례로 삼아 트로츠키주의 파괴공작의 ‘작동방식’을 깊고 광범위하게 보여주는 한편, 이후의 모스크바 재판을 사소한 기술적 세부사항으로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케메로보광산 반혁명 트로츠키주의 파괴공작집단’의 공개재판은 1936년 11월 19일부터 22일까지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열렸다.
셰스토프와 드로브니스는 법정에서 예비수사 당시의 진술을 확인하고, 쿠즈바스에서 파괴공작을 조직한 퍄타코프의 지도적 역할을 주장했다.
재판속기록의 일부는 『프라우다』에 실렸다.
그 결과 소련 시민과 국제사회는 과거의 저명한 반대파 인물인 퍄타코프가 피고석에 서는 광경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재판 결과 여섯 명이 총살형을, 세 명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셰스토프와 드로브니스의 사건은 별도의 수사로 분리되었으므로, 두 사람은 이 재판에는 증인으로만 출석했다.
재판이 끝난 뒤 이들은 다른 서시베리아 트로츠키주의 피의자 몇 명과 함께 수도로 옮겨져 새 모스크바 재판을 준비하던 NKVD 중앙기구 수사관들의 관리 아래 들어갔다.
1936년 11월 말 현재 G. Ya. 소콜니코프와 서시베리아 트로츠키주의자 외에도 Yu. L. 퍄타코프에게서 자백을 받아낸 상태였다.
퍄타코프는 10월 중순 수사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중공업인민위원부 중앙기구의 부하직원 몇 명과, 그 인민위원부 체계에 속하는 여러 기업의 지도자들도 자백했다.
이들을 향한 혐의의 전체적인 구조는 11월 말 노보시비르스크 재판에서 이미 그려졌다.
또 앞 장에서 말했듯 12월 초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예조프도 이 주제를 다루며, 자신의 인민위원부가 새로 얻은 ‘사실’을 참석자들에게 소개했다.
‘음모자’들이 방위산업과 화학공업에서 벌인 파괴활동을 설명하면서, 예조프는 케메로보 ‘힘콤비나트스트로이’ 소장 B. O. 노르킨의 진술을 언급했다.
노르킨은 어느 심문에서 퍄타코프에게서 파괴공작에 관한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파괴공작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아끼지 말라는 요구도 받았다고 했다.
퍄타코프는 노동자들이 단순히 “양 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 이후 노르킨은 법정에서 사실상 이 ‘자백’을 철회했다.
예조프는 이때 냉정한 보고말투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다.
“보십시오.
이 파시스트의 앞잡이, 공산당원 가운데서 나온 이 타락자의 악의가 어디까지 이르렀습니까.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합니까!
이 쓰레기들을 목 졸라 죽여야 합니다.
차분하게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225]
청중이 한때 술자리에서 자신을 핀으로 찔렀던 인물의 도덕적 면모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도록, 예조프는 노르킨의 진술을 놓고 자신과 퍄타코프 사이에 있었다는 대화를 소개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노동자들을 정말 그런 태도로 대했는가?
그자는 웃었다.
‘그렇소. 아마 그들을 북돋우려고 그와 비슷한 말을 했을 것이오.
어쩌면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정확하지 않게 전달했을 수도 있소.’”[226]
예상대로 회의장은 분노의 고함으로 폭발했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피고인들에게 씌운 범죄계획에는 세부사항이 점점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이미 알려진 ‘사실’을 구체화하는 데 그쳤다.
새롭고 인상적인 진술이 없는 상태에서 수사는 점차 같은 자리만 맴돌기 시작했다.
같은 증언의 폐쇄된 원에서 벗어날 돌파구가 필요했다.
1936년 12월 4일 마침내 그 돌파구가 나타났다.
그날 K. B. 라데크가 입을 열었다.
예조프의 부하들은 1936년 9월 체포된 라데크를 두 달 반 넘게 설득했다.
소콜니코프와 이후 퍄타코프, 그보다 앞서는 카메네프에게서 받아낸 진술을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전 반대파 인사들의 반혁명조직에서 예비중앙을 이끈 활동에 라데크도 참가했다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그들의 인내가 보상을 받았다.
예조프에게서 자신의 이후 운명에 관한 어떤 보증을 받은 듯한 라데크는 오랜 침묵을 깨뜨렸다.
12월 4일과 그 뒤 며칠 동안 받아낸 그의 진술은 수사를 즉시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라데크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테러계획을 자백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는 이미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음모자’ 활동의 대외정책적 측면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고, 이 부분이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하게 말하면 라데크가 이 주제의 최초 발견자는 아니었다.
소콜니코프도 그보다 앞서 진술에서 국제문제를 언급했다.
1936년 10월 20일 심문에서 그는 1934년 영국기자 S. 탤벗과 대화할 때 다음과 같은 반대파의 계획을 이야기했다고 진술했다.
권력을 잡으면 영국공업에 대규모 주문을 제공하고, 영국의 이권사업이 소련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할 기회를 보장한다.
혁명 이전 러시아의 채무를 인정하고 코민테른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것이었다.[227]
그러나 라데크의 대외정책 이야기는 훨씬 더 유용했다.
첫째, 비록 소련에 적대적이지만 존중받는 영국과의 접촉이 아니라 파시스트 독일과의 접촉을 다루었다.
둘째, 스탈린의 최대 적인 트로츠키를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라데크는 트로츠키가 독일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뒤,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이 권력을 잡으면 독일에 중대한 양보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렸다고 진술했다.
독일상품의 소련 수출에 특혜조건을 제공하고, 독일로 수출하는 소련상품의 가격을 낮추며, 독일자본이 소련의 천연자원을 개발하도록 허용하고, 일부 영토도 양보한다는 것이었다.[228]
라데크의 말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독일과 소련의 전쟁에 큰 기대를 걸었다.
“트로츠키주의 지휘관들은 개별 전투의 패배를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정책이 잘못되었고, 전쟁 자체가 무의미하고 파멸적이라는 증거로 이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실패와 적군 병사들의 피로를 이용하여 전선을 버리고 정부를 향해 무기를 돌리라고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러면 독일군은 병력이 사라진 지역을 전투 없이 점령하고, 전선 전체를 붕괴시킬 실질적인 위협을 만들 수 있었다.”[229]
이런 상황에서 음모자들은 트로츠키주의 지휘관들이 이끄는 부대에 의지하여 권력을 장악할 현실적인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었다.
라데크의 ‘자백’은 다가오는 재판이 노보시비르스크 재판의 단순한 반복으로 끝나지 않게 만드는 데 부족했던 연결고리였다.
이제 준비 중인 무대에 필요한 규모와 긴장감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이후 소콜니코프와 퍄타코프, 라데크 자신의 진술에서 대외정책 문제가 발전한 방식을 보면, 스탈린은 이 방향의 가능성을 즉시 파악하고 예조프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지시한 듯하다.
예조프는 노력했다.
3주도 지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반혁명조직의 지도자들이 수사관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과, 특히 트로츠키에게 씌운 방대하고 반역적인 범죄계획의 목록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소콜니코프는 1936년 12월 12일 진술에서 트로츠키가 1933년 일본정부 관계자들과 접촉한 뒤, 소련이 군사적으로 패배하면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기대하며 일본을 소련과의 전쟁으로 부추겼다고 말했다.
특히 중국동부철도 문제를 둘러싼 소련당국과의 협상을 결렬시키고, 철도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크렘린 지도부에 기정사실을 들이밀라고 일본 측에 권했다는 것이다.
소련 지도부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어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면 국내외에서 권위가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행동에 무력으로 대응하면 소련이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필연적으로 패배하고, 그 역시 반대파에 유리하리라는 것이었다.*
- 중국동부철도, 러시아어 약칭 KVZhD. 원문에 따르면 1935년까지 소련과 일본의 공동관리 아래 있었고, 이후 소련 측 철도구간을 일본에 매각했다.
소콜니코프는 이어 1935년 트로츠키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 지도부에 다음과 같이 알렸다고 진술했다.
독일의 군사력이 성장하면 머지않아 소련을 공격할 수 있으므로 독일 지도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소련과 전쟁이 일어나면 트로츠키는 독일 측에 블록이 가진 모든 수단을 이용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공업분야의 파괴공작과 전선에 있는 트로츠키주의 지휘관의 직접적인 배신이었다.
독일과 일본을 더 강하게 끌어들이기 위해 트로츠키는 영토도 양보하기로 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극동지역을, 독일에는 우크라이나를 양도한다는 계획이었다.[230]
퍄타코프도 1936년 12월 19일부터 20일까지의 진술에서 트로츠키와 독일당국의 협력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1935년 12월 업무출장으로 베를린에 머물 때, 노르웨이에 살던 트로츠키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로 갔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그 대화에서 나치당의 히틀러 부관 R. 헤스와 만났으며,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이 권력을 차지하도록 독일이 지원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트로츠키는 새 지도부가 독일정부에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국제정치의 핵심문제에서 독일과 협력하겠다고 보장했다.
또 영토를 양보하는 데 동의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이 요구할 경우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분리되는 데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독일경제에 중요한 소련의 철광석·망간·석유·금·목재 등의 자원을 개발하도록, 이권사업이나 다른 형태로 독일자본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231]
트로츠키가 과거의 조국을 팔아넘긴다는 이야기는 1936년 12월 22일 라데크의 진술에서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퍄타코프와 트로츠키가 노르웨이에서 만났다고 주장된 이유는, 트로츠키가 전날 보낸 편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혀졌다.’
그 편지에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의 대외활동에 관한 새로운 방침이 담겨 있었다.
라데크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권력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를 위해 소련정부 지도자들을 향한 테러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썼다.
독일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독일이 소련의 광물자원 개발에 참여하도록 허용하고, 세계시장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식량과 지방을 공급하겠다고 보장해야 했다.
일본에는 사할린의 석유를 양도하고, 미국과 전쟁할 때 추가 석유를 공급하며, 소련의 금광도 개발하도록 허용해야 했다.
독일이 다뉴브강 유역국가와 발칸국가들을 장악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고, 일본의 중국점령도 막지 말아야 했다.
전쟁 전까지 권력을 잡지 못할 경우에는 소련의 군사적 패배를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라데크가 전한 트로츠키는 생각했다.
전쟁 전과 전쟁 중의 적극적인 파괴공작은 소련의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블록의 실제 힘을 보여주어 전후 독일과의 협상을 쉽게 만들어야 했다.
전쟁에서 소련이 패배한 결과 음모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평화로운 시기의 양보만으로는 부족할 터였다.
독일이 원하는 공업기업을 넘겨주고, 장기간 독일상품을 구입할 의무를 받아들이며, 추가로 영토까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직업혁명가 트로츠키에게 씌운 계획이 지나치게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도록, 라데크는 트로츠키가 이런 패배주의적 구상을 만들 때 사용했다는 논리도 덧붙였다.
독일과 일본이 소련을 희생시키면서 강해지면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전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 전쟁의 결과로 세계에 새로운 혁명정세가 형성될 것이므로 다시 반격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라데크가 1935년 말 받았다고 주장한 바로 이 편지 때문에 퍄타코프는 가능한 첫 기회에 트로츠키를 찾아가 협의하기로 했다고 한다.
라데크는 퍄타코프와 트로츠키의 만남에 관한 퍄타코프의 진술을 확인하고, 퍄타코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자신에게 전했다는 새로운 세부사항을 덧붙였다.
트로츠키는 독일과 소련이 전쟁을 벌일 때, 전선에 있는 트로츠키주의 지휘관들이 독일군 총참모부의 직접지시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전쟁 뒤 새 정부는 상품과 독일이 필요로 하는 공업기업의 소유권으로 독일의 전쟁비용 일부를 배상한다고 했다.
한편 트로츠키는 독일과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피하려고 영국과 프랑스와도 동시에 협상했다고 한다.
독일·영국·프랑스 대표들과 만난 결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집권하면 영국과 프랑스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협정안이 작성되었고 독일도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프랑스에는 혁명 이전 러시아의 채무를 돌려받으려는 요구와 돈바스 야금공업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에는 캅카스지역에서 영국의 이익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트로츠키에게 씌운 구상에 따르면 전쟁 뒤 소련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와 같은 사회·경제체제를 세워야 했고, 코민테른도 당연히 해산해야 했다.[232]
라데크는 트로츠키를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묘사하여 지도자의 요구를 충족한 뒤, 과거의 사상적 스승이 세웠다는 범죄계획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려고 했다.
소콜니코프와 퍄타코프도 함께 보호하려 했다.
이들은 트로츠키의 방침을 알게 된 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역의 동조자들과 상의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 정책 때문에 목숨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남겨둘 수 없었다.
우리는 1936년 2월 말 회의를 열기로 했다.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 열지 못했다.
3월에는 체포와 조직의 붕괴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사건의 결과를 결정했다.
회의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233]
라데크의 이 계책은 다가오는 재판의 주요피고인을 조금이나마 희게 만들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의 진술을 더 그럴듯하게 보이게 했다.
무엇보다 수사기관이 라데크와 공범들을 극악한 반혁명분자로 묘사하려 했는데도, 그런 사람들조차 트로츠키의 계획에는 경악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이 이야기가 최종 각본에 들어가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라데크·소콜니코프·퍄타코프의 상세하고 논리적인 진술로 예비 트로츠키주의 중앙의 ‘범죄활동’은 필요한 수준의 논리적 완결성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몇 군데 붓질만 더하면 완성된 그림을 주문자에게 넘길 수 있었다.
퍄타코프가 다가올 재판의 주역이 되어야 했으므로, 예조프의 부하들이 체포자들에게서 얻으려 한 파괴공작 진술은 주로 중공업인민위원부 소속 기업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적들이 국민경제의 대단히 중요한 한 부문에서만 활동할 수는 없었다.
불균형이 명백해지자 트로츠키 추종자들의 파괴공작 영역을 넓히기로 했고, 자연스럽게 철도운수가 선택되었다.
철도는 전략적 중요성에서 중공업인민위원부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또 여러 종류의 사고가 매일 일어났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고든 고의적인 사건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1936년 11월 중순 전 트로츠키주의자인 철도 부인민위원 Ya. A. 리프시츠를 비롯한 철도관계자 몇 명이 체포되었다.
한 달 뒤 피의자 가운데 철도인민위원부 중앙운행국 부국장 I. A. 크냐제프가 상세한 진술을 했다.
리프시츠의 지시로 철도에서 파괴공작을 조직했으며, 일본정보기관의 어느 요원에게서 전쟁 중 세균무기를 이용해 군용열차와 부대의 급식·위생처리시설을 감염시키라는 임무도 받았다는 것이었다.
1937년 1월 초에는 리프시츠 자신이 입을 열었다.
며칠 뒤에는 스베르들롭스크철도 부국장 I. D. 투로크도 진술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개정치재판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조건은 마련되었다.
이제 시작할 때였다.
재판은 1937년 1월 23일 개정했다.
첫 이틀 동안은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퍄타코프는 1월 23일 저녁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935년 12월 업무출장으로 베를린에 갔을 때, 독일당국과 긴밀히 연결된 트로츠키의 신임자가 트로츠키를 만나도록 오슬로행 비행을 조직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대화에서 트로츠키는 자신이 나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들의 지원과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어떤 봉사를 할 계획인지 이야기했다고 한다.
카를 라데크는 1월 24일 법정에서 이 만남을 어떻게 계획했는지를 설명하고, 퍄타코프와 트로츠키가 나눴다는 대화의 세부사항을 덧붙였다.
다음 날 아침 증인으로 신문받은 전 독일 주재 『이즈베스티야』 특파원 D. P. 부하르체프도 이 만남을 준비하는 데 참여했다며 퍄타코프의 노르웨이행 비행을 확인했다.
하지만 부하르체프가 진술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이 이야기 전체를 둘러싼 추문이 발생하여 재판 조직자들을 몹시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날 노르웨이 언론에는 오슬로 헬레르공항장 G. 울릭센의 발표가 실렸다.
1935년 12월에는 외국항공기가 공항에 한 대도 착륙하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착륙한 노르웨이 항공기에도 승객은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이전 재판의 ‘브리스톨’ 호텔 사건보다 훨씬 심각한 실수였다.
그때는 재판이 끝난 뒤에야 문제가 드러났고, 한 사람 E. S. 골츠만의 실수라고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인 때였다.
게다가 피고인 세 명이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을 이미 언급했다.
노르웨이 언론의 폭로는 주요 외국언론에 모두 보도되었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1월 27일 피고인과 증인의 신문을 끝낸 뒤 비신스키는 퍄타코프에게 추가질문이 있다고 말했다.
퍄타코프가 트로츠키를 만났다는 진술의 신뢰성을 확인하고 싶다고 밝힌 뒤, 노르웨이행 비행과 오슬로공항에 착륙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달라고 했다.
퍄타코프는 이를 확인했다.
그러자 비신스키는 외무인민위원부 영사국에서 받은 증명서를 사건기록에 포함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노르웨이 주재 소련 전권대표부가 제공했다는 증명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슬로 인근 헬레르공항은 국제규정에 따라 연중 외국항공기를 받아들인다.”
“항공기의 도착과 출발은 겨울철에도 가능하다.”[234]
물론 이 논거는 몹시 초라해 보였다.
더구나 1937년 1월 29일 울릭센은 정부기관지 『아르베이데르블라데트』와의 인터뷰에서, 외국항공기가 1935년 12월뿐 아니라 1935년 9월 19일부터 1936년 5월 1일까지 단 한 대도 헬레르공항에 착륙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스탈린의 최대 적인 트로츠키는 퍄타코프의 허구적인 비행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조롱했다.
“번번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스탈린의 사법부가 국외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언급할 때마다, 그들에게는 절망적인 실패로 끝난다.”[235]
트로츠키에 대한 혐의뿐 아니라 전체 재판을 의심받게 만든 이 실패에 예조프는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을까?
1950년대 초 서방에서 출간된 『스탈린 범죄의 비사』에서 스페인 주재 전 NKVD 책임자 A. M. 오를로프는, NKVD 국가보안총국 해외부장 A. A. 슬루츠키에게서 이 사건의 세부사항을 들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퍄타코프와 트로츠키가 노르웨이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는 스탈린 자신이 체키스트들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열차시간표에 따르면 퍄타코프가 적어도 이틀 이상 베를린을 비워야 했고, 독일 측이 이를 쉽게 반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스탈린은 퍄타코프가 하룻밤 사이에 다녀올 수 있도록 이동수단을 비행기로 바꾸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236]
그러나 오를로프의 설명은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독일이 반박하더라도 재판에서는 독일을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로 묘사할 예정이었으므로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부하들 앞에서 자신을 그렇게 노출하며 수사를 직접 조작하라고 재촉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행동은 그의 방식과 전혀 맞지 않았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만으로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답할 수 없다.
다만 수사를 이끌던 비밀정치부와, 해외사건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했던 해외부 사이의 업무조정에 어떤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지도자 앞에서 자신의 평판을 회복하려던 예조프는 퍄타코프와 트로츠키가 노르웨이에서 실제로 만날 가능성이 있었다고 논의한 외국언론 자료를 여러 차례 모아 스탈린에게 보냈다.
두 사람의 이후 관계가 전개된 모습을 보면 스탈린은 결국 충성스러운 측근의 실수를 용서한 것으로 보인다.
20. 2·3월 전원회의
‘병행 트로츠키주의 중앙’ 재판이 끝나자, 이제 전 ‘우익반대파’ 지도자인 부하린과 리코프의 문제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부하린을 포함한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전원에게 다음 전원회의의 자료로, 체포 중인 전 트로츠키주의자와 우익반대파 인사들의 심문조서가 보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반혁명적 계획과 범죄를 자백하는 한편, 그 모든 활동이 부하린·리코프·고인이 된 톰스키, 우익파,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거나, 트로츠키파의 경우 이들과 긴밀히 접촉하며 수행되었다고 진술했다.
부하린의 아내가 훗날 회상한 바에 따르면 이 진술들은 연출이 잘되어 있었고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정말 솜씨 좋게 만들어냈군!
내가 아니라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전부 믿었을 거야.”[237]
부하린은 첫 조서들을 읽은 뒤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것이 노림수였다.
다음 전원회의까지 남은 기간 동안 중앙위원들은 부하린과 리코프에게 제기된 혐의가 정당하다고 최종적으로 확신하고, 망설임 없이 필요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1937년 1월 초에는 키로프 살해에 부하린·리코프·톰스키가 관여했다고 고발한 K. B. 라데크의 진술이 중앙위원들에게 배포되었다.
이를 읽은 부하린은 1월 12일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성명을 보내, 그 내용을 허구와 중상이라고 단호하게 반박했다.
다음 날 예조프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부하린과 라데크, V. N. 아스트로프의 대질심문을 조직했다.
아스트로프는 적색교수양성소에서 부하린의 제자였으며, 1933년 이른바 ‘우익 반당집단, 부하린 학파,’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NKVD의 비밀정보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스트로프는 특히 적극적이었다.
그는 여러 반혁명범죄를 자백했을 뿐 아니라, 1930년에서 193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조자들의 한 회의에서 부하린이 집단화 때문에 예상되는 농촌봉기와, 여기에 합류해야 할 도시주민의 움직임을 언급하며 동지들에게 대열을 결집하고 봉기를 이끌라고 호소했다고 진술했다.
아스트로프의 말에 따르면 1932년 11월 부하린은 그를 만났을 때 최대한 철저하게 신분을 숨기고 스탈린 암살을 준비하라고 요청했다.[238]
아스트로프의 ‘폭로’는 대질심문에 다른 정치국원들과 함께 참석한 스탈린에게 대단히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곧 석방되어 모스크바에서 아파트와 직장을 받았다. 이후 장수하여 당시 사건에 관한 회고를 언론에 발표할 수도 있었다.[239]
라데크도 기존 진술을 확인했다.
그는 키로프 암살 직후 부하린이 범죄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체포되는 것을 보고 테러에 계속 기대를 걸어야 할지 의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조자들과 상의한 뒤에는 첫 실패 앞에서 후퇴해서는 안 되며, 게릴라식 행동에서 진지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투쟁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선언했다는 것이었다.[240]
그동안 부하린의 집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심문조서가 배달되었다.
그는 『이즈베스티야』 편집부에도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았다.
기존 피의자와 새로 체포된 사람들이 조서에서 부하린에게 가능한 모든 죄를 씌우고 있었다.
이런 고발을 계속 읽다가 부하린은 한때 자살을 거의 결심했다.
A. M. 라리나는 어느 날 남편의 방에 들어갔다가, 그가 권총을 손에 든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부하린은 자신이 관자놀이에서 피를 흘리며 숨진 모습을 아내가 보게 될 광경을 떠올리자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차라리 네가 보지 않는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편이 낫겠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선택이 사라졌다면 이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더구나 스탈린은 중앙위원들에게 부하린과 리코프의 유죄를 확신시키려는 과정에서 다소 경솔하게 수사의 ‘주방’을 열어 보였다.
A. M. 라리나가 썼듯 진술들은 잘 연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배포한 심문조서를 나중에 수정할 수는 없었다.
수사가 발전하면서 기소의 전체구상은 필연적으로 일정하게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이전에 받아내 중앙위원들에게 이미 배포한 진술 가운데 일부는 수정된 구상에 들어맞지 않았다.
또 예조프의 부하들에게 압력을 받아 이런저런 진술을 한 체포자 모두가 자기 ‘자백’의 신빙성과 논리성을 똑같이 신경 쓴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역할이 강요되었으므로, 가능한 한 형식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수사관들은 자신들이 얻어낸 정보가 믿을 만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특히 5년에서 7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묘사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함정을 완전히 고려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서로 다른 수사관에게서 날마다 수많은 조서를 받아 하나로 맞춰야 했던 수사기구 지도부와 예조프 본인에게는, 정해진 업무속도 속에서 모든 오류를 완전히 피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앞선 재판들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최종적인 구도와 모순되지 않는 정보만 법정에서 발표했고, 나머지는 모두 어둠 속에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간 심문조서를 중앙위원들에게 배포하라는 스탈린의 지시 때문에, 예조프가 지휘하는 기구가 체키스트들이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다시는 경험하지 않을 처지에 놓였다.
수사의 완성본이 아니라 초고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더구나 이를 반박할 기회를 가진 사람은 수사에 예속된 죄수가 아니라,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중앙위원이었다.
그는 필요한 분석능력을 갖추었고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
물론 모든 진술이 배포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만 골라 보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있는 독자, 부하린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가 자세히 파고들면 그 안에서도 외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오류를 찾을 수 있었다.
또 수사기관은 진술을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가능하면 실제로 있었던 만남과 대화에서 출발한 뒤, 그 안에 전혀 다른 내용을 채워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앞선 몇 년 동안 우익파 지도자들은 과거 동조자들과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들이 수용소와 유형지를 전전하고 있었던 점도 중요한 이유였다.
그 때문에 수집된 ‘사실’의 대부분은 1932년 이전 시기에 해당했다.
이는 제기된 혐의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렸고, 때로는 혐의를 노골적으로 터무니없게 만들었다.
부하린은 자신에게 보내진 심문조서를 면밀히 읽고 비교한 결과 수많은 논리적 모순, 시간의 불일치, 오류와 초보적인 조작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거의 100쪽에 달하는 편지에 기록하여 1937년 2월 20일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사흘 뒤 개막할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참석자들에게 편지를 복사하여 나누어달라고 요청했다.
부하린이 지적한 수사의 ‘실수’ 가운데 열다섯 건가량은 예조프와 조력자들이 수행한 업무 전체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노골적인 조작을 보여주는 사례들이었기 때문이다.
부하린은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가 명백하게 날조되었다는 사실만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수사관들이 어떤 식으로 질문하여 체포자들이 ‘필요한’ 진술을 하도록 유도했는지도, 자신에게 보내진 조서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갔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이 수사극의 기획자이자 지휘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앞으로 편지를 읽을 사람들에게 암시했다.
사건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기존 관행에 따라 전원회의 참석자들에게 배포할 수밖에 없었던 부하린의 편지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 부하린과 리코프에게 최후의 타격을 가하기 전에 방어전에서 먼저 승리해야 했다.
첫째, 평판이 크게 손상된 NKVD와 예조프 자신을 복권해야 했다.
둘째, 당 지도부, 특히 스탈린이 미리 정해놓은 수사결과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부하린의 암시를 무력화해야 했다.
짧은 고민 끝에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행동방침이 선택되었다.
의제의 첫 번째 항목인 「부하린 동지와 리코프 동지의 사건」을 논의할 때, 예조프와 당 측 공동보고자인 정치국원 A. I. 미코얀은 전 우익반대파 지도자들의 ‘범죄활동’과 부하린의 편지에 담긴 ‘날조’를 폭로한다.
그러면서도 가능한 처벌을 정할 때에는 최대한 온건한 태도를 보인다.
주된 공격은 토론에서 발언하는 전원회의 참석자들이 담당하고, 마치 이 발언들의 영향으로 원래 계획된 결정이 채택되는 것처럼 연출한다는 것이었다.
구상한 대로 실행되었다.
1937년 2월 23일 개막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가장 먼저 예조프가 발언했다.
그는 앞선 12월 전원회의에서 부하린과 리코프에게 제기했던 혐의를 참석자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지난 기간에 이 혐의가 완전히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혐의까지 추가되었다고 선언했다.
이어 그는 다소 무기력하고 무색한 연설, 참석자 한 사람의 표현으로는 ‘차분하고 절제된’ 연설,을 했다.
부하린에게 신뢰를 잃은 사실과 이야기는 거의 모두 연설에서 제거해야 했다.
그럼에도 전 우익반대파 지도자들에게 여러 혐의를 제기했다.
요점은 부하린·리코프·자살한 톰스키로 구성된 우익중앙이 소련의 자본주의체제를 복원하려는 목적으로 당과 정부 지도자들을 향한 테러, 파괴공작, 농촌의 쿨라크봉기와 기업의 파업을 조직하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최고형까지 적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범죄를 열거했음에도, 예조프는 부하린과 리코프를 중앙위원회와 당에서 제명하자는 제안에만 머물렀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복잡한 각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처럼 기묘한 관대함에 놀란 참석자 한 사람이 분노했다.
예조프는 이해당사자였으므로 부하린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직접 방어하지 않았다.
그 역할은 정치국원 A. I. 미코얀에게 넘겼다.
미코얀의 공동보고는 계획된 연극의 첫 부분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맡았다.
미코얀은 예조프의 지휘 아래 새롭게 바뀐 NKVD를 찬양하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부하린은 모든 문서와 사실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버릇을 들였다.
그는 자기 문서에서 내무인민위원부 기구를 공격한다.
온갖 암시와 직접적인 공격, 추악하고 오만한 말로 전체 기구, 특히 새롭게 바뀐 기구의 신용을 떨어뜨리려 한다.
예조프 동지는 볼셰비키답게 기구의 업무를 개선하는 데 온 영혼을 쏟았다.
나는 기구에 오류가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서면진술과 내가 참석한 대질심문에서 나온 진술이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하는지를 보고 놀랐다.
이후 나는 예조프 동지에게 이 수사를 진행한 기구가 진실성과 정확성에 관한 볼셰비키적 시험을 통과했다고 인정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부하린은 이 기구를 공격한다.
‘수사관들이 진술을 직접 만들어준다’고 말하며,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을 겨냥해 꾸며졌다는 식이다.
당의 도구이자 소비에트국가를 지키는 도구가 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며 성공적으로 노력하는 우리의 NKVD 기관을 적대적인 사람만이 이처럼 대할 수 있다.
그는 우리 당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오늘날의 정치적 방침을 이야기하면서, 수사관들이 특수한 심문으로 사람들을 특정한 진술로 유도하며 어떤 정치적 지침이 존재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면 중앙위원회가 특별히 그를 겨냥한 혐의를 조직하고, 모든 자료를 진정으로 조사하려 하지 않으며, 사람을 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도 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불리하게 만들 자료만 모으는 것처럼 된다.
이것은 우리 중앙위원회를 향한 가장 추악한 공격이다.
더구나 중앙위원회가 이 사람들을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보살펴왔는데도 이런 말을 한다.
당원들은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오랫동안 보살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회의장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옳다! 이제 보살피는 것은 그만두자!”
미코얀은 계속했다.
“그가 이런 수법을 쓰는 것은 사실과 문서를 반박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이 거짓말하고 이야기를 꾸민다고 증명하려 한다.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물론 동지들, 적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고된 사실과 이름의 압도적 다수가 진실이라는 점은 입증되었다.”[241]
이 모든 말을 마친 미코얀은 연설의 두 번째 부분에서 갑자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테러조직과 파괴공작에 관해서는 개별적인 의문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입증된 것은 아닐 수도 있다……”[242]
그리고 더욱 뜻밖에도 다음과 같이 이어갔다.
“부하린이 테러를 벌이는 반소비에트 집단을 준비하고 교육했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그에게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243]
“어떻게 제시하지 않을 수 있나?”
회의장에서 누군가 당황하여 물었다.
미코얀은 예조프와 마찬가지로 부하린과 리코프를 중앙위원회와 당에서 제명하자는 제안으로 연설을 마쳤다.
“이들이 무슨 중앙위원 후보위원인가?
이들이 무슨 공산당원인가?”[244]
그는 수사적으로 외쳤다.
이후 부하린에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회의장에서 끊임없이 끼어드는 말과 논평을 받으면서 그는 편지의 주요논거를 반복했다.
이것으로 전원회의 첫날의 활동이 끝났다.
다음 회의에서는 리코프가 발언했다.
그는 수사기관을 직접 비난하지 않으면서, 체포자들이 자신을 고발하는 진술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오류를 범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수사기구는 “물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들이 양심에 따라 발견한 것만을 중앙위원회에 말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245]
이것으로 준비운동이 끝나고 본공연이 시작되었다.
첫 발언자는 예조프의 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M. F. 시키랴토프였다.
그는 상황을 곧바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시키랴토프는 부하린과 리코프가 전 동조자들의 반혁명적 분위기를 전혀 알지 못했고 이들의 테러준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거칠게 조롱했다.
시키랴토프는 마지막에 말했다.
“이 사람들에게는 중앙위원회와 당에 자리가 없을 뿐 아니라, 법정 앞에 서야 한다.
국가범죄자인 이들의 자리는 오직 피고석뿐이다.”[246]
토론에 참가하도록 선정된 다른 발언자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취지로 말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들을 폭로하고 규탄한 뒤, 당 차원의 조치에만 머물러서는 절대로 안 되며 사건을 수사기관이나 법원으로 넘겨야 한다고 요구했다.
모든 발언을 관통한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피의자들이 자신과 동시에 부하린·리코프에게 총살형이 가능한 형법조항을 씌울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이들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월 26일, 이 의제논의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부하린과 리코프에게 ‘최후진술’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회의장의 고함에 끊임없이 방해받은 부하린은 한 시간 반 동안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견디지 못하고 속기록에 따르면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감옥에 갈 때다.”
회의장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리코프의 연설은 더 짧았다.
그에게 제기된 혐의가 더 적었고, 그만큼 진술에서 발생한 각종 오류도 적었다.
따라서 리코프는 자신에게 제기된 거의 모든 혐의가 이상하게도 1934년에 끝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정작 ‘우익 반혁명중앙’의 핵심활동이 전개되었어야 할 그 이후의 기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술도 없었다.
부하린과 리코프가 논리적이고 진지하게 발언한 뒤, 일부 참석자에게는 이들에게 제기된 혐의의 신빙성에 대한 의심이 남았거나 다시 생겼을 수 있었다.
이제 많은 것이 최종발언을 해야 할 예조프에게 달려 있었다.
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업무의 결과를 상대방이 훼손하고, 그의 뒤에 서 있는, 모두가 그렇게 이해했다, 스탈린에게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할 수는 없었다.
부하린이 편지에서 밝혀내고, 부하린과 리코프가 전원회의 발언에서 제기한 진술의 모든 모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침내 설명해야 했다.
예조프는 부하린이 세운 방어체계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필요한 설명을 찾아냈다.
“부하린은 이 체포자 저 체포자의 진술에서 개별적인 모순을 찾아내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보라, 수사가 사람들에게 말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그 가르쳐준 말조차 서로 맞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부하린을 겨냥해 이 모든 진술을 꾸며내려 했다면, 모든 내용을 빗질하고 매끄럽게 다듬었을 것이며 모순도 제거했을 것이다.
모두가 필요한 방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수사가 올바르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 장소에서 수십 명의 체포자를 심문하면서, 부하린에게 어떤 진술이 나와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 체포자들은 각자 자기 방식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을 진술했다.
모든 것이 일치했다면 부하린은 오히려 전 세계를 향해 이것이 조작되었다고 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247]
이 구원공식은 이미 1928년 샤흐티 재판 때 만들어졌다.
당시 국가검사였던 N. V. 크릴렌코는 피고인들의 진술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언급하면서, 모든 것이 100퍼센트 일치했다면 사전에 입을 맞췄다고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차이가 세부사항에만 있다면 그것이 보고된 내용의 신빙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제 예조프도 크릴렌코를 따라 체포자들의 진술에 있는 모든 모순을 설명했을 뿐 아니라, 정직하고 공정하게 수사를 진행하면 그러한 모순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주장까지 만들어냈다.
물론 진술들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지 사전에 합의된 각본이 없었다는 점만 보여줄 뿐, 그 내용이 진실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고 누군가는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집회 참석자 가운데 그런 문제를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리코프의 주요논거, 자신을 향한 모든 진술이 1934년에 끝난다는 주장,에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맞섰다.
“우리가 모든 것을 파헤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36년과 1937년에도 도달할 것이다.”[248]
예조프는 부하린과 리코프가 수사결과를 의심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무력화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시도를 전 우익반대파 지도자들을 향한 새로운 혐의로 이용했다.
“그들이 이런 노선을 취했다면, 이번 논의의 결과로 우리는 정당하게 또 하나의 정치적 혐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적으로 남았다.
소련 내부와 해외의 모든 적대세력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회의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옳다!”
예조프는 계속했다.
“그들은 자기 동조자들에게 이렇게 신호한다.
계속 활동하라. 더 철저하게 신분을 숨겨라. 붙잡히더라도 자백하지 말라.”[249]
그 뒤 예조프는 부하린과 리코프에게 제기된 주요혐의를 되풀이하고, 인상적인 말로 연설을 끝냈다.
“그들은 정치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수사의 모순만을 언급했다.
전원회의는 부하린과 리코프가 수사의 객관성을 실제로 확인하고, 수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리라고 생각한다.”
회의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옳다!”[250]
전원회의는 옛 동료들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예조프도 포함된 20인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에서는 여러 제안이 논의되었다.
군사재판에 넘겨 최고형인 총살형을 적용하자는 예조프의 제안, 재판에 넘겨 10년형에 처하자는 제안, 형량을 미리 결정하지 않고 재판에 넘기자는 제안 등이었다.
위원회는 결국 다음과 같은 방안을 선택했다.
부하린과 리코프를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과 당에서 제명한다.
재판에는 넘기지 않고 사건을 NKVD에 이송한다.
2월 27일 전원회의는 이 제안을 승인했다.
채택된 결의문은 수사자료, 대질심문과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진 전면적인 토론을 바탕으로 다음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했다.
부하린과 리코프는 최소한 트로츠키주의 중앙의 범죄적 테러·간첩·파괴공작활동과, 자기 제자와 동조자들이 만든 테러집단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장려했다는 것이었다.
결의문은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원회의는 부하린 동지가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문서, 그가 트로츠키주의자와 우익 테러리스트들의 진술을 반박하려 한 문서,가 내용상 중상적인 문서라고 판단한다.
이 문서는 트로츠키주의자와 우익 테러리스트의 진술을 반박할 능력이 완전히 없음을 드러낼 뿐 아니라, 진술을 변호사처럼 논박한다는 구실로 NKVD를 중상하고 당과 중앙위원회를 향해 공산당원에게 어울리지 않는 공격을 가한다.
그러므로 부하린 동지의 문서는 완전히 근거가 없고 어떤 신뢰도 받을 가치가 없는 문서로 보아야 한다.”[251]
같은 날 부하린과 리코프는 체포되었다.
전원회의는 다음 의제로 넘어갔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공업인민위원부와 철도인민위원부에서 활동한 일본·독일·트로츠키주의 요원들의 파괴공작·사보타주·간첩활동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보고자는 각각 V. M. 몰로토프와 L. M. 카가노비치였다.
내무인민위원부의 같은 문제는 예조프가 보고했다.
보고와 토론발언은 위에서 말한 인민의 적이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얼마나 깊이 침투했고, 국가경제에 얼마나 큰 손해를 입혔으며 계속 입히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공장과 탄광의 모든 대형사고, 철도참사, 화재와 전염병 등이 실제로는 외국정보기관과 트로츠키파·우익파 출신 파괴공작원들의 활동결과였다는 것이다.
참석자들은 NKVD가 여러 경제부문에서 적발했다는 이들의 파괴활동 사례를 들면서, 서로에게 경계심을 강화하고 안일함과 정치적 근시안을 극복하며 속물적인 멍청함을 버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토론발언에 나선 예조프는 이 문제를 특별히 다루었다.
“상당히 이상한 상황이다.
나는 내무인민위원부에서 이미 네 달 반 동안 일했지만, 누군가 먼저 전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사례를 단 한 건도 알지 못한다.
‘예조프 동지, 이 사람이 무언가 수상합니다. 이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조사해주십시오.’”[252]
예조프는 위장한 간첩과 파괴공작원을 폭로하는 이 효과적인 방법을 참석자들에게 상기시켰다.
이어 NKVD의 상황에 관한 보고에서 자기 기관의 인민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1936년 11월 초까지 NKVD에서 일하던 전 지노비예프파·트로츠키파와 그 밖의 반대파 인사 699명 가운데 이미 138명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숫자에 놀라지 않도록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NKVD에서 일한 전 반대파 인사들에게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과거 트로츠키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당과 NKVD 기관에 숨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를 체포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이를 배신으로 보았다.
우리의 내부규정은 형사책임의 위협 아래 모든 문서를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진실하게 작성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부규정에 따라 이런 사람들을 체포했다.”[253]
예조프는 아마 자신이 제시한 숫자에 회의장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보고, 당을 속였다는 이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만들어낸 듯하다.
실제로는 1937년 3월 19일 NKVD 지도간부회의에서 예조프가 같은 세부사항을 언급한 연설을 보면,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으며 NKVD의 공식등록자료에도 전 반대파 인사로 기록되어 있던 체키스트들이 체포된 것이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예조프의 첫 번째 폭로를 소화할 틈도 없이 두 번째 폭로가 이어졌다.
외국정보기관의 요원들조차 체키스트 기구 내부에 침투했다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해외부의 폴란드부문에서 특히 심각한 상황이 형성되었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폴란드군 총참모부 제2부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부서의 장교였던 폴란드인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폴란드공산당으로 보내졌고, 그 조직을 통해 NKVD 기구에 침투했다고 했다.
그러나 예조프의 견해에서 국가보안기관에 가장 큰 피해를 준 것은 전 NKVD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 G. A. 몰차노프의 ‘배신활동’이었다.
몰차노프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우익파를 상대로 한 업무가 제대로 확대되지 못하게 막았다.
개별 체키스트의 발의로 업무가 시작될 때에도 제출된 자료를 허튼소리나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부르며 어떻게든 중단시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몰차노프는 혼자 행동한 배신자인가?”
예조프는 질문한 뒤 스스로 답했다.
“이 분야에는 상당히 우려스러운 사실들이 있다.
그것은 자기 제복과 자기 기관의 명예를 지킨다는 전혀 볼셰비키답지 않은 태도로 설명된다.
우리 기구 내부의 배신자들을 더 일찍 적발할 수 있었는가?
물론 가능했다.
사람과 그들의 행동,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조사했다면 적발할 수 있었다.”[254]
예조프는 이렇게 자신의 향후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당 중앙위원회와 “날마다 우리를 지도하는” 스탈린 동지의 도움을 받으면 소비에트 국가보안기관을 마땅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세계최고의 기관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표현하며 연설을 마쳤다.
전원회의는 예조프의 보고에 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했다.
그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1. 반소비에트 파괴공작·사보타주·간첩·테러집단인 트로츠키주의자와 그 밖의 이중행동자들을 분쇄하기 위한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조치를 승인한다.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트로츠키주의자와 그 밖의 파시즘 요원들을 폭로하고 분쇄하는 일을 끝까지 수행하여, 이들의 반소비에트활동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진압해야 한다……
- 새롭고 볼셰비키적으로 검증된 체키스트를 지도업무에 발탁하고, 계급의 적과 싸울 볼셰비키적 날카로움과 경계심을 완전히 잃어 영광스러운 체키스트의 이름을 더럽히는 타락한 관료를 기구에서 제거하여 국가보안기관을 건전화하기 위한 중앙위원회의 조치를 승인한다.”[255]
전원회의의 마지막 의제는 「당 간부의 정치교육과 당조직 내 트로츠키주의자 및 그 밖의 이중행동자들과 싸우기 위한 조치」였다.
스탈린이 이 문제를 보고했다.
“우리가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계급투쟁이 점점 약해지고, 성공이 커질수록 계급의 적이 점점 온순해진다는 썩은 이론을 깨뜨리고 내던져야 한다.
그와 반대다.
우리의 성공이 커질수록 패배한 착취계급의 잔재는 더욱 분노한다.
이들은 더욱 빠르게 날카로운 투쟁방식으로 넘어가고, 소비에트국가에 더 큰 해를 끼우며,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들이 사용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투쟁방법을 붙잡게 된다.”[256]
스탈린은 부르주아국가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간첩과 파괴공작원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부르주아국가들은 다른 어떤 부르주아국가의 후방보다 소련의 후방에 두 배, 세 배 많은 파괴공작원·간첩·사보타주범·살인자를 보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파괴공작원과 간첩 등의 역할을 현재 수행하는 사람은 당과 인민의 주요한 적인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이들은 “소비에트국가와 소비에트권력에 해를 입힐 수만 있다면 간첩활동과 조국에 대한 직접적 배신을 포함한 어떤 추악한 행위도 저지를 수 있는 노상강도로 오래전에 변했다.”[257]
스탈린은 질문했다.
“그렇다면 현대의 파괴공작원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힘은 무엇인가?”
그리고 설명했다.
“그들의 힘은 당원증에 있다. 당원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당원증은 이들에게 정치적 신뢰를 주고 우리의 모든 기관과 조직으로 들어갈 길을 열어준다.”[258]
이 모든 이야기에서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는 참석자들이 곧 알게 될 일이었다.
그 결론은 스탈린보다 예조프를 통해 더 많이 알게 될 터였다.
나라에 피할 수 없이 다가오던 사건에서 주요한 역할은 바로 예조프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1934년 12월 국내정치체제가 강화되기 시작한 뒤 세계의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대규모 전쟁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스탈린은 군사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역량을 늘리는 조치를, 내부의 잠재적 위협을 무력화할 그에 못지않은 단호한 행동으로 뒷받침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런 위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던 당시 제헌의회 선거결과를 보면 이들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던 주민은 25퍼센트에 불과했다.
이후 벌어진 내전, 집단화와 1932년에서 1933년의 기근은 새 체제의 인기를 높일 수 없었다.
지난 20년 동안 공산주의 구호 속에서 교육받은 세대 전체가 성장했지만, 인구의 상당수가 국내의 기존질서에 아무런 호감도 품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스탈린이 받은 NKVD 보고도 이를 확인했다.
보고에는 발견했다는 반혁명조직들이 등장했다.
더구나 예조프가 부임한 뒤 지도자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객관성의 마지막 흔적마저 잃었다.
전문가로서 수사의 내부구조를 잘 알았던 야고다는 전달된 보고서에 때때로 “허튼소리”, “그럴 수 없다” 같은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예조프에게는 ‘그럴 수 없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체키스트 기관의 활동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려고 부하들의 직무열성을 모든 방식으로 장려했다.
상부의 기대를 정당화할 다른 방법이 없었던 부하들은 새롭고 새로운 ‘반소비에트’ 집단과 조직을 발명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이 모든 허위정보가 날마다 지도자의 책상에 올라갔다.
대부분의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의심이 많고, 병적으로 의심이 많다고도 할 수 있었던 스탈린은 보내온 보고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그 진실성을 직접 확인할 수도 없었다.
결국 이른바 NKVD 특별보고와 체포자들의 심문조서를 끊임없이 읽은 결과, 체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수천·수만 명이 첫 기회가 생기면 간첩·파괴공작·테러·봉기조직의 길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위협의 규모에 관한 완전히 과장된 관념이 스탈린에게 형성되었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아직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생하여 국가의 모든 자원이 외부의 적과 싸우는 데 투입되면, 1917년 제정러시아에서 일어났듯 내부의 적과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있었다.
잠재적인 ‘제5열’을 선제공격하여, 국내에 존재하는 체제가 전쟁 중에 흔들리지 않도록 보장해야 했다.
지도자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도 이 견해를 공유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당시 사건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공개했다.
V. M. 몰로토프와 L. M. 카가노비치는 일어난 모든 일에 이론적인 근거를 부여하려고까지 했다.
이 일은 당시 당 지도부에서 스탈린 다음가는 인물이었던 몰로토프가 가장 잘 해냈다.
그는 1986년까지 무사히 살아남았고, 사망하기 전 작가 F. I. 추예프에게 자신의 기억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추예프는 이후 『몰로토프와의 140차례 대화』라는 책을 출판했다.
몰로토프의 다음 발언을 인용해보자.
예조프도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몰로토프의 말이다.
“우리는 탄압에서 피할 수 없는, 비록 심각하기는 하지만 일정한 과도함을 허용하는 길로 나아감으로써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 중에 국내에서 심각한 충돌이 일어나 모든 업무와 소비에트권력의 존재 자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259]
“1930년대 말 실시된 그 테러는 필요했다.
물론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면 희생자가 적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탈린은 아무도 아끼지 않으면서, 전쟁 중과 전쟁 뒤의 상황을 확실하게 보장하려고 안전장치를 지나치게 강화했다.”[260]
“내 생각에 스탈린은 대단히 올바른 노선을 따랐다.
필요 이상의 사람 한 명의 목이 날아가더라도 전쟁 중과 전후에 동요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261]
“혁명 이후 우리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베어내어 승리했지만, 여러 방향의 적 잔재가 남아 있었음을 생각하면 1937년은 필요했다.
다가오는 파시스트침략의 위험 앞에서 이들이 결합할 수도 있었다.
전쟁 중 우리에게 ‘제5열’이 없었던 것은 1937년 덕분이다.
볼셰비키 가운데에도 모든 일이 잘되고 국가와 당에 위험이 없을 때에는 훌륭하고 충성스럽지만, 무슨 일이 시작되면 흔들리고 변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262]
“열성적인 우익이나 트로츠키주의자뿐 아니라, 동요하고 노선을 확고하게 따르지 않았으며 어려운 순간에 배신하거나 후퇴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던 사람도 많이 피해를 입었다.”[263]
“물론 지나치게 나아갔다.
하지만 권력을 지키는 핵심목표를 위해서라면 이 모든 일은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264]
물론 국내에 펼쳐진 테러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기여한 몰로토프가 전쟁 전 상황을 언급하며 자기 행동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욕망을 의심할 수 없는 사람의 견해도 있다.
감옥의 독방에서 N. I. 부하린은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고, 벌어지는 모든 일에 이성적인 설명을 찾으려 했다.
“전면적인 숙청이라는 크고 대담한 정치적 구상이 있는 것 같다.
a) 전쟁 전의 시기와 관련되어 있고, b)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숙청은 a) 유죄인 사람, b) 의심스러운 사람, c) 잠재적으로 의심스러운 사람까지 포함한다.
어떤 사람은 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세 번째 사람은 또 다른 방식으로 무력화한다.
나는 이미 어린아이의 포대기에서 충분히 벗어났기 때문에, 거대한 계획과 거대한 구상, 거대한 이해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265]
몰로토프와 부하린처럼 전혀 다른 사람들이 전쟁 전 상황을 이유로 테러의 정당성을 언급했다는 것은, 이러한 관념이 당시 당 상층부에 실제로 퍼져 있었으며 본인이 탄압에 관여했는지와는 무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하린이 ‘전면적 숙청’ 구상을 정당화하는 또 하나의 사건으로 언급한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무엇이었을까?
1936년 12월 채택된 새 헌법에 따라, 소련은 새로운 최고권력기관인 소련 최고소비에트 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과거 각급 소비에트 선거는 여러 단계로 이루어졌으며, 투표는 명부에 따라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도시와 농촌주민의 대표선출 비율도 달랐다.
또 전 쿨라크, 상인, 장교, 관리, 경찰직원, 과거와 현재의 종교종사자 등 열한 개 범주의 시민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새 헌법은 창안자의 구상에 따르면 소련에 사회주의가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자국민과 세계여론에 확신시켜야 했다.
따라서 과거의 선거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제 소련의 선거는 직접·평등선거가 되고, 명부가 아니라 개별후보에게 비밀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선거권을 박탈당했던 이른바 ‘리셴치’들도 정치적으로 완전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 되었다.
이처럼 많은 전 ‘계급의 적’이 선거과정에 참가하게 되는 것은 권력에 일정한 위험을 제기했다.
비밀투표라는 조건에서 나머지 주민 모두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새 유권자와 전반적으로 체제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무력화해야 했다.
가능하면 장기간, 아니 영원히 무력화하여 4년마다 이 문제와 다시 마주치지 않아야 했다.
물론 선거결과는 누가 어떻게 투표하는지보다 이후 누가 표를 집계하는지에 더 많이 달려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듯했지만, 그래도 대비책을 마련해두는 편이 좋았다.
결국 외부와 내부의 모든 이유로 보아, 소비에트사회에서 신뢰할 수 없는 요소를 근본적으로 숙청할 때가 되었다.
이를 미뤄서는 안 되었다.
정황으로 보아 1937년 봄까지 스탈린은 관련결정을 내렸을 뿐 아니라 그 실행의 주요단계도 이미 생각해두었던 듯하다.
계획이 성숙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은 일부 윤곽을 가장 가까운 조력자, 특히 예조프와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예조프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인 S. S. 슈바르츠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35년 말 중앙위원회 기구의 동료들이 모인 어느 술자리에서 예조프는 앞으로 ‘역사적인 간부재배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며칠 뒤 슈바르츠가 그 말의 의미를 묻자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래된 간부들은 모두 옆으로 밀려날 것이다.
모든 사람을 한두 차례 교체하여, 옛 간부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266]
그러나 1937년 초가 되어 스탈린의 계획이 완성된 형태를 갖추자, 지도자는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조차 자기 의도를 알려주지 않았던 듯하다.
동료들은 목표달성을 위한 이런저런 결정을 집단적으로 승인할 필요가 생길 때마다, 그의 구상을 단계적으로 접하게 될 예정이었다.
누군가와 공유하기에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발상이었다.
문제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이루어졌던 것처럼 체제의 현실적·잠재적 반대자를 격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당파뿐 아니라 당원을 포함한 수십만 명을 육체적으로 제거하는 일이었다.
1935년에 당문서 검사라는 형태로 실시된 숙청은 당에서 명백한 적, 이질적인 사회환경 출신자, 전 반대파 인사, 의심스러운 외국인 등,을 제거하게 해주었다.
이제는 형식적으로는 흠잡을 수 없는 숨겨진 적을 제거해야 했다.
또 대외상황이 비교적 평온했던 1935년과 달리, 이제는 단순히 당에서 제명하는 조치만으로는 부족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만을 품은 전 공산당원들의 거대한 집단이 체제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려는 어떤 세력에게든 좋은 토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했고, 근본적일수록 좋았다.
평화로운 시기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주민을 대규모로 탄압한 경험은 이미 있었다.
집단화시기의 일이었다.
이제는 비록 선언적인 수준이라도 일정한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한 새 헌법이 막 시행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일을 실행해야 했다.
당은 이런 ‘연옥’을 처음 통과해야 했으며, 이 부분이 당연히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모든 일이 순조롭고 방해 없이 진행되리라는 확신은 스탈린에게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지도역할이 너무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방침을 세워야 했다.
자신이 내린 결정들이 가능하면 누군가의 발의에 대한 대응처럼 보이게 해야 했다.
결정은 집단적으로 내려진 것처럼 보여야 했다.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그것을 집행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할 일은 많았다.
그 일을 수행할 사람들, 즉 체키스트들부터 시작해야 했다.
21. 경비병 교대
옛 체키스트 친위대의 숙청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제는 거의 정설이 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만든 사람은 네덜란드 주재 NKVD 책임자였다가 1937년 귀국을 거부한 발터 크리비츠키였다.
그는 과거 NKVD의 파괴로 이어진 사건의 출발점을 1937년 3월 18일 예조프가 한 연설에서 찾았다.
중앙위원회 2·3월 전원회의의 결정에 비추어 국가보안총국이 맡은 과제를 논의한 회의에서 한 연설이었다.
크리비츠키는 1938년 망명잡지 『사회주의 통보』에 발표한 글과, 1년 뒤 런던에서 출판한 『스탈린의 비밀기관에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조프는 연설에서 야고다와 NKVD 중앙기구의 가까운 동료들을 격렬하게 공격하여 독일을 위한 간첩활동과 국가자금 횡령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야고다는 혁명 이전에 제정 비밀경찰과 협력했다는 혐의까지 받았다고 했다.
예조프는 NKVD 지도간부들이 스탈린의 신뢰를 잃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국과 조직국에서 온 검증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들어와, 철빗자루로 야고다의 비열한 심복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267]
이 이야기는 출처를 밝히기도 하고 밝히지 않기도 하면서 1930년대 탄압을 다룬 저술에서 자주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실제사실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로 이 회의는 3월 18일이 아니라 1937년 3월 19일부터 21일까지 열렸다.
그리고 예조프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연설에서 불과 두 주 전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보고를 거의 그대로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는 앞선 보고 때와 마찬가지로 계급의 적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새롭고 교묘한 투쟁방법에 체키스트들이 대응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정보원업무의 결함과 잘못된 인사정책을 지적했다.
“사람을 제멋대로 뽑았다.
정치적인 동기는 없었고 그런 기준으로 지도하지도 않았다.
사람을 선발할 때에는 예를 들어 상관의 비위를 제때 맞출 수 있는가, 필요한 순간에 ‘우라!’를 외칠 수 있는가 같은 다른 판단기준을 따랐다.”[268]
예조프는 야고다의 측근이나 야고다 자신을 간첩으로 고발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야고다를 포함한 측근 대부분은 당시 아직 자유로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고다와 제정 비밀경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예조프는 마지막에 말했다.
“우리는 혁명의 무장한 검이라고 불린다.
내가 이야기한 사실들을 보면 검이 조금, 아주 조금 무뎌졌다.
검을 날카롭게 하고 갈아야 한다.
우리는 이 검이 날카롭게 갈릴 것이라고 당 중앙위원회와 스탈린 동지에게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269]
앞으로 이루어질 변화에 관한 예조프의 암시는 이 말이 전부였다.
서기국과 조직국의 검증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다.
국가의 핵심보안기관을 숙청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또 한 명의 귀국거부자이자 전 스페인 주재 NKVD 책임자 A. M. 오를로프의 견해에 따르면, 스탈린과 예조프는 구세대 체키스트들을 제거하여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흔적을 지우고, 모스크바 공개재판이 어떻게 조직되었는지를 너무 많이 아는 사람들을 없앴다.[270]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으로 보인다.
새로운 대형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모스크바 재판을 준비하며 얻은 기술과 방법을 앞으로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미 검증된 조작전문가들을 교체할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구세대 체키스트를 바꿔야 했던 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을 대신한 사람들도 한 달만 지나면 조금도 덜 알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이제 NKVD 앞에 놓인 과제에 그들 가운데 다수가 완전히 부적합했다는 데 있었다.
‘부르주아’ 전문가 재판을 조직하고, 쿨라크와 성직자를 탄압하며, 전 반대파 인사들을 박해하는 일까지는 이들도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근본적인 숙청은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
기존의 적과 싸우는 일을 줄이지 않으면서, 당과 국가기구 안의 적을 찾아내는 데에도 그에 못지않은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전통 속에서 성장한 체키스트 원로 가운데 많은 사람은 스탈린이 자신들을 당 동지들과의 투쟁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바라보았다.
또 스탈린과 다른 지도간부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하면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래전에 ‘지도자들’의 무오류성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어떤 지시든 무조건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의심할 근거가 충분했다.
구 체키스트 친위대를 무대에서 내려보낼 때가 되었다.
내부숙청의 첫 번째 대형희생자는 사라토프변경 NKVD국 부국장이자 국가보안 3급위원 I. I. 소스놉스키였다.
과거 러시아 주재 폴란드정보기관의 책임자였던 소스놉스키는 1920년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이 지목한 폴란드요원들을 수사가 끝난 뒤 고국으로 돌려보낸다는 조건으로 협력에 동의하여 이중요원이 되었고, 실제로 그 약속은 이행되었다.
이후 소스놉스키는 중앙과 지방의 전러시아비상위원회·OGPU 특별부와 방첩부에서 일했다.
1934년에는 NKVD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부부장 자리까지 올랐다.
1934년 12월 그는 모스크바 체키스트들의 조사단에 포함되어 레닌그라드로 갔고, S. M. 키로프 암살경위를 조사하는 데 참여했다.
아마 바로 그때 소스놉스키가 레닌그라드에 와 있던 스탈린의 눈에 다시 띄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전 폴란드정보요원이 이처럼 책임 있는 업무를 맡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 뒤 소스놉스키는 1935년 1월 초 사라토프변경의 현지 NKVD국 부국장으로 전근되었고, 이후 그곳에서 일했다.
1936년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일부 폴란드 공산당원은 자신들의 집단에서 체포가 이어지는 것을 걱정하여 NKVD에 성명을 제출했다.
이들은 소스놉스키가 국가보안기관을 거짓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271]
그뿐 아니라 체포된 폴란드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소스놉스키가 간첩활동을 했다는 ‘정보’가 나왔다.
이에 따라 그는 1936년 11월 체포되었다.
같은 시기에 폴란드계의 다른 체키스트 다수도 감옥에 들어갔다.
NKVD 내부에서는 허구의 폴란드요원을 사냥하는 일이 한창이었다.
소스놉스키의 운명을 뒤따른 다음 체키스트 엘리트는 전 NKVD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이자 국가보안 2급위원 G. A. 몰차노프였다.
1936년 11월 말 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된 몰차노프는 민스크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곧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1937년 2월 초 체포되었다.
형식적인 체포구실은 앞에서 이야기한 L. B. 자프란 사건에서 보인 그의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러나 NKVD의 본격적인 숙청은 전 소련 내무인민위원 G. G. 야고다가 체포된 1937년 3월 말 시작되었다.
가장 격렬한 단계는 같은 해 10월 말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에 국가보안총국 여덟 개 부서장 가운데 여섯 명과, 예조프가 부임했을 당시 자리를 맡고 있던 주요 지방 NKVD기관 책임자의 3분의 1이 체포되었다.
1937년 4월 말까지 설득과 구타를 이용해 야고다와 당시 체포된 그의 전 부하들에게서, 기존 지도부를 전복하고 국내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조직이 NKVD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진술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수사는 극도의 비밀 속에서 진행되었다.
진술에 등장하는 ‘음모자’들의 이름 가운데 어떤 것이 ‘올바르게’ 지목되었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NKVD 지도부가 판단하기 전에, 그 이름들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체포자들의 진술은 먼저 초안으로 기록했다.
그 뒤 해당 수사를 감독하는 국가보안총국 부서장이 내용을 수정했다.
이후에는 NKVD 서기국장 Ya. A. 데이치가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편집된 문서는 프리놉스키나 예조프에게 보내 승인을 받았다.
그들의 지적사항을 반영한 뒤에야 최종 심문조서가 작성되었다.
지방 NKVD국에서 ‘음모자’를 고발하는 진술이 들어와 이미 수정할 수 없을 때에는 체포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심문했다.
예조프가 신뢰하고 앞으로도 함께 일하려는 체키스트를 고발한 내용을 철회하도록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야고다의 사람들을 대신한 새 집단은 여러 경로에서 충원되었다.
가장 중요한 인력공급원은 오랜 기간 구세대 체키스트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인 E. G. 예브도키모프가 지휘했던 북캅카스변경 NKVD국이었다.
적기훈장을 네 차례 받은 유일한 체키스트인 예브도키모프는 내전 말기에 남서전선 특별부 부부장으로 일했다.
당시 스탈린은 같은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이었으며, 이때 알게 된 두 사람 사이에는 상당히 신뢰하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1923년 예브도키모프는 북캅카스변경 OGPU 전권대표부를 이끌었다.
1927년에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변경의 탄광에서 발생한 여러 사고를 이른바 ‘샤흐티 사건’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인민의 적인 파괴공작원들을 상대로 한 국내 최초의 조작재판으로 끝났다.
예브도키모프는 바로 이 일로 네 번째 적기훈장을 받았다.
남서전선 특별부, 전우크라이나비상위원회와 북캅카스변경에서 일하는 동안 예브도키모프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체키스트들의 거대한 집단을 선발해 결집했다.
그들을 승진시키고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했으며, 필요할 때에는 보호했다.
자기 생각 외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싫어한 사람도 있었지만, 근무시간 밖에서 예브도키모프는 의도적으로 소탈하게 행동했다.
이것은 그의 권위를 더욱 높였다.
예브도키모프 집단을 결속시킨 것은 공동업무뿐만 아니었다.
그가 장려한 집단적인 여가활동도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북캅카스 출신 체키스트 I. Ya. 일린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대개 로스토프에서 자주 소집되던 작전회의는 회의가 끝난 뒤, 때로는 회의 도중부터 거대한 술판과 난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법이 없었다.
그런 술자리는 하루 이상 계속되기도 했다.
어떤 직원은 사흘이나 나흘이 지나서야 선술집이나 매춘부의 집에서 찾아내는 경우도 있었다.”[272]
1929년 말 예브도키모프는 모스크바로 전근되어 OGPU 비밀작전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1년 반 동안 근무하다가 1931년 여름 몇몇 동조자와 함께 당시 OGPU 제1부의장이던 G. G. 야고다를 제거하려 했다.
V. R. 멘진스키가 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야고다는 사실상 체키스트기관 전체를 이끌고 있었다.
야고다를 공격한 계기는 이른바 ‘봄’ 사건의 하나로 당시 군부에서 진행된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이 과정에서 내전 때부터 적군에서 복무하던 전 제정군 장교와 장군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이들이 지하 반혁명조직의 구성원이라는 혐의였다.
예브도키모프와 OGPU의 고위간부 네 명은 ‘봄’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실제로 사실에 부합했다.
이들은 몇몇 정치국원의 지원을 받아 스탈린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갈등을 다룬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은 반대자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브도키모프에게 분쟁을 일삼는 사람들과 한패가 되었다고 질책했다.
다섯 사람 모두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그중 세 명은 OGPU를 영원히 떠났고, 비교적 가벼운 처분을 받은 예브도키모프는 레닌그라드주 OGPU 전권대표라는 상당히 명예로운 자리로 이동했다.
하지만 불과 2주 뒤 야고다의 노력으로 그 자리에서도 해임되어 중앙아시아 OGPU 전권대표부를 이끌게 되었다.
현지 기후는 예브도키모프의 건강에 치명적이었다.
이때부터 야고다를 향한 그의 반감은 노골적인 적개심으로 바뀌었다.
1932년 말 예브도키모프는 북캅카스로 돌아왔다.
당시 그곳은 집단화 때문에 대단히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예브도키모프는 단호하고 가혹하게 행동하여 상황을 뒤집었다. 1933년 봄이 되자 변경의 농민소요는 끝났다.
1934년 1월 스탈린은 그를 당 업무로 이동시켜 북캅카스변경 당위원회 제1서기로 임명했다.
이 무렵부터 예브도키모프와 예조프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35년 초 예조프가 지도당기관부장으로 임명된 뒤 두 사람의 관계는 특히 가까워졌다.
예조프는 ‘초보’ 당 활동가인 예브도키모프가 당·소비에트 기구의 간부를 선발하는 것을 도왔고, 당시 진행된 당문서 검사와 이후의 당원증 교체에 관해 유용한 조언을 해주었다.
국가보안기관을 감독하는 중앙위원회 서기로서 예조프는 예브도키모프와 대화할 때 NKVD 문제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 과정에서 야고다를 향한 예브도키모프의 비판을 온갖 방식으로 장려했다.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될 가능성이 이미 명백해졌던 어느 날, 예브도키모프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나도 NKVD로 데려가게.
둘이 함께 한번 밀어붙이면 악마들도 토할 거야.”[273]
예조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본 예브도키모프는 NKVD를 누군가와 공동으로 지휘한다는 발상이 그에게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후 내무인민위원이 된 예조프는 거대한 NKVD 기구를 관리하는 어려움에 부딪히자 예브도키모프를 조력자로 데려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탈린이 반대했다.
1936년 북캅카스 당조직에서도 다른 수많은 조직과 마찬가지로 온갖 ‘반당분자’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예브도키모프 주변에서도 나왔다.
예브도키모프는 2·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자신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체키스트”도 적을 제때 알아보지 못했다고 자아비판해야 했다.
정치적 경계심이 무뎌진 사람을 NKVD에 임명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예조프가 예브도키모프를 제1부인민위원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지도자는 거절했다.
한편 1937년 초 제1부인민위원 문제는 예조프에게 대단히 중요해졌다.
그 직무를 수행하던 Ya. S. 아그라노프는 같은 2·3월 전원회의에서 인민의 적, 즉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와의 투쟁에서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그의 경력이 끝나가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아그라노프 자신에게는 이런 전환이 뜻밖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조프는 자기 제1부인민위원을 향한 스탈린의 불만을 전원회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예브도키모프도 후보에서 탈락했으므로 다른 방안을 찾아야 했다.
잠시 고민한 뒤 예조프는 M. P. 프리놉스키를 선택했다.
프리놉스키는 모스크바 체카 특별부에서 예브도키모프의 지휘 아래 국가보안기관 경력을 시작했다.
1919년 말 예브도키모프가 우크라이나로 이동하자 프리놉스키도 불러들였고, 이후 7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일했다.
1926년 당시 북캅카스변경 OGPU 전권대표 제1부대표였던 프리놉스키는 프룬제 적군군사아카데미의 고급지휘관 보수과정에 파견되었다.
과정을 마친 뒤 모스크바에 남아 처음에는 모스크바군관구 OGPU 특별부장 보좌관으로, 이후에는 OGPU 합의부 산하 제르진스키 특수목적사단의 사단장 겸 군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0년에는 부대를 이끌고 다게스탄과 아제르바이잔으로 보내져 집단화시기의 농민봉기를 진압했다.
1930년 9월부터 1933년 4월까지 아제르바이잔 GPU 의장 직무를 수행했다.
그 뒤 모스크바로 돌아와 OGPU 국경경비·군대총국장이 되었고, 이 조직은 1934년 NKVD 국경·내무경비총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옛 후견인 예브도키모프가 야고다와 최악의 관계였음에도 프리놉스키 자신은 인민위원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는 스탈린의 신임도 누렸다.
예브도키모프와 마찬가지로 1920년 남서전선 특별부에서 근무할 당시 스탈린을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조프는 NKVD에 임명되기 전부터 프리놉스키를 알고 있었다.
국가보안기관을 감독하던 중앙위원회 서기로서 그는 인민위원부 고위간부 가운데 몇 명을 정보원으로 두었다.
이들은 체키스트기관의 상황, 야고다가 주재한 회의에서 논의된 문제 등을 예조프에게 보고했다.
프리놉스키도 그 정보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36년 여름 모스크바에 와 있던 예브도키모프는 예조프와 프리놉스키를 집으로 초대했다.
체키스트기관의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예조프는 몇몇 사건을 이야기한 뒤, 자신이 NKVD에서 일한다면 프리놉스키를 부인민위원으로 삼고, 중앙기구에는 북캅카스 NKVD국 출신을 데려오겠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프리놉스키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렸다.[274]
내무인민위원이 된 예조프는 프리놉스키를 부인민위원으로 임명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제는 그를 제1부인민위원으로 승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조프는 프리놉스키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점심을 먹고, NKVD 업무를 상의했으며, 다른 부인민위원은 부르지 않는 작전회의에도 그를 초대하기 시작했다.
1937년 초의 어느 대화에서 예조프는 프리놉스키를 제1부인민위원직에 가장 적합한 후보로 보고 있으며, 지도자에게 관련청원을 제출할 생각임을 내비쳤다.
그러나 프리놉스키는 승진을 기뻐하기는커녕 온갖 방식으로 거절했다.
자신은 국가보안기관에서 복무한 거의 모든 기간을 군대의 지휘·전투직에서 보냈기 때문에 작전·체키스트 업무에 익숙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예조프는 그의 말을 모두 들었지만 뜻을 바꾸지 않았다.
2·3월 전원회의가 끝난 뒤 다시 만났을 때에는 프리놉스키를 제1부인민위원으로 추천하기로 최종결정했다고 알렸다.
4월 중순 예조프는 프리놉스키를 자기 아파트로 불러 NKVD의 예정된 인사개편을 이야기했다.
뒤이어 NKVD 서기국장 Ya. A. 데이치, 비밀정치부장 V. M. 쿠르스키, 예조프의 부인민위원 M. D. 베르만과 L. N. 벨스키가 대화에 합류했다.
예조프는 모인 사람들에게 프리놉스키를 제1부인민위원으로 임명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프리놉스키는 평소처럼 사양하면서 자신 대신 L. N. 벨스키를 제안했다.
그러나 벨스키는 즉시 거절했다.
그러자 참석자 모두가 프리놉스키에게 제안된 직책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프리놉스키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곧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체포가 이미 결정된 K. V. 파우케르를 대신할 경호부장으로 예조프는 그 자리에 있던 V. M. 쿠르스키를 제안했다.
동시에 그를 또 한 명의 부인민위원으로 임명하려 했다.
쿠르스키도 프리놉스키처럼 사양하며 북캅카스변경 NKVD국장 I. Ya. 다긴을 대신 추천했다.
다긴을 경호부장으로 임명하자는 생각은 과거 예브도키모프가 내놓았고 프리놉스키도 지지했다.
그러나 예조프는 다긴이 정치국에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반면 서시베리아변경 NKVD국장 시절 능력을 보여준 쿠르스키는 당 지도부에 알려져 있었으므로 더 적합한 후보라는 판단이었다.
쿠르스키 문제가 해결되자 나머지 인사변동은 비교적 빠르게 합의되었다.
이 인사는 다음 정치국 회의에서 승인된 뒤 효력을 갖게 되었다.
프리놉스키와 쿠르스키의 승진은 1937년 봄 시작된 북캅카스 체키스트 집단의 팽창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이었다.
예조프는 ‘예브도키모프의 둥지’ 출신자에게 기대를 걸고, 야고다시대 간부들을 이들로 적극적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우선 지방조직에서 이런 교체가 진행되었다.
전 북캅카스변경 NKVD국장 I. Ya. 다긴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뒤 나는 예조프의 대기실에서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예조프가 미로노프, 데이치, 쿠르스키, 모두 전 북캅카스 출신이었다, 등과 함께 집무실에서 나왔다.
예조프는 나와 인사한 뒤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 사람이 지도자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다.
저 사람들이 말하듯 여기는 간부가 너무 오래 고여 있다.’
예조프는 데이치, 쿠르스키와 미로노프를 손으로 가리켰다.
‘중앙기구와 지방으로 보낼 책임간부를 여기에서 몇 명이나 데려갈 수 있나?’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많습니다. 많습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나는 최근 중앙기구와 다른 변경으로 이미 이동한 체키스트 숫자를 제시하며, 북캅카스변경 기구를 약화시키지 말아달라고 예조프에게 요청했다.
예조프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네에게는 사람이 많다.’
데이치와 쿠르스키도 예조프를 지지하며 북캅카스 출신 스무 명 정도는 NKVD국장이나 부국장으로 충분히 발탁할 수 있다고 말했다.”[275]
실제로 거의 그렇게 되었다.
1937년 말이 되자 북캅카스 NKVD국 출신자들은 러시아공화국의 변경·주·자치공화국 NKVD국과 내무인민위원부 14곳을 지휘하고 있었다.
국가보안총국 부서 세 곳도 북캅카스 출신자들이 이끌었다.
북캅카스 NKVD국 외에도 스탈린의 인척 S. F. 레덴스가 지휘하던 모스크바주 NKVD국, 예조프와 가까운 L. M. 자콥스키가 이끌던 레닌그라드 NKVD국, 1937년 4월까지 프리놉스키가 지휘한 국경·내무경비총국도 지도간부 쇄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조프는 국가보안총국의 여러 책임 있는 자리를 당기구에서 자신과 함께 일하다 NKVD로 이동한 옛 동료들에게도 맡겼다.
처음 이들은 행정경제국, 서기국, 인사부, 등록기록부 같은 보조부문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1937년 봄부터 본격적인 체키스트 업무에도 투입되었다.
5월 M. I. 리트빈이 비밀정치부장이 되었고, 7월에는 I. I. 샤피로와 S. B. 주콥스키가 각각 특수부와 작전기술부를 이끌었다.
V. E. 체사르스키가 계속 등록기록부를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1937년 7월 말에는 국가보안총국 열두 개 부서 가운데 네 곳이 예조프의 당기구 동료들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예조프가 당기구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자기 노선을 집행하거나 다른 체키스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별집단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예조프는 적어도 겉으로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동등하며 ‘자기 사람’을 특별대우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다.
때로는 이 노력이 직무윤리상 허용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전 NKVD 직원 E. V. 부리닌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느 날 예조프의 복도를 지나가다가, 예조프가 복도에 서서 샤피로를 무언가 때문에 거칠게 꾸짖는 장면을 보았다.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276]
다른 체키스트 G. N. 룰로프의 증언도 있다.
“언젠가 예조프의 집무실에 코간, 나, 룰로프, 글레보프와 다섯 명가량이 더 있었다.
체사르스키가 들어와 예조프에게 무언가를 보고하고 곧바로 나갔다.
체사르스키가 나가자 예조프는 아무 이유도 없이 온갖 말로 그를 헐뜯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체사르스키가 끝장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뒤 체사르스키는 두 번째 훈장을 받았고 비밀정치부장, 이어 모스크바주 NKVD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277]
스탈린과 예조프의 견해에 따르면 NKVD의 많은 부서는 야고다시대에 침투한 인민의 적들로 오염되어 있었다.
따라서 인민위원부 숙청과 함께 새로운 피를 수혈하여 조직을 쇄신하기로 했다.
이미 1936년 12월부터 NKVD에서 ‘당의 영향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파견된 당 활동가들의 첫 집단이 예조프의 처분 아래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참들은 국가보안총국의 여러 부서, 주로 방첩부·비밀정치부·특별부·운수부에서 실습한 뒤 정식 체키스트가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로네시시 당위원회 제2서기 A. M. 알레마소프, 스탈리노고르스크 화학콤비나트 당위원회 서기 A. F. 보예친과 수많은 중간급 당 관료가 직업을 바꾸었다.
1937년 4월 17일 정치국은 중앙위원회 산하 고급당조직자학교 수강생 50명을 추가로 NKVD에 실습시키기로 결정했다.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뒤 국가보안총국 체계의 작전업무에 투입하기 위해서였다.
1937년 내내 국가보안총국과 지역 국가보안부서는 당과 콤소몰이 보낸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후 중앙기구와 지역 NKVD조직의 지도직에 임명되었다.
앞에서 말한 A. M. 알레마소프와 A. F. 보예친은 각각 타타르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1937년 7월,과 쿠르스크주 NKVD국장, 1937년 11월,이 되었다.
이들과 동시에 들어온 쿠이비셰프주의 한 사탕무 국영농장 정치부장 A. D. 발라무토프는 1938년 비밀암호부장이 되었다.
새 집단의 형성은 1937년 내내 계속되었다.
하지만 여름이 끝날 무렵 예조프는 이미 어떤 지시든 수행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충분히 전투력 있는 동료집단을 손에 넣고 있었다.
22. 사령부를 향한 포화
NKVD 숙청의 바퀴가 완전히 속도를 내고 별다른 돌발사태 없이 진행되는 것을 확인한 스탈린은 1937년 4월 말 체제의 두 번째 핵심기반인 노동자·농민적군, RKKA,을 강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앞 장에서 말했듯 1930년부터 1931년에도 군대를 한 차례 뒤흔들었다.
혁명 뒤 볼셰비키 편으로 넘어와 적군에서 복무하던 전 제정군 장교와 장군을 몰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수천 명이 ‘반혁명 장교조직’에 속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많은 사람이 총살되었다.
1936년 중반 ‘트로츠키·지노비예프 통합 테러센터’ 재판이 진행되면서 군 내부에 숨어 있는 적을 찾는 활동은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이번에는 과거 당내 반대파에 가담했거나 동조했던 군인이 주된 박해대상이었다.
1937년 봄 시작된 새로운 숙청단계에서는 이전의 탄압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경력에 아무 흠도 없지만 충성심에 관해 스탈린이 의심을 품은 사람까지 제거해야 했다.
스탈린은 많은 고위·중견 지휘관이 자신에게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나 적어도 의심했다.
그의 오랜 전우이자 국방인민위원인 K. E. 보로실로프의 경우에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했다.
보로실로프를 반대하는 세력은 제1부국방인민위원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를 중심으로 상당히 조직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보로실로프를 식견이 좁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군대의 현대화를 방해하여 잠재적 적국의 군대보다 뒤처지게 만드는 사람으로 보았다.
보로실로프가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지도자가 부하에게 가장 높이 평가한 자질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스탈린이 잘 알고 있던 명백한 단점들을 상쇄했다.
한편 스탈린은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보로실로프의 반대자들이 지닌 전문능력도 그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럴 만한 근거도 있었다.
자신을 탁월한 전략가로 여긴 투하쳅스키는 실제 내전에서 언제나 진정한 지휘관에게 필요한 능력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20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그가 이끈 서부전선이 당한 참패였다.
자기 병력을 과대평가하고 적을 과소평가했으며, 정보자료를 무시하고 군지휘에서 결함을 드러낸 결과, 후방과 단절되고 연속된 전투로 지친 소련군 집단은 바르샤바 근교에서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젊은 시절 투하쳅스키에게 있었던 모험주의는 이후에도 나타났다.
1930년 1월 레닌그라드군관구 사령관이던 그는 군대개편에 관한 의견을 작성하여 보로실로프에게 보냈다.
그가 상상한 적군은 보병·기병사단 260개와 전차 5만 대, 항공기 4만 대를 갖추어야 했다.
비교하면 그보다 반년 전 승인된 군사건설 5개년계획은 1933년 말까지 전차 약 5천 대와 항공기 3천5백 대를 보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국가의 경제능력을 완전히 무시한 이 거대한 계획은 상당히 터무니없어 보였다.
이를 읽은 스탈린에게는 짜증만 불러일으켰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투하쳅스키 동지의 ‘계획’이 유행하는 ‘좌익’ 문구에 도취되고, 서류와 사무실에서 만들어낸 최대주의에 빠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계획에서는 분석이 ‘숫자놀음’으로 바뀌었고, 적군의 성장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전망은 공상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계획’을 실행한다는 것은 국가경제와 군대를 확실하게 망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반혁명보다도 더 나쁠 것이다.”[278]
투하쳅스키에게는 정치적 문제도 있었다.
1930년 체포된 프룬제군사아카데미 교원 N. E. 카쿠린과 I. A. 트로이츠키는 투하쳅스키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투하쳅스키를 자신에게 충성하는 간부들을 주변에 모으며, 우익반대파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장악하고 군사독재를 세울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진술했다.
스탈린은 이 진술을 완전히 신뢰했던 듯하다.
그는 G. K. 오르조니키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체키스트들이 얻은 정보를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렇다면 투하쳅스키는 반소비에트분자들의 포로가 되었고, 우익대열의 반소비에트분자들에게 철저히 가공되었다는 뜻이다.
자료를 보면 그렇게 나온다.
이것이 가능한가?
물론 배제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가능하다.
보아하니 우익은 중앙위원회, 콜호스와 소브호스, 공업의 볼셰비키적 성장속도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군사독재까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279]
당시에는 카쿠린과 트로이츠키의 진술이 허구라는 사실, 실제로도 그랬다,을 스탈린에게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병적으로 의심이 많은 지도자가 투하쳅스키를 향한 불신을 완전히 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스탈린이 적군의 근본적인 숙청을 투하쳅스키와 그 주변에서 시작하기로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일은 1937년 4월 21일 시작되었다.
그날 예조프는 스탈린과 협의하여 그의 이름 앞으로 다음과 같은 특별보고를 보냈다.
“오늘 우리는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해외정보원에게서 다음 정보를 받았습니다.
투하쳅스키 동지가 런던의 대관식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는 동안, 독일 정보기관의 지령을 받은 자들이 그를 대상으로 테러행위를 벌일 계획입니다.*
테러행위를 준비하기 위해 네 명으로 구성된 집단이 만들어졌습니다. 독일인 세 명과 폴란드인 한 명입니다.
정보원은 이 테러가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려는 의도로 준비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동 중과 런던에서 투하쳅스키 동지의 완전한 안전을 보장할 경호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투하쳅스키 동지의 런던행을 취소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280]
- 투하쳅스키는 5월 12일 예정된 조지 6세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할 소련대표단의 구성원으로 런던에 가게 된다는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스탈린은 예조프가 만들어낸 이 이야기를 다른 정치국원들에게 돌려 읽게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였다.
“유감스럽지만 예조프 동지의 제안에 동의해야 한다.
보로실로프 동지에게 다른 후보를 제출하라고 해야 한다.”[281]
결국 런던에는 국방 부인민위원이자 적군 해군총사령관 V. M. 오를로프가 갔다.
한편 투하쳅스키 주변에서는 즉시 활발한 수사작업이 시작되었다.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최근 체포된 전 NKVD 국가보안총국 특별부장 M. I. 가이와 전 소련 내무부인민위원 G. E. 프로코피예프가 고위군부의 반혁명활동과 관련해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심문받았다.
체키스트와 군인의 오랜 상호반감 때문에 이런 정보를 얻는 일이 비교적 쉬울 것이라고 기대했던 듯하다.
이 계산은 어느 정도 맞았다.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투하쳅스키와 일부 측근을 불리하게 만드는 상당히 명확한 진술을 얻을 수 있었다.
4월 25일 심문에서 프로코피예프는 국가전복을 준비했다는 전 내무인민위원 야고다가 투하쳅스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음모자들의 군사력을 지휘하는 인물로 이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야고다는 1933년 독일정보기관의 정보원을 통해 받은 자료를 당 지도부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독일군 지휘부와 접촉한 고위군인의 성이 ‘T’로 시작한다는 정보였다.
야고다는 이것이 투하쳅스키라고 즉시 판단하고 관련자료를 모두 가져간 뒤 사건을 진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야고다는 국방인민위원 보로실로프에게 적대적인 투하쳅스키 주변인사들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는 군 계급심사에서 원수가 아니라 1급 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데 불만을 품은 벨로루시군관구 사령관 I. P. 우보레비치가 있었다.
1935년 모스크바군관구 사령관직에서 해임된 데 불만을 품은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원장 A. I. 코르크와 다른 지휘관도 포함되었다.
야고다는 국가권력을 장악할 때 이들에게 의존하려 했다는 것이다.
프로코피예프는 전 영국 주재 소련 무관 V. K. 푸트나와 전 레닌그라드군관구 부사령관 V. M. 프리마코프도 과거 투하쳅스키 주변의 군인집단에 속했다고 말했다.
‘트로츠키·지노비예프 통합 테러센터’ 사건수사에서는 푸트나와 프리마코프가 군대 내 트로츠키주의 군사조직의 참가자라는 진술이 나왔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1936년 8월 체포되었고, 이후 감옥에서 과거의 트로츠키주의 연계에 관해 때때로 심문을 받고 있었다.
4월 26일에는 야고다도 수사에 협력하는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예조프에게 심문받은 그는 자신의 ‘범죄활동’에 관한 몇 가지 세부사항을 말했지만, ‘군사음모’ 관련진술을 하도록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날 얻어낸 최대의 성과는, 야고다가 국가보안총국 작전부장 M. I. 가이에게 군인들과 접촉하여 음모에 이용할 사람들을 선발하라고 지시했다는 ‘자백’이었다.
4월 26일 저녁 예조프는 최근 며칠 동안의 업무결과를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이후의 지시를 받았다.
아마 바로 이때 지도자의 지시를 기록하는 그의 수첩에 다음 메모가 나타났다.
“볼로비치를 특별히 심문할 것.”[282]
전 국가보안총국 작전부 부부장 Z. I. 볼로비치는 프로코피예프의 진술에서 야고다가 프리마코프·푸트나 등 군사음모자들과 관계를 맺는 데 이용한 인물로 언급되었다.
4월 27일 볼로비치는 ‘특별심문’을 받았다.
그는 투하쳅스키가 체키스트와 군부가 함께 벌인 음모에 참가했으며, 군부대를 이용해 음모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상세한 진술을 했다.
체포된 체키스트들의 진술은 ‘군사음모’ 사건을 정치궤도로 쏘아 올린 일종의 로켓역할을 했던 듯하다.
스탈린은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 확보한 ‘정보’를 보여주어 상황의 심각성을 납득시키고 필요한 지지를 얻었다.
이제 군인들 자신을 수사에 끌어들일 때였다.
전 NKVD 직원들의 진술은 당연히 상당히 일반적인 내용에 머물러 있었다.
사건을 믿을 만하게 보이려면 군사음모자들의 구체적인 범죄 ‘사실’, 날짜와 ‘공범’의 이름 등 체포된 체키스트에게서 얻기 어려운 정보가 필요했다.
‘음모’의 개념 자체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투하쳅스키는 야고다의 군사문제 보좌관 정도로 묘사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예조프는 1937년 5월 5일 스탈린과 다시 만났을 때 새로운 지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는 이미 체포된 군인, 특히 투하쳅스키의 가장 가까운 주변인물인 프리마코프와 푸트나에게서 투하쳅스키와 그 집단을 불리하게 만드는 자료를 얻는 데 집중하라고 권고했던 듯하다.
당시 NKVD의 손에는 이미 군단장·사단장·여단장 등 고위군인 약 20명이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과거 반대파활동 참여, ‘인민의 적’과의 관계, ‘비밀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집단’ 소속 등 여러 ‘범죄’ 때문에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일부는 죄를 인정했고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이들은 권력장악을 위한 음모, 간첩활동과 다른 중대한 국가범죄라는 훨씬 심각한 내용을 자백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정된 ‘수사’는 NKVD 국가보안총국 특별부의 소관이었다.
예조프는 특별부 직원들이 필요한 모든 자백을 얻어내리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기에는 이들을 노골적인 조작으로 직접 몰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는 부하들의 눈에 자신을 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반혁명투사로 보이고 싶어 했다.
따라서 자신의 임무가 진짜로 중요하고 책임 있는 업무라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것은 예조프가 지금 가장 먼저 평가받게 될 수사의 ‘품질’과 속도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수사초기, 진술을 처음 축적하는 단계에서 예조프는 모스크바주 NKVD국도 사건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모스크바 체키스트의 관할대상은 모스크바군관구의 군인이었고, 그나마 최고위층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예조프가 모든 내용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모스크바주 NKVD국 부국장 A. P. 라지빌롭스키였다.
1935년 L. B. 자프란 사건에서 중대한 정치적 오류를 범했던 그는 예조프의 보호로 책임을 피했다.
예조프는 이제 라지빌롭스키가 아무리 의심스러운 지시라도 수행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해 뒤 라지빌롭스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37년 5월 어느 휴일에 나는 프리놉스키가 있던 예조프의 집무실로 불려갔다.*
프리놉스키는 내가 이제 예조프에게서 개인적인 임무를 받게 되며, 그것을 신속하고 결단력 있게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스크바주 NKVD국 자료에 고위군인이 등장하는지를 물었다.
내가 모스크바군관구에서 체포 중인 군인 몇 명을 말하자, 프리놉스키는 첫 번째 과제는 적군 내부에 존재하는 크고 깊은 음모의 그림을 확대하는 것이며 나도 이에 참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주 NKVD국은 군인 외에도 바로 전날인 1937년 5월 5일 어느 철도병원 건설책임자였던 예비역 여단장 M. E. 메드베데프를 체포했다.
메드베데프는 과거 적군 방공국장이었지만 1934년 국유재산 낭비 때문에 해임되고 당에서도 제명된 사람이었다.
프리놉스키의 말을 듣고 나는 국가에 거대한 군사음모가 존재한다는 과장된 사건을 준비하려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했다.
그 음모를 적발하면 중앙위원회 앞에서 예조프와 프리놉스키의 거대한 역할과 공적이 분명해질 터였다.
곧 예조프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프리놉스키가 나를 부른 이유를 설명했느냐고 물었다.
프리놉스키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예조프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주겠다고 말했다……”
“예조프가 내게 내린 임무는 체포된 전 적군 방공국장 메드베데프의 심문을 즉시 시작하고, 적군에 군사음모가 존재하며 최대한 넓은 범위의 인물이 참여했다는 진술을 받아내라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메드베데프에게 사용할 물리적 압박방법을 선택할 때 주저하지 말라고 직접 지시했다.
메드베데프가 가능한 한 많은 고위군인의 이름을 말하게 해야 하며, 이름을 많이 기록할수록 프리놉스키가 앞서 내게 설명한 과제의 실현에 가까워진다고 특별히 강조했다.
메드베데프를 심문하면서 나는 그가 체포되기 3년에서 4년 전에 이미 적군에서 해임되었고, 체포 직전에는 어떤 병원건설의 부책임자로 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메드베데프는 반소비에트활동과 적군 군인들과의 관계를 전부 부인했다.
군에서 해임된 뒤에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메드베데프의 진술을 예조프와 프리놉스키에게 보고하자, 두 사람은 그에게서 음모와 관련된 연계를 ‘짜내고’ 다시 한번 수단을 가리지 말라고 했다.
메드베데프가 오래전에 군부와 단절된 사람이고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내게 명백했다.
그러나 예조프와 프리놉스키의 지시를 수행하면서 나는 그에게 군사음모가 존재하고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고 진술하게 했다.
이후의 심문, 특히 예조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프리놉스키에게 구타당한 뒤, 메드베데프는 수많은 고위군인의 이름을 말했다.
사건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메드베데프가 말한 관계가 허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진술이 거짓이고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나와, 이후에는 예조프와 프리놉스키에게도 계속 말했다.
그럼에도 예조프는 이 심문조서를 중앙위원회에 보고했다.”[283]
- 앞 장에서 이야기했듯 라지빌롭스키는 1935년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수용소에서 탈출한 자프란을 지원하는 대신 감옥에 보냈다. 이후의 사건을 보면 이 회상에서 말한 휴일은 1937년 5월 6일로 보인다.
메드베데프에게서 강제로 받아낸 진술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월 6일, 적군 방공국 직원 가운데 소비에트권력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된다는 몇 사람을 고발했다.
5월 8일, 모스크바군관구 부사령관 B. M. 펠드만이 이끄는 트로츠키주의 군사조직에 참여했다고 진술했다.
5월 10일, 우랄군관구 부사령관 M. I. 바실렌코와 적군 군사공병아카데미 원장 I. I. 스몰린에게서 들었다는 형태로 적군 안에 ‘군사반혁명조직’이 존재한다고 진술했다.
이 조직의 목적은 “소비에트권력을 전복하고 자본주의를 복원한 군사독재를 수립하며, 그에 앞서 침략자의 무장원조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조직은 독재자 후보인 M. N. 투하쳅스키, 키예프군관구 사령관 I. E. 야키르,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원장 A. I. 코르크가 이끈다고 했다.
메드베데프의 말에 따르면 V. M. 프리마코프와 V. K. 푸트나도 1936년 8월 체포되기 전까지 음모자의 지도집단에 속했다.
이제 국가보안총국 특별부를 수사에 투입할 때였다.
5월 14일 특별부 직원들은 메드베데프의 진술에서 언급된 V. M. 프리마코프와 V. K. 푸트나를 ‘강도 높은 방식’으로 심문하기 시작했다.
푸트나는 부티르카교도소 병원의 병상에서 곧바로 끌려나와 레포르토보교도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밤새 심문받았다.
그 결과 음모관련 ‘정보’는 ‘확인’되었고 수많은 새로운 세부사항이 추가되었다.
프리마코프에게서는 음모를 이끄는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보로실로프를 대신할 국방인민위원 후보로 I. E. 야키르를 가장 적절하게 보았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야키르는 철저히 신분을 숨긴 트로츠키의 요원으로서 가장 비밀스러운 지령을 수행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프리마코프는 고위·중견 지휘관 가운데 다른 음모자 18명의 이름을 말했다.
푸트나는 1935년 투하쳅스키에게 트로츠키가 보낸 편지를 직접 전달했다고 ‘자백’했다.
편지에는 음모에 참가하라는 직접적인 제안이 있었고, 편지를 읽은 투하쳅스키는 즉시 동의했다고 했다.
푸트나는 다른 ‘음모자’ 9명의 이름도 말했다.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제2과장 A. A. 아브세예비치는 1962년 이러한 진술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이야기했다.
“심문에서 질문과 답변은 특별부장 레플렙스키가 작성했다.
프리마코프가 말한 성명들은 조서에 들어갔지만, 그가 설명한 대화와 만남의 의미는 문장 속에서 강화되어 음모활동으로 격상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프리마코프가 대규모 고위군인 집단을 고발하는 진술이 조작되었다.”[284]
아브세예비치는 계속 말했다.
“체포된 프리마코프와 푸트나는 장기간의 독방수감, 빈약한 교도소 급식, 자기 옷 대신 입은 낡은 적군 면제복, 군화 대신 신은 짚신, 오랜 기간 머리와 수염을 깎지 못한 상태, 레포르토보교도소 이송과 마지막으로 예조프에게 불려간 일 때문에 도덕적으로 무너져 진술하기 시작했다.”[285]
그러나 프리마코프와 푸트나를 무너뜨린 것은 발에 신은 짚신이나 예조프에게 불려간 일이 아니라 A. A. 아브세예비치와 부하들이 사용한 심문방법이었다.
이들이 5월에 수행한 업무는 지도부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다른 수사관들에게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예조프는 푸트나와 프리마코프의 진술을 스탈린·몰로토프·보로실로프·카가노비치에게 보낸 뒤, 조서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을 체포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이 순간부터 애초 모든 일이 겨냥했던 적군의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새로 체포된 사람들에게서 다음 ‘공범’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짜냈고, ‘음모자’의 범위는 빠르게 커졌다.
5월 22일 M. N. 투하쳅스키가 체포되었다.
일주일 뒤 ‘음모’의 또 다른 핵심인 I. E. 야키르와 I. P. 우보레비치도 체포되었다.
6월 5일에는 이미 고위지휘관 100명 이상이 체포된 상태였다.
그 가운데 투하쳅스키를 포함한 여덟 명이 모의재판에 참가할 사람으로 선정되어 각자의 사건이 하나의 집단사건으로 합쳐졌다.
1937년 6월 11일 스탈린이 직접 선발한 전국적으로 유명한 군지휘관들로 구성된 소련 최고재판소 특별재판부는 ‘군사음모’ 사건을 심리하여 피고인 여덟 명 전원에게 총살형을 선고했다.
1937년 5월 시작된 군 숙청은 이후 약 1년 반 동안 계속되었고, 그 사이 국가의 군 수뇌부는 거의 완전히 소멸했다.
1937년 5월 국방인민위원 산하 군사평의회 위원 81명 가운데 1938년 말까지 자유로운 상태로 남은 사람은 겨우 10명이었다.
두 명은 체포 직전 자살했고, 나머지 69명은 체포되었다.
그중 64명은 이후 총살되었고, 두 명은 수사 중 사망했으며, 두 명은 장기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에 단 한 사람만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고위층뿐 아니라 상급지휘관도 큰 피해를 입었다.
다만 이 계층에서는 탄압비율이 비교적 낮았다.
예를 들어 1937년 당시 대령 계급을 가진 군인 1천7백여 명 가운데 약 3백 명, 즉 대략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체포되었다.[286]
빈자리를 채운 지휘관들은 ‘대테러’의 연옥을 통과하고, 모든 단계의 특별부로부터 거의 확대경을 들이댄 듯한 조사를 받았다.
스탈린은 이들을 전임자들보다 훨씬 신뢰했다.
하지만 이들의 충성심조차 100퍼센트 확신하지는 않았다.
이는 1941년 전쟁 직전에 군대를 또 하나의 탄압물결이 덮쳤을 때 확인되었다.
다만 그 물결은 1937년에서 1938년만큼 파괴적이지는 않았다.
23. 생존의 기술
1937년 5월 중순 스탈린이 시작한 숙청의 다음 표적은 당 중앙위원회가 되었다.
예조프의 부하들은 1936년 가을부터 당조직을 적극적으로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이유는 당에 존재한다는 반혁명집단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예조프는 “주저하지 말고 더 대담하게 행동하라”고 권했다.
업무규모가 크고 정보망이 약하므로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일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런 피해를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지역에서는 이런 지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제각각이었다.
그 사례가 당시 지도부가 교체된 서시베리아변경 NKVD국이었다.
신임 국장 S. N. 미로노프는 1936년 12월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그는 전임자 V. M. 쿠르스키와 부국장 A. I. 우스펜스키가 예조프의 최신지침을 실행한 방식을 보고, 인민위원이 권한 ‘대담함’을 보여주기는커녕 예조프의 표현대로 ‘주저’하기 시작했다.
미로노프는 서시베리아 체키스트들의 불법행위를 설명하는 편지를 예조프에게 보내고, 자신에게 부국장으로 남겨진 A. I. 우스펜스키를 변경 밖으로 이동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직접 만나 이 문제를 제기했다.
2년 뒤 미로노프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37년 2월 말 2·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다.
2월 말인지 3월 초인지 예조프에게 보고하면서 나는 그에게 문자 그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쿠르스키와 우스펜스키가 케메로보 사건을 적발한 데 큰 공을 세웠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구의 실제상황과 수사사건의 상태를 숨기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판단으로는 쿠르스키, 특히 우스펜스키가 거의 모든 작전직원을 허구의 조서제작에 끌어들였습니다.
그 결과 진짜 중대한 반혁명사건을 확대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누구를 건드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완전히 무고한 사람에게 씌운 가짜사건들과 뒤엉켜 있습니다.’
- ‘케메로보 사건’은 케메로보광산 ‘첸트랄나야’ 탄광 폭발사건을 말한다. 제19장 참조.
예조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는 신경이 약하다. 더 강한 신경을 가져야 한다.
우스펜스키와 쿠르스키는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고 서시베리아 기구는 가장 건전한 기구다.
오히려 우리는 자네에게서 부장수준을 넘어선 사람을 많이 데려가 승진시킬 것이다.
자네가 우스펜스키와 함께 일할 수 없다면 내가 데려가서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겠다.’
그는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2월 말 모스크바에 오기 전 서시베리아에 머물렀던 두 달 동안, 도착한 지 5일이나 6일째부터 거의 날마다 데이치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데이치는 예조프의 지시라며 모든 변경과 주에서 사건을 확대하는데, 쿠르스키가 떠난 뒤 서시베리아만 ‘잠자고’ 있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가 불만이라고 말했다.
내가 서시베리아에 온 지 5일이나 6일밖에 안 되었고 사건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도 없었으며, 쿠르스키가 그린 것처럼 상황이 훌륭하지도 않다고 말하면 데이치는 늘 같은 답을 했다.
‘나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가 불만이라고 자네에게 말하는 것이다.
결론은 자네가 알아서 내려라.
니콜라이 이바노비치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말을 전한다.’”
“게다가 NKVD에서는 날마다 심문조서와 각종 진술이 여러 무더기씩 도착했다.
특히 레닌그라드에서는 자콥스키, 북캅카스에서는 류시코프, 우랄에서는 드미트리예프*, 그리고 중앙기구에서 적발했다는 온갖 반소비에트조직에 관한 자료가 들어왔다.
주로 당조직 내부에 반소비에트집단과 조직이 적발되었다는 조서가 배포되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당시 백위군조직이나 독일·폴란드 간첩조직 같은 사건의 조서가 배포된 사례는 한 건도 떠오르지 않는다.
- L. M. 자콥스키, G. S. 류시코프, D. M. 드미트리예프는 각각 레닌그라드·아조프흑해·스베르들롭스크 NKVD국장이었다.
데이치는 전화하면서 자콥스키·류시코프·드미트리예프, 한 번은 다긴까지,가 훌륭한 사건을 처리하며 사건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고 있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가 대단히 만족한다고 말하곤 했다.
모든 NKVD기관을 날마다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일종의 심리적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프리놉스키에게 보고할 때에도 나는 서시베리아 상황을 똑같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철학을 하고 사건을 재검토하는 일은 환영받지 못한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의 불만은 정당하다.
자네는 이제 서시베리아의 신임국장이 아니다.
성과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
지금은 업무결과를 몇 달이나 몇 년 뒤가 아니라 며칠 안에 보여주어야 하는 속도다.’
그는 내가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해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해한다고 대답했다.”[287]
지역 NKVD기관의 다른 책임자들도 그 의미를 이해했다.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리에 오래 남지 못했다.
곧 전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각급 당위원회 지도자와 위원들을 향한 진정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첫 타격은 1936년 말 아조프흑해변경 당조직에 가해졌고 다른 지역들이 뒤따랐다.
체포된 당 활동가들에게서 얻어낸 ‘진술’은 체키스트들을 노멘클라투라의 더욱 높은 단계로 이끌었다.
1937년 5월이 되자 당의 최고사령부인 중앙위원회를 공격하기 위한 모든 전제조건이 마련되었다.
당시 중앙위원회는 이미 몇 명의 위원을 잃었다.
I. P. 토브스투하와 A. M. 슈테인가르트는 사망했고, S. M. 키로프는 살해되었으며, G. K. 오르조니키제와 M. P. 톰스키는 자살했다.
또한 1937년 2·3월 전원회의 전까지 A. S. 예누키제, G. Ya. 소콜니코프와 Yu. L. 퍄타코프가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고 체포되었다.
전원회의에서는 N. I. 부하린과 A. I. 리코프가 제거되었다.
마지막으로 1937년 3월 28일 전 내무인민위원 G. G. 야고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야고다는 2·3월 전원회의 뒤 탄압된 최초의 중앙위원이었다.
야고다가 체포되고 사흘 뒤 정치국은 중앙위원들에게 이 조치가 옳았음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스탈린의 서명이 들어간 통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통신인민위원 야고다가 내무인민위원으로 재임하던 기간과 통신인민위원부로 이동한 뒤 저지른 반국가적·형사범죄가 발견되었다.
이에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야고다를 당에서 제명하고 즉시 체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정치국은 야고다를 단 하루라도 자유상태로 두는 것이 위험하므로 즉시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음을 중앙위원들에게 알린다.
정치국은 야고다의 당·중앙위원회 제명과 체포를 승인해달라고 중앙위원들에게 요청한다.”[288]
- 반국가적·형사범죄란 야고다의 부하 일부가 정부의 승인을 받아 해외에서 수행한 다이아몬드 거래에서 벌였다고 주장된 각종 조작을 의미하는 듯하다.
중앙위원들의 동의가 내려왔다.
그 뒤 1개월 반 동안은 이와 같은 요청으로 그들을 다시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적인 고요였다.
1937년 5월 중순부터 당 최고위층의 탄압이 대량처리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5월 17일부터 30일까지 불과 2주 동안 중앙위원들은 동료 여섯 명의 체포에 동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가운데에는 ‘군사음모’ 사건의 M. N. 투하쳅스키, I. E. 야키르, I. P. 우보레비치와,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부의장이자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인 Ya. E. 루주타크, 스베르들롭스크주 당위원회 제1서기 I. D. 카바코프, 러시아공화국 경공업인민위원 K. V. 우하노프가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가 반혁명 음모조직에 속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루주타크·투하쳅스키·야키르·우보레비치는 간첩혐의도 받았다.
같은 기간 중앙위원들은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Sh. Z. 엘리아바와 중앙검사위원 M. D. 오라헬라시빌리를 당에서 제명하고 모스크바에서 추방하는 데에도 동의했다.
두 사람은 ‘그루지야 트로츠키주의 중앙’의 활동을 알고도 이를 당 지도부에 숨겼다는 혐의였다.
일부 중앙위원은 동료들에게 제안된 조치에 단순히 찬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감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공화국 지방공업인민위원 I. P. 주코프는 야고다 관련질의서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찬성!!! 이 악당이 폭로된 것을 특히 환영한다.”[289]
적군 기병감찰관 S. M. 부됸니는 Ya. E. 루주타크와 M. N. 투하쳅스키 관련질의서에 이렇게 썼다.
“당연히 찬성한다. 이 악당들은 처형해야 한다.”[290]
전연방노동조합중앙평의회 서기 G. D. 베인베르크는 옛 당 동료들의 탄압에 동의하는 문서를 작성하면서 실수했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긴 편지를 따로 써야 했다.
1937년 5월 26일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낸 진술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루주타크와 투하쳅스키의 당 제명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카바코프·우하노프·엘리아바·오라헬라시빌리의 중앙위원회와 당 제명에 찬성할 때 ‘그 사건을 NKVD로 넘긴다’는 문구를 실수로 덧붙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이 반혁명적 배신자들, 당과 소비에트권력과 조국의 반역자 모두를 당에서 제명하는 것뿐 아니라 사건을 NKVD로 넘기고, 이 극악한 인민의 적을 소련법의 모든 엄중함으로 처단하는 데에도 찬성한다.”[291]
- 베인베르크는 이 부분에서 지나치게 앞서갔다. I. D. 카바코프와 K. V. 우하노프는 실제로 체포동의를 요청한 대상이었지만, Sh. Z. 엘리아바와 M. D. 오라헬라시빌리에 관해서는 당 제명과 모스크바 추방만을 요청했다. 물론 두 사람도 이후 체포되었다.
5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중앙위원 체포승인 요청은 중단되었다.
스탈린은 전술을 바꾸었다.
앞으로 며칠과 몇 주 동안 체포할 사람이 너무 많았으므로, 매번 제기된 혐의를 짧은 설명서로 처리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 상층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논리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형성된 상황에 상응하는 조치에 대한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 일은 다음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만 가능했다.
전원회의는 1937년 6월 20일 소집하기로 계획되었다.
곡물종자 개선, 올바른 윤작제 도입, 기계·트랙터정비소 업무개선, 새 선거법에 따른 소비에트 선거준비 같은 부차적인 문제와 함께, 의제에는 겉보기에는 눈에 띄지 않는 ‘현안’이라는 항목이 들어갔다.
스탈린은 아마 이 자리에서 인민의 적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중앙위원회 내부에 침투했는지를 알리고, 상황에 맞는 조치를 승인받으려 했을 것이다.
이후 이 마지막 의제는 첫 번째 항목으로 올라갔다.
6월 19일 전원회의 최종일정이 승인되었을 때, 6월 23일로 개막이 연기된 회의일정에는 더 이상 모호한 ‘현안’이 없었다.
논의할 문제의 첫머리에는 「예조프 동지의 보고」가 놓였다.
6월 23일 저녁 전원회의가 개막했다. 회의에 배정된 일곱 날 가운데 나흘이 첫 번째 의제를 논의하는 데 쓰였다.
예조프의 보고도, 그 뒤에 이어진 토론도 속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논의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는 그날들에 채택된 전원회의 결정들을 통해서만 판단할 수 있다.
첫 번째 결정은 6월 25일 자였다. 정치적 신뢰를 상실했다는 이유로 일곱 명이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며칠 사이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같은 날 채택된 또 하나의 결정에서는 “당과 조국에 대한 배신 및 적극적인 반혁명활동”을 이유로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19명이 당에서 제명되었다. 이들의 사건은 NKVD에 넘기도록 지시되었다.
그러나 이 지시는 이미 벌어진 일을 사후적으로 확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정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사실상 모두 이미 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6월 26일에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G. N. 카민스키에 관한 별도의 결정이 채택되었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당에서 제명되었고, 같은 날 체포되었다.*
- 또한 6월 29일 전원회의가 끝나기 직전, 스탈린은 전날 체포되어 “음모자들의 범죄행위에 관여한” 중앙위원회 위원 두 명과 후보위원 한 명을 당에서 제명하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얻었다. 해당 결정이 각 지역으로 발송되기 전에는 막 체포된 또 한 명의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이름이 ‘음모자’ 명단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결과와 앞선 전원회의에서 부하린·리코프 사건이 논의된 방식을 고려하면, 예조프의 보고는 중앙위원회 구성원 개개인의 ‘범죄활동’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모아놓은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토론에 나선 사람들은 과거 동료들에게 제기된 혐의에 동조하면서, 예조프가 제시한 ‘정보’에 새로운 사실과 이름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그 견해에 따르면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의 옛 친위대’가 스탈린과 예조프가 가동한 테러의 수레바퀴를 멈추려 했으나 패배했다는 것이다.
이 주제를 다룬 최초의 출판물 가운데 하나인 A. V. 안토노프오프세옌코의 『폭군의 초상』, 1980년 뉴욕 출간,은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앞두고 몇몇 고참 공산당원이 어느 아파트에 모여 저녁차를 마셨다. 퍄트니츠키, 카민스키…… 그리고 필라토프였다.
대화의 주제는 스탈린, 그의 지도방식과 당 안의 견딜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들은 스탈린을 지도부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테러정책을 규탄하고, 스탈린을 서기장 자리에서 교체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찻잔’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모임은 주인에게 알려졌다. 동료들을 밀고한 사람은 필라토프였다. 스탈린은 나중에 밀고자를 포함하여 그들을 모두 제거했다.”[292]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이에 관한 자료가 소련 언론에도 등장했다.
이제 이야기는 당 원로들이 스탈린의 노선에 반대할 의도를 품었다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 방향에서 행동했다는 내용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의료위원회 수석의사 I. I. 무코보스는 1991년 출간된 『그들은 침묵하지 않았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37년 6월 소련 보건인민위원 G. N. 카민스키를 만나려고 모스크바에 왔던 무코보스는 그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참석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도 그곳으로 갔다고 한다.
“나는 최고기관 출입증을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일회용 방청권을 발급받았다. 나는 측면의 귀빈석으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이미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회의는 스탈린이 주재했다. 연단에는 내무인민위원 예조프가 서 있었다. 그는 최근 당원 가운데 인민의 적으로 적발되어 체포된 사람이 몇 명인지 보고하고, NKVD 기관이 유죄판결을 내린 사람의 이름과 직책을 열거했다.
예조프의 발언이 끝나자 전원회의 참석자들은 짓눌린 듯 침묵했다.
‘질문이나 발언을 할 사람이 있습니까?’ 의장이 회의장에 물었다.
대답은 무덤 같은 침묵이었다.
‘누구든 의견을 말할 사람이 없습니까?’ 스탈린이 다시 물었다.
다시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모를 줄에서 카민스키가 일어났다.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중앙위원회 위원과 정부 구성원을 NKVD 직원들이 당규약을 위반하면서 체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열거한 여러 ‘인민의 적’을 나는 정직하고 사회주의의 대의에 충실한 공산당원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스탈린이 분노하며 말을 끊었다.
‘당신도 우연히 그 적들의 친구인 것은 아니오?’
‘그들은 결코 내 친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그들과 같은 밭에서 난 열매라는 뜻이군!’
몇 차례 더 말이 오간 뒤 극도로 흥분한 스탈린은 휴회를 선언했다.
나는 인민위원부에도 들르지 않고 역으로 달려가 그날 저녁 집으로 떠났다. 다음 날 사람들이 나를 잡으러 왔다……”[293]
이 이야기는 카민스키가 앞선 2·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어떤 발언을 했는지 모른다면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카민스키는 당 간부와 체키스트, 그리고 그들의 전임 책임자 G. G. 야고다가 안일함과 부주의 때문에 인민의 적의 활동을 놓쳤다고 맹렬히 규탄했다.
그는 적과의 투쟁을 마땅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스탈린과 예조프를 찬양했다.
1933년에는 스탈린 암살을 계획했다고 주장된 위장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자신이 폭로하는 데 참여했다고 이야기했다.
보건인민위원부 직원들이 의료계에 틀림없이 적지 않을 파괴공작원과 사보타주범을 아직 자기 힘으로 적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294]
더구나 일회용 방청권을 받은 외부인이 중앙위원회의 비공개 회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자체가 완전히 터무니없다.
첫 번째 의제를 논의할 때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은 문서보관소에 남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I. I. 무코보스의 이름은 그 안에 없다.
그럼에도 카민스키가 전원회의에서 발언했고, 곧이어 특별결정으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당에서 제명되어 같은 날 체포된 사실은 맞다.
다만 이유는 전혀 달랐다.
N. S. 흐루쇼프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카민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당이 알아야 할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20년 내가 바쿠로 파견되어 아제르바이잔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와 바쿠소비에트 의장으로 근무할 때, 이 자리에 있는 베리야 동지*가 바쿠가 점령되어 있던 시기**에 무사바트파 방첩기관에서, 아니면 그보다 앞서 영국정보기관에서 일했다는 끈질긴 소문이 돌았습니다.’
누구도 반박에 나서지 않았다. 베리야조차 이 문제에 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침묵뿐이었다.”[295]
- L. P. 베리야: 그루지야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18∼1919년 영국군의 바쿠 점령을 말한다. *** 무사바트: 1918∼1920년 아제르바이잔의 집권당.
흐루쇼프는 카민스키의 발언을 상당히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 분명한 스탈린 노선에 대한 비판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L. P. 베리야가 1919∼1920년 아제르바이잔 부르주아정부의 방첩기관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특별히 큰 비밀도 아니었다.
베리야 자신은 현지 사회민주주의 정당 ‘훔메트’의 지시를 받고 그 조직을 위해 일하러 들어갔다고 언제나 주장했다.
1920년 아제르바이잔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국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고, 당시 카민스키도 그 회의에 참석했다. 여러 증인이 베리야의 설명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베리야에게는 어느 시기에나 적이 넘칠 만큼 많았고, 이들은 그의 ‘어두운 과거’에 관한 소문을 정기적으로 퍼뜨렸다.
1920년대 초부터 카민스키와 베리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당시 한 사람은 아제르바이잔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였고, 다른 사람은 현지 체카 부의장이었다.
카민스키는 이제 6월 전원회의의 연단을 과거의 적을 실각시키는 데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 가운데 누구를 ‘인민의 적’으로 분류하고 누구를 제외할지를 결정할 권리는 나라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있었다. 그 사람은 베리야에 관해 누구에게도 지시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폭로자료는 오래된 것이었고, 단순히 개인적 원한을 갚는 행동으로 보였다. 카민스키와 베리야 사이의 관계를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민스키의 발언이 도발로 평가되어 같은 날 그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탈린 정책에 대한 항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6월 전원회의에서 옛 당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증언 가운데 하나는 전 코민테른 직원 A. G. 크릴로프의 회고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감옥과 수용소에서 나는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참가자 가운데 아직 살아 있던 몇 사람을 만났다.
전 NKVD 직원 툼발라는 자신도 이미 수사를 받고 있으면서 카민스키의 발언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도발적이었다’고 표현했다.
보로네시주 당위원회 서기와 포스티셰프*의 보좌관 가운데 한 사람도 나와 같은 감방에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카민스키 외에 중앙위원회 위원 퍄트니츠키, 하타예비치, 추도프, 류브첸코, 셰볼다예프 등 모두 열두 명에서 열다섯 명가량이 스탈린의 탄압정책에 반대하여 발언했다.
회의 사이의 휴식시간에는 내무인민위원 부인민위원 프리놉스키가 복도를 돌아다니며 담배를 피우고, 담배로 사람을 가리키면서 ‘이자를 잡고, 저자도 잡아’라고 했다.
다음 날 예조프는 전날 발언한 사람들이 모두 적발된 반혁명조직의 구성원이라고 보고했다.
스탈린은 개인적으로는 일부 사실을 의심하지만, 지금은 가장 뜻밖이고 믿기 어려운 일도 밝혀지는 시대이므로 NKVD에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고 덧붙였다.
그 뒤 체포된 사람들은 물론 모두 총살되었다. 셰볼다예프는 판결조차 없이 죽었다.
노릴스크수용소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류브첸코의 아들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간 바로 그날 아내를 쏜 뒤 자살했다고 말했다.
이 사람들은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발언함으로써 자기 사형판결에 서명했다.”[296]
- P. P. 포스티셰프: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이 증언은 문장마다 반박할 부분이 있다.
크릴로프가 이름을 든 여섯 명의 ‘반란자’ 가운데 두 명은 물리적으로 전원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M. S. 추도프는 아마 체포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초대받지 못했다.
B. P. 셰볼다예프는 전원회의가 열리기 이미 두 주 전에 체포되었다.
스탈린 정책에 반대했다고 주장되는 M. M. 하타예비치와 P. P. 류브첸코는 첫 번째 의제논의가 끝난 뒤 다른 의제를 다루는 토론에서 발언했다.
류브첸코는 6월 27일 소련 최고소비에트 선거문제를, 하타예비치는 6월 28일 곡물종자 개선문제를 논의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 사람이 첫 번째 의제를 논의할 때 지도자가 보기에 금지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랬다면 발언자 명단에서 곧바로 삭제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항의자들’이 이튿날 ‘적발된 반혁명조직의 구성원’이라고 선언되었다면, 류브첸코와 하타예비치는 어떻게 그런 운명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류브첸코가 자살한 것도 6월 전원회의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이 아니라 두 달 뒤였으며, 이유도 완전히 달랐다.
회의 사이에 프리놉스키가 복도를 돌아다니면서 담배로 체포할 사람을 가리켰다는 대목은 논평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중앙위원회 위원은 당시에도, 다른 어떤 시대에도 그런 식으로 체포되지 않았다.
따라서 크릴로프가 열거한 스탈린 노선의 투사 가운데 추도프와 셰볼다예프는 물리적으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하타예비치와 류브첸코는 다른 의제논의에 계속 참가한 사실로 보아 지도자 관점에서 아무런 부적절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카민스키의 발언이 무엇이었는지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남는 사람은 I. A. 퍄트니츠키다.
그가 6월 전원회의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관한 주요정보는 L. M. 카가노비치와 그의 전 서기 V. S. 구베르만의 아들이 나눈 대화를 전한 이야기에서 나온다.
구베르만은 이 대화내용을 퍄트니츠키의 아들에게 알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1988년 『모스콥스키예 노보스티』에 실렸고, 이후 여러 출판물을 거쳐 1998년 출간된 퍄트니츠키의 아들 V. I. 퍄트니츠키의 『스탈린에 대한 음모』에 수록되었다.*
- 책 제목은 내용 전체를 정확히 반영하지 않는다. 열여섯 장 가운데 6월 전원회의를 다룬 것은 한 장뿐이며, 그 장에서 ‘음모’를 이야기한다. 나머지는 주로 코민테른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전원회의에서는 스탈린의 제안으로 이른바 우익반대파 지도자, 특히 N. I. 부하린의 이후 운명이 논의되었다.
스탈린은 우익반대파 대표 전원을 육체적으로 제거하고, 예조프에게 ‘인민의 적’과 싸울 비상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I. A. 퍄트니츠키가 뜻밖의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부하린과 동료들을 육체적으로 제거하는 데 반대했다.
분파활동의 처벌로는 당에서 제명하여 정치활동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이후에는 이들의 경험과 지식을 국민경제에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퍄트니츠키는 예조프에게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데에도 반대했다.
그가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행정부장으로 일하면서 국가보안기관에서 당의 지시가 어떻게 집행되는지를 비롯한 여러 문제를 감독했고, 예조프가 인민위원부에서 육성한 심문방법을 접했기 때문에 그러한 전권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NKVD와 예조프 개인의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다음 날 전원회의는 예조프의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예조프는 NKVD가 퍄트니츠키가 혁명 이전 제정 비밀경찰의 정보원이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그에게 정치적 불신임을 표명하자고 제안했다.
전원회의는 다수결로 예조프의 제안을 지지했다.
보로파예프, 카민스키, 크룹스카야 세 사람이 반대표를 던졌고, 스타소바 한 사람은 기권했다고 한다.
전원회의는 퍄트니츠키가 자신을 변호하고 혐의를 반박하도록 2주의 시간을 주었다.
L. M. 카가노비치와 V. S. 구베르만이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퍄트니츠키의 발언에 관해 실제로 대화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위 이야기에 나타난 몇 가지 이상한 점은 지적해야 한다.
첫째, 퍄트니츠키가 부하린을 당에서 제명하는 데 그치고 이후 그의 경험과 지식을 국민경제에 활용하자고 말했다는 주장은 너무 늦은 제안으로 보인다.
부하린은 이미 당에서 제명되고 체포되어 있었다.
이 제안은 사실상 그를 석방하자는 말과 같았다.
더구나 부하린은 분파활동 때문이 아니라 국가범죄 혐의로 제명되고 체포되었다.
지난 넉 달 동안 예조프의 부하들은 악명 높은 ‘우익반대파’ 지도자들의 반혁명활동을 보여준다는 새로운 ‘증거’를 많이 만들어냈다.
부하린 자신도 석 달간 침묵한 끝에 이미 자백하기 시작했다. 예조프가 전원회의 보고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을 리 없다.
따라서 그를 국민경제에서 활용하자는 이야기는 나올 수 없었다.
둘째, ‘부하린을 육체적으로 제거하는 문제’를 전원회의에서 다시 제기할 필요도 없었다.
이 문제는 앞선 2·3월 전원회의에서 이미 논의되었다.
총살을 포함한 여러 처분안 가운데 스탈린의 제안에 따라 겉으로는 더 인도적인 방안, 즉 부하린과 리코프의 사건을 NKVD에 넘기는 방안이 선택되었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계속 NKVD의 구금 아래 있었다.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할 이유가 없었다.
부하린과 리코프는 더 이상 중앙위원회 구성원이 아니었으므로, 이들의 운명은 이제 중앙위원회가 아니라 법원이 결정해야 했다. 실제 재판은 여덟 달 뒤에 열렸다.
셋째, 퍄트니츠키가 NKVD의 심문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도 매우 의심스럽다.
그가 이끌던 중앙위원회 정치행정부는 사법기관에서 당 결정이 어떻게 이행되는지를 검사하고 인사정책 등을 감독했다.
외부의 눈에 철저히 감추어진 전문적 수사방법까지 감독한 것은 아니었다.
넷째, 예조프가 퍄트니츠키에게 제기했다는 제정 비밀경찰 협력혐의는 그에 관한 형사사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사건기록에는 전혀 다른 혐의가 적혀 있다.
퍄트니츠키의 아내가 쓴 일기에도 그가 트로츠키주의와의 관련성을 이유로 고발되었다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297]
당시 트로츠키주의는 무엇이든 의미할 수 있었지만, 제정경찰과의 협력을 의미한 것만큼은 아니었다.
다섯째, 카가노비치의 말에 따르면 퍄트니츠키에 대한 정치적 불신임에 반대한 사람은 보로파예프, 카민스키, 크룹스카야 세 명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실제로 반대표를 던질 수 있었던 사람은 크룹스카야뿐이다.
보로파예프는 중앙위원도, 이 전원회의의 참가자도 아니었다.
카민스키는 전날 이미 체포되었다.
이 설명이 1988년 『모스콥스키예 노보스티』에 처음 실리고, 카가노비치가 사망한 지도 7년이 지난 1998년 출간된 『스탈린에 대한 음모』에서는 그의 회상이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 있었다.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그 가운데 크룹스카야와 리트비노프가 있었고 한 명은 기권했다. 카가노비치는 그가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마 스타소바였다고 말했다.”[298]
그러나 스타소바 역시 이 전원회의 참가자가 아니었다.
다시 6년이 지나자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카가노비치가 ‘반대’표를 던진 세 번째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내고, 어떻게든 이해관계자들에게 알린 듯하다.
적어도 2004년 출간된 『오시프 퍄트니츠키와 역사의 저울 위에 놓인 코민테른』에서 V. I. 퍄트니츠키는 문제의 문장을 세 번째 판본으로 제시했다.
“‘아니요’라고 단호히 발언한 사람은 N. K. 크룹스카야, M. M. 리트비노프, M. F. 블라디미르스키 세 사람뿐이었다.”[299]
M. F. 블라디미르스키는 중앙감사위원장이었으므로 전원회의에 참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앙위원이나 후보위원이 아니었으므로 ‘찬성’이든 ‘반대’든 표를 던질 수 없었다.
역사적 증언을 이처럼 자유롭게 수정했다는 사실과, 앞서 살펴본 6월 전원회의에서 퍄트니츠키가 했다는 발언의 의심스러운 대목들을 고려하면 이 주장을 신뢰할 만하다고 볼 수 없다.
퍄트니츠키가 실제로 발언했고 그 내용이 스탈린의 반감을 사서 이후 사건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 정도만 추정할 수 있다.
1937년 7월 7일 퍄트니츠키는 체포되었고, 1년 뒤 총살되었다.
그러나 지도자를 불쾌하게 만든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옛 당 친위대가 치른 ‘마지막 전투’라는 전설에는 짧게라도 언급해야 할 꽤 기이한 변형도 있다.
V. I. 퍄트니츠키는 『스탈린에 대한 음모』에서 백계 러시아 망명자들의 정보조직인 ‘농민러시아’의 정보보고를 인용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1937년 6월 23일부터 29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예조프는 국가보안기관이 “당과 소비에트 기구에서 우익·트로츠키주의 반대파의 소굴을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할” 수 있도록 비상권한을 부여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카민스키와 퍄트니츠키가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카민스키는 예조프의 제안을 광기라고 불렀고, 퍄트니츠키는 NKVD의 활동을 검증하고 제한할 특별위원회를 만들자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 정보의 출처로 러시아연방국립문서보관소의 A. A. 아르구노프 기금, 문서철 제17호와 제18호라는 구체적인 문서번호까지 적혀 있다.
A. A. 아르구노프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들어진 러시아망명자 조직 ‘농민러시아’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27년 이 조직은 러시아에 부르주아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가진 ‘노동농민당’으로 개편되었다.
문서철 제17호와 제18호에는 당시 해외에서 떠돌던 소련 국내정세에 관한 온갖 소문과 험담이 수집되어 있다.
대부분 현실과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6월 전원회의에 관한 보고 자체가 없었다.
이에 대한 질의에 V. I. 퍄트니츠키는 자신이 공개한 정보는 레닌그라드의 한 역사학자에게서 받은 것이며 검증하지 않고 출판했다고 설명했다.
이 답변은 상황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그 역사학자의 저술에서는 이와 같은 ‘부정확성’이 상당히 자주 나타나 일종의 상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6월 전원회의에서 논의된 핵심문제에 관한 정보가 해외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기존의 모든 연락통로는 이미 막혀 있었다.
평소 상당히 정보가 빨랐던 망명잡지 『반대파 통보』와 『사회주의 통보』조차 이 문제를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6월 전원회의의 ‘스탈린 반대음모’ 주장은 ‘제17차 당대회 투표결과 조작’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신화로 보인다.
흐루쇼프가 19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한 비밀보고에도,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개인숭배’ 시대의 범죄를 논의할 때에도 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흐루쇼프의 ‘해빙기’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비에트 역사학에서도, 소련 해체 뒤 공개된 비밀문서에서도, 흐루쇼프·미코얀·카가노비치와 그 밖의 시대인물의 회고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중앙위원회 위원 집단이 스탈린의 탄압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면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을 텐데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1927년부터 1953년까지 유일한 사례였을 것이며, 그 독특함 때문에 기록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건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듯하다.
스탈린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은 중앙위원회 위원들도 자신들에게 그를 멈출 현실적인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조건에서 가능한 일은 자기 자신을 구하려는 시도뿐이었다.
지도자가 제안한 ‘인민의 적’ 게임에 뛰어들어 적극적인 참가자가 되거나, 모든 일이 어떻게든 가라앉고 남에게 닥친 재앙이 자신은 피해가기를 기대하며 숨을 죽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