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내려놓고도 혁명의 불씨를 지킨 남아공 공산당 지도자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경력 연표
- 1957ANC 청년동맹 가입 (15세)
- 1959–1961포트헤어 대학교에서 영문학·고전학 수학
- 1961남아공 공산당 입당
- 1962움콘토 웨 시즈웨(MK) 입대
- 1963체포 후 레소토 망명 — '크리스'로 개명
- 1967–1969로디지아 해방전쟁 — MK·ZIPRA 합동작전 참전
- 1969'하니 각서' 공동 서명 — ANC·MK 지도부 비판
- 1974ANC 전국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 1982MK 참모총장 — 루사카에서 게릴라전 지휘
- 1990ANC 합법화 후 남아공 영구 귀국
- 1991.12SACP 사무총장 취임 — 조 슬로보 후임
- 1993.4.10복스버그 자택 앞에서 극우 이민자에게 피살
하니 각서 (1969)
1967년 웡키(Wankie) 및 시폴릴로(Sipolilo) 작전이 실패한 후, 로디지아를 경유해 남아공으로 침투하려던 MK의 '루툴리 파견대'는 큰 손실을 입었다. 크리스 하니는 보츠와나에서 체포되어 1년 이상 수감된 뒤 1968년 말 루사카로 돌아왔으나, ANC 지도부는 패배의 교훈을 정리하기 위한 보고 회합조차 열지 않았다. 이에 하니는 MK 대원 6명과 함께 1969년 초 '하니 각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조 모디세(MK 총사령관), 모지스 코타네 등 망명 지도부의 안일함과 부패, 전투원과 지도부 간의 단절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니는 "ANC는 남아공 혁명투쟁의 전위이며, 그 지도자들이 MK 선서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썼다. 각서는 외교적 협상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을 지적하며 무장투쟁을 재급진화할 것을 촉구했다.
각서는 ANC 내부의 심각한 위기를 드러냈고, 이는 1969년 모로고로(Morogoro) 회의로 이어져 당 구조 개혁과 비아프리카인에게도 당원 자격을 개방하는 결정을 낳았다. 이 문건은 단순한 불만 표출이 아니라, 무장투쟁의 정치적 성격과 조직 민주주의를 둘러싼 원칙적 개입이었다. 훗날 ANC 사무총장 과데 만타셰는 2008년 하니 각서를 '모로고로, 카브웨, 폴로콰네'로 이어지는 당 쇄신의 기원으로 평가하며 논쟁적 유산을 재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