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朝鮮共産黨) · 1925–1946

조선공산당

Communist Party of Korea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비밀리에 창립된 조선의 공산당. 치안유지법 아래 거듭 검거되며 재건과 와해를 되풀이했고, 파벌 다툼 끝에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해체되었다. 1945년 9월 박헌영이 재건했으며, 1946년 이북 조직은 북조선로동당으로, 이남 조직은 남조선로동당으로 합당했다.

상세

조선 안에서 공산당을 세우려는 첫 시도는 1923년 정재달이 했으나 그는 1924년 체포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의 중국 음식점 아서원에서 15명이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다. 이날은 일본 경찰의 관심이 전조선기자대회에 쏠린 날이었다. 한국어 출처는 박헌영·김단야·조봉암 등이 창립을 주도했다고 적는다. 4월 18일 김찬의 집에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는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뽑았고, 같은 날 박헌영을 책임비서로 하는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되었다. 당은 조동호를 소련에 보내 코민테른의 승인을 구했고, 1926년 5월 승인을 받았으며 1928년 9월 1일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정식으로 가입했다.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당원들이 일본 경찰과 충돌한 일을 계기로 당 문서가 드러나 약 100명이 검거되고 8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12월 강달영이 책임비서를 이어받았고 김재봉은 체포되었다. 1926년 3월 당원은 130명이었다. 당은 순종의 장례를 계기로 6·10 만세운동을 준비했으나 권오설 등 약 160명이 검거되고 강달영도 7월 17일 체포되었다(제2차 사건). 1926년 11월 일월회 계열이 낸 정우회 선언은 민족주의자와의 통일전선을 주장했고, 12월 제2차 당대회로 재조직된 당(이른바 ML당)도 1928년 2월 대거 검거되었다. 1928년 3월 책임비서가 된 차금봉은 7~8월 검거 때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검거 인원은 영어 출처가 약 175명, 한국어 출처가 170여 명으로 적는다.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당은 1927년 결성된 신간회에 당원들을 참여시켰다. 그러나 창당 때부터 이어진 화요파·서울파·ML파 등의 파벌 다툼 때문에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 당을 해체했다. 한국어 출처는 이를 「12월 테제」에 따른 임시 해산으로 적는다. 이후 만주와 조선 안에서 이어진 재건 시도는 잇따른 검거로 실패했고, 코민테른은 1930년 당 재건 임무를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맡겼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이영 등이 장안파 공산당을 세웠고, 박헌영은 9월 11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장안파는 11월 23일 스스로 해산하고 박헌영 쪽에 합류했다. 10월 13일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치되어 김용범이 책임자가 되었고, 12월 김일성이 그 자리를 이었다. 북한 공식 사학은 10월 10일을 창당일로 기념한다. 당은 처음에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했으나 1946년 1월 3일 지지로 돌아섰다. 북조선분국은 1946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뀌어 조선신민당과 합당해 북조선로동당이 되었다. 개칭 시점은 영어 출처가 1946년 4월, 한국어 「조선로동당」 문서가 6월 22일로 다르게 적는다. 이남에서는 9월 당이 이끈 총파업에 25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참여해 대구 10·1 사건으로 번졌고, 체포령을 피해 박헌영이 10월 월북한 뒤 11월 23일 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 일부와 합당해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었다.

소속 인물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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