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중앙위원회 문화 결정 세 건: 문학·영화·음악, 1946~1948

PeopleAndrei Zhdanov, Mikhail Zoshchenko, Anna Akhmatova, Sergei Eisenstein, Dmitri Shostakovich, Sergei Prokofiev, Aram Khachaturian, Georgy Alexandrov, Pyotr Popkov, Yakov Kapustin TermsZhdanovshchina, Anti-Formalism Campaign, Socialist Realism

잡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에 관하여 — 조직국 결정 제274호, 1946년 8월 14일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레닌그라드에서 발행되는 문예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게 운영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최근 《즈베즈다》에는 소비에트 작가들의 의미 있고 성공적인 작품들과 나란히 무사상적이고 이념적으로 유해한 작품이 많이 실렸다. 《즈베즈다》의 중대한 오류는 그 작품이 소비에트 문학에 이질적인 작가 조셴코에게 문학의 연단을 내준 것이다. 《즈베즈다》 편집부는 조셴코가 오래전부터 공허하고 무내용하고 저속한 것을 쓰는 일을, 우리 청년의 방향을 흐리고 그 의식을 오염시키려는 썩은 무사상성과 저속함과 비정치성의 설교를 전문으로 삼아 왔음을 알고 있다. 조셴코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단편 「원숭이의 모험」(《즈베즈다》 1946년 제5~6호)은 소비에트의 일상과 소비에트 사람들에 대한 저속한 비방문이다. 조셴코는 소비에트의 질서와 소비에트 사람들을 추악한 희화의 꼴로 그리며, 소비에트 사람들을 원시적이고 교양 없고 어리석은, 속물적 취향과 습속의 인간으로 비방하여 그려 낸다. 우리 현실에 대한 조셴코의 악의적이고 불량배 같은 묘사에는 반소비에트적 공격이 따라붙는다.

조셴코 같은 저속배와 문학의 쓰레기에게 《즈베즈다》의 지면을 내주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다. 《즈베즈다》 편집부는 조셴코의 정체와 전쟁 중 그의 부끄러운 처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조셴코는 독일 침략자들에 맞선 소비에트 인민의 투쟁을 조금도 돕지 않으면서 「해뜨기 전」 같은 역겨운 것을 썼고,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조셴코의 문학 「창작」 전체에 대한 평가와 함께 잡지 《볼셰비크》 지면에서 이미 내려진 바 있다.

잡지 《즈베즈다》는 또한 작가 아흐마토바의 작품들을 갖은 방법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사회정치적 정체는 소비에트 공중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아흐마토바는 우리 인민에게 이질적인 공허한 무사상적 시의 전형적 대표자다. 비관주의와 퇴폐의 정신에 젖고, 부르주아·귀족적 유미주의와 데카당스,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입장에 굳어 버린 낡은 살롱 시의 취향을 표현하며, 제 인민과 발맞추어 가기를 원치 않는 그의 시들은 우리 청년 교육 사업에 해를 끼치며 소비에트 문학에서 용인될 수 없다.

조셴코와 아흐마토바에게 잡지의 능동적 역할을 내준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레닌그라드 작가들 사이에 사상적 동요와 해이의 요소를 끌어들였다. 잡지에는 소비에트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현대 서방 부르주아 문화 앞에 굽실거리는 정신을 배양하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수와 비관과 삶에 대한 환멸이 배어든 작품들이 실리기 시작했다(1946년 제1호의 사도피예프와 코미사로바의 시 등). 이런 작품들을 실으면서 편집부는 제 오류를 가중시켰고 잡지의 사상 수준을 더욱 떨어뜨렸다.

사상적으로 이질적인 작품이 잡지에 침투하도록 허용하면서 편집부는 게재되는 문학 자료의 예술적 질에 대한 요구도 낮추었다. 잡지는 예술성 낮은 희곡과 단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야그펠트의 「시간의 길」, 시테인의 「백조의 호수」 등). 게재 자료 선별에서의 이런 무분별이 잡지의 예술 수준 저하를 불러왔다.

중앙위원회는 잡지 《레닌그라드》가 특히 형편없이 운영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잡지는 조셴코의 저속하고 비방적인 글과 아흐마토바의 공허하고 비정치적인 시에 끊임없이 지면을 내주었다. 《즈베즈다》 편집부와 마찬가지로 《레닌그라드》 편집부도 외국의 모든 것 앞에 굽실거리는 정신이 배어든 일련의 작품을 실어 큰 오류를 저질렀다. 잡지는 그릇된 작품 몇 편을 게재했다(바르샵스키와 레스트의 「베를린 상공의 사건」, 슬로님스키의 「국경 초소에서」). 하진의 시 「오네긴의 귀환」에서는 문학 패러디의 겉모습 아래 현대 레닌그라드에 대한 비방이 행해졌다. 잡지 《레닌그라드》에는 주로 무내용한 저질 문학 자료가 실린다.

전위적 혁명 전통으로 이름난 영웅 도시, 언제나 전진적 사상과 전진적 문화의 못자리였던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발행되는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가 어떻게 소비에트 문학에 이질적인 무사상성과 비정치성이 잡지에 끌려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수 있었는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 편집부 오류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잡지의 지도 일꾼들, 무엇보다 그 편집자인 사야노프 동지와 리하레프 동지는, 우리의 잡지는 과학 잡지든 문예지든 비정치적일 수 없다는 레닌주의의 명제를 잊었다. 그들은 우리의 잡지가 소비에트 사람들, 특히 청년을 교육하는 사업에서 소비에트 국가의 강력한 수단이며, 따라서 소비에트 체제의 생명의 기초를 이루는 것 — 그 정치 — 에 의해 이끌려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소비에트 체제는 청년을 소비에트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정신으로, 될 대로 되라는 정신과 무사상성의 정신으로 교육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전진적인 문학인 소비에트 문학의 힘은, 그것이 인민의 이익, 국가의 이익 밖에 다른 이익이 없고 있을 수 없는 문학이라는 데 있다. 소비에트 문학의 임무는 국가가 청년을 올바르게 교육하는 일을 돕고, 청년의 요구에 답하며, 새 세대를 씩씩하고, 제 사업을 믿으며, 장애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장애든 극복할 준비가 된 사람으로 기르는 데 있다.

그러므로 무사상성과 비정치성과 「예술을 위한 예술」의 온갖 설교는 소비에트 문학에 이질적이고, 소비에트 인민과 국가의 이익에 유해하며, 우리의 잡지에 자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 지도 일꾼들의 사상성 부족은 또한, 이 일꾼들이 문학가들과 맺는 관계의 기초에 소비에트 사람들의 올바른 교육과 문학가 활동의 정치적 방향이라는 이익이 아니라 개인적·친분적 이익을 놓는 결과를 낳았다. 친분 관계를 망치지 않으려는 마음에 비판이 무뎌졌다.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명백히 쓸모없는 작품이 지면에 통과되었다. 인민과 국가의 이익, 우리 청년의 올바른 교육의 이익이 친분 관계에 희생되고 비판이 눌리는 이런 자유주의 아래서, 작가들은 자기를 갈고닦기를 멈추고, 인민 앞에, 국가 앞에, 당 앞에 지는 책임의 의식을 잃으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춘다.

이상의 모든 것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 편집부가 맡겨진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잡지 지도에서 중대한 정치적 오류를 저질렀음을 말해 준다.

중앙위원회는 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특히 그 의장 티호노프 동지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의 개선을 위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조셴코와 아흐마토바와 그 아류 같은 비소비에트 작가들이 소비에트 문학에 끼치는 유해한 영향에 맞서 싸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 문학에 이질적인 경향과 습속이 잡지에 침투하는 것을 방임하기까지 했음을 확인한다.

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는 잡지들의 최대 오류를 간과했고, 잡지 지도에서 손을 뗐으며, 조셴코와 아흐마토바류의, 소비에트 문학에 이질적인 사람들이 잡지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내주었다. 그뿐 아니라 당이 조셴코와 그의 「창작」을 어떻게 보는지 알면서도, 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카푸스틴 동지와 시로코프 동지)는 그럴 권리도 없이 올해 1월 28일 시당위원회 결정으로 조셴코가 들어간 《즈베즈다》 편집위원회의 새 구성을 승인했다. 그로써 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는 중대한 정치적 오류를 저질렀다.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는 올해 7월 6일 자에 조셴코의 창작에 대한 유리 게르만의 수상쩍은 찬양 서평을 실은 오류를 저질렀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국은 레닌그라드 잡지들의 사업에 대한 적절한 통제를 보장하지 못했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1. 잡지 《즈베즈다》 편집부, 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중앙위원회 선전국에, 본 결정에서 지적된 잡지의 오류와 결함을 무조건 제거하고 잡지의 노선을 바로잡으며 잡지의 높은 사상적·예술적 수준을 보장할 조치를 취할 것을 의무 지우되, 조셴코·아흐마토바와 그 아류의 작품이 잡지에 들어오는 길을 막는다.
  2. 현재 레닌그라드에서 두 개의 문예지를 발행할 적절한 조건이 없음을 고려하여 잡지 《레닌그라드》의 발행을 중단하고, 레닌그라드의 문학 역량을 잡지 《즈베즈다》 둘레에 집중시킨다.
  3. 《즈베즈다》 편집부의 사업에 적절한 질서를 세우고 잡지의 내용을 크게 개선하기 위하여, 잡지에 주필을 두고 그 아래 편집위원회를 둔다. 잡지의 주필이 잡지의 사상·정치적 방향과 게재 작품의 질에 전적인 책임을 지는 것으로 정한다.
  4. 예골린 아. 엠. 동지를 중앙위원회 선전국 부국장직을 유지한 채 잡지 《즈베즈다》 주필로 승인한다.
  5. 부문 편집자들과 편집위원회 구성의 심의와 승인을 중앙위원회 서기국에 위임한다.
  6. 《즈베즈다》 편집위원회에 관한 올해 6월 26일 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 결정을 정치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취소한다. 이 결정을 채택한 데 대하여 시당위원회 제2서기 카푸스틴 야. 페. 동지에게 견책을 선고한다.
  7. 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 선전 담당 서기 겸 선전선동부장 시로코프 이. 엠. 동지를 직위에서 해임하고 중앙위원회의 처분에 맡겨 소환한다.
  8. 잡지 《즈베즈다》에 대한 당적 지도를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에 맡긴다.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와, 개인적으로 주당위원회·시당위원회 제1서기 포프코프 동지에게, 잡지를 개선하고 레닌그라드 작가들 속의 사상·정치 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의무 지운다.
  9. 잡지 《레닌그라드》에 대한 형편없는 지도에 대하여 리하레프 베. 엠. 동지에게 견책을 선고한다.
  10. 잡지 《즈베즈다》가 상당한 지연을 거듭하며 발행되고 장정이 몹시 조잡함(표지가 볼품없고, 해당 호의 발행 월이 표시되지 않음)을 지적하며, 《즈베즈다》 편집부에 잡지의 정시 발행 보장과 외양 개선을 의무 지운다.
  11. 본 결정의 집행에 대한 통제를 중앙위원회 선전국(알렉산드로프 동지)에 맡긴다.
  12. 석 달 뒤 조직국에서 중앙위원회 결정의 집행에 관한 《즈베즈다》 주필의 보고를 청취한다.
  13. 본 중앙위원회 결정의 해설을 위하여 즈다노프 동지를 레닌그라드로 파견한다.

영화 《위대한 삶》에 관하여 — 조직국 결정 제277호, 1946년 9월 4일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소련 영화성이 준비한 영화 《위대한 삶》(2부, 감독 엘. 루코프, 시나리오 작가 페. 닐린)이 사상·정치적으로 유해하고 예술적으로 극히 허약함을 지적한다.

영화 《위대한 삶》의 해악과 결함은 무엇인가?

영화에는 돈바스 복구의 첫 착수라는 사소한 일화 하나만 그려져 있어, 소비에트 국가가 도네츠 분지에서 수행한 복구 사업의 실제 규모와 의의에 대한 올바른 인상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영화에서 돈바스 복구는 대수롭지 않은 자리를 차지할 뿐이고, 주된 관심은 온갖 개인적 체험과 일상 장면의 원시적 묘사에 쏠려 있다. 그로 인해 영화의 내용은 그 제목에 걸맞지 않다. 그뿐 아니라 《위대한 삶》이라는 영화 제목은 소비에트 현실에 대한 조롱처럼 들린다.

영화에는 우리 공업 발전의 서로 다른 두 시대가 명백히 뒤섞여 있다. 《위대한 삶》에 나타난 기술 수준과 생산 문화로 보면 이 영화는 스탈린적 5개년 계획의 시기에 창조된 전진적 기술과 문화의 현대 돈바스가 아니라 내전 종결 뒤 돈바스 복구기를 반영하는 것에 가깝다. 영화의 작자들은 독일 침략자들로부터 해방된 뒤의 돈바스 탄광 복구와 채탄이 현대의 전진적 기술과 노동 과정의 기계화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투박한 육체적 힘과 오래전에 낡아 버린 기술과 보수적인 작업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그릇된 인상을 관객에게 만들어 낸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전진적 기술과 높은 생산 문화에 기초한 우리 공업의 전후 복구 전망을 왜곡한다.

영화 《위대한 삶》에서 돈바스 복구 사업은, 탄광 복구를 향한 노동자들의 발의가 국가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가 기관들의 방해 속에서 광부들에 의해 수행된 것처럼 그려져 있다. 국가 기관과 노동자 집단 사이 관계에 대한 이런 묘사는 속속들이 거짓되고 그릇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의 온갖 발의와 솔선이 국가의 폭넓은 지지를 누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는 당 일꾼들이 거짓되게 그려져 있다. 복구 중인 탄광의 당 조직 서기는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 탄광 복구를 향한 노동자 발의를 지지하는 일이 마치 그를 당의 대열 밖에 세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연출자들은 마치 당이 경제 복구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을 제 대열에서 제명할 수 있는 것처럼 일을 그려 놓았다.

돈바스 복구의 정황은, 마치 조국전쟁이 돈바스의 독일 침략자들로부터의 해방으로 끝난 듯한 인상이 만들어지도록 그릇되게 그려져 있다. 영화는 돈바스 복구 초기에 군대의 동원 해제가 이루어져 모든 병사와 파르티잔이 평화로운 일로 돌아간 것처럼 일을 제시한다. 그 시기에 한창이던 전쟁은 영화에서 먼 과거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영화 《위대한 삶》은 낙후와 무교양과 무지를 설교한다. 기술적으로 문맹에 가깝고 낡은 견해와 습속을 지닌 노동자들이 지도적 직위에 대거 발탁되는 모습이 연출자들에 의해 전혀 동기 없이, 그릇되게 그려져 있다. 영화의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높이 평가받고 과감히 발탁되는 것이 낙후하고 교양 없는 사람이 아니라 교양 있고 현대적이며 제 일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이 자신의 인텔리겐치야를 만들어 낸 지금, 낙후하고 교양 없는 사람의 지도적 직위 발탁을 긍정적 현상으로 그리는 것은 터무니없고 야만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 《위대한 삶》에는 소비에트 사람들이 거짓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돈바스를 복구하는 노동자와 기사들은 도덕적 자질이 매우 낮은, 낙후하고 교양 없는 사람들로 나타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제 시간의 태반을 빈둥거리고 실없는 수다와 술타령으로 보낸다. 영화의 구상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사람들이 구제불능의 술꾼이다. 영화의 기본 주인공으로는 독일 경찰에 복무했던 자들이 등장한다. 독일 점령 아래 돈바스에 남았던, 소비에트 체제에 명백히 이질적인 유형(우시닌)이 그려지는데, 그의 부패와 도발 행위는 처벌받지 않은 채 남는다. 영화는 소비에트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습속을 입힌다. 탄광 해방 전투에서 부상한 붉은 군대 병사들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싸움터에 버려져 있고, 부상병들 곁을 지나가는 광부의 아내(소냐)는 그들에게 완전한 무관심과 냉담을 보인다. 영화에는 돈바스로 온 젊은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무정하고 모욕적인 처우가 그려져 있다. 여성 노동자들은 더럽고 반쯤 무너진 막사에 수용되어 이름난 관료주의자이자 무뢰한(우시닌)의 보호에 맡겨진다. 탄광의 지도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기본적인 배려조차 보이지 않는다. 처녀들이 배치된, 비가 새는 눅눅한 숙소를 정비하는 대신, 조롱이라도 하듯 아코디언과 기타를 든 유흥꾼들이 그들에게 보내진다.

영화는 일부 예술 일꾼들이 소비에트 사람들 속에 살면서도 그들의 높은 사상적·도덕적 자질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을 예술 작품에 제대로 그려 낼 줄 모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영화의 예술적 수준도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 영화의 개별 장면들은 흩어져 있고 공통의 구상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영화에서 개별 삽화들을 잇는 구실을 하는 것은 거듭되는 술판, 저속한 로망스, 연애 행각, 잠자리에서의 밤 수다다. 영화에 넣어진 노래들(작곡 엔. 보고슬롭스키, 가사 아. 파티야노프, 베. 아가토프)은 선술집의 우수에 젖어 있어 소비에트 사람들에게 이질적이다. 갖가지 취향, 특히 낙후한 사람들의 취향을 겨냥한 연출자들의 이 모든 저질 수법은 영화의 기본 주제 — 돈바스 복구 — 를 뒷전으로 밀어낸다. 재능 있는 소비에트 배우들의 집단은 영화의 연출자들에 의해 그릇되게 쓰였다. 배우들에게는 터무니없는 배역이 떠맡겨졌고, 그들의 재능은 원시적인 인물들과 그 성격이 의심스러운 일상 장면들의 묘사에 돌려졌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영화성(볼샤코프 동지)이 최근 유해한 영화 《위대한 삶》 말고도 그 밖의 실패작과 오류작 여럿 — 영화 《이반 뇌제》 2편(감독 에스. 예이젠시테인), 《나히모프 제독》(감독 베. 푸돕킨), 《평범한 사람들》(감독 게. 코진체프, 엘. 트라우베르크) — 을 준비했음을 확인한다.

거짓되고 그릇된 영화가 이토록 자주 만들어지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되는가? 과거에 높은 예술성의 작품들을 만들었던 이름난 소비에트 감독들 — 루코프, 예이젠시테인, 푸돕킨, 코진체프, 트라우베르크 동지들 — 은 왜 실패했는가?

문제는 많은 영화 명장들, 연출자·감독·시나리오 작가들이 자기 의무를 경솔하고 무책임하게 대하며 영화 제작에 불성실하게 임한다는 데 있다. 그들 작업의 주된 결함은 자기가 맡는 일을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감독 베. 푸돕킨은 나히모프에 관한 영화를 맡았으면서 일의 세부를 연구하지 않았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했다. 나히모프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나히모프의 삶에서 딴 삽화들을 곁들인 무도회와 춤에 관한 영화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러시아인들이 시노프에 있었다는 것, 시노프 해전에서 사령관을 필두로 한 튀르크 제독 일단이 통째로 포로가 되었다는 것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영화에서 빠져 버렸다. 감독 에스. 예이젠시테인은 영화 《이반 뇌제》 2편에서 역사적 사실의 묘사에서 무지를 드러냈다. 이반 뇌제의 진보적 군대인 오프리치니크들을 미국의 쿠클럭스클랜 비슷한 퇴폐배 무리로, 강한 의지와 성격의 인간 이반 뇌제를 성격도 의지도 약한, 햄릿 비슷한 무엇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영화 《위대한 삶》의 작자들은 현대 돈바스와 그 사람들이라는 주제의 연구에서 무지를 드러냈다.

대상에 대한 무지에,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제 일을 경솔하게 대하는 데에 쓸모없는 영화들이 나오는 기본 원인의 하나가 있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영화성이, 그리고 무엇보다 그 책임자 볼샤코프 동지가 촬영소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의 작업을 형편없이 지도하고, 제작되는 영화의 질 개선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큰 자금을 무익하게 지출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영화성의 지도자들은 맡겨진 일을 무책임하게 대하며, 영화의 사상·정치적 내용과 예술적 가치에 대해 태평하고 무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영화성 부속 예술평의회의 사업이 그릇되게 조직되어 있으며, 평의회가 개봉을 앞둔 영화들에 대한 공정하고 실무적인 비판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예술평의회는 영화에 대한 판단에서 자주 비정치성을 드러내고 그 사상적 내용에 거의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예술평의회의 많은 성원이 영화 평가에서 원칙성을 보이지 않고, 영화 연출자들과의 개인적 친분 관계에서 출발하여 영화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예술평의회가 영화 《위대한 삶》을 심의하면서 그 사상적 내용을 가려내지 못하고 유해한 자유주의를 드러내며 전혀 근거 없는 높은 평가를 준 것은 오직 이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영화 부문에서의 비판의 부재, 영화 창작 일꾼들 사이의 끼리끼리 감싸는 풍토가 나쁜 영화가 만들어지는 주요 원인의 하나다.

예술 일꾼들은, 앞으로도 제 일을 무책임하고 경솔하게 대하는 자는 전진적 소비에트 예술의 뱃전 밖으로 밀려나 퇴물이 되기 쉽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소비에트 관객은 성장했고 그 문화적 요구와 기준은 높아졌으며, 당과 국가는 앞으로도 인민 속에 좋은 취향과 예술 작품에 대한 높은 기준을 길러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1. 이상의 이유로 영화 《위대한 삶》 2부의 개봉을 금지한다.
  2. 소련 영화성과 영화성 부속 예술평의회에, 영화 《위대한 삶》에 관한 중앙위원회 결정에서 필요한 교훈과 결론을 끌어내고, 앞으로 이와 같은 영화가 나올 온갖 가능성이 배제되도록 예술영화 사업을 조직할 것을 제의한다.

베.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에 관하여 — 정치국 결정, 1948년 2월 10일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10월 혁명 30주년의 날들에 소련 볼쇼이 극장이 무대에 올린 오페라 《위대한 우정》(음악 베. 무라델리, 대본 게. 므디바니)이 음악에서나 줄거리에서나 유해한 반예술적 작품이라고 본다.

오페라의 기본 결함은 무엇보다 오페라의 음악에 뿌리박고 있다. 오페라의 음악은 표현력이 없고 빈약하다. 그 안에는 기억에 남는 선율이나 아리아가 하나도 없다. 음악은 어수선하고 부조화하며, 끊임없는 불협화음 위에, 귀를 찢는 소리의 조합 위에 세워져 있다. 선율을 자처하는 개별 소절과 장면들은 정상적인 사람의 청각에 완전히 이질적이고 듣는 이를 짓누르는 어지러운 소음으로 갑자기 끊긴다. 음악 반주와 무대 위 행위의 전개 사이에 유기적 연관이 없다. 오페라의 성악 부분 — 합창·독창·중창 — 은 초라한 인상을 준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관현악단과 가수들의 가능성은 쓰이지 못한 채 남는다.

작곡가는 소련 여러 인민의 창작이, 특히 오페라에 그려진 행위가 펼쳐지는 북캅카스 여러 인민의 창작이 그토록 풍부하게 지닌 인민 선율과 노래와 가락과 춤곡의 보고를 이용하지 않았다.

음악의 거짓된 「독창성」을 좇아 작곡가 무라델리는 고전 오페라 일반의, 특히 러시아 고전 오페라의 가장 좋은 전통과 경험을 무시했다. 내적 충실성, 선율의 풍부함과 폭넓은 음역, 인민성, 우아하고 아름답고 명료한 음악 형식으로 이름난 러시아 고전 오페라는 그 덕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오페라가, 인민의 폭넓은 층이 사랑하는 다가가기 쉬운 음악 장르가 되었다.

1918~1920년 북캅카스에서의 소비에트 권력 수립과 인민 우호를 위한 투쟁을 그린다고 자처하는 오페라의 줄거리는 역사적으로 거짓되고 인위적이다. 오페라에서는 그루지야인과 오세티야인 같은 캅카스 인민들이 그 시대에 러시아 인민과 반목했다는 그릇된 인상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거짓이다. 그 시기 북캅카스에서 인민 우호 수립의 방해자는 인구시인과 체첸인이었기 때문이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무라델리 오페라의 실패가, 무라델리 동지가 들어선, 소비에트 작곡가의 창작에 거짓되고 파멸적인 형식주의의 길의 결과라고 본다.

중앙위원회에서 열린 소비에트 음악 활동가 협의회가 보여 주었듯이, 무라델리 오페라의 실패는 개별 사례가 아니라 현대 소비에트 음악의 불건전한 상태와, 소비에트 작곡가들 사이의 형식주의적 경향의 만연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일찍이 1936년, 데.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군의 맥베스 부인》의 등장과 관련하여 중앙위원회 기관지 《프라우다》에서 데. 쇼스타코비치 창작 속의 반인민적·형식주의적 왜곡이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고, 이 경향이 소비에트 음악 발전의 운명에 갖는 해악과 위험이 폭로된 바 있다[1936년 1월 28일 자 논설 「음악 대신 혼돈」 — 옮긴이]. 당시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나선 《프라우다》는 소비에트 인민이 자기 작곡가들에게 내거는 요구를 명료하게 정식화했다.

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또한 잡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에 관하여, 영화 《위대한 삶》에 관하여, 극장 상연 목록과 그 개선책에 관하여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그 결정들에서 내린 지시들을 거슬러, 소비에트 음악에서는 아무 개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민의 인정을 받아 널리 퍼진 새 노래들의 창작, 영화 음악의 창작 등에서 일부 소비에트 작곡가들이 거둔 개별적 성공은 전체 판도를 바꾸지 못한다. 특히 나쁜 것이 교향악과 오페라 창작 부문의 사정이다. 형식주의적·반인민적 경향을 고수하는 작곡가들이 문제다. 이 경향은 데. 쇼스타코비치, 에스. 프로코피예프, 아. 하차투랸, 베. 셰발린, 게. 포포프, 엔. 먀스콥스키 동지들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가장 온전한 표현을 찾았다. 그들의 창작에는 소비에트 인민과 그 예술적 취향에 이질적인 형식주의적 왜곡과 반민주주의적 경향이 특히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런 음악의 특징적 표지는 고전 음악의 기본 원리들의 부정, 음악 형식 발전의 「진보」와 「혁신」의 표현이라는 무조성·불협화·부조화의 설교, 선율이라는 음악 작품의 가장 중요한 기초의 포기, 음악을 불협화음으로, 소리의 혼돈스러운 퇴적으로 바꿔 놓는 어수선하고 신경증적인 조합에 대한 탐닉이다. 이 음악에서는 부르주아 문화의 쇠망을, 음악 예술의 전면 부정을, 그 막다른 골목을 반영하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현대 모더니즘 부르주아 음악의 정신이 짙게 풍긴다.

형식주의적 경향의 본질적 표지는 또한, 여러 독립적 선율 선의 동시적 결합과 전개에 기초하는 다성 음악과 다성 가창의 포기, 그리고 흔히 가사조차 없는 단선율·제창 음악과 가창에 대한 탐닉이다. 이는 우리 인민에게 고유한 다성적 음악·가창 구조의 파괴이며 음악의 빈곤화와 쇠퇴로 이끈다.

러시아와 서방 고전 음악의 가장 좋은 전통을 짓밟고 그 전통을 「낡았다」느니 「구식이다」느니 「보수적이다」느니 하며 내던지고, 고전 음악의 기법을 성실하게 익히고 발전시키려 애쓰는 작곡가들을 「원시적 전통주의」와 「아류」의 무리로 얕잡아 깔보면서, 많은 소비에트 작곡가들은 그릇되게 이해된 혁신을 좇아 자기 음악에서 소비에트 인민의 요구와 예술적 취향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전문가와 음악 미식가의 좁은 동아리에 틀어박혔으며, 음악의 높은 사회적 역할을 깎아내리고 그 의의를 좁혀 탐미적 개인주의자들의 일그러진 취향의 충족에 국한시켰다.

소비에트 음악의 형식주의적 경향은 일부 소비에트 작곡가들 사이에, 가사 없는 기악 교향악의 복잡한 형식에 대한 일방적 탐닉과, 오페라·합창 음악·소규모 관현악과 인민 악기와 성악 앙상블을 위한 대중 음악 같은 음악 장르에 대한 멸시의 태도를 낳았다.

이 모든 것은 성악 문화와 극작술의 기초가 상실되고 작곡가들이 인민을 위해 쓰는 법을 잊어버리는 결과로 불가피하게 이끈다. 최근 러시아 오페라 고전의 수준에 서는 소비에트 오페라가 한 편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일부 소비에트 음악 활동가들의 인민으로부터의 유리는, 그들 사이에 이런 썩은 「이론」이 퍼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많은 현대 소비에트 작곡가의 음악을 인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인민이 그들의 복잡한 음악을 이해할 만큼 아직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며, 몇 세기가 지나면 이해하게 될 것이므로, 일부 음악 작품이 청중을 얻지 못해도 당황할 것 없다는 것이다. 속속들이 개인주의적이고 뿌리부터 반인민적인 이 이론은 일부 작곡가와 음악학자들이 인민으로부터, 소비에트 공중의 비판으로부터 더욱더 담을 쌓고 제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는 것을 부추겼다.

이런 견해들과 그 유사물의 배양은 소비에트 음악 예술에 최대의 해를 끼친다. 이 견해들에 대한 관용적 태도는 소비에트 음악 문화 활동가들 사이에 그것에 이질적인 경향, 음악 발전의 막다른 골목으로, 음악 예술의 청산으로 이끄는 경향이 퍼지는 것을 뜻한다.

소비에트 음악의 유해하고 반인민적인 형식주의적 경향은 우리 음악원들에서의 젊은 작곡가 양성과 교육에도, 무엇보다 형식주의적 경향이 지배하는 모스크바 음악원(원장 셰발린 동지)에 파멸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학생들에게 러시아와 서방 고전 음악의 가장 좋은 전통에 대한 존중을 심어 주지 않으며, 인민 창작과 민주주의적 음악 형식에 대한 사랑을 길러 주지 않는다. 음악원 졸업생 다수의 창작은 데. 쇼스타코비치, 에스. 프로코피예프 등의 음악에 대한 맹목적 모방이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소비에트 음악 비평의 전혀 용인할 수 없는 상태를 확인한다. 비평가들 사이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러시아 사실주의 음악의 반대자들, 퇴폐적·형식주의적 음악의 지지자들이다.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먀스콥스키·셰발린의 작품이 새로 나올 때마다 이 비평가들은 그것을 「소비에트 음악의 새로운 정복」이라 선언하고, 그 음악 속의 주관주의·구성주의·극단적 개인주의·언어의 직업적 난해화, 곧 바로 비판받아야 마땅한 것을 찬양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에 이질적인 유해한 견해와 이론을 쳐부수는 대신, 음악 비평은 그릇된 창작 노선을 제 창작에서 나눠 가진 작곡가들을 추어올리고 「전진적」이라 선언함으로써 그 확산을 스스로 거들고 있다.

음악 비평은 소비에트 공중의 의견, 인민의 의견을 표현하기를 그치고 개별 작곡가들의 확성기로 변했다. 일부 음악 비평가들은 원칙 있는 객관적 비판 대신 친분 관계 때문에 이런저런 음악계 지도자들에게 영합하고 굽실거리며 그들의 창작을 갖은 방법으로 추어올리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일부 소비에트 작곡가들 사이에 현대의 퇴폐적인 서유럽과 아메리카 음악의 영향으로 길러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잔재가 아직 청산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소비에트 음악 전선의 이 불리한 상태가 소련 각료회의 부속 예술위원회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가 소비에트 음악 부문에서 수행해 온 그릇된 노선의 결과로 만들어졌다고 본다.

소련 각료회의 부속 예술위원회(흐랍첸코 동지)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하차투랸 동지)는 소비에트 음악에서 사실주의적 경향을 발전시키는 대신 사실상 소비에트 인민에게 이질적인 형식주의적 경향을 부추겼다. 사실주의적 경향의 기초는 고전 유산의, 특히 러시아 음악 유파 전통의 거대한 진보적 역할의 인정, 이 유산의 이용과 그 한층의 발전, 음악에서 높은 내용성과 음악 형식의 예술적 완성의 결합, 음악의 진실성과 사실성, 인민 및 그 음악·노래 창작과의 깊고 유기적인 연관, 음악 작품의 단순함·다가가기 쉬움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높은 직업적 숙련이다.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는 형식주의 작곡가 집단의 도구로 변했고 형식주의적 왜곡의 기본 못자리가 되었다. 조직위원회에는 케케묵은 공기가 만들어졌고 창작 토론이 없다. 조직위원회의 지도자들과 그 둘레에 모인 음악학자들은 지지할 가치가 없는 반사실주의적·모더니즘적 작품들을 추어올리는 반면, 사실주의적 성격과 고전 유산을 잇고 발전시키려는 지향이 돋보이는 작업들은 이류로 선언되어 주목받지 못한 채 얕잡히고 있다. 음악에서의 「혁신」과 「초혁명성」을 뽐내는 작곡가들이 조직위원회 활동에서는 가장 낡고 케케묵은 보수주의의 옹호자로 나서서, 비판의 아주 작은 표현에도 오만한 불관용을 드러내고 있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소련 각료회의 부속 예술위원회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에 만들어진 이런 상황과 소비에트 음악의 임무에 대한 이런 태도는 소비에트 음악의 발전에 최대의 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더는 용인될 수 없다고 본다. 최근 몇 해 소비에트 인민의 문화적 요구와 예술적 취향의 수준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소비에트 인민은 작곡가들에게 모든 장르 — 오페라와 교향악 부문, 노래 창작, 합창과 무용 음악 — 에서 질 높고 사상성 있는 작품을 기대한다. 우리나라에서 작곡가들에게는 무한한 창작 가능성이 주어져 있고 음악 문화의 참된 개화에 필요한 모든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 소비에트 작곡가들은 과거의 어느 작곡가도 알지 못했던 청중을 가지고 있다. 이 더없이 풍부한 가능성을 이용하지 않고 자기의 창작 노력을 올바른 사실주의의 길로 돌리지 않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1. 소비에트 음악의 형식주의적 경향을 반인민적이며 실제로 음악의 청산으로 이끄는 것으로 단죄한다.
  2.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과 예술위원회에, 소비에트 음악의 상태를 바로잡고 본 중앙위원회 결정에서 지적된 결함을 청산하며 소비에트 음악의 사실주의적 방향의 발전을 보장할 것을 제의한다.
  3. 소비에트 작곡가들에게, 소비에트 인민이 음악 창작에 내거는 높은 요구의 의식으로 스스로를 채우고, 우리 음악을 약하게 만들고 그 발전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제 길에서 내던지며, 소비에트 음악 문화를 빠르게 전진시키고 음악 창작의 모든 부문에서 소비에트 인민에게 값하는 온전하고 질 높은 작품의 창조로 이끌 창작 사업의 앙양을 보장할 것을 호소한다.
  4. 음악 사업의 개선을 겨냥한 해당 당·소비에트 기관들의 조직적 조치들을 승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