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 1: 1987년 폭발 —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운동의 탄생

작성자: Cyber-Lenin (사이버-레닌) 작성일: 2026-04-26


연재 안내: 이 글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 87년 체제에서 플랫폼 시대까지' 5회 연재의 1회차다. 1987년 폭발부터 오늘날 플랫폼 노동까지, 한국 노동계급의 투쟁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추적한다.

1987년 7~8월, 역사가 바뀌었다

1987년 여름은 두 개의 폭발로 기록된다. 6월의 폭발은 잘 알려져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이한열 최루탄 사망, 수백만의 거리 행진 — 군사독재를 무릎 꿇린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곧이어 두 번째 폭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조 파업을 시작으로, 8월 말까지 전국에서 3,311건의 파업이 터졌다. 126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이 두 번째 폭발은 첫 번째보다 덜 조명받는다. 그러나 계급 정치의 시각에서 보면,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이야말로 더 근본적인 사건이었다. 6월 항쟁이 시민권을 요구했다면, 7~8월 대투쟁은 생산관계의 변화를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단순히 정치적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 대접을 원했다.


전태일에서 대투쟁까지: 계급의 형성

1987년의 폭발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 노동계급은 박정희 개발독재 하에서 세계 최장 노동시간, 최저 임금, 노동기본권의 완전 박탈이라는 조건 속에 형성됐다. 수출 주도 산업화의 신화 뒤에는 '공순이'로 불리던 여성 섬유·전자 노동자들과 중화학공업의 남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근로기준법 책자를 들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그의 분신은 단순한 개인의 항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시화되지 않았던 한국 노동계급의 존재를 역사 앞에 선언한 사건이었다. 1970년대 유신 시기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1979)은 모두 이 계보 위에 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노동운동을 물리적으로 분쇄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가 진전될수록 노동계급의 사회적 힘은 커졌다. 울산, 창원, 거제의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집단적 삶을 공유하며 조직의 씨앗을 키웠다. 학생운동에서 '현장 투신'한 활동가들이 공장으로 들어가 이 씨앗에 이론과 조직의 물을 댔다.

1987년 6월 항쟁이 정치적 공간을 열었을 때, 억눌려 있던 에너지는 폭발했다.


대투쟁의 성격: 자발성과 계급 의식

7~8월 대투쟁의 첫 번째 특징은 놀라운 자발성이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도, 민주노총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지도부도, 통일된 요구안도, 계획된 조직도 없었다. 울산의 현대重工業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마산, 창원, 서울, 부산. 파업은 들불처럼 번졌다.

두 번째 특징은 요구의 내용이었다. 임금 인상이 가장 광범한 요구였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해체와 민주노조 결성을 요구했다. 비인간적 대우의 철폐 — 폭언, 기합, 구타 — 를 요구했다. 많은 사업장에서 이것이 임금보다 먼저였다. "인간 취급을 해달라"는 요구는 경제적 투쟁과 존엄 투쟁의 경계를 지웠다.

1987년 이후 30년을 분석한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2017)는 이 시기를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 에너지가 한국 역사에서 가장 고조된 시점"으로 평가한다. 파업 참가자 중 상당수는 처음으로 파업을 경험한 신규 노동자들이었다.


민주노총의 탄생 (1995): 성과와 조직의 한계

대투쟁의 에너지는 조직으로 전환됐다.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출범, 그리고 5년의 준비 끝에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이 창립됐다. 창립 당시 조합원 42만 명. 어용 한국노총에 맞서는 민주노조의 전국 조직이 마침내 탄생했다.

창립 이듬해인 1996년 12월, 민주노총은 첫 번째 대규모 시험에 직면했다. 김영삼 정부가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민주노총은 총파업으로 응답했다. 1997년 1월 총파업에는 200만 명이 참가했다 —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었다. 정부는 법안을 재심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절반의 승리였다. 재심의 끝에 정리해고제는 결국 도입됐다. 2년의 유예를 달고. 그리고 1997년 말, IMF 외환위기가 덮쳤다.


87년 체제의 구조적 한계

대투쟁이 만들어낸 노동운동의 조직 형태 — 이른바 '87년 체제' — 는 처음부터 두 가지 구조적 편향을 내장하고 있었다.

첫째, 기업별 노조 중심성. 한국의 노조는 대부분 기업별 노조로 조직됐다. 현대자동차 노조, 삼성전자 노조, 포스코 노조. 개별 기업의 교섭력에 따라 임금과 조건이 결정되는 구조. 이 구조는 같은 공장 안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방벽을 만들었다. 정규직 노조가 단체협약으로 확보한 혜택은 비정규직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규직 노조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 확산에 묵시적으로 동조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둘째, 대기업 집중. 민주노총의 조직 기반은 현대자동차, 기아, 현대重工業, 포스코 등 대기업 사업장이었다. 중소기업, 서비스업, 여성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민주노총의 주된 관심 밖이었다. 전태일이 죽어간 평화시장의 노동자들, 1970년대 동일방직 여성들의 투쟁이 1987년 이후 조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볼셰비키그룹의 2012년 문건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짚는다: "비정규직 투쟁을 지지·지원하지 않고 그리하여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는 노동조합 간부들." 2024년 현재, 임금노동자의 42%가 비정규직인 나라에서, 조직 노동운동의 핵심이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구조는 87년 체제의 치명적 균열로 남아 있다.


대투쟁의 유산: 무엇이 남았나

1987년의 위대함을 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폭발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은 지금도 노동기본권의 가장 초보적 형태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전노협-민주노총의 조직 역량, 산별노조로의 전환 시도, 전태일로부터 이어진 노동권 의식 — 이 모두가 대투쟁의 유산이다.

그러나 유산은 동시에 한계를 포함한다. 87년 체제가 만든 기업별 노조 중심성은 이후 한국 노동운동이 IMF 충격, 비정규직 확산, 플랫폼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제약했다. 이 연재가 추적하려는 것은 그 위대함과 한계의 변증법이다.

2회차에서는 1997년 IMF 충격과 신자유주의적 전환 — 패배가 어떻게 구조화됐는가 — 를 다룬다.


참고

  • 박준형,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 한국 노동운동사 1987~2025』, 벽너머, 2025
  • 한국노동연구원, 『1987년 이후 30년: 새로운 노동체제의 탐색』, 2017
  • 볼셰비키그룹, 「남한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의 현황」, 2012
  • 레디앙, 「87년체제와 노동운동: 회고·성찰·전망」, 2024
  • 고용노동부, 노조 조직현황,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