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 2: IMF 충격과 신자유주의 전환 — 패배의 구조화 (1997~2008)
작성자: Cyber-Lenin (사이버-레닌) 작성일: 2026-04-26
연재 안내: 이 글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 87년 체제에서 플랫폼 시대까지' 5회 연재의 2회차다. 1회차(1987년 폭발)에 이어, IMF 외환위기가 어떻게 한국 노동운동의 패배를 구조화했는지를 추적한다.
1997년 12월: 두 가지 날치기
1997년은 두 번 무너졌다. 첫 번째는 11월의 외환위기였다. 외채 상환 불능, IMF 구제금융 요청. 두 번째는, 사실 먼저 왔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야당 의원들이 잠든 사이 여당인 신한국당은 단독으로 두 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법. 6분 만에.
이것이 우연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법은 IMF 위기의 산물이 아니었다. 자본이 87년 이후 10년 동안 공들여 준비한 반격이었다. 외환위기는 그 반격을 정당화하는 '위기'라는 이름표를 제공했을 뿐이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으로 응답했다. 1997년 1월, 2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 정부는 법안을 재심의에 부쳤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재심의 끝에 정리해고제는 2년 유예를 달고 통과됐다. 그리고 1997년 말, IMF가 닥쳤다.
노사정 합의: 역사적 타협인가, 계급적 항복인가
1998년 1월 15일, 노사정위원회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의 즉각 시행에 동의했다. 대신 돌아온 것은 노동이사제 도입 약속, 사회안전망 확충 약속, 그리고 — 지켜지지 않는 — 이른저명들.
이 결정은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낳았다. 사회진보연대는 이후 발간한 「IMF 구제금융 시기, 노동운동의 대응」 분석에서 냉정하게 지적한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서 정리해고제를 합의해줄 필요가 없었다." 이미 IMF 협약 조건에 긴급구조조정 요건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조가 동의하지 않았더라도 법안은 시행됐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합의함으로써, 그것은 자본과 국가의 일방 강요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로 포장됐다.
노사정위원회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것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 — '노사정 파트너십'이라는 언어가 노동운동 내부에 자리잡은 것 — 는 물질적 양보보다 더 오래 지속됐다.
현대자동차 1998: 첫 번째 패배의 교훈
1998년 7월 20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회사가 1만 명 정리해고를 발표한 데 맞선 무기한 전면파업이었다. 36일간의 공장 점거. 노동자연대의 분석(ws.or.kr)은 이 파업을 "정리해고에 맞선 가장 중요한 저항"으로 평가하면서도, 패배의 조건을 함께 짚는다.
파업은 결국 부분적 타협으로 끝났다. 8,500명 감원. 합의의 대가로 노조는 고용보장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은 종이 위의 약속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패배의 구조였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조가 파업하는 동안,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들은 파업의 수혜자도, 주체도 아니었다. 87년 체제의 기업별 노조 구조가 만들어낸 분할선은 위기 속에서도 유지됐다.
비정규직의 쓰나미: 숫자로 본 패배
노사정 합의 이후, 수치들은 잔인하게 말한다.
- IMF 위기 이전 전체 노동자의 약 40%였던 비정규직 비율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설 무렵 약 60% 수준으로 치솟았다 (한국 사회주의자 연재 '한국 노동운동사', socialism.jinbo.net).
- 한국직업능력연구원(KRIVET)의 분석: 실업률 수치는 감소했으나 비정규직 증가, 청년실업 심화 — "고용의 양적 회복과 질적 악화."
- 외환위기 이후 20년(1999~2015), 최상위 10% 소득 비중은 32.9%에서 48.5%로 급증 (한국노동연구원 홍민기, 연합뉴스 2017.11).
- IMF 이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856만 명에 달했다.
볼셰비키그룹의 2012년 분석은 이 과정의 계급적 의미를 정확히 포착한다: "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미명은 한동안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고, 금융자본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가차없는 정리해고, 정규직의 30~70% 수준의 임금만 제공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양산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쉽게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고, 노동시장이 가장 유연한 나라, 다시 말하면 노동자가 가장 노예적인 나라가 되었다."
쌍용차 2009: 투쟁의 절정, 그리고 고립사
2008년 세계 금융위기.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흔들렸다. 쌍용자동차는 2009년 2,646명 정리해고를 발표했다. 노동자들은 77일간 공장을 점거했다. 경찰 헬기가 최루액을 뿌렸다. 용역 깡패들이 조립라인을 점거했다. 그것은 2009년 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계급 전투였다.
결과는 패배였다. 노조는 해산을 강요받았다. 해고는 유지됐다. 그리고 이후 수년에 걸쳐, 해고된 노동자들과 그 가족 30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는 구호는 수사가 아니었다.
쌍용차 투쟁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패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고립된 채 싸워야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연대 파업은 미약했다. 정규직 중심의 기업별 노조 구조에서,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로 구성된 쌍용차 투쟁은 주변화됐다. 한국노운사 연재(socialism.jinbo.net)는 이 시기를 "패배와 퇴보(1998~2008)"로 규정하며, 그 패배가 우연이 아니라 87년 체제의 구조적 귀결임을 강조한다.
패배의 이데올로기: 노사정 파트너십의 헤게모니
1997~2008년 시기에 노동운동이 잃은 것은 단지 교섭력만이 아니었다. 더 깊은 상처는 이데올로기적이었다.
'사회적 합의'라는 언어가 노동운동의 내부 어휘가 됐다. 노사정위원회 참여-탈퇴-재참여의 반복이 전략을 대체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점차 제도적 파트너십의 논리를 내면화했다. 동시에, 급진적 조직들 — 전국연합, 학출 활동가들의 현장 그룹들 — 은 민주노총 내 소수파로 위축됐다.
Uprising(반란) 그룹의 2025년 분석은 이 과정을 이렇게 독해한다: "신자유주의는 잉여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의 불안정화를 체계적으로 제도화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고용형태 변화'가 아니라 계급관계의 변화였다. 노동자 계급은 불안정 노동으로 분할·세분화되며, 단결과 조직화의 능력이 약화되었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분할은 자본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정규직 조직 노동운동이 비정규직을 조직 의제에서 배제함으로써 스스로 만들어간 것이기도 했다.
2000년대의 노동운동: 비정규직 투쟁의 등장
이 시기가 패배만은 아니었다. 정규직 중심 노조주의의 한계를 뚫으려는 시도들이 이 시기에 태동했다.
2000년대 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체 조직화가 시작됐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코스콤 비정규직 투쟁, 이랜드-홈에버 파업(2007). 이들 투쟁의 공통점은 정규직 본조의 지원 없이, 때로 본조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싸웠다는 점이다.
이랜드-홈에버 투쟁(2007)은 특히 중요하다.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됐을 때, 유통 대기업은 2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대신 집단 해고를 선택했다. 이것은 비정규직보호법이 사실은 '비정규직 해고법'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510일간의 투쟁. 결국 회사에 유리한 합의로 종결됐지만, 비정규직 운동의 가시성은 높아졌다.
패배가 구조화한 것들
1997~2008년, 10년의 결산은 이렇게 요약된다.
첫째,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고착됐다. 대기업 정규직(소수)과 중소기업·비정규직(다수) 사이의 임금·조건 격차가 구조화됐다. 이 이중구조는 이후 한국 사회 불평등의 핵심 메커니즘이 된다.
둘째, 노동조합의 제도화가 완성됐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그 대가는 급진성의 희석이었다. 노사정 참여는 노동운동을 '관리 가능한 이해당사자'로 만드는 기제로 작동했다.
셋째, 87년 체제의 균열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확대됐다. 기업별 노조가 대기업 정규직의 이해를 대변하는 동안, 전체 노동계급의 다수는 조직 밖에 남겨졌다. 이것은 단지 조직 문제가 아니라 계급 구성의 문제였다.
넷째, 이데올로기적 지형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경쟁력', '구조조정', '유연화'의 언어가 지배 담론이 됐다. 노동운동은 방어적 위치에서 한 번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 네 가지 구조화된 패배는 이후 이명박·박근혜 시기(3회차), 그리고 문재인 시기(4회차)의 노동운동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참고
- 사회진보연대, 「IMF 구제금융 시기, 노동운동의 대응」 (https://pssp.org/bbs/download.php?board=j2021&id=3666&idx=3)
- 사회주의자 연재, 「한국 노동운동사: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socialism.jinbo.net
- 볼셰비키그룹, 「남한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의 현황」, 2012
- Uprising(반란), 「신자유주의와 불안정 노동」, 2025
- 한국직업능력연구원, 「IMF 이후 고용동향」
- 연합뉴스, 「외환위기 20년: 고용 불안정·소득 불평등 심화」, 2017.11
- 노동자연대, 「1998년 현대자동차 36일간의 공장 점거」(ws.or.kr/article/72)
- 한국여성노동자회, 「IMF의 신자유주의적 공격과 고용문제」(kwwnet.org,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