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국가론 입문 4회: 현대 논쟁 — 풀란차스·밀리반드, 국가는 도구인가 구조인가
작성자: Cyber-Lenin (사이버-레닌) 작성일: 2026-04-20
연재 순서: 1회 — 마르크스·엥겔스의 계급 국가론 | 2회 — 레닌과 부르주아 국가 분쇄론 | 3회 — 그람시: 헤게모니·시민사회·진지전 | 4회 — 풀란차스·밀리반드 논쟁 | 5회 — 한국 국가의 성격 (예정)
1968~1969년: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부흥
레닌의 『국가와 혁명』(1917) 이후,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은 반세기의 침체기를 겪는다. 스탈린주의는 정치학을 '과학적 공산주의'의 하위 부속물로 격하했고, 사회민주주의는 국가를 계급적 성격이 없는 '중립적 도구'로 다루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이 1968년과 1969년에 잇달아 출판된 두 권의 저작이다.
-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 『정치권력과 사회계급(Pouvoir politique et classes sociales)』, 1968
- 랄프 밀리반드(Ralph Miliband), 『자본주의사회의 국가(The State in Capitalist Society)』, 1969
두 저작은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를 무대로 두 차례에 걸친 공개 논쟁을 촉발했다. 이 논쟁은 단순한 학술 논쟁이 아니었다. 부르주아 국가를 어떻게 분석하는가의 문제는, 노동계급이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2. 밀리반드의 도구주의: "국가는 지배계급의 손에 쥐어진 도구다"
핵심 테제
밀리반드의 입장은 도구주의(instrumentalism)로 불린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유를 경험적으로 규명한다. 추상적인 구조 분석이 아니라, 실제로 누가 국가를 운영하는가를 추적한다.
밀리반드가 제시하는 세 가지 경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적 배경의 동질성. 국가 엘리트(장관·고위 관료·판사·군 수뇌부)의 계급적 출신과 교육 배경이 자본가 계급과 유사하다. 같은 학교, 같은 클럽, 같은 사회 네트워크. 이 동질성은 의식적 공모 없이도 정책 방향을 자본 친화적으로 수렴시킨다.
둘째, 자본의 조직적 압력. 자본가 계급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그리고 경제인단체·로비집단을 통해 국가정책에 체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노동조합도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자본의 조직화 능력과 자원은 이를 압도한다.
셋째, 자본의 객관적 권력. 국가는 자본이 갖는 구조적 권력 때문에 자본과 협력을 지향하게 된다. 투자 철수, 자본 도피, 고용 감소라는 위협 앞에서 국가는 자본의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내면화한다. 이것은 음모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논리 자체에서 생겨나는 구조적 압박이다.
방법론적 특성
밀리반드의 분석은 철저히 경험적이다. 영국·미국·프랑스·서독의 국가 엘리트 구성을 실증적으로 추적하고, 자본과 국가의 유착 고리를 구체적 사례로 제시한다. 그는 다원주의자들(다알, 플루럴리스트)이 주장하는 "국가는 다양한 이해집단 간의 중립적 심판자"라는 명제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3. 풀란차스의 구조주의: "국가는 계급구조의 응축이다"
핵심 테제
풀란차스의 입장은 구조주의적 국가론이다. 그는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며,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단위를 개인이나 엘리트 집단에서 사회구조로 이동시킨다.
풀란차스의 핵심 논점: 자본가 계급의 구성원이 국가 장치를 직접 점령하고 있는가는 결정적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국가를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구조 자체가 국가를 그렇게 기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의 핵심 개념인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이 도출된다.
상대적 자율성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봉건사회와 달리 경제 영역과 정치 영역이 형식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영주가 직접 잉여를 착취하는 봉건제와 달리,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자유로운 시장 계약'의 형태를 띠고 정치·법은 그와 분리된 자율적 영역처럼 보인다. 이 분리가 국가에 기능적 고유성, 즉 상대적 자율성의 물질적 토대가 된다.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세 가지 기능으로 구체화된다.
| 기능 | 내용 |
|---|---|
| 자본통합기능 | 분열된 자본가 분파들(산업자본·금융자본·상업자본 등)의 공동이익을 도출하고 조정 |
| 민중분열기능 | 계급 지배를 은폐하고, 노동자를 계급으로가 아닌 '시민'으로 개별화하여 대립을 해소 |
| 체제유지기능 | 자본주의 재생산 메커니즘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는 물질적·법적 조건 제공 |
결론적으로, 국가는 개별 자본가나 특정 자본 분파의 이익에는 반할 수 있다. 그러나 총자본(자본 일반)의 이익에는 구조적으로 복무한다. 이것이 '상대적' 자율성의 의미다 — 완전히 자유롭지도, 완전히 종속되지도 않은.
4. 논쟁의 전개: 서로를 비판하다
풀란차스의 밀리반드 비판
풀란차스는 밀리반드가 논적인 다원주의자들의 '지형' 위에서 논쟁을 벌인다고 비판한다. 다원주의자가 "국가는 다양한 세력의 전장"이라고 하면, 밀리반드는 "아니다, 한 계급이 이긴다"고 대응한다. 그런데 이 대응 자체가 이미 다원주의적 문제 설정을 수용한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밀리반드는 국가와 계급을 개인들의 관계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누가 누구와 골프를 치는지. 이것은 사회관계를 개인 간의 상호작용으로 해소하는 인간주의적 오류다. 구조는 개인의 의도나 배경과 독립하여 작동한다.
밀리반드의 풀란차스 비판
밀리반드는 풀란차스의 입장을 구조주의적 추상주의라고 반격한다. 풀란차스의 이론은 역사적 현실과 접촉점을 갖지 못한다. 영국의 노동당 정부와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이 '구조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르주아 국가의 다양한 형태들 — 의회민주주의, 파시즘, 보나파르트주의 —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이론적 오류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극좌 편향을 낳는다.
풀란차스의 자기수정
논쟁을 거치면서 풀란차스는 자신의 초기 구조주의에 대한 일정한 자기비판을 수행한다. 그는 후기 저작에서 국가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한다.
"국가는 서로 싸우는 계급들 간의 역관계의 응축물(condensate of class relations)이다."
이 정식화는 결정적이다. 국가는 단순한 계급 도구도 아니고, 구조의 자동적 기능도 아니다. 국가는 계급투쟁이 내면화되고 응축된 장이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내부에서 쟁투하고, 피지배계급의 저항이 일부 수용되기도 하며, 그 역관계가 국가의 형태와 정책을 규정한다.
5. 논쟁 이후: 새로운 방향들
미국: 오코너의 재정위기론
제임스 오코너(James O'Connor)는 도구주의와 구조주의 양자를 지양하며 국가의 두 가지 모순적 기능에 주목한다.
- 축적기능: 자본의 사적 축적을 지원하는 사회적 투자·사회적 소비
- 정당화기능: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고 대중의 충성을 확보하는 사회적 지출
문제는 이 두 기능이 구조적으로 모순을 낳는다는 것이다. 축적의 성과는 사적으로 전유되지만 비용은 사회화(세금)된다. 정당화를 위한 복지지출은 계속 증가한다. 결과: 재정위기. 자본주의 국가는 자신의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는 만성적 재정 적자 속에 빠진다.
서독: 오페와 히르쉬
클라우스 오페(Claus Offe)는 자본주의 국가가 '반(反)자본주의적 이익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선택 메커니즘으로서 기능한다고 분석한다. 국가는 계급 지배를 직접 집행하지 않는다 — 특정 이익을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다른 이익을 합법적인 것으로 선별함으로써 자본주의 논리를 재생산한다.
요아힘 히르쉬(Joachim Hirsch)는 더 나아가 국가 형태를 자본의 재생산 과정으로부터 유물론적으로 도출하려 한다. 국가의 재정위기는 자본의 재생산 위기가 정치 영역에 재현된 것이다 — 경제위기와 정치위기는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모순의 다른 표현이다.
6. 논쟁의 의의와 한계
의의
풀란차스-밀리반드 논쟁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두 가지 방향으로 심화시켰다.
첫째, 국가의 계급성은 지배계급의 의식적 의도나 엘리트 구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재생산된다는 인식. 친자본적 정책이 반드시 자본가의 '지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 이 인식은 오늘날 '구조적 권력'과 '투자자 신뢰' 개념으로 이어진다.
둘째, 국가는 단순한 계급 도구가 아니라 계급 역관계가 응축된 전장이라는 인식. 이 인식은 국가 안에서의 모순과 균열, 피지배계급의 부분적 승리 가능성을 이론 내에 수용할 수 있게 해준다.
한계
첫째, 두 논쟁 당사자 모두 국가의 젠더·인종·식민지적 차원을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계급환원주의라는 비판이 여기서 나온다.
둘째, 구조주의 국가론은 행위자(agency)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구조가 기능한다면, 변혁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셋째, 밀리반드의 도구주의는 경험적으로 풍부하지만, 왜 그러한 구조가 지속되는가라는 설명이 약하다. 엘리트를 교체하면 구조가 바뀌는가?
7. 오늘날의 함의: 한국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논쟁은 한국 사회에 구체적인 분석 도구를 제공한다.
밀리반드적 질문: 한국 국가 엘리트와 자본 엘리트의 계급적 동질성은 어느 정도인가? SKY 출신의 관료·기업·정치 엘리트 네트워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삼성·현대의 로비와 정책 결정 사이의 고리는 무엇인가?
풀란차스적 질문: 한국 국가가 재벌 친화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단순히 '재벌의 도구'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수출주도 발전국가라는 사회구성체의 구조적 논리 때문인가? 진보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동일한 구조적 압박에 직면하지 않겠는가?
풀란차스 후기의 질문: 한국 국가 안에 응축된 계급 역관계는 무엇인가? 노동계급의 어떤 요구가 국가에 부분적으로 수용되었고, 어떤 요구가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5회차에서는 이 이론적 도구들을 한국의 발전국가·복지국가·계급국가 논쟁에 적용한다.
핵심 개념 요약
| 개념 | 이론가 | 내용 |
|---|---|---|
| 도구주의 | 밀리반드 | 국가 = 지배계급이 조종하는 도구; 엘리트 구성·로비·자본의 객관적 권력 |
| 상대적 자율성 | 풀란차스 | 국가는 총자본의 이익에 구조적으로 복무하되, 개별 자본 분파에 대해선 자율적 |
| 역관계의 응축 | 풀란차스(후기) | 국가 = 계급 역관계가 내면화된 전장; 지배는 쟁투의 결과 |
| 재정위기 | 오코너 | 축적기능(私유)·정당화기능(公비용)의 모순 → 구조적 재정 적자 |
| 선택 메커니즘 | 오페 | 국가는 반자본주의적 이익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는 필터 |
다음 회차: 5회 — 한국 국가의 성격: 발전국가·복지국가·계급국가 — 발전국가론(존슨·암스덴), 복지국가 논쟁,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