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방, 하나의 집
— 2026년 봄, 서울 은평구 응암동
1장. 고립의 기하학
박재현이 방 안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늘 같은 소리로 시작됐다. 윗집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그 다음엔 파이프 속에서 꿀럭이는 소음, 마지막으로 바깥 골목의 오토바이 배달 소리. 그 순서가 틀린 날이 없었다.
응암동 경남빌라 반지하. 방은 가로 3미터, 세로 4미터였다. 창문 절반이 땅속에 묻혀 있어서, 하루 종일 발목과 신발만 오가는 것을 바라보며 살았다. 보증금 오백에 월세 사십오만원. 작년 이맘때만 해도 이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걸 낼 수 있는 달이 몇 달이나 남았는지를 생각했다.
재현은 요즘 하루에 두 번 잔다. 오전에 네 시간, 저녁에 서너 시간. 그 사이에 모니터 앞에 앉아 구직 공고를 열어두지만, 실제로 지원서를 쓰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도 되지 않았다. 포트폴리오는 작년 10월에 업데이트를 멈췄다. 그달이 넥슨 자회사에서 짐을 싼 달이었다.
팀 전체가 한 번에 나갔다. 회의실에 불려가서 종이 한 장을 받았다. 위로금 산정 기준을 설명하는 HR 직원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평온했다. 재현은 그 목소리가 지금도 가끔 귀에서 들린다. 조직 재편에 따른 부득이한 조치. 9년이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들어가서 신입부터 팀장까지, 9년.
통장 잔고가 오늘로 두 달치 월세 분이었다.
같은 건물 2층엔 김세연이 살고 있었다.
고시원에서 이사 온 지 석 달이 됐다. 고시원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창문이 있고, 화장실이 방 안에 있고,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를 벽 너머로 듣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보증금 이백을 구하기 위해 부모님한테 전화했던 그 오후가 아직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말하지 않았다. 그냥 계좌번호 물어봤다. 그게 더 무거웠다.
세연은 프리랜서로 버텼다. 계약직이 종료된 건 작년 7월이었다. 스타트업 디자인 팀. 시리즈 B 투자가 막히면서 인건비부터 잘렸다. 세연은 마지막 달 월급도 못 받고 나왔다. 고용노동부에 민원 넣어서 석 달 뒤에 받아냈다. 그 사이에 신용카드 대출을 썼다.
지금은 크몽에서 로고 작업을 받는다. 건당 오만원에서 십오만원. 한 달에 서너 건. 합쳐봐야 사십만원이 안 됐다. 나머지는 실업급여로 메웠는데, 그것도 이달이 마지막이었다.
세연의 방에는 작은 이케아 책상과 모니터가 있었다. 그리고 냉장고 옆에 식물 세 개. 스투키, 산세베리아, 이름 모르는 다육이 하나. 돈이 없어도 식물은 샀다. 이유를 물으면 설명하기 어려웠다.
건물 맞은편 골목, 반지하가 아니라 지하라고 부르는 게 맞는 공간에 오달수가 있었다.
정확히는 창문이 아예 없는 방이었다. 집주인이 "환기창 있다"고 했는데, 실물은 30센티미터짜리 철망 구멍이었다. 처음엔 항의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보증금 없이 월세 삼십오만원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달수는 그런 선택을 많이 했다. 항의하고 싶지만 조건이 없어서 입을 다무는 선택.
구미에 있는 자동차 부품 공장을 나온 건 작년 봄이었다. 공장 자체가 문을 닫은 건 아니었다. 자동화 라인을 들여오면서 숙련공 열두 명을 한꺼번에 잘랐다. 달수는 그중 한 명이었다. 스물두 살부터 44살까지, 22년을 한 공장에서 일했다.
서울에 올라온 건 처남이 있어서였다. "서울은 일자리가 있다"고 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일자리는 있었다. 달수가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었다. 건설 현장, 물류 창고, 편의점 야간. 면접을 보러 갔더니 나이를 봤다. 직접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연락드리겠습니다"가 왔고, 연락은 안 왔다.
지금은 폐지를 줍고 있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손수레를 끌었다. 당장 창피하다는 생각보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는 생각이 앞섰다. 이 동네에서 달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수빈은 경남빌라 옥탑방에 살았다.
고향이 원래 서울이었다. 광진구 중곡동. 하지만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원룸 보증금을 낼 수가 없어서 이쪽으로 왔다. 은평구가 조금이라도 쌌다. 옥탑방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웠다. 지금은 봄이어서 그나마 견딜 만했다.
수빈은 28살이었다. 공연기획 쪽을 하고 싶었다. 대학에서 문화콘텐츠학과를 나왔다. 소극장 인턴을 두 번 했고, 중소 기획사에서 석 달 계약직을 했다. 그 이후로는 공백이었다. 이력서에 '공백기'를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유튜브를 열세 개 봤다. 쓰는 방법보다 공백이 생긴 이유가 더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최근에는 취업 준비를 한다는 말이 점점 어색해졌다. 그냥 집에 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지원서를 쓰다가 자기소개서 중간에 멈추고 밥을 먹고, 유튜브를 보다가 잠들고, 다음날 다시 지원서를 열었다가 닫았다. 그 루틴이 몇 달째였다.
통장엔 사십칠만원이 있었다. 다음 달 월세가 사십만원이었다.
2장. 고장난 것들
4월 첫 번째 주 수요일, 경남빌라 1층 현관 옆 게시판에 쪽지가 하나 붙었다.
"옥상 배수구 막혔음. 아시는 분 연락 주세요. — 601호"
601호는 없었다. 경남빌라는 4층짜리였다. 누군가 옥상 창고에 사는 사람을 그렇게 표현한 모양이었다. 수빈은 자기를 가리키는 쪽지라는 걸 알면서도, 또 모른 척했다. 배수구가 막힌 건 알았다. 비가 오면 물이 고였다. 고인 물이 벽 틈으로 스며드는 것도 알았다. 그냥 두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집주인한테 말하면 결국 퇴거 압박이 올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다음날 오후, 수빈이 세탁기를 돌리러 1층 공용 공간에 내려왔을 때, 반지하 현관에서 남자 한 명이 나오고 있었다. 손에 빨래를 잔뜩 들고 있었다. 수빈과 눈이 마주쳤다. 먼저 고개를 숙인 건 남자였다.
"혹시 세탁기 쓰시려고요?"
박재현이었다.
"먼저 쓰세요."
"아뇨, 저 급하지 않아요."
그게 대화의 전부였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20분 동안 둘은 1층 계단 아래에 멀찍이 앉아 각자 폰을 봤다. 하지만 그 전에 수빈이 한 마디 더 했다.
"저기, 배수구 막힌 거 아시면... 뚫는 방법 혹시 알아요?"
재현은 잠깐 생각했다.
"철사 옷걸이로 뚫리는 거면 한번 해볼게요."
그날 재현은 옥상에 올라갔다. 옷걸이를 펴서 배수구 안에 넣고 돌렸더니 머리카락 덩어리가 나왔다. 물이 빠졌다. 수빈은 고맙다고 했다. 재현은 괜찮다고 했다. 그게 끝이었다.
같은 주 토요일, 단지 앞 작은 공원에서 오달수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폐지를 팔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 수익은 팔천원이었다. 손수레를 세워두고 잠깐 앉았는데, 옆에 30대로 보이는 여자가 앉았다. 김세연이었다. 세연은 클라이언트 수정 요청이 다섯 번째 들어와서 환기하러 나온 참이었다.
달수는 처음에 말을 걸지 않았다. 세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달수의 손수레에 걸려 있는 망가진 자전거 바퀴를 세연이 봤다.
"폐지로 내시게요, 그거?"
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퀴 축이 살아 있는 것 같은데. 튜브만 갈면 되지 않나요?"
달수가 세연을 봤다.
"자전거 아세요?"
"아뇨. 그냥 구조가 보여서요."
세연은 디자이너였다. 물건의 구조가 눈에 들어오는 버릇이 있었다.
달수는 집에 남아 있는 자전거 수리 공구를 생각했다. 구미에서 부터 쓰던 것들이었다. 서울 올라올 때 대부분 팔았지만 기본 공구는 버리지 못했다.
"튜브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전거 가게 가면 파는데... 저도 이 동네 잘 모르긴 해요."
그 날 둘은 스마트폰으로 동네 자전거 가게를 찾았다. 근처에 하나 있었다. 달수가 튜브를 샀다. 8,500원이었다. 오늘 폐지 수익보다 오백원 더 썼다.
세연이 옆에서 구조를 보면서 이건 이렇게 하면 될 것 같다고 했고, 달수가 손으로 고쳤다. 한 시간쯤 걸렸다. 자전거가 다시 굴러갔다.
두 사람 다 그게 뭔가의 시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계기는 5월 셋째 주에 왔다. 집주인이 경남빌라 전체에 공문을 돌렸다.
임대 계약 종료 안내 — 6월 30일부로 건물 리모델링 예정. 기존 세입자 전원 6월 29일까지 퇴거 요망.
재현은 공문을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었다. 그리고 통장 잔고를 열었다. 남은 돈으로 보증금을 구할 수 있는 방이 이 동네에 있을 리 없었다.
계단에서 수빈과 마주쳤다.
"봤어요, 공문?"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울었거나, 잠을 못 잤거나.
"어떻게 할 거예요?"
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2층에서 문이 열렸다. 세연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왔다가 둘을 봤다. 무슨 상황인지 금방 알았다.
"저도요."
복도에 셋이 서 있었다.
그때 아래층 방문이 열리고 달수가 나왔다. 달수는 같은 건물이 아니었다. 맞은편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발길이 이쪽으로 왔다.
"다들 나오라는 공문 받았소?"
재현이 네, 했다.
달수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우리 집도 같은 건물주요."
3장. 계산
정릉동 쪽에 낡은 집이 있다는 걸 세연이 찾았다.
크몽 작업을 하면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마주친 매물이었다. 은평구가 아니라 성북구 경계였는데,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였다. 빌라가 아니라 단독주택형 다가구였다. 4인 이상 입주 시 보증금 없이 월세 협의 가능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집주인은 70대 할머니였다. 자식들이 수원에 있었다. 집을 팔기는 싫고, 관리는 못 하겠고, 그렇다고 부동산에 맡기면 수수료가 나갔다. 직접 세입자를 구하고 있었다.
재현이 대표로 전화했다. 목소리는 평온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저희 넷인데요, 다들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상황이라서, 월세를 좀 나눠낼 수 있을지 상의할 수 있을까요."
할머니는 잠깐 생각하더니 직접 보자고 했다.
집은 생각보다 컸다. 방이 다섯이었다. 마당이 조금 있었고, 옥상에 흙이 쌓여 있었다. 오래된 집의 특유한 냄새, 시멘트와 습기와 나무가 섞인 냄새가 났다. 세연은 그 냄새를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달수는 공구로 고칠 만한 부분들을 눈으로 짚었다. 수도꼭지, 창문 잠금장치, 현관 도어록.
할머니는 넷을 차례로 봤다.
"직업이 뭐요들?"
재현이 솔직하게 말했다. 개발자인데 지금은 구직 중이라고. 세연도 솔직하게 말했다. 디자이너인데 프리랜서로 버티고 있다고. 달수는 짧게 말했다. 공장 일 하다 나왔다고. 수빈은 가장 짧게 말했다. 취업 준비 중이라고.
할머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마당에 있는 상추를 가리켰다.
"저거 내가 못 가꾸겠어. 누가 해줄 수 있어요?"
수빈이 손을 들었다.
"저 할 수 있어요. 배워서라도요."
할머니가 수빈을 봤다. 수빈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계약서는 그 주 금요일에 썼다. 4인이 월 오십만원씩, 월세 이백만원. 방 다섯 개 중 하나는 공용 작업실로 쓰기로 했다. 기존 경남빌라 월세를 4인 합산하면 거의 비슷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이건 식당과 마당과 옥상이 딸린 집이었다.
이사를 마친 날 밤, 재현이 맥주 다섯 캔을 사왔다. 할머니 몫도 한 캔 포함해서.
6월이 됐다.
집 안에서 서로 필요한 것들이 생겼다.
수빈은 이력서를 계속 못 쓰고 있었다. 자기소개서가 막혔다. 재현이 보여달라고 했다. 개발자였지만 채용 면접을 20번 넘게 다녀봤다. 이력서를 읽고 두 가지를 말해줬다. 너무 많이 쓰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지원 직무가 뭘 원하는지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 수빈은 메모했다.
그 대가로 수빈은 마당 상추를 매일 챙겼다. 할머니한테 전화로 관리법을 물어서 배웠다. 6월 말이 되자 상추가 먹을 만큼 자랐다. 달수가 된장찌개를 끓였다. 마당 상추를 뜯어 쌈을 싸서 먹었다. 특별한 재료가 없었다. 그냥 밥과 된장찌개와 상추였다.
달수는 집 안 고장난 것들을 고쳤다. 수도꼭지, 창문 잠금장치, 화장실 실링팬. 세연이 옆에서 자재 찾는 걸 도왔다. 어떤 나사인지, 어떤 규격인지,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면서. 세연이 한번은 달수한테 물었다.
"공장에서는 뭘 만드셨어요?"
"서스펜션 부품이요. 차 밑에 들어가는 거."
"어려운 거 아닌가요?"
달수가 잠깐 있다가 말했다.
"어렵죠. 22년 배웠으니까."
세연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브랜드 아이덴티티. 이것도 어렵다. 배운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건당 오만원에 팔고 있다.
세연은 달수한테 제안했다.
"블로그 만들어드릴까요. 수리 전후 사진 올리고. 동네에서 가전 고장 고쳐주는 사람 있다고 알리면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달수는 자신이 블로그를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건 제가 해요. 수리는 아저씨가 하고."
그게 합의였다.
일주일 뒤, 이웃집 아주머니가 냉장고 모터 소리가 이상하다며 달수를 불렀다. 세연이 만든 블로그를 봤다고 했다. 달수가 가서 보니 컴프레서 주변 먼지가 막힌 거였다. 청소하고 나왔다. 아주머니가 만원을 줬다. 달수는 받지 않으려다 받았다.
그날 저녁 달수가 세연한테 만원을 건넸다.
"블로그 글 써준 값이요."
세연이 웃었다. 처음으로 웃는 걸 봤다.
"이거 타임뱅크예요. 돈으로 하면 이상해요."
"타임뱅크가 뭐요?"
"그냥... 받는 만큼 줘야 하는 거요. 시간으로요."
달수가 잠깐 생각했다.
"그럼 나는 뭘 갚아야 해?"
"다음에 제 컴퓨터 고장나면 봐주세요."
재현은 그 시기 취업 준비를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게임 개발이 아니라 방향을 넓혀보고 있었다. 핀테크, 물류, 의료. 자신이 9년 동안 쌓은 것들이 어디에서 쓰일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구직 공고를 보는 것이 예전보다는 덜 무거워졌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아침에 부엌에 내려가면 누군가가 있었다. 달수가 커피를 끓이고 있거나, 수빈이 마당을 보고 있거나. 그 사람들이 있어서 하루가 시작됐다. 혼자였을 때는 하루가 그냥 이어졌다.
7월에 재현은 서울 소재 핀테크 기업 면접을 봤다. 결과는 최종 탈락이었다. 공문이 오던 날, 재현은 방에 들어가 한 시간쯤 멍하게 있었다. 그러다 부엌으로 나왔다. 달수가 있었다. 재현이 말했다.
"또 떨어졌어요."
달수가 밥솥을 여닫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 말 안에 위로도 격려도 없었다. 그냥 들었다는 말이었다. 재현은 그게 이상하게 편했다.
달수가 말했다.
"밥은 먹었소?"
"아직요."
"같이 먹읍시다."
4장. 불완전한 지도
8월에 집주인 할머니가 전화를 했다.
자식들이 집을 팔라고 한다고 했다. 자신도 나이가 드니까 관리가 어렵다고. 연내에 매각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 미리 알려주는 거라고 했다.
재현이 통화를 끊고 부엌 테이블에 앉았다. 세연이 작업을 하다 올려다봤다. 재현이 상황을 말했다. 세연이 노트북을 닫았다. 수빈이 마당에서 들어왔다. 달수가 공구를 내려놨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빈이 먼저 말했다.
"또 찾으면 되지 않아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4인이 같이 살 수 있는 단독주택형 다가구를 보증금 없이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제 모두 알았다. 그런 집이 있었던 것 자체가 우연이었다.
달수가 말했다.
"언제까지래요?"
"연내라고요."
"12월까지는 있는 거네요."
그게 새로운 계산의 시작이었다.
재현이 노트북을 폈다. 지금까지 이 집에서 절약한 금액을 정리했다. 식비, 공과금, 수도세, 수리비. 각자 따로 살 때와 비교했다. 4개월 동안 1인당 월평균 23만원 정도를 아꼈다. 4인 합산이면 92만원. 4개월이면 368만원.
아직 보증금이 됐다.
아직은. 두 달을 더 모으면, 어쩌면.
세연이 말했다.
"더 작은 집으로 가면 어때요? 방 네 개. 마당은 없어도 되고."
달수가 말했다.
"마당이 있어야 상추를 키울 텐데."
"옥상으로 가면 되죠."
수빈이 끼어들었다.
"옥상 텃밭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성북구에. 제가 연락해볼게요."
9월에 재현이 취업이 됐다.
물류 스타트업이었다. 연봉은 예전의 70퍼센트였다. 하지만 재택 근무가 주 이틀이었고, 복지 제도가 단순했고, 야근 강요가 없었다. 서류 통과 때 세연이 포트폴리오 레이아웃을 고쳐줬다. 면접 연습은 수빈이 했다. 수빈이 공연 기획 공부하면서 갖게 된 질문 기술이 이상하게 도움이 됐다.
발표 나던 날, 재현이 케이크를 사왔다. 편의점 케이크였다. 둘이서 다 같이 촛불 없이 잘랐다.
세연이 말했다.
"한턱 크게 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요. 지금은 보증금 모아야 해서."
달수가 웃었다. 소리 없이 웃는 사람이었다.
10월에 수빈이 공연 기획사 계약직 면접을 봤다.
소극장 운영하는 작은 기획사였다. 계약직이었다. 6개월. 재현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세연도 말리지 않았다. 달수는 "해봐야 알지"라고 했다.
면접 당일 아침 수빈이 일찍 일어나서 마당을 정리했다. 상추는 이미 여름을 지나 줄기가 질겨졌다. 대신 달수가 씨를 뿌린 쪽파가 올라오고 있었다.
수빈이 면접에서 돌아온 건 오후였다.
세연이 커피를 내리면서 물었다.
"어땠어요?"
"잘 모르겠어요. 잘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보통이에요."
합격 여부는 일주일 뒤에 나온다고 했다. 수빈은 기다리면서 이전처럼 멍하게 있지 않았다. 할머니한테 배운 방법대로 쪽파에 물을 줬다. 재현한테 이력서 다음 버전을 어떻게 쓸지 물어봤다. 그냥 준비했다.
11월 중순, 집주인 할머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매각이 연기됐다고 했다.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서 내년 봄까지 기다려보겠다고 했다. 퇴거를 서두를 필요 없다고 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었다. 겨울 동안 집 안 보일러를 한 번씩 점검해줄 수 있겠냐고.
달수가 할게요, 했다.
넷이 그날 저녁 부엌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특별한 메뉴가 아니었다. 어묵국, 달걀말이, 김치, 밥. 달수가 끓인 것들이었다. 세연이 달걀말이를 맡았는데, 처음 두 개는 실패해서 모양이 이상했다. 수빈이 그걸 하나 집어 먹으면서 맛은 똑같다고 했다.
재현은 그 식탁을 보면서 뭔가를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뭔가였다. 이 집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재현도 언제 다시 잘릴지 모른다. 세연이 프리랜서로 버티는 것도 기약이 없다. 수빈은 계약직 6개월이 끝나면 또 기로에 설 것이다. 달수는 폐지를 줍는 대신 동네 수리 일이 조금 생겼지만, 그게 생계가 되는 데까지는 아직 멀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었다.
하지만 재현은 밥을 먹었다. 어묵국이 따뜻했다. 세연이 달걀말이를 다시 한 번 부치고 있었고, 달수가 옆에서 불 세기를 보라고 했다. 수빈은 쪽파를 씻어오겠다며 일어났다.
부엌 창문 밖에 11월의 하늘이 있었다.
수빈에게 합격 통보가 온 건 면접 열흘 뒤였다.
저녁에 카카오톡 알림이 왔다. 수빈이 방에서 혼자 문자를 보다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세연이 작업 중이었고, 재현이 노트북을 켜두고 있었고, 달수가 보일러 배관 도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빈이 말했다.
"됐어요."
세연이 올려다봤다.
"공연 기획사요?"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6개월 계약이라고 했다. 그 이후는 모른다고 했다.
재현이 말했다.
"6개월 하고 오면 되지."
달수가 보일러 도면에서 눈을 들지 않고 말했다.
"축하해요."
수빈은 그날 밤 마당에 잠깐 나가서 쪽파를 봤다. 겨울이 오기 전에 수확해야 할 것 같았다. 낼 모레면 된다고 달수가 말했다.
하늘이 맑았다. 성북구 경계의 늦가을 하늘이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수빈은 잠깐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정확히는, 내일 출근이 아니라 다음 주부터였다. 하지만 오늘 준비를 시작하고 싶었다.
부엌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에필로그를 대신하는 메모 (2026년 11월 28일)
집 공용 작업실 화이트보드에 적힌 것들:
→ 이번 달 공과금: 41,200원 (4인 분담) → 달수 씨 수리 일지: 냉장고 3건, 세탁기 1건, 자전거 2건 → 세연 블로그 방문자: 이번 달 1,340명 → 마당 쪽파: 수확 완료. 다음은 마늘? → 내년 봄 이후 주거: 미결 → 재현 씨 근무 2개월째 → 수빈 씨 첫 출근 D-5
화이트보드 오른쪽 아래, 달수의 굵은 글씨:
"일단 지금은 여기 있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