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결, 그다음의 정치

5월 21일 오후 2시. 코스피는 7,775.84로 마감했다. 하루 만에 567포인트, 7.86% 상승. 최근 1년간 단일 거래일 최대 상승폭이다. 시장은 축제를 벌였다. 파업이 사라졌으니까.

그러나 이 7,775라는 숫자가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 시장은 노동자가 생산을 멈추면 무너지고, 노동자가 다시 기계 앞으로 돌아가면 폭등한다. 즉 시장의 환호는 노동자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다시 잉여가치를 생산하러 돌아간다는 사실을 축하하는 것이다. 7만 노동자가 평택 정문 앞에 서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567포인트의 실체다. 이 아이러니를 직시해야 한다. 파업을 유보함으로써 노동자는 자본에게 567포인트짜리 선물을 안겼다. 물론 성과급 제도화, 상한 폐지, 임금 7% 인상이라는 대가를 받았다. 그러나 자본이 지불한 그 대가는, 자본이 노동자의 노동에서 앞으로 착취할 이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7,775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지만, 보여준다.

청와대는 "노사의 대승적 결단에 감사"를 말했고, 김영훈 장관은 "노사 자율 교섭으로 합의에 이르렀다"고 했고, 언론은 "극적 타결"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국가와 미디어가 합창하는 이 서사는 한 가지 사실을 은폐한다 — 6시간의 장관 중재가 '자율 교섭'이라면, 자율이란 단어는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5월 17일 총리의 긴급조정권 위협, 5월 19일 대통령의 "경영권 존중" 트윗, 법원의 가처분 — 이 모든 국가 폭력의 예비 동원이 깔려 있었기에 장관의 중재는 '중립적 조정'이 아니라 계급적 압박으로 기능했다. 국가는 노동자에게 타협을 명령하고, 자본에게 타협을 요청했다. 그 요청이 축적 체계의 붕괴 위협 앞에서 비로소 압박으로 전환된 것이 5월 20일 밤의 실체다.

그러나 이 타결이 던지는 진짜 질문은 국가의 역할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내부의 정치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몇몇 동지들이 정확히 이 지점을 찔렀다. 하나는 "삼성 교섭 타결, 좋은 것인가 하청 노동자의 몫이 죄이는 것인가"였다. 다른 하나는 "투쟁의 진전이 노동자의 소부르주아화를 가져오는 건 필연인가"였다. 또 다른 하나는 "만약 그들이 7만 조합원의 이익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안주한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였다. 이 세 질문은 동일한 모순의 세 얼굴이다.

잠정 합의안의 내용을 보라. 성과급 제도화, 상한 폐지, 임금 7% 인상, 적자 사업부 1년 유예. 이 모든 항목은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의 몫을 늘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 하청·협력업체 노동자의 단가, 고용 안정, 노동조건에 대한 조항은 단 한 줄도 없다. 7만의 승리는 7만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7만의 승리가 협력업체 수만 노동자의 몫을 간접적으로 조일 가능성 — 삼성전자가 인건비 증가를 납품 단가 인하로 상쇄할 유인 — 은 추상적 우려가 아니라 자본 축적의 항등식이다.

이 지점에서 "초기업노조가 경제주의에 안주하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 설정되어 있다. 경제주의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과 설득의 대상이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경제주의를 비판했을 때, 그는 경제주의자들을 노동운동의 외부로 추방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운동 내부의 한 경향과의 싸움, 즉 당파 투쟁을 말했다. 초기업노조는 노동자 계급의 일부이며, 그 한계는 내부 비판과 정치적 개입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모순이다. "타도" 운운하는 것은 적을 더 많이 만드는 길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초기업노조의 경제주의를 방치하는 것은 더 큰 오류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 이번 타결이 경제적 승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승리가 정치적 후퇴로 이어질 조건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성과급 제도화는 노동자에게 예측 가능한 몫을 보장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를 기업의 이윤 증대에 더 깊이 묶는다. 성과급 상한 폐지는 개별 노동자의 최대 수령액을 높이지만,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를 확대하여 집단적 이해관계를 분할한다. 이것이 바로 "투쟁의 진전이 소부르주아화를 가져오는가"라는 질문의 현실적 근거다.

답은 이렇다. 경제적 승리 자체가 소부르주아화를 필연적으로 초래하지는 않는다. 영국 노동귀족의 부르주아화를 가능케 했던 것은 제국주의적 세계시장 독점이라는 특수한 조건이었고, 오늘날 한국에는 그런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적 승리가 정치적 의식의 발전 없이 반복되면,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다. 그 환상이 바로 경제주의의 최종 산물이며, 그것을 깨는 것이 정치적 당파 투쟁의 역할이다.

찬반투표는 5월 23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다. 조합원들이 이 잠정 합의안을 받아들일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찬반투표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방향이다. 초기업노조가 이번 승리를 '7만의 승리'로만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이 승리를 협력업체 노동자, 비정규직, 그리고 더 넓은 노동계급 전체의 정치적 동원으로 확장할 것인가. 전자의 길은 경제주의의 완성이지만, 후자의 길은 경제주의의 자기 지양이다. 어느 길로 갈지는 앞으로의 행동이 말해줄 것이다. 지금은 타결의 날이지만, 타결은 끝이 아니라 정치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