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 동토의 땅에서
인물이오시프 스탈린, 니콜라이 바빌로프 용어1941년 6월의 추방, 민족 강제이주, 특별이주민, 내무인민위원부(NKVD), 콜호스 사건발트 3국 병합과 1941년 6월 추방
1941년 6월 14일 밤, “만백성의 위대한 벗” 스탈린과 그 측근들의 명령으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 한꺼번에 대량 체포와 시베리아 강제 추방이 시작되었다. 평화로운 마지막 며칠 동안 사람을 가득 실은 열차가 줄지어 동쪽으로 떠났다. 아무 죄 없는 사람 수십만 명이 실려 갔고, 그중 고향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 제노사이드를 당한 유형자는 저마다 제 골고타 언덕을 올랐다. 오랜 세월 굶주림과 추위, 질병과 굴욕, 무권리와 폭력, 가시지 않는 고향 그리움이 늘 그들 곁에 있었다. 얼마 전 비투리스 출판사가 『영구 동토의 땅에서』라는 책을 냈다. 이 모든 일을 몸소 겪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은 책이다. 여기서는 이 책에 실린 글 「북극권의 …」의 일부를 소개한다.
나, 안타나스 아브로마이티스는 추방될 때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다. 내 유형은 20년 두 달 동안 이어졌다.
1941년 6월 14일 새벽 4시, 우리 가족은 잠자다 끌려 일어났다. 그들은 리볼버 총구를 들이대고 (기소장도 판결도 없이) 어서 떠날 채비를 하라고 다그쳤다.
아버지는 무슨 근거로 이런 탄압을 하느냐고 따졌다. 돌아온 대답은 우리 가족이 시베리아로 영구 이주를 가며 다시는 리투아니아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가져가도 된다고 한 것은 베개 두 개와 담요 한 장, 가는 길에 먹을 음식뿐이었다. 트럭에 올라 호송병을 달고 길을 떠났다. 어디로, 무엇 때문에!
함께 학교에 다니고 함께 소를 치던 이웃 아이들이 울타리에 매달려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유오주케스 구디나스, 비루테와 비타스 카즈다우스카스 남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서웠을 것이다.
우리를 실어 간 곳은 알리투스 기차역이었다. 거기에는 창에 쇠창살을 박은 가축 수송 화차들이 열차를 이루고 서 있었다. 아직 비어 있는 화차 하나 앞에 우리를 내려놓고 올라타라고 했다. 화차에 맨 처음 탄 덕분에 우리는 하나뿐인 창살 창 옆 위층 침상을 차지했다.
얼마 뒤 우리 화차에 다른 유형자들도 들어차기 시작했다. 대부분 시골 학교 교사였다. 교사들이야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글자 쓰는 법을 가르치고 첫 낱말을 읽게 했다는 죄로 유형을 보낸다 치자. 그런데 베르나타비추스가 아내와 두 살배기 딸을 데리고 왜 우리 화차에 탔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제 땅 한 뼘, 제 집 한 칸 없이 평생 영지에서 머슴살이를 한 사람들이었다.
오르샤에서 열차는 나흘쯤 서 있었던 것 같다. 더운 날이 시작되었고, 화차 안에는 공기도 물도 모자랐다. “공기”, “물”이라는 러시아 말을 배워서 외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외쳤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여자 몇이 정신을 잃었다.
화차 안에서 배고픔은 느끼지 않았다. 먹을거리를 얼마쯤 가져오도록 허락받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장 모자란 것은 물이었다. 주식은 빵을 부숴 넣은 설탕물이었다. 열차가 서는 곳마다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과 여자들이 달려와 먹을 것을 구걸했다. 신문에 쓰인 대로라면 이렇게 부유한 나라에 왜 굶주리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
한 달쯤 지나 우리 열차는 알타이 지방의 도시 비스크에 섰다. 비가 쏟아졌고, 화차에서 쫓겨난 우리는 보잘것없는 세간을 들고 서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다렸다. 어머니가 다섯 살 난 누이동생을 안고 서 있고, 그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던 모습이 기억난다. 짧은 반바지에 윗도리 하나만 걸친 나는 흠뻑 젖은 채 화차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얼마 뒤 짐마차가 여러 대 몰려왔고, 마차마다 몇 가족씩 태워 우리 모두를 콜호스로 나누어 실어 갔다. 우리는 비스크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리넵스키 콜호스로 갔다. 여기서는 모두를 일터로 내몰았다. 어머니는 밭에서 일했고, 아버지(교사였다. — 편집부 주)는 전선으로 떠난 사람의 자리를 메워 대장장이가 되었다.
춥고 바람 부는 겨울이 왔다. 우리는 반지하 방 하나에 몇 가족씩 모여 살았다. 우리 아이들은 입을 옷이 없어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
1942년 봄이 왔다. 유형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더니 텃밭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기뻤는지! 어머니는 씨앗을 사 왔고, 우리는 감자와 오이를 심었다. 다음 겨울에는 굶지 않아도 되겠다며 모두가 기뻐했다.
그러나 유형을 온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제 처지가 조금 나아지리라 기뻐한 것은 섣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한 NKVD 요원들이 다시 나타나더니, 텃밭을 거두게 해 주지도 않고 말 그대로 “북극곰들한테” 보내 버렸다.
높은 강기슭에 올라서니 저 멀리 지평선만 보였다. 풀 한 포기도,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없었다. 아직 눈이 살짝 덮인 툰드라의 이끼만 푸릇했다.
따뜻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빈 통 위에 올라서서 말했다. 여기에 트로피모프카 수산 공장[1]을 세울 거라고. 앞으로 어부가 될 사람들은 고기잡이가 뭔지 조금도 모르는 여자들과 아이들이었다.
알타이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농장에서 일하며 그래도 무언가 쓸모 있는 일을 했다면, 북쪽 무인도로 실려 온 사람들은 죽을 운명이었다.
1942년, 무시무시한 극지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추위와 눈보라. 막사에는 바람이 숭숭 들이친다. 벽도 천장도 꽁꽁 얼어붙었다. 막사마다 리투아니아 사람과 핀란드 사람이 80~100명씩 들어 있었다. 막사 한가운데 쇠통 난로를 놓았지만 땔 것이 없었다. 판자 한 장이라도 훔치면 감옥에 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불이라고는 관솔불뿐이었다. 아무도 씻지 않았다. 씻을 형편이 안 되었다. 물은 눈을 녹여서 얻었다.
병이 돌기 시작했다. 괴혈병, 이질에 이까지 끓었고, 거기다 추위와 굶주림이 겹쳤다. 빵은 400그램씩 받았지만, 서둘러 지은 빵 공장이 내주는 것은 데운 반죽 덩어리뿐이라 빵이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가족이 통째로 죽기도 하고, 한 사람씩 죽기도 했다. 의료 지원을 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것이 여기에는 없었으니까.
이따금 텔레비전에 파시스트 수용소가 나온다. 줄무늬 수인복을 입은 수척한 수감자들이 서로 부축하며 걸어간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햇빛이라도 비쳤다. 우리는 해도, 풀도, 나뭇잎도 보지 못했다.
여기를 보시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백과사전』 12권 250쪽.
“빌카이티스 빈차스. 1892년 1월 16일~1943년 1월 19일, 트로피모프카(야쿠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사망. 리투아니아의 식물학자. 1925년 베를린 대학교 졸업. 1925~1941년 농업 아카데미 학과장. 1934~1940년 총장, 교수. 1941~1943년 야쿠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경제 업무에 종사.”
“존경하는 역사가” 여러분, “백과사전”을 펴낸 분들이여!
당신들의 “백과사전”이 전부 이런 식으로 쓰였다면, 나는 그 예약 구독을 신청하려고 밤새 줄을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잡아 드리겠다!
빈차스 빌카이티스는 1941년 6월 14일 가족과 함께 리투아니아에서 추방되었다. 유형자 V. 빌카이티스는 1943년 1월 19일 트로피모프카(야쿠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10호 막사, 우리 침상 바로 옆에서 굶어 죽었다. 당신들이 쓴 것처럼 경제 업무를 하다 죽은 것이 아니다.
V. 빌카이티스는 교양 있고 품격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비극을 내다보았다. 1942년 가을, 사람들이 아직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V. 빌카이티스는 유형자들을 곁에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 사랑하는 리투아니아 동포 여러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여기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든 살아남는 사람은 우리가 여기서 겪어야 하는 고통을 꼭 이야기하고, 글로 남겨 주십시오.
스탈린주의가 러시아 민중에게서 바빌로프를 없앴듯이, 리투아니아에서는 V. 빌카이티스를 없앴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바빌로프였다.
1947년 트로피모프카 수산 공장은 채산이 맞지 않는다며 문을 닫았다. 저마다 도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을 받았다. 거기에는 너는 “특별이주민”이며 야쿠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경계 안에서만 살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다달이 관리소에 가서 어디로 달아나지 않았다고 신고해야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할 수 있는 대로 트로피모프카를 떠났다. 혼자서 또는 무리 지어, 바지선과 소형 기선을 타고 떠났다. 유형자 절반이 묻힌 트로피모프카 섬의 공동 무덤을 뒤에 남긴 채였다. 어떤 이들은 레나강 상류로 가서 벌목장에서 일했고, 어떤 이들은 탄광에서 일했다. 많은 사람이 야쿠츠크에서 90킬로미터 떨어진 벽돌 공장 건설장으로 강제로 보내졌다.
나는 「야쿠츠크스트로이」 트러스트의 기계 공작소에서 선반 일을 했다. 이름난 작업 개선 제안자였고, 하루 작업량을 늘 넘겼다. 일을 잘한다고 몇 번이나 정부 표창 후보에 올랐지만, 그때마다 내 이름은 빠졌다. 알고 보니 유형자에게는 훈장을 주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상장만 수십 장이 쌓였고, 나는 그것을 기념품 삼아 간직하고 있다.
야쿠츠크에서 일하며 야간 학교에 다녔다. 리투아니아 젊은이들이 많이 대학에 다녀 교사가 되었다. 나는 야간 과정에서 전기 공학을 공부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다른 바람이 불었고, 우리 유형자들도 숨을 좀 돌렸다. 젊은이들은 노보시비르스크와 옴스크로 공부하러 떠나도 되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로는 여전히 보내 주지 않았다. 여전히 다달이 특별 관리소에 신고하러 다녔다. 여권도 없었다.
A. 아브로마이티스는 1961년에야 리투아니아로 돌아왔다. 똑같이 유형을 살며 제 골고타를 지나온 아내, 그리고 북쪽에서 태어난 두 아이와 함께였다. 고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주 등록을 하기도, 일자리를 얻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세상에 좋은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A. 아브로마이티스는 카우나스 전력망 기업에서 오래 일하며 존경과 신뢰를 받았고, 그곳에서 정년퇴직했다.
러시아어 번역 V. 부트쿠스
주석
- 옮긴이 주: 트로피모프카(트로피몹스크)는 레나강이 랍테프해로 흘러드는 하구 삼각주의 섬에 1942년 유형자들을 부려 세운 수산 정착지다. 신문 발췌는 알타이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을 건너뛰고 도착 장면으로 넘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