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소설
인물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이오시프 스탈린 용어굴라크, 내무인민위원부(NKVD), 트로이카, 58조, 제카 (з/к), 대숙청 사건대숙청
예전에 수감자였던 사람으로서, 스탈린 독단 시기 내무인민위원부(NKVD) 노릴스크 수용소 역사의 몇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나에 대해 몇 마디.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인민위원의 구상에 따라 베르홉체보 철도 분기역에 기계화된 조차용 험프가 세워지고 있었다. 제철소로 보낼 크리보이로크 광석을 실은 화차를 거기서 분류했다. 중요한 공사로 여겨졌고 세르고가 몸소 감독했다. 나는 그곳에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파견 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었다.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의 장례식에는 드네프로페트롭스크 볼셰비키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그러다 1937년, 나는 “인민의 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그때부터 감옥 지하 감방, 정치범 격리소, 중앙 감옥, 호송, 수용소, 유형으로 이어진 18년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세월을 죄 없는 많은 사람들 곁에서 보냈다.
1939년, 옐레츠 정치범 격리소에서 감옥 체제와 괴혈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린 우리를 크라스노야르스크 중계 감옥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8층 침상을 짜 넣은 나무 바지선에 우리를 실었다. 그리고 외륜 기선 ‘마리야 울리야노바’호가 그 바지선을 끌고, 흘러가는 얼음을 뒤따라 예니세이강을 내려가 두딘카로 향했다.
이 호송은 두 달이 걸렸다. 먹을 것으로는 자티루하를 주었다. 예니세이강 물에 소금과 밀가루를 섞은 것이다. 하루 배급은 한 사람에 국자로 세 번이 전부였다. 그릇이 없어서 각자 받는 국자 하나 분량의 자티루하를 누구는 신발에, 누구는 군모나 털모자에, 소매나 윗옷 자락에 받았다. 못 받으면 굶어 죽는 수밖에 없었다. 알루미늄 숟가락은 빼앗아 갔고 나무 숟가락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개처럼 먹어야 했다. 담긴 것을 혀로 핥아 먹는 것이다. 물도, 끓인 물도, 빵도 주지 않았다.
바지선 한 척에 제크가 600명쯤 있었다. 침상 층마다 용변 통이 있었는데, 하루에 한 번 해치를 통해 갑판으로 올려 배 밖에 쏟아 버렸다. 통에 손잡이가 없어서 기운 없는 사람들 손에서 자주 미끄러졌고, 침상과 잠자리와 우리 머리 위로 엎어졌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 갔다. 공기가 없고, 물이 없고, 사람이 먹을 음식이 없고, 위생이라고는 없어서였다. 죽은 사람의 시체는 완전히 썩을 때까지 갑판의 호송병에게 내주지 않았다. 왜냐고? 그래야 죽은 사람 몫으로 하루 세 국자의 자티루하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두 달 동안 우리 바지선 한 척에서만 150명이 넘게 죽었다.
두딘카에 닿았을 때 유빙을 건너 발판을 밟고 제 발로 뭍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들려 나가 타이미르의 영구 동토 위에 눕혀졌다. 그런데 여기서는 괴혈병과 영양실조에 폐렴까지 더해졌다.
그리고 살아 있는 “시체들” 사이에서 또 사람이 줄기 시작했다. 굶주리고 반쯤 헐벗은 사람들 위로 불어닥치는 타이미르의 매서운 돌풍, 그 “상쾌한” 바람이 한몫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바람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소련 사람들의 새 세대가 꼭 알았으면 좋겠다…
노릴스크라고 하면 우리 기억에는 모로조프 광산, 제6·제2 수용 분소의 천막 구역, 전설적인 지질학자 우르반체프의 통나무집, 그리고 튼튼한 2층짜리 NKVD 건물이 남아 있다. 우리가 끌려가 맨 먼저 지은 것은 우리 자신을 가둘 감옥이었고, 자유민들에게는 집과 단독 주택을 지어 주었으며, 열병합 발전소를 세우려고 영구 동토에 기초를 파 들어갔다… 하기야 다른 일도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 몇 해는 호송병이 따라붙는 일반 노동만 했다. 그때 말로 하면 “가라, 한눈팔지 마라”였다. 그런데 나는 남들과 달리 운이 좋았다. 내가 있던 수용 분소에 취주악단 악사들의 작업반이 살고 있었는데, 그 악단을 만들고 이끈 사람이 수감자인 작곡가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카이단-데시코프[1], 피오네르 찬가 「모닥불로 타올라라」를 지은 사람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 하는 집안에서 자라 트럼펫을 불었다. 마침 악단에 트럼펫 주자가 필요했고, 카이단은 나를 클럽 막사로 불렀다.
그는 내 음악 실력을 시험해 보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기가 트로이카에서 58-10조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고 이야기했다. 노릴스크에는 1935년에 끌려왔다. 악단에서 정치범은 그 혼자이고 악사들은 모두 일반 형사범(도둑, 강도, 협잡꾼, 사기꾼 따위…)이었다. 정치범은 그들 틈에 받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트럼펫 주자가 꼭 필요하니 나를 악단에 넣을 수 있게 애써 보겠다고 했다. 악사들은 모두 “연줄 있는” 일을 했다. 그들은 인민의 적이 아니라 형사범, 곧 “친구들”이었다. 악단은 무엇보다 자유민, 주로 NKVD 직원들을 위해 일했다. 카이단은 바로 그 NKVD를 통해, 정치범이자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인민의 적인 나를 악단에서 연주하게 해 달라는 허가를 받아 냈다. 악단은 NKVD 직원들의 여흥 모임, 무도회, 자유민의 장례식, 콤비나트의 기념 행사 같은 데서 자주 연주했다. 이른바 인민의 친구들인 악사들은 모두(인민의 적인 우리와는 달리) 호송 없이 다닐 수 있었다. 물론 카이단과 나는 빼고. 우리 둘이 구역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나강 권총을 찬 “앵무새”, 곧 감시병이 따라붙었다.
나는 일반 노동도 계속했다. 광부로, 석탄 짐꾼으로, 지질 작업반 인부로 시굴 구덩이를 팠다… 악단과 연주해야 하는 날이면 반나절 일반 노동에서 빠져, 개인 호송병에게 이끌려 트럼펫을 들고 문화 여흥 행사장으로 갔다.
나중에는 극장까지 생겼다. 호송되어 오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음악가들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츠파스만 재즈단을 이끌었던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바체예프(트로이카에서 58-10조로 10년형), 지휘자이자 첼리스트로 뒷날 스베르들롭스크 오페라 극장에서 일한 세르게이 댜겔. 극장 미술가 레프 호멘코는 중동철도(КВЖ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을 받았다[2]. 드라간이 이끄는 리보프 합창단이 단원 전부 그대로 왔다. 라트비아 오페레타의 메조소프라노 이리나 크리토. 수영 선수 발레리 부레는 우리 무대에서 푸시킨의 시를 낭송했다. 이름난 에스토니아 피아니스트 우노 톰브레도 함께했다. 앙상블에는 집시 무용수들과 그 밖에 많은 음악가들이 들어왔는데, 아쉽게도 그들의 성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수용 분소와 공장에서 수감자와 자유민을 위해 공연을 했고, 빵 배급과 얼마 안 되는 국거리로 살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나는 그때와 같은 호송에 실려, 4년의 감옥형을 치르러 알렉산드롭스크 중앙 감옥으로 보내졌다…
서툴게 적어 미안하다. 나는 글을 쓸 줄 모른다. NKVD 노릴스크 수용소에서 보낸 세월, 나 자신과 그곳 사람들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을 다 남겨 탄압과 무법 시기의 노릴스크 역사를 앞으로 쓸 사람들에게 넘겨주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쉽다. 나는 벌써 일흔여덟 살이다. 우리는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다.
비탈리 바비체프
고참 당원·노동 원로
명예 철도원
키예프
주석
- 옮긴이 주: 다이제스트의 OCR에는 성이 Кайдан-Дешков(카이단-데시코프)로 찍혀 있으나, 피오네르 노래 「모닥불로 타올라라」(Взвейтесь кострами, 1922)의 작곡가는 보통 세르게이 카이단-데시킨(Кайдан-Дешкин)으로 알려져 있다. 글에 적힌 대로 옮겼다. ↩
- 옮긴이 주: 중동철도는 만주를 가로질러 하얼빈을 지나던 철도로, 1935년 소련이 만주국에 팔기 전까지 소련이 운영했다. 그곳에서 일하다 돌아온 이른바 “하얼빈 사람들”은 1937~1938년 NKVD 작전에서 일본 간첩 혐의로 대거 체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