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окандская автономия · 1917–1918

코칸트 자치국

Kokand Autonomy

1917년 12월 10일(구력 11월 27일) 코칸트에서 열린 제4차 임시 전무슬림 지역 대회가 선포해 1918년 2월 22일까지 존속한 투르키스탄의 자치 정부. 공식 이름은 투르키스탄 자치국으로, 제헌의회가 최종 형태를 정할 때까지 연방 러시아 공화국 안의 자치를 내걸고 러시아인 정착민이 이끈 타슈켄트 소비에트에 맞섰다. 타슈켄트 소비에트 군대가 코칸트를 포격해 점령하면서 무너졌다.

상세

2월 혁명 뒤 투르키스탄에서는 자디드가 중심인 슈로이 이슬로미야와 샤리아를 앞세운 보수적 울라모 자미야티가 생겨났다. 1917년 11월 타슈켄트를 장악한 소비에트는 소브나르콤을 세웠지만, 의장 표도르 콜레소프는 「현 시점에서 무슬림을 최고 권력 기관에 들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무슬림 대회의 연립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무슬림 정치 세력은 타슈켄트 소비에트의 손이 닿지 않는 페르가나 분지의 상업 중심지 코칸트에 약 250명이 모여 자치를 선언했다. 첫 총리는 카자흐인 무하메잔 티니슈파예프였고, 1918년 1월 초 무스타파 쇼카이가 뒤를 이었다. 원주민 다수가 지지해 나망간·사마르칸트 등지에서 수천 명, 타슈켄트에서 6만 명이 모인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자치국은 세금을 걷지 못해 300만 루블의 차입금과 기부금에 기댔고, 소비에트 군이 국립은행 코칸트 지점에서 자치국 계좌를 포함한 800만 루블을 압수하자 내분이 깊어졌다. 군대는 약 2,000명으로 장교도 훈련된 병사도 없어 코칸트 민병대장 에르가시에게 의존했다. 남동연맹의 알렉산드르 두토프, 알라시 자치국, 부하라 에미르와 손잡으려던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민족 인민위원 이오시프 스탈린은 승인 요청에 투르키스탄의 노동자들이 힘이 있다면 타슈켄트의 인민위원부를 「무력으로」 해산하라고 답했다.

1918년 1월 중순 제4차 지역 소비에트 대회는 자치국을 불법화하고 그 구성원의 체포를 결의했다. 1월 두토프의 철도 봉쇄가 풀려 무기가 타슈켄트에 들어오면서 군사력의 격차는 결정적이 되었다. 2월 11일 밤 자치국 쪽 무장대가 후다야르 칸 궁전과 코칸트 소비에트 본부를 점거하자 타슈켄트 소비에트는 계엄을 선포하고 콘스탄틴 오시포프의 부대를 보냈다. 포격이 시작되자 정부는 쇼카이 내각과 강경파로 갈라졌고, 2월 18일 총사령관 에르가시가 정변으로 권력을 쥐었다. 그가 19일 항복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소비에트 군은 도시를 집중 포격했고, 22일 구시가 대표단이 무장 해제와 소비에트 권력 인정에 동의했다. 점령된 도시는 약탈당했고 주민 학살이 벌어졌는데, 영어 출처들도 희생자를 1만 명 이상에서 최대 2만 5천 명까지로 다르게 적는다. 자치국 지지자들은 즉결 처형되거나 체포되었고, 소비에트 정부의 식량 징발이 기근을 낳았다. 에르가시가 1918년 여름 시작한 무장 저항은 바스마치 운동으로 번졌고, 자치국은 그 뒤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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