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urrection de décembre 1851 · 1851.12.03–13

1851년 12월 쿠데타 반대 봉기

Risings against the coup of December 1851

상위 항목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1851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에 맞서 프랑스 곳곳, 특히 남동부(바스잘프, 바르, 드롬)와 중부·남서부의 농촌과 소도시에서 공화파가 일으킨 무장 봉기. 아무 계획 없이 저절로 일어났지만 전국에서 10만 명 가까이가 가담했고, 디뉴에서는 도청까지 잠시 장악했다. 군대에 진압된 뒤 32개 도에 계엄이 선포되고 2만 명 넘게 혼성위원회의 처벌을 받았다.

상세

파리에서는 12월 2~4일 위고, 쇨셰르, 보댕 같은 산악파 의원들이 저항위원회를 만들고 바리케이드를 쌓았지만, 1848년 6월의 학살을 잊지 않은 노동자들은 대체로 나서지 않았다. 4일 군대가 대로에서 군중에게 발포하면서 파리의 저항은 끝났다. 지방에서는 소식이 천천히 퍼졌다. 리옹은 카스텔란 장군의 대비 속에 움직이지 않았고, 마르세유, 릴, 보르도, 툴루즈 같은 큰 도시의 시위도 쉽게 흩어졌다. 그해 미리 노동자 지도자들을 잡아들인 것도 저항을 막았다.

그러나 몇몇 시의회는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면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헌법 제68조를 들어 보나파르트의 직위 상실을 선포했고, 그것이 「공화국을 지키자」는 봉기로 번졌다. 전체 계획 없이 저절로 일어난 저항이었지만 가담자는 전국에서 10만 명에 이르렀을 수 있다. 질서당을 뽑았던 서부, 북부, 북동부는 거의 조용했다. 중심은 남동부였고, 클라므시, 미랑드, 베다리외, 르동종, 미요 같은 중부·남서부의 곳곳도 들고일어났다. 12월 5일 남동부에서 봉기가 시작되었고, 7일 디뉴의 수비대가 항복해 공화파가 바스잘프 도청을 차지했다. 공화파 손에 넘어간 도청은 프랑스에서 이곳뿐이었고, 「도 저항위원회」가 도를 다스렸다.

전신을 쥔 보나파르트파 도지사들과 군대는 곧 반격했다. 디뉴는 13일 되찾겼고, 무장이 변변찮은 바르의 공화파 행렬은 쉽게 흩어져 며칠 사이 50명가량이 죽었다. 붙잡혀 두 번 총살당한 마르탱 비두레는 바르 저항의 영웅이 되었다. 12월 8일부터 32개 도에 계엄이 선포되었고, 즉결 처형과 대대적인 체포가 1852년 1월까지 이어졌다. 체포된 2만 6,884명 가운데 2만 1,000명이 도지사, 장군, 법관으로 이루어진 혼성위원회의 판결을 받았고, 9,530명이 알제리로, 239명이 카옌 형무소로 보내졌다. 모르니의 선전은 약탈과 살인 이야기를 부풀려 망설이던 정통왕조파와 자유주의 유지들까지 쿠데타 편으로 끌어들였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이 봉기를 농민의 각성으로 보았다. “쿠데타 뒤의 봉기들에서 프랑스 농민의 일부는 손에 무기를 들고 1848년 12월 10일 자기가 던진 표에 항의했다. 1848년 이래의 학교가 그들을 깨우친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아직 보나파르트에 대한 미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바로 그 「가장 붉은 도들」에서 농민들이 12월 20~21일 국민투표 때 보나파르트에게 표를 던졌다고 그는 덧붙였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fr.wikipedia.org
  2. fr.wikipedia.org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