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PeopleJoseph Stalin, Karl Marx, Karl Kautsky, Georgi Plekhanov, Julius Martov TermsThe Right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Liquidationism, August Bloc GenealogyThe Course of Soviet Nationality Policy
러시아의 반혁명기는 '천둥과 번개'만 몰고 온 것이 아니라 운동에 대한 환멸과 공동의 힘에 대한 불신도 함께 몰고 왔다. '밝은 미래'를 믿는 동안 사람들은 민족에 상관없이 나란히 싸웠다. 공동의 문제가 무엇보다 먼저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의심이 스며들자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민족의 거처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각자 자기 자신만을 믿으라는 것이다! '민족 문제'가 무엇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나라의 경제 생활에서는 심각한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1905년은 헛되이 지나가지 않았다. 농촌에 남아 있던 농노제 질서의 잔재는 또 한 차례 타격을 입었다. 기근의 해들에 뒤이은 몇 차례의 풍작과 그 뒤에 찾아온 산업 호황은 자본주의를 앞으로 밀고 나갔다. 농촌의 분화, 도시의 성장, 상업과 교통로의 발전은 모두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변경 지역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여러 민족의 경제적 결집 과정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민족들은 움직이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자리 잡은 '입헌 체제'도 민족들을 각성시키는 같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신문과 문헌 일반의 증가, 어느 정도의 출판·문화 기관의 자유, 민중 극장의 성장 따위는 의심할 바 없이 '민족 감정'의 강화에 이바지했다. 선거 운동과 정치 그룹을 거느린 두마는 민족들이 활기를 띨 새로운 가능성을, 민족들을 동원할 새롭고 넓은 무대를 제공했다.
그리고 위로부터 일어난 전투적 민족주의의 물결, 변경 지역의 '자유 애호'에 앙갚음하려는 '권력자들'의 잇따른 탄압은 아래로부터의 민족주의 물결을 맞받아 불러일으켰고, 이는 때로 조야한 배외주의로 넘어갔다. 유대인 사이에서 시온주의[1]가 강해지고, 폴란드에서 배외주의가 자라나고, 타타르인 사이에서 범이슬람주의가, 아르메니아인·그루지야인·우크라이나인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강해지고, 속물 대중이 전반적으로 반유대주의 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모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민족주의의 물결은 노동자 대중마저 집어삼킬 듯 갈수록 거세게 밀려왔다. 그리고 해방 운동이 쇠퇴하면 할수록 민족주의의 꽃은 그만큼 무성하게 피어났다.
이 어려운 시기에 사회민주주의에게는 높은 사명이 주어졌다. 민족주의에 반격을 가하고 대중을 이 전반적인 '유행병'에서 지켜내는 일이다. 민족주의에 맞서 국제주의라는 검증된 무기를, 계급투쟁의 통일성과 불가분성을 맞세울 수 있는 것은 사회민주주의, 오직 사회민주주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올수록, 러시아의 모든 민족 프롤레타리아의 형제애와 단결을 부르짖는 사회민주주의의 목소리는 그만큼 크게 울려야 했다. 이때 민족주의 운동과 직접 부딪치는 변경 지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는 특별한 굳건함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회민주주의자가 이 과제를 감당할 만한 높이에 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변경 지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러했다. 전에는 공동의 과제를 강조하던 분트는 이제 자신의 특수한, 순전히 민족주의적인 목표를 앞자리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급기야 '안식일 준수'와 '이디시어 인정'을 선거 운동의 투쟁 항목으로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2] 분트의 뒤를 캅카스가 따랐다. 전에는 나머지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함께 '문화적 민족 자치'를 부정하던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자의 일부가 이제는 그것을 당면 요구로 내세우고 있다.[3] 민족주의적 동요를 외교적으로 승인해 준 청산파의 회의는 더 말할 것도 없다.[4]
그런데 이로부터, 민족문제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견해가 아직 모든 사회민주주의자에게 분명하지는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분명 민족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전면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민족주의의 안개가 어디에서 밀려오든 그에 맞서는, 일관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한마음의 지칠 줄 모르는 작업이 필요하다.
I. 민족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은 무엇보다 먼저 공동체, 곧 일정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인종적인 것도 종족적인 것도 아니다. 오늘의 이탈리아 민족은 로마인, 게르만인, 에트루리아인, 그리스인, 아랍인 등으로부터 형성되었다. 프랑스 민족은 갈리아인, 로마인, 브리튼인, 게르만인 등으로 이루어졌다. 잉글랜드인과 독일인을 비롯하여 갖가지 인종과 종족의 사람들로부터 민족을 이룬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민족은 인종적·종족적 공동체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동체다.
다른 한편, 키루스나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고 갖가지 종족과 인종으로 이루어졌지만 민족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민족이 아니라, 이런저런 정복자의 승패에 따라 흩어졌다 뭉쳤다 하는, 우연하고 결합이 느슨한 집단들의 덩어리였다.
그러므로 민족은 우연하고 덧없는 덩어리가 아니라 안정된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러나 안정된 공동체라고 모두 민족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도 안정된 공동체지만 아무도 그것을 민족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민족 공동체는 국가 공동체와 무엇이 다른가? 다른 무엇보다도, 민족 공동체는 공통의 언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반면 국가에 공통의 언어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는 점이 다르다. 오스트리아의 체코 민족과 러시아의 폴란드 민족은 각자에게 공통된 언어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을 테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온전한 하나로 있는 데는 그 안에 여러 언어가 있다는 사실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민중이 실제로 쓰는 언어이지 공문서의 관청 언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의 공통성은 민족의 특징적 표지의 하나다.
물론 이것은 서로 다른 민족들이 언제 어디서나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는 뜻도,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반드시 하나의 민족을 이룬다는 뜻도 아니다. 민족마다 공통의 언어가 있어야 하지만, 민족이 다르다고 언어가 반드시 달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꺼번에 여러 언어로 말하는 민족은 없지만, 그렇다고 같은 언어로 말하는 두 민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잉글랜드인과 북아메리카인은 같은 언어로 말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민족을 이루지는 않는다. 노르웨이인과 덴마크인, 잉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왜, 예컨대 잉글랜드인과 북아메리카인은 언어가 같은데도 하나의 민족을 이루지 않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함께 살지 않고 서로 다른 영토에서 살기 때문이다. 민족은 오랜 세월에 걸친 규칙적인 교류의 결과로, 사람들이 대를 이어 함께 살아온 결과로만 형성된다. 그리고 오랜 공동생활은 공통의 영토 없이는 불가능하다. 잉글랜드인과 아메리카인은 전에는 하나의 영토인 잉글랜드에서 살았고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다. 그 뒤 잉글랜드인의 일부가 잉글랜드를 떠나 새 영토인 아메리카로 옮겨 갔고, 여기 새 영토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북아메리카 민족을 형성했다. 서로 다른 영토가 서로 다른 민족의 형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영토의 공통성은 민족의 특징적 표지의 하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토의 공통성 그 자체가 민족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그러려면 그 밖에도 민족의 각 부분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주는 내적인 경제적 유대가 필요하다. 잉글랜드와 북아메리카 사이에는 그런 유대가 없고,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른 두 민족을 이룬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인들 자신도, 북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이 서로 간의 분업과 교통로의 발전 따위 덕분에 하나의 경제적 전체로 묶여 있지 않았다면 민족이라는 이름값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루지야인을 예로 들어 보자. 개혁 이전 시대의 그루지야인들은 공통의 영토에서 살았고 하나의 언어로 말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엄밀히 말해 하나의 민족을 이루지 못했다. 서로 단절된 여러 공국(公國)으로 쪼개져 공통의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 몇 세기에 걸쳐 서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약탈했으며, 페르시아인과 튀르크인을 서로에게 부추겨 댔기 때문이다. 이따금 어느 운 좋은 차르가 이루어 내곤 하던 덧없고 우연한 공국 통합은 잘해야 표면적인 행정의 영역에 미쳤을 뿐, 공후들의 변덕과 농민들의 무관심에 부딪혀 금세 부서지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산산이 조각나 있던 그루지야에서는 달리 될 수도 없었다... 민족으로서의 그루지야는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나타났다. 농노제의 몰락과 나라 경제생활의 성장, 교통로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발생이 그루지야의 여러 지방 사이에 분업을 이루어 놓고, 공국들의 경제적 고립을 뿌리째 흔들어 그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낸 때가 되어서다.
봉건제 단계를 지나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생활의 공통성, 경제적 연결은 민족의 특징적 표지의 하나다.
그러나 이것도 전부는 아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 말고도, 민족으로 묶인 사람들의 정신적 면모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민족들은 생활 조건에서만이 아니라 민족 문화의 특수성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면모에서도 서로 구별된다. 같은 언어로 말하는 잉글랜드와 북아메리카와 아일랜드가 그래도 서로 다른 세 민족을 이룬다면, 거기에는 저마다 같지 않은 생존 조건의 결과로 대를 이어 만들어진 독특한 심리 구조가 적잖은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심리 구조 그 자체, 달리 부르자면 '민족성'은 관찰자에게 붙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지만, 그것이 민족에 공통된 문화의 독자성으로 표현되는 한 그것은 붙잡을 수 있는 것이며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민족성'은 한번 정해지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생활 조건과 함께 변한다. 그러나 그것이 매 순간마다 존재하는 한, 그것은 민족의 얼굴에 자기 도장을 찍는다.
그러므로 문화의 공통성 속에서 나타나는 심리 구조의 공통성은 민족의 특징적 표지의 하나다.
이로써 우리는 민족의 표지를 모두 살펴보았다.
민족이란 언어, 영토, 경제생활, 그리고 문화의 공통성 속에서 나타나는 심리 구조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발생한, 역사적으로 형성된 안정된 사람들의 공동체다.
이때 민족도 다른 모든 역사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변화의 법칙 아래 놓이며, 자기의 역사를, 시작과 끝을 가진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강조해 둘 것은, 위의 표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 떼어 놓고 보면 민족을 정의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 표지들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민족은 민족이기를 그친다.
공통의 '민족성'을 지닌 사람들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경제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서로 다른 영토에서 살며,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한다면 그들이 하나의 민족을 이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컨대 러시아, 갈리치아, 아메리카, 그루지야, 산악 지방의 유대인들이 그러하니, 우리가 보기에 이들은 단일한 민족을 이루지 않는다.
영토와 경제생활이 공통된 사람들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언어와 '민족성'의 공통성이 없으면 그들은 하나의 민족을 이루지 못한다. 예컨대 발트 연안 지방의 독일인과 라트비아인이 그러하다.
끝으로, 노르웨이인과 덴마크인은 같은 언어로 말하지만 다른 표지들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을 이루지 않는다.
모든 표지가 함께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민족이 성립한다.
'민족성'이 여러 표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민족의 유일한 본질적 표지이고, 나머지 표지들은 사실 민족의 표지가 아니라 민족 발전의 조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예컨대 오스트리아에서 민족문제의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로 이름난 R. 슈프링거, 그리고 특히 O. 바우어가 그런 관점에 서 있다.
그들의 민족 이론을 살펴보자.
슈프링거에 따르면 "민족이란 같게 생각하고 같게 말하는 사람들의 연합"이다. 그것은 "'땅'과 결부되지 않은, 현대인 집단의 문화 공동체"다[5](강조는 우리의 것).
그러니까 같게 생각하고 같게 말하는 사람들의 '연합'이 곧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 아무리 단절되어 있든, 어디에 살든 상관없이 말이다.
바우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는 묻는다. "사람들을 민족으로 묶어 주는 것은 언어의 공통성인가? 그러나 잉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은... 같은 언어로 말하지만 하나의 인민을 이루지 않는다. 유대인은 공통의 언어가 아예 없는데도 민족을 이룬다."[6]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상대적인 성격 공동체다."
그러면 성격이란, 이 경우 민족적 성격이란 무엇인가?
민족적 성격이란 "한 민족체의 사람들을 다른 민족체의 사람들과 구별해 주는 표지들의 총합,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해 주는 신체적·정신적 자질의 복합체"다.
물론 바우어는 민족적 성격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들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운명이다"... "민족이란 운명의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운명 공동체는 다시 "사람들이 생활 수단을 생산하고 노동 생산물을 분배하는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바우어의 표현대로 가장 '완전한' 민족의 정의에 이르렀다.
"민족이란 운명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성격의 공동체로 묶인 사람들의 총체다."
그러니까 영토·언어·경제생활의 공통성과의 필연적 연관 밖에서 취해진, 운명의 공통성에 기초한 민족적 성격의 공통성이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민족에서 대체 무엇이 남는가? 경제적으로 서로 단절되어 있고, 서로 다른 영토에서 살며, 대대로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민족적 공통성을 말할 수 있는가?
바우어는 유대인이 "공통의 언어가 아예 없는데도" 민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컨대 서로 완전히 단절된 채 서로 다른 영토에 살고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그루지야, 다게스탄, 러시아, 아메리카의 유대인들에게 무슨 '운명의 공통성'과 민족적 유대를 말할 수 있는가?
이 유대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각각 그루지야인, 다게스탄인, 러시아인, 아메리카인과 공통의 경제적·정치적 생활을 하며 그들과 공통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민족적 성격에 도장을 찍지 않을 리 없다. 그들에게 공통된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통의 기원, 그리고 민족적 성격의 얼마간의 잔재다. 이 모든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화석처럼 굳은 종교 의례와 풍화되어 가는 심리적 잔재가, 그들을 둘러싼 살아 있는 사회경제적·문화적 환경보다 더 강하게 이 유대인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어떻게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런 가정 위에서만 유대인 일반을 단일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우어의 민족은 심령론자들의 신비하고 자족적인 '민족정신'과 무엇이 다른가?
바우어는 민족의 '구별 표지'(민족적 성격)와 그들 생활의 '조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긋고 둘을 서로 떼어 놓는다. 그러나 민족적 성격이란 생활 조건의 반영, 환경에서 받은 인상의 응결이 아니면 무엇인가? 민족적 성격을 낳은 토양에서 그것을 떼어 내고 고립시켜, 어떻게 민족적 성격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가?
또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북아메리카가 아직 '뉴잉글랜드'라 불리던 시절에 잉글랜드 민족과 북아메리카 민족은 대체 무엇이 달랐는가? 민족적 성격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북아메리카인들은 잉글랜드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고, 영어와 함께 잉글랜드의 민족적 성격까지 아메리카로 가져갔으며, 새로운 조건의 영향으로 그들 나름의 특수한 성격이 만들어지고 있었을 테지만 그렇게 빨리 그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성격의 크고 작은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때 이미 잉글랜드와는 다른 민족을 이루고 있었다! 분명 민족으로서의 '뉴잉글랜드'가 민족으로서의 잉글랜드와 달랐던 것은 특수한 민족적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혹은 민족적 성격 때문이라기보다는 잉글랜드와 다른 환경, 다른 생활 조건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분명해진 것은, 실제로는 민족의 유일한 구별 표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것은 표지들의 총합뿐이며, 민족들을 견주어 볼 때 그 가운데 어떤 때는 이 표지(민족적 성격)가, 어떤 때는 저 표지(언어)가, 또 어떤 때는 제3의 표지(영토, 경제적 조건)가 더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민족은 이 모든 표지를 함께 취한 결합체다.
민족을 민족적 성격과 동일시하는 바우어의 관점은 민족을 그 토양에서 떼어 내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족적인 힘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 결과는 살아서 활동하는 민족이 아니라 신비하고 붙잡을 수 없는 저승의 그 무엇이다. 거듭 말하지만, 예컨대 그루지야, 다게스탄, 러시아, 아메리카를 비롯한 각지의 유대인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성원들이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니까), 지구의 서로 다른 곳에 살고, 평생 서로 볼 일도 없고, 평시에도 전시에도 함께 나설 일이 없는 유대 민족이란 대체 무슨 민족인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가 자기의 민족 강령을 만드는 것은 그런 종이 위의 '민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는 오직 현실의 민족들, 활동하고 움직이며 그렇기에 자기를 셈에 넣도록 만드는 민족들만을 셈에 넣을 수 있다.
바우어는 분명 역사적 범주인 민족을 민족지(民族誌)적 범주인 종족과 뒤섞고 있다.
하기야 바우어 자신도 자기 입장의 약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책 첫머리에서 유대인이 민족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 바우어는 책 끝에 가서는 "자본주의 사회는 대체로 그들(유대인)이 민족으로 유지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자본주의 사회가 그들을 다른 민족들에 동화시킨다고 말을 고친다. 알고 보니 그 까닭은 "유대인에게는 폐쇄된 정주 지역이 없다"는 데 있다. 반면 그런 지역이 예컨대 체코인에게는 있으며, 바우어에 따르면 체코인은 민족으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까닭은 영토의 부재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논증하면서 바우어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민족적 자치가 유대인 노동자의 요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는 그럼으로써 본의 아니게 자기 자신의 이론, 영토의 공통성을 민족의 표지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는 이론을 뒤엎어 버렸다.
바우어는 더 나아간다. 책 첫머리에서 그는 "유대인은 공통의 언어가 아예 없는데도 민족을 이룬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130쪽에 이르기가 무섭게 그는 전선을 바꾸어 똑같이 단호하게 선언한다. "공통의 언어 없이는 어떤 민족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강조는 우리의 것)
여기서 바우어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언어는 인간 교류의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것이었지만, 그는 동시에 증명할 생각이 없던 것까지 본의 아니게 증명해 버렸다. 곧 언어의 공통성이 갖는 의의를 부정하는 자기 자신의 민족 이론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관념론의 실로 꿰맨 이론은 스스로 자신을 반박한다.
II. 민족 운동
민족은 단순히 역사적 범주가 아니라 특정 시대, 곧 상승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역사적 범주다. 봉건제가 청산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은 동시에 사람들이 민족으로 형성되는 과정이다. 예컨대 서유럽에서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 잉글랜드인,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은 봉건적 분열을 이기고 개선 행진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민족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민족의 형성은 동시에 민족들이 독립된 민족국가로 바뀌는 것을 뜻했다. 잉글랜드 민족, 프랑스 민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은 동시에 잉글랜드 국가, 프랑스 국가이기도 하다. 이 과정 밖에 남은 아일랜드가 전체 그림을 바꾸지는 않는다.
동유럽에서는 일이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서쪽에서 민족들이 국가로 발전하는 동안, 동쪽에서는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 민족들 사이에 걸친 국가가 형성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그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정치적으로 가장 발전한 것이 독일인이었고,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민족체들을 국가로 통합하는 일을 그들이 떠맡았다. 헝가리에서는 국가적 조직화에 가장 잘 적응한 것이 헝가리 민족체들의 핵심인 마자르인이었고, 헝가리를 통합한 것도 그들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민족체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대러시아인이 떠맡았으니, 그들 앞에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강력하고 조직된 귀족 군사 관료층이 서 있었다.
동쪽에서는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
이런 독특한 국가 형성 방식은 봉건제가 아직 청산되지 않은 조건, 자본주의가 미약하게 발전한 조건, 뒷전으로 밀려난 민족체들이 아직 경제적으로 결집하여 온전한 민족을 이루지 못한 조건에서만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쪽의 국가들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상업과 교통로가 발전한다. 큰 도시들이 생겨난다. 민족들이 경제적으로 결집한다. 밀려나 있던 민족체들의 고요한 생활에 뛰어든 자본주의는 그들을 뒤흔들어 움직이게 만든다. 신문과 극장의 발전, 제국의회(오스트리아)와 두마(러시아)의 활동은 '민족 감정'의 강화를 부추긴다. 새로 태어난 인텔리겐치아는 '민족 이념'에 물들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독자적인 생활에 눈을 뜬 이 밀려난 민족들은 이제 독립된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길에서, 이미 오래전에 국가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 지배 민족 지도층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힌다. 때가 늦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스트리아에서는 체코인과 폴란드인 등이, 헝가리에서는 크로아티아인 등이, 러시아에서는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민족으로 형성된다. 서유럽에서 예외였던 것(아일랜드)이 동쪽에서는 규칙이 되었다.
서쪽에서 아일랜드는 자신의 예외적 처지에 민족 운동으로 답했다. 동쪽에서 눈을 뜬 민족들도 같은 것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유럽 동쪽의 젊은 민족들을 투쟁으로 밀어붙이는 사정이 만들어졌다.
투쟁이 시작되고 타올랐다. 다만 그것은 사실 민족 전체와 민족 전체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지배 민족과 밀려난 민족의 지배계급들 사이의 투쟁이었다. 투쟁을 벌이는 것은 보통 억압받는 민족의 도시 소부르주아지 대 지배 민족의 대부르주아지(체코인과 독일인)거나, 억압받는 민족의 농촌 부르주아지 대 지배 민족의 지주(폴란드의 우크라이나인)거나, 억압받는 민족의 '민족적' 부르주아지 전체 대 지배 민족의 집권 귀족(러시아의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이다.
주역은 부르주아지다.
젊은 부르주아지에게 기본 문제는 시장이다. 자기 상품을 팔아 치우고 다른 민족체의 부르주아지와의 경쟁에서 승자로 올라서는 것, 그것이 그의 목적이다. 여기서 '자기의', '조국의' 시장을 확보하려는 그의 욕망이 나온다. 시장은 부르주아지가 민족주의를 배우는 첫 학교다.
그러나 일은 보통 시장에 그치지 않는다. 투쟁에는 지배 민족의 반봉건적·반부르주아적 관료층이 '잡아끌고 내놓지 않는' 저들의 수법을 들고 끼어든다. 지배 민족의 부르주아지는, 그것이 소부르주아지든 대부르주아지든, 자기 경쟁자를 '더 빨리'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해치울 수 있게 된다. '힘'이 하나로 합쳐지고, '이민족' 부르주아지에 대한 갖가지 제한 조치가 잇따르며 이는 탄압으로 넘어간다. 투쟁은 경제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 간다. 이주의 자유 제한, 언어 압박, 선거권 제한, 학교 축소, 종교적 압박 등이 '경쟁자'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물론 이런 조치들은 지배 민족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만이 아니라 집권 관료층의 이른바 특수한 신분적 목적에도 봉사한다. 그러나 결과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부르주아 계급과 관료층은 이 경우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간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야기든 러시아 이야기든 마찬가지다.
사방에서 압박받는 억압 민족의 부르주아지는 자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제 민족의 밑바닥 대중'에 호소하며 '조국'을 부르짖기 시작하고, 자기 자신의 사업을 온 인민의 사업인 양 내세운다. 그는 '조국'의 이익을 위한다며... '동포'들로 군대를 모집한다. 그리고 '밑바닥 대중'도 그 호소에 늘 무심하지는 않아서 그의 깃발 둘레에 모여든다. 위로부터의 탄압은 그들도 건드리며 그들 속에 불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족 운동이 시작된다.
민족 운동의 힘은 민족의 넓은 층, 곧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거기에 얼마나 참여하는가에 따라 정해진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깃발 아래 서게 될지는 계급 모순의 발전 정도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성과 조직성에 달려 있다. 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자기 자신의 검증된 깃발이 있으며, 부르주아지의 깃발 아래로 들어갈 까닭이 없다.
농민으로 말하면, 그들의 민족 운동 참여는 무엇보다 탄압의 성격에 달려 있다. 아일랜드에서 그랬듯 탄압이 '토지'의 이해를 건드리면 농민의 넓은 대중은 곧바로 민족 운동의 깃발 아래 선다.
다른 한편, 예컨대 그루지야에 이렇다 할 반러시아 민족주의가 없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거기에 대중의 그런 민족주의에 먹이를 줄 러시아인 지주나 러시아인 대부르주아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루지야에 있는 것은 반아르메니아 민족주의인데, 이는 거기에 아직 아르메니아인 대부르주아지가 있어서, 아직 여물지 못한 그루지야인 소부르주아지를 때려눕히며 그들을 반아르메니아 민족주의로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요인들에 따라 민족 운동은 갈수록 커지는 대중적 성격을 띠기도 하고(아일랜드, 갈리치아), 자잘한 승강이의 연쇄로 바뀌어 추문과 간판을 둘러싼 '투쟁'으로 변질되기도 한다(보헤미아의 몇몇 소도시).
민족 운동의 내용이 어디서나 같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운동이 내거는 다양한 요구에 따라 정해진다. 아일랜드에서 운동은 농업적 성격을 띠고 보헤미아에서는 '언어적' 성격을 띠며, 어떤 곳에서는 시민적 평등권과 신앙의 자유를, 다른 곳에서는 '자' 민족 관리나 자기의 의회를 요구한다. 다양한 요구들 속에서는 민족 일반을 특징짓는 다양한 표지들(언어, 영토 등)이 자주 비쳐 보인다.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우어의 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민족적 성격'에 대한 요구는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럴 만도 하다. '민족적 성격'은 그 자체로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이며, I. 슈트라서가 옳게 지적했듯 "정치는 그것을 가지고 할 일이 없다".[7]
민족 운동의 형태와 성격은 대체로 이러하다.
말한 것에서 분명해지듯, 상승하는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민족 투쟁은 부르주아 계급들 사이의 투쟁이다. 때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민족 운동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며, 그러면 민족 투쟁은 겉보기에 '온 인민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다. 그 본질에서 그것은 언제나 부르주아적이며, 주로 부르주아지에게 이롭고 부르주아지의 구미에 맞는 투쟁이다.
그러나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체 억압 정책에 맞서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이주의 자유 제한, 선거권 박탈, 언어 압박, 학교 축소를 비롯한 탄압은 부르주아지 못지않게, 어쩌면 그보다 더 노동자들을 건드린다. 이런 상태는 예속 민족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적 힘이 자유롭게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을 뿐이다. 타타르인이나 유대인 노동자가 집회와 강연에서 모국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학교를 닫아 버리는 판국에, 그들의 정신적 재능이 온전히 발전하리라고 진지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탄압 정책은 다른 쪽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업에 위험하다. 그것은 넓은 층의 관심을 사회적 문제, 계급투쟁의 문제로부터 민족적 문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에 '공통된' 문제 쪽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이해관계의 조화'라는 거짓 설교가 자라날 좋은 토양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이익을 덧칠해 가리고 노동자들을 정신적으로 예속시킬 토양을 만들어 준다. 그럼으로써 모든 민족체 노동자들의 단결이라는 사업 앞에 심각한 장벽이 세워진다. 폴란드 노동자의 상당 부분이 지금까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국제적 노동운동의 곁에 비켜서 있다면, 그것은 주로 '권력자들'의 뿌리 깊은 반폴란드 정책이 그런 예속의 토양을 만들어 주고 노동자들이 그 예속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압 정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민족 억압의 '체계'에서 민족들끼리 맞붙이는 '체계'로, 학살과 포그롬의 '체계'로 자주 넘어간다. 물론 이 마지막 것이 어디서나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가능한 곳, 기초적인 자유조차 없는 조건에서는 그것이 자주 무시무시한 규모를 띠어 노동자 단결의 사업을 피와 눈물 속에 빠뜨릴 듯 위협한다. 캅카스와 남부 러시아가 적잖은 본보기를 보여 준다. '분할하여 지배하라', 이것이 맞붙임 정책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런 정책이 성공하는 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해악이며, 국가 안 모든 민족체 노동자들의 단결 사업을 가로막는 더없이 심각한 장벽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이익은 모든 동지가 단일한 국제적 군대로 완전히 융합하는 데, 그들이 부르주아지의 정신적 예속에서 하루빨리 최종적으로 해방되는 데, 어느 민족에 속하든 자기 형제들의 정신적 힘이 완전하고 자유롭게 발전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가장 교묘한 것부터 가장 조야한 것까지 온갖 형태의 민족 억압 정책에 맞서, 또 온갖 형태의 맞붙임 정책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의 사회민주주의는 민족자결권을 선포한다.
자결권이란 곧 이런 것이다. 오직 민족 자신만이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며, 누구도 민족의 생활에 폭력으로 개입할 권리, 그 학교와 그 밖의 기관을 파괴할 권리, 그 풍습과 관습을 부술 권리, 그 언어를 압박하고 그 권리를 깎아낼 권리를 갖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사회민주주의가 민족의 모든 관습과 기관을 무엇이든 지지하리라는 뜻이 아니다. 민족에 가해지는 폭력에 맞서 싸우면서도 사회민주주의는 오직 민족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리만을 옹호할 것이며, 동시에 그 민족의 해로운 관습과 기관에 맞서는 선동을 벌여 그 민족의 근로 층이 그것들에서 해방될 수 있게 할 것이다.
자결권이란 곧 이런 것이다. 민족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자신을 조직할 수 있다. 민족은 자치의 원칙 위에 자기 생활을 꾸릴 권리가 있다.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연방적 관계를 맺을 권리가 있다. 민족은 완전히 분리할 권리가 있다. 민족은 주권적이며, 모든 민족은 평등하다.
물론 이것은 사회민주주의가 민족의 어떤 요구든 다 옹호하리라는 뜻이 아니다. 민족은 심지어 낡은 질서로 되돌아갈 권리도 있지만, 그렇다고 사회민주주의가 그 민족의 이런저런 기관의 그런 결정에 서명하리라는 뜻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지키는 사회민주주의의 의무와, 갖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진 민족의 권리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것이다.
민족자결권을 위해 싸우면서 사회민주주의가 스스로에게 놓는 목표는 민족 억압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민족들 사이의 투쟁의 밑동을 파내고 그 날을 무디게 하여 그것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은, 민족 투쟁을 깊게 하고 부풀리며 민족 운동을 이어 가고 날카롭게 하려 애쓰는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의 '민족' 깃발 아래 설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우어가 내놓는 이른바 '진화적 민족' 정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진화적 민족' 정책을 '현대 노동자 계급'의 정책과 동일시하려는 바우어의 시도는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민족들의 투쟁에 뜯어맞추려는 시도다.
본질에서 부르주아적인 민족 운동의 운명은 자연히 부르주아지의 운명과 묶여 있다. 민족 운동의 최종적 몰락은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함께라야 가능하다. 완전한 평화는 사회주의의 왕국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민족 투쟁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 그 뿌리를 파내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최대한 무해하게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도 가능하다. 스위스와 아메리카의 본보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려면 나라를 민주화하고 민족들에게 자유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주어야 한다.
III. 문제의 제기
민족은 자기 운명을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가 있다. 민족은 물론 다른 민족들의 권리를 짓밟지 않는 한에서,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자신을 조직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족의 다수,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고려한다면, 민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신을 조직해야 하며 그 미래의 구조는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민족은 자치적으로 자신을 조직할 권리가 있다. 심지어 분리할 권리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이 어떤 조건에서든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며, 자치나 분리가 어디서나 언제나 민족에게, 곧 민족의 다수에게, 곧 근로 층에게 이로우리라는 뜻도 아니다. 자캅카지예의 타타르인들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를테면 자기네 의회에 모여 베크와 물라들의 영향에 굴복한 채 옛 질서를 되살리기로, 국가에서 분리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자결 조항의 뜻에 따르면 그들은 그렇게 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타타르 민족 근로 층의 이익이 될 것인가? 베크와 물라들이 대중을 이끌고 민족문제를 결정하는 것을 사회민주주의가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가? 사회민주주의는 이 일에 개입하여 민족의 의지에 일정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야 하지 않는가? 타타르 대중에게 가장 이로운 구체적인 문제 해결 방안을 들고나서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떤 해결이 근로 대중의 이익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가? 자치인가, 연방인가, 분리인가?
이 모든 것은 그 민족을 둘러싼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에 따라 해결이 달라지는 문제들이다.
그뿐이 아니다. 조건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변하며, 어느 시점에 옳았던 해결이 다른 시점에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 마르크스는 러시아령 폴란드의 분리를 지지했고, 그가 옳았다. 그때 문제는 더 높은 문화를 그것을 파괴하는 더 낮은 문화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 문제는 이론 속에만, 학술적으로만 서 있던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 생활 그 자체 속에 서 있었다...
19세기 말에 폴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미 폴란드 분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으며, 그들 또한 옳았다. 지난 50년 동안 러시아와 폴란드의 경제적·문화적 접근이라는 방향으로 깊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이 분리 문제는 실천의 대상에서 학술 논쟁의 대상으로, 기껏해야 국외의 지식인들이나 들뜨게 하는 문제로 바뀌었다.
물론 이것은 폴란드 분리 문제가 다시 일정에 오를 수 있는 어떤 국내외적 정세가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민족문제의 해결은 오직 역사적 조건과의 연관 속에서, 그 조건을 발전 속에서 파악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민족을 둘러싼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조건, 이것이 그 민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신을 조직해야 하는가, 그 미래의 구조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푸는 유일한 열쇠다. 이때 민족마다 문제의 특수한 해결이 필요할 수 있다.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어디에선가 필요하다면, 바로 여기, 민족문제에서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우 널리 퍼져 있는, 그러나 매우 두루뭉술한 민족문제 '해결' 방식 하나에, 분트에서 시작된 그 방식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오스트리아와 남슬라브 사회민주당[8]이 민족문제를 이미 해결했으니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 해결을 그저 빌려 오면 된다는 손쉬운 인용의 방법 말이다. 이때 전제되는 것은, 이를테면 오스트리아에서 옳은 것은 러시아에서도 옳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 곧 러시아 일반의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과 러시아 안 각 민족 하나하나의 생활의 조건이 시야에서 빠져 있다.
예컨대 이름난 분트주의자 V. 코솝스키의 말을 들어 보라.
"분트 제4차 대회에서 문제(민족문제를 말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원칙적 측면이 토의되었을 때, 대회 성원 한 사람이 제안한 남슬라브 사회민주당 결의의 정신에 따른 문제 해결은 전원의 찬동을 얻었다."[9]
그 결과 "대회는 만장일치로"... 민족 자치를 "채택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러시아 현실의 분석도, 러시아 유대인들의 생활 조건에 대한 해명도 없다. 먼저 남슬라브 사회민주당에게서 해결을 빌려 오고, 다음에 '찬동'하고, 그다음에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이다! 분트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민족문제를 이렇게 제기하고 이렇게 '해결'한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전혀 다른 조건에 놓여 있다. 브륀에서(1899년)[10] 남슬라브 사회민주당 결의의 정신에 따라(사실 몇 가지 사소한 수정을 거쳐) 민족 강령을 채택한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가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말하자면 전혀 러시아식이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물론 러시아식이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문제의 제기부터 보자. 문화적 민족 자치의 오스트리아 이론가들, 브륀 민족 강령과 남슬라브 사회민주당 결의의 해설자들인 슈프링거와 바우어는 문제를 어떻게 제기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슈프링거는 말한다. "민족체들의 국가가 대체 가능한가, 특히 오스트리아의 민족체들이 하나의 정치적 전체를 이루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는 답하지 않은 채 남겨 둔다. 이 문제들은 해결된 것으로 치겠다. 앞서 말한 가능성과 필연성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연구가 물론 근거 없는 것이 될 터이다. 우리의 주제는 이렇다. 주어진 민족들은 공동의 생존을 꾸려 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법적 형태가 그들에게 가장 좋은 삶의 가능성을 줄 것인가?"(강조는 슈프링거)[11]
그러니까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온전함이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바우어도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민족들이 지금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국가 연합 속에 남으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이 연합의 틀 안에서 민족들 서로의 관계와 민족들 전체와 국가의 관계가 어떠할 것인가를 묻는다."
여기서도 오스트리아의 온전함이 첫째 의무다.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가 문제를 이렇게 제기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럴 수 없는 것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처음부터 민족자결의 관점에, 민족은 그에 따라 분리의 권리를 갖는다는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분트주의자 골드블라트조차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제2차 대회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자결의 관점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때 골드블라트는 이렇게 말했다.
"자결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반박할 수 없다. 어떤 민족이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경우 거기에 반대할 수는 없다. 폴란드가 러시아와 '합법적 결혼'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을 막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출발점이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라는 것이다. 그러고도 오스트리아인들에게서 민족 강령을 빌려 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음. 오스트리아인들은 '민족체들의 자유'를 자잘한 개혁으로, 느린 걸음으로 실현할 생각이다. 문화적 민족 자치를 실천적 조치로 제안하면서 그들은 근본적 변화, 민주주의적 해방 운동을 전혀 셈에 넣지 않는다. 그들의 전망 속에는 그런 것이 없다. 반면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체들의 자유' 문제를 있음 직한 근본적 변화와, 민주주의적 해방 운동과 결부시키며, 개혁을 셈에 넣을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에서 민족들의 있음 직한 운명이라는 점에서 사태를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물론," 바우어는 말한다. "민족 자치가 위대한 결단, 대담하고 결정적인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스트리아는 한 걸음 한 걸음 민족 자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느리고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입법과 행정이 만성적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될 무거운 투쟁으로 말이다. 새로운 국법 질서는 위대한 입법 행위의 길이 아니라, 개별 지방과 개별 공동체를 위해 제정되는 수많은 개별 법률들로 만들어질 것이다."
슈프링거도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는 쓴다. "이런 종류의 제도(민족 자치 기관을 말한다. 이오시프 스탈린)는 1년이나 10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프로이센 행정 하나를 재조직하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프로이센이 자기의 기본 행정 기구를 최종적으로 세우는 데 20년이 필요했다. 그러니 오스트리아에 얼마만 한 시간과 얼마만 한 어려움이 필요할지 내가 모른다고는 생각지 말라."
모두 매우 분명한 말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족문제를 '대담하고 결정적인 행동'과 결부시키지 않을 수 있는가? 그들이 부분적 개혁을, '수많은 개별 법률들'을 '민족체들의 자유'를 쟁취할 수단으로 셈에 넣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면, 오스트리아인과 러시아인의 투쟁 방법과 전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오스트리아인들의 일면적이고 어중간한 문화적 민족 자치에 머무를 수 있는가? 둘 중 하나다. 차용론자들은 러시아에서 '결정적이고 대담한 행동'을 셈에 넣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셈에 넣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앞에는 전혀 다른 당면 과제가 놓여 있으며, 그로 인해 요구되는 민족문제 해결의 방법도 다르다. 오스트리아는 의회주의의 조건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 조건에서 의회 없이 오스트리아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의회 생활과 입법은 민족 정당들의 날카로운 충돌 때문에 자주 완전히 멈추어 선다. 오스트리아가 오래전부터 앓고 있는 만성적 정치 위기는 이것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민족문제가 정치 생활의 축을, 존립의 문제를 이룬다. 그러니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들이 무엇보다 먼저 민족 충돌 문제를 어떻게든, 물론 이미 존재하는 의회주의의 토대 위에서 의회적 방법으로 해결하려 애쓰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러시아는 그렇지 않다. 첫째, 러시아에는 "천만다행히도 의회가 없다".[13] 둘째,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러시아 정치 생활의 축은 민족문제가 아니라 농업 문제다. 그러므로 러시아 문제의 운명은, 따라서 민족들의 '해방'의 운명도, 러시아에서는 농업 문제의 해결, 곧 농노제 잔재의 일소, 곧 나라의 민주화와 묶여 있다. 러시아에서 민족문제가 독립적이고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해방이라는 전체적이고 더 중요한 문제의 일부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의회의 불모성은," 슈프링거는 쓴다. "오로지 다음의 사정, 곧 개혁 하나하나가 민족 정당들 내부에 그들의 단합을 무너뜨리는 모순을 낳고, 그래서 당 지도자들이 개혁 냄새가 나는 것이면 무엇이든 조심스레 피한다는 사정에서 비롯한다. 오스트리아의 진보는 대체로, 민족들에게 빼앗을 수 없는 법적 지위가 주어질 때에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민족들이 의회에 상비 전투 부대를 두어야 할 필요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경제적·사회적 과제의 해결로 돌아설 가능성을 줄 것이다."
바우어도 같은 말을 한다.
"민족 간의 평화는 무엇보다 먼저 국가에 필요하다. 국가는 더없이 어리석은 언어 문제 때문에, 민족 경계 어딘가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벌이는 아주 작은 말다툼 때문에, 새 학교 하나하나 때문에 입법이 멈추어 서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민족문제가 전혀 다른 평면에 서 있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러시아에서 진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민족문제가 아니라 농업 문제다. 민족문제는 종속적인 문제다.
그러므로 문제의 제기도 다르고, 투쟁의 전망과 방법도 다르고, 당면 과제도 다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오스트리아에서 본보기를 얻어 오고 강령 차용에 골몰할 수 있는 것은, 공간과 시간 밖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종이 위의 인간들뿐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다시 한번 말한다.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 변증법적 문제 제기를 유일하게 옳은 제기로 삼는 것, 이것이 민족문제 해결의 열쇠다.
IV. 문화적 민족 자치
앞에서 우리는 오스트리아 민족 강령의 형식적 측면에 대해,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에게서 그저 본보기를 얻어 와 그 강령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는 방법론적 근거에 대해 말했다.
이제 강령 그 자체를 본질에서 이야기해 보자. 그렇다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민족 강령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두 단어로 표현된다. 문화적 민족 자치.
이것은 첫째로, 자치가 이를테면 주로 체코인과 폴란드인이 사는 체히나 폴란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토와 상관없이 체코인과 폴란드인 일반에게, 그들이 오스트리아의 어느 고장에 살든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자치는 영토적 자치가 아니라 민족적 자치라 불린다.
이것은 둘째로, 오스트리아의 여러 구석에 흩어져 사는 체코인, 폴란드인, 독일인 등이 개인 단위로, 개별 인격으로서 온전한 민족으로 조직되어, 그런 자격으로 오스트리아 국가의 구성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경우 오스트리아는 자치 지방들의 연합이 아니라, 영토와 무관하게 구성된 자치 민족체들의 연합이 될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이 목적을 위해 폴란드인, 체코인 등을 위해 만들어질 전민족적 기관들이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오직 '문화적' 문제만을 관할하게 된다는 뜻이다. 정치적 문제 자체는 전(全)오스트리아 의회(제국의회)에 집중된다.
그래서 이 자치는 문화적 자치, 문화적 민족 자치라고도 불린다.
다음은 1899년 브륀 대회에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가 채택한 강령의 본문이다.[14]
"오스트리아의 민족 분쟁이 정치적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 "민족문제의 최종적 해결은... 무엇보다 문화적 필요"라는 것, "해결은 보통·직접·평등 선거권의 기초 위에 세워진 참으로 민주주의적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언급한 다음, 강령은 이렇게 이어진다.
"오스트리아 여러 인민의 민족적 특성의 보존과 발전[15]은 완전한 평등권과 온갖 억압의 부재 아래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관료주의적 국가 중앙집권의 체계가, 마찬가지로 개별 영방(領邦)의 봉건적 특권이 거부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 오직 이런 조건에서만 오스트리아에는 민족 분쟁 대신 민족적 질서가 설 수 있을 것이니, 그 토대는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리아는 민족체들의 민주주의적 연합을 대표하는 국가로 개조되어야 한다.
2. 역사적인 왕령지 대신 민족적으로 경계 지어진 자치 단체들이 만들어져야 하며, 그 각각에서 입법과 행정은 보통·직접·평등 투표로 선출되는 민족 의회의 손에 놓여야 한다.
3. 같은 민족의 자치 지방들은 함께 민족적으로 통일된 연합을 이루며, 이 연합은 자기의 민족적 사무를 완전히 자치적으로 결정한다.
4. 민족적 소수자의 권리는 제국 의회가 제정하는 특별법으로 보장된다."
강령은 오스트리아 모든 민족의 연대를 호소하며 끝난다.[16]
이 강령에 '영토주의'의 자취가 얼마간 남아 있음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지만, 전체로 보면 그것은 민족 자치의 정식화다. 문화적 민족 자치의 첫 선동가 슈프링거가 그것을 열광으로 맞이한 것도 까닭 없는 일이 아니다. 바우어도 그것을 민족 자치의 '이론적 승리'라 부르며 그것에 동조한다. 다만 그는 더 큰 명확성을 위해, 학교와 그 밖의 문화적 사무를 관할하도록 "각 자치 지방 안에서 민족적 소수자를 공법상의 단체로 구성"할 필요를 말하는 더 명확한 정식으로 해당 조항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민족 강령은 이러하다.
그 과학적 기초를 살펴보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가 자기가 설교하는 문화적 민족 자치를 어떻게 근거 짓는지 보자.
문화적 민족 자치의 이론가들인 슈프링거와 바우어에게로 가 보자.
민족 자치의 출발점은 민족을 일정한 영토와 무관한 개인들의 연합으로 보는 관념이다.
슈프링거에 따르면 "민족체는 영토와 어떤 본질적 연관도 갖지 않는다. 민족은 자치적인 인적 연합이다".
바우어도 민족을 "어떤 일정한 지역의 배타적 지배가 주어져 있지 않은" '인적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민족을 이루는 개인들이 언제나 한 덩어리로 모여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주 여러 집단으로 갈라져 남의 민족 유기체 속에 박혀 들어간다. 그들을 벌이를 찾아 이런저런 지방과 도시로 내모는 것이 자본주의다. 그런데 남의 민족 지역에 들어가 거기서 소수자가 된 이 집단들은 언어와 학교 등의 압박이라는 점에서 그 지방 민족적 다수자에게 시달린다. 여기서 민족 충돌이 나온다. 여기서 영토적 자치의 '부적합성'이 나온다. 슈프링거와 바우어가 보기에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는, 국가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해당 민족체의 소수자들을 하나의 공통된, 계급을 뛰어넘는 민족 연합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그런 연합만이 민족적 소수자의 문화적 이익을 지킬 수 있고, 그런 연합만이 민족 분쟁을 그치게 할 수 있다.
"민족체들에게," 슈프링거는 말한다. "올바른 조직을 주고 그들에게 권리와 의무의 옷을 입힐 필요가 있다"... 물론 "법률은 만들기 쉽지만, 과연 그것이 기대하는 작용을 하는가"... "민족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먼저 민족들 그 자체를 만들어야 한다"... "민족체들의 구성 없이는 민족적 권리의 창출도 민족 분쟁의 제거도 불가능하다".
바우어도 같은 정신으로 말한다. 그는 "인적 원리의 기초 위에서 소수자들을 공법상의 단체로 구성"하는 것을 '노동자 계급의 요구'로 내세운다.
그러나 민족을 어떻게 조직하는가? 개인이 이 민족에 속하는지 저 민족에 속하는지 어떻게 정하는가?
"그 소속은," 슈프링거는 말한다. "민족 등록부로 확정된다. 지역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신고해야 한다."
"인적 원리는," 바우어는 말한다. "주민이 민족체별로 나뉘는 것을 전제한다... 성년 시민의 자유로운 신고에 기초하여." 그리고 그러기 위해 "민족 대장(臺帳)이 마련되어야 한다".
계속 들어 보자.
"민족적으로 단일한 구역의 모든 독일인," 바우어는 말한다. "그리고 혼성 구역의 민족 대장에 등록된 모든 독일인이 독일 민족을 이루어 민족 평의회를 선출한다."
체코인, 폴란드인 등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민족 평의회는," 슈프링거에 따르면, "문화적 민족 의회로서, 민족의 학교 사업, 민족의 문학·예술·과학을 돌보고 아카데미, 박물관, 미술관, 극장 따위를 세우는 데 필요한 원칙을 정하고 수단을 승인하는 일을 맡는다."
민족의 조직과 그 중앙 기관은 이러하다.
바우어에 따르면, 이런 계급을 뛰어넘는 제도들을 만듦으로써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민족 문화를... 인민 전체의 자산으로 만들고, 그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으로 민족의 모든 성원을 민족적 문화 공동체로 결속"하려 애쓴다(강조는 우리의 것).
이 모든 것이 오스트리아에만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바우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민족 자치가 오스트리아처럼 여러 민족체로 이루어진 다른 국가들에서도 필수적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바우어에 따르면 "유산 계급의 민족 정책, 민족체 국가에서 권력을 쟁취하려는 정책에 맞서 모든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의 민족 자치 요구를 맞세운다".
그러고는 민족자결을 슬그머니 민족 자치로 바꿔치기하면서 이렇게 잇는다.
"이렇게 민족 자치, 곧 민족자결은 민족체 국가에 사는 모든 민족 프롤레타리아트의 헌법 강령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자기와 슈프링거가 '구성'해 낸 계급을 뛰어넘는 '민족 연합'이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일종의 원형이 되리라고 깊이 믿는다. 그는 "사회주의적 사회 질서는... 인류를 민족적으로 경계 지어진 사회들로 나눌" 것임을, 사회주의 아래서 "인류가 자치적 민족 공동체들로 무리 지어질" 것임을, "그리하여 사회주의 사회는 의심할 바 없이 인적 민족 연합과 영토적 단체가 어우러진 얼룩덜룩한 그림이 될" 것임을, 따라서 "사회주의적 민족체 원리는 민족 원리와 민족 자치의 최고의 종합"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만하면 충분할 듯하다...
바우어와 슈프링거의 저작에 나타난 문화적 민족 자치의 근거는 이러하다.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민족자결을 민족 자치로 바꿔치기하는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수법이다. 둘 중 하나다. 바우어가 자결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했으면서 무슨 까닭에선지 의식적으로 그것을 좁히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ㄱ) 문화적 민족 자치는 민족체 국가의 온전함을 전제하지만, 자결은 그런 온전함의 틀 밖으로 나간다. (ㄴ) 자결은 민족에게 권리의 전부를 넘겨주지만, 민족 자치는 '문화적' 권리만을 넘겨준다. 이것이 첫째다.
둘째로, 앞으로 언젠가 이런저런 민족체가 민족체 국가에서, 이를테면 오스트리아에서 떨어져 나가기로 결심하게 될 국내외 정세의 결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루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브륀 당대회에서 자기 인민의 '두 부분'을 하나로 합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17] 그때 '모든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수적'이라는 민족 자치는 어떻게 되는가? 민족들을 국가의 온전함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기계적으로 밀어 넣는 이따위 문제 '해결'이란 대체 무엇인가?
다음. 민족 자치는 민족 발전의 전체 행정에 어긋난다. 그것은 민족들을 조직하라는 구호를 내놓는다. 그러나 생활이, 경제 발전이 민족들에게서 통째로 집단들을 떼어 내어 여러 지방으로 흩어 놓는 판에 그들을 인공적으로 땜질해 붙일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첫 단계들에서 민족들이 결속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더 높은 단계들에서 민족의 흩어짐의 과정, 벌이를 찾아 떠났다가 나중에는 아예 국가의 다른 지방으로 이주해 버리는 집단들이 민족에서 떨어져 나가는 과정이 시작된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때 이주한 사람들은 옛 유대를 잃고 새 터전에서 새 유대를 얻으며, 대를 이어 가며 새로운 풍습과 취향을, 어쩌면 새로운 언어까지 익힌다. 묻거니와, 이렇게 서로 갈라져 나간 집단들을 단일한 민족 연합으로 통합하는 것이 가능한가? 통합할 수 없는 것을 통합해 줄 그 신통한 테는 어디에 있는가? 예컨대 발트 연안의 독일인과 자캅카지예의 독일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결속'하는 일을 생각이나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면, 민족 자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 애쓰던 옛 민족주의자들의 유토피아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민족의 통일은 흩어져 삶으로써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격화로 인해 안으로부터도 무너진다. 자본주의의 첫 단계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문화 공동체'를 아직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공업이 발전하고 계급투쟁이 날카로워지면서 '공동체'는 녹아 없어지기 시작한다. 같은 민족의 주인과 노동자가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된 마당에 그 민족의 '문화 공동체'를 진지하게 말할 수는 없다. 부르주아지는 전쟁을 목말라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판에 무슨 '운명의 공동체'를 말할 수 있는가? 이렇게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로 계급을 뛰어넘는 단일한 민족 연합을 조직할 수 있는가? 그러고도 '민족의 모든 성원을 민족적 문화 공동체로 결속'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민족 자치가 계급투쟁의 전체 행정에 어긋난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민족을 조직하라'는 구호가 실현 가능한 구호라고 잠깐 가정해 보자. 표를 더 얻으려고 민족을 '조직'하려 애쓰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의회주의자들이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언제부터 민족의 '조직'에, 민족의 '구성'에, 민족의 '창조'에 골몰하기 시작했는가?
계급투쟁이 더없이 날카로워진 시대에 계급을 뛰어넘는 민족 연합을 조직하는 이들이 대체 무슨 사회민주주의자인가? 지금까지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에게는, 다른 모든 나라의 사회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제가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보아하니 '낡은' 모양이다. 이제 슈프링거와 바우어는 '새롭고' 더 재미있는 과제를 내놓는다. 민족을 '창조'하고 '조직'하라는 것이다.
하기야 논리는 의무를 지운다. 민족 자치를 받아들인 사람은 이 '새로운' 과제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계급적 입장에서 내려와 민족주의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슈프링거와 바우어의 문화적 민족 자치는 세련된 형태의 민족주의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민족 강령이 여러 인민의 '민족적 특성의 보존과 발전'을 돌보라는 의무를 지우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자캅카지예 타타르인의 '샤흐세이-바흐세이' 명절의 자기 채찍질 같은 '민족적 특성'을 '보존'하다니! 그루지야인의 '복수의 권리' 같은 '민족적 특성'을 '발전'시키다니!..
이런 조항이 있을 자리는 골수 부르주아 민족주의 강령이다. 그것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령에 들어앉게 되었다면, 그것은 민족 자치가 그런 조항들을 용납하기 때문이며, 민족 자치가 그런 조항들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에 부적합한 민족 자치는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에는 더더욱 부적합하다.
'인류가 민족적으로 경계 지어진 사회들로 나뉘리라'는 바우어의 예언은 현대 인류의 발전 행정 전체가 반박한다. 민족의 칸막이는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고 쓰러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0년대에 "여러 인민의 민족적 고립과 이해의 대립은 이미 오늘날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한층 앞당길 것"이라고 말했다.[18] 자본주의적 생산의 거대한 성장, 민족체들의 뒤섞임, 갈수록 넓어지는 영토 위에서의 사람들의 통합을 동반한 인류의 그 뒤의 발전은 마르크스의 생각을 결정적으로 확증해 준다.
사회주의 사회를 '인적 민족 연합과 영토적 단체가 어우러진 얼룩덜룩한 그림'으로 그려 보이려는 바우어의 바람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개념을 바쿠닌의 개량된 개념으로 바꿔치기하려는 소심한 시도다. 사회주의의 역사가 보여 주듯, 그런 시도는 어느 것이나 피할 수 없는 파산의 요소를 품고 있다.
바우어가 추어올리는 그 무슨 '사회주의적 민족체 원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계급투쟁이라는 사회주의적 원리를 부르주아적 '민족체 원리'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민족 자치가 이런 미심쩍은 원리에서 출발한다면, 그것이 노동운동에 해악밖에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이 민족주의는 그리 투명하지 않다. 사회주의적 문구로 교묘하게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더 해롭다. 드러난 민족주의는 언제나 처리할 수 있다. 그것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가면을 쓰고 그 가면 속에서 알아볼 수 없게 된 민족주의와 싸우기는 훨씬 어렵다. 사회주의의 갑옷으로 몸을 가린 그것은 상처 입힐 구석이 적고 생명력이 질기다. 그리고 노동자들 속에 살면서 그것은 갖가지 민족체 노동자들이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 담을 쌓게 만드는 해로운 사상을 퍼뜨려 공기를 오염시킨다.
그러나 민족 자치의 해악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민족들의 고립화만이 아니라 통일된 노동운동의 산산조각을 위한 토양도 마련해 준다. 민족 자치의 이념은 통일된 노동자 정당을 민족체별로 세워진 개별 정당들로 나누는 심리적 전제를 만들어 낸다. 당을 따라 조합도 쪼개지고, 완전한 고립화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통일된 계급 운동이 개별 민족의 실개천들로 부서진다.
'민족 자치'의 고향 오스트리아는 이 현상의 가장 슬픈 본보기들을 보여 준다. 한때 통일되어 있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이미 1897년부터(빔베르크 당대회[19]) 개별 정당들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민족 자치를 채택한 브륀 당대회(1899년) 뒤에 분열은 한층 심해졌다. 마침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단일한 국제주의적 정당 대신 지금은 여섯 개의 민족 정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체코 사회민주당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당과 묶여 있는 것이 직업 조합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당에서나 조합에서나 주된 일을 짊어지는 것이 같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당의 분리주의가 조합의 분리주의로 이어져 조합도 갈라지지 않을까 우려할 만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조합도 민족체별로 갈라진 것이다. 지금은 심지어 체코인 노동자들이 독일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깨뜨리거나, 시 의회 선거에서 체코인 부르주아와 한편이 되어 독일인 노동자들에 맞서는 지경에까지 자주 이른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문화적 민족 자치는 민족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뿐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운동의 통일을 무너뜨리고 노동자들을 민족체별로 갈라놓고 그들 사이의 알력을 키우기 좋은 토양을 만들어, 민족문제를 더 날카롭게 하고 더 헝클어 놓는다.
민족 자치의 수확은 이러하다.
V. 분트, 그 민족주의, 그 분리주의
앞에서 우리는, 체코인과 폴란드인 등에게는 민족 자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바우어가 그럼에도 유대인을 위한 그런 자치에는 반대 목소리를 낸다고 말했다. "노동자 계급은 유대 인민을 위한 자치를 요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바우어는 "민족 자치는 유대인 노동자의 요구가 될 수 없다"고 답한다. 바우어에 따르면 그 까닭은 "자본주의 사회가 그들(유대인. 이오시프 스탈린)이 민족으로 유지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요컨대 유대 민족은 존재하기를 그쳐 가고 있으며, 따라서 누구를 위해 민족 자치를 요구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동화되어 가고 있다.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운명에 대한 이 견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이미 1840년대에,[20][21] 주로 독일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표명했다. 카우츠키가 1903년에,[22] 러시아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되풀이했다. 이제 바우어가 오스트리아 유대인에 대해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다만 그가 부정하는 것이 유대 민족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차이는 있다.
유대인이 민족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바우어는 "유대인에게는 폐쇄된 정주 지역이 없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 설명은 기본에서 옳지만 진실의 전부를 말해 주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유대인에게는 땅과 결부된, 민족을 자연스럽게 다져 주는 넓고 안정된 층이 없다. 민족의 뼈대로서만이 아니라 '민족적' 시장으로서도 그러하다. 러시아 유대인 500~600만 명 가운데 어떤 식으로든 농업과 결부된 것은 3~4퍼센트뿐이다. 나머지 96퍼센트는 상업과 공업, 도시의 기관들에 종사하며 대체로 도시에 살고, 게다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어 어느 구베르니야에서도 다수를 이루지 못한다.
이렇게 유대인은 민족적 소수자로서 다른 민족의 지역들에 박혀 들어가, 공업가와 상인으로서도 자유직업인으로서도 주로 '남의' 민족에 봉사하며, 언어를 비롯한 여러 면에서 자연히 '남의 민족'에 맞추어 간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된 형태에 고유한, 갈수록 심해지는 민족체들의 뒤섞임과 맞물려 유대인의 동화로 이어진다. '정주 허용선'의 폐지는 동화를 앞당길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러시아 유대인을 위한 민족 자치의 문제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꼴을 띠게 된다. 미래가 부정되는 민족, 존재부터 증명해야 할 민족을 위해 자치를 제안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분트는 이 우스꽝스럽고 흔들리는 입장에 올라섰다. 제6차 대회(1905년)에서 민족 자치의 정신에 따른 '민족 강령'을 채택한 것이다.
두 가지 사정이 분트를 그런 걸음으로 밀어붙였다.
첫째 사정은 유대인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만의 조직으로서의 분트의 존재다. 1897년 이전부터 유대인 노동자들 속에서 일하던 사회민주주의 그룹들은 '특별히 유대인만의 노동자 조직'[23]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897년에 그들은 분트로 통합하여 그런 조직을 만들었다. 그때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전체로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던 때였다. 그 뒤 분트는 끊임없이 자라고 넓어지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잿빛 나날을 배경으로 갈수록 도드라졌다... 그런데 1900년대가 온다. 대중적 노동운동이 시작된다. 폴란드 사회민주주의가 자라나 유대인 노동자들을 대중 투쟁에 끌어들인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자라나 '분트의' 노동자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영토적 기반이 없는 분트의 민족적 울타리가 비좁아진다. 분트 앞에 문제가 선다. 전체 국제주의의 물결에 녹아들 것인가, 아니면 영토 밖 조직으로서 자기의 독자적 존재를 지켜낼 것인가. 분트는 후자를 택한다.
이렇게 '유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대표자'라는 분트의 '이론'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이상한 '이론'을 어떻게든 '간단히' 정당화하기는 불가능해진다. 무언가 '원칙적' 안감, '원칙적' 정당화가 필요해진다. 그 안감으로 나타난 것이 문화적 민족 자치였다. 분트는 그것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에게서 빌려 와 부여잡았다. 오스트리아인들에게 그런 강령이 없었다면 분트는 자기의 독자적 존재를 '원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지어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01년(제4차 대회)의 머뭇거리는 시도를 거쳐 분트는 1905년(제6차 대회)에 '민족 강령'을 최종적으로 채택한다.
둘째 사정은 온전한 지역들의 조밀한 타민족 다수자 속에 박힌 개별 민족적 소수자로서의 유대인의 특수한 처지다. 그런 처지가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존재를 파내며 그들을 동화의 길에 세운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 과정이다. 주관적으로, 유대인들의 머릿속에서 그것은 반작용을 불러일으키며 민족적 소수자의 권리 보장 문제, 동화로부터의 보장 문제를 제기한다. 유대 '민족체'의 생명력을 설교하는 분트로서는 '보장'의 관점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 선 이상 민족 자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분트가 어떤 자치든 부여잡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민족적 자치, 곧 문화적 민족 자치뿐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일정한 온전한 영토가 없는 이상 유대인의 영토적·정치적 자치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특징적인 것은, 분트가 처음부터 민족 자치의 성격을 민족적 소수자의 권리 보장, 민족의 '자유로운 발전'의 보장으로 강조했다는 점이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제2차 대회에서 분트의 대표 골드블라트가 민족 자치를 "그들(민족들.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문화 발전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기관들"[24]로 정식화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분트의 이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같은 제안을 들고 제4대 두마의 사회민주주의 의원단에 들어갔다...
이렇게 분트는 유대인의 민족 자치라는 우스꽝스러운 입장에 올라섰다.
앞에서 우리는 민족 자치 일반을 따져 보았다. 따져 본 결과 민족 자치는 민족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래에서 우리는 분트가 같은 종착점에 이르렀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분트는 민족 자치를 또 하나의 특수한 측면, 곧 민족적 소수자의 권리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 이 특수한 측면에서도 문제를 따져 보자. 민족적 소수자 문제는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민주주의에게 심각한 의의를 갖는 만큼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민족들에게 "문화 발전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기관들"이라는 것이다(강조는 우리의 것. 이오시프 스탈린).
그런데 이 '보장하는 기관들' 따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슈프링거-바우어의 '민족 평의회', 일종의 문화 사무 의회다.
그러나 이 기관들이 민족에게 '문화 발전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가? 그 어떤 문화 사무 의회가 민족을 민족주의적 탄압으로부터 보장할 수 있는가?
분트는 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역사는 반대를 말한다.
러시아령 폴란드에는 한때 의회가, 그것도 정치적 의회가 존재했고, 그것은 물론 폴란드인의 '문화 발전'의 자유를 보장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일에 성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신이 러시아의 전반적인 정치적 조건과의 힘겨운 싸움 속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핀란드에는 오래전부터 의회가 존재하며, 그것 역시 핀란드 민족체를 '침해'로부터 지키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 방향에서 그것이 해내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두가 보고 있다.
물론 의회라고 다 같은 의회는 아니어서, 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된 핀란드 의회를 해치우기는 귀족적인 폴란드 의회만큼 쉽지 않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의회 그 자체가 아니라 러시아의 전반적인 질서다. 지금 러시아에 옛날 폴란드 의회가 폐지되던 시절 같은 조야한 아시아적 사회·정치 질서가 있다면 핀란드 의회의 처지는 훨씬 나빴을 것이다. 게다가 핀란드에 대한 '침해' 정책은 자라나고 있으며, 그것이 패배를 겪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오래된 기관들, 정치적 의회들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젊은 의회들, 젊은 기관들, 더구나 '문화' 의회처럼 약한 기관들이 민족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분명 '기관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전반적 질서에 있다. 나라에 민주화가 없으면 민족체들의 '문화 발전의 완전한 자유'의 보장도 없다. 나라가 민주적일수록 '민족체들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적고 '침해'로부터의 보장이 크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러시아는 반(半)아시아적 나라이며, 그래서 그곳의 '침해' 정책은 자주 가장 조야한 형태, 포그롬의 형태를 띤다. 러시아에서 '보장'이 극도의 최소한으로 줄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독일은 크든 작든 정치적 자유가 있는, 이미 유럽이다. 그곳의 '침해' 정책이 포그롬의 형태를 띠는 일이 없는 것도 놀랍지 않다.
프랑스에는 물론 '보장'이 더 많다. 프랑스가 독일보다 민주적이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곳에서는 높은, 비록 부르주아적일지언정 높은 민주주의 덕분에 민족체들이 소수자든 다수자든 자유롭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기관들' 그 자체가 민족체들의 완전한 문화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트는 그릇된 길에 서 있다.
분트 자신도 러시아의 민주화를 '기관 창설'과 자유 보장의 선결 조건으로 여기고 있다고 지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분트 제8차 협의회 보고」[25]를 보면, 분트는 지금의 러시아 질서의 기초 위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개혁'을 통해 '기관들'을 얻어 낼 생각임을 알 수 있다.
"공동체는," 이 협의회에서 분트 지도자의 한 사람은 말했다. "미래의 문화적 민족 자치의 핵이 될 수 있다. 문화적 민족 자치는 민족이 스스로를 돌보는 형태, 민족적 필요를 채우는 형태다. 공동체의 형태 아래 숨어 있는 것은 같은 내용이다. 이것들은 같은 사슬의 고리들이며 같은 진화의 단계들이다."[26]
여기서 출발하여 협의회는 "유대인 공동체의 개혁과 그것의 입법적 경로를 통한 세속 기관으로의 전환"을 위해, 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된 세속 기관으로의 전환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결정했다(강조는 우리의 것. 이오시프 스탈린).
분트가 조건이자 보장으로 여기는 것이 러시아의 민주화가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의 개혁'을 통해 말하자면 '입법' 절차로, 두마를 거쳐 얻어질 유대인의 미래 '세속 기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 전체의 민주주의적 질서 없이는 '기관들' 그 자체가 '보장'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러면 미래의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는 어떠할까? 민주주의 아래서도 '보장하는' 특별한 '문화 기관들' 따위가 필요할까? 예컨대 민주주의적인 스위스에서는 이 점에서 사정이 어떠한가? 그곳에 슈프링거식 '민족 평의회' 같은 특별한 문화 기관들이 있는가? 없다. 그런데 그 때문에 예컨대 그곳에서 소수자를 이루는 이탈리아인의 문화적 이익이 침해받고 있는가? 그런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다. 스위스의 민주주의가 '보장한다'는 따위의 온갖 특별 문화 '기관들'을 쓸모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에는 무력하고 미래에는 남아도는 것, 문화적 민족 자치의 기관들이란 그런 것이며, 민족 자치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와 미래가 의심스러운 '민족'에게 강요될 때 한층 해로워진다. 그런 경우 민족 자치의 지지자들은 '민족을 동화에서 구하기' 위해, 민족을 '지키기' 위해, '민족'의 온갖 특성을, 유익한 것만이 아니라 해로운 것까지 보호하고 보존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분트는 이 위험한 길에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들어섰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안식일'과 '이디시어' 등에 대한 분트의 최근 협의회들의 알려진 결정들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모든 민족을 위한 모국어의 권리를 쟁취하려 한다. 그러나 분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대 언어의 권리"(강조는 우리의 것. 이오시프 스탈린)를 "특별한 끈질김으로" 옹호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분트 자신이 제4대 두마 선거에서 "그들(곧 선거인들) 가운데 유대 언어의 권리를 옹호하겠다고 약속하는 쪽"에 "우선권"을 주었다.
모든 민족의 모국어에 대한 일반적 권리가 아니라 유대 언어, 이디시어의 개별적 권리라니! 개별 민족체의 노동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언어를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 유대인은 유대어를 위해, 그루지야인은 그루지야어를 위해, 등등. 모든 민족의 일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은 부차적인 일이다. 당신들은 억압받는 모든 민족체의 모국어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이디시어의 권리만 인정한다면 알아 두라. 분트는 당신들에게 투표할 것이다. 분트는 당신들을 '우선'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분트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사회민주주의는 일주일에 하루의 의무 휴일 제정을 쟁취하려 한다. 그러나 분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안식일을 지킬 권리를 '입법 절차로' 보장하되 다른 날을 지킬 강제는 없앨 것"을 요구한다.
분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의 옛 명절 전부를 지킬 권리를 요구하게 되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분트에게는 불행하게도 유대인 노동자들이 편견에서 벗어나 명절을 지키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분트는 '안식일의 권리'를 위한 선동으로 그들에게 안식일을 일깨우며 그들 속에 말하자면 '안식일 정신'을 가꾸어 갈 것이다...
그러니 분트 제8차 협의회에서 연사들이 '유대인 병원' 요구를 놓고 쏟아 낸 '불타는 연설들'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때 이 요구의 근거는 "환자는 제 사람들 속에 있어야 더 낫다"는 것, "유대인 노동자는 폴란드인 노동자들 속에서는 불편하고 유대인 가게 주인들 속에서는 편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대적인 것이면 무엇이든 지키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명백히 해로운 것까지 유대인의 온갖 민족적 특성을 보존하고, 유대인을 유대적이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갈라놓고, 심지어 따로 병원까지 차리다니. 분트는 여기까지 내려앉았다!
플레하노프 동지가 분트는 "사회주의를 민족주의에 뜯어맞추고 있다"고 말한 것은 천 번 옳았다. 물론 블라디미르 코솝스키를 비롯한 그와 비슷한 분트주의자들은 플레하노프를 '선동꾼'이라고 욕할 수 있다.[27][28] 종이는 무엇이든 참아 주니까. 그러나 분트의 활동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용감한 사람들이 '선동'이라는 험한 말 뒤에 숨어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민족문제에서 이런 입장에 머무는 이상, 분트는 조직 문제에서도 자연히 유대인 노동자를 갈라놓는 길, 사회민주주의 안에 민족별 쿠리아를 만드는 길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 자치의 논리란 그런 것이다!
실제로 분트는 '유일 대표'의 이론에서 노동자의 '민족적 경계 짓기' 이론으로 넘어간다. 분트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게 "자기 조직 구조 안에 민족체별 경계 짓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 '경계 짓기'에서 분트는 다시 '한 걸음 나아가' '고립화'의 이론으로 간다. 분트 제8차 협의회에서 "고립화 속에 민족적 존재가 있다"는 연설이 울려 퍼진 것도 까닭 없는 일이 아니다.
조직적 연방주의는 해체와 분리주의의 요소를 품고 있다. 분트는 분리주의로 가고 있다.
하기야 분트로서는 달리 갈 곳도 없다. 영토 밖 조직이라는 그 존재 자체가 분트를 분리주의의 길로 내몬다. 분트에게는 일정한 온전한 영토가 없고 그는 '남의' 영토에서 활동한다. 반면 그와 맞닿아 있는 폴란드, 라트비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국제주의적·영토적 집단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 집단들이 넓어질 때마다 그것이 분트에게는 '손실'을, 활동 마당의 축소를 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둘 중 하나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전체가 민족적 연방주의의 원칙 위에서 재편되어 분트가 유대 프롤레타리아트를 '확보'할 가능성을 얻거나, 아니면 이 집단들의 영토적·국제주의적 원칙이 힘을 유지하여 분트가 폴란드와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에서처럼 국제주의의 원칙 위에서 재편되거나.
분트가 처음부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연방적 원칙 위에서의 개조"[29]를 요구한 것은 이것으로 설명된다.
1906년에 분트는 밑바닥의 통합 물결에 밀려 중간 길을 택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들어갔는가? 폴란드와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가 평화로운 공동 작업을 위해 들어간 반면, 분트는 연방을 위한 전쟁을 목적으로 들어갔다. 분트주의자들의 지도자 메뎀은 그때 바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목가(牧歌)를 위해서가 아니라 투쟁을 위해서 간다. 목가는 없으며, 가까운 미래에 그것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마닐로프 같은 자들뿐이다. 분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장하고 당에 들어가야 한다."[30]
여기서 메뎀의 악의를 보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문제는 악의가 아니라 분트의 특수한 입장에 있다. 그 입장 때문에 분트는 국제주의의 원칙 위에 세워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싸우면서 분트는 자연히 통일의 이익을 해쳤다. 마침내 일은, 분트가 규약을 어기고 제4대 두마 선거에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한편이 되어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섬으로써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와 형식적으로 갈라서는 데까지 이른다.
분트는 분명 결별이야말로 자기의 독자 활동을 가장 잘 보장해 준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조직적 '경계 짓기'의 '원칙'은 분리주의로, 완전한 결별로 이어졌다.
옛 『이스크라』[31]와 연방주의를 놓고 논쟁하면서 분트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이스크라』는 분트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연방적 관계가 둘 사이의 유대를 약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우리는 러시아의 실천을 들어 이 견해를 반박할 수 없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연방적 결합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우리는 1897년 당대회의 결정에 따라 연방적 성격을 받아들인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더없이 교훈적인 경험을 들 수 있다."
이것은 1902년에 쓰인 글이다.
그러나 지금은 1913년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러시아의 '실천'도 있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경험'도 있다.
그것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더없이 교훈적인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경험'부터 시작하자. 1896년까지 오스트리아에는 단일한 사회민주당이 존재한다. 그해에 체코인들이 런던 국제 대회에서 처음으로 별도 대표권을 요구하여 그것을 얻는다. 1897년 빈 당대회(빔베르크 대회)에서 단일당은 형식적으로 청산되고 그 대신 여섯 민족 '사회민주주의 그룹'의 연방적 연합이 세워진다. 그 뒤 이 '그룹들'은 독자적인 정당들로 바뀐다. 정당들은 조금씩 서로의 유대를 끊는다. 정당을 따라 의회 의원단이 갈라진다. 민족별 '클럽'이 만들어진다. 다음은 조합 차례로, 조합도 민족체별로 쪼개진다. 일은 협동조합에까지 이르러, 체코인 분리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협동조합마저 쪼개자고 호소한다.[32] 분리주의 선동이 노동자들의 연대 감정을 약하게 만들어 그들을 자주 파업 파괴의 길로 밀어붙인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더없이 교훈적인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경험'은 분트에 반대하고 옛 『이스크라』의 손을 들어 준다. 오스트리아 당의 연방주의는 가장 꼴사나운 분리주의로, 노동운동의 통일의 파괴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실천'도 같은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분트의 분리주의자들은 체코의 분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와 갈라섰다. 조합, 곧 분트의 조합으로 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민족체의 원칙 위에서 조직되었다. 곧 다른 민족체의 노동자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었다.
완전한 고립화, 완전한 결별. 연방주의의 '러시아 실천'이 보여 주는 것은 이것이다.
이런 사태가 노동자들의 연대 감정의 약화와 사기 저하로 이어지고, 그 사기 저하가 분트 안에까지 스며드는 것도 놀랍지 않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실업을 둘러싸고 갈수록 잦아지는 유대인 노동자와 폴란드인 노동자의 충돌이다. 분트 제9차 협의회에서는 이 일을 놓고 이런 연설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우리를 밀어내는 폴란드인 노동자들을 포그롬꾼으로, 노랑이(어용)로 보며, 그들의 파업을 지지하지 않고 그것을 깨뜨린다. 둘째로, 밀어내기에는 밀어내기로 답한다. 유대인 노동자를 공장에 들이지 않는 데 대한 답으로 우리는 폴란드인 노동자를 수동 직기에 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 일을 우리 손에 잡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다른 자들을 따라갈 것이다."(강조는 우리의 것. 이오시프 스탈린)
분트의 협의회에서는 연대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경계 짓기'와 '고립화'에서 더 갈 곳이 없다. 분트는 목적을 이루었다. 그는 서로 다른 민족체의 노동자들을 주먹다짐에 이르도록, 파업 파괴에 이르도록 갈라놓고 있다. 달리 도리도 없다. "우리가 이 일을 우리 손에 잡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다른 자들을 따라갈 것"이니 말이다...
노동운동의 해체, 사회민주주의 대열의 사기 저하. 분트의 연방주의가 이끌고 가는 곳은 여기다.
이렇게 문화적 민족 자치의 이념은,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공기는, 오스트리아에서보다 러시아에서 한층 더 해로운 것으로 드러났다.
VI. 캅카스인들, 청산파의 협의회
앞에서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유행병'을 이겨 내지 못한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자 일부의 동요에 대해 말했다. 이 동요는, 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상하게도 분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문화적 민족 자치를 선포한 데서 나타났다.
캅카스 전체를 위한 지역 자치와 캅카스를 이루는 민족들을 위한 문화적 민족 자치. 이 사회민주주의자들, 덧붙이자면 러시아의 청산파에 가담해 있는 이들은 자기 요구를 이렇게 정식화한다.
그들의 공인된 지도자, 그 유명한 N의 말을 들어 보자.
"캅카스가 인구의 인종 구성에서나 영토와 농업 문화에서나 중앙의 구베르니야들과 깊이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이런 지방의 개발과 물질적 발전에는 그 고장의 일꾼들, 그 고장의 특성을 잘 알고 그 고장의 기후와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 고장 영토의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법률은 현지에서 제정되고 현지의 힘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캅카스 자치 중앙 기관의 권한에는 지방 문제에 대한 입법이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캅카스 중앙의 기능은 그 고장 영토의 경제적 개발과 지방의 물질적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의 제정에 있다."[33]
그러니까 캅카스의 지역 자치라는 것이다.
조금 어수선하고 앞뒤가 안 맞는 N의 논거를 접어 둔다면, 그의 결론은 옳다고 인정해야 한다. N 자신도 부정하지 않듯 국가 전체 헌법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캅카스의 지역 자치는, 캅카스의 인구 구성과 생활 조건의 특성으로 보아 실제로 필요하다. 이것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도 인정한 바로, 제2차 대회에서 "생활 조건과 인구 구성에서 본래의 러시아 지방들과 구별되는 변경 지역들을 위한 지역 자치제"를 선포했다.
이 조항을 제2차 대회의 토의에 부치면서 마르토프는 "러시아의 광대한 공간과 우리의 중앙집권적 행정의 경험은, 핀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 캅카스 같은 큰 단위들을 위한 지역 자치제의 존재를 필요하고 합목적적인 것으로 여길 근거를 준다"는 것을 논거로 들었다.
여기서 지역 자치제란 지역 자치로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N은 더 나아간다. 그가 보기에 캅카스의 지역 자치는 "문제의 한 측면만"을 붙잡을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방 생활의 물질적 발전만을 말했다. 그러나 지방의 경제 발전을 돕는 것은 경제 활동만이 아니라 정신적·문화적 활동이기도 하다"... "문화적으로 강한 민족은 경제 영역에서도 강하다"... "그런데 민족들의 문화 발전은 민족어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모국어와 결부된 모든 문제는 문화적 민족 문제다. 교육, 재판, 교회, 문학, 예술, 과학, 극장 등의 문제가 그러하다. 지방의 물질적 발전 사업이 민족들을 묶어 준다면, 민족 문화 사업은 민족들 각각을 저마다의 마당에 세우며 그들을 갈라놓는다. 첫째 종류의 활동은 일정한 영토와 결부되어 있다"... "문화적 민족 사업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일정한 영토가 아니라 일정한 민족의 존재와 결부되어 있다. 그루지야어의 운명은 그루지야인이 어디에 살든 똑같이 그의 관심사다. 그루지야 문화가 그루지야에 사는 그루지야인에게만 관계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큰 무지일 것이다. 예컨대 아르메니아 교회를 보라. 그 사무의 운영에는 여러 곳, 여러 국가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참여한다. 여기서 영토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또 예컨대 그루지야 박물관의 건립은 티플리스의 그루지야인만이 아니라 바쿠, 쿠타이시, 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각지의 그루지야인의 관심사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적 민족 사업의 관할과 지도는 이해 당사자인 민족들 자신에게 맡겨져야 한다. 우리는 캅카스 민족체들의 문화적 민족 자치를 선포한다."[34]
요컨대 문화는 영토가 아니고 영토는 문화가 아니니 문화적 민족 자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적 민족 자치를 위해 N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다.
여기서 문화적 민족 자치 일반을 다시 다루지는 않겠다. 그 부정적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말했다. 다만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일반적으로 부적합한 문화적 민족 자치가 캅카스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는 무의미하고 터무니없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이렇다.
문화적 민족 자치는 발전된 문화와 문학을 지닌, 크든 작든 발전한 민족체들을 전제한다. 이 조건이 없으면 이 자치는 온갖 의미를 잃고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바뀐다. 그런데 캅카스에는 원시적인 문화와 독자적 언어를 지녔으되 모국어 문학이 없는 갖가지 민족체가, 게다가 과도기에 있어 일부는 동화되어 가고 일부는 더 발전해 가는 민족체가 수두룩하다. 그들에게 문화적 민족 자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그런 민족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문화적 민족 자치가 의심할 바 없이 전제하는 대로, 그들을 어떻게 개별 문화적 민족 연합들로 '조직'할 것인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자기 문학이 없는 밍그렐인, 압하지야인, 아자리아인, 스반인, 레즈긴인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어느 민족에 넣을 것인가? 그들을 민족 연합들로 '조직'하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문화 사업' 둘레에 그들을 '조직'할 것인가?
자캅카지예의 오세트인은 그루지야인에게 동화되어 가고 있고(그러나 아직 동화가 끝나려면 멀었다), 캅카스 이북의 오세트인은 일부는 러시아인에게 동화되어 가고 일부는 더 발전하여 자기 문학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이 오세트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어떻게 단일한 민족 연합으로 '조직'할 것인가?
그루지야어로 말하지만 튀르크 문화 속에 살며 이슬람을 믿는 아자리아인은 어느 민족 연합에 넣을 것인가? 종교 사업의 마당에서는 그루지야인과 따로, 그 밖의 문화 사업의 마당에서는 그루지야인과 함께 '조직'하자는 것인가? 그러면 코불레티인은? 인구시인은? 인길로인은?
수두룩한 민족체들을 명단에서 빼놓는 이따위 자치란 대체 무엇인가?
아니다. 이것은 민족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한가한 공상의 열매다.
그러나 허용될 수 없는 것을 허용하여, 우리 N의 문화적 민족 자치가 실현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무엇으로 이어지고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예컨대 자캅카지예의 타타르인을 보자. 최소한의 식자율, 전능한 물라들이 우두머리로 앉아 있는 학교들, 종교적 정신이 배어든 문화... 그들을 문화적 민족 연합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그들의 우두머리에 물라들을 앉힌다는 것이며, 그들을 반동적 물라들의 밥으로 내준다는 것이며, 타타르 대중을 그들의 가장 악랄한 적에게 정신적으로 예속시킬 새로운 보루를 만들어 준다는 것임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언제부터 반동배의 물레방아에 물을 대주기 시작했는가?
자캅카지예의 타타르인을 문화적 민족 연합으로 울타리 쳐서 대중을 가장 악랄한 반동배들에게 예속시키다니. 캅카스의 청산파는 정말 이것보다 나은 것을 '선포'할 수 없었단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민족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캅카스의 민족문제는 오직 뒤처진 민족들과 민족체들을 더 높은 문화의 공동의 물줄기에 끌어들이는 정신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오직 그런 해결만이 진보적일 수 있고 사회민주주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캅카스의 지역 자치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도, 그것이 뒤처진 민족들을 공동의 문화 발전에 끌어들이고, 그들이 작은 민족적 폐쇄성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도록 도우며, 그들을 앞으로 밀어 주고 더 높은 문화의 혜택에 다가가기 쉽게 해 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화적 민족 자치는 정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민족들을 낡은 껍데기 속에 가두고, 그들을 문화 발전의 낮은 단계에 못 박아 두며, 그들이 문화의 높은 단계로 올라서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민족 자치는 지역 자치의 긍정적 측면들을 마비시키고 그것을 영(零)으로 만들어 버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N이 제안하는, 문화적 민족 자치와 지역 자치를 결합한 그 혼합형 자치도 부적합하다. 이 부자연스러운 결합은 일을 낫게 만들기는커녕 나쁘게 만든다. 그것은 뒤처진 민족들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에 더해, 지역 자치를 민족 연합들로 조직된 민족들의 충돌 마당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부적합한 문화적 민족 자치는 캅카스에서라면 무의미한 반동적 놀음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N과 그의 캅카스 동조자들의 문화적 민족 자치는 이러하다.
캅카스의 청산파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직 문제에서도 분트를 따라갈지는 미래가 보여 줄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조직에서의 연방주의는 언제나 강령에서의 민족 자치에 앞서 왔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897년부터 조직적 연방주의를 실시했고, 두 해가 지나서야(1899년) 민족 자치를 채택했다. 분트주의자들이 민족 자치를 처음으로 또렷하게 입에 올린 것은 1901년이지만, 조직적 연방주의는 1897년부터 실천하고 있었다.
캅카스의 청산파는 일을 끝에서부터, 민족 자치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들이 계속 분트의 발자국을 따라간다면, 그들은 먼저 1890년대 말에 국제주의의 원칙 위에 세워진 지금의 조직 건물 전체를 부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아직 이해하지도 못하는 민족 자치를 채택하기가 쉬웠던 만큼, 캅카스의 모든 민족체 노동자들이 가꾸고 키워 오며 여러 해에 걸쳐 세운 건물을 부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헤로스트라토스적 놀음에 손을 대는 순간, 노동자들은 눈을 뜨고 문화적 민족 자치의 민족주의적 본질을 깨닫게 될 것이다.
✦ ✦ ✦
캅카스인들이 민족문제를 보통의 방식으로, 곧 말로 하는 논쟁과 문헌상의 토론으로 해결하고 있다면, 전러시아 청산파 협의회는 전혀 색다른 방식을 생각해 냈다. 쉽고 간단한 방식이다. 들어 보라.
"문화적 민족 자치의 요구를 내걸 필요가 있다는 캅카스 대표단의 보고를 듣고, 협의회는 이 요구의 본질에 대해서는 의견을 밝히지 않으면서, 각 민족체의 자결권을 인정하는 강령 조항에 대한 그런 해석이 강령의 정확한 뜻과 어긋나지 않음을 확인한다."
그러니까 먼저 이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는 의견을 밝히지 않고', 그다음에 '확인'한다는 것이다. 독창적인 방법이다...
그러면 이 독창적인 협의회는 무엇을 '확인'하는가?
문화적 민족 자치의 '요구'가 민족자결권을 인정하는 강령의 '정확한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따져 보자.
자결 조항은 민족의 권리를 말한다. 이 조항에 따라 민족은 자치만이 아니라 분리의 권리도 갖는다. 이것은 정치적 자결의 이야기다. 국제 사회민주주의 전체에 오래전부터 확립된 이 민족의 정치적 자결권을 이리저리 비틀어 해석하려 하면서, 청산파는 누구를 속이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혹시 청산파는 이런 궤변으로 자신을 지키며 빠져나가려 들지도 모른다. 문화적 민족 자치는 민족의 권리와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곧, 어느 국가의 모든 민족이 문화적 민족 자치의 원칙 위에서 자신을 조직하기로 합의한다면 그들, 그 민족들의 합은 그렇게 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며, 누구도 그들에게 다른 형태의 정치 생활을 폭력으로 강요할 수 없다고. 새롭기도 하고 영리하기도 하다. 이왕이면 이렇게 덧붙이는 게 어떤가. 일반적으로 말해 민족은 자기 헌법을 폐지하고 그것을 전횡의 체계로 바꾸고 낡은 질서로 되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민족은, 오직 민족 자신만은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뜻에서라면 문화적 민족 자치든 그 어떤 민족적 반동이든 민족의 권리와 '어긋나지 않는다'.
존경하는 협의회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것인가?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협의회는 문화적 민족 자치가 민족의 권리가 아니라 강령의 '정확한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똑똑히 말한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것은 강령이지 민족의 권리가 아니다.
그럴 만도 하다. 청산파 협의회에 어떤 민족이 문의해 왔다면 협의회는 그 민족이 문화적 민족 자치의 권리를 갖는다고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협의회에 문의해 온 것은 민족이 아니라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표단', 나쁜 사회민주주의자들일지언정 그래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물은 것은 민족의 권리가 아니라, 문화적 민족 자치가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에 모순되지 않는가, 그것이 사회민주주의 강령의 '정확한 뜻'과 '어긋나지' 않는가였다.
그러므로 민족의 권리와 사회민주주의 강령의 '정확한 뜻'은 같은 것이 아니다.
분명, 민족의 권리와는 어긋나지 않으면서 강령의 '정확한 뜻'과는 어긋날 수 있는 요구들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령에는 신앙의 자유 조항이 있다. 이 조항에 따라 어떤 집단이든 어떤 종교든, 가톨릭이든 정교든 믿을 권리가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온갖 종교적 탄압에 맞서, 정교도와 가톨릭교도와 프로테스탄트교도에 대한 박해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티즘 따위가 강령의 '정확한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박해에 언제나 항의할 것이며 민족들이 어떤 종교든 믿을 권리를 언제나 지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민주주의는 올바르게 이해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에서 출발하여,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승리를 안겨 주기 위해 가톨릭에도 프로테스탄티즘에도 정교에도 맞서 선동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그렇게 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릭과 정교 따위가 의심할 바 없이 강령의 '정확한 뜻'과, 곧 올바르게 이해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자결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민족들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자신을 조직할 권리가 있고, 해로운 것이든 유익한 것이든 자기의 어떤 민족적 제도든 보존할 권리가 있으며, 누구도 민족의 생활에 폭력으로 개입할 수 없다(그럴 권리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민주주의가 민족들의 해로운 제도에 맞서, 민족들의 합목적적이지 못한 요구에 맞서 싸우지 않고 선동하지 않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는 그런 선동을 벌여, 민족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에 가장 잘 맞는 형태로 자신을 조직하도록 민족들의 의지에 영향을 미칠 의무가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민족자결권을 위해 싸우면서도, 동시에 이를테면 타타르인의 분리에 맞서서도, 캅카스 민족들의 문화적 민족 자치에 맞서서도 선동할 것이다. 둘 다 이 민족들의 권리와는 어긋나지 않지만 강령의 '정확한 뜻'과는, 곧 캅카스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과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분명 '민족의 권리'와 강령의 '정확한 뜻'은 전혀 다른 두 평면이다. 강령의 '정확한 뜻'이 강령 속에 과학적으로 정식화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표현한다면, 민족의 권리는 어떤 계급의 이익이든, 곧 부르주아지, 귀족, 성직자 등의 이익을 그 계급들의 힘과 영향에 따라 표현할 수 있다. 저쪽에 있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의무요, 이쪽에 있는 것은 갖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진 민족의 권리다. 민족의 권리와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은, 이를테면 쿠푸의 피라미드가 저 이름난 청산파 협의회와 '어긋나거나' '어긋나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서로 '어긋나거나'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 그것들은 그저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존경하는 협의회가 전혀 다른 두 가지를 용서할 수 없는 방식으로 뒤섞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민족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얼토당토않은 소리였으니, 그에 따르면 민족의 권리와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은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 따라서 민족의 어떤 요구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과 양립할 수 있고, 따라서 자결을 추구하는 민족의 어떤 요구도 강령의 '정확한 뜻과 어긋나지' 않게 된다!
논리를 아끼지 않았다...
문화적 민족 자치의 요구가 강령의 '정확한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이제부터 유명해질 청산파 협의회의 그 결정은 바로 이 얼토당토않은 소리의 토양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청산파 협의회가 어기는 것은 논리의 법칙만이 아니다.
문화적 민족 자치를 승인함으로써 협의회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앞에서의 자기 의무도 어기고 있다. 협의회는 강령의 '정확한 뜻'을 더없이 명확하게 어기고 있다. 강령을 채택한 제2차 대회가 문화적 민족 자치를 단호하게 물리쳤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대회에서는 이 일을 놓고 이런 말들이 오갔다.
"골드블라트(분트주의자): ...나는 민족체들의 문화 발전의 자유를 보장할 특별한 기관들의 창설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그래서 제8조에 '그리고 그들에게 문화 발전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기관들의 창설'을 덧붙이자고 제안한다(알다시피 이것은 문화적 민족 자치의 분트식 정식화다. 이오시프 스탈린).
마르티노프는 일반적 기관들이 부분적 이익도 보장하도록 조직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족체의 문화 발전의 자유를 보장하는 그 어떤 특별 기관도 만들 수 없다.
예고로프: 민족체 문제에서 우리는 부정적 명제들만을 채택할 수 있다. 곧 우리는 민족체에 대한 온갖 압박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민족체가 민족체로서 발전할 것인가 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자인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다. 그것은 자연발생적 과정의 일이다.
...끝으로 콜초프: 분트 대표들은 그들의 민족주의가 화제에 오르면 언제나 서운해한다. 그런데 분트 대표가 낸 수정안은 순전히 민족주의적인 성격의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사멸해 가는 민족체들까지 떠받치기 위한 순전히 공세적인 조치들이다."
"골드블라트의 수정안은 3표 대 다수로 부결되었다."
그러므로 청산파 협의회가 강령의 '정확한 뜻과 어긋나게' 나아갔다는 것은 분명하다. 협의회는 강령을 어겼다.
이제 청산파는 스톡홀름 대회가 문화적 민족 자치를 승인했다는 듯이 그 대회를 들먹이며 변명하려 한다. 블라디미르 코솝스키는 이렇게 쓴다.
"알다시피 스톡홀름 대회에서 채택된 협정에 따라 분트는 (전당 대회에서 민족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자기의 민족 강령을 유지하도록 허용되었다. 이 대회는 문화적 민족 자치가 어쨌든 전당 강령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35]
그러나 청산파의 시도는 헛수고다. 스톡홀름 대회는 분트의 강령을 승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회는 그저 문제를 당분간 열어 두는 데 동의했을 뿐이다. 용감한 코솝스키에게는 진실을 다 말할 용기가 모자랐다. 그러나 사실은 스스로 말한다. 이것이 그 사실이다.
"갈린의 수정안이 제출된다. '민족 강령 문제는 대회가 그것을 심의하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남는다.'(찬성 50표, 반대 32표.)
목소리: 열려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
의장: 민족문제가 열린 채로 남는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그것은 분트가 다음 대회까지 이 문제에 대한 자기 결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36](강조는 우리의 것. 이오시프 스탈린)
보다시피 대회는 분트의 민족 강령 문제를 '심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을 '열린' 채로 남겨, 분트 스스로 다음 전당 대회까지 자기 강령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맡겼을 뿐이다. 다시 말해 스톡홀름 대회는 문화적 민족 자치에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평가를 내리지 않고 문제를 비켜 갔다.
그런데 청산파 협의회는 더없이 명확하게 문제의 평가에 들어가, 문화적 민족 자치를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인정하고 당 강령의 이름으로 그것을 승인한다.
차이는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청산파 협의회는 온갖 잔꾀에도 불구하고 민족문제를 한 걸음도 앞으로 밀고 나가지 못했다.
분트와 캅카스의 민족·청산파 앞에서 꼬리 치기. 협의회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전부다.
VII. 러시아의 민족문제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민족문제의 긍정적 해결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가 러시아가 지나고 있는 시기와의 뗄 수 없는 연관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러시아는 과도기를 살고 있다. '정상적인' '입헌적' 생활은 아직 자리 잡지 못했고 정치적 위기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폭풍과 '분규'의 날들은 앞에 있다. 여기서 완전한 민주화를 목표로 삼는 운동이, 지금 있는 운동과 앞으로 올 운동이 나온다.
민족문제도 이 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라의 완전한 민주화가 민족문제 해결의 기초이자 조건이다.
문제를 풀 때는 국내 정세만이 아니라 대외 정세도 셈에 넣어야 한다.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오스트리아와 중국 사이에 있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성장은 피할 수 없다. 유럽에서 제국주의의 성장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에서 자본은 비좁아졌고, 새로운 시장과 값싼 노동자와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남의 나라들로 내닫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외적 분규와 전쟁으로 이어진다. 발칸 전쟁[37]이 분규의 끝이며 시작이 아니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이런저런 민족체가 자기 독립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필요를 느끼게 될 국내외 정세의 결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장벽을 쌓는 것은 물론 마르크스주의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자결권 없이는 꾸려 나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자결권은 민족문제 해결에서 필수적인 항목이다.
다음. 이런저런 까닭으로 전체의 틀 안에 남기를 택할 민족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문화적 민족 자치가 부적합하다는 것은 이미 보았다. 첫째로 그것은 인공적이고 생활력이 없다. 그것은 생활이, 현실의 생활이 갈라놓고 국가의 여러 끝으로 흩어 놓는 사람들을 인공적으로 하나의 민족으로 끌어모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민족주의로 밀어붙인다. 그것은 사람들을 민족별 쿠리아로 '경계 짓는' 관점으로, 민족을 '조직'하는 관점으로, '민족적 특성'을 '보존'하고 가꾸는 관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사회민주주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제국의회의 모라비아 분리주의자들이 독일인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모라비아의 부르주아 의원들과 하나의, 말하자면 모라비아 '콜로'로 뭉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분트의 분리주의자들이 '안식일'과 '이디시어'를 추어올리며 민족주의의 수렁에 빠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두마에는 아직 분트 의원이 없지만, 분트의 활동 구역에는 성직자적·반동적 유대인 공동체가 있으며, 분트는 당분간 그 '지도 기관들' 안에서 유대인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통합체'를 꾸리고 있다. 문화적 민족 자치의 논리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 자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면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유일하게 옳은 해결은 지역 자치, 곧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캅카스처럼 윤곽이 잡힌 단위들의 자치다.
지역 자치의 장점은 무엇보다 먼저, 그 경우 영토 없는 허구가 아니라 일정한 영토에 사는 일정한 주민을 상대하게 된다는 데 있다. 다음으로 그것은 사람들을 민족별로 경계 짓지 않으며 민족의 칸막이를 튼튼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 칸막이를 부수고 주민을 통합하여, 다른 종류의 경계 짓기, 곧 계급에 따른 경계 짓기에 길을 열어 준다. 끝으로 그것은 중앙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지역의 천연자원을 가장 잘 이용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준다. 문화적 민족 자치에는 없는 기능들이다.
그러므로 지역 자치는 민족문제 해결에서 필수적인 항목이다.
어느 지역도 민족적으로 온통 한 가지 빛깔은 아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역마다 민족적 소수자들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유대인, 리투아니아의 라트비아인, 캅카스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의 폴란드인 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소수자들이 민족적 다수자에게 억압받지 않을까 우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우려에 근거가 있는 것은 나라가 낡은 질서에 머물러 있는 경우뿐이다. 나라에 완전한 민주주의를 주어 보라. 우려는 온갖 근거를 잃을 것이다.
흩어져 있는 소수자들을 단일한 민족 연합으로 묶자고 제안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공적인 연합이 아니라 자기 사는 곳에서의 현실적인 권리다. 완전한 민주화 없이 그런 연합이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거꾸로, 완전한 민주화가 있다면 민족 연합이 무슨 소용인가?
민족적 소수자를 특히 들쑤시는 것은 무엇인가?
소수자가 불만인 것은 민족 연합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국어의 권리가 없어서다. 모국어를 쓰게 해 주어 보라. 불만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소수자가 불만인 것은 인공적 연합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국어 학교가 없어서다. 그런 학교를 주어 보라. 불만은 온갖 근거를 잃을 것이다.
소수자가 불만인 것은 민족 연합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심의 자유(신앙의 자유)와 이주의 자유 따위가 없어서다. 이 자유들을 주어 보라. 소수자는 더는 불만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형태의 민족적 평등권(언어, 학교 등)은 민족문제 해결에서 필수적인 항목이다. 따라서 나라의 완전한 민주화를 기초로 하여, 예외 없이 모든 종류의 민족적 특권과 민족적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그 어떤 압박이나 제한도 금지하는 국가 전체의 법률이 필요하다.
여기에, 오직 여기에만 종이 위의 것이 아닌 현실의 소수자 권리 보장이 있을 수 있다.
조직적 연방주의와 문화적 민족 자치 사이에 논리적 연관이 존재하는가는 다툴 수도 있고 다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적 민족 자치가 끝 간 데 없는 연방주의, 완전한 결별과 분리주의로 넘어가는 연방주의에 좋은 공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은 다툴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체코인들과 러시아의 분트주의자들이 자치에서 일을 시작하여 연방으로 넘어갔다가 분리주의로 끝을 맺었다면, 거기에는 문화적 민족 자치가 자연스레 퍼뜨리는 민족주의적 공기가 의심할 바 없이 큰 역할을 했다. 민족 자치와 조직적 연방이 손에 손을 잡고 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럴 만도 하다. 둘 다 민족체별 경계 짓기를 요구한다. 둘 다 민족체별 조직화를 전제한다. 닮았음은 의심할 바 없다. 차이는 다만 저쪽에서는 주민 일반을 경계 짓고 이쪽에서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를 경계 짓는다는 것뿐이다.
노동자를 민족체별로 경계 짓는 것이 무엇으로 이어지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단일한 노동자 정당의 와해, 조합의 민족체별 분열, 민족적 알력의 격화, 민족별 파업 파괴, 사회민주주의 대열의 완전한 사기 저하. 조직적 연방주의의 결과는 이러하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러시아에서의 분트의 활동이 이것을 웅변으로 증언한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수단은 국제주의의 원칙에 따른 조직이다.
러시아의 모든 민족체 노동자들을 현지에서 단일한 온전한 집단들로 결속하는 것, 그런 집단들을 단일한 당으로 결속하는 것. 과제는 이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당 구조는 단일한 당 전체 안에서의 지역들의 넓은 자율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한다.
캅카스의 경험은 이런 조직 유형이 얼마나 합목적적인지를 보여 준다. 캅카스인들이 아르메니아인 노동자와 타타르인 노동자 사이의 민족적 알력을 이겨 냈다면, 주민을 학살과 총격전의 가능성으로부터 안전하게 만들었다면, 민족 집단들의 만화경인 바쿠에서 이제 민족 충돌이 불가능해졌다면, 그곳 노동자들을 힘찬 운동의 공동의 물줄기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면, 거기에는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국제주의적 구조가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조직의 유형은 실천 작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정신생활 전체에 지울 수 없는 도장을 찍는다. 노동자는 자기 조직의 생활을 살며 그 안에서 정신적으로 자라고 교육받는다. 그리하여 자기 조직 안에서 움직이며 그때마다 다른 민족의 동지들과 만나고, 공동의 집단의 지도 아래 그들과 함께 공동의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노동자는 노동자란 무엇보다 먼저 하나의 계급 가족의 성원, 사회주의의 단일한 군대의 성원이라는 생각이 몸에 깊이 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넓은 층에 거대한 교육적 의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국제주의적 조직 유형은 동지적 감정의 학교이며 국제주의를 위한 더없이 큰 선동이다.
민족체별 조직은 그렇지 않다. 민족체를 기초로 조직되면서 노동자들은 민족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고 조직의 칸막이로 서로 담을 쌓는다. 강조되는 것은 노동자들 사이에 공통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점이다. 여기서 노동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민족의 성원이다. 유대인, 폴란드인 등등. 민족적 연방주의가 조직에서 노동자들 속에 민족적 폐쇄성의 정신을 길러 내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러므로 민족별 조직 유형은 민족적 편협성과 굳어짐의 학교다.
이렇게 우리 앞에는 원칙적으로 다른 두 조직 유형이 있다. 국제주의적 결속의 유형과, 노동자를 민족체별로 '경계 짓는' 조직의 유형이다.
이 두 유형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1897년 빔베르크에서 만들어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화해적 규약은 공중에 떠 버렸다. 오스트리아 당은 조합들을 끌어들이며 산산이 부서졌다. '화해'는 유토피아적일 뿐 아니라 해로운 것으로 드러났다. "분리주의는 빔베르크 당대회에서 첫 개가를 올렸다"[38]고 말한 슈트라서가 옳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톡홀름 대회에서 이루어진 분트의 연방주의와의 '화해'는 완전한 파산으로 끝났다. 분트는 스톡홀름의 타협을 깨뜨렸다. 분트는 스톡홀름 직후 첫날부터, 모든 민족체의 노동자를 아우르는 단일한 조직으로 노동자들을 현지에서 융합하는 길의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고 1907년에도 1908년에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모든 민족체 노동자 사이의 아래로부터의 통일을 마침내 실현할 것을 몇 차례나 요구했음에도,[39] 분트는 자기의 분리주의 전술을 고집스레 이어 갔다. 조직적 민족 자치에서 시작한 분트는 실제로는 연방으로 넘어갔고, 결국 완전한 결별로, 분리주의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와 갈라서면서 분트는 그 안에 혼란과 해체를 들여놓았다. 야기에우워 사건[40]만이라도 떠올려 보라.
그러므로 '화해'의 길은 유토피아적이고 해로운 것으로서 버려야 한다.
둘 중 하나다. 분트의 연방주의든가, 그 경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를 민족체별로 '경계 짓는' 원칙 위에서 재편된다. 아니면 국제주의적 조직 유형이든가, 그 경우 분트는 캅카스, 라트비아,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를 본보기 삼아 영토적 자율성의 원칙 위에서 재편되어, 유대인 노동자가 러시아의 다른 민족체 노동자들과 직접 통합하는 길을 연다.
중간은 없다. 원칙은 승리하는 것이지 '화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국제주의적 결속의 원칙은 민족문제 해결에서 필수적인 항목이다.
1913년 1월, 빈.
1913년 3~5월 잡지 『프로스베셰니예』(계몽) 제3~5호에 처음 발표. 서명: K. 스탈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