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파블류코프, 『예조프: 전기』 한국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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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노멘클라투라 사다리를 오르며

5. 중앙의 파견자

예조프가 흔들린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타타르와 인접한 마리 자치주에서는 그의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리 자치주는 1920년 11월 카잔현, 뱟카현, 니즈니노브고로드현 일부 지역을 합쳐 설치되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마리인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두 집단 사이에는 언어, 문화, 생활방식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양쪽 집단의 대표들은 이 지역에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당시에는 그들 사이에 특별히 심각한 의견 차이가 없었다.

갈등은 이후 마리 자치주 창설 문제가 의제로 올라오면서 시작되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현 코지모데먄스크군에 살던 산지 마리인들은 미래 자치주의 중심지를 코지모데먄스크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평지 마리인들은 뱟카현 크라스노콕샤이스크군의 중심도시인 크라스노콕샤이스크, 오늘날의 요시카르올라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자치주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코지모데먄스크가 더 적합했다. 그곳의 인구는 7천 명이었지만 크라스노콕샤이스크의 인구는 약 2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평지 마리인의 수가 더 많았고 결국 그들의 의견이 승리했다.

두 민족집단의 당 및 소비에트 활동가들 사이의 긴장은 이후 더욱 심해졌다. 마리 자치주 행정기관의 관료기구가 주로 평지 마리인과 러시아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모순과 상호 적대감은 점차 축적되었고, 마침내 마리 당조직 역사에서 ‘코지모데먄스크 분쟁’으로 알려진 사건이 일어났다.

1921년 여름 볼가 지역에 닥친 가뭄은 거의 모든 농작물을 파괴했다. 기근이 시작되었다.

국가 비축기금에서 마리 자치주로 들어오는 식량의 배분은 주 식량위원회가 담당했다. 이 위원회는 중앙의 지시와 곡물 지급 배정표를 지방기관에 전달했다.

10월 식량이 부족해지자 주 식량위원회는 국가로부터 식량을 공급받는 사람의 수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지시가 코지모데먄스크 칸톤에서 무시되었는지, 아니면 제시간에 전달되지 않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에는 주 중심지와 정기적인 통신망조차 없었다.

어쨌든 칸톤 식량위원회는 이전의 기준대로 지역 주민에게 식량을 계속 공급했고, 그 결과 식량이 할당량보다 초과 지출되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이용하여 고분고분하지 않은 코지모데먄스크 주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한 듯하다.

코지모데먄스크 칸톤 식량위원회의 불법적인 식량 지출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21년 12월 24일 마리주 당위원회 상무국은 특별위원회의 보고를 심의한 뒤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그러나 당 칸톤위원회 지도부는 이 지시에 복종하기를 거부했고, 심지어 무장저항을 조직하려 했다.

또한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전러시아 비상위원회에 전보를 보내 지역 당 활동가들의 체포를 중단하고 중앙의 조사위원회를 즉시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대표 N. A. 쿠뱌크가 마리 자치주로 파견되었다.

상황을 파악한 그는 코지모데먄스크 칸톤위원회 해산 결정에 충분한 근거가 없다며 이를 취소했다.

동시에 1922년 1월 18일부터 20일까지 열린 당 주위원회 확대회의에서는 코지모데먄스크 지도부가 저지른 잘못도 비판했다.

1922년 2월 10일 중앙위원회 조직국 회의에서 마리 당조직의 상황에 관한 쿠뱌크의 보고가 청취되었다.

채택된 결정에는 상황을 정상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와 함께, 중앙위원회 기록배치부가 마리주 당위원회의 새로운 서기를 찾아야 한다는 지시가 포함되었다.

후보자를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마 이제는 치료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해야 할 전 타타르주 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예조프의 이름이 거의 즉시 떠올랐던 듯하다.

예조프가 볼가 지역에서 약 2년 동안 근무하여 지역의 특수성, 특히 민족문제에 익숙하다는 점도 이 선택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1922년 2월 15일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예조프를 마리 자치주로 파견하고, 현지 당 주위원회 서기로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예조프가 2월 17일 개막 예정이던 제3차 주 당협의회가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듯하다.

그렇게 되면 협의회가 끝난 뒤 처음 열리는 주위원회 조직전원회의의 선거를 통해 예정된 직책에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취임할 수 있었다.

새로운 임명 소식은 막 병원에서 퇴원한 예조프에게 그리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기근에 휩싸인 볼가 지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겠지만, 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그러나 예조프는 즉시 출발할 수 없었다.

따라서 협의회 이전에도 책임서기를 맡았던 N. F. 부테닌이 마리주 당위원회 책임서기로 다시 선출되었다.

그의 재선 소식은 이 결정을 승인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즉시 모스크바로 전달되었다.

이후 사건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922년 3월 6일 중앙위원회 조직국은 부테닌을 마리주 당위원회 책임서기로 승인하는 문제를 심의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이전의 결정과 반대로, 조직국은 부테닌의 임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이전 결정은 취소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같은 사안에 관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결정 두 개가 내려졌다.

첫 번째 결정, 즉 예조프를 마리 자치주로 보내는 결정은 이미 집행 중이었다.

따라서 아무것도 모른 채 마침내 크라스노콕샤이스크에 도착한 예조프는 그곳에서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월 15일 예조프가 참석한 마리주 당위원회 상무국 회의에서 한 직책을 둘러싼 두 후보자 문제가 논의되었다.

상무국 위원 5명 가운데 4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논의는 격렬했다.

의견 차이의 핵심은 예조프가 중앙에서 임명되어 내려온 사람이자 러시아인이었던 반면, 부테닌은 지역 출신이자 마리인이었다는 점이었다.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자 표결이 실시되었다.

N. F. 부테닌 자신은 아마 윤리적인 이유로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머지 표는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

이처럼 의견이 갈리자 양측의 근거를 담은 진술서를 중앙위원회로 전보로 보내 모스크바가 최종 결정을 내리게 하기로 했다.

그러나 3월 20일 열린 다음 상무국 회의에서 I. P. 페트로프는 자신의 반대를 철회하고 다른 상무국 위원들의 의견에 합류했다.

아마도 이미 임지에 도착한 예조프를 중앙위원회가 다시 불러들이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표결에서도 예조프가 ‘다수’를 얻었다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순간부터 예조프는 공식적으로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마리주위원회 책임서기직에 취임했다.

겉으로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끝난 듯했지만, 이 사건은 광범위한 후과를 낳았다.

주 단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인물, 즉 당 주위원회 서기와 주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사이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이 갈등은 이후 마리 지도부 전체가 서로 맞서는 두 집단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리 당조직은 타타르 당조직보다 훨씬 작았다.

예조프가 도착했을 당시 당원과 후보당원을 합쳐 약 600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 절반은 18세 이하의 청년이었다.

앞에서는 산지 마리인과 평지 마리인의 복잡한 관계를 언급했다.

그러나 마리인 지도급 당 활동가와 러시아인 당 활동가 사이의 관계도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1921년 9월과 10월에 관한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조직부 보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마리 자치주에서는 최근 주 당협의회, 즉 1921년 8월 협의회에서 마리인들만 주위원회에 선출되었다. 이에 러시아인들은 민족적 독점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업무를 그만두려 한다.”[45]

예조프가 도착할 무렵 상황은 다소 바뀌었다.

주 당조직 지도부에서 러시아인과 마리인의 비율은 이전보다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리 당조직만 특별히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 거의 모든 민족지역 당조직에서 이와 비슷한 갈등이 발생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예조프의 도착은 이 지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갈등, 즉 당 조직과 소비에트 기관 사이의 갈등도 촉발했다.

당시 마리 자치주에서도 다른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주요 수단은 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었다.

규모가 작은 주 당조직의 당위원회는 아직 안정된 구조를 갖추지 못했고, 그 지도자들도 특별히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관할지역의 경제행정을 장악하고 있던 집행위원회와 경쟁할 수 없었다.

집행위원장 I. P. 페트로프는 자치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 결과 주 당위원회는 사실상 집행위원회의 부속기관으로 기능하며, 집행위원회의 이익과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집행위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반드시 당 주위원회 상무국에도 들어갔기 때문에 이런 구조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I. P. 페트로프 이외에도 주 식량위원 I. A. 시가예프가 상무국 위원이었다. 그 역시 민족적으로 마리인이었다.

시가예프가 바로 상무국의 다섯 번째 위원이었다. 예조프의 후보를 표결하던 날 그가 우연히 결석한 덕분에 페트로프가 소수파가 되었다.

예조프가 도착하자 당 주위원회와 집행위원회 사이에 정착되어 있던 관계체계는 완전히 흐트러졌다.

예조프가 처음부터 다른 대우를 받았다면 그 이전에 형성된 질서를 그렇게 급격하게 바꾸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가 이인자의 위치에 만족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적어도 공개적인 갈등까지 가는 것은 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마리 자치주에 도착한 첫날부터 자존심에 상당한 상처를 입은 ‘이지 미클라이’, 즉 마리인 당 동지들이 붙인 별명인 ‘작은 니콜라이’는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후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그는 빚을 갚지 않고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조프는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의 투쟁을 두 가지 주요 방향으로 전개했다.

우선 그는 당 주위원회를 실질적인 권력기관으로 만들려 했고, 실제로 그렇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지역문제와 관련된 어떤 중요한 결정도 당 주위원회의 승인 없이는 내릴 수 없게 되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집권당의 전권대표기관인 당 주위원회가 다른 모든 조직과 국가기관의 활동을 지도하고 감독하면서 전반적인 정치적 지도를 수행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예조프는 또한 인사문제 해결에 정력적으로 나섰다.

핵심 직책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신뢰할 수 없거나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려 했다.

이를 위해 집행위원회의 지도급 인사들을 흠집 낼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관련 사실이 발견될 때마다 해당 인물은 당 주위원회 상무국에서 상세하고 가차 없는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에는 원칙을 강조한 엄격한 조직적 처분이 뒤따랐다.

그리고 찾아낼 문제는 충분했다.

마리인 지도자 가운데 많은 사람은 필요한 전문지식이나 충분한 행정경험을 갖추지 못했고, 맡은 직무도 그리 훌륭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때때로 부하들의 완전히 합법적이지 않은 행동을 눈감아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마리 지도부 일부의 평판을 훼손하고 그 대열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키기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했다.

이 투쟁에서 예조프는 주 당조직의 러시아인 구성원들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또한 주 중심지에서 평지 마리인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불만을 품은 코지모데먄스크 공산당원들과, 자리를 오래 차지한 지도자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평지 마리인 청년 당원들에게도 기대할 수 있었다.

아울러 처음부터 경찰, 노동자·농민감찰원, 혁명재판소, 주 통제위원회처럼 러시아인이 이끄는 주 기관들도 그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예조프가 당 주위원회 서기로 승인된 지 한 달 뒤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1922년 4월 21일, 주 노동자·농민감찰원은 마리 혁명재판소와 함께 갑자기 주 식량위원회에 대한 감사를 시작했다.

식량위원장이자 주 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인 I. A. 시가예프는 심문을 받기 위해 혁명재판소에 소환되었다.

다음 날 불안해진 I. P. 페트로프는 노동자·농민감찰원과 혁명재판소에 공식 질의서를 보내 사건을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노동자·농민감찰원장은 차분한 어조의 답변에서, 식량위원회의 일부 직원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확인되었고 경제기관인 식량위원회는 본래부터 감찰원의 관심 대상이 될 수밖에 있으므로 이번 감사에는 아무런 이례적인 점도 없다고 설명했다.

반면 혁명재판소의 답변은 형식부터 도발적이었다.

그 답변만 보더라도 주 집행위원회의 평온한 시절이 끝났다는 결론을 분명히 내릴 수 있었다.

혁명재판소장은 집행위원회가 정보를 요청할 수는 있어도 이를 요구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혁명재판소가 감사에 참여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하며, 모든 감사 결과는 당 주위원회에 제출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주 집행위원회는 혁명재판소의 도발적인 답변이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공식적인 선전포고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듯하다.

혁명재판소장은 “주 집행위원회의 권위를 축소하고 훼손하는 무분별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엄중견책을 받았다.

또다시 이와 같은 무분별한 행동을 하면 해임될 것이라는 경고도 받았다.

반격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바로 같은 날 열린 당 주위원회 상무국 회의에서는 또 다른 집행위원인 주 국민경제회의 의장 S. A. 체르냐코프의 보고가 심의되었다.

예조프의 제안에 따라 상무국은 “현재 구성으로는 주 국민경제회의가 완전히 업무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다.

이어 중앙에 마리 자치주로 공산당원 출신 경제전문가들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하고, 특히 국민경제회의 의장부터 교체해달라고 청원하기로 했다.

이틀 뒤 혁명재판소 합의부는 국민경제회의 업무를 붕괴시킨 혐의로 체르냐코프를 형사입건하고 출국금지 서약을 받았다.

며칠이 지나자 또 다른 집행위원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주 군사위원 M. M. 토바쇼프에게 직무태만 혐의로 사건이 개시되었다.

혁명재판소 합의부는 이를 이유로 그를 직위에서 해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지역 지도간부와의 투쟁이 당 주위원회 서기 예조프의 주요 업무였다고 결론 내린다면 잘못이다.

예조프는 기근과 산불의 후유증에 대처하고, 주민을 위한 의료지원을 조직하는 등 온갖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더구나 그는 집행위원회를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본래 집행위원회 소관인 문제의 상당 부분을 직접 통제했다.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사업에도 참여해야 했다.

이런 사업은 때때로 예조프가 복잡한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투사로서의 자질을 보여줄 기회를 주었다.

그런 기회 가운데 하나는 1922년 4월 초 당 주위원회 상무국에서 교회 귀중품 몰수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찾아왔다.

이 문제를 보고한 예조프는 몰수 절차에 관한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전보가 아직 해독되지 않아 모든 업무가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고 귀중품 몰수를 즉시 시작한 뒤 그 사실을 중앙위원회에 보고하자고 제안했다.[46]

상무국은 예조프의 제안을 지지했다.

짧은 기간 안에 금, 은, 보석을 합쳐 거의 700킬로그램을 수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안들을 비롯한 모든 업무는 집행위원회 지도부와의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는 가운데 처리해야 했다. 이는 업무를 크게 어렵게 만들었다.

1922년 7월 초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정보보고서에서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의 핵심 활동가들 사이의 의견 차이가 이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분위기는 긴장되어 있으며, 머지않아 분명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47]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예조프는 카잔에 있을 때 결혼했다. 그의 배우자는 안토니나 티토바로, 당시 타타르 노동조합평의회 생산선전국장을 맡고 있었다.

예조프는 카잔을 떠나면서 아내와 헤어져 살아야 했다. 그러나 마리 자치주에 확실히 자리를 잡은 뒤 아내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불러오기로 했다.

1922년 6월 모스크바 출장 중 예조프는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기록배치부와 협의하여 티토바를 마리 자치주로 전근시키고, 당 주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당시 티토바도 모스크바에 있었으며 중앙노동조합평의회로 직장을 옮긴 상태였다.

예조프는 이처럼 중요한 자리에 당연히 자기 사람을 두고 싶어 했다. 티토바는 이 역할에 더없이 적합했다.

예조프는 아내와 함께 크라스노콕샤이스크로 돌아왔다. 7월 9일 열린 주위원회 상무국 회의에서 티토바는 조직부장으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이 너무나 손쉽게 통과되었다는 사실은 기만적이었다.

처음에 마리인 반대파가 예조프와 중앙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새로 부임한 조직부장 사이의 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예상하지 못한 일에 당황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예조프가 평범한 족벌주의, 즉 가족과 측근을 요직에 앉히는 행태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대파는 이를 기고만장한 당 주위원회 서기에게 제자리를 가르쳐줄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듯하다.

예조프를 공격할 또 하나의 구실은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그가 만든 마르크스주의 연구회의 활동이었다.

이 연구회에는 젊은 당 활동가 약 15명이 참여했다.

연구회 회의에서는 이론적인 문제만 논의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조직 내부에 ‘예조프 분파’가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곧 퍼지기 시작했다.

이 소문만이라면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티토바 임명을 둘러싸고 일어난 소동은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이는 원칙의 문제였다.

예조프는 모든 것을 걸고 승부하기로 했다.

7월 14일 열린 주위원회 상무국 정기회의에서 예조프는 자신을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처분 아래 다시 보내달라고 제안했다.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과 퍼지고 있는 소문을 통해 자신이 당 주위원회 위원 모두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 이유였다.

논쟁이 격화되자 예조프의 반대자들은 그의 입지를 최대한 약화하려 했다.

회의에 초청된 N. S. 파트키예비치는 전날 티토바에게 조직부장 자리를 내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조직부장직에서 해임한 결정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I. P. 페트로프는 당조직에서 민족문제에 관한 토론을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예조프를 중앙위원회로 돌려보내는 것을 막지 말자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반대파도 예조프의 제안에 동의할 경우 자신들이 중앙위원회 파견자를 자치주에서 쫓아낸 사람들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중앙은 이들에게 더욱 사나운 ‘모스크바 보모’를 보내는 것 외에는 다른 대응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 중앙이 발생한 갈등을 고려하여 스스로 예조프를 소환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렇게 되면 그의 자리를 다시 지역의 오랜 활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 차지할 수도 있었다.

회의 결과 채택된 당 주위원회 상무국의 결정은 타협적인 성격을 띠었다.

예조프의 전출 요청은 기각되었다.

파트키예비치를 조직부장직에서 해임하고 티토바를 후임으로 임명한 기존 결정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민족문제와 당 윤리에 관한 토론을 실시하자는 페트로프의 제안도 받아들여졌다.

이런 결과는 예조프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었다.

상대방에게 더욱 심각한 패배를 안길 필요가 있었다.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무대는 곧 열릴 당 주위원회 전원회의였다.

특히 이 회의에서는 I. P. 페트로프의 보호를 받던 주 식량위원회 합의부 위원들에 대한 사건의 예비 결론도 논의할 예정이었다.

4월 말에 시작된 수사에서는 주 식량위원회 체계에서 일어난 여러 부정행위와 횡령이 드러났다.

1922년 7월 27일 열린 전원회의에서는 수사가 끝나는 대로 사건을 재판에 넘기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예조프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했다.

“주 식량위원회 합의부는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다. 재판을 받아야 한다.

혁명재판소는 이 사건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

피고인 가운데 당원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죄 여부를 규명하고, 재판이 지닌 막대한 사회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무자비하게 처리해야 한다.

이 재판은 모든 소비에트 기관과 모든 활동가를 잠에서 깨워야 한다.”[48]

이 관점은 다른 회의 참석자들의 발언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전원회의가 채택한 결의에서는 주 식량위원회 사건의 수사를 신속하게 끝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 식량위원 I. A. 시가예프와 그의 부위원장을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I. P. 페트로프가 수사가 편파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으므로,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최고재판소에 청원하여 예비수사와 재판에 참여할 대표를 파견하도록 요청하기로 했다.

전원회의가 심의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주 당조직의 상황이었다.

예조프는 자신의 발언에서 현재의 상황을 설명한 뒤, 자신을 중앙위원회로 다시 보내달라는 문제를 또다시 제기했다.

그는 페트로프와의 마찰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이므로 둘 가운데 한 명은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페트로프가 떠날 경우 그만큼 경험 많은 마리인 활동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떠나는 편이 낫고, 그렇게 하면 의견 차이도 어쩌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계산은 적중했다.

이런 전망에 불안을 느낀 전원회의는 상당히 강경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 주위원회 상무국 내부에 일정한 의견 차이가 존재하며, 이것이 업무를 상당히 방해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전원회의는 이러한 의견 차이를 가장 단호한 방식으로 해소할 것을 요구한다.

당 건설의 공통된 원칙적 노선에서 이탈하는 주위원회 위원에게는 당 제명에 이르는 징계조치까지 적용해야 한다.”[49]

전원회의가 끝난 지 며칠 뒤 예조프는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제12차 전러시아 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다.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그는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를 방문해 마리 당조직의 상황을 설명했다.

조직지도부의 정보담당자 G. A. 구반스카야는 대화 내용을 언급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예조프 동지는 육체적으로 완전히 지쳐 있다……

예조프와 페트로프 두 사람이 같은 주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예조프를 소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조직의 건전한 세력이 그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한 동지가 예조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예조프 동지가 떠날 경우 여러 당 활동가가 마리 자치주를 단호히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강력한 지원 없이 계속 남아 있는 것도 이제 예조프 동지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리주위원회에 세 명의 강력한 활동가를 보내고,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페트로프 동지는 소환해야 한다.

새로운 동지들은 페트로프를 대신할 집행위원장, 주 식량위원장, 토지부장으로 배치해야 한다.

활동가 파견은 8월 23일 소집되는 주 당협의회에 맞추어야 한다. 이 협의회를 비정상적인 현상을 해소하고 조직을 건전화하는 데 이용해야 한다.

예조프 동지는 새로 파견되는 검증된 활동가 세 명을 주 집행위원회와 주요 경제기관의 책임자로 배치한다면, 조직을 건전화하고 당·소비에트 업무를 정상화하기 위해 이미 절반가량 진행된 사업을 끝까지 완수하고 정착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50]

실제로 인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페트로프를 소환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부위원장직에 새로운 사람을 보냈고, 주 식량위원장을 맡을 사람도 한 명 파견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조프의 오랜 지인 B. S. 루리예가 주위원회에서 일하기 위해 도착했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은 1917년 비테프스크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예조프는 병사였고, 루리예는 젊은 제혁노동자였다.

그들은 함께 비테프스크 당조직에 가입했고, 그 활동에도 함께 참여했다.

이후 두 사람의 길은 갈라졌다.

루리예는 10월혁명 직후부터 사실상 당 활동가가 되었으며, 마리 자치주로 이동하기 전에는 아스트라한현 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을 맡고 있었다.

루리예의 마리 자치주 전근이 우연이었을 가능성은 작다.

아마 예조프가 그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이제 예조프의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다.

더구나 루리예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역시 당 활동가인 아내와 함께 왔다. 그의 아내도 주위원회 аппара트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파견된 사람이었다.

G. A. 구반스카야가 보고서에서 언급했던 제4차 주 당협의회는 1922년 8월 26일 개막했다.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참관인으로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 A. D. 아브데예프가 참석했다.

그는 마리 자치주 체류보고서에서 현지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협의회 준비가 이루어진 분위기는 복잡했으며, 개인적인 감정싸움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의견 차이의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었다.

한쪽에는 마리인인 주 집행위원장 페트로프와 그를 둘러싼 소수의 마리인 집단이 있었다.

다른 쪽에는 당 주위원회 서기 예조프가 있었으며, 압도적 다수의 조직과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마리인 공산당원 일부가 그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협의회의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개막 전, 각 대표단에서 두 명씩 참석시킨 당 주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게 했다.

절대다수는 페트로프를 협의회 상임단 후보에서 제외할 뿐 아니라, 주 집행위원장직에서도 즉시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심각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그를 상임단 후보로 추천했었다.

페트로프에게 제기된 이유는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였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람은 업무능력 면에서 페트로프를 대체할 사람이 없으며, 무당파 농민대중 사이에서도 권위를 누리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페트로프를 협의회 상임단 후보로 넣을 것인지를 두 시간 동안 논의한 결과 표가 정확히 절반으로 갈려 문제는 미결로 남았다.

회의가 끝난 뒤 다시 논의가 시작되었다.

반대파는 페트로프가 ‘민족주의’ 쪽으로 지나치게 나아가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약속한다면 당 주위원회에 다시 넣어볼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아브데예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협의회에서 페트로프의 후보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는 협의회의 통합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당 주위원회 보고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소동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확고한 회의 운영으로 격정을 불붙이지 못하게 했다……

차기 당 주위원회 구성 문제를 논의할 때도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다만 협의회 본회의가 아니라 대표단별 회의에서 일어났다.

나는 각 대표단에 주 집행위원장 후보를 제시하고, 페트로프에게 제기되는 혐의를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제시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회의한 끝에 페트로프는 만장일치로 당 주위원회 상무국에 들어갔다.

페트로프에게 결점이 있었고 그를 한번 호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예조프 동지는 반대 방향으로 지나치게 나아갔다.

그는 조직을 페트로프 개인뿐 아니라 마리인으로서의 페트로프에게까지 지나치게 적대하도록 만들었다.

협의회에서 예조프 자신도 대러시아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 자기 지지자들을 억제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나머지 문제들은 특별한 마찰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페트로프와 예조프는 앞으로 이와 같은 의견 불일치가 없도록 하겠으며, 전체 조직에도 같은 방향으로 행동할 것을 호소하겠다고 함께 약속했다……

예조프 동지는 조직의 다수에게 권위를 누리고 있다.

업무를 독단적으로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마리주위원회 서기로서는 충분히 적합하다……

페트로프는 당 주위원회가 자신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당 주위원회를 지도해왔기 때문에 정상적인 업무조건을 ‘대러시아 쇼비니즘’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무당파의 수완가들이 자주 자신을 그물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본인도 이를 인정했고, 협의회에서 호된 경고를 받은 뒤 고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이 조건 아래 새 당 주위원회에 포함되었다.”[51]

새 당 주위원회에 들어간 11명 가운데 다수는 예조프의 지지자였다.

주위원회 аппара트의 지도직에도 자기 사람들이 배치되었다.

B. S. 루리예는 조직부장에 임명되었고 당 주위원회 상무국에도 들어갔다.

루리예의 아내 M. B. 스몰렌스카야는 총무부장이 되었다.

예조프의 아내 A. A. 티토바는 선전선동부를 맡았다.

예조프는 협의회의 결과에 만족할 수 있었다.

1922년 9월 초 A. D. 아브데예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있습니다.

새 상무국의 업무가 화목하게, 그리고 당연히 생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말해야겠습니다.

이번 한 주 동안 해낸 일을 예전 같았으면 한 달이 지나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52]

이제 업무가 마침내 정상화되었으므로 자신의 건강을 생각할 수도 있었다.

1922년 10월 13일 예조프는 치료를 위한 휴가와 금전보조를 요청하는 신청서를 당 주위원회 상무국에 제출했다.

그는 전년도 가을 이미 휴가를 보냈다는 사실을 잊은 듯 다음과 같이 썼다.

“2월혁명 이후 휴가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올해 2월에는 병원에서 곧바로 마리 자치주로 파견되었습니다.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현재 거의 일곱 종류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53]

당 주위원회 상무국은 예조프의 신청을 심의한 뒤 한 달간의 휴가와 금전보조를 제공하고,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공화국 내 휴양지 가운데 한 곳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예조프는 이웃한 타타르에 들러, 1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오랜 친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재회는 매우 따뜻했다.

마침 그 무렵 주 당협의회가 열리고 있었고 새 상무국 선거도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예조프를 즉시 타타르주위원회 상무국 위원으로 넣으려 했다.

예조프는 가까스로 이 계획을 물리쳤다.

원칙적으로 카잔으로 돌아오는 것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는 동안 마리 당조직의 갈등이 다시 격렬하게 폭발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게다가 당시 타타르의 상황도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래서 카잔에서 며칠을 보낸 뒤 예조프는 계획대로 수도로 향했다.

1922년 11월 1일, 그는 마리 자치주에 있는 친구 한 명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모스크바에서 지낸 지도 벌써 나흘째다……

온통 보고와 업무뿐이다. 죽어라 뛰어다니고 있다. 오늘은 식량인민위원부*에 가서 우리 지역에 현물세 일부를 남겨두는 문제를 이야기할 예정이다.

중앙위원회에서는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검사는 아마 곧 보내줄 것이다. 다만 누가 올지는 모르겠다.

자, 이제 내 문제를 말하겠다. 그래, 너에게만 알려주는 것이니 당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나를 이곳에서 옮기는 데에는 모두 동의했다……

이 문제는 시르초프**와 이미 최종적으로 합의했고, 쿠이비셰프***와도 합의했다.

상황은 이렇다. 지금 나는 한 달 동안 휴양을 떠난다. 그사이에 마리란디야의 당 주위원회 서기를 맡을 사람을 찾고,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예정이다.

오룔, 브랸스크, 세베로드빈스크, 우랄, 남동부 가운데 어디든 선택하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휴양에서 돌아오면 무슨 결론이 나겠지.

그런데 친구들은 나를 비테프스크로 끌어가려고 한다……

중앙위원회에서는 지도적인 소비에트 업무나 경제업무 같은 다른 종류의 일로 옮길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거절했다. 그런 일은 지옥에나 가라고 해라.”[54]

11월 6일 예조프는 마침내 키슬로보츠크의 한 요양원으로 떠났다.

휴식과 치료를 마친 뒤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파벌싸움으로 분열된 펜자현 당위원회에 자신을 보낼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추가 후보지로 아스트라한, 프스코프, 세미팔라틴스크가 제시되었다.

예조프가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세미팔라틴스크였다.

6. 세미팔라틴스크현의 주인

초원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카자흐 인민이 어깨를 활짝 펼쳤을 때, 목동들이 바이들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레닌과 스탈린은 우리에게 예조프를 보내주었다.

예조프가 와서 안개를 걷어내고 행복을 위한 투쟁에 카자흐스탄을 일으켰다. 아울들을 소비에트의 깃발 아래 단결시키고 크렘린 법령의 힘과 지혜를 전해주었다.

카자흐스탄 인민을 이끌면서 바이와 베크*를 향한 원정을 지휘했다. 인민은 예조프를 따라 공격에 나섰고 황금빛 꿈은 현실이 되었다.

예조프는 착취자들을 산맥 너머로 몰아내고 그들의 말 떼와 가축 떼를 빼앗았다. 우리는 바이들의 기만과 영원히 결별했고 카자흐스탄의 초원에는 봄이 피어났다.

잠불, 「인민위원 예조프」, 1937년

예조프가 체력을 회복하고 새로운 임명을 기다리는 동안,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 A. D. 아브데예프는 지역 당조직에 대한 감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1922년 말 그는 당시 키르기스 자치공화국에 속해 있던 세미팔라틴스크현에 도착했다. 당시에는 카자흐스탄을 이렇게 불렀다.

현지 당 활동가들의 업무를 살펴본 아브데예프는 참담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중앙위원회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현 안에 볼로스트위원회**와 당 세포가 몇 개나 있는지 현위원회에는 자료가 없다. 내가 직접 자료를 가져온 세 개 군의 경우만 예외다.

내가 발견한 현위원회 상무단은 동지 두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명은 현위원회 책임서기 예고로프였다. 그는 현물세 업무와 소비에트 업무에 완전히 몰두하여 현위원회 аппара트에는 우연히 들를 뿐이었고, 당 업무는 하지 않았다.

두 번째 현위원은 현 국민교육부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현위원회에는 회의가 있을 때만 나왔다.

따라서 사실상 현위원회 상무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위원회에는 지도원도 없었다. 어떤 형태의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조직 전체는 식량감사관과 무당파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처분에 맡겨져 있었다.”[55]

** 볼로스트위원회: 볼로스트 단위 당위원회. *** 현 국민교육부: 현 단위 교육행정기관.

1923년 1월 28일 아브데예프의 보고서는 키르기스주 당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심의되었다.

전원회의는 세미팔라틴스크현 당위원회 책임서기 Ya. G. 예고로프를 직위에서 해임하고,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새로운 활동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아브데예프는 1923년 2월 16일 중앙위원회 서기국 회의에서 출장 결과를 보고했다.

키르기스 동지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중앙위원회 기록배치부는 일주일 안에 적절한 후임자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마 이때 아브데예프는 전년도 여름 크라스노콕샤이스크의 주 당협의회에서 만났던 정력적인 마리주위원회 서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예조프를 세미팔라틴스크 당조직의 지도자로 추천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미팔라틴스크 당조직은 마리 당조직보다 몇 배 컸으며 키르기스공화국의 현 당조직 가운데 가장 큰 조직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임명은 예조프에게 명백한 승진이었다.

1923년 3월 1일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예조프를 세미팔라틴스크로 보내고, 현지 당 현위원회 서기로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예조프는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계하기 위해 잠시 크라스노콕샤이스크에 들렀다.

3월 말 세미팔라틴스크에 도착했으며, 1923년 4월 2일 현위원회 상무단 결정으로 책임서기에 승인되었다.

남편과 함께 온 A. A. 티토바도 일자리를 얻었다. 그녀는 선전선동부 산하 출판분과를 맡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오래 일하지는 않았다. 1923년 가을 모스크바의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에서 공부하기 위해 떠났기 때문이다.

예조프가 가장 먼저 손댄 것은 당 аппара트였다.

그가 오기 전까지 현위원회와 각 부서의 업무는 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로 상급기관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집행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현위원회 각 부서는 장기적인 업무계획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 현위원회 상무국에서는 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소속 부서 책임자들의 보고를 정기적으로 청취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업무에 존재하는 잘못을 지적한 뒤, 발견된 결함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 방안을 정했다.

1923년 여름 말이 되자 예조프는 지역문제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

1923년 8월 7일 열린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세미팔라틴스크시 협의회에서 현의 발전 전망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당 활동가들 앞에 제시할 수 있었다.

신문 『스텝나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보고는 보고자가 제기한 문제들에 관해 현위원회의 견해가 아니라 개인적인 견해를 말한다는 단서로 시작되었다.

아마 그 때문인지 보고자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느끼며 협의회에 대단히 독창적인 생각들을 많이 제시했다.”[56]

예조프가 제시했다는 ‘대단히 독창적인 생각’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그는 지역의 지리, 기후, 토양 조건을 자세히 설명하고 회의장에 걸어놓은 지도와 도표를 보여주었다.

이어 건조한 기후에서는 농업이 결코 현 주민의 주요 생업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반대로 금, 철, 구리, 석탄 등 풍부한 광물자원은 이 지역의 산업발전에 유리한 전망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을 조금씩 긁어낼 것이 아니라 더 깊이 파서 땅속에 묻힌 보물을 캐내야 한다. 이것이 현 발전의 과제이자 구호다.”

한편 초지가 풍부한 조건을 고려하면 농업의 기초는 계속 축산업이어야 했다.

가죽, 양모, 지방과 같은 축산 원료는 가공산업 발전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예조프는 가까운 시일 안에 상급기관에 청원하여 우수한 제혁공장들을 세미팔라틴스크현으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생산비를 낮추고 현 전체의 경제적 성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생각들을 ‘대단히 독창적’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이 지역의 경제조건은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농업은 언제나 축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막대한 광물자원이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광산이 멀리 떨어져 있고 도로망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현 전체와 특히 광산 지역의 인구가 부족하여 개발이 억제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예조프의 연설은 그가 이 무렵 지역 상황을 파악했고, 사정을 이해한 상태에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는 증거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923년 9월 11일부터 12일까지 열린 당 현위원회 전원회의는 예조프가 현지 당조직 책임서기로 선출된 사실을 공식화했다.

현위원회 기관지 『코무니스트』는 전원회의에서 예조프가 한 보고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조프 동지는 우리에게 관행처럼 굳어진 보고 구성방식에서 벗어났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방식은 현 단위 대회와 협의회에서 지배적이다.

상무국이 몇 차례 회의를 열었고, 그 회의에서 몇 건의 문제를 처리했으며, 그 문제가 성격에 따라 어떻게 구분되는지, 사무국이 수신·발신 문서를 몇 건 처리했는지 등의 전통적인 숫자를 제시하지 않았다.

업무가 취약한 부분을 ‘어려운 객관적 조건’ 탓으로 돌리는 상투적인 설명도 하지 않았다.

대신 보고는 현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여주었고, 현이 직면한 과제를 공정하게 평가했다.

또한 현위원회 상무국이 상황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상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했으며 그에 맞는 실천조치를 얼마나 올바르게 적용했는지를 역시 공정하게 보여주었다.”[57]

전원회의는 예조프가 부임한 뒤 시작된 현지 당조직 활동의 변화를 지지했다.

채택된 결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다.

“전원회의는 현위원회 상무국의 정치노선을 전적으로 승인한다.

특히 당조직의 결속력이 강화된 점, 최근까지 존재하던 유격대식 편향이 단호하게 극복된 점, 당과 소비에트 업무 전반이 활기를 되찾은 점, 그리고 계획적인 업무로 전환하여 전체적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둔 점을 특별한 만족과 함께 지적한다……”[58]

예조프는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업무는 순조롭게 돌아갔고, 긴장과 소모가 심했던 마리 자치주의 갈등을 겪은 뒤 이곳에서는 마음의 긴장을 조금 풀고 쉴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좋았지만, 이제 자신이 맡은 상당히 높은 직책을 수행하기에는 기존의 지식만으로 분명히 부족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었다.

당시 작성한 어느 신상기록의 “어떤 주제로 강의할 수 있는가?”라는 항목에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공산당과 혁명운동의 역사, 정치경제학, 철학.”[59]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학력과 준비수준으로 계속 일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24년 1월 제13차 당협의회 대표로 모스크바에 간 예조프는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V. M. 몰로토프를 만났다.

그는 교육을 계속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얼마 전 공산주의아카데미에 지도급 당 활동가들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마르크스주의 과정이 개설되었다.

예조프는 이것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협의회가 끝난 지 불과 며칠 뒤 당은 심각한 상실을 겪었다. V. I. 레닌이 사망한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과 책임을 인식한 예조프는 몰로토프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 협의회에서 동지와 이야기하면서 나의 전근 가능성과 공부하고 싶다는 희망을 언급했습니다.

이 문제를 정상적인 공식절차에 따라 제기한 것은 아니고 평범한 동지 간의 대화에서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다음 사항을 말씀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당의 전반적인 상황, 무엇보다도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죽음을 고려하면, 나의 전근이나 더구나 학업과 같은 개인적 희망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앙위원회가 변방에 보낼 활동가를 찾는 데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완전히 명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몰로토프 동지, 지금은 모든 당원이 러시아공산당의 방어가 취약한 진지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키르기스공화국을 여전히 방어가 취약한 진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동지께서도 우리의 대화를 고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60]

키르기스공화국에서 가장 큰 현 당조직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예조프의 활동은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다.

키르기스주위원회는 그를 지원했고, 예조프를 현 단위 업무에서 키르기스공화국 전체의 당 업무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도 점차 형성되었다.

당시 키르기스주위원회 책임서기 직무대행이던 G. M. 두나예프가 1923년 9월 14일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서한도 이를 보여준다.

그는 여러 지역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세미팔라틴스크현 당위원회 서기 예조프 동지는 분명히 자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전임 서기 예고로프 동지의 정책으로 완전히 해체된 당조직의 모든 건전한 세력을 자기 주위에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조직을 완전히 건전화하고 업무를 확립하기 위해, 예조프 동지는 늦어도 1924년 봄까지는 세미팔라틴스크현에 반드시 남겨두어야 한다.

봄에 열리는 정기 당협의회에서는 그를 주위원회 구성원으로 발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61]

이 밖에도 키르기스주위원회 지도부는 예조프가 인사를 다루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키르기스공화국의 당조직은 서로 대립하는 온갖 분파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예조프는 인사정책에서 특정 분파에 우위를 주지 않으려 했다.

예를 들어 군 지역의 지도직 후보를 선정할 때, 군 소비에트 집행위원장과 당위원회 서기 자리를 서로 다른 분파의 대표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

서로 싸우느라 바쁜 지역 지도자들은 현 지도부에 맞서 단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경쟁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받기 위해 현 지도부에 계속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직능력은 공화국 차원에서도 유용했다.

그곳에서도 ‘분할하여 통치하는’ 방법을 익힌 활동가에 대한 수요는 결코 적지 않았다.

1924년 5월 11일부터 16일까지 당시 공화국 수도였던 오렌부르크에서 제4차 전키르기스 당협의회가 열렸다.

5월 16일 열린 새 주위원회 첫 전원회의에서 예조프는 상무단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업무를 분담하는 과정에서는 조직부를 맡았다.

세미팔라틴스크에서는 이 소식에 강하게 반발했다.

5월 27일 현위원회 상무단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예조프 동지가 키르기스주위원회의 상근 аппара트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어 소환이 불가피해졌으므로, 중앙위원회에 예조프 동지를 세미팔라틴스크현 당위원회 서기로 계속 남겨줄 것을 요청한다.”[62]

그러나 이미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예조프는 시작한 업무 일부를 끝내기 위해 한동안 세미팔라틴스크에 남아 있었지만, 중앙위원회가 지역 동지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따라서 세미팔라틴스크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작별을 받아들이는 일뿐이었다.

그들은 작별의 표시로 전임 지도자에게 크림반도의 휴양지 가운데 한 곳에서 치료받을 권리가 포함된 한 달간의 휴가를 제공했다.

예조프를 보내는 분위기는 따뜻했다.

언론기관에 제공한 지원과 도움에 감사하여 현 기자국은 예조프를 신문 『스텝나야 프라우다』의 명예기자로 등록하고 명예 기자증을 수여하기로 했다.

현 지방경제부 노동자·직원 회의에서는 예조프가 세미팔라틴스크에 머무는 동안 지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며, 시 발전소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불과 1년 전 이 지역 당조직의 지도자가 된 떠나는 서기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다른 사례들도 있었다.

1924년 8월 예조프는 휴가를 떠났다.

9월 초 휴가에서 돌아온 그는 마침내 키르기스주위원회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즉시 당시 공화국 당조직 내부의 여러 분파가 서로 벌이고 있던 투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7. 분파투쟁의 한복판에서

카자흐스탄, 즉 1925년 4월부터 키르기스공화국이 이렇게 불리게 되는 지역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비교적 독립적인 세 지역, 즉 세 개의 주즈로 나뉘었다.

대주즈는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카자흐 민족의 역사적 중심지였다.

대주즈에 속하는 시르다리야현과 제티수현은 당시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민족·영토 분할이 예정되면서, 두 현을 키르기스공화국에 병합하는 문제가 1924년 내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과거 서로 다른 주즈의 봉건집단 사이에 존재했던 경쟁은 혁명 이후에도 지역적 대립이라는 형태로 새로운 권력 내부에 그대로 옮겨졌다.

카자흐스탄 각 지역 출신자들이 당과 소비에트 기관의 지도직을 차지한 뒤, 주로 고향 사람들로 자기 주변을 채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지 당조직은 서로 대립하는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예조프가 키르기스주위원회 аппара트에 들어간 1924년 여름, 주요 투쟁은 두 분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카자흐스탄 서부 여러 현 출신자를 결집한 서부 분파, 다른 하나는 동부 분파였다.

서부 분파의 지도자는 공화국 소비에트대회 중앙집행위원장 S. 멘데셰프였다.

멘데셰프는 여러 해 동안 권력을 유지하면서 많은 지지자를 잃었다.

사람들은 그의 활동뿐 아니라 생활방식에도 불만을 품었다.

중앙위원회에 보낸 어느 서한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음주와 연회, 그것도 종종 무당파나 심지어 이질적인 인물들까지 참여한 음주와 연회.”[63]

이런 조건에서 멘데셰프는 계속 러시아인, 당시 표현으로는 당조직의 ‘유럽인’ 구성원들에게서 지지를 구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국제주의자이며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요소’에 단호하게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들을 설득하려 했다.

당 주위원회를 장악한 러시아인 지도부는 멘데셰프의 사상적 신념과 충성심을 특별히 신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이던 S. 세이풀린이 이끄는 반대 분파의 공격으로부터 멘데셰프를 가능한 한 보호하려 했다.

세이풀린과 그의 지지자들은 멘데셰프와 달리 경제적으로 더 발전한 카자흐스탄 동부 여러 현을 대표했다.

이 지역에서는 민족 지식인이 사회생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토착주민의 특성과 전통을 더 많이 고려하려 했다.

계급적 모순을 인위적으로 격화하는 것에 반대했고, 공화국 당 지도기관을 ‘유럽인들’이 독점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이 때문에 멘데셰프 분파와 달리 동부 분파는 키르기스주위원회의 러시아인 지도부로부터 호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동부 분파는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경쟁자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1924년 5월, 현재 상황에 불만을 품은 동부 분파의 저명인사 20명은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서한을 보냈다.

그들은 멘데셰프와 그를 지지하는 당 주위원회의 러시아인 지도자 다섯 명을 카자흐스탄에서 소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자신들을 공화국에서 전출시켜달라고 했다.

1924년 6월 13일 이 문제는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조직국 회의에서 심의되었다.

결정문은 중앙위원회에 호소문을 보낸 공산당원들이 당원과 무당파 대중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강화하는 대신 분파투쟁에 관심을 쏟고 있으며, 이는 공화국 당조직의 업무를 방해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키르기스주위원회에는 기존 당내 분파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특히 공화국 중앙에 있는 카자흐인 지도급 활동가 일부를 지방, 무엇보다 노동자 지역으로 보내고, 현지에서 새로운 활동가들을 발탁하라고 제안했다.

조직국의 지시를 받은 키르기스주위원회는 동부 분파의 주요 인물들을 중요하지 않은 업무구역으로 이동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바로 이때 주위원회 지도부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기존 책임서기 G. A. 코로스텔료프가 소환되었다.

후임으로 페름에서 일하던 V. I. 나네이슈빌리가 부임했다.

그는 외부에서 온 사람으로 어느 분파에도 특별한 선호가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뒤 두 분파 모두와 동시에 투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둘째, 1924년 9월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시르다리야주와 제티수주가 카자흐스탄에 병합되었다.

이에 따라 카자흐 당조직의 규모가 3분의 1 이상 증가했다.

새로 편입된 두 지역의 대표 세 명이 주위원회 상무단에 들어오면서 세력관계도 즉시 변했다.

앞서 말했듯이 새로 편입된 남부 지역은 카자흐스탄의 역사적 핵심지였다.

이 지역 공산당원들의 공인된 지도자는 S. 호자노프였다.

그는 직전까지 투르키스탄공화국 농업인민위원으로 일했다.

호자노프가 이끄는 남부 분파는 즉시 카자흐 당조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더구나 예정된 분파척결은 남부 분파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잠재적 경쟁자들만 약화시킬 예정이었다.

몇 달 뒤 키르기스주위원회 제1서기 V. I. 나네이슈빌리는 호자노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서부와 동부 두 분파의 관계는 호자노프 동지의 등장으로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그는 키르기스인들 가운데 아마 가장 능력 있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파렴치하고 가장 냉소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민족주의적 편향이 그에게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그는 시르다리야주와 제티수주가 키르기스공화국의 핵심이며,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키르기스공화국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64]

예조프가 9월 초 휴가에서 돌아와 주위원회 서기국에 들어가 업무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9월 16일 예조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위원회는 6월에 내려진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조직국 결정의 새로운 실행계획을 준비했다.

기존 계획처럼 동부 분파만이 아니라 서부 분파까지 약화해야 한다는 점을 반영한 계획이었다.

1924년 11월 4일 예조프는 위원회가 마련한 카자흐 지도급 활동가들의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전출계획과, 비게 될 직책을 채울 지역 활동가 명단을 제출했다.

위원회의 제안은 승인되었으며, 활동을 계속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멘데셰프는 훗날 나네이슈빌리와 예조프의 계획이 다음과 같이 실행되었다고 불평했다.

“어지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실행되어 많은 사람이 휴가나 출장 중에 인사변동을 맞았고, 이미 끝난 일 앞에 놓이게 되었다……

경험과 능력을 갖춘 활동가들은 직장에서 제거되어 사회생활의 바깥으로 내던져졌다.

이제 실업자가 된 이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기 위해, 업무상 필요성이나 새 업무에 적합한지조차 전혀 고려하지 않고 처음 걸리는 자리마다 마구 밀어 넣고 있다.”[65]

서부와 동부 분파가 약화될수록 호자노프가 이끄는 남부 분파는 더욱 강해졌다.

이는 변경당위원회 지도부의 불안을 점점 키웠다.

더구나 호자노프는 자신이 ‘공화국 제1의 키르기스인’이 되어야 한다는 야심을 숨기지도 않았다.

인사문제를 담당하던 예조프는 남부 분파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1925년 3월 말 호자노프는 자신을 키르기스 변경당위원회 제2서기로 임명하는 데 성공했다.

예조프도 같은 시기에 제3서기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남부 분파의 추가적인 팽창은 저지되었다.

화가 난 호자노프는 4월 초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나네이슈빌리 동지는 오랜 당원이지만, 현재 지위에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지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도, 아무것도 지도할 능력이 없고, 오히려 예조프 동지가 그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예조프 동지를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로 임명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그가 일을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책임도 지게 될 것입니다.”[66]

또 다른 불만세력인 S. 멘데셰프도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비슷한 생각을 밝혔다.

“나네이슈빌리는 аппара트를 지도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조프 동지는 키르기스인 활동가들 사이의 투쟁을 격화하는 방향으로 명백히 잘못된 노선을 취했으며, 그 노선은 선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상무국의 다른 러시아인 위원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67]

멘데셰프는 이로부터 나네이슈빌리와 예조프 모두를 공화국에서 소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호자노프가 예조프에 관해 한 냉소적인 추천도, 멘데셰프의 진지한 요구도 중앙위원회에서는 무시되었다.

예조프를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로 임명하기에는 어쨌든 너무 이른 시기였다.

이 노멘클라투라 단계는 더 많은 공적과 권위를 쌓은 당원들을 위한 자리였다.

그렇다고 예조프를 카자흐스탄에서 제거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현지 당 지도자인 나네이슈빌리에게는 실제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1925년 7월 31일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나네이슈빌리를 공화국에서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후임으로는 당시 사마라현 당위원회 서기였던 F. I. 골로쇼킨을 카자흐스탄에 보내기로 했다.

골로쇼킨은 저명한 당 활동가였으며 1903년부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해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1918년 차르 일가의 총살에 관여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었다.

1925년 8월 초 모스크바에 와 있던 예조프는 예정된 인사변동 소식을 아마 그때 들었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다.

예조프는 자신이 나네이슈빌리의 후임이 될 것으로 기대하다가 중앙위원회의 선택에 실망했을 수도 있다.

또는 골로쇼킨 아래에서는 필연적으로 이인자 역할에 머물게 되리라는 점을 단순히 깨달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1925년 8월 9일 공산주의아카데미 마르크스주의 과정에 자신을 입학시켜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1924년 1월에도 V. M. 몰로토프에게 비슷한 요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레닌의 죽음 때문에 당시에는 그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계획을 실행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 없었다.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 골로쇼킨의 부임을 기다리면서 예조프는 공화국 당조직의 상황을 분석한 편지를 몰로토프에게 작성했다.

그는 S. 호자노프를 카자흐스탄에서 소환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이 결정을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문제를 성급하게 처리하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었다.

멘데셰프 분파는 이때 사실상 이미 붕괴한 상태였다.

호자노프가 떠나면 그의 분파도 필연적으로 입지를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변경당위원회 지도부는 어느 정도 활동능력을 유지한 유일한 세력인 동부 분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부 분파도 다른 두 분파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더구나 동부 분파만을 기반으로 삼는다면 다가오는 공화국 당협의회를 앞두고 배제된 두 분파의 대표들이 결합한 강력한 반대세력이 출현할 수 있었다.

현재 상황에서는 이미 실질적인 권한을 잃었지만 형식적으로 변경당위원회 서기직을 유지하고 있는 호자노프가 최소한 강제된 형태로나마 충성을 지켜야 했다.

또 자기 사람들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예조프는 중앙위원회가 그래도 당협의회 전에 호자노프를 소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를 대비해, 그 결정의 후과를 줄일 수 있는 여러 조치도 제안했다.

편지 끝부분에서 예조프는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도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제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저는 키르기스공화국에서 이미 2년 반 동안 변방 민족지역의 극도로 어려운 조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전에 타타르공화국에서 2년, 마리 자치주에서 1년 동안 일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환경을 바꿔달라고 요청할 어느 정도의 도덕적 권리가 제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골로쇼킨 동지가 부임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저는 공산주의아카데미에 보내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제게 가장 큰 부탁은 이것을 방해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업무를 하면서 체계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아카데미에서 활동가를 양성하려는 중앙위원회의 기대를 정당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 모든 힘을 다하겠습니다.

어떤 이유로 중앙위원회가 저를 아카데미에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최소한 1년 정도는 모스크바의 다른 환경에서 일하면서 제 능력을 조금 더 보충하고 싶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중앙위원회 аппара트의 조직배치 업무 같은 일을 맡는 것입니다……”[68]

몰로토프는 예조프가 이론적 수준을 높이려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1925년 10월 말 열린 중앙위원회 입학위원회 회의에서 예조프는 마르크스주의 과정에 등록되었다.

그의 동기생 가운데는 몰로토프의 아내 P. S. 젬추지나와 스탈린의 보좌관 L. Z. 메흘리스가 있었다.

이 밖에도 당시 이미 당에서 유명했거나 이후 유명해지는 인물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수업은 이듬해 1월 중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동안 예조프는 카자흐스탄에 남아 새로 부임한 골로쇼킨이 복잡한 인사 상황을 파악하도록 도왔다.

1925년 12월 초 공화국 당협의회가 열렸다.

같은 달 말에는 제14차 당대회가 열렸고 예조프도 대표로 선출되었다.

당대회에서 돌아온 그는 가장 긴급한 업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1926년 1월 25일 공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예조프가 남은 생애 14년 전체를 보내게 될 도시였다.

8. 부부장

공산주의아카데미 부설 마르크스주의 과정은 1921년, “10월혁명 이래 책임 있는 실무를 떠맡아온 노동자 출신 당원들에게 축적된 경험을 체계화하고 그 아래에 이론적 토대를 마련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개설되었다.[69]

예조프가 입학할 당시 교육기간은 1년 반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공부하는 동안 과정이 2년으로 연장되었다.

수강생들의 학력 수준을 고려하여, 그해 입학생의 79퍼센트가 초등교육만 받은 상태였으므로 교육과정에는 일반교양 과목도 포함되었다. 러시아어, 수학, 즉 분수 계산과 비례식·백분율 계산, 그리고 자연과학의 기초 등이었다.

그러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전문과목이었다.

첫해에는 정치경제학, 러시아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의 역사, 당사를 공부했다. 둘째 해에는 변증법적 유물론, 레닌주의의 기초, 세계경제, 소비에트 경제의 기초와 사회주의 건설의 주요 문제를 배웠다.

이 밖에도 세계혁명운동사, 통계학 일반이론 등의 강의가 제공되었다.

예조프가 마르크스주의 학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습득했는지를 보여주는 신뢰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A. A. 파데예프는 자신의 미출간 원고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빈곤과 투쟁의 아들」에서 이 시기의 예조프를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이론 공부에서도 실무에서와 같은 자질을 보였다. 어떤 문제든 전면적으로,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연구했다.

그와 함께 공부한 동지들은 예조프가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에 관한 보고서를 준비하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 보고서는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박식함에서 탁월했다.”[70]

이 주장은 별도의 논평 없이 남겨두기로 하자.

다만 몇몇 자료를 보면 예조프는 힘들게 공부할 줄 알았을 뿐 아니라,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그에 못지않게 격렬하게 쉬는 법도 알았던 듯하다.

1950년대 말 공산주의아카데미의 전 관리책임자 A. L. 도로고프는 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제법 규칙적으로 술을 퍼마셨으며, 그러고 나면 종종 자신의 경비실에서 잠을 잤다고 회상했다.[71]

물론 이런 증언을 전적으로 믿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일이 실제로 어느 정도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어쨌든 이는 시간상 예조프의 독주 취향을 언급한 최초의 증언이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자면 그는 이 취향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유전적 영향도 있었을지 모른다. 앞에서 말했듯 그의 아버지도 술을 대단히 좋아했다.

카자흐스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온 예조프는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에서 계속 공부하고 있던 아내와 다시 합쳤다.

그는 여기에 더해 어머니, 아버지는 1919년에 사망했다,와 누나 예브도키야의 자녀인 두 조카도 모스크바로 데려왔다. 열다섯 살 류드밀라와 열세 살 아나톨리였다.*

그들은 여전히 트베리현 비시니볼로초크군에 살고 있었으며, 여러 해 동안 예조프에게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내전에서 죽었다고 생각하여 전사한 적군 병사의 유족 자격으로 연금까지 받아냈다.

이제 모든 오해는 무사히 풀렸고, 20년 만에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과정의 수강생들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여름에는 방학을 보냈다.

1926년 예조프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젤레즈노보츠크의 온천 휴양지에서 방학을 보냈다.

1927년에는 폐결핵 환자 치료로 유명한 바시키리야의 샤프라노보 쿠미스 요양원으로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방된 치료과정을 끝까지 이수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 과정 수강생들을 관찰하면서 졸업 후 근무지를 선정하던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는 이 무렵 이미 예조프를 교육이 끝나는 대로 자기 부서로 데려올 계획을 세웠던 듯하다. 예조프 자신도 과거에 그런 희망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직배치부만이 예조프를 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분파투쟁과 그에 따르는 분쟁에 지친 타타르주 당위원회 제1서기 M. M. 하타예비치는 중앙위원회 서기국에 자신의 후임자를 찾아달라고 요청하면서, 후임으로 바로 예조프를 원한다고 밝혔다.

타타르 당조직은 6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예조프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다.

아마 누군가가 예조프와 함께 일한 적이 전혀 없던 하타예비치에게, 타타르 공산당원들이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예조프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조직배치부는 아마 하타예비치의 계획을 알게 되었고, 그 구상이 지도부의 지지를 얻기 전에 예조프를 마르크스주의 과정에서 조기 소환하여 부서에 채용하기로 했다.

1927년 7월 5일 조직배치부 부부장 N. A. 보고몰로프는 샤프라노보에 있는 예조프에게 전보를 보냈다. 모스크바로 돌아올 날짜와 조직배치부장 보좌관직을 맡는 데 동의하는지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답변이 오지 않자, 당시 예조프는 우파의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보고몰로프는 일주일 뒤 다시 전보를 보내 제안된 임명에 동의하는지 긴급히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7월 13일 요양원으로 돌아온 예조프는 보고몰로프에게 모스크바로 출발한다고 알렸다.

같은 날 중앙위원회 서기들을 대상으로 한 서면 표결에서 예조프를 조직배치부장 보좌관으로 승인하는 문제가 긍정적으로 결정되었다.

7월 15일 이 결정은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정식 결의로 확정되었다.

따라서 이틀 뒤 예조프가 마침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당 중앙위원회의 가장 강력한 부서 가운데 하나에 속한 정식 직원이었다.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구성부서인 조직배치부는 두 개의 주요 하위부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직과는 당 조직업무에 관한 회람, 규정, 지침을 작성하고, 지역 당조직을 조사·지도하며, 그 경험을 연구하고 종합하는 등의 업무를 맡았다.

등록과라고도, 배치과라고도 불린 두 번째 부서는 중앙위원회 노멘클라투라에 포함된 당 활동가의 등록, 선발, 배치와 전근을 담당했다.

또한 지역 당조직과 중앙 국가기관의 유사 부서들을 전반적으로 지도하고, 배치·등록 업무와 관련하여 중앙위원회 서기국과 조직국이 내리는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했다.

예조프가 배치된 곳은 바로 등록배치과였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표현한 바에 따르면 “가장 뒤엉킨” 부문을 맡았다. 출판사, 문화기관, 자발적 사회단체, 협동조합 등을 관할하는 부문이었다.

이곳에서 일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많은 조직과 기관이 자체 등록배치부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예조프의 부문은 최고위층뿐 아니라 중간급 간부의 선발과 배치까지 직접 맡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의 인사배치를 아무런 통제 없이 방치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에 성공적으로 맞서기 위해 예조프는 인사배치 문제에 관한 당의 지침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원전’으로 돌아가 이 문제를 다룬 레닌의 저작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했다.

이 무렵 예조프는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출판된 최초의 레닌 다권 저작집 20권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이미 읽은 상태였다.

그는 의무감에서라기보다 실제로 좋아해서 이를 읽었다.

초임 조직배치부 직원의 이러한 열성은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장 I. M. 모스크빈은 어느 회의에서 예조프를 모든 직원이 본받아야 할 사례로 내세웠다.

예조프와 모스크빈의 관계는 상당히 동지적인 것으로 형성되었다.

다만 초기의 예조프는 새로운 환경에서 완전히 자신감을 갖지는 못했던 듯하다.

적어도 모스크빈의 집에서 그를 만났던 L. E. 라즈곤의 묘사 속 예조프는 그렇게 보인다.

“예조프는…… 작고 마른 사람이었다. 언제나 구겨진 값싼 양복과 푸른 새틴제 러시아식 셔츠를 입고 있었다.

식탁에서는 조용하고 말이 적었으며 약간 수줍어했다. 술도 조금만 마셨다.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조용하고 과묵하며 수줍은 미소를 띤 그런 예조프가 모스크빈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조프는 한때 결핵 환자였고,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모스크빈의 아내,는 그의 건강을 몹시 걱정했다.

그녀는 예조프를 돌보고 주변을 분주히 오가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참새 씨, 이것 좀 드세요. 더 많이 먹어야 해요, 참새 씨.’”[72]

예조프가 조직배치부에 들어온 시기는 부서 개편 결정과 겹쳤다.

실무경험은 기존 형태의 조직배치부가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강력한 부서였지만 조직배치부는 중앙위원회 서기국을 구성하는 여러 부서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부장 I. M. 모스크빈도 당에서 알려진 인물이기는 했지만 노멘클라투라 사다리에서는 그다지 높이 올라가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불과했다.

물론 1927년 12월에는 중앙위원회 정위원이 되고 조직국 위원과 중앙위원회 서기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된다.

한편 조직배치부가 감독해야 하는 여러 기관의 수장은 중앙위원회 최고지도기관인 정치국의 위원이나 후보위원이었다.

따라서 그런 기관의 업무를 조사하거나 지도부의 보고를 듣고, 노동자·농민감찰원 또는 중앙통제위원회에 해당 기관 직원들의 자료를 요구하는 문제 등이 제기되면 이를 실행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반면 스탈린과 몰로토프 등이 참여한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어떤 지도자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조직배치부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결국 서기국이 나서야 했다.

마침내 중앙위원회 서기국이 가끔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조직배치부 소관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조직배치부는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 S. V. 코시오르뿐 아니라, 심의하는 문제의 성격에 따라 다른 서기들에게도 직접 제안할 수 있게 되었다.

조직배치부에서 결정을 준비하는 절차도 단순화하기로 했다.

예전에는 인사문제를 먼저 부장 보좌관들, 즉 예조프와 동료들이 검토했다.

그다음 부부장들과 합의하고, 부부장들은 부장과, 부장은 S. V. 코시오르와, 코시오르는 해당 분야를 담당하는 중앙위원회 서기와 합의했다.

이후 합의된 문제는 다시 아래로 돌아와 중앙위원회 조직국과 서기국 심의를 위한 안건으로 준비되었다.

이 순환과정 전체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의사결정 기술을 효율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조직배치부장 보좌관 전원을 부부장으로 승격시키고, 각 기관을 담당하는 중앙위원회 서기에게 직접 접근할 권한을 부여하기로 했다.

1927년 11월 중순까지 예정된 개편이 완료되었다.

예조프는 부장 보좌관에서 조직배치부 부부장이 되었다.

조직개편과 함께 일부 인사교체도 이루어졌다.

그 결과 예조프는 지역 당위원회, 노동조합 기관, 최고재판소, 검찰, OGPU, 군사기관, 노동인민위원부와 법무인민위원부 및 몇몇 다른 기관을 감독하는 부문을 맡게 되었다.

예조프는 이 기관들에 관한 중앙위원회의 인사결정안을 작성하고, 결정의 집행을 보장해야 했다.

또 아직 등록배치부서가 만들어지는 단계에 있던 기관에서는 그 업무를 확립하고, 당원과 노동자 출신 비중을 강화하라는 중앙위원회 지침의 이행을 감독해야 했다.

문제는 우연히도 이 부문의 직원들이 그다지 유능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예조프가 거의 혼자서 모든 업무를 짊어져야 했다.

그럼에도 첫 몇 달부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예조프는 1928년 초 조직배치부의 한 회의에서 이를 언급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등록배치 업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인민위원부들이 여럿 있다.

다만 법무인민위원부*는 예외다. 그곳에서는 업무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고, 합의부 위원 전원을 이 일에 참여시킬 수 있었다……

혁명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법무인민위원부 합의부에서 간부문제가 의제로 올라갔고, 그에 맞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우리가 직접 결의안을 작성했더라도 그보다 더 강경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매질했다. ‘여기서는 우리가 놓쳤고, 저기서는 또 무엇을 놓쳤다’는 식으로 자기 잘못을 직접 지적했다.”[73]

이후 예조프는 자신이 관할하는 다른 기관들에서도 등록·배치 업무가 제대로 자리 잡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1928년 중반 조직배치부에는 새로운 감독자가 생겼다. 소련 정치무대에서 떠오르던 별, L. M. 카가노비치였다.

7월 4일부터 12일까지 열린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그는 중앙위원회 서기와 조직국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우크라이나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직무에서는 해임되었다. 하리코프에서 비게 된 그의 자리는 조직배치부의 전임 감독자 S. V. 코시오르가 차지했다.

카가노비치는 1924년부터 1925년까지 이미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낸 바 있었다. 이후 스탈린은 그를 우크라이나로 보내 현지 당조직을 강화하게 했다. 지도자의 견해로는 우크라이나 당조직이 반대파 분파들과 충분히 정력적으로 싸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가노비치는 맡겨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다만 그가 사용한 노골적인 행정명령식 방법에 불만을 품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원의 대다수를 적으로 돌리면서 이루어낸 성공이었다.

이제 모스크바에는 다시 카가노비치가 필요했다.

스탈린이 구상한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는 일부 당 활동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스탈린이 ‘우익편향파’라고 이름 붙인 반대자들은 정치국 내부에도 있었고, N. I. 부하린, A. I. 리코프, M. P. 톰스키가 그 대표였다, 지역 당조직에도 존재했다. 특히 수도의 당조직이 강한 반대 성향을 보였다.

이런 조건에서 조직·당 업무와 간부의 등록, 선발, 배치를 담당하는 중앙위원회 서기 자리에는 100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사람뿐 아니라 강경한 행정가가 필요했다. 카가노비치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덧붙이자면 카가노비치가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된 바로 그 1928년 7월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훗날 악명 높아질 이론의 윤곽을 처음으로 당 활동가들에게 제시했다. 사회주의로 전진할수록 계급투쟁이 더욱 격화된다는 이론이었다.

카가노비치는 이 발상을 거의 가장 먼저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조직배치부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위원회 서기로서 카가노비치는 업무에 착수하자마자 당연히 예조프와 알게 되었다. 예조프의 부문이 수행하던 지역 당조직 감독은 카가노비치 자신의 직접적인 소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우익’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M. P. 톰스키를 전연방노동조합중앙평의회 의장직에서 해임하는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특히 가까워졌다. 톰스키의 해임은 1929년 5월에 이루어졌다. 이후 몇 달 동안 카가노비치가 이 최고 노동조합기관의 지도자까지 겸임하면서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당시 예조프는 여전히 일상적인 조직배치부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지역 당위원회들을 감독하고, 노동조합 대회의 보고서와 결의안 초안을 편집하며, 국가기관·당기관·노동조합기관의 공석에 배치할 후보자를 준비하고, 국민경제 각 부문의 지도간부 재교육계획을 작성했다.

검토하는 문제 가운데 일부는 비교적 단순하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 어떤 문제는 당기관이 채택한 결정을 해당 기관이 실제로 집행하도록 만들기까지 여러 차례 되돌아가야 했다.

그 한 사례가 소련 노동인민위원부의 인사숙청이었다.

샤흐티 재판, 1928년 5월 18일부터 7월 5일까지,은 북캅카스 변경 샤흐티 지역에 석탄산업 파괴공작을 벌이는 반혁명조직이 존재했다고 ‘밝혀낸’ 재판이었다.

이 재판 이후 모든 행정기관에서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소비에트 권력에 충성하는지가 의심되는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해고하기 시작했다.

예조프의 부문이 관할하던 소련 노동인민위원부와 러시아공화국 노동인민위원부에서도 해고 대상자 명단이 작성되었다.

두 인민위원부의 인사부서는 해당 기관에 배치된 OGPU 대표들과 함께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조직배치부에 제출했다.

1928년 12월 초 예조프는 제출된 문서를 검토하고 작성자들과 만난 뒤, 제안된 조치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다.

몇몇 대상자는 과거 귀족이나 백군 장교였다. 다른 사람들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 또는 당내 반대파 참가자였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무당파였음에도 당원을 배치하고 싶은 직책을 차지하고 있었다.

1929년 1월 7일 이 문제는 중앙위원회 조직국에서 심의되었다.

채택된 결정은 소련과 러시아공화국 노동인민위원부에 한 달 안으로 두 기관의 중앙 기구에서 32명을 해고하도록 요구했다. 해고 대상자의 개인별 명단도 같은 자리에서 승인되었다.

최고 당기관 가운데 하나로부터 명령을 받은 기관은 무엇을 해야 할까?

가능한 한 빨리 모든 지시를 집행하고, 수행한 업무를 보고해야 한다. 처음에는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는 듯했다.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예조프 동지에게 1929년 2월 28일

소련 노동인민위원부는 올해 1월 7일 자 조직국 결정 가운데 직원 해임 부분을 집행했음을 알립니다.

여러 직책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 각 부서의 업무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결정은 집행되었습니다.

특히 중앙사회보험국*에서는 법률가가 없어 여러 법률안의 처리가 지연되고 있으며, 예정된 전연방 보험대회의 준비작업에도 착수할 수 없습니다……

소련 노동 부인민위원 톨스토퍄토프[74]

편지의 내용을 보면 노동인민위원부의 책임자는 자기 기관의 인사담당자들과 그곳에 배속된 체키스트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결과에 그리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여기서 볼셰비키답지 않은 하소연조의 문장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예조프에게 중요한 것은 일이 끝났고 결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곧 이 문제를 의제에서 내려놓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29년 3월 23일 같은 I. A. 톨스토퍄토프가 예조프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그는 몇몇 공석이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고 알리면서, 해임된 전문가들을 대신해 자기 기관으로 데려오고 싶은 적색교수양성소와 소비에트·상업기관 종사자 및 의료노동자 노동조합 중앙위원회 소속 전문가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동시에 동등한 자격을 갖춘 후임자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직원 두 명의 해임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시 보름이 지났다.

1929년 4월 9일 소련 노동인민위원부 지도부는 중앙위원회 조직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해고 대상자 가운데 이제는 네 명을 직장에 남겨달라고 청원했다. 또 한 명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절한 자격을 갖춘 직원이 없다는 똑같은 구실로 해임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안은 1929년 6월에도, 8월에도 계속 조직배치부의 감독 아래 남아 있었다.

예조프는 훨씬 더 중요한 다른 문제를 차분하게 처리하는 대신, 이미 오래전에 해결된 듯했던 같은 사안으로 몇 번이고 되돌아가야 했다.

이런 사례는 한두 건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업무를 지연시키고 뒤엉키게 했다. 계속 겹쳐 쌓이는 문제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손을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당시 승인된 중앙위원회 조직국 업무계획에는 다음과 같은 안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농업부문 제1차 5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농업 종사 간부의 구성을 점검하고, 간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하는 문제.”

이 문제를 사전 검토하기 위해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조직배치부장 I. M. 모스크빈이 위원장을 맡았고 예조프가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예조프는 이전에도 농촌의 인사문제를 연구하는 업무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1929년 초 러시아공화국 농업인민위원부의 중앙 및 지역조직에서 당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산당원 집단을 파견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예조프는 관련 위원회의 업무에 참여했다.

그는 위원장 L. M. 카가노비치에게 자신의 견해를 보고했다.

한 보고서에서 예조프는 거의 모든 대형 주 토지행정국을 당 경력이 매우 짧은 공산당원들이 이끌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과거 사회혁명당에 속해 있었다고 알렸다.

이 기관들의 기구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문을 전 사회혁명당원 출신 공산당원이나 무당파가 차지하고 있었다.

관구 단위 토지행정국에 이르면 아예 과거 농민 출신자들이 지도하고 있었으며, 그 대부분은 쿨라크 출신이었다.

예조프는 이 모든 사정이 토지기관 정책에서 계급노선의 명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계급노선이 대규모로 왜곡되고 있으며, 일부 경우에는 농촌에서 당이 추진하는 정책에 직접 반대하는 결과까지 나타난다는 것이었다.[75]

또 다른 위원회는 몇 달 동안 활동하도록 계획되었다.

이 위원회는 농업의 모든 부문에서 간부 상황을 분석하고, 농업생산의 특정 영역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의 실태를 조사했다.

전문가 집단은 지역으로 파견되어 구체적인 지방의 인사문제를 연구했다.

위원회는 기존 문제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안도 마련했다. 예조프는 이 업무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느 위원회 회의에서 지도간부 가운데 공산당원과 노동자 출신의 비율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전통적인 인사정책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조프는 공업부문에서는 거의 모든 지도자가 이 기준에 부합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밝혀지고 있는 대규모 파괴공작의 확산을 막지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충분한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한 기업과 기관의 책임자들이 모든 문제에서 ‘부르주아’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전문가들이 이를 이용해 범죄적 계획을 실행했다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이제 지도자가 정치적으로 교양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가 맡은 직책에 전문교육 수준과 문화 수준 등의 측면에서도 적합해야 했다.

“업무를 이해하는 사람이어야지, 단지 군사위원 역할만 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76]

1929년 말이 되자 예조프는 농업 간부문제의 상당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바로 이 사정이 그의 경력에서 새롭고 다소 뜻밖인 전환을 결정했을 것이다.

9. 집단화의 일상

1929년은 이 나라의 역사에 ‘대전환의 해’로 기록되었다.

그해 11월 열린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농촌의 상황을 검토하고, 농업의 전면적 집단화로 이행하는 속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전원회의에서는 농업의 전체 상품생산에서 콜호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1927·1928년도 1.4퍼센트에서 1928·1929년도 4.9퍼센트로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1928년 말부터 콜호스 가입을 직접적·간접적으로 강요한 결과 나타난 이 미미한 성과는 “모든 낙관적인 예측을 뛰어넘는 전례 없는 집단화 속도”로 평가되었다.

또한 이는 “농촌의 빈농경영에 뒤이어, 집단적 농업형태의 우월성을 실천 속에서 확신한 진정한 중농경영의 대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해석되었다.[77]

전원회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집단화가 이토록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빈농과 중농의 경영이 사회주의적 경영형태로 이토록 빠르게 이끌리고 있다.

그 결과 콜호스 운동은 실제로 이미 여러 지역 전체의 전면적 집단화로 성장하기 시작했다.”[78]

이러한 상황은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방식의 변화를 요구했다.

각 공화국의 농업인민위원부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으며, 소련 전체를 포괄하는 통합 농업인민위원부를 창설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소련 농업인민위원부는 1929년 12월 7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결정으로 창설되었다.

그보다 앞서 정치국은 새로운 농업인민위원을 승인했고, 12월 15일에는 부인민위원 네 명도 승인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간부업무를 담당하라”는 임무를 받은 예조프였다.

이 임명은 아무래도 임시적인 조치로 여겨졌던 듯하다.

부인민위원은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부장보다 노멘클라투라상의 지위가 낮았다. 그렇다고 예조프가 무슨 처벌을 받아야 할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가 새 인민위원부의 인사업무를 모범적으로 정비하고 나면 다시 당 업무로 복귀시킬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조프도 이런 사정을 틀림없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임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스탈린 앞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신청서까지 제출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효과가 없자 예조프는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의 임명문제가 내 의사에 반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에, 나는 스탈린의 서기실로 찾아가 스탈린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서기실에서는 거절했다.

마침 그때 스탈린 자신이 들어왔다. 내가 서기실에서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을 본 그는 나를 자기 집무실로 불렀고,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나의 좋지 못한 행동을 꾸짖고는 가서 일하라고 말했다.”[79]

이제 예조프에게 남은 선택은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열성적으로 일함으로써 가능한 한 빨리 중앙위원회 аппара트로 돌아갈 권리를 얻기를 바랐다.

농업인민위원부에서 예조프는 간부부문을 맡았다.

이 부문의 임무는 농업생산 전문가의 등록, 양성, 배치였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복잡한 것은 양성이었다. 전면적 집단화로의 전환은 농업인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에도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우선 전문가의 수를 급격하게 늘려야 했다.

서둘러 만들어지는 콜호스와 그 관리기관에는 농학자, 기술자, 축산전문가, 토지측량사, 재무·회계직원 등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다.

또한 대규모 공동경영에는 과거 농업대학과 전문학교가 양성하던 여러 분야를 두루 아는 종합형 전문가가 아니라, 개별 생산부문을 담당하는 좁은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어 단순한 축산전문가가 아니라 말 사육 전문가, 양 사육 전문가, 돼지 사육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식이었다.

이는 농업계 교육기관의 구조와 교육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트랙터 운전수, 콤바인 운전수, 목자, 가축 사육원, 곡물 검수원 등 대중적인 현장 직종의 숙련인력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 모든 사람을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양성할 것인지도 긴급히 결정해야 했다.

예조프가 부인민위원직에 취임하자마자 이 문제들과 그 밖의 수많은 과제가 한꺼번에 그에게 쏟아졌다.

그가 업무를 시작한 첫 몇 주 동안 다루어야 했던 문제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한편 나라에서는 강제집단화의 돌격적인 속도가 낳은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농촌에서는 가축 도살이 대규모로 확산되었다.

결국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3월 2일 『프라우다』에 발표한 「성공에 취하여」에서 스탈린은 현지 활동가들의 무능과 경솔함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자발성의 원칙은 건전한 콜호스 운동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다.”

콜호스에서 대규모 이탈이 시작되었다.

1930년 3월에는 농가의 56퍼센트가 집단화되어 있었지만, 6월에는 그 비율이 23.6퍼센트까지 떨어졌다.[80]

그러나 콜호스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되찾은 농민들에게는 심각한 실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콜호스에는 그 주변의 가까운 토지가 하나의 연속된 고리처럼 묶여 사용지로 배정되었다.

따라서 독립농민에게는 토지를 돌려주지 않거나, 돌려주더라도 경작에 부적합한 곳이나 서로 떨어진 여러 장소에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배정했다.

목초지나 물가로 가는 통로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종자를 돌려주지 않았고, 이미 콜호스에서 수행한 노동의 대가도 지급하지 않았다.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위협도 가했다.

이러한 압박에서 보호받기 위해 수천 명의 농민이 진정서를 들고 군·주·변경의 중심도시와 수도의 기관들을 찾아갔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농업인민위원부까지 도착했다. 농업인민위원부 지도자들은 농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문제를 검토해야 했다.

예조프도 이런 면담 가운데 하나에 참여했다.

1930년 6월 1일 그는 북캅카스 변경의 아르마비르관구와 돈관구에서 온 전 콜호스 농민 집단을 만났다.

농민들은 집단화 과정에서 자신들이 1929년 가을 겨울밀을 파종한 토지가 법을 어기고 공동화되었다고 호소했다.

이제 콜호스에서 탈퇴했는데도, 콜호스가 수확을 마친 뒤에야 토지를 돌려주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수확작업 비용까지 자신들이 내야 했다.

토지만 빨리 돌려주면 자기 밭의 곡물은 스스로 어렵지 않게 수확할 수 있다고 농민들은 주장했다.

농민들의 말을 들은 예조프는 현지기관에 지시를 보내 위반사항을 시정하고, 콜호스 생활의 기본규칙을 정한 농업아르텔 규약을 엄격하게 준수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예조프를 찾아오기 전에 이미 관련 규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이처럼 간단한 답변으로 그들을 돌려보내기는 어려웠다.

농민들: 동지, 규약이 있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관구 토지행정국*의 해석도 있습니다. 강제로 콜호스에 들어갔고 그곳에 남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회계연도가 끝날 때에야 재산과 파종지를 분리해주라고 합니다.

예조프: 규약은 여러분의 이익을 전적으로 보장합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사람을 강제로 콜호스에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콜호스에 남고 싶지 않은 동지들은 분리해주어야 합니다.

농민들: 맞습니다. 하지만 회계연도가 끝날 때 분리해준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분리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조프: 규약은 여러분의 이익을 보호하며, 물론 콜호스 농민의 이익도 보호합니다.

농민들: 동지의 말씀은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규약과 발표된 법률에 따라 파종지를 회계연도 말이 아니라 지금 분리해달라고 요청하러 왔습니다.

현지기관은 수확을 마친 뒤에야 우리 파종지를 떼어주겠다고 합니다…… 우리 밭에는 잡초가 무성한데 아무도 김을 매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땅을 관리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분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의 성과를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상급기관에서 우리의 파종지를 지금 즉시 분리해주도록 결정받기 위해 왔습니다.”[81]

끈질긴 방문객들을 단숨에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예조프는 우선 모인 사람들의 말을 모두 들은 뒤 공동의 결정을 내리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발언하고 나자 예조프는 농업인민위원부 대표를 현지에 보내 모든 사정을 조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자신들이 옳았고 현지에서 잘못된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는 확신을 품은 채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집단화의 고삐를 다소 느슨하게 해야 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후퇴일 뿐이며 새로운 콜호스 건설의 물결이 곧 닥치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이런 조건에서는 농민들이 겪는 불행의 주된 책임이 농민 자신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예조프는 수많은 불만을 들은 뒤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문제의 한 측면일 뿐입니다.

다른 측면은 여러분 동지들도 여러 면에서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실제로 많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잘못은 하나의 근본적인 죄에서 나옵니다. 콜호스에서는 개인경영보다 훨씬 더 나은 생활을 건설할 수 있다는 인식이 여러분에게 스며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여러분은 아직 콜호스에 이를 만큼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의심하고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여러분을 강제로 콜호스에 붙잡아둘 권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1년이나 2년이 지나면 여러분이 이것을 깨닫고 콜호스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제로 붙잡아둘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머리채를 잡혀 끌려온 사람은 일할 의욕이 없으며, 콜호스의 생활을 정비하기는커녕 콜호스를 망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부실한 경영과 그 밖의 많은 문제를 호소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콜호스만의 책임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도 달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속았다고 말합니다. 약속했으면서 파종지를 떼어주지 않았으니, 우리는 김을 매러 가지 않겠다, 일하고 싶지 않다, 우리 밭은 잡초투성이로 내버려두겠다고 합니다.

자존심이라는 관점에서는 좋을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것이 누구에게 이롭습니까? 여러분 자신에게도, 콜호스에도 이롭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 여러분은 이 문제를 합의했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일부는 문제를 더 높은 곳에 가서 해결하려 하고, 일부는 계속 일하면서 콜호스의 공동생활을 방해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나는 다시 말합니다. 콜호스가 좋은 일이라는 점을 여러분은 충분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서로를 물어뜯고 있습니다.

물어뜯고 때려야 할 때도 있지만, 오직 정당한 일을 위해서만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거나 어떻게든 타협하려 하지 않고 서로에게 큰 불만만 드러내고 있습니다.”[82]

면담에 대한 농민들의 인상은 그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처음에는 변경 중심지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모스크바로 왔습니다.

여기에서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그러면 일에 착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여전히 최종적인 결정은 받지 못했습니다.”[83]

이렇게 면담은 끝났다.

예조프에게는 온갖 개별 문제에 많은 시간을 쓸 여유도, 의욕도 없었다. 더구나 이 문제들은 그의 직접적인 소관도 아니었다.

그는 인사정책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그 영역에만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차고 넘쳤다.

정부의 결정에 따라 전국에서는 농업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의 기존 조직구조를 깨뜨리는 대대적인 개편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러 전공을 함께 가르치던 종합대학과 전문학교를 해체하고, 개별 생산부문을 담당할 전문교육기관을 그 자리에 만들었다.

1930년 중반까지 과거의 종합대학 25곳을 대신해 전문화된 단과대학 84곳이 창설되었다.

또한 1930년 대학과 전문학교의 입학생 수를 두세 배로 급격히 늘리는 과제가 제시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계급적 원칙을 엄격하게 지켜야 했다. 신입생의 최소 75퍼센트는 본인이 노동자나 콜호스 농민이거나, 적어도 그런 가정 출신이어야 했다.

이 모든 문제는 끊임없이 예조프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조직능력으로도 주어진 과제를 정해진 기간 안에 제대로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업에 필요한 조건이 마련되지 않아 많은 대학과 전문학교의 학년은 9월이 아니라 11월, 심지어 12월에야 시작되었다.

교실이 부족하여 수업은 끔찍할 만큼 비좁은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교육에 맞지 않는 건물이나 헛간, 심지어 천막에서 수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숙사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일부 기숙사에서는 방 하나에 60명에서 70명씩 밀어 넣었고, 학생 두 명이 침대 하나에서 자야 했다.

교원도 부족했다. 많은 경우 교원을 아무런 체계 없이 선발했다.

학생 급식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식량도, 식당도 부족했다.

많은 대학과 전문학교는 교육과정, 교과서, 학습자료조차 갖추지 못한 채 수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각자 가능한 방식으로 궁지를 빠져나왔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농업 기계기술자대학 학생들은 미국 기업 ‘캐터필러’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학생들은 대학이 확보한 설명서와 도면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그 회사가 생산하는 콤바인의 사용설명서를 보내달라고 대표에게 직접 요청했다.

다른 대학에서는 신문이나 잡지 기사를 교재 삼아 여러 과목을 공부하는 방식에 적응했다.

교육의 질도 이러한 조건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결국 2년 뒤 정부는 대학과 전문학교의 교육과정 및 운영방식에 관한 특별결정을 채택해야 했다.

이 결정에서는 전공을 지나치게 세분화하고, 교육의 질에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교육기관과 학생 수의 증가에만 일방적으로 몰두한 일을 왜곡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농업인력 양성 분야뿐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다른 전선에서도 사정은 결코 훌륭하지 않았다.

무능한 경제지도는 공업, 농업, 운수의 발전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국민경제 시설을 돌격적인 속도로 건설하고, 가동 과정에서 안전수칙을 무시한 결과 생산현장에서는 수많은 사고가 일어났다. 그중에는 인명피해를 동반한 사고도 있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이미 1928년에 발견되었다. 그해 열린 이른바 ‘샤흐티 재판’에서 범인들이 지목되었다.

그들은 소비에트 기업과 기관에서 근무하던 구시대의 기술자와 경제학자, 즉 ‘부르주아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주인들에게서 지령을 받거나 독자적으로 파괴공작을 벌인다고 주장되었다.

1929년 OGPU는 소련 군수산업에서 활동하는 반혁명적 파괴공작 조직 사건을 조작했다. 적군에서 복무하던 ‘군사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사건도 여러 건 만들어냈다.

1930년에는 중앙 경제기관에서 일하던 저명한 전문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소련 재무인민위원부 경기연구소의 전 소장이자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교수였던 N. D. 콘드라티예프였다.

그는 ‘노동농민당’이라는 조직을 이끌었다고 주장되었다. 체키스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농민봉기와 농업부문의 파괴공작을 준비하던 비밀 지하조직이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조직이었다.

이때 예조프가 농업인민위원부의 간부업무를 맡은 지는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산하기관이 이질적인 요소들로 오염된 데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미리 안전장치를 마련해둘 필요는 있었다.

지도자의 활동은 점점 자신에게 맡겨진 분야에서 ‘파괴공작원’과 얼마나 적극적으로 투쟁하는가에 따라 평가되고 있었다.

이를 고려한 예조프는 농업인민위원부 체계에서 활동하는 ‘계급의 적’을 폭로하는 일에 자신도 가능한 몫을 보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1930년 잡지 『농업의 사회주의적 재건』 10월호에 그의 논문 「간부를 둘러싼 투쟁에서의 콘드라티예프주의」가 실렸다.[84]

예조프는 논문 첫머리에서 자신이 보기에 국내 인사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우려스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 국가기관과 경제조직을 프롤레타리아 간부로 충원하는 문제와 자체적인 전문가 간부를 양성하는 문제에 당과 광범한 노동자 대중의 관심이 커지는 것과 동시에, 기구 안에 있는 적대적인 부르주아 지식인층의 저항도 강화되었다.

이 저항은 기구를 노동자화하는 데 반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우리 대학의 부르주아 교수진은 프롤레타리아 전문가의 양성에 대항하여 광적인 공세를 벌였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전문가 양성을 소련 건설의 과제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다.

간부를 둘러싼 이 모든 투쟁과정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격화된 계급투쟁을 표현한다.”

예조프는 이어 토지행정기관, 농업연구기관과 대학에서 일하는 농업전문가들의 사회적 출신에 관한 자료를 분석했다.

그는 이 기관들이 비프롤레타리아 계층 출신자들로 오염되어 있다고 판단한 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주었다.

“하부 볼가 지역에서는 1928년 임업전문학교 학생들이 ‘검은 장미’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볼셰비키와 콤소몰은 물러가라’는 구호 아래 활동했다.

반합법적으로 존재했던 이 조직은 콤소몰 측으로부터도 충분히 단호한 반격을 받지 않았다. 이 전문학교의 콤소몰 대열 역시 이질적인 요소로 상당히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장미’의 공격을 받던 바로 그 콤소몰원들이 국방·항공·화학건설지원협회* 활동, 군사지식 연구회와 정치연구회의 활동을 폐지하라고 한두 번이 아니라 요구했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그들은 이 모든 활동이 공부를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귀족과 그 밖의 계층 출신 학생들을 노동자 청년 학생들과 동등하게 대우하라고 요구한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하부 볼가 지역 콤소몰원들의 기묘한 행동에 놀라움을 표시한 예조프는 이어 구 지식인 대표들이 벌인다는 본격적인 파괴공작 활동을 분석했다.

그 결과 이 활동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첫 번째 방향의 특징은 사상적으로 가까운 구 전문가 간부를 보존하려는 투쟁과, “기구 내 발탁에 대한 광적인 저항, 젊은 전문가에 대한 투쟁과 그들에 대한 억압”이었다.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과거에는 이 모든 사실이 개별 기관의 개별 전문가 집단이 제각기 벌이는,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저항의 시도로 보였다.

그러나 이제 콘드라티예프 일당의 파괴공작 조직이 적발된 것을 배경으로 보면 이러한 분산성은 사라진다.

각각의 시도는 하나의 통일되고 목적의식적인 체계로 합쳐진다.”

이른바 파괴공작원들의 두 번째 활동방향은 고등교육 개혁, 특히 좁은 분야에 특화된 교육기관의 창설에 맞서는 ‘광적인 투쟁’이었다.

논문에 인용된 사례를 보면 이 분야의 ‘파괴공작 활동’에 대처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듯하다. ‘파괴공작원’들이 자신의 견해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티미랴제프 모스크바농업아카데미 교수 A. G. 도야렌코, 예조프의 표현으로는 “우익 교수진의 가장 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는 농업교육의 개편이 곧 고등교육의 폐지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농업대학을 지나치게 세분화하면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가가 아니라 단순한 기술자만 배출하게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파괴공작원’인 벨로루시 농업아카데미의 A. S. 사노츠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고등학교는 폭넓은 백과사전적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전문가는 실생활 속에서 스스로 형성된다.

농민경영은 탄탄하고 폭넓은 일반지식을 요구하는 복잡한 유기체다.”

또 하나의 ‘계급의 적’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농업생산의 계절적 성격 때문에 경영연도 동안 한 생산기능에서 다른 기능으로 이동하는 대다수 노동자는 농업의 여러 부문에 관한 생산교육을 받아야 한다.”

예조프는 자신이 제시한 사례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전문가의 유형에 관한 파괴공작원들의 견해가 바로 이것이다.

콘드라티예프, 도야렌코 등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콘드라티예프주의의 뿌리는 여전히 우리의 토지기관, 연구기관과 대학에 남아 있다.

우리 앞에는 콘드라티예프주의의 뿌리를 최종적으로 뽑아내야 하는 막대한 과제가 놓여 있다.

이 문제는 다음 논문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계속되지 못했다.

예조프에게는 새롭고 훨씬 더 책임이 큰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독자들에게 약속했던 “파괴공작원들을 뿌리 뽑기 위한 막대한 과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10. 다시 중앙위원회 기구로

1930년 말은 최고권력층의 대규모 인사변동으로 특징지어졌다.

당시 형성된 상황은 이른바 우익반대파에 다시 한번, 이번에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전년도부터 시작된 그들의 패배를 마무리할 수 있게 했다.

전년도에는 “우익편향파의 선동자이자 지도자”인 N. I. 부하린이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1930년 7월 제16차 당대회에서는 또 다른 ‘우익’ 지도자인 M. P. 톰스키가 정치국원으로 재선되지 못했다.

이제 마침내 정치국에 남은 마지막 우익 대표 A. I. 리코프까지 제거할 기회가 나타났다.

당시 정부는 인민위원평의회, 약칭 소브나르콤 또는 SNK라고 불렸고, 리코프는 그 의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스탈린의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노선에 공개적으로 저항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잘못된’ 견해와 공개적으로 결별하는 데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가 관할하는 인민위원평의회 산하의 경제정책 담당기관들에도 은밀한 반대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리코프는 당과 국가에서 높은 권위를 누렸고, 전문적인 경험도 풍부했다. 인민위원평의회에서 이미 9년 동안 일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리코프가 자기 곁에 존재하는 것을 참을성 있게 견디며, 이 인사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기회는 1930년 여름에 나타났다.

앞에서 말했듯이 OGPU는 당시 ‘부르주아 전문가’ 가운데 또 하나의 ‘파괴공작원’ 집단을 체포했다.

이번에 체포된 사람들은 인민위원평의회의 여러 부서와 정부를 지원하는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던 인물들이었다.

앞 장에서 언급한 N. D. 콘드라티예프는 경기연구소를 이끌었다.

또 다른 체포자 V. G. 그로만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상임위원이었고, P. A. 사디린은 소련 국가은행 이사였다.

이 모든 체포가 처음부터 주문에 따라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스탈린은 인민위원평의회 지도부의 평판을 훼손할 자료가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OGPU에 그에 맞는 지시를 내릴 수도 있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체포자들의 진술 일부를 수록한 소책자가 광범한 당·소비에트·경제 지도간부들에게 배포되었다.

이제 리코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30년 8월 소치에서 휴양 중이던 스탈린은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V. M. 몰로토프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콘드라티예프·그로만·사디린 사건의 수사는 서두르지 말고 철저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신사들과 우익, 부하린·리코프·톰스키, 사이의 직접적인 연계가 밝혀질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85]

1930년 9월 13일 같은 수신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탈린은 논의를 실천적인 문제로 옮겼다.

“소비에트 중앙 상층부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있다.

노동국방평의회, 리코프가 함께 의장을 맡고 있던 기관,는 실무적이고 전투적인 기관에서 공허한 의회로 변했다.

인민위원평의회는 리코프의 물 탄 듯한, 본질적으로 반당적인 연설 때문에 마비되었다……

이런 상태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어떤 조치인지는 모스크바로 돌아가서 이야기하겠다.”[86]

그러나 스탈린은 모스크바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다음 편지에서 몰로토프에게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다.

“리코프와 그의 일당을 쫓아내야 한다.

이제 그것은 피할 수 없다.

소비에트·경제 상층부의 이 썩은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다만 이것은 당분간 우리 둘만 알고 있도록 하자.”[87]

마침내 1930년 9월 22일 스탈린의 계획은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다.

“뱌체슬라프!

  1. 내 생각에는 가을까지 소비에트 상층부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a) 리코프와 슈미트, 리코프의 부위원장,를 해임하고, 그들의 관료적 자문·서기 기구 전체를 해산해야 한다.

b) 자네가 인민위원평의회 의장과 노동국방평의회 의장 자리에서 리코프를 대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에트 지도부와 당 지도부 사이의 단절이 계속된다.

이 조합을 통해 소비에트 상층부와 당 상층부의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 있으며, 이는 틀림없이 우리의 힘을 두 배로 늘려줄 것이다.”[88]

1930년 10월 하반기부터 소비에트 경제체계의 최고위층에서 대규모 인사이동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리코프의 사람들은 점차 스탈린의 신임을 받는 인물들로 교체되었다.

마침내 리코프 자신의 차례가 왔다.

1930년 12월 19일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리코프를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의장과 정치국원 직위에서 해임했다.

계획대로 V. M. 몰로토프가 새 정부수반이 되었다.

상층부에서 일어난 변화는 당 기구의 인사변동으로도 이어졌다.

1930년 11월 14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조직배치부 시절 예조프의 상관이었던 I. M. 모스크빈은 당시 맡고 있던 중앙위원회 배치부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최고국민경제회의 간부부문 책임자라는 비교적 낮은 자리로 이동했다.

모스크빈의 후임에는 L. M. 카가노비치의 추천으로 예조프가 임명되었다.

L. E. 라즈곤은 모스크빈을 잘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실각 원인을 개인적인 성격에서 찾았다.

라즈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스탈린은 모스크빈을 자기 가까이 끌어들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사냥에 초대했고, 자신의 그루지야식 연회에도 불렀으며, 남부에서 휴양할 때에는 친근한 태도로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놀이의 동반자로 모스크빈보다 더 부적합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엄격한 원칙주의자였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는 평생 포도주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담배 한 개비도 피우지 않았다.

음담패설이나 거친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에도 관심이 없었고, 구경거리에도 무관심했다.

그리고 자신의 습관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최고지도자의 연회 초대를 거절했고, 휴양도시를 자동차로 휩쓸고 다니는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스탈린의 식탁에서 밤을 새우는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지’였으며, 그의 몰락은 피할 수 없었다.”[89]

그러나 스탈린이 언제나 정치적 필요성을 최우선에 두었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처럼 중요한 인사문제를 결정하면서 그렇게 사소한 동기에 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리코프가 통제하던 모든 정부기관을 근본적으로 숙청하기로 한 상황에서, 스탈린은 행정·경제 간부를 담당하는 부서의 책임자로 어떤 임무든 무조건 수행할 준비가 된 사람을 필요로 했다.

카가노비치는 예조프야말로 바로 그런 인물이라고 스탈린을 설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모스크빈에 대해서는 그런 확신이 이미 사라졌던 듯하다.

이렇게 예조프는 다시 당 중앙위원회 기구로 돌아와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인사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1930년 11월부터 1934년 2월까지 이 새로운 직책에 머물렀다. 이 3년 동안 하루하루는 최선의 인사해법을 찾아내기 위한 긴장된 작업으로 채워져 있었다.

예를 들어 임의로 선택한 단 한 주, 1932년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예조프가 준비에 참여한 문제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도 그 한 주 동안 예조프가 혼자서, 또는 다른 관계자들과 함께 중앙위원회 조직국 회의에 보고하거나 서면표결을 위해 준비한 안건의 절반에 불과했다.

조직국뿐 아니라 중앙위원회 서기국과 정치국에서 심의할 자료도 준비했다. 또한 정치국이 구체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여러 위원회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그런 과제에는 거의 언제나 인사문제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지루하고 재미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 인사담당자에게는 사람들의 운명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특정 인물의 경력이 어떻게 전개될지가 바로 자기 손에 달려 있다는 인식이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 중요성의 감각을 안겨주었다.

예조프는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직배치부에서, 이제는 배치부에서 근무하면서 행정기관과 경제기관의 지도급 인사들을 상당히 가까이에서 알게 되었다.

이 지식은 훗날 그가 내무인민위원이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체키스트 최고지도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도 이후 활동에 대단히 유용했다. 그 지도부의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시기에 예조프의 손을 거쳐갔다.

예조프가 국가보안기관의 인적 구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33년 당 숙청 이후 특히 두드러졌다.

그는 중앙 숙청위원회 위원으로서 OGPU를 검사하는 업무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이 무렵 예조프는 이미 국가의 핵심 보안기관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었고, 필요한 경우 그 기관 직원들에게 정치적인 의미에서 제법 전문적인 조언도 해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33년 7월, 우랄주의 신임 OGPU 전권대표 I. F. 레셰토프가 임지로 떠날 때 예조프는 전임자 G. Ya. 라포포르트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충고했다.

라포포르트가 재임하던 시기 우랄의 체키스트들은 사소한 일에 빠져 본연의 업무를 하지 않았고, 우랄주 당위원회의 보조기관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예조프는 그들이 주력부대를 파괴공작과의 투쟁, 생산현장의 사보타주 예방에 투입하는 대신 수감자 노동력이 사용되던 온갖 거대 건설사업에 몰두하거나, 당시 진행 중이던 경제사업과 관련된 각종 지시를 수행하는 데 빠졌다고 말했다.

“주위원회와 평화롭게 지내고 주위원회를 돕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명망 있는 인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기관과 소비에트기관에도 선출되고 칭찬도 받겠지요.

그러나 체키스트 업무의 관점에서는 실패할 것입니다.”[91]

예조프는 자신이 관할하는 간부들을 훈계하면서도 자기 부서 직원들을 잊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인 모범과 교육적인 대화를 통해 부하들에게 맡겨진 업무에 대한 책임감을 길러주려고 했다.

예를 들어 1933년 12월 2일 열린 당원회의에서 예조프는 직원들에게 배치부가 당 안에서 누리는 권위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지키고, 업무 중에 여전히 때때로 나타나는 실수를 피하라고 요구했다.

누군가를 임명하기 전에는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모든 측면에서 확인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 이후 중앙위원회 서기국이나 조직국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검토는 이미 순전히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기 사람을 임명해달라고 청원하는 개별 인민위원들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원칙적인 당적 입장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특정 직책을 얻으려는 배치 대상자 본인들의 요구에 맞설 줄 아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때때로 말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 중앙위원회 기구에 어울리지 않는 썩은 자유주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볼셰비키다운 솔직함을 보이는 것, 이것이 여러분이 지켜야 할 두 번째 자질입니다.

세 번째 자질은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조건에서는 무신경함 때문에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고, 그 결과 중앙위원회 기구와 중앙위원회 자체에 관해 대단히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위대한 자질입니다.”[92]


1933년 말은 예조프의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가 부하들에게 사람을 세심하게 대하라고 가르치던 바로 그 무렵, 베를린에서 발행되던 망명자 잡지 『사회주의 통보』 제23호가 모스크바에 들어왔다.

잡지에는 소련에서 보낸 편지 형식으로 작성된 「독재자의 측근들」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이 글은 스탈린 주변의 몇몇 인물을 언급했으며, 그 가운데에는 망명지 언론으로부터 처음으로 이처럼 세밀한 관심을 받은 예조프도 있었다.

익명의 필자는 스탈린의 다른 측근들에게도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예조프에 관해 쓴 부분은 전통적으로 거칠고 사정없는 망명지 언론의 비판수준마저 명백하게 넘어섰다.

예조프는 아마 평생 한 번도 다음과 같은 글에서처럼 자신의 인격에 대해 모욕적인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 부서, 즉 배치부의 책임자는 예조프라는 자다.

과거 페테르부르크의 금속노동자였고, 아마 푸틸로프 공장에서 일했던 그는 옛날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학습모임에서 선전활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노동자 유형에 속한다.

키가 작아 거의 난쟁이이며, 가늘고 휜 다리를 가졌다. 얼굴은 비대칭이고 명백한 퇴행의 흔적을 띠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세습적인 알코올중독자였다.

사악한 눈,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 독하고 빈정거리는 혀를 지녔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숙련공 계층’의 전형적인 대표자다. 이 계층의 결정적인 성격은 자신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 운명 덕분에 그 자신이 그토록 열렬히 그러나 가망 없이 갈망하던 삶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사람에 대한 원한이었다……

지식인에 대한 원한은 엄청나다. 당 소속 지식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지식인 가운데 누군가에게 지방의 고된 업무로 전근하라고 통보할 때, 그의 작은 눈이 얼마나 즐거움으로 빛나는지는 직접 보아야 한다……”[93]

이 글의 어조는 필자가 예조프에게 개인적으로 갚아야 할 원한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예조프는 나중에 이 독설의 필자가 소련 중공업 부인민위원 Yu. L. 퍄타코프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이 판단에 얼마나 근거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퍄타코프는 1932년 말 업무상 베를린을 방문했고, 그때 현지 망명자 집단에 글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때 예조프와 퍄타코프는 친한 사이였으며, 업무가 없는 시간에는 종종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그 술자리에서 마시는 양이 언제나 적당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퍄타코프에게는 매우 불쾌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술에 취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또다시 술을 마시던 중 그는 예조프를 핀으로 두어 번 찔렀다.

예조프는 그 장난을 재미있어하지 않았다. 화가 난 그는 퍄타코프의 얼굴을 때려 입술을 찢어놓았다.

그 사건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는 금이 갔다.

이후에도 서로 교류하기는 했지만, 이전과 같은 친밀함은 사라졌다.

퍄타코프가 실제 필자였다면, 이제 그는 자신을 때린 사람에게 보복한 셈이었다.

당 지도부 전체는 망명자 언론, 특히 『사회주의 통보』를 받아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조프에게는 정치국과 조직국의 위원들이 이 비방문을 읽고, 어쩌면 거기에 적힌 내용을 믿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극도로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가장 잘 웃는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마지막에 웃게 될 사람은 바로 예조프였다. 다만 그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3년이 더 필요했다.

11. 공적에 따른 영예

1934년 초 예조프에게 가장 빛나는 사건은 1월 26일부터 2월 10일까지 열린 제17차 당대회였다.

예조프는 대회 준비에 직접적으로 깊이 참여했다.

1월 초 정치국 결정으로 두 개의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하나는 대회 대표들의 조직·경제적 편의를 담당하는 조직위원회였고, 다른 하나는 도착한 대표들에게 예비 위임장을 발급하는 예비 자격심사위원회였다.

예조프는 두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모두 임명되었다.

대회가 시작된 뒤에도 할 일은 많았다.

그는 대회 서기국 구성원으로 선출되었고,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대회가 끝날 무렵 당 지도기관을 선출할 때 일어났다.

예조프가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약칭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그와 함께 선출된 70명은 당·국가 노멘클라투라의 정화, 모든 관료가 들어가기를 꿈꾸던 일종의 엘리트 클럽을 이루었다.

당대회와 다음 당대회 사이에는 이 사람들이 전원회의라 불리는 회의에 모여 당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과거에는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점점 드물게 열렸고, 그곳에서 다루는 안건의 중요성도 점점 줄었다.

실제 권력은 전원회의 사이의 일상적인 당·국가 업무를 지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집중되었다.

중앙위원회 위원 가운데 선출된 정치국원 9명에서 10명이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했고, 그중 일부를 1년에 약 두 차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올렸다.

그렇다고 위계질서의 가장 높은 계단에 있는 듯 보이는 정치국이 권력의 정상인 것도 아니었다.

정치국 내부에는 어떤 공식기관도 승인한 적 없는 스탈린 중심의 지도집단이 존재했다. 이 집단은 지도자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을 결집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스탈린 외에 V. M. 몰로토프, L. M. 카가노비치, K. E. 보로실로프가 그 집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결정은 바로 이들이 내렸다.

그 결정은 나머지 정치국원들이 승인한 뒤 최고 당기관의 결정 또는 결의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정치국 외에 이 책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또 하나의 중앙위원회 기관은 조직국이었다.

조직국은 정치국에서 논의할 일부 문제를 예비적으로 검토했고, 중앙위원회의 권한에 속하는 광범한 문제에 관해서는 자체적으로 결정도 내렸다.

제17차 당대회가 끝난 뒤 열린 새 중앙위원회의 첫 조직전원회의에서 예조프는 이 권위 있는 당기관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직국에는 예조프 외에 스탈린, 정치국원 세 명, 당과 국가에서 이름난 인물 다섯 명이 포함되었다.

또한 예조프는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의 결정이 전국 당조직에서 어떻게 집행되는지를 감독하는 당통제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통제위원회 위원장은 L. M. 카가노비치가 맡았고, 예조프는 그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제17차 당대회로 예조프 경력의 첫 단계가 끝났다.

그의 공적은 충분히 인정받았다.

그는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 가운데 하나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사실상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당의 ‘천상인들’ 공동체에 속하는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

제17차 당대회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후 이 책에서 다룰 사건들과 직접 관계된 논쟁 하나를 지나칠 수 없다.

역사문헌, 특히 대중역사서에서는 당대회에서 지도기관을 선출할 때 상당수 대표가 스탈린의 신임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에 반대표를 던졌으며, 이것이 3년 뒤 당대회 대표들과 당 전체에 닥친 탄압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의 탄압 원인이 이 책이 다루는 문제 가운데 하나인 만큼, 잠시 본론에서 벗어나 이 주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탈린의 범죄를 폭로하기 시작한 제20차 당대회, 1956년, 이후 정치탄압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과정에서 제17차 당대회 개표위원회의 자료를 조사하기로 했다.

1960년 11월, 26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문서 꾸러미들이 개봉되었다.

그 결과 중앙위원회 선거에 사용된 투표용지는 대회 자격심사위원회가 승인한 의결권 보유 대표 수에 따르면 1,225장이 있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1,059장만 남아 있었다.

166장이 부족했다.

남아 있는 투표용지 가운데 스탈린의 이름이 지워진 것은 3장이었다.

생존해 있던 대회 개표위원들에게도 질문했다.

한 사람은 스탈린 후보에게 던져진 반대표가 3표를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인 V. M. 베르호비흐는 완전히 다른 숫자를 제시했다.

그는 당통제위원회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투표결과…… 가장 많은 반대표를 받은 사람은 스탈린, 몰로토프, 카가노비치였다.

각각 100표가 넘는 반대표를 받았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스탈린은 125표 또는 123표였던 것 같다.”[94]

대회 개표위원회 문서를 조사한 결과와 생존 위원들의 설명은 당시 공개되지 않았다.

스탈린의 ‘유산’을 조사하는 모든 작업은 고도의 비밀 속에서 이루어졌고, 순전히 당내 문제로 취급되었다.

10여 년이 지난 뒤, 1970년대 초 서방에서 출판된 R. A. 메드베데프의 『역사의 심판 앞에서』는 앞서 언급한 V. M. 베르호비흐의 말을 근거로 제17차 당대회에서 270명이 스탈린에게 반대표를 던졌다고 전했다.

그 뒤 대회 조직위원회를 이끌었다는 중앙위원회 서기 L. M. 카가노비치의 지시에 따라 그런 투표용지 가운데 3장만 남기고 나머지는 폐기했으며, 이렇게 조작된 결과가 대표들에게 보고되었다는 것이다.[95]

1970년대 말이 되자 이 주장은 더욱 다듬어지고 새로운 세부사항이 붙었다.

1980년에는 그 최종판이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그해 뉴욕에서 출간된 A. V. 안토노프오프세옌코의 『폭군의 초상』은 역시 V. M. 베르호비흐의 말을 인용해 스탈린에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이 292명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뒤에는 R. A. 메드베데프가 이미 서술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했다.

다만 의미심장한 세부사항 하나가 덧붙었다.

카가노비치는 ‘잘못된’ 투표용지를 폐기하라는 지시를 내리기 전에, 누군가와 상의하기 위해 몇 분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었다.[96]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이전까지 서방에서 발표되었던 제17차 당대회 투표결과 조작설을 소개하는 글이 소련 언론에도 처음 등장했다.

1989년 여름 잡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식』은 독자들의 관련 질문에 답하며 이 문제를 다룬 글을 실었다.

글은 1960년 제17차 당대회 개표위원회의 봉인문서를 개봉한 결과를 소개하고, 투표용지 166장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문서도 제시했다.

이때부터 166이라는 숫자는 일종의 공식수치가 되었다.[97]

1년이 더 지나자 전 당통제위원회 위원 O. V. 샤투놉스카야의 글들이 신문에 실렸다.

1960년 개표위원회 자료를 조사하는 작업은 바로 그녀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스탈린 탄압의 희생자였던 샤투놉스카야는 오래전부터 투표용지 약 300장이 사라졌다는 주장을 지지했다.

이제 그녀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식』에 자신의 서명으로 실린 제17차 당대회 개표위원회 문서 개봉기록이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1960년에 확인된 부족분은 166장이 아니라 289장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실제로 남아 있는 스탈린 반대표 3장을 더하면, 그의 반대자는 모두 292명이 된다. 이는 A. V. 안토노프오프세옌코의 책에 적힌 숫자와 같았다.

샤투놉스카야의 견해에 따르면, 그녀가 1962년 당통제위원회를 떠난 뒤 제17차 당대회와 관련된 많은 자료, 당연히 대회 개표위원회의 문서도 포함되었을 것이다,가 다른 당통제위원회 직원들에 의해 위조되었다.

그 목적은 스탈린에 관한 진실 전체를 은폐하는 것이었다.[98]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후 새로운 증언이나 문서가 공개된 적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제17차 당대회를 언급하는 역사가들은 자신에게 더 마음에 드는 자료를 선택해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스탈린에 반대한 대표가 거의 300명이었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169명, 즉 사라진 투표용지 166장에 실제 반대표 3장을 더한 수치였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는 하지만, 연기가 있는 곳에는 불이 있기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는 오히려 불 없는 연기에 관한 이야기다.

먼저 샤투놉스카야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녀가 주장하듯 1960년에 투표용지 289장이 부족했고 지금은 166장만 부족하다면, 샤투놉스카야가 당통제위원회를 떠난 뒤 동료들이 중앙위원회 선거용 가짜 투표용지 123장을 만들어 기존 문서 사이에 끼워 넣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가짜 투표용지를 만드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투표용지는 특수한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고 특별한 서체도 사용되었다.

수공업적인 방식으로는 만들 수 없었다. 당시의 질서와 이 문제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인쇄소에서 제작하려면 최고위층의 허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설령 그 발상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이처럼 의심스러운 계획에 허가를 내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활동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첫째, 스탈린에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이 292명이든 169명이든 어느 쪽도 많은 숫자다.

둘째, 그렇게 손질한 문서는 다시 중앙당문서보관소의 비밀창고로 들어갔을 것이며, 그곳에는 여전히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 20여 년 뒤 페레스트로이카가 일어나 관련 자료가 일반에 공개되리라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샤투놉스카야의 주장에 따르면 이 모든 일은 제17차 당대회의 진실을, 누구에게서인지도 불분명하지만, 숨기기 위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라진 투표용지를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새로 만들어 넣는 방식으로 어떻게 진실을 숨길 수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 1960년대 초 스탈린에 관해 이미 공개된 수많은 사실에 비하면 투표결과 조작 같은 일은 천진난만한 장난처럼 보였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열성적으로 제17차 당대회 선거의 진실을 숨겨야 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V. M. 베르호비흐와 O. V. 샤투놉스카야가 단순히 착각했고, 스탈린에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292명이 아니라 169명이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결과도 스탈린을 기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당대회 대표와 당 전체를 상대로 탄압을 벌일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라진 투표용지의 숫자에 근거한 가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결함은, 등록된 대표 1,225명이 모두 투표에 참가했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며칠 동안 모스크바에 모여든 지역 당조직 대표들에게는 자신들이 참석하더라도 별다른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당대회 회의 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소련처럼 극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에서는 사실상 모든 지방문제와 현안을 중앙의 당기관과 정부기관에서 해결해야 했다.

따라서 당대회가 진행되는 기간, 심지어 투표가 실시되던 시간에도 수도에 머무는 기회를 자신을 파견한 조직을 위해 최대한 유용하게 사용하려던 많은 대표를 회의장이 아니라 이 기관들의 복도와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제17차 당대회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앞선 제16차 당대회, 1930년,에서는 투표함을 개봉했을 때 투표용지 136장이 부족했다.[99]

그리고 바로 다음의 제18차 당대회, 1939년,에서도 막 끝난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대표들의 규율이 크게 높아졌는데도 투표용지 44장이 부족했다.[100]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많은 당대회 대표가 스탈린의 후보에 반대표를 던졌으며 투표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허위설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제17차 당대회의 투표결과는 1937년에서 1938년 탄압의 원인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당대회 대표들은 당시의 당·국가 노멘클라투라 전체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들은 이 당대회에 참가했는지와 무관하게 스탈린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제 다시 예조프에게 돌아가자.

제17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새 당규약에 따라 중앙위원회 기구의 구조가 개편되었다.

조직지도부와 배치부 두 부서만의 힘으로 비대해진 당·소비에트·경제 관료기구를 통제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중앙위원회의 서로 다른 부서가 각자의 업무노선에 따라 국민경제의 동일한 부문과 국가기관을 동시에 감독하는 상황은 역량을 불필요하게 분산시키고 온갖 조직적 문제를 낳았다.

이에 중앙위원회 안에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책임지는 부문별 부서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 부서는 조직·당 업무, 간부의 배치와 선발, 당기관 결정의 집행 등을 모두 담당해야 했다.

이렇게 여섯 개 부서가 만들어졌다.

1934년 3월 10일 정치국 결정으로 신설 부서의 책임자들이 승인되었다.

예조프에게는 공업부가 맡겨졌다.

그러나 정치행정부장이 임명되지 않았으므로 그 부서도 겸임하여 이끌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1935년 3월까지 두 부서를 함께 지도했다.*

따라서 중앙위원회 기구의 구조가 바뀐 뒤에도, 예조프의 이후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업무영역인 OGPU 간부에 대한 통제는 정치행정부를 통해 계속 그의 관할 아래 남았다.

이 무렵 OGPU 자체도 개편을 준비하고 있었다.

체제를 외관상 자유화하려는 정책의 하나로 스탈린은 국가의 핵심 보안기관에 조금 더 문명화된 모습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1934년 2월 20일 정치국 회의에서 그는 개편된 OGPU를 포함하는 전연방 내무인민위원부, 즉 소련 NKVD를 창설하자는 구상을 참석자들에게 설명했다.*

그때까지 통합국가정치국, OGPU는 형식적으로는 인민위원평의회에 예속되었으나 실제로는 스탈린의 개인적인 통제를 받는 독립기관으로 존재했다.

OGPU가 한 인민위원부의 하위기관이 되면 일반적인 소비에트 행정기관의 외관을 얻게 된다.

스탈린은 이런 유사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마 같은 정치국 회의에서 OGPU가 보유한 재판권을 상당히 제한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의 측근들은 지도자의 계획을 승인했다.

L. M. 카가노비치가 이끄는 위원회가 NKVD 규정 초안을 작성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1934년 4월에는 예조프도 이 위원회에 포함되었다.

1934년 7월 초까지 새 기관의 창설과 관련된 주요 문제가 해결되었다.

7월 10일 정치국 결정과 같은 날 공식적으로 발표된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결정에 따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가 창설되었다.

OGPU는 그 안에 편입되어 이때부터 소련 NKVD 국가보안총국, 약칭 GUGB NKVD로 불리게 되었다.

OGPU 의장 V. R. 멘진스키는 이보다 두 달 앞서 사망했다.

그의 오랜 병환으로 인해 사실상 OGPU를 이끌고 있던 제1부의장 G. G. 야고다가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NKVD의 창설과 동시에 OGPU 재판합의부는 폐지되었다.

이전까지 체키스트 기관은 이른바 국가범죄 사건을 수사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직접 판결까지 내렸다.

재판은 피고인과 증인이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고, 변호인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았다.

재판 절차는 합의부 위원들이 미리 작성된 조서를 읽어보는 것으로 축소되었으며, 불과 몇 시간 동안 수십 건의 판결이 선고되었다.

이제 국가범죄 사건은 수사가 끝난 뒤 여러 단계의 법원으로 넘겨야 했다.

주로 소련 최고재판소, 각 연방공화국과 자치공화국의 최고재판소, 주·변경재판소에 설치되는 특별재판합의부가 이를 담당했다.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와 각 군관구 군사재판소도 사건을 심리했다.

1934년 7월 11일 『프라우다』는 이 변화에 관해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혁명적인 엄격한 질서가 소련에서 갈수록 확고해지고 있다.

사회주의적 법의식은 수천만 근로대중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다……

소비에트 법원의 역할 강화는 대중의 사회주의적 법의식을 더욱 성장시키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NKVD에서 처벌권을 완전히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내무인민위원 산하의 이른바 특별협의회에는 ‘사회적으로 위험한 인물’에게 추방, 유형, 최대 5년의 교정노동수용소 수감을 선고할 권한이 주어졌다.

아마도 ‘성장한 대중의 법의식’은 이런 비교적 온건한 형태의 재판 외 처벌이라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스탈린은 합법성을 강화하고 국가보안기관의 무제한적인 권한을 제한한다는 새 노선을 NKVD 창설처럼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조치뿐 아니라, 기회가 생기면 개별 사건에서도 보여주려고 했다.

이 점을 잘 드러내는 것이 A. G. 레비스의 진정사건이다.

1932년 말 OGPU는 일본군 참모본부의 지령을 받아 활동했다는 또 하나의 ‘간첩·파괴공작 조직’을 적발했다.

1933년 3월 OGPU 합의부의 결정으로 체포자 일부는 총살형을 선고받고, 나머지는 장기징역형을 받았다.

1년 뒤 수형자 가운데 한 사람인 A. G. 레비스는 수용소에서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진정국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실제로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불법적이고 사실상 도발적인 수사방법 때문에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진정국을 이끌던 레닌의 누이 M. I. 울리야노바는 이 편지를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스탈린은 진정내용을 조사할 특별 정치국위원회를 설치하도록 지시했을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명령했다.

“무고하게 피해를 본 사람이 있다면 석방하고, 특수한 ‘수사기법’을 사용하는 자들을 OGPU에서 제거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을 처벌하라.”

스탈린은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V. V. 쿠이비셰프와 A. A. 즈다노프에게 보낸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내 생각에 이 사건은 심각하며 끝까지 처리해야 한다.”[101]

조사를 시작한 위원회는 해당 사건뿐 아니라 다른 여러 사건에서도 불법적인 수사방법이 사용되었다는 결론에 비교적 빠르게 도달했다.

위원회는 관련 권고안을 작성하고 정치국 결정문 초안까지 마련했다.

하지만 이때 S. M. 키로프가 암살되었다.

국가보안기관 업무에서 합법성을 강화한다는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관심은 즉시 사라졌고, 이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34년 여름 예조프는 다시 한번 건강을 돌보았다.

지난 세월 동안 그의 건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예전과 마찬가지로 담당의사들이 계속 걱정하는 원인이었다.

1931년 6월 30일 크렘린 의료위생국장 M. S. 메탈리코프는 중앙위원회 서기 L. M. 카가노비치와 P. P. 포스티셰프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예조프 동지는 양쪽 폐의 결핵성 병변, 결핵성 기관지림프절염과 기관지주위염, 근무력증, 영양실조를 앓고 있습니다.

그는 즉시 업무에서 해방되어 적절한 기후와 요양환경을 갖춘 요양원에 2개월 동안 입원해야 합니다.”[102]

1932년 11월 15일 같은 M. S. 메탈리코프는 다시 고위 당지도부의 관심을 환자의 건강에 돌렸다.

“예조프 N. I. 동지가 최근 편도염을 앓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좌골신경통과 폐결핵, 그리고 전반적인 과로를 앓고 있으므로, 상세한 검사와 필요한 요양방식을 결정하기 위해 긴급히 크렘린 병원에 입원시켜야 합니다……”[103]

의사들의 우려 섞인 보고는 무시되지 않았다.

예조프는 정기적으로 크렘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1931년과 1932년에는 결핵환자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그루지야의 고산휴양지 아바스투마니에서 건강을 회복했다.

1933년에도 그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1933년 7월 31일 크렘린 진료소의 소견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예조프 N. I.는 만성기관지염과 폐조직 경화를 동반한 잦은 악화, 건선, 말라리아 후 중독증, 예조프는 1921년 말라리아를 앓았다, 극심한 과로와 체중감소를 겪고 있다.

전신의 건강회복과 치료를 위해 6주에서 8주 동안 즉시 아바스투마니에서 휴가를 보낼 필요가 있다.”[104]

하지만 그해 예조프는 휴가를 가지 못했다.

이는 당연히 그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34년에는 그를 외국으로 보내 치료하기로 했다.

당시의 관행에 따라 고위 관료는 필요한 경우, 특히 국내의 치료법으로 상태가 호전되지 않을 때 외국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허용되었다.

1934년 7월 중순 예조프는 두 달간의 휴가를 받아 빈으로 떠났다.

그는 소련 지도층이 오래전부터 즐겨 이용하던 카를 폰 노르덴 교수의 요양원에 입원했다.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부의장 V. Ya. 추바리, 적군 정치국장 Ya. B. 가마르니크, 전연방노동조합중앙평의회 서기 G. D. 베인슈토크, 크렘린 의료위생국장 M. S. 메탈리코프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사가 각기 다른 시기에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빈에서 일주일 반을 보낸 예조프는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산악 온천휴양지 바트가슈타인으로 옮겼다.

현지의 라돈온천은 그에게 좋은 효과를 보였다.

그러나 치료식으로 권고된 단순하고 거친 음식에 그의 위장이 맹장염 발작과 비슷한 증상으로 반응했다.

모스크바에서 긴급히 소집된 의료협의회는 전달된 자료를 검토한 뒤 맹장염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수술을 금지했다.

식단이 변경되자 예조프의 건강은 빠르게 호전되었다.

하지만 치료가 진행되면서 건강상의 어려움은 줄어든 반면 재정적인 문제는 커졌다.

지급받은 돈이 거의 바닥나자 예조프는 치료과정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귀국하기로 했다.

결국 정치국은 1934년 8월 28일 이 문제에 관한 특별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정은 두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a) 치료를 마칠 수 있도록 예조프 N. I.에게 금화 기준 1천 루블을 추가 지급한다.

b) 휴가가 끝날 때까지 예조프 동지가 소련으로 출발하는 것을 금지한다.”[105]

재정지원을 받은 예조프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오스트리아 국경 가까이에 있는 이탈리아 알프스 휴양지 메라노로 이동했다.

그는 식이요법을 전문으로 하는 ‘스테파니아’ 요양원에 입원했다.

이곳에서는 포도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했다.

그러나 예조프의 위장은 이 음식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고위급 환자는 다시 더 부드러운 식단으로 바꾸어야 했다.

1934년 10월 치료가 끝났고, 그달 말 예조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휴가 중 쌓인 업무를 정리할 틈도 없이 나라의 상황이 급변했다.

새로운 환경은 그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자격으로 활동할 것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