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파블류코프, 『예조프: 전기』 한국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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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수하노프카의 지하감옥에서
1938년 11월 23일, 형식상으로는 아직 예조프의 부관이었지만 사실상 이미 NKVD를 지휘하고 있던 L. P. 베리야는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V. M. 몰로토프에게 편지를 보냈다.
“1939년 1월 1일까지 소련 NKVD 국가보안총국 산하에 특별히 격리된 특수목적감옥을 설치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를 위해 옛 수하노프수도원의 부지와 건물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모스크바돈바스철도 라스토르구예보역 근처에 있는 이 시설은 한 달이면 감옥으로 개조할 수 있습니다.”[471]
1931년 폐쇄된 수하노프수도원은 인근의 볼콘스키공작가 영지인 수하노보에서 이름을 얻었다.
1935년부터 이곳에는 소련 건축기금의 휴양소가 있었고, 수도원부지는 부속축산농장으로 사용되었다.
1938년 11월 29일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부의장 N. A. 불가닌은 사흘 안에 옛 수도원건물과 주변 100미터 지대를 NKVD에 넘기라고 지시했다. 주변지대의 양도 역시 베리야가 편지의 별첨에서 요청한 내용이었다.
1939년 초 개조공사가 끝났다.
소비에트 감옥 가운데 가장 수수께끼 같은 수하노프카가 업무를 시작했다.
수하노프카에는 다른 수감자와 접촉하지 못하게 격리하려는 최고위관료들만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직급은 훨씬 낮아도 여러 이유로 진술이 NKVD 지도부의 관심을 끄는 수감자도 이곳으로 보내졌다.
강화된 격리조치가 적용되었다.
아주 작은 감방에는 두 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은 NKVD 정보원인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
다른 감옥에는 어디든 있는 내부생활규칙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에 달린 감시구멍은 거의 1분마다 열릴 정도로 끈질기게 감시했다.
산책도 없었고, 물리적 강제수단은 당연히 널리 사용되었다.
이 모든 환경은 수감자가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빨리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1939년 4월 10일 체포된 예조프가 보내진 곳이 바로 이런 감옥이었다.
그 무렵에는 예조프와 그의 내무인민위원 재직활동에 관한 여러 종류의 정보가 이미 상당히 수집되어 있었다.
첫 정보는 예조프가 NKVD를 떠나기도 전인 1938년 11월 초 체포된 전 국가보안총국 경호부장 I. Ya. 다긴에게서 나왔다.
수사가 완전히 베리야의 손에 들어간 뒤 열흘 동안 구금된 다긴은 1938년 11월 15일 자백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는 예조프와 그의 내무인민위원 활동에서 추악한 면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근무시간과 휴식시간을 가리지 않은 예조프의 음주, 필요하면 이를 질병으로 위장한 일, NKVD 지도간부를 불리하게 만드는 정보를 중앙위원회, 즉 스탈린,에 숨긴 일, 베리야가 오기 직전 그 자료 일부를 없앤 일 등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브류하노프 등 크렘린 사령관국 ‘음모자’ 집단에 관한 자료도 있었다.
대량작전의 무책임한 수행, 작전과정에서 벌어진 과잉과 왜곡을 국가 지도부에 숨긴 일, 트로이카와 2인조의 승인을 받으려고 제출된 사건에 대한 판결을 아무런 통제 없이 처리한 일도 거론되었다.[472]
이 주제들은 전 소련 NKVD 서기국장 I. I. 샤피로의 진술에서 더욱 발전했다.
1938년 11월 29일 심문에서 샤피로는 예조프 재임기의 정치적으로 잘못된 인사선발과 대량작전과정의 왜곡을 특히 자세히 이야기했다.
이후 두 달 동안 이 진술에 실질적으로 새롭거나 중요한 내용은 추가되지 않았다.
진술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그러나 1939년 1월 중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조프가 실제로 저지른 직무상 태만과 권력남용을 수사는 이제 그의 반혁명적 의도의 표현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은 예조프의 비서 S. A. 리조바의 진술이었다.
1939년 1월 14일 심문에서 리조바는 1931년부터 반혁명음모조직의 구성원이었으며, 옛 상관이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그 조직의 활동에 관해 구체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예조프의 적대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방향은 반혁명간부를 당과 국가의 지도직에 배치하는 일이었다는 주장만 나왔다.[473]
리조바의 ‘자백’이 예조프에 대한 정치적 혐의의 윤곽만 그렸다면, 1939년 1월 20일대에 얻은 진술은 거의 모든 빈칸을 채웠다.
1월 20일 전 NKVD 운수국장이자 전 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B. D. 베르만에게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받아냈다.
아무 죄 없는 사람이 목숨을 잃고 진짜 간첩·파괴공작원·테러리스트는 자유롭게 남도록 만든 근거 없는 대량탄압을 예조프와 프리놉스키가 외국정보기관의 지시로 실시했다는 것이었다.
베르만은 이미 자신이 독일정보기관과 관계를 맺었다고 ‘자백’한 상태였으므로, 예조프에 관해 이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도 자기 자신에게 더 불리해질 것은 없었다.
“예조프와 프리놉스키에게 중요한 것은 당과 나라에 가능한 한 큰 피해를 입히는 일이었습니다.
NKVD노선에서 적대활동을 벌여 광범위한 주민층에서 당과 중앙위원회의 권위를 최대한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주된 과제였습니다.
지방과 중앙의 NKVD기구, 특히 중앙기구를 끌어들이고 타락시키면서 이 방향으로 행동했습니다.
예조프와 프리놉스키가 관계를 맺고 요원으로 활동한 침략국 외국정보기관의 지시에 따라 벌어진 일이었습니다.”[474]
일주일 뒤 예조프를 고발할 또 하나의 중요한 증인은 전 서시베리아 NKVD국장이자 전 몽골 주재 소련대사 S. N. 미로노프였다.
1939년 1월 26일 베리야가 직접 그를 심문했다.
다음 날 미로노프는 베리야 앞으로 성명을 작성하여, 예조프·프리놉스키 등이 지도한 NKVD기관의 적대활동에 관해 자신이 아는 사실을 완전히 솔직하게 밝힐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앞에서 인용한 리조바와 베르만의 진술도 새 내무인민위원과 직접 만난 결과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로노프의 말에 따르면 1937년 7월 프리놉스키는 어느 대화에서 예조프가 당시의 국내정책노선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예조프는 NKVD의 동료들을 이용하여 현 지도부를 전복하고 직접 국가의 수장이 되려고 했다.
이를 위해 NKVD기구 전체를 복무시키려 했다.
권력을 향한 전반적인 불만과 불신을 조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원과 무당파 활동가들을 분쇄하는 것이며, 대량작전이라는 외피를 사용하면 매우 편리하게 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475]
앞 장에서 말했듯 1939년 1월 말 NKVD 업무의 인수·인계문서가 서명될 무렵 예조프의 내무인민위원 활동은 이미 대단히 가혹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태만과 권력남용, 즉 비정치적인 직무범죄의 틀 안에 있었다.
동시에 위에서 인용한 진술을 보면 베리야의 부하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예조프 주변에 전혀 다른 종류의 올가미를 짜기 시작했다.
형법상 총살형으로 이어지는 조항들이었다.
1939년 2월 말에는 예조프에 대한 전체고발구도에 매우 구체적인 세부내용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2월 27일 심문에서 예조프의 오랜 지인 S. S. 슈바르츠는 예조프도 독일정보기관의 요원이라고 진술했다.
슈바르츠 본인은 이미 독일을 위한 간첩활동을 자백한 상태였다.
그는 베를린 소련전권대표부에서 일한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전권위원 I. A. 페트루니체프를 통해 예조프가 독일 측에 방위관련자료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화학공장에 관한 통계자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0년대 초에는 당시 독일 주재 소련 무역대표부 부대표로 특별파견된 S. B. 주콥스키도 예조프의 간첩지시를 수행했다고 했다.
슈바르츠의 말에 따르면 1933년 폴란드간첩으로 적발된 전 농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F. M. 코나르와, 일본간첩으로 드러난 전 일본 주재 소련 무역대표 V. N. 코체토프가 예조프와 친구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476]
이것이 예조프가 체포될 무렵까지 수집된 주요정치혐의였다.
체포 다음 날에는 예조프의 전 제1부인민위원이자 이후 소련 해군인민위원이 된 M. P. 프리놉스키가 예조프와 자신의 NKVD 범죄활동에 관한 상세진술을 했다.
프리놉스키는 구금 닷새째인 1939년 4월 11일 베리야 앞으로 쓴 장문의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37년 ‘우익중앙’ 지도부가 체포된 뒤, 예조프와 프리놉스키 자신, 예브도키모프가 사실상 그 중앙의 역할을 넘겨받아 살아남은 우익음모자 간부를 가능한 한 보존하려 했다.
동시에 당에 충실한 공산당원을 탄압하고 국가 지도자들을 향한 테러행위를 준비했다.
프리놉스키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활동은 예조프가 지도하는 우익파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할 조건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477]
이제 그림을 완성하려면 E. G. 예브도키모프에게서 비슷한 자백을 받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 뒤 예조프 본인과의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예브도키모프는 1938년 11월 초 체포되었지만, 수사관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였어도 다섯 달 동안 자백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다.
1939년 4월 13일 예브도키모프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1938년 여름 말, 그는 예조프와 프리놉스키가 지도하는 음모조직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현 지도부를 폭력으로 제거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성공한 뒤 예조프는 당을 이끌고, 프리놉스키는 군대를 지휘하며, 예브도키모프 자신은 NKVD 책임자가 될 예정이었다.
정변이 성공하려면 특별히 실시한 근거 없는 대량탄압으로 주민의 전반적인 불만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스탈린에 대한 테러행위로 당과 정부에 혼란이 생기면 음모조직이 지하에서 나와 권력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478]
뒤에 법정에서 예브도키모프는 예비수사에서 한 진술을 철회했다.
거짓말하도록 강요당했으며, 발바닥을 심하게 맞아 거짓진술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당시는 예조프와 생산적인 ‘대화’를 시작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때였다.
예조프는 예비수사의 첫날들을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간첩도 테러리스트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고 나를 가장 심하게 구타했다.”[479]
예조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향한 폭력을 언제나 견디지 못했다.
과도한 업무로 지쳐 있었고, 아내의 죽음으로 고통받았으며, 독극물중독으로 건강까지 나빠져 의지력이 완전히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수사기관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지어내기 시작했다.[480]
예조프가 혐의를 부인한 초기진술은 수사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심문조서는 체포 일주일 뒤인 1939년 4월 18일부터 20일로 작성되어 있다.
그전까지 수사관들의 강요에 저항하려 했던 흔적은 전혀 없다.
조서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시작한다.
“질문: 당신은 당의 배신자이자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었다.
수사는 당신이 범죄를 숨기려고 처음 시도하는 순간 완전히 폭로할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
폭로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당과 소비에트권력을 상대로 벌인 검고 배신적인 활동을 진술하라.
답변: 얼마 전까지 당의 신뢰를 받았던 나 같은 사람이 배신과 반역을 자백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 범죄의 책임을 수사 앞에서 지게 된 만큼 완전히 솔직하고 진실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당이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원이라는 가면으로 여러 해 동안 당을 속이고 이중행동을 했으며, 당과 소비에트국가를 상대로 격렬하고 은밀한 투쟁을 벌였다.”[481]
물론 이런 문답이 실제로 오갔다고 볼 필요는 없다.
심문조서를 만드는 기술은 다양했다.
예조프가 마침내 ‘자백’을 작성한 뒤, 적절한 위치에 유도질문을 삽입하여 마치 그 질문에 답한 것처럼 꾸미고 전체를 깨끗하게 다시 타이핑했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수감자와 수사관 사이에 살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진 듯한 문서가 만들어졌다.
예조프는 자신의 ‘타락사’를 1921년부터 시작했다.
타타르공화국에서 근무할 때 무정부생디칼리슴 사상의 영향을 받아 현지 ‘노동자반대파’ 집단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1920년대 당내논쟁 때에도 당의 일반노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처럼 역사 깊숙이 들어가는 이야기는 수사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예조프가 주요주제에서 오랫동안 벗어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질문: 당신의 어떤 ‘정치적 동요’를 다룬 이 장황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오래전부터 외국정보기관의 요원이었던 당신은 직접적인 간첩활동을 진술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하라!
답변: 좋다. 내가 간첩관계를 맺은 시점으로 곧바로 넘어가겠다.”[482]
* 실제로 예조프가 1920년대 초 ‘노동자반대파’의 일부 견해에 공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당내집단의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NKVD에서 일하는 동안 예조프의 손을 거쳐 간 간첩포섭 이야기는 수천 건에 달했다.
피의자와 수사관이 함께 만들어낸 이야기들이었다.
고문자들의 까다롭지 않은 취향을 만족시킬 무언가를 지어내는 일은 그에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예조프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오랜 폴란드요원으로 드러난 친구 F. M. 코나르가 자신을 간첩활동에 끌어들였다고 했다.
코나르는 예조프에게서 여러 정치소식을 듣고 폴란드의 상관에게 전달했다.
어느 날 이 사실을 예조프에게 밝히면서 자발적으로 폴란드를 위해 일하라고 제안했다.
예조프는 코나르를 통해 중요한 당·국가기밀을 많이 넘겨 사실상 이미 폴란드정보기관의 정보원이 되었으므로,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폴란드는 예조프에게서 얻은 정보 일부를 동맹국 독일과 공유했고, 얼마 뒤 독일 측에서도 협력제안이 왔다고 했다.
예조프의 말에 따르면 중개자는 소련 국방부 제1부인민위원 A. I. 예고로프 원수였다.
1937년 여름 예조프를 만난 예고로프는 그가 폴란드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도 독일간첩이며 독일당국의 지시로 적군에 음모집단을 만들었고, 자기 집단과 예조프 사이에 긴밀한 업무연락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예조프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예고로프의 사람들을 체포에서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예조프의 첫 진술이었다.
여러 최고기관이 그 내용을 검토하는 동안 예조프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1939년 4월 23일 소련 NKVD 수사부에 성명을 작성했다.
예비수사 전체를 통틀어 그가 한 자백 가운데 가장 기묘한 내용이었다.
“나의 생활상 타락을 보여주는 새로운 사실 몇 가지를 수사기관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악습인 남색에 관한 이야기다.”[483]
이어 열 쪽에 걸쳐 재봉사 견습생 시절부터 체포 직전까지의 동성애관계를 설명했다.
그가 지목한 여섯 명의 상대에는 제정군과 적군, 이후 근무지의 동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 유명한 당간부였고 당시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산하 한 기관을 이끌던 인물도 있었다.
예조프는 글을 다음과 같이 끝냈다.
“나의 도덕적·생활상 타락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 이 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한다.”[484]
이 진술이 수수께끼인 이유는 예조프가 이런 고백을 하도록 강요당했다는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후 수사과정에서 진술서에 나온 사람들을 심문하며 이 주제가 두 차례 제기되었다.
한 사람은 예조프의 주장을 단호히 부인했고, 예조프도 이를 강하게 고집하지 않았다.
심문조서를 보면 수사관들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상대’는 심문 중 스스로 예조프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사관은 더 심각한 혐의에 집중하라며 말을 끊었다.
예조프의 자기폭로가 외부압력의 결과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관심을 가진 반국가범죄활동 이야기를 계속하지 않고 아무도 묻지 않은 문제를 갑자기 꺼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예조프와 수사관들의 다음 기록된 만남은 1939년 4월 26일에 열렸다.
베리야 본인과 소련 NKVD 수사부장 B. Z. 코불로프가 참석했다는 사실이 이 심문에 부여된 중요성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예조프가 충분히 솔직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질문: 이전 심문에서 당신은 10년 동안 폴란드를 위해 간첩활동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여러 간첩연락을 숨겼다.
수사는 이 문제에 관하여 진실하고 완전한 진술을 요구한다.
답변: 폴란드를 위한 간첩활동을 사실대로 진술하면서도 독일과의 간첩관계를 숨긴 것은 인정해야 한다.
질문: 어떤 목적으로 독일과의 간첩관계에서 수사의 관심을 돌리려 했는가?
답변: 독일 측과 직접 연결된 간첩관계를 수사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독일정보기관과의 협력은 간첩활동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독일정보기관의 지시에 따라 나는 반소비에트음모를 조직하고, 당과 정부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테러행위를 통해 국가정변을 준비했다.”[485]
실제로 오간 것인지 조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문답 뒤에는 1934년 여름 예조프가 빈의 노르덴교수 병원에서 치료받던 시기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는 간호사 한 명을 유혹했다고 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나는 방에 노르덴교수의 수석조수 엥글러박사가 갑자기 들어와 소란을 피웠다.
이 일이 언론에 새어나갈 수 있다고 암시했다.
엥글러는 예조프가 내민 돈을 받지 않았다.
그가 소련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독일과 협력하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언론에서 신용을 무너뜨리겠다고 했다.
예조프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독일정보기관을 위해 일하겠다는 서면서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뒤에 독일 측은 정보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A. I. 예고로프 원수가 이끄는 군부음모조직과 같은 조직을 NKVD에 만들도록 그를 밀어붙였다고 했다.
소련과 독일의 전쟁이 시작될 때 두 조직이 결합하여 국가권력을 성공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예조프는 NKVD 안에 조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조직이 무엇을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1938년 가을의 사건으로 넘어갔다.
베리야가 NKVD에 나타나자 음모자들은 적발을 피하기 위해 당과 정부지도자를 살해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작전은 10월혁명 21주년인 1938년 11월 7일로 정했다.
“프리놉스키·예브도키모프·다긴과 나는 1938년 11월 7일 열병식이 끝나고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대열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붉은광장에 병목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시위대열의 공황과 혼란을 이용하여 폭탄을 던지고 정부구성원 가운데 누군가를 살해하려 했다.”[486]
이 계획의 실행은 I. Ya. 다긴과 NKVD 국가보안총국 경호부의 부하들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러나 1938년 11월 5일 이들이 모두 체포되어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예조프는 내무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지인 몇 사람을 부추겨 스탈린을 대상으로 테러를 벌이려 했지만 이 시도도 실패했다고 말했다.
1939년 4월 26일 심문의 마지막 부분은 예조프와 영국정보기관의 관계를 다루었다.
예조프는 1938년 봄 스탈린이 F. M. 코나르와의 옛 관계에 갑자기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자신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고, 아내가 이유를 묻자 반소비에트활동과 폴란드·독일정보기관과의 관계를 털어놓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폭로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자신도 영국에서 일하던 1920년대 중반 남편 A. F. 글라둔에게 포섭되어 수년 동안 영국간첩으로 활동했다고 자백했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영국 외무부 정보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소련의 상황과 러시아지식인의 정치적 분위기를 보고한다고 말했다.
간첩목적을 위해 나 예조프도 이용했다.
내가 가진 모든 기밀자료를 아내에게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487]
그러나 수사관들은 예조프가 영국정보기관과의 관계를 1938년 중반부터로 잡은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성과 있는 협력을 벌일 시간이 너무 짧았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내가 영국정보기관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1938년보다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 영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수사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488]
그러나 예조프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문제에 답하지 않고, 아내를 독살하는 데 자신이 가담했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요양원으로 많은 양의 루미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녀가 자살하려 한다는 의도가 분명했는데도 막지 않았다.
따라서 그 죽음의 주된 책임자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아내가 체포될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심문을 받으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예조프의 반소비에트·간첩활동까지 말할까 두려워 자살을 막지 않았다고 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수사관들은 예조프가 “계속 적대적 입장을 유지하며 불성실하게 행동한다”고 판단했다.
독일을 위한 간첩활동을 완전히 말하지 않았고, 음모활동 관련자로 이미 체포된 사람이나 외국외교기관의 공식대표만 지목하며, 소련에서 반혁명정변을 조직한 배신행위를 함께 지도한 사람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문은 다음 경고로 끝났다.
“이 모든 문제로 당신은 바로 내일 다시 심문받을 것이다.
완전한 진술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 베리야가 직접 참석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수사의 첫 단계는 1939년 4월 30일 끝났다.
그날의 심문에서 예조프는 부하 체키스트들을 반소비에트음모에 끌어들이는 방법과 NKVD에서 벌인 주요파괴공작의 방향을 설명했다.
파괴공작은 근거 없는 대량체포, 수사자료의 위조, 문서조작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모든 일은 주민들 사이에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지도부와 소비에트정부를 향한 일정한 불만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음모계획을 실행하는 데 가장 유리한 기반을 만들려는 계산 아래 진행되었다.”[489]
1939년 4월 18일부터 30일까지의 심문에서 예조프의 ‘범죄활동’의 주요방향이 정해졌다.
관련된 사람도 대거 지목되었다.
4월 18일부터 20일까지 세 명, 4월 26일 서른여섯 명, 4월 30일 예순여섯 명으로 모두 105명이었다.
대부분은 이미 체포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은 총살까지 당했다.
그러나 아직 탄압을 받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예조프는 자신이 아는 ‘군부음모자’로 소련 국방부 부인민위원 S. M. 부됸니와 총참모장 B. M. 샤포시니코프를 지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체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직책과 지도자의 개인적 신임도 유지했다.
스탈린은 NKVD 지하감옥에서 얻은 진술을 신뢰했지만, 특정인에 관해 자신이 품은 판단과 모순되지 않을 때에만 그랬다.
예조프에 대한 전체고발구도가 만들어진 뒤에는 개별세부사항을 다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939년 5월 5일 심문에서 예조프는 외무인민위원부의 ‘음모자들’이 벌인 활동을 이야기했다.
당시 외무정책기관의 책임자 M. M. 리트비노프가 해임된 뒤 외무인민위원부에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기관의 파괴활동은 그 무렵 특별히 시의적절한 주제였다.
예조프는 그 활동이 소련과의 미래전쟁에서 독일과 일본이 승리할 조건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중국정부 수반 장제스와 소련당국의 관계를 이간하려고 시도했다고 했다.
궁극적으로 일본이 소련 극동지역을 점령하는 일을 쉽게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다.
1939년 5월 초 체포된 NKVD 직원 몇 명에게서 예조프의 지시로 이른바 수은중독사건을 날조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이 문제로 심문받은 예조프는 조작사실을 인정하고, 국가 지도부의 눈에 자기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해 실행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1939년 5월 17일 심문은 전 NKVD 국가보안총국 해외부장 A. A. 슬루츠키의 죽음을 다루었다.
예조프는 자신의 지시로 슬루츠키를 살해했다고 말했다.
슬루츠키의 체포가 불가피해지고 있었고, 심문을 받으면 자신이 아는 음모자들의 범죄활동을 폭로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939년 초여름 수사기관은 예조프에게 공식혐의를 제기할 충분한 자료가 이미 있다고 판단했다.
6월 10일 소련 NKVD 수사부 선임수사관 V. T. 세르기옌코는 그를 형사피고인으로 입건하는 결정을 서명했다.
결정문은 예조프를 폭로하기 위한 두 달간의 작업결과를 종합하고 주요 ‘범죄’를 열거했다.
간첩형태의 조국반역,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형법 제58조 1항 ‘a’, 외국에 소련과의 전쟁을 부추긴 행위, 제58조 5항, 무장봉기와 테러행위 준비, 제19조 및 제58조 2·8항, 파괴공작, 제58조 7항, 다른 범죄를 숨기려는 고의살인, 제136조 ‘g’, 동성애, 제154조 ‘a’,였다.
남은 여덟 달의 수사기간 동안 예조프는 대체로 자기 음모활동에 참여했다는 여러 사람을 고발하거나, 자신의 ‘범죄’에 관한 세부사항을 수정해야 했다.
예를 들어 1939년 6월 21일 심문에서는 이전에 말한 1934년이 아니라 1930년 독일정보기관에 포섭되었다고 ‘자백’했다.
소련대표단의 일원으로 쾨니히스베르크 농업박람회에 갔을 때였다는 것이다.
독일 측이 1930년과 1934년 두 번이나 그를 어떻게 포섭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예조프는 1930년에는 일반 정치정보기관이, 1934년에는 군사정보기관이 포섭했다고 설명했다.
뒤의 기관은 그에게 국내군사정변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개인에 관한 일부 진술을 얻기 위해 수사기관이 가혹한 심문관행을 다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예조프에게서 가까운 가족을 불리하게 만드는 자백까지 어떻게 얻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1939년 6월 19일 심문에서 예조프는 조카 빅토르·아나톨리, 조카의 남편 미하일 블리노프와 반혁명적인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예조프의 반소비에트견해에 완전히 동의했고, 빅토르는 그의 테러의도까지 공유했다고 했다.
다만 그런 임무를 실제로 맡기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사기관이 주로 관심을 가진 대상은 가족과 친구가 아니라 중앙위원회 기구와 NKVD에서 함께 일한 동료들이었다.
많은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자백한 상태였다.
이들과 대질심문을 벌일 때 두 ‘음모자’는 공동의 ‘반혁명활동’의 세부사항을 서로 조정하고, 때로는 사소한 부정확성을 서로 지적했다.
끝까지 저항한 사람도 있었다.
1939년 9월 20일 예조프와 중앙위원회 기구의 전 동료 D. A. 불라토프가 대질심문을 받았다.
불라토프는 자신에게 제기된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굴복하지 않은 채 심문실을 떠났다.
그러나 예조프의 완강한 상대가 마침내 항복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러면 조서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표준문구가 나타났다.
“대질심문을 중단해주기 바란다.
이제 내가 완전히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수행한 반소비에트 음모활동 전체를 수사에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
예조프와 다른 수감자의 대질심문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떤 피의자가 예조프와 특정인 사이의 관계를 진술하는데, 이미 첫 심문에서 자기 ‘공범’을 모두 지목한 예조프가 정보를 숨긴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단호히 부인할 때였다.
전 영국 주재 소련 무역대표 N. A. 보고몰로프와의 대질심문에서는 영국 주재 소련 공군무관 I. I. 체르니를 둘러싸고 언쟁이 벌어졌다.
보고몰로프는 예조프에게서 체르니가 음모에 참여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예조프는 그 이름을 처음 듣는다고 버텼다.
누가 거짓말하는지 알아내려는 수사관의 시도가 실패한 뒤, 대질심문은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고 끝났다.
예조프는 이미 떠안은 범죄에 다른 혐의까지 덧붙이려는 시도도 막아야 했다.
전 소련 재무인민위원부 정원국장 M. B. 그리신과의 대질심문에서는 그리신이 예조프에게 재무부문 파괴공작지시를 받았다고 비난했다.
예조프가 이미 자백한 내용과 비교하면 비교적 사소한 혐의였다.
그러나 원칙이 중요했다.
예조프는 그리신의 모든 주장을 모순으로 몰아가며 열심히 반박했다.
앞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한 시간 반 동안 말싸움이 계속되자 수사관은 인내심을 잃고 대질심문을 중단시켰다.
1940년 새해가 시작될 무렵 수사기관은 관심을 가진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얻고 사건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심문 몇 차례를 끝내 법원으로 넘길 수 있게 된 1940년 1월 8일, 예조프는 결말이 다가옴을 예감하고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듯 갑자기 병에 걸렸다.
진찰결과 대엽성폐렴이 발견되었다.
현장에서 며칠 동안 치료해도 나아지지 않자 고위수감자는 부티르카감옥 의무실로 옮겨졌다.
의사들은 할 수 있는 조치를 모두 취했고 1월 말 예조프를 체키스트들에게 돌려보냈다.
1월 31일 마지막 심문이 열렸다.
다음 날 NKVD 수사부 부부장 A. A. 예사울로프가 수사종결조서를 작성했다.
예조프는 12권으로 이루어진 형사사건기록을 열람했다.
검토한 뒤 예비수사에서 한 모든 진술을 확인하며 덧붙일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1940년 2월 1일 소련 검찰청으로 보내진 기소장은 그날 바로 검토되어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로 넘어갔다.
2월 2일 군사합의부 예비회의는 기소장에 동의하고 사건을 접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관행에 따라 검찰과 변호인이 참여하지 않고 증인도 부르지 않는 비공개재판으로 심리하기로 했다.
그날 법정을 기다리며 레포르토보감옥에 수감된 예조프를 베리야가 찾아갔다.
전임자가 법정에서도 ‘올바르게’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하려 했던 듯하다.
그러나 불쾌한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 달 동안 강요된 역할을 순순히 수행하던 예조프는 베리야를 보자 갑자기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반혁명분자·간첩·테러리스트가 아니며 그런 적도 없었고, 예비수사에서 한 모든 자백은 100퍼센트 허구라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형식적인 재판절차가 끝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진술을 철회한 사람을 감히 법정에 세우지는 못할 것이라고 계산하여 재판을 늦추려 했다.
이처럼 큰 사건이 조금이라도 지연되면 스탈린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상황을 알게 된 스탈린이 어떤 대표를 보내 사정을 조사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때가 되면 충실한 제자와 동료가 어떤 이유와 방식으로 자신을 거짓고발하도록 강요당했는지를 지도자에게 마침내 알릴 기회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러나 예조프에게 그런 계획이 있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다.
베리야는 재판을 미룰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예비수사의 자백을 법정에서 확인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말하여 예조프를 진정시키려 했을 뿐이었다.
과거 자신도 이런 약속을 여러 차례 했던 예조프는 그 가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리야의 말을 믿었고 규칙 밖의 행동을 중단할 준비가 된 듯 가장했다.
이제 빠져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예조프는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
목숨을 구할 수 없다면 적어도 다가오는 법정발언을 이용해 스탈린과 당 전체의 눈에 자신의 정직한 이름을 보존하려 했다.
39. “고통 없이 조용히 총살해주십시오”
1940년 2월 3일 N. I. 예조프 사건을 심리한 군사합의부 재판은 통상적인 절차로 시작되었다.
재판장 V. V. 울리히는 피고인이 기소장 사본을 받았고 내용을 확인했으며, 질문도 없고 재판부 기피신청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예조프에게 유죄를 인정하는지 물었다.
재판조서에 따르면 예조프는 기소장에 열거된 범죄에 관해서는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고 당을 속이는 일이 된다는 것이었다.
수사종결조서가 낭독되었다.
그 문서에서 예조프는 직접 서명하여 자기 진술이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예조프는 당시에는 그 진술을 철회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철회한다고 말했다.
어떤 외국정보기관과도 관계가 없었고, 1938년 11월 7일 붉은광장 테러행위를 준비하지 않았으며, 음모활동을 한 적도 없다고 했다.
원래 증인 없이 처리하려던 법원은 계획을 바꾸어 증인 한 명을 법정으로 불러야 했다.
예조프의 전 부인민위원 M. P. 프리놉스키였다.
그 역시 그날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으므로 아마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
* 다른 주요증인 두 명인 NKVD 국가보안총국 경호부장 I. Ya. 다긴과 수운인민위원부의 예조프 부인민위원 E. G. 예브도키모프는 그때 이미 총살된 상태였다.
프리놉스키는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에 임명된 직후 자신을 NKVD 안에 만든 음모조직으로 끌어들였다고 진술했다.
처음에는 가능한 한 ‘우익·트로츠키 블록’ 참가자들을 적발에서 숨겼고, 1937년 말에는 NKVD 내부에 테러집단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예조프의 지시에 따라 이른바 수은중독사건을 조작한 일, 예조프의 명령으로 NKVD 국가보안총국 해외부장 A. A. 슬루츠키를 살해한 일과 예조프가 아내를 독살한 일도 언급했다.
재판장 울리히의 질문에 예조프는 프리놉스키의 모든 말을 악의적인 중상이라고 답했다.
아내를 독살하지 않았고 루미날도 보내지 않았다.
슬루츠키에 관해서는 ‘지시기관’에서 그를 체포하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해외정보망 전체가 흩어져 달아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조프의 말에 따르면 슬루츠키를 제거한 이유는 전 NKVD 부인민위원 Ya. S. 아그라노프가 그를 상대로 매우 중대한 진술을 했기 때문이었다.
예조프는 프리놉스키와 함께 반소비에트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계속했다.
자신이 진술에서 음모참가자로 지목한 예브도키모프·다긴 등도 실제로는 참가자가 아니었으며, 적어도 예조프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 뒤 예조프는 다른 ‘범죄사실’도 반박했다.
그 진술들은 심문 중 구타위협을 받아 지어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재판장은 심리를 끝낸다고 선언하고 피고인에게 최후진술을 허용했다.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떻게 재판을 받으러 가야 할지, 법정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오래 생각했습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과 실마리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바로 어제 베리야와 대화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드시 총살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자백하고 모든 것을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목숨은 보존될 것이오.’
베리야와의 이 대화 뒤 나는 죽는 편이 낫더라도 정직하게 생을 마치고, 법정 앞에서 오직 실제진실만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25년간 당원으로 살며 정직하게 적들과 싸우고 적들을 제거했습니다.
총살당할 만한 범죄도 저질렀고, 그 내용은 뒤에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내 사건의 기소장이 씌운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고 나는 무죄입니다.”[490]
예조프는 총살당할 만한 자기 범죄를 말하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았다.
이어 그는 예비수사에서 한 진술을 구체적인 사례로 반박했다.
물론 대부분은 객관적 근거가 없는 부인이었다.
그러나 원한다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주장도 있었다.
모스크바 주재 독일군무관 에른스트 쾨스트링장군*과의 관계를 부인하면서 예조프는 자신의 지시로 모든 독일인과 차량을 감시했다고 말했다.
쾨스트링과 만났다면 그 시간에는 감시를 중단시켜야 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는 NKVD 국가보안총국 경호부에 보관된 문서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예비수사에서 예조프는 쾨스트링장군이 독일정보기관을 위해 일할 때의 연락책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진술했다.
예조프는 1930년 쾨니히스베르크 농업박람회에 참가한 소련대표단에 있을 때 자신을 포섭했다는 독일 경제부 관리 아르트나우라는 사람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관련명부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계속했다.
“나는 당과 정부를 상대로 어떤 음모도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음모를 적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1934년 키로프사건*을 맡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야고다와 다른 체카 배신자들**을 중앙위원회에 보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그라노프를 비롯하여 체카에 앉아 있던 적들은 우리를 속이고 라트비아정보기관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이 체키스트들을 믿지 않았고, 우익·트로츠키주의 조직***이 이 사건에 참여했다는 진실을 밝히도록 만들었습니다.
키로프 암살사건을 조사할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체키스트들이 사건을 덮으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이 문제에 관한 상세보고서를 스탈린 앞으로 작성했습니다.
스탈린은 즉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당통제위원회와 중앙위원회가 실시한 당문서검사****에서도 우리는 여러 종류의 적과 간첩을 많이 적발했습니다.
이를 체카에 알렸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스탈린은 야고다를 불러 이런 사건을 즉시 처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야고다는 매우 불만스러워했지만 우리가 자료를 제공한 사람들을 체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반소비에트음모의 참가자였다면 왜 체카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스탈린에게 거듭 제기했겠습니까?
NKVD기관에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나 혼자였습니다.
조력자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업무를 살펴본 뒤 체카기관의 모든 부서에 침투한 폴란드간첩들을 분쇄하는 일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소비에트정보망이 그들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폴란드간첩’인 나는 폴란드간첩들을 분쇄하는 일로 업무를 시작한 셈입니다.
폴란드간첩을 제거한 뒤에는 곧바로 월경자집단을 숙청했습니다.
NKVD에서의 업무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나는 체키스트 1만 4천 명을 숙청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커다란 죄는 숙청한 수가 너무 적다는 점입니다.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어느 부서장에게 체포자를 심문하라는 임무를 주면서도 속으로는 ‘오늘은 자네가 그를 심문하지만 내일은 내가 자네를 체포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방에 인민의 적과 나의 적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모든 곳의 체키스트들을 숙청했습니다.
다만 모스크바·레닌그라드·북캅카스에서는 숙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내 날개 아래 파괴공작원·사보타주범·간첩과 온갖 인민의 적을 숨긴 셈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도덕적·생활상 타락으로 비난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25년 동안 당의 눈앞에서 살았습니다.
이 25년 동안 모든 사람이 나를 보았고, 겸손함과 정직함 때문에 좋아했습니다.
내가 술을 많이 마신 것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황소처럼 일했습니다.
나의 타락이 어디에 있습니까?”[491]
* 1934년 12월 S. M. 키로프 암살을 뜻한다.
** 1930년대에도 국가보안기관을 오래된 명칭인 체카, 비상위원회,로 부르는 일이 있었다.
*** 예조프의 말실수다. 키로프 암살은 지노비예프파 조직의 소행으로 규정되었고, ‘우익·트로츠키주의 조직’은 1937년에야 만들어졌다.
**** 1935년에 실시된 당문서검사를 뜻한다.
연설의 마지막에 예조프는 말했다.
“나는 한 가지를 이해합니다.
목숨을 보존할 유일한 구실은 제기된 혐의에 유죄를 인정하고 당 앞에서 참회하며 생명을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일입니다.
당은 나의 공로를 고려하여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에는 언제나 거짓말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시 말합니다.
나는 폴란드간첩이 아니었고,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자백은 폴란드의 지주들에게 선물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일본을 위한 간첩활동을 인정하는 것도 영국귀족과 일본사무라이에게 선물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런 선물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예비수사에서 나의 이른바 테러활동을 쓸 때에는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듯했습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고 단언합니다.
더구나 정부구성원 가운데 누군가를 대상으로 테러행위를 하려 했다면 누구도 포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술을 이용해 언제든 혼자 그 추악한 일을 실행했을 것입니다.
예비수사에서 테러에 관해 말하고 직접 쓴 내용은 모두 조작입니다.
이제 최후진술을 마치겠습니다.
군사합의부에 다음의 요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내 운명은 분명합니다.
예비수사에서 내가 직접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으므로 목숨은 당연히 보존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만 부탁합니다.
고통 없이 조용히 총살해주십시오.
- 법원도 중앙위원회도 내가 무죄라는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면 노후를 보장하고, 내 딸을 길러주십시오.
조카들은 아무 죄도 없으므로 탄압하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정직하고 레닌과 스탈린의 사업에 헌신한 사람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주르벤코*의 사건을 법원이 철저히 검토해주십시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단순한 사정의 우연한 결합이며, 내가 놓친 적들이 손을 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을 스탈린에게 전해주십시오.
나는 스탈린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죽을 것이라고 전해주십시오.”[492]
* A. S. 주르벤코는 예조프가 발탁한 간부였다. 1938년 5월부터 9월까지 NKVD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 9월부터 11월까지 모스크바 NKVD국장을 지냈다. 1938년 11월 15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15일 총살되었다. 1939년 6월 14일 주르벤코와의 대질심문에서 예조프는 그가 NKVD에 만들어진 음모조직에 참여했다고 진술했다.
재판관들은 모든 말을 들은 뒤 평의하러 퇴장했다.
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었으므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돌아온 군사합의부장 울리히는 판결문을 읽었다.
기소장에 있던 예조프의 모든 혐의가 열거되었고, 마지막에는 재산몰수를 수반한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1940년 2월 4일 NKVD 사령관 V. M. 블로힌은 울리히가 서명한 명령서를 받았다.
전날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가 열세 명에게 내린 최고형을 즉시 집행하라는 내용이었다.
예조프 외에도 유명한 체키스트 몇 명의 이름이 있었다.
예조프의 부인민위원 M. P. 프리놉스키, NKVD 국가보안총국 방첩부장 N. G. 니콜라예프주리드, 특별부장 N. N. 표도로프 등이었다.
다른 사형수 가운데에는 북방함대 사령관 K. I. 두셰노프, 전 서시베리아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이자 이후 소련 농업인민위원이 된 R. I. 에이헤, 중간급 관료 몇 명이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던 M. V. 댜추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독일에서 농업노동자로 일했고, 독일공산당과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에 동시에 가입한 사람이었다.
1939년 6월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소련 국경을 넘어 들어오다 체포되었고, 이제 간첩혐의로 총살형을 받았다.
명령대로 판결은 곧바로 집행되었다.
그러나 열세 명 가운데 열 명만 그날 처형되었다.
예조프·프리놉스키·니콜라예프주리드는 2월 4일에는 죽지 않았다.
예조프와 니콜라예프주리드는 2월 6일, 프리놉스키는 다시 이틀 뒤 총살되었다.
이들의 처형이 왜 미뤄졌는지, 사형이 집행되기 전 며칠과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40. 에필로그를 대신하여
예조프의 체포는 가장 가까운 친족들의 운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체포된 날 조카 세 명도 함께 구금되었다.
중앙항공엔진연구소 기계기술자 아나톨리, 카가노비치 기념 모스크바산업아카데미 학생 빅토르, 어느 의류작업장에서 다림질공으로 일하던 세르게이였다.
앞에서 말했듯 1939년 6월 19일 심문에서 예조프는 아나톨리와 빅토르가 자기 반소비에트견해를 공유하고 테러성향에도 동조했다는 진술을 강요당했다.
그 뒤 수사기관은 조카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먼저 아나톨리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예조프의 테러의도를 알고 있었다고 ‘자백’했을 뿐 아니라, 동생 빅토르와 함께 그 범죄계획의 실행을 온갖 방식으로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아나톨리와 대질심문을 한 뒤 빅토르도 항복해야 했다.
1940년 1월 말 두 사람은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에 출정하여 총살형을 받았다.
따라서 예조프가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무 죄 없는 조카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했을 때에는 두 사람 모두 이미 세상에 없었다.
세르게이는 예조프와 특별히 가깝지 않아 형제들보다 덜 가혹한 일을 겪었다.
1939년 10월 23일 NKVD 특별협의회는 그를 사회적으로 위험한 분자로 규정하여 교정노동수용소 8년형을 내렸다.
형기를 마친 1946년 5월 22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1952년 1월 26일 소련 국가보안부 특별협의회는 이전과 같은 이유로 그에게 5년간의 유형을 선고했다.
1953년 5월 말 당시 발표된 사면에 따라 완전히 풀려났고, 3년 뒤 복권되었다.
예조프와의 혈연 때문에 희생된 또 다른 사람은 남동생 이반이었다.
두 사람은 1906년까지 마리얌폴에서 함께 살았다.
그 뒤 예조프가 페테르부르크로 옮겼고, 1913년 이반도 이곳으로 왔다.
그러나 북방의 수도에서 형제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이반은 페테르부르크의 악명 높은 불량배집단 ‘포르트아르투르’와 어울리며, 드물게 만날 때마다 자신보다 약한 형을 때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 번은 술친구들과 거리에서 예조프를 폭행했다.
다른 때에는 누이 예브도키야의 아파트에서 예조프를 만나 손에 잡힌 만돌린으로 또다시 때렸다.
예조프는 이 일을 끝내 용서하지 못했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에 친족관계라고 부를 만한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오랜 단절 뒤 처음 다시 만난 것은 1930년이었다.
이반이 모스크바로 이사하고, 예조프와 함께 살던 어머니를 때때로 방문하면서 형과도 만났다.
최종적인 결별은 1933년에 일어났다.
이반은 예조프의 아파트에서 형의 친구이자 소련 국가은행 이사회 부의장 L. E. 마리야신을 만났다.
노동자 급여지급이 늦어진다고 비난하며 욕설과 주먹다짐을 벌였다.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에는 이반이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다 민병대에 붙잡히면 곧바로 인민위원의 동생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그 결과 즉시 풀려난다는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이 지나치게 많은 이 친척에게 어떤 식으로든 제동을 걸어야 했다.
예조프는 NKVD 국가보안총국 작전부 부부장 Z. I. 볼로비치에게 문제를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볼로비치는 이반을 불러 인민위원의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꾸짖고, 항상 감시할 수 있도록 작전부의 관리·지원 업무에 취직시키라고 지시했다.
이반은 NKVD가 소유한 일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1938년 10월까지 일하다 음주 때문에 해고되었다.
예조프가 체포된 지 2주 뒤 이반도 붙잡혔다.
10개월간의 수사에서 간첩행위와 스탈린을 대상으로 한 테러준비 혐의를 받았다.
1940년 1월 21일 예조프의 조카들과 같은 날 총살되었다.
예조프의 친족 가운데 가장 어린 희생자는 당시 일곱 살이 되어가던 양녀 나탈리야였다.
아버지가 체포된 뒤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널리 알려진 예조프라는 성을 양어머니의 성인 하유티나로 바꿨지만, 부칭은 니콜라예브나로 유지했다.
나탈리야는 뒤에 중학교와 직업학교를 마치고 펜자의 시계공장에서 약 4년 동안 일했다.
이어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1958년 문화계몽활동자 자격증을 받고 졸업한 뒤 배치에 따라 마가단주로 갔고, 그때부터 그곳에서 살았다.
예조프가 탄압당했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1950년대 말까지 나탈리야 하유티나뿐 아니라 다른 모든 소비에트시민에게도 예조프에 관해 무엇인가를 알 방법은 없었다.
1939년 4월 10일 이후 그의 이름은 언론에서 사라졌다.
그 무렵에도 예조프의 이름은 기관신문 『수운』에서만 겨우 찾아볼 수 있었다.
중앙신문에 마지막으로 이름이 나온 것은 1939년 1월 22일이었다.
레닌 사망 15주기 추도회의에 참석한 당과 정부지도자를 열거한 기사였다.
1939년 4월부터 예조프의 이름은 과거 그 이름을 부여받은 기업·기관과 지역명에서 점차 제거되었다.*
몇 달 뒤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탈린의 가장 가깝고 충실한 동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흔적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예조프의 이름을 사용한 곳에는 체르케스자치주의 행정중심지 예조보체르케스크, 아르한겔스크·옴스크·치칼로프 등 여러 주의 지구, 루베즈노예 화학콤비나트, 키예프 ‘디나모’ 경기장, NKVD 국경군·내무군 지휘간부 고급학교 등이 있었다.
오랜 공백 뒤 예조프의 이름이 처음 다시 등장한 것은 N. S. 흐루쇼프의 유명한 보고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였다.
흐루쇼프는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비공개회의에서 이 보고를 했다.
그러나 스탈린탄압문제가 언론에 나타나고 예조프의 행동이 널리 알려지기까지는 다시 몇 년이 걸렸다.
그때 나탈리야 하유티나는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다정하고 세심한 아버지였던 예조프가 공무에서는 전혀 다른 특성을 보였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았다.
그런 행동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수많은 동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나라의 역사에 들어갔다.
브레즈네프 ‘정체기’인 1960년대 말 탄압문제는 다시 금기가 되었다.
예조프의 이름은 다시 20년 동안 대중의식에서 사라졌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7년에야 언론에 되돌아왔다.
그때부터 스탈린범죄의 역사가 더욱 깊이 연구되었다.
당과 국가문서보관소에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서가 공개되었고, 예조프의 수사와 재판자료 일부도 포함되었다.
앞에서 말했듯 예조프에게는 간첩형태의 조국반역, NKVD 내부의 반혁명음모조직 창설, 파괴공작, 당과 정부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테러준비 등이 적용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뒤 이런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1995년 한 역사연구자는 이 점을 N. N. 하유티나에게 편지로 지적하고, 검찰청에 양부의 복권을 신청하라고 권했다.
그녀는 즉시 결심하지 못했다.
사실이 공개될 가능성이 두려웠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예조프의 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많은 주민이 탄압피해자의 자녀나 손자녀인 마가단주에서는 예조프뿐 아니라 징벌기관 직원 전반을 바라보는 태도가 매우 분명했다.
그러나 마침내 N. N. 하유티나는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국가가 법치국가의 규범과 가치를 지향한다고 선언한 상황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게 했다.
1995년 말 그녀는 러시아연방 검찰총장 앞으로 신청서를 보냈다.
“러시아연방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에 관한 법률」 제3조*에 따라 양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를 복권하라는 지시를 내려주시기를 요청합니다.
1940년 2월 2일** V. V. 울리히가 재판장을 맡은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는 아버지에게 총살형을 선고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의 출판물을 분석하면 양부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493]
*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에 관한 법률」은 1991년 10월 18일 채택되었다.
** 실제로는 1940년 2월 3일이다.
N. N. 하유티나는 기소항목을 모두 열거한 뒤, 어느 것도 사실과 일치하지 않고 어떤 사실자료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N. I. 예조프는 어떠한 배신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탈린의 의지를 집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간첩행위 등 모든 ‘자백’이 구타로 강요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기소장이 내게 씌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나는 무죄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기소장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트로츠키의 모든 동조자와 동료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내린 스탈린의 의지를 실행하는 사람으로 이용당했습니다.
그 임무를 완수한 뒤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제거되었습니다.
N. I. 예조프는 간첩·테러리스트·음모자가 아니라 당시 지배한 피비린내 나는 독재체제의 산물이었습니다.
소비에트인민 앞에서 예조프의 책임은 I. V. 스탈린, V. M. 몰로토프, L. M. 카가노비치, A. Ya. 비신스키, V. V. 울리히, K. E. 보로실로프와 당시의 수많은 당·정부지도자보다 결코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법원의 판결상 인민의 적이 아닙니다.
친족들은 자기 성으로 살아가며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입니다.
반면 다정하고 세심했던 나의 양부는 지금까지도 자기 인민의 사형집행인으로 묘사됩니다.
크론시타트와 탐보프 ‘반란’ 당시 수천 명의 수병과 농민을 총살한 M. N. 투하쳅스키는 완전히 복권되었고 지금은 인민의 적이 아닙니다.
N. I. 예조프의 가장 가까운 보좌관인 M. D. 베르만, S. B. 주콥스키 등도 복권되었습니다.
이상의 사정을 고려하여 러시아연방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에 관한 법률」 제3조에 따라 양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를 복권하라는 지시를 내려주시기를 요청합니다.”[494]
예조프의 복권가능성을 검토하는 일은 군사최고검찰청에 맡겨졌다.*
검찰은 연방보안국에 그의 형사사건기록을 요청했다.
제출된 자료를 검토한 뒤 어떤 결정을 내리기에는 문서가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1996년 3월 14일 연방보안국 수사국에 추가자료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1937년과 1938년 이른바 ‘대량작전’의 근거가 된 예조프 서명의 소련 NKVD 문서, 탄압규모에 관한 통계, 같은 기간 NKVD 지도간부 작전회의 의정서, 일부 전 NKVD 직원의 형사사건기록 등이었다.
* 예조프는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므로 법률상 군사최고검찰청이 복권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1996년 9월 말까지 요청자료가 수집되어 군사최고검찰청으로 보내졌다.
제출된 문서에는 연방보안국 중앙문서보관소의 확인서도 있었다.
문서보관소에서는 예조프가 폴란드·독일·영국·일본정보기관의 요원이었다는 정보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군사최고검찰청이 상황을 깊고 전면적으로 검토하여 공정하고 편견 없는 결정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다.
요청한 추가자료 목록만 보아도 누구도 예조프의 복권을 진지하게 검토할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조프의 NKVD 명령, 회의연설, 탄압규모 통계 등은 1940년에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혐의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군사검찰 직원들은 예조프가 어떤 경우에도 복권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앞으로 할 일은 이미 정해진 결과에 조금이나마 법률적인 외형을 부여하는 것뿐이었다.
오랫동안 직무상 스탈린탄압 희생자들의 복권을 처리해온 검찰직원이라면 예조프에게 적용된 죄목을 한 번 보기만 해도, 그것이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전형적인 조작사건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시기 체포된 스탈린의 동료 대부분에게 비슷한 혐의가 제기되었지만, 단 한 건도 입증된 적이 없었다.
이런 사건은 모두 피의자의 개인자백과 같은 수준의 근거 없는 ‘공범’ 진술에 의존했으며, 객관적인 유죄증거는 전혀 없었다.
자백을 받아낸 방식도 잘 알려져 있었다.
예조프 자신도 법정에서 “가장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예조프의 수사기록을 넘겨보며 조작의 모든 흔적을 확인한 검찰은 반세기 전의 판결에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을 순전히 법률적인 관점에서 처리하는 경우였다.
예조프의 복권은 법률행위인 동시에 정치행위였다.
러시아여론에서 복권은 구체적인 기소조항에 따른 유죄판결이 근거 없었다는 확인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전반적인 무죄증명을 주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예조프처럼 악명 높은 인물의 판결을 취소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스탈린시기 국가보안기관의 다른 지도직원들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친족들의 시도도 이전에 있었다.
검찰은 사실상 모든 시도를 성공적으로 막았다.
예조프에게 예외를 인정할 이유도 없었다.
그를 복권하고 나면 다른 사람 모두에게 거절하기가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여 예조프의 복권가능성을 검토하는 작업은 결국 그에게 내린 판결의 적법성을 입증하는 일로 바뀌었다.
총살형이 가능한 국가범죄 가운데 적어도 하나를 예조프가 실제로 저질렀다는 점을 입증해야 했다.
그러면 1940년의 판결을 재검토할 필요가 없었다.
군사최고검찰청은 이후 1년 반 동안 바로 이 일을 했다.
1998년 2월 25일 작업이 마침내 끝났다.
검찰이 작성한 예조프 형사사건 검토의견서는 법률에 따라 최종결정을 내려야 하는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로 보내졌다.
군사최고검찰청은 간첩행위와 아내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국가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테러준비와 NKVD 내부음모조직 창설혐의는 아예 무시했다.
검토의견서는 예조프에게 적용된 범죄 가운데 파괴공작,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형법 제58조 7항, 하나에만 집중했다.
예조프가 유죄판결을 받을 당시 이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파괴공작은 반혁명적인 목적을 가지고 국가기관과 기업을 그에 맞게 이용하거나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함으로써 국가의 산업·운수·무역·통화유통·신용제도 또는 협동조합을 훼손하는 행위이다.”[495]
예조프에게 법정에서 제기된 혐의도 대략 이런 형태였다.
“소비에트인민 대중의 동정과 지지를 얻지 못한 예조프와 가까운 공범 예브도키모프·프리놉스키 등은 배신계획을 실제로 실행하기 위해 소련의 여러 당·소비에트·군사기관 등에 간첩·음모간부를 만들고 배치했다.
중앙과 지방의 가장 중요한 당·소비에트기관, 특히 내무인민위원부 업무에서 광범위한 파괴공작을 벌였다.
당에 충실한 간부를 제거하고 소련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며 노동자들의 불만을 도발했다.”[496]
1998년에는 50년 전 기소장의 이런 문구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군사최고검찰청 최종문서에서는 예조프의 ‘배신계획’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범죄는 다음과 같이 구체화되었다.
“사건에서 수집된 증거는 N. I. 예조프가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한 정치탄압을 조직하고, 불법체포와 피의자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시행하며 형사사건자료를 조작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아 실제로 국가권력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손해를 입히며 국가를 훼손하고 약화시키려는 행위를 저질렀다.”[497]
이 결론에 따르면 목적은 알 수 없지만, 국내의 대량정치탄압과 그에 관련된 모든 일을 조직한 사람은 예조프였다.
검찰은 1937년과 1938년의 탄압규모 통계와 내무인민위원 작전명령 제00447호, 대량작전 개시, 제00485호, 폴란드인, 제00486호, ‘인민의 적’의 아내, 제00693호, 월경자,를 근거로 들었다.
검찰의 견해에 따르면 이 명령 뒤 시작된 대량테러는 국가 지도부가 개입하고 나서야 중단할 수 있었다.
1938년 11월 17일 중앙위원회와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공동결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검찰은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N. I. 예조프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내무인민위원으로 재직하며 국가의 기본법인 소련헌법과 법률을 거칠게 짓밟고, 대량탄압을 사실상 합법화했다는 점이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그는 권력을 남용하고 부여된 권한을 넘어섰으며, 명백하게 범죄적인 명령과 지령을 발행했다.
수십만 명의 무고한 소비에트시민·군인·과학자·국가와 사회활동가를 고의로 제거하는 형태의 자의와 불법을 전국에 심었다.
이는 소비에트국가의 국제적 권위, 방위력과 국가안보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주었다.
국가산업과 운수를 훼손하고 기관과 조직의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했다.
이처럼 국가에 특별히 위험한 여러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정당하게 형사책임을 지게 되었다.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형법 제58조 1항 ‘a’, 제58조 7항, 제19조·제58조 8항과 제58조 11항에 따라 내린 형량은 범죄의 중대성에 부합하며 복권대상이 아니다.”[498]
물론 예조프의 활동은 범죄였다.
그러나 당시 법률의 관점이 아니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렇다.
당시에는 현대의 검찰이 예조프의 죄로 제시한 모든 일이 나라의 정치지도부가 내린 명령을 열심히 집행한 것에 불과했다.
검찰의견서 어디에도 예조프가 범죄행위를 한 동기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범죄수사에서 가장 먼저 밝히는 문제가 동기다.
1940년의 기소논리는 오늘날 어떻게 평가하든 자체의 논리는 있었다.
예조프는 위장한 반혁명분자이자 외국간첩으로, 국내사회주의체제를 전복하는 것이 목표였고, 모든 범죄는 그 목적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런 목적이 없다면 예조프의 행동은 단순히 사디즘적인 행위가 의미 없이 이어진 것으로 변한다.
더구나 이런 목적이 없다면 예조프가 실제로 한 일은 제58조 7항, 파괴공작,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이 조항은 반혁명적 의도를 가지고 실행한 행위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1938년 12월 31일 소련 최고재판소 전원회의 결정도 사건의 정황을 통해 피고인이 반혁명목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이 확인될 때에만 제58조 7항을 적용할 수 있다고 특별히 강조했다.[499]
오늘날의 시각에서 예조프를 반혁명분자로 볼 근거가 전혀 없다면 제58조 7항도 적용할 수 없다.
이 조항은 다른 모든 조항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스탈린의 뜻을 실행한 뒤 1937년과 1938년 국내에서 벌어진 모든 일의 책임을 떠안고 죽어야 했던 한 사람의 살해를 합법화하는 수단이었다.
예조프가 실제로 한 행동은 간첩행위나 아내 살해 같은 허구가 아니라면 당시 형법상 어떤 총살조항에도 해당하지 않았고, 해당할 수도 없었다.
국가지도자의 범죄적인 명령을 열심히 집행한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은 소비에트형법에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예조프의 행동은 범죄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간첩행위 같은 환상적인 혐의를 여러 가지 지어내야 했다.
범죄적이었던 것은 자기 인민을 상대로 한 국가권력 자체의 활동이었다.
원칙적으로 검찰조사의 주요결론은 바로 이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예조프의 복권으로 이어졌고, 그런 결과는 용납할 수 없었다.
군사최고검찰청은 전통적인 길을 선택했다.
1950년대 말부터 검찰은 친족들의 진정을 받아 스탈린시기 NKVD 직원들이 재판에서 받은 혐의의 타당성을 조사해왔다.
복권을 거부하는 결정에서 여러 혐의는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지만,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대량탄압과 허용되지 않은 수사방법*에 관여했으므로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형법 제58조 7항이 정한 범죄의 특성에 해당하며 복권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 실제로는 앞에서 보았듯 당시 그 방법들이 충분히 허용되었고, 공식적인 금지조치는 1953년 4월에야 나왔다.
예조프 사건에서도 검찰은 제58조 7항을 넓게 해석하면 문구에 집어넣을 수 있는 범죄에 그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집중했다.
피고인에게 반혁명적인 의도가 없다면 이 조항을 원칙상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았다.
동시에 예조프의 딸이 1991년 채택된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군사최고검찰청에 신청했으므로, 그 법률에 따라서도 요청을 거절할 필요가 있었다.
법률의 한 조항은 복권되지 않는 사람들의 범주를 열거했다.
간첩행위, 군사·국가기밀 제공, 군인의 적군 측 귀순, 테러행위 또는 파괴공작으로 정당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었다.
검찰은 이 조항도 복권이 불가능하다는 또 하나의 근거로 인용했다.
그러나 간첩혐의는 검찰 자신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예조프에게 테러행위를 적용한 것도 아니고 준비혐의만 제기했다.
나머지 항목은 형식적으로도 그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아마 이 때문에 1998년 3월 초 러시아연방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가 예조프 사건에 관한 검찰의견서를 받아 검토했을 때, 복권을 거절하려고 제시한 방식이 충분히 믿을 만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군사재판관들은 이 문제에서 자기 길을 가기로 했다.
검찰의 방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전혀 다른 논거를 전면에 세웠다.
군사합의부의 결정은 1998년 6월 4일 수많은 언론인이 참석한 공개재판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재판부는 검찰의 주요논거를 되풀이하고 1940년 예조프의 유죄판결이 완전히 정당했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복권을 거부하는 결정에는 전혀 다른 근거를 붙였다.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에 관한 법률」의 목적은 국가테러의 결과 탄압을 받은 희생자를 복권하는 데 있다.
법률의 의미에 따르면 탄압희생자는 국가의 박해로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시민이어야 한다.
그 국가정책을 실행한 사람은 관련공직자이며, 특히 최고위직에 있던 사람이다.
예조프는 국가내무기관의 책임자였으므로 의심할 여지 없이 여기에 해당한다.
추가조사자료를 보면 바로 그의 재임과 지도 아래 탄압이 조직적인 성격을 띠고 대규모로 확산되었다.
예조프는 무고한 시민에 대한 대규모 불법박해를 조직하고 직접 수행한 국가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므로 탄압의 직접적인 책임자인 예조프는 자신이 조직한 테러의 희생자로 인정될 수 없다.
따라서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에 관한 법률」의 실체적 적용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500]*
* 군사합의부는 간첩혐의와 아내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입증부족으로 삭제하자는 검찰의 제안을 심리하지 않았다.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에 관한 법률」은 부분복권을 규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형사소송법이 정한 일반절차에 따라 검찰이 이 문제를 처리하라고 권고했다.
군사합의부가 제시한 복권거부의 이론적 근거는 문제를 법률적인 것, 유죄인가 무죄인가,에서 철학적인 것의 한 형태로 바꾸었다.
탄압조직에 관여한 사람이 탄압의 희생자로 인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군사합의부가 검찰의 견해에 동의했을 경우 입장을 뒷받침하려 사용해야 했던 비판에 취약한 논거를 피할 수 있었다.
이제 결정에 대한 반론은 논리적인 수준에서만 제기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반론의 근거도 충분히 존재했다.
실제로 예조프가 한동안 테러의 도구였다가 뒤에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군사합의부 결정이 말한 ‘자신이 조직한 테러’가 아니라 스탈린이 조직한 테러의 희생자였다고 해야 한다.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에 관한 법률」 제3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범죄와 그 밖의 범죄에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복권대상이 된다.”[501]
예조프는 바로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범죄와 그 밖의 범죄에 유죄판결을 받았다.
법률 어디에도 희생자의 과거생활이 정치적·도덕적 또는 다른 측면에서 흠이 없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1930년대 많은 지방당지도자는 NKVD 지하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탄압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그들의 복권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은 이전의 검찰과 마찬가지로 이런 모순을 깊이 검토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찾아낸 방식이 가장 적은 번거로움으로 사건을 끝낼 수 있었으므로 그대로 멈췄다.
그 결과 러시아 사법기관이 3년 동안 일한 끝에 예조프는 ‘인민의 적’ 명단에 남았다.
법률적으로 올바른 결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동의하지 않기 어렵다.
따옴표 없는 ‘인민의 적’은 예조프라는 개인과 사회현상 양쪽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M. S. 보슬렌스키는 『노멘클라투라』에서 그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조프는 평범한 고위관료였고, 지도부의 어떤 지시든 특별히 성실하게 수행했다는 점에서만 두드러졌다.
중앙위원회 공업부에서 공장건설을 조직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조직했다.
NKVD에서 고문하고 살해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고문하고 살해했다.
예조프는 집행자였다.
어떤 스탈린주의 노멘클라투라 관료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예조프가 러시아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사형집행인으로 부당하게 평가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스탈린주의 임명관료가 잠재적으로 그런 사형집행인이었다는 뜻이다.
예조프는 지옥에서 나온 괴물이 아니라 노멘클라투라에서 나온 괴물이었다.”[502]
보슬렌스키가 스탈린주의 노멘클라투라에 내린 평가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예조프가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더 성실한 집행자였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명령을 받아 집행했을 뿐 아니라, 말하자면 마음의 부름에 따라 행동한 집행자였다.
전쟁을 앞두고 국내에서 대규모 정치숙청을 실시하기로 계획한 스탈린이 바로 예조프를 보좌자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국내역사에 남는 것은 정당하다.
공산주의독재의 시대가 나라에 가져온 재앙을 상징하는 인물들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