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파블류코프, 『예조프: 전기』 한국어 번역
PeopleNikolai Yezhov TermsYezhovshchina EventsThe Great Purge
제5부. 비극의 마지막 막
제31장 뜻밖의 임명
제32장 류시코프의 탈출
제33장 간부문제
제34장 베리야의 등장
제35장 무어인은 자기 일을 다했다……
제36장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제37장 올가미가 조여오다
제38장 수하놉카의 고문실에서
제39장 “고통 없이 조용히 총살해주십시오”
제40장 에필로그를 대신하여
31. 뜻밖의 임명
소비에트사회의 근본적인 숙청은 점차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이제 예조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에서 지도자에게 도착하는 시민들의 편지와 진정서를 통해, 스탈린은 나라를 휩쓴 테러의 물결을 많은 사람이 NKVD 기관의 독자적인 폭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조프를 계속 자신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남겨두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런 독자행동도 없었으며, 모든 일이 최고권력의 인지와 명령 아래 이루어졌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예조프와 결별해야 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
대량작전이 끝난 뒤 그를 직위에서 해임하고, 외국정보기관의 지시에 따라 소비에트인민을 상대로 근거 없는 탄압을 벌인 위장한 적이었다고 국가에 발표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여러 이유 때문에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첫째, 스탈린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충성스러운 제자’를 그토록 잘못 판단했는지, 왜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은 채 불과 몇 달 동안 수십만 명의 무고한 사람을 탄압하도록 내버려두었는지라는 의문이 즉시 생겼을 것이다.
둘째, 국내에서 실시된 탄압이 근거 없었다고 인정하면 모든 재판과 수사사건을 재검토해야 했다.
피해자들을 무죄라고 선언하고, 감옥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석방해야 했다.
셋째, 스탈린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은 예조프가 그동안 누구의 명령을 그토록 열심히 수행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모든 책임을 예조프에게 떠넘기려 한다면, 스탈린은 측근들이 익숙하게 생각해온 현명한 통치자가 아니라 비겁하고 교활하며 다음에는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든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일 터였다.
이처럼 예조프를 공개적으로 고발하는 방안은 적절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스탈린은 결국 예조프에게 공식적인 혐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부드럽고 단계적으로 게임에서 밀어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동시에 예조프가 정치무대에서 제거된다는 사실 자체는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높은 신임을 정당화하지 못했고, 인민의 적을 뿌리 뽑는 중요하고 책임 있는 업무에서 심각한 착오와 실수를 저질렀다는 의미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자신의 평판이 전혀 손상되지 않으리라고 스탈린이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예조프를 정치의 높은 단상으로 끌어올리고 적과 싸우는 임무를 맡긴 사람은 스탈린 자신이었다.
그의 활동을 감시해야 했던 사람도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아무런 손실 없이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방안의 손실은 다른 선택보다 그나마 작았다.
예조프를 어떻게 처리할지 대략적인 방향을 결정한 뒤에는, 이를 실무적으로 어떻게 실행할지도 생각해야 했다.
첫 단계로 그에게 어떤 추가직책을 찾아줄 수 있었다.
대량탄압의 시기가 끝난 뒤 특별한 관심을 끌지 않고 내무인민위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때, 과도한 업무부담은 NKVD를 떼어내어 책임을 줄여주어야 한다는 설득력 있는 논거가 될 수 있었다.
또 업무가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은 예조프를 도울 경험 많은 부인민위원을 임명하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었다.
그 부인민위원은 이후 인민위원부를 이끌 수도 있었다.
예조프에게 제안할 새 직책은 당연히 그의 지위에 맞아야 했다.
최소한 인민위원급보다 낮아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새 인민위원평의회는 1938년 1월에 비교적 최근 구성되었으므로, 최초의 인민위원 자리는 4월 초에야 비었다.
철도인민위원 A. V. 바쿨린과 수운인민위원 N. I. 파호모프가 직위에서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철도인민위원부는 예조프에게 맡기기에는 지나치게 중요한 기관이었다.
반면 수운인민위원부, 약칭 NKVT,는 매우 적합했다.
1938년 4월 8일 정치국 결정으로 예조프의 새 임명이 승인되었다.
스탈린이 어떤 논거로 자신의 선택을 설명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대량작전의 시기가 끝나가므로, 훌륭한 조직가이자 위장한 반혁명에 타협하지 않는 투사가 필요한 다른 업무영역도 생각해야 한다는 취지였던 듯하다.
소비에트 관행에서 여러 인민위원직을 겸임하는 일은 그 자체로 특별하지 않았지만 비교적 드물었다.
이번에는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듯, 함께 비어 있던 또 하나의 인민위원 자리도 겸직으로 중공업인민위원 L. M. 카가노비치에게 주어졌다.
다만 카가노비치의 임명에는 일정한 논리가 있었다.
그는 이미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철도인민위원부를 지휘한 적이 있었다.
또 제품생산과 운송이라는 서로 연결된 생산과정의 두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한 사람이 함께 책임질 때 해결하기가 더 쉬웠다.
그러나 NKVD와 NKVT 사이에는 발음이 비슷한 약칭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예조프 자신도 수운과 어떤 관계도 맺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 또 하나의 기관을 맡긴 것은 기능적인 의미가 없었으며, 단순히 업무량을 기계적으로 늘렸을 뿐이다.
예조프 자신이 권한범위의 확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새 임명의 기묘함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NKVD의 모든 역량을 인민의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는 데 투입해야 할 듯한 시기에 그 책임자에게 갑자기 부차적인 업무영역이 추가되어, 주요임무에서 관심을 분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막 끝난 ‘우익·트로츠키 블록’ 재판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적들은 국가의 최고 체키스트의 건강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된 업무부담은 더욱 부적절해 보였다.
한 여성의사는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에 편지를 썼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가 현재 담당하는 두 개의 이처럼 거대한 업무에 대한 책임은, 이미 손상된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료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이것이 그리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에서 이 소식을 읽었을 때,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걱정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376]
그러나 특별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두 인민위원부를 동시에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없었던 예조프는 NKVD 업무의 상당부분을 제1부인민위원 M. P. 프리놉스키에게 넘겼다.
수운인민위원부에도 첫날부터 믿을 만한 조력자가 나타났다.
국가보안기관의 유명한 원로인 E. G. 예브도키모프였다.
예조프는 1938년 4월 10일, 자신의 새 임명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이틀 전에 그를 제1부인민위원으로 임명하도록 정치국의 승인을 받았다.
예브도키모프가 수운과 어떤 관계도 없기는 예조프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새 인민위원에게는 업계의 전문가라기보다 충성스럽고 활동적인 보좌관이 필요했다.
예브도키모프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예조프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두 사람은 1936년 예조프가 NKVD를 이끌게 된 뒤 더욱 가까워졌다.
수운인민위원부는 처음부터 체키스트 출신 간부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예조프와 예브도키모프는 새 기관에 도착하자마자 이전 지도부가 남긴 간부들을 조사했고, 다수에게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거나 업무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신문 『수운』은 1938년 4월 24일자에서 새 인민위원의 임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예조프 동지는 수운노동자들 앞에 엄청난 과제를 세웠다.
수운에서 인민의 적이 남긴 잔재를 끝까지 제거하고, 볼셰비키적 질서를 수립하며, 수운을 선진적인 사회주의 운수부문으로 만들어야 한다.”[377]
이틀 뒤 같은 신문은 예조프가 4월 23일 열린 인민위원부 지도간부회의에서 했다는 발언을 실었다.
예조프는 수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간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훌륭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지도부에 배치해야 한다.
신뢰할 수 없는 자와 게으름뱅이, 관료, 무능한 사람을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한다.”[378]
예조프가 새로운 업무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실제로 간부숙청이었다.
그는 각 총국과 선박회사의 지도부에 관한 자료를 요구했다.
정치적 전력과 사회적 출신, 당내 반대파와의 관계, 과거 체포된 사람들과의 친분을 조사했다.
NKVD에서 검증을 통과한 체키스트들을 수운인민위원부의 책임 있는 직책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예브도키모프는 실제적인 인사교체와 일상업무를 대부분 담당했다.
예조프 자신은 인민위원부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로 간부문제나 현재의 긴급한 사안을 처리하는 데 몇 시간 머물렀다.
우선적인 인사문제가 대체로 해결된 뒤에는 수운의 만성적인 낙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되었다.
생산규율을 강화하고 업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을 엄하게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부족했다.
동일한 수준의 재정과 노동력의 질, 낡은 장비 등의 조건에서 짧은 시간 안에 수운노동자의 효율을 급격히 높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소련에서는 이미 그런 방법이 발명되어 있었다.
1935년 8월 한 교대근무에서 착암기를 이용한 석탄채굴량 기준을 열네 배 초과한 돈바스 광부 A. G. 스타하노프의 이름을 딴 스타하노프운동이었다.
같은 해 11월 공업·운수부문 스타하노프 노동자들의 전연방회의가 열렸다.
스탈린은 스타하노프의 발의를 높이 평가하며, 바로 이 길을 통해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데 필요한 노동생산성 수준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 스타하노프 노동자는 국민경제의 모든 부문에 나타났다.
수운인민위원부에도 있었지만, 스타하노프 자신이나 철도노동자 P. F. 크리보노스, 방직공 비노그라도바 자매처럼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수운부문에는 스타하노프운동을 이끌고 질적으로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지도자가 분명히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발견되었다.
1938년 5월 20일 신문 『수운』에는 수운아카데미 수강생 A. F. 블리드만이 예조프에게 보낸 공개편지가 게재되었다.
블리드만은 오랫동안 하역운반기의 효율을 개선하는 문제를 연구했고, 당시 드네프로페트롭스크항에서 자신의 발상 가운데 하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말했다.
“5월 16일에서 17일로 넘어가는 밤, 드네프로페트롭스크항의 스타하노프 작업반과 함께 제86호 바지선에 석탄을 선적하면서 ‘마켄젠’ 운반기의 생산량을 504톤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이는 기존기준인 32톤의 1,575퍼센트입니다.”
그는 이 성과가 당과 정부가 수운에 기울이는 막대한 관심의 결과라고 했다.
“동지를 인민위원으로 임명한 것은 모든 수운노동자에게 영감을 주었고, 우리를 더 큰 사업과 수운을 국민경제의 선진부문으로 바꾸기 위한 투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편지는 운반기의 생산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싸우고, 새 작업방식을 광범한 수운노동자들에게 전파하는 데 모든 힘과 능력을 바치겠다는 약속으로 끝났다.
블리드만 방식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기존 관행에서는 하역노동자들이 화물을 손으로 운반기에 날랐고, 이들의 작업속도가 선적속도를 결정했다.
블리드만은 하역노동자를 추가 운반기 세 대로 대체했다.
이 운반기들을 배치하여, 해안에 원뿔모양으로 높이 쌓아둔 석탄이 자연경사각에 따라 중력으로 운반기에 흘러내리게 했다.
주운반기로 들어가는 석탄량이 크게 늘자 모터의 출력을 높였다.
그 결과 벨트의 이동속도는 네 배로 증가했다.
블리드만 방식은 큰 의미가 있었다.
하역작업의 기계화가 미약했으므로 부두와 항구는 실제로 선박이 멈춰 서는 곳이었다.
선박은 전체시간의 50∼70퍼센트를 선적과 하역을 기다리며 이곳에서 보냈다.
1938년 5월 20일 예조프의 부인민위원 Z. A. 샤시코프는 답신전보를 보내 블리드만의 기록을 축하하고, 그의 스타하노프 노동이 모든 수운노동자의 모범이 되리라는 희망을 표했다.
블리드만은 모스크바로 불려왔다.
6월 2일 예조프와 인민위원부의 다른 지도자들이 그를 만났다.
신문은 이 만남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블리드만 동지는 자신의 작업방식을 도입하기 위해 3년 동안 어떻게 싸웠는지를 인민위원에게 이야기했다.
드네프로페트롭스크항에서 활동한 적들은 블리드만 동지를 방해하고 그의 대담한 발의를 깎아내렸으며, 두 차례 해고하고 작업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콤소몰에서 제명하겠다고까지 위협했다.
예조프 동지는 블리드만 동지에게 어떤 화물을 그의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 해양선박의 선적에도 사용할 수 있는지 등을 상세히 질문했다.
인민위원은 모든 수운부문에 블리드만 방식을 도입하기 위한 특별작전반을 수운인민위원부에 설치하라고 지시했다.”[380]
1938년 6월 15일 예조프는 「하역작업에 스타하노프 방식을 도입하기 위한 작전반 조직에 관하여」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하역작업의 기계화에 관한 당과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수운에서 활동한 인민의 적들에 의해 완강히 무시되었다.”
새 작전반은 블리드만 방식을 모든 항만과 부두에 도입하고, 이른바 블리드만운동을 조직해야 했다.
『수운』은 6월 18일 다음과 같이 썼다.
“스타하노프 노동자 블리드만의 이름은 이제 모든 수운노동자에게 알려져 있다.
그의 대담한 발의는 당과 정부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수운노동자들은 블리드만 방식의 광범위한 도입으로 인민의 적들이 남긴 낙후를 극복하고 수운을 선진적인 사회주의 운수부문으로 만들 것이다.”[381]
그러나 이런 선전적인 열광과 별개로 수운의 현실적 문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블리드만 방식은 석탄이나 곡물처럼 흘러내리는 일부 대량화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운반기와 충분한 전력, 화물을 미리 쌓아둘 넓은 공간도 필요했다.
대다수 부두에는 이런 조건이 없었다.
예조프는 자신에게 맡겨진 부문을 실질적으로 재건하는 데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수운인민위원이라는 직책은 애초부터 그를 정치무대에서 단계적으로 밀어내기 위한 장치였으며, 그 자신은 아직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스타하노프 운동을 수운에 도입하는 문제를 다루던 무렵, 스탈린과의 관계에는 이미 위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938년 5월 어느 날 스탈린은 예조프를 불러 그의 아내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의 과거 인맥에 관해 질문했다.
그녀가 트로츠키주의자나 외국인과 가까운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지, 특히 런던에서 소련국가은행 대표로 일했던 외국무역관계자 보리스 아르쿠스와 어떤 관계였는지를 물었다.
예조프의 아내는 1927년 런던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던 중 베를린에 두 달 머물며 아르쿠스를 알게 되었다.
당시 아르쿠스는 그곳에서 소련국가은행 대표로 일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그의 아내를 몇 차례 만났고, 아르쿠스 자신도 한두 번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실제사정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예조프를 자신에게서 떼어내기 시작하려면 형식적인 구실이 필요했고, 아내의 문제도 다른 구실과 마찬가지로 쓸 수 있었다.
대화 말미에는 상황이 예조프에게 더욱 불길하게 돌아갔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관계가 있는 이런 오염된 아내를 전 친구 F. M. 코나르나, 이후 간첩으로 적발된 다른 누군가가 예조프에게 의도적으로 소개한 것이 아니냐고 갑자기 물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충분히 생각한 뒤 이혼이 필요한지를 스스로 결정하라고 권고했다.
집에 돌아온 예조프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스탈린과의 대화, 특히 코나르와의 과거관계에 지도자가 관심을 기울인 일이 자신의 정치경력 전체를 의심받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부부는 이후 몇 차례 이 문제로 다시 대화했다.
마침내 예조프는 실제로 이혼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무런 끔찍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이 잘 넘어가리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기회가 생기면 스탈린에게 당시의 대화를 다시 언급하고, 아내를 완전히 신뢰하며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라고 예조프에게 충고했다.[445]
예조프가 이 조언을 따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때부터 예조프 부부의 평온한 생활은 끝났다.
그 뒤 다른 대형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코나르 이야기는 잊힌 듯했다.
적어도 예조프는 그렇게 희망했다.
그러나 이제 스탈린과의 대화를 통해, 지도자가 아무것도 잊지 않았으며 잊을 생각도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동안 예조프는 지도자의 눈에 자신을 복권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텐데도 그랬다.
이 사실을 깨달은 예조프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마 전 재산을 걸고 도박하던 사람이,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지만 승리할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을 때와 비슷했을 것이다.
예조프의 발밑에서 이미 땅이 꺼지고 있던 바로 그때, 지도자의 총애를 되찾겠다는 마지막 희망을 완전히 파괴할 사건이 발생했다.
32. 류시코프의 탈출
1938년 6월 13일 이른 새벽, 훈춘 인근 소련·만주국경 구간을 순찰하던 만주국경경비대원 두 명은 새벽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윤곽을 발견했다.
경비대원들이 정지하라고 외치자 낯선 남자는 두 손을 들어 항복할 의사를 표시했다.
심문에서 그는 자신이 극동변경 NKVD국장 G. S. 류시코프이며, 생명의 위험을 느껴 국경을 넘고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당시 서른여덟 살이었던 국가보안 3급위원 겐리흐 사모일로비치 류시코프는 1920년 우크라이나에서 체키스트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의 근무평가서에서는 목표를 무슨 일이 있어도 달성하려는 의지가 특별한 장점으로 언급되었다.
동시에 지나치게 소년 같은 외모 때문에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우며, 이것이 승진에 장애가 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류시코프는 이후 이 단점을 비교적 빠르게 극복했다.
경력의 사다리를 성공적으로 올라 1931년에는 우크라이나 GPU 비밀정치부장이 되었다.
이후 모스크바의 중앙기구로 전근했다.
1934년 12월에는 NKVD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 부부장으로서 레닌그라드에서 진행된 S. M. 키로프 암살사건 수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류시코프는 예조프와 코사레프가 수사를 통제하려는 시도에 반대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예조프는 이후 그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다.
결국 필요한 결과가 얻어졌으므로 나머지는 원칙적으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닌그라드에서 돌아온 류시코프는 당시 내무인민위원 G. G. 야고다와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었다.
야고다는 그를 통해 비밀정치부의 상황을 통제했다.
류시코프는 야고다 명의로 발표되는 NKVD의 가장 중요한 명령과,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주요보고서를 작성했다.
1935년부터 1936년에는 ‘크렘린 사건’과 ‘트로츠키·지노비예프 통합 테러센터’ 사건 등 유명한 수사에 참여했다.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중앙’ 재판이 끝난 뒤인 1936년 8월 말에는 아조프·흑해변경 NKVD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지역에는 스탈린의 소치별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조프가 NKVD 내부숙청을 시작하자 류시코프는 동료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자료를 모스크바로 보내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85]
1937년 7월 초 NKVD 직원들이 대규모로 훈장을 받던 시기에 류시코프는 레닌훈장을 받았다.
같은 달 말에는 새 직책을 얻었다.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어 이 지역의 상황이 소비에트 지도부의 특별한 관심대상이 되자, 경험 많은 체키스트인 류시코프에게 극동변경 NKVD국을 이끌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1937년 7월 28일 그는 크렘린의 스탈린 집무실로 불려가 15분 동안 접견했다.
지도자에게서 앞으로의 직무에 관한 간단한 지시를 받았다.
류시코프가 1937년 8월 초 하바롭스크에 도착한 시기는 전 범죄자·쿨라크와 그 밖의 이른바 반소비에트분자를 탄압하는 대량작전이 시작된 때와 일치했다.
그는 정력적으로 이 업무에 착수했다.
동시에 현지 NKVD국을 숙청하여 전임 국장 T. D. 데리바스, 부국장 두 명과 체키스트 약 스무 명을 체포했다.
그해 말에는 현지 NKVD 직원 40명 이상이 감옥에 있었으며, 작전부문 지도자 거의 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극동 NKVD 조직에 존재했다는 우익·트로츠키주의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혐의를 받았다.[386]
류시코프에게 불리한 일은 1938년 1월 모스크바에 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37년 12월 선거에서 극동변경 대표로 당선되었으므로 소련 최고소비에트 제1차 회의에 참가했다.
M. P. 프리놉스키의 훗날 회상에 따르면 어느 날 류시코프는 몹시 흥분한 상태로 그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호텔에서 나갈 때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류시코프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조프와 프리놉스키가 이 문제를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몹시 낙담했다.
프리놉스키는 류시코프에게 미행을 붙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자신과 예조프 모두 그를 신뢰한다고 장담했다.
오히려 류시코프를 향한 근거 없는 혐의가 나타나면 그를 보호하려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NKVD에서 야고다의 음모를 폭로하는 운동이 전개되자, 야고다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류시코프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체포된 체키스트들의 진술에는 다른 ‘음모자’와 함께 그의 이름도 등장했다.
이 불필요한 증언을 없애려면 일정한 노력을 들여야 했다.
가장 위험한 진술은 류시코프가 극동국장에 임명되기 직전인 1937년 7월에 나왔다.
그루지야 NKVD는 전 자캅카스연방 내무인민위원 T. I. 로르드키파니제의 진술을 보냈다.
그는 류시코프와 몇몇 유명체키스트가 야고다가 만든 반혁명조직에 가담했다고 고발했다.
예조프는 진술이 거짓이며 나머지 혐의도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로르드키파니제를 모스크바로 보내 다시 심문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류시코프에 관한 고발은 철회되었다.
하지만 위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NKVD의 체포자들은 계속해서 류시코프의 이름을 말했다.
예조프와 프리놉스키는 그를 보호할 때마다 이러한 증언을 수정하거나 제거해야 했다.
1938년 봄이 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류시코프를 보호하던 예조프 자신에 대한 스탈린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류시코프의 부관 M. A. 카간에게 발생한 사건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러 해 동안 함께 일했고 너무나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 한 체키스트의 표현으로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처럼 보였다.
카간도 류시코프와 마찬가지로 ‘인민의 적’과 무자비하게 싸웠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가 되자 약해졌다.
감옥에서 탈출한 트로츠키주의자인 형제를 자기 아파트에 숨겨준 것이다.[389]
스탈린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지시로 카간이 체포되었다.
류시코프 본인은 이 사건에 관련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보좌관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므로 그 자신에게도 당연히 그림자가 드리웠다.
결국 지도자는 류시코프가 더 이상 신뢰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를 모스크바로 소환하여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1938년 5월 26일 정치국 결정으로 류시코프는 중앙기구로 전근한다는 명목 아래 극동변경 NKVD국장직에서 해임되었다.
6월 1일에는 이 결정을 발전시켜 부하들의 운명과 관련된 또 하나의 결정이 내려졌다.
극동변경 NKVD국의 새 부국장과 변경을 구성하는 여덟 개 주의 NKVD국장 전원, 태평양함대와 아무르군사소함대 특별부장들이 새로 임명되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든 임명자는 극동기구 출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
류시코프의 부하들에게 이처럼 명백한 불신이 표시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모스크바에서 받게 될 ‘중앙기구의 업무’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런 대규모 인사교체가 류시코프의 귀에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예조프는 정치국 지시를 인민위원부 명령으로 확정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통상 이런 명령은 정치국 결정 뒤 며칠 안에 내려졌다.
지나치게 의심이 많은 류시코프가 모스크바 소환사실을 알게 되면 이상을 느끼고, 잃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규칙을 벗어난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예조프는 그가 이 사건을 조금씩 받아들이도록 준비하기로 했다.
1938년 5월 26일 하바롭스크로 보낸 전보에서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가까운 시일 안에 NKVD 국가보안총국의 개편과 관련하여 동지를 중앙기구에서 활용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두시오.*
현재 후임자를 고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동지의 의견을 알려주시오.”[390]
* 당시 국가보안총국의 개편은 실제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틀 뒤 류시코프의 답신이 도착했다.
“동지의 직접적인 볼셰비키적 지도 아래 일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합니다.
보여주신 신임에 감사드립니다.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1938년 5월 28일. 류시코프.”[391]
답신의 형식에서는 예조프의 전보를 받은 뒤 류시코프가 겪은 고통스러운 고민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할 문제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전보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새 근무지가 이미 정해졌고 후임자까지 고르고 있다면 류시코프에게 동의를 묻기에는 이미 늦었다.
더구나 중앙기구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막연하게 묻기보다 구체적인 직책을 제시하고 의향을 확인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직책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류시코프에게 자신을 모스크바로 유인하기 위한 함정처럼 보였다.
류시코프는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이 계속 나오고 있으며, 보호해주던 사람들의 힘도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부관 카간이 이미 체포되었다.
이제 사용되는 NKVD의 심문방식 아래에서는 카간이 자신뿐 아니라 친구이자 상관인 류시코프까지 고발하지 않았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모든 사정을 따져본 류시코프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 앞에는 수많은 옛 체키스트를 삼킨 것과 같은 함정이 놓여 있었다.
1938년 5월 말 현재 예조프가 NKVD에 들어왔을 때 국가보안위원이라는 최고 체키스트계급을 가지고 있던 41명 가운데 자유로운 상태로 남은 사람은 류시코프를 포함해 열 명뿐이었다.
한 사람 A. A. 슬루츠키는 불분명한 상황에서 죽었다.
고리키·하리코프·모스크바주 NKVD국장 M. S. 포그레빈스키, S. S. 마조, V. A. 카루츠키 세 명은 자살했다.
나머지는 체포되었으며 다수는 이미 총살된 상태였다.
이제 자신의 차례가 왔다고 류시코프는 이해했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옛 동료들의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2주 동안 고통스럽게 고민한 끝에 그는 탈출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6월 9일 류시코프는 부국장 G. M. 오시닌비니츠키에게 국경도시 포시에트로 긴급히 가야 한다고 알렸다.
만주행정과 점령군 지휘부의 최고위층에 접근할 수 있는 특별히 중요한 정보원과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기차로 보로실로프시에 도착하여 현지 NKVD국에서 짧은 회의를 한 뒤 자동차로 포시에트로 향했다.
포시에트 국경구간은 계획에 가장 편리한 장소였다.
자연장벽이 없었고, 국경 반대편 가까운 곳에는 관동군 부대의 사령부와 하얼빈 일본군사사절단의 국경정보소가 있었다.
포시에트에서 류시코프는 제59국경수비대장 K. E. 그레벤니크에게 담당구간의 상황을 보고받았다.
이어 체키스트 한 명과 함께 정보원을 만나기로 했다는 국경 바로 인근으로 갔다.
동행자를 ‘접선장소’ 근처의 매복지에 남겨두었다.
위험이 발생하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류시코프는 국경방향으로 걸어갔고 몇 순간 뒤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류시코프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예조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스탈린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던 모든 희망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류시코프가 스스로 달아났든, 일본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납치했든, 그런 상황을 배제하는 조건을 만들지 못한 예조프가 당연히 책임자로 간주될 터였다.
예조프는 만일을 위해 프리놉스키를 전신국으로 보내 하바롭스크에 문의하게 했다.
류시코프가 편지나 메모를 남기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프리놉스키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반년 뒤 예조프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문자 그대로 미쳐가고 있었습니다.
프리놉스키를 불러 함께 동지에게 보고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혼자서는 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프리놉스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호되게 처벌받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고 거대한 정보기관의 실패였으므로*, 이런 일로 쓰다듬어줄 리는 없었습니다.”[392]
* 당시 ‘정보기관’이라는 말은 국가보안기관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되었다.
전 국가보안총국 경호부장 I. Ya. 다긴의 증언에 따르면, 예조프는 류시코프의 탈출을 이야기하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이제 나는 끝났다.”[393]
류시코프에 관한 최초의 정보는 1938년 6월 24일 외국언론에 나타났다.
그가 만주국 영토로 넘어가 현지당국에 투항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스크바에서 알지 못했다.
프리놉스키는 스탈린에게서 하바롭스크로 가서 현지에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출발 전 예조프와 프리놉스키는 수사방향을 논의했다.
일본인들이 류시코프를 납치한 것이라면 국경수비대의 배신이 없었는지, 이들이 류시코프를 만주로 끌고 가는 데 협력하지 않았는지를 조사하기로 했다.
류시코프가 탈출한 것으로 밝혀지면 사건을 일으킨 지역적 원인을 찾는 데 집중해야 했다.
특히 모스크바 소환을 알린 전보를 수사자료에서 제거해야 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 전보가 탈출을 유발한 요인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탈출의 주요원인은 블류헤르가 류시코프가 정치적 신임을 잃었다는 소문을 퍼뜨린 일로 설명하는 편이 바람직했다.
어떤 경우든 수사진행 정보가 블류헤르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야 했다.[394]
앞질러 말하면 이러한 사전각본은 사실상 아무 쓸모가 없었다.
전보의 존재를 숨길 수 없었으며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었다.
국경수비대원들도 모두 심문을 받았지만 그들의 행동에서 비난할 만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프리놉스키의 열차가 모스크바와 하바롭스크 사이의 8천5백 킬로미터를 가는 동안, 류시코프를 둘러싼 상황은 스스로 명확해졌고 대부분의 질문은 의미를 잃었다.
1938년 7월 1일 일본 육군성 정보부는 언론에 다음과 같은 발표를 배포했다.
“6월 13일 오전 5시 30분, 국가보안 3급위원이자 극동 NKVD국장인 류시코프는 소련에서 전개된 잔혹한 숙청 속에서 위험을 느끼고 우리 국가의 보호를 받기 위해 훈춘지역의 만주·소련국경을 넘었다.
류시코프는 만주국 국경경비대에 의해 체포되었다.”[395]
이틀 뒤 일본과 세계의 신문지면은 류시코프의 폭로를 위한 연단이 되었다.
류시코프는 먼저 탈출이유를 이야기했다.
모스크바에서 자신을 향한 불만의 징후가 나타났고, 부관이 최근 체포되었으며, 중앙기구로 불러들인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 소환은 여러 동료에게 체포와 처형으로 끝났다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소련을 지배하는 정치테러의 분위기를 묘사했다.
소련에서는 온갖 음모를 적발한다는 명분 아래 수십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살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키로프 암살로 조성된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정치적 반대자나 미래에 반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모든 방법으로 제거하려 한다고 했다.
류시코프는 자신이 1934년부터 1936년까지의 주요 정치재판 준비에 참여했다고 밝히며, 이 재판들은 모두 스탈린이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키로프를 살해한 니콜라예프는 지노비예프 반대파에 속한 적이 없었다.
그는 과대망상을 앓고 역사적 영웅이 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정신질환자였다는 것이다.
1936년 8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중앙’ 재판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독일 게슈타포와 협력했다는 혐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간첩이며 톰스키·리코프·부하린이라는 ‘우익음모자’와 연결되었다는 혐의도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들은 스탈린의 파괴적인 정책에 반대했던 그의 적이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공개재판에서 볼셰비키당의 저명한 활동가들이 내놓은 터무니없는 자기고발에 관해 류시코프는, 이 모든 ‘자백’이 잔혹한 고문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체포자들은 수사기관이 원하는 진술에 동의할 때까지 고문당했다.
그 증거로 류시코프는 적기훈장 극동특별군 공군담당 부사령관 A. Ya. 라핀의 유서를 가지고 나와 신문에 공개했다.
라핀은 1937년 9월 하바롭스크교도소에서 자살했다.
그는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앞으로 남긴 편지에서, 모스크바의 심문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고발한 모든 진술은 허구라고 말했다.
오랜 구타 끝에, 그리고 다시 고문하겠다는 위협 아래 이런 진술을 했다는 것이었다.
대외정책 관련 폭로에서 류시코프는 소련이 극동과 자바이칼에 강력한 군사집단을 집중했다고 말했다.
25개 사단에 약 40만 명이 배치되어 있고, 약 2천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류시코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길어지도록 의도적으로 조장했다.
두 나라를 가능한 한 약화시키는 것이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소모된 일본은 소련에 위험이 되지 못할 것이고, 같은 상황에 빠진 중국은 볼셰비키화하기 쉬워진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스탈린의 계획에 들어 있다고 했다.
언론에 제공한 정보 외에도 류시코프는 직책상 알고 있던 더욱 비밀스러운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인들에게 제공했다.
다만 그 정보의 성격과 중요성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분명하지 않다.
류시코프가 일부 중요한 비밀을 일본인들에게 감추었을 가능성도 있다.
모스크바는 류시코프의 소재를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준비된 계획은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류시코프는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진 여러 문제에 대해 조언하며 1945년까지 살아남았다.
1945년 7월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을 앞두고, 그는 그동안 살았던 도쿄에서 중국 다롄의 일본군사사절단으로 옮겨졌다.
관동군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다.
8월 9일 소련·일본전쟁이 시작되었다.
불과 7일 뒤 관동군 지휘부는 항복을 발표했다.
소련군은 빠르게 다롄으로 접근했다.
1945년 8월 19일, 도시가 함락되기 사흘 전 류시코프는 다롄 군사사절단장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포로가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자살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런 ‘배려’는 류시코프가 일본정보기관과 7년 동안 협력하며 알게 된 활동정보를 비밀로 지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무언가를 기대했던 듯한 류시코프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그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소련에서는 류시코프의 탈출에 관한 정보가 반세기 넘게 금지되었다.
1989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야, 나머지 세계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잊힌 이 사건이 소련대중에게 처음 알려졌다.
33. 간부 문제
1938년 5월과 6월에 스탈린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것은 예조프에게 진정한 재앙이었다.
지도자의 신뢰가 사라지자, 체제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쳤던 그 힘들고 소모적인 노동도 의미를 잃었다. 그 노동의 유일한 보상은 ‘주인’이 부지런한 조력자에게 때때로 내려주던 칭찬뿐이었다.
류시코프가 탈출한 뒤 예조프는 수운인민위원부를 제1부인민위원 E. G. 예브도키모프에게 맡겨두고 NKVD로 돌아왔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는 사정이 요구하는 만큼 자주 NKVD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제대로 일할 능력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은 우울을 검증된 방법, 즉 술로 이겨내려 했다.
예조프는 이전에도 술을 마셨지만 주로 근무시간 밖이나 모스크바를 떠났을 때였다. 이제는 스탈린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날이면 근무시간에도 술자리가 점점 잦아졌다.
점심때 집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근무지에서 식사할 때에는 부하들에게 코냑을 가져오라고 했다. 술을 마신 뒤 그대로 집무실에서 잠들었다가, 완전히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직원들을 접견하거나 심문에 나갔다.
중요한 정보원과 만나는 데 사용하던 고골대로의 비밀아파트도 술 마시는 장소로 바꾸었다. 모스크바에서 근무시간에 소문을 걱정하지 않고 ‘긴장을 풀’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업무가 끝난 뒤에는 가까운 측근 한 사람을 자기 아파트나 별장으로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술자리는 그곳에서 계속되었고, 때로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그런 밤을 보내고 나면 예조프는 오후 3시나 4시가 되어서야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출근했다. 진한 커피와 보르조미 광천수를 가져오라고 한 뒤, 업무는 보지 않고 소파에 누워 정신을 차렸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가 형식적으로나마 부하들의 음주와 싸웠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1937년 가을 스몰렌스크주 NKVD국장 V. K. 카루츠키의 음주에 관한 진정서가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들어왔다.
이를 알게 된 예조프는 카루츠키를 해임하고 교훈도 주기로 했다. 카루츠키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프리놉스키에게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프리놉스키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도덕적 충격을 더 크게 주기 위해, 예조프는 카루츠키의 체포영장을 작성하고 범죄자처럼 감옥에 넣으라고 내게 제안했다. 나는 그대로 실행했다.
닷새에서 일주일쯤 지난 뒤 예조프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카루츠키를 불러,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음모활동에 관한 진술을 시작하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카루츠키는 예조프에게 말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무엇을 써야 합니까?’
그러자 예조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나를 가리키며, 카루츠키를 체포한 장본인은 나 프리놉스키이며, 체포의 목적은 그가 술을 끊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카루츠키는 그 자리에서 석방되었고, 우리 셋은 예조프의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396]
그러나 1937년 가을과 달리 이제는 예조프 자신을 교육해야 할 때였다.
부하들이 술을 끊으라고 설득해도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부하들은 지도자가 계속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37년 봄부터 NKVD에서 진행된 대규모 숙청은 그해 말이면 대체로 마무리되었다.
예조프가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구 체키스트 친위대의 구성원들은 이미 체포되었다. 남은 사람들로 앞으로도 함께 일할 팀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평온하게 일하려면 NKVD 안팎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던 온갖 불리한 자료로부터 자기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 M. G. 라예프 사건이다. 전 NKVD 서기국장 I. I. 샤피로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바쿠의 직원 두 명이 특별히 모스크바로 와서, 라예프가 바쿠에서 배신적이고 파괴적인 활동을 벌였다는 방대한 진정서를 예조프에게 제출했다.
예조프는 이들을 접견하고 말로는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진정내용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사는 라예프를 모스크바로 불러 그를 고발하는 진정서 자체를 넘겨주는 것으로 끝났다.
바쿠로 돌아간 라예프가 자신을 폭로한 사람들에게 어떤 환경을 만들어주었을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이들은 내게 전화하여 라예프가 자신들에게 도저히 일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 보복하고 있다며, 바쿠 밖으로 전근시켜달라는 요청을 예조프에게 보고해달라고 했다.
내가 이를 예조프에게 보고하자 그는 말했다.
‘괜찮아. 그대로 일하게 둬. 앞으로는 분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될 거야.’”[397]
류시코프의 탈출은 예조프가 1938년 겨울부터 이미 마주하고 있었고, 달이 갈수록 점점 더 긴박해지던 복잡한 인사문제를 분명히 드러냈다.
예조프는 자기 팀을 선발하고 해당 임명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를 받아냈다. 이제 발탁한 간부들의 정치적·업무적 자질에 책임을 져야 했다.
자기 간부가 어떤 일로 신용을 잃으면 공격을 받는 사람은 예조프 자신이었다.
그 첫 사례 가운데 하나가 NKVD 국가보안총국 해외부장 A. A. 슬루츠키 사건이었다. 이 내용은 앞의 「슬루츠키의 죽음」에서 이미 다루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또 하나의 불쾌한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오르조니키제변경 NKVD국장 P. F. 불라흐와 관련된 문제였다.
수사사건의 대량조작과 권력남용은 모든 지역기관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선두주자가 있었다.
우크라이나·벨로루시·투르크메니스탄 내무인민위원부, 레닌그라드주·스베르들롭스크주 NKVD국, 그리고 오르조니키제변경 NKVD국이었다.
오르조니키제변경 NKVD국의 ‘작전상 과잉’에 관한 정보는 1937년 가을부터 모스크바로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조프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비밀정치부장 M. I. 리트빈이 이끄는 체키스트 집단을 현지로 보냈다.
오르조니키제변경의 행정중심지 보로실롭스크에 도착한 리트빈은 현지 직원과 일부 피의자들을 만났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지도부에 자신의 인상을 보고했다.
전 NKVD 국가보안총국 경호부장 I. Ya. 다긴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리트빈을 프리놉스키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두 사람만 있었다.
리트빈은 웃으며 나를 보고 ‘여기 조직원이 한 명 더 왔군’이라고 말했다.
이어 프리놉스키와 리트빈은 서로 말을 끊어가며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불라흐는 체포된 전 변경당위원회 서기 랴보콘에게서 노보시비르스크 NKVD국장 고르바치와 크림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미헬손이 반소비에트조직에 참여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또 체포된 전 변경당위원회 공업부장 차소브니코프에게서는 고리키 NKVD국장 라브루신과 아르한겔스크 NKVD국장 데멘티예프가 반소비에트조직에 참여했다는 진술을 얻었다.
리트빈은 같은 대화에서 차소브니코프가 진술서에 내 이름도 적었지만, 불라흐가 차소브니코프를 믿지 않아 그 진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트빈은 현지에서 수사자료를 확인했고, 랴보콘과 차소브니코프를 재심문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데려왔다고 했다.
이후 리트빈은 나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이 체키스트들에 관한 진술을 철회했으며 수사관들이 그 진술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고 알려주었다.”[398]
* 이 회고를 남긴 I. Ya. 다긴과 그가 언급한 체키스트 G. F. 고르바치, A. I. 미헬손, I. Ya. 라브루신, V. F. 데멘티예프는 1937년 봄과 여름까지 오르조니키제변경, 1937년 3월까지는 북캅카스변경,에서 일했다. 따라서 이들은 과거 P. F. 불라흐의 동료였으며, 다긴은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리트빈이 보로실롭스크에서 발견한 것은 귀환 뒤 동료들에게 이야기한 그런 ‘우스운’ 일들만이 아니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한계를 넘어선 사건조작과 함께, 자행되는 불법행위의 규모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라흐는 허구의 ‘반혁명 우익·트로츠키주의 조직 변경중앙’과 그 지역지부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당·소비에트·경제기관 지도부를 체계적으로 갈아버리고 있었다.
그 결과 일부 구에서는 전체 공산당원의 20퍼센트에서 50퍼센트가 체포되었다.
오르조니키제변경의 사정을 알고 있던 체키스트들 사이에서는 씁쓸한 농담이 돌았다.
외국군이 침공하더라도 점령자들은 현지 활동가들을 제거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불라흐가 이미 그 일을 모두 해놓았다는 농담이었다.
수사사건을 공장처럼 조작하려면 그에 맞는 조직적·기술적 환경도 필요했다.
변경 NKVD국과 지역부서는 진정한 고문실로 변했다.
전 예센투키시 NKVD부장 G. M. 도비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변경 NKVD국의 제3부와 제4부, 그리고 다른 부서들의 복도를 지나갈 수도 없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모든 집무실에서 아무나 붙잡아 때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직원들은 그곳에서 교육과정을 받았다.
일곱 명이나 여덟 명이 한 사람을 집단으로 구타하고, 반죽음 상태가 된 그를 들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399]
그때 불라흐는 가벼운 공포를 겪는 것으로 끝났다.
프리놉스키가 오르조니키제변경의 상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자고 제안했지만 예조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1938년 1월 열린 NKVD 지도간부회의에서 예조프는 많은 참석자를 놀라게 하며 사실상 불라흐를 지지했다.
예조프가 오르조니키제 체키스트들의 책임자를 이처럼 보호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한 동료는 불라흐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진짜 노상강도이자 떠돌이, 도적이었다.
19세기 시베리아 밀림지대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400]
불라흐가 ‘인민의 적’과 싸우는 열정을 예조프가 좋아했을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조프는 결국 불라흐를 버려야 했다.
그의 활동결과가 너무나 노골적이었고, 더 이상 은폐하기도 위험했기 때문이다.
불라흐는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다.
그가 이끈 기관은 오르조니키제변경에 정해진 총살한도를 넘어섰다.
그러나 불라흐는 모스크바에서 승인한 수치가 단순한 형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아무 문제도 보지 않았다.
많은 체포자가 재판까지 살아남지 못하는 사실도 형식적인 문제라고 여겼던 듯하다.
한 지역 NKVD부서 직원들의 잔혹한 구타로 피의자 일곱 명이 심문 중 사망한 사례가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불라흐의 지시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사법 ‘트로이카’에 넘겨진 뒤 총살된 것으로 문서가 작성되었다.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가 오르조니키제 NKVD국에서 넘긴 어느 집단사건을 심리한 뒤 사형을 선고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여 추가수사로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불라흐의 지시에 따라 사건은 추가수사를 거치지 않고 비사법기관인 ‘트로이카’가 처리했다.
그 결정으로 피고인 전원에게 최고형이 선고되었다.
불라흐의 ‘작품’에 관한 정보가 NKVD를 통하지 않고 스탈린에게 직접 전달될 것을 우려한 프리놉스키는 결국 예조프를 설득하여 총애하던 부하를 ‘넘겨주게’ 했다.
예조프 자신은 지도자와 이처럼 민감한 문제를 논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출장 중인 자신의 부재를 이용하여 프리놉스키가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예조프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프리놉스키가 키예프로 전화하여 스탈린과 나눈 대화를 보고하자 예조프는 물었다.
“그럴 필요가 있었나?”
프리놉스키는 다긴에게 불평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중앙위원회에 가서 자료를 보고하기로 분명히 합의했는데, 이제 그는 불만이야.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401]
1938년 2월 21일 정치국 결정으로 불라흐는 해임되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그사이 변경지역에서 자행된 만행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체포자 집단이 스탈린 앞으로 진정서를 보내 자신들의 사건이 조작되었으며, 도발적인 수사방법이 사용되었다고 호소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1938년 4월 말 스탈린은 예조프의 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M. F. 시키랴토프에게 보로실롭스크로 가서 상황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형식적으로 시키랴토프는 예조프의 부하였다.
그러나 예조프가 NKVD로 옮긴 뒤 당통제위원회 업무에 사실상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시키랴토프는 상당한 독립성을 얻었고 스탈린과 직접 접촉할 수도 있었다.
그가 알게 된 정보가 통제 없이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감시해야 했다.
예조프는 당시 NKVD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이던 V. E. 체사르스키를 시키랴토프의 감시자로 붙였다.
체사르스키가 받은 지시는 사건을 절대로 확대하지 말고 가능한 한 무마하며, 시키랴토프가 사건을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체사르스키는 예조프의 지시를 수행하지 못했다.
시키랴토프는 노련한 기구관료였고 속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체사르스키와 함께 진정서가 들어온 노보알렉산드롭스크 지역 NKVD부서를 방문했다.
수감자들의 사건기록을 검토하고, 체포자 서른 명가량의 재심문과 NKVD 직원 여러 명의 조사에도 참가했다.
따라서 체사르스키가 돌아와 조사결과를 보고했을 때, 예조프는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
시키랴토프는 알아서는 안 될 내용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고, 그가 본 모든 것을 스탈린에게 보고하는 일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가능한 일은 조사보고서를 최대한 부드럽게 다듬는 것뿐이었다.
예조프의 지시에 따라 체사르스키는 가장 날카로운 대목을 지우고, 일부 직원들이 저지른 우연한 실수에 불과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보고서를 여러 차례 다시 작성했다.
그러나 남은 내용만으로도 현지 체키스트들의 업무는 대단히 추악하게 보였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변경과 지역 NKVD 기구는 우연하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 그리고 체포자들의 고의적인 허위진술을 근거로 체포를 실시했다.
실제의 적과 함께 아무 죄 없는 정직한 소비에트시민, 우수한 콜호스원과 정직한 당원들도 체포되었다……
수사과정에서 변경기구와 지역 NKVD부서 직원들은 체포자들을 잔혹하게 구타하고 모욕했으며, 가장 교묘한 방법까지 사용했다.
구타한 체포자들을 공동감방에 다시 넣은 뒤, 다른 수감자들에게 맞은 흔적을 보여주도록 강요했다.
그렇게 구타의 위협으로 다른 체포자에게 영향을 주려 했다.”[402]
소란을 일으킨 당사자 P. F. 불라흐는 1938년 4월 말 체포되었다.
심문에서 그는 자신이 예조프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고 여러 차례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이런 말을 도발이라고 규정하고 조서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불라흐는 전 인민위원 G. G. 야고다가 NKVD 안에 만들었다는 반소비에트조직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다.
1938년 7월 28일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불라흐 사건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예조프와 가장 가까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부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국장 L. M. 자콥스키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자콥스키는 대단히 다채로운 인물이었다.
라트비아인으로 본명은 헨리흐 에르네스토비치 슈투비스였다.
젊은 시절 선원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리바우로 돌아온 뒤 불법문헌을 배포하고 리바우의 한 은행강도도 준비하던 무정부주의조직에 가담했다.
체포된 그는 올로네츠현으로 3년간 유형되었다.
유형이 끝난 뒤 1917년 초 페트로그라드로 옮겼다.
혁명 뒤 전러시아비상위원회에 들어가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에게 가장 큰 명성을 안긴 사건은 1918년 8월 카잔의 반볼셰비키 조직 ‘조국과 자유수호동맹’을 분쇄한 일이었다.
그는 백위군 장교로 위장하여 음모자들의 본부에 침투한 뒤 이들을 체포했다.
내전이 끝난 뒤 우크라이나, 시베리아와 벨로루시의 국가보안기관에서 지도직을 맡았다.
1934년 12월 S. M. 키로프 암살과 관련하여 레닌그라드 NKVD국장 F. D. 메드베드가 해임되자 자콥스키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예조프가 자콥스키와 가까워진 것도 바로 그때 레닌그라드에서였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강한 술에 대한 공통된 애정도 관계를 강화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자콥스키는 NKVD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젊은 시절의 성향을 간직했다.
예조프는 거의 면전에서 그를 범죄자라고 부르곤 했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예조프는 자콥스키에게 반말을 했고 그를 ‘레노치카’라고 불렀다.
업무상 특별한 필요가 없는데도 자콥스키를 며칠씩 모스크바로 불러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곤 했다.
1937년 말 자콥스키의 머리 위에도 작은 먹구름이 나타났다.
스탈린이 자콥스키의 이른바 생활상의 타락, 즉 의심스러운 여성들까지 참여한 술자리 등에 관한 보고에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예조프는 자콥스키를 레닌그라드에 계속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곳에는 그의 실수를 위에 알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적이 너무 많았다.
1938년 1월 예조프는 자콥스키를 모스크바로 전근시키고 부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국장으로 임명하는 데 스탈린의 동의를 받아냈다.
예조프는 자콥스키의 풍부한 체키스트 경험이 NKVD 중앙기구에서 유용하며, 모스크바에 오면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어 나쁜 습관을 더 쉽게 고칠 수 있다고 스탈린을 설득했을 것이다.
자콥스키는 앞에서 말한 특성 외에도 가장 거리낌 없는 사건조작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모스크바에 온 뒤에도 그는 자기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곧 모스크바의 체키스트들, 조작에서는 이들 역시 초보자가 아니었다,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놀라며 발견했다.
예를 들어 자콥스키는 민족계층별 체포한도를 도입했다.
‘민족계층’을 탄압하기 위한 할당량은 정치국 결정이나 NKVD 명령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자콥스키는 개의치 않았다.
레닌그라드에서 이 방법을 성공적으로 사용했고 모스크바에서 포기할 이유도 보지 못했다.
곧 모스크바 NKVD국 작전부서들은 비토착민족 대표를 체포하라는 월별 계획을 받았다.
자콥스키가 제시한 “첫 심문부터 얼굴을 때려라”라는 방침은 짧은 기간 안에 공장, 기관과 군부대에 만들어졌다는 수십 개의 반혁명조직과 집단을 ‘적발’하게 해주었다.
그 수는 날마다 늘어났다.
* 자콥스키가 사건을 조작한 전형적인 사례는 N. S. 흐루쇼프가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의 유명한 비밀보고에서 사례로 사용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NKVD국의 높아진 활동성은, ‘민족계층’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예조프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탈린도 새 근무지에서 자콥스키가 거둔 성공을 기뻐했다.
1938년 2월 예조프에게서 모스크바 NKVD국이 ‘반혁명 사회혁명당 지하조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당원 열한 명을 포함해 156명을 체포했다는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자콥스키 동지는 레덴스 동지와 다르다.*
금광업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자콥스키 동지가 금맥을 찾아낸 것이 분명하다.
체키스트로서 레덴스는 자콥스키의 왼발만도 못하다.
자콥스키 동지의 성공을 빈다.
사회혁명당의 뿌리를 계속 뽑아야 한다.
사회혁명당은 큰 위험이다.”[403]
* S. F. 레덴스는 자콥스키에 앞서 모스크바 NKVD국장을 지냈다. 1938년 1월 카자흐공화국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인상적인 업무성과에도 불구하고 자콥스키도 불라흐처럼 결국 버려야 했다.
예조프의 문서에는 자콥스키의 잘못을 보여주는 사례로 아무 설명 없이 ‘스탈린에 관한 대화’라는 표현이 적혀 있다.[404]
아마 자콥스키가 술에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에서 스탈린을 향해 불쾌한 말을 했고, 그 내용이 지도자에게 전달된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다.
실제로 그랬다면, 이것이 그의 운명이 급변한 주요원인이었을 수 있다.
공식적인 이유는 물론 달랐다.
1938년 4월 14일 정치국회의에서 자콥스키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에는, 그가 레닌그라드 NKVD국을 이끌던 시기의 업무상 결함이 거론되었다.
결정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1. 자콥스키 동지가 레닌그라드 NKVD국장으로 근무한 기간에 다음과 같은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감자들이 외부와 서신을 주고받도록 방치했고……
여러 건의 부풀려진 사건을 만들었으며,
불리한 자료가 존재했음에도 최근까지 근무한 간첩분자들이 NKVD국 기구에 침투해 있었다.
이에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자콥스키 동지가 현재 체키스트 업무지도자로서 완전한 정치적 신뢰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자콥스키 동지를 소련 내무부 부인민위원직에서 해임하고, 쿠이비셰프 수력시설 건설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는 그곳에서의 업무를 통해 자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405]
그러나 자콥스키는 완전한 신뢰는 물론이고 부분적인 신뢰도 회복할 시간이 없었다.
2주 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1938년 4월 예조프는 또 다른 발탁간부와도 결별해야 했다.
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이자 이후 NKVD 국가보안총국 운수부장이 된 I. M. 레플렙스키였다.
5월 말에는 앞에서 말한 G. S. 류시코프와 또 한 명의 예조프 총애자인 스베르들롭스크주 NKVD국장 D. M. 드미트리예프의 차례가 왔다.
예조프는 1934년 12월 레닌그라드에서 드미트리예프를 가까이 알게 되었다.
당시 국가보안총국 경제부 부부장이던 드미트리예프는 S. M. 키로프 사망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온 체키스트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키로프의 살인자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는 일이 맡겨졌고, 그는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934년 12월부터 1935년 1월까지의 이른바 ‘모스크바 중앙’ 사건에서도 효과적으로 일했다.
그가 체포자 I. P. 바카예프에게서 얻은 진술 덕분에 다른 피의자들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재판을 조직할 수 있었다.
1936년 야고다 재임기에 드미트리예프는 스베르들롭스크주 NKVD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 사는 불행한 ‘인민의 적’을 부지런히 찾아 제거했다.
드미트리예프에게는 다른 지방 NKVD국장들과 눈에 띄게 구별되는 고유한 방식이 있었다.
그와 부하들은 체포자에게 구타보다 설득을 더 많이 사용했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진술은 자본주의 포위세력을 폭로하고 특정한 외국국가에 항의할 자료로서 당과 국가에 필요하다고 피의자들에게 집요하게 주입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체포자들은 가족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직업을 얻으며, 2년이나 3년 뒤 다시 우랄로 돌아올 수 있다고 약속했다.
당은 언제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으로 살아왔다.
많은 수감자는 이런 설명을 믿었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수사관에게 협조하여 자신과 지인들이 간첩활동, 테러활동 등을 벌였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스베르들롭스크 NKVD국 감옥에는 이른바 ‘공산당원 감방’까지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특별히 중요한 당의 임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한 당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 백군장교나 성직자처럼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인물이 감방에 잘못 들어오지 않도록 경계했다.
드미트리예프가 선택한 전술은 좋은 성과를 냈다.
적발했다는 반혁명분자의 체포승인을 요청하는 전보가 계속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그 대부분은 지역 당위원회와 콤소몰위원회 서기, 지역집행위원장 등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처럼 높은 성과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나타났다.
드미트리예프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체포하고 있으며, 농촌의 당·콤소몰 서기 거의 전원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소문이 NKVD 안에 퍼졌다.
그러나 예조프에게는 그런 의심이 없었다.
그는 드미트리예프가 요청한 사람들의 체포를 쉽게 승인했다.
드미트리예프의 또 다른 특징은 통계보고를 대단히 거리낌 없이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스베르들롭스크 NKVD국이 종결한 사건의 숫자가 전 쿨라크, 범죄자와 다른 이른바 반소비에트분자에게 지역별로 정해진 탄압한도를 초과하자, 그는 ‘남는’ 피의자들을 수치제한이 없는 민족계층 사건으로 서류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모스크바로 보내져 판결승인을 기다리는 ‘민족계층’ 피고인 명단은 거의 전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로루시인 성으로 채워졌다.
모스크바에서 명단을 아무리 피상적으로 검토했다 해도 이처럼 노골적인 불일치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는 없었다.
스베르들롭스크에서 보낸 신청의 승인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1938년 2월 드미트리예프는 민족계층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업무가 모스크바로 보낸 ‘앨범’의 느린 검토 때문에 방해받고 있다고 예조프에게 불평했다.*
* 이른바 ‘앨범’은 체포자의 성명과 기타 신상정보, 제기된 혐의의 요약과 제안된 판결을 적은 대형 장부였다.
이에 프리놉스키는 스베르들롭스크의 신청내용을 자세히 계산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그는 드미트리예프가 민족작전으로 위장하여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스베르들롭스크 NKVD국이 폴란드계 사건으로 체포한 4,218명 가운데 실제 폴란드인은 390명에 불과했다.
명령 제00447호에 따라 탄압했어야 할 전 쿨라크는 3,798명이었다.
라트비아계 사건으로 체포한 237명은 전원이 전 쿨라크였으며, 라트비아인은 열두 명뿐이었다.[406]
게다가 전 쿨라크의 압도적 다수는 체포당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따라서 명령 제00447호의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이들을 탄압할 정당성은 의심스러웠다.
업무상 드미트리예프와 부하들의 활동결과를 접한 NKVD 직원들은 스베르들롭스크 NKVD국의 문제를 예조프에게 여러 차례 알렸다.
그러나 예조프는 평소처럼 침묵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예프가 무엇 때문에 신임을 잃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스베르들롭스크 체키스트들의 지나친 권력남용에 관한 소문이 스탈린에게 전달되었을 수 있다.
드미트리예프의 전 상관 L. G. 미로노프의 진술이 어떤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1938년 5월 말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5월 22일 그는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소환되어 소련 NKVD 간선도로총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38년 봄의 상황은 구세대 체키스트들이 안심할 아무런 이유도 주지 않았지만, 드미트리예프는 새 임명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938년 6월 말 그는 지방신문에 모스크바의 새 주소를 게재하기까지 했다.
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인 자신이 지역을 떠난 뒤에도 유권자들이 민원을 보낼 곳을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편지를 보낼 곳 자체가 사라졌다.
스베르들롭스크 NKVD국 신임국장 M. P. 빅토로프는 첫 몇 달 동안 전임자가 남긴 유산을 정리해야 했다.
빅토로프는 조사과정에서 많은 수감자를 석방했다.
모스크바에는 전임자의 업무방식과 구체적인 사건조작·위조사례를 설명한 보고서를 보냈다.
NKVD 서기국장 I. I. 샤피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빅토로프가 스베르들롭스크주의 중대한 과잉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을 때 예조프는 내게 화를 내며, 빅토로프가 일반화를 지나치게 좋아하고 있으며 모든 내용은 허튼소리이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407]
그러나 샤피로가 특별위원회를 스베르들롭스크에 보내 현지에서 모든 문제를 조사하자고 제안하자, 예조프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발한 간부들이 가장 취약한 약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한 예조프는, 부하들을 불리하게 만들 정보가 인민위원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쓰기 시작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전 소련 NKVD 인사부장대리 S. B. 발라얀이 전한 이야기가 있다.
등장인물은 발라얀 자신과 보좌관 K. G. 미하일렌코, NKVD 서기국장 I. I. 샤피로, 예조프,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장 G. M. 말렌코프와 부부장 V. A. 돈스코이였다.
발라얀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38년 7월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에서 모든 지역 NKVD국장의 개인기록을 검토할 수 있도록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내 보좌관 미하일렌코는 이를 샤피로에게 알렸고, 샤피로는 개인기록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내가 업무에 복귀한 뒤 지도당기관부 부부장 돈스코이가 전화하여 해당 기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샤피로가 미하일렌코에게 중앙위원회의 요구를 수행하지 말라고 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는, NKVD국장들의 개인기록을 곧 보내겠다고 답했다.
그때 미하일렌코가 들어와 샤피로가 기록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샤피로에게 문의하자 그는 예조프의 지시라며 자신의 명령을 확인했다.
얼마 뒤 말렌코프가 전화하여 자기 요구를 단호하게 수행하라고 했다.
나는 다시 샤피로에게 갔다.
샤피로는 내가 보는 앞에서 예조프의 집으로 전화했다.
예조프는 기록을 넘기지 말고, 말렌코프에게는 인민위원 본인의 직접지시가 있어야만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라고 명령했다.
곧 말렌코프가 다시 전화하여 문제가 예조프와 합의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발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기록이 이미 자동차에 실렸을 때 샤피로가 전화하여 중앙위원회에서 계속 전화가 오는지를 물었다.
나는 기록을 보내고 있으며 이를 말렌코프에게도 알렸다고 말했다.
그러자 샤피로는 나를 불러 다시 예조프에게 전화했다.
예조프는 나를 욕하고 자기 지시를 다시 확인했다.
말렌코프에게는 모든 기록이 예조프의 집무실에 있어 지금은 가져갈 수 없다고 말하라고 했다.
결국 나는 NKVD국장들의 개인기록을 말렌코프에게 넘기지 않았다.
말렌코프는 중앙위원회에서 내 해임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말했다.”[408]
예조프가 NKVD 책임직원들의 개인기록을 이처럼 열심히 보호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측근을 지도직에 추천할 때 그는 때때로 발탁한 사람들의 경력에 관한 일부 사실을 스탈린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런 사실이 임명승인을 방해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 고위체키스트 거의 전원에게 각종 불리한 자료, 진정서와 밀고 등이 모였다.
그 자료는 NKVD에 직접 들어오기도 했고, 당기관을 비롯한 다른 기관에서 전달되기도 했다.
일부는 직원의 개인기록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예조프의 부하 상당수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고발하고, 예조프 자신은 의심스러운 정치분자를 비호했다고 비난할 수 있었다.
이처럼 폭발할 가능성이 큰 인사상황은 예조프를 심각하게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미 복잡해진 스탈린과의 관계도 더욱 악화시켰다.
그러나 가장 큰 인사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34. 베리야의 등장
1938년 6월 말 프리놉스키는 스탈린의 지시로 류시코프 실종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극동으로 떠났다.
그 결과 예조프에게는 제1부인민위원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쩌면 프리놉스키의 시찰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부재로 만들어진 상황은 스탈린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더없이 유리했다.
새로운 제1부인민위원을 선정하여, 이후 예조프가 물러나면 NKVD 지도업무를 이어받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사실 예조프에게도 제1부인민위원 후보가 있었다.
프리놉스키가 국방인민위원부로 옮길 수 있다는 이야기는 1937년 가을부터 나왔다.
실제로 그렇게 되면 예조프는 처음에는 L. M. 자콥스키를 후임으로 생각했다.
자콥스키가 체포되어 이 선택지가 사라지자 오랜 보좌관 M. I. 리트빈을 후보로 삼았다.
1938년 여름 당시 레닌그라드 NKVD국장이던 리트빈은 NKVD 안에서 가장 현실적인 제1부인민위원 후보로 여겨졌다.
예조프는 이미 이 문제를 스탈린과 논의했다.
지도자의 호출을 기다리며 리트빈은 일부러 모스크바에 여러 차례 왔지만, 접견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탈린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리트빈은 예조프의 후계자로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1938년 7월 말로 보이는 어느 날, 스탈린은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장 G. M. 말렌코프와 대화하면서 새 후보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당기관과 국가보안기관 양쪽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스탈린 자신이 개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조건이었다.[409]
당시 최고위 노멘클라투라에서 이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그루지야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L. P. 베리야와 아제르바이잔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M. D. 바기로프였다.
더 적합한 사람을 고르는 데 스탈린이 지도당기관부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절차를 이용하면 장기적인 목적이 없는 평범한 인사결정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예조프에게는 아직 시작한 업무를 마무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의 의욕을 너무 일찍 떨어뜨릴 이유는 없었다.
스탈린은 예조프가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이끌었던 지도당기관부의 인맥을 통해 이 임무를 알게 될 것으로 계산했을 수 있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다가오는 사건에 대비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을 덜 품게 된다.
미래의 NKVD 책임자를 고르는 문제였다면 후보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스탈린이 누구의 조언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렌코프와 부하들은 L. P. 베리야를 선택했다.
그에게는 상당한 체키스트 경력이 있었다.
베리야는 1921년부터 1931년까지 자캅카스 체카·GPU에서 근무했다.
1926년부터 1931년까지는 그루지야 GPU 의장이었고, 1931년 4월부터 11월까지는 자캅카스연방 전체의 GPU를 이끌었다.
1931년 말 그루지야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32년에는 당시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은 물론 후보위원도 아니었지만, 그의 업무능력과 다른 모든 자질을 높이 평가한 스탈린의 발의로 자캅카스변경 당위원회 제1서기도 겸임했다.
이 기구는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세 공화국의 공산당을 통합하고 있었다.
베리야는 자캅카스연방이 1937년 폐지될 때까지 이 자리를 맡았다.
따라서 당 사업경험도 결코 적지 않았다.
지도자의 신뢰도 받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자유로운 상태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를 알 수 있었다.
‘대테러’ 시작 당시 각 주·변경·민족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있던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베리야의 또 다른 장점은 비교적 젊다는 점이었다. 당시 서른아홉 살이었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그루지야인이라는 사실도 장점이었다.
다만 1937년에는 한동안 베리야도 지도자의 신뢰를 잃은 지역책임자 대열에 합류할 듯한 순간이 있었다.
스탈린은 그루지야와 자캅카스연방 전체에서 베리야를 지나치게 떠받들고, 사회주의 건설의 온갖 공적을 그에게 돌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리야는 올바른 결론을 내렸다.
가능한 범위에서 자신을 향한 찬양을 줄였고, 사건은 넘어갔다.
말렌코프는 만일에 대비해 부관 V. A. 돈스코이에게 후보를 몇 명 더 고르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추가된 여섯 명은 지도자가 제시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지만, 지도당기관부에서는 장래성 있는 간부로 여겨졌다.
그중 누군가가 스탈린의 관심을 끌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던 듯하다.
후보에는 스베르들롭스크주 당위원회 제3서기 N. I. 구사로프, 지도당기관부 책임지도원 S. N. 크루글로프와 N. M. 페고프, 그리고 같은 부서가 관리하는 노멘클라투라 소속의 다른 세 사람이 포함되었다.
예조프는 곧 자신이 마주하게 될 뜻밖의 인사문제를 실제로 알게 되었던 듯하다.
아래에서 다시 다룰 1938년 7월 말의 격렬한 활동은, 자신이 여전히 직무를 과거 못지않게 잘 수행하고 있으며 외부에서 온 어떤 보조자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목적이었을 수 있다.
1938년 7월 26일 예조프는 군사합의부가 제1범주로 재판해야 할 139명의 명단을 스탈린에게 보냈다.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A. I. 예고로프 원수의 이름 하나를 지웠다.
그는 그렇게 추가로 일곱 달 동안 수사감옥을 견뎌야 했다.
두 사람은 이어 명단 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38명 전원 총살에 찬성한다.”[410]
그 뒤 명단은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로 보내졌다.
예조프가 이처럼 많은 최고위층 인사를 제거해달라는 승인을 마지막으로 요청한 때는 1937년 11월이었다.
명단에는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열일곱 명이 포함되었다.
전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부의장 Ya. E. 루주타크, 중앙위원회 정치행정부장 I. A. 퍄트니츠키, 농업부장 Ya. A. 야코블레프, 선전선동부장 A. I. 스테츠키가 있었다.
저명한 군지도자들도 총살할 예정이었다.
소련 국방부인민위원 겸 적군 공군총사령관 Ya. I. 알크스니스, 벨로루시군관구 사령관 I. P. 벨로프, 적군 정보국장 Ya. K. 베르진이었다.
유명한 체키스트도 포함되었다.
전 NKVD 부인민위원 Ya. S. 아그라노프, 극동과 오르조니키제 NKVD국장 T. D. 데리바스와 P. F. 불라흐, 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I. M. 레플렙스키 등이었다.
이 밖에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비에트 당·국가 엘리트의 핵심을 이루던 수많은 고위관료가 있었다.
이 작전은 NKVD의 업무능력이 약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중요하고 긴급한 행사였다.
그 때문에 예조프는 이런 절차를 처리하던 기존의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통상적인 절차에서는 NKVD 중앙기구가 수사를 끝낸 사건을 먼저 특별위원회에 보고했다.
위원회에는 내무부 제1부인민위원, 소련 부검사와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장이 참여했다.
위원회가 각 사건을 어디에서 심리할지 정했다.
군사합의부에서 재판할 사람의 명단은 예조프가 스탈린의 서명을 받기 위해 보냈다.
지도자가 승인한 판결은 이후 군사합의부의 형식적인 법정회의에서 확정되었다.
이번에는 예조프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기로 했다.
NKVD 교도부에서 체포된 지도간부 명단을 받아, 군사합의부에 넘겨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을 표시했다.
그 표시를 바탕으로 만든 명단을 스탈린에게 보냈다.
앞서 말했듯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예고로프 원수를 제외한 전원을 승인했다.
이제 군사합의부가 처리할 차례였다.
그런데 예조프의 지시로 작성되고 국가 최고지도부가 승인한 제거후보자 명단에는 당시 수사가 끝나지 않은 사람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는 수사가 사실상 시작되지도 않았다.
전 NKVD 서기국장 I. I. 샤피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군사합의부는 법정에서 심리할 수사기록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예조프는 수사를 최대한 빨리 끝내라고 요구했다.
사건의 형식만 어떻게든 갖추어 떠넘기기 위해, 일부 사건은 문자 그대로 이틀이나 사흘 만에 수사를 마쳤다.
다른 복잡한 사건의 수사에 반드시 필요했던 체포자의 사건까지 넘겨졌다.
어떤 사건은 애초에 군사합의부의 관할이 아니었고, 잘해도 특별협의회가 다뤄야 했다.”[411]
특별협의회에는 총살형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지도부가 요구하면 부하들은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미완료 사건의 수사가 돌격적인 속도로 마무리되었다.
군사합의부도 지체하지 않고 자기 업무를 처리했다.
며칠 뒤 모든 일이 끝났다.
예조프는 자신의 조직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제 앉아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한편 NKVD 안에는 다가오는 변화에 관한 소문이 퍼졌다.
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A. I. 우스펜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1938년 8월 초 소련 최고소비에트 제2차 회의에 참석하려 모스크바에 왔다가 NKVD 서기국장 I. I. 샤피로를 찾아갔다.
샤피로는 대단히 불안해 보였다.
우스펜스키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샤피로는 예조프에게 큰 문제가 생겼으며 중앙위원회가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예조프의 부인민위원으로 어떤 사람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412]
예조프는 자신이 경계해야 할 사람이 베리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베리야도 최고소비에트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당시 모스크바에 있었다.
예조프는 베리야가 스탈린과 접촉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긴장한 채 지켜보았다.
때로는 정도를 넘어설 정도였다.
NKVD 국가보안총국 경호부장 I. Ya. 다긴은 훗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리야가 교외의 스탈린 숙소로 접견을 받으러 간 일과 관련하여 예조프는 몹시 초조해했다.
그날 예조프는 내게 끊임없이 전화했다.
한 번은 전화하여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나?’라고 묻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말씀입니까, 니콜라이 이바노비치!’라고 답했다.
그제야 예조프는 이 문제에 관한 대화를 그만두었다.”[413]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조프와 베리야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1931년과 1932년 예조프가 아바스투마니에 있는 그루지야 GPU의 요양원에서 건강을 회복할 때, 베리야는 모스크바에서 온 손님을 특별히 돌보았고 그루지야 체키스트 부하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요구했다.
베리야가 모스크바에 오면 예조프의 환대를 기대할 수 있었다.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에도 예조프는 그루지야 체키스트의 책임자 S. A. 고글리제에게 여러 차례 전화하여 베리야의 개인경호를 강화하라고 경고했다.
이 내용은 베리야에게도 틀림없이 알려졌을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처음 흐리게 만든 사건은 그루지야공화국 인민위원평의회 부의장 B. G. 므디바니의 사건이었던 듯하다.
므디바니는 그루지야공산당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36년 가을 그는 트빌리시에서 과거 수년 동안 트로츠키주의 활동을 벌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그보다 심각한 혐의를 씌울 계획이 없었고, 사건을 특별협의회에 넘기려 했다.
그러나 이때 모스크바에서 심문받던 Yu. L. 퍄타코프와 G. Ya. 세레브랴코프가 새로운 진술을 했다.
1934년 므디바니가 만든 그루지야 트로츠키주의 중앙의 구성원들이 승인되었으며, 이 중앙에는 그루지야에서 사보타주·파괴공작·테러활동을 확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내용이었다.
1937년 1월 예조프의 지시로 므디바니는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
NKVD 내부감옥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그는 최근까지 자캅카스 트로츠키주의 중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당 지도부를 상대로 적극적인 투쟁을 벌였다고 ‘자백’했다.
수사가 계속되면서 므디바니의 범죄목록에는 스탈린·예조프·베리야 암살준비, 그루지야를 소련에서 분리하기 위한 무장봉기준비, 간첩활동 등의 혐의가 추가되었다.
수사가 끝난 뒤 므디바니와 여섯 명의 ‘공범’ 사건은 1937년 7월 그루지야 최고재판소로 넘겨졌다.
법원은 피고인 전원에게 총살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그루지야의 완전한 주인으로 여겼던 베리야는, 순전히 그루지야 내부문제라고 생각한 일에 NKVD 중앙기구와 예조프가 개입한 것을 극도로 고통스럽게 받아들였다.
현지 체키스트가 스스로 사건을 처리할 능력을 불신했다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베리야 자신은 므디바니의 처형에 반대했던 듯하다.
그럼에도 결국 그를 처형해야 했다는 사실은 예조프와의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뒤 베리야에게는 또 다른 심각한 불만의 이유가 생겼다.
이번에는 1937년 4월 자캅카스 당위원회가 폐지된 뒤 베리야가 형식적으로는 더 이상 지도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자신이 감독한다고 생각하던 아르메니아에서 NKVD가 벌인 일 때문이었다.
1937년 8월 19일 전 아르메니아공화국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S. M. 테르가브리엘랸은 아르메니아 NKVD 건물 4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강압적인 심문과정에서 이처럼 생을 마감하는 일은 때때로 발생했다.
그에 앞선 1937년 6월 21일에는 전 벨로루시공화국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N. M. 골로데드가 민스크 NKVD 건물의 창문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스탈린과 예조프는 부하들의 서투른 행동에 당연히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없다면 처벌도 지나치게 엄격하지는 않았다.
골로데드의 자살과 관련해서는 사건의 직접책임자인 국가보안 하급중위 두 명이 체포되었다.
그들의 상관인 벨로루시 NKVD 방첩부 부부장은 엄중경고만 받았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일이 다르게 전개되었다.
스탈린은 ‘인민의 적’과 싸우는 현지지도부의 활동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오래전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테르가브리엘랸의 자살은 공화국에서 강력한 숙청을 실시하는 기회로 이용되었다.
1937년 9월 8일 스탈린은 아르메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아르메니아의 경제·문화건설이 매우 나쁜 상태라고 지적했다.
농업은 붕괴되고 건설 중인 기업은 동결되며, 트로츠키주의자와 다른 반당분자들이 마땅한 저항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지도부의 비호까지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견해에 따르면 S. M. 테르가브리엘랸은 남은 공범들을 폭로하지 못하게 ‘입을 막으려는’ 인민의 적들에게 살해당했다.
편지는 아르메니아 내무인민위원 Kh. Kh. 무구두시와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A. A. 굴로얀을 체포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이들은 “폭로된 모든 추악한 사태에 책임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르메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A. S. 아마투니의 책임문제도 제기되었다.[414]
현지에서 사건의 모든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장 G. M. 말렌코프가 아르메니아로 파견되었다.
당시 NKVD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 M. I. 리트빈이 이끄는 체키스트단이 동행했다.
예레반에 도착한 말렌코프는 A. A. 굴로얀, Kh. Kh. 무구두시와 그의 부인민위원 I. A. 게보르코프의 체포를 지시했다.
이들은 즉시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전 아르메니아 국경수비대장 G. A. 페트로프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말렌코프와 소련 NKVD 직원 리트빈, 알트만, 게이만은 체포된 아르메니아 내무인민위원 무구두시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무구두시에게서 자백을 얻기 위해 말렌코프, 리트빈과 다른 소련 NKVD 조사단 직원들은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무구두시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상세히 말하겠다고 동의할 때까지 구타했다.”[415]
다른 아르메니아 체포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그 결과 적발했다는 ‘인민의 적’ 명단은 빠르게 늘어났다.
1937년 9월 15일 말렌코프는 아르메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중단을 포함해 9월 23일까지 계속되었다.
그 결과 많은 아르메니아 관료들이 당에서 제명되었다.
일부는 이미 체포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전원회의가 끝나자마자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어 명령 제00447호에 따라 아르메니아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전 쿨라크·범죄자·기타 ‘반소비에트분자’ 작전에 더하여, 책임 있는 당·국가관료들을 대상으로 체포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자캅카스연방 시기에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인접한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직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두 공화국에서도 체포가 시작되었다.
아르메니아 징벌원정은 스탈린이 시작했으므로 베리야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작전방식에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불만을 느꼈다.
자캅카스공화국의 지도간부 대부분은 베리야의 승인 아래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자캅카스 당위원회가 폐지된 뒤에는 더 이상 그의 부하가 아니었지만, 베리야는 특정인에 대한 탄압문제가 어떤 형태로든 자신과 협의될 것으로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베리야의 위치는 특별히 확고하지 않았다.
예조프가 파견한 체키스트들은 그의 의견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처럼 거리낌 없는 행동은 그의 자존심에 상당히 아픈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전 그루지야 GPU 직원이자 당시 당관료였던 M. E. 고랴체프*와 일부 그루지야 지도간부의 체포를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했다.
그 결과 1938년 여름이 되면 예조프와 베리야의 관계는 과거처럼 평온하지 않았다.
* M. E. 고랴체프는 1935년까지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자캅카스연방 GPU에서 근무했고, 이후 당 업무로 옮겼다. 그루지야공산당 중앙위원이었다.
프리놉스키를 소련 해군인민위원으로 임명할 예정이어서 NKVD 부인민위원직에서 해임하고, 그 자리에 베리야를 임명한다는 정치국 결정은 1938년 8월 21일 채택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았다.
그루지야신문에는 베리야가 ‘모스크바의 업무로 이동함에 따라’ 그루지야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서 해임되었다는 모호한 발표만 실렸다.
그 뒤 몇 달 동안 베리야가 소련 NKVD 제1부인민위원이라는 언급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베리야의 이름을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하려 했을 수 있다.
국내숙청이 끝나고 ‘당의 통제에서 벗어난 체키스트들이 저지른 오류를 바로잡을’ 때가 온 뒤에야 대중에게 그를 소개하려 했다는 것이다.
베리야 자신은 새 임명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그는 기존의 자리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로 이동할 가능성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캅카스연방과 그루지야를 이끌며 얻은 지식과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대형 경제인민위원부를 기대했던 듯하다.
베리야는 체키스트 업무를 이미 지나간 생애의 단계로 여겼고, 다시 돌아갈 욕망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복종해야 했다.
예조프는 노련한 기구관료였으므로 베리야 같은 거물의 NKVD 등장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즉시 이해했다.
그는 이 사건에 보름 가까운 폭음으로 대응했다.
메셰리노 마을의 별장에 숨어 의사를 불렀다.
두통, 불면증, 심장부위의 불쾌감과 식욕부진을 호소했다.
의사는 최소 닷새의 휴식을 처방했다.
엿새 뒤 다시 검진했을 때에도 같은 권고가 반복되었다.
따라서 예조프는 8월 말까지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동안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우울을 술로 달랠 수 있었다.
1938년 8월 25일 M. P. 프리놉스키가 두 달간의 극동체류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수도에서 멀지 않은 지점에서 그의 열차에 탄 NKVD 운수·통신국장 B. D. 베르만이 최신소식을 전했다.
베르만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프리놉스키에게 이제 그가 해군인민위원이므로 NKVD 업무를 넘기고 작별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알고 있으며 리트빈에게 일을 넘기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리트빈이 아니라 베리야에게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프리놉스키는 ‘베리야라니? 리트빈이 임명되지 않았나……’라고 외쳤다.
나는 기구 안에 오래전부터 다음과 같은 소문이 돈다고 말했다.
예조프와 리트빈이 별장에서 리트빈의 건강을 축하하며 이미 술을 마셨지만, 그 잔치는 너무 빨랐다는 것이다.
임명된 사람은 리트빈이 아니라 베리야였기 때문이다.
프리놉스키가 충격을 받은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그의 기분은 곧바로 가라앉았고 말도 없어졌다.”[416]
프리놉스키는 역에서 곧장 예조프의 요청을 받고 그의 별장으로 갔다.
예조프는 대단히 흥분해 보였다.
그는 눈물까지 흘리며 프리놉스키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그리고 NKVD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상황을 논의한 뒤 예조프에게 어려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권위적이고 독립적인 베리야와 함께 일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NKVD 안에 두 개의 권력중심이 생기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므디바니 사건과 아르메니아 사건, 그리고 NKVD와의 관계에서 벌어진 다른 갈등을 용서하지 않았을 베리야는 인민위원부 지도부의 과거활동을 불리하게 만들려 할 것이었다.
현재 사건에 관해서도 스탈린에게 편파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이 발견한 개별결함을 전체체계의 문제로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프리놉스키는 예조프에게 낙담을 멈추고 ‘고삐’를 다시 잡으라고 충고했다.
베리야의 사람들이 NKVD 중앙기구에 침투하는 것을 막고, 중앙기구가 그의 편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417]
예조프는 건강이 좋지 않고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는 이유로, 베리야가 후임자에게 일을 넘기기 위해 그루지야로 돌아갔다가 모스크바에 복귀하기 전까지 프리놉스키가 몇 가지 문제를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새 제1부인민위원의 눈에 들어가서는 안 될 자료를 정리해야 했다.
가장 먼저 어떤 방식으로든 이른바 ‘모스크바 크렘린 사령관국 테러집단’ 사건을 종결해야 했다.
1938년 초 체포된 크렘린 사령관 P. P. 트칼룬과 부사령관 S. I. 콘드라티예프에게서, 자신들의 음모조직에 부하들을 끌어들였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특히 크렘린 사령관국 전투훈련부장 N. N. 타볼린, 재정국장 A. I. 콜마코프와 정부청사 사령관 P. P. 브류하노프가 거론되었다.
브류하노프는 크렘린의 스탈린 아파트에서 일하는 식당종업원 A. 비노그라도바와 특별히 결혼하여, 그녀를 통해 지도자를 살해하려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418]
이 ‘자백’을 보고받은 예조프는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언급된 사람 가운데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이제 베리야가 NKVD에 들어올 예정이므로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긴급히 결정해야 했다.*
* P. P. 트칼룬은 1938년 7월 총살되었다. S. I. 콘드라티예프는 베리야가 부임하기 직전, 그에게 보여서는 안 될 수사사건들을 급히 마무리하던 8월 말에 총살되었다.
예조프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프리놉스키는 크렘린 사령관 F. V. 로고프, NKVD 경호부장 I. Ya. 다긴과 NKVD 특별부국장 N. N. 표도로프가 참석한 작은 회의를 열었다.
다긴은 크렘린의 각 ‘테러리스트’를 고발하는 어떤 진술이 존재하는지를 보고했다.
논의결과 일부는 체포하거나 해고하고, 다른 사람은 NKVD의 다른 부서로 전근시키기로 했다.
이제 트칼룬과 콘드라티예프의 진술 자체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다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8년 9월 초 프리놉스키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당시 그는 방에 없었고 예조프에게 가 있었다.
프리놉스키는 몹시 흥분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서류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던지며 말했다.
‘그 사람이 너무 겁을 먹어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방금 무슨 제안을 했는지 아나?
슈라 비노그라도바와 브류하노프가 등장하는 트칼룬의 조서를 없애자고 했어.’”[419]
앞질러 말하면 프리놉스키는 이 조서를 없애라는 예조프의 지시를 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베리야가 그 존재를 알았고, 베리야를 통해 스탈린에게도 알려졌다.
예조프는 이런 지시를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
다긴은 이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예조프가 나를 집무실로 불렀다.
책상 위에는 카드함과 많은 서류철이 있었고, 각 서류철에는 특정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몇 분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사이 예조프는 문서를 빠르게 읽고 바로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예조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가 든 서류철 하나를 내게 건넸다.
‘가져가시오. 굴코에 관한 자료요.*
수사할 수 있겠소?’
나는 자료를 주면 읽어본 뒤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예조프와 대화를 나눈 뒤, 그의 집무실에 있던 모든 자료가 직원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정보이며 그가 그 자리에서 없애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나는 본 장면에 충격을 받았고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과거 서기국에 감추어둔 자료를 정리하여 없애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내가 둘째 날, 셋째 날과 그 뒤에도 집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예조프는 서류를 찢고 있었다.”[420]
* 다긴의 부관 B. Ya. 굴코는 전 NKVD 국가보안총국 경호부장 K. V. 파우케르의 부관이기도 했다. 파우케르는 1937년 4월 체포되었다. 굴코는 파우케르와 가까웠으므로 NKVD 안에 존재했다는 음모조직에 가담했다는 수많은 진술과 신고의 대상이 되었다. 다긴은 예조프에게 굴코를 경호부에서 제거하자고 요청한 적이 있었지만, 전문성을 높이 평가한 예조프와 프리놉스키가 건드리지 말라고 금지했다.
예조프는 원하지 않는 문서를 없애는 것과 함께 직원숙청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불리한 자료가 특별히 심각하지 않은 직원까지 ‘묶음’으로 해고했다.
일부는 체포해야 했다.
베리야의 등장을 준비하며 예조프가 취한 또 하나의 조치는 NKVD 관리체계를 개편할 계획을 만드는 일이었다.
인민위원부의 결정에 새 제1부인민위원이 미치는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1938년 4월 5일 정치국이 채택한 NKVD 합의부 설치결정을 마침내 실행하면 이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시에는 결정이 문서로만 남았지만, 새로운 상황에서 인민위원 산하의 집단지도기관을 실제로 만드는 구상은 다시 시도할 가치가 있었다.
합의부에 신뢰할 수 있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포함시키면, 명백한 소수에 놓인 베리야의 권한을 상당히 제한할 수 있었다.
예조프는 카자흐공화국 내무인민위원이자 스탈린의 인척인 S. F. 레덴스를 합의부 위원 겸 제2부인민위원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레덴스는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자캅카스연방 GPU 의장이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1931년 초 베리야의 음모 때문에 해임되었고, 당시 부의장이던 베리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실제로 그랬다면 레덴스를 베리야의 견제세력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예조프는 레덴스 외에도 1938년 4월 철도인민위원부로 옮긴 전 제2부인민위원 L. N. 벨스키와, 오랫동안 NKVD의 지도직을 얻으려 했지만 실패하던 수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E. G. 예브도키모프를 합의부에 포함시키려 했다.
이들이 국가보안기관으로 복귀해야 하는 이유는, 숙청을 거친 뒤 NKVD에 풍부한 체키스트 경험을 가진 고위직원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으로 설명할 계획이었다.
‘젊은 세대’ 가운데에는 NKVD 특별부국장 N. N. 표도로프와 비밀정치부장 A. S. 주르벤코, 해외부장 Z. I. 파소프를 합의부 후보로 정했다.[421]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집단지도기관에 갑자기 관심을 보인 이유가 너무나 분명했다.
예조프는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NKVD 합의부를 다시 만드는 구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1938년 9월 초 베리야는 그루지야에서 후임자에게 업무를 넘긴 뒤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처음에 과거 체키스트 업무에서 함께 일했던 세 사람을 데려왔다.
그루지야공산당 중앙위원회 특별부문장 A. P. 카파나제,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공업·운수부장 V. N. 메르쿨로프, 그루지야 내무부인민위원 B. Z. 코불로프였다.
카파나제는 베리야 서기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메르쿨로프는 베리야의 부관이 되었고, 코불로프는 비밀정치부를 이끌었다.
베리야가 자기 사람을 비밀정치부장으로 두려는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예조프는 발탁한 사람 두 명을 옮겨야 했다.
기존 부장 A. S. 주르벤코는 모스크바 NKVD국장이 되었다.
동급의 자리로 옮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 모스크바 NKVD국장 V. E. 체사르스키는 작전업무와 결별해야 했다.
지난 6년 동안 예조프와 함께 일한 체사르스키는 스탈린에게 내용이 알려진 밀고의 희생자가 되었다.
특히 체포 직전인 1937년 5월 자살한 전 적군 정치국장 Ya. B. 가마르니크와 친밀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1919년 우크라이나 좌파사회혁명당을 떠나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로 옮길지를 결정할 때 의심을 품었다는 혐의도 씌워졌다.
1938년 9월이 되면 예조프가 동료들을 보호할 능력은 거의 사라졌다.
그는 체사르스키를 지킬 수 없었거나, 아마 지키려 하지도 않았다.
결국 체사르스키는 ‘유형’에 가까운 인사를 받아 NKVD 우흐타·이젬스크 수용소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베리야는 소련 내무부 제1부인민위원직에 더하여 1938년 9월 8일 NKVD 국가보안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며칠 뒤 프리놉스키에게서 업무를 넘겨받고 맡은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 NKVD의 구조개편으로 1938년 5월부터 9월까지 국가보안총국은 국가보안국으로 불렸다. 이후 이전 명칭이 복원되었다.
35. 무어인은 제 할 일을 다했다…
베리야가 NKVD에 들어온 뒤, 1년 넘게 이어진 ‘대량작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시작되었다.
이때까지 명령 제00447호에 따라 전 쿨라크와 그 밖의 이른바 반소비에트분자를 탄압하는 과제는 대체로 완수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족계층’ 문제는 사정이 달랐다.
앞에서 말했듯 1938년 1월 31일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에 따르면 민족노선별 작전은 4월 15일까지 끝내야 했다.
그러나 지방기관에서 올라온 수십만 건의 탄압신청을 NKVD 중앙기구가 처리할 능력이 없어 이를 지키지 못했다.
1938년 봄까지 ‘민족계층’에 관한 지방의 보고서는 예조프의 지시에 따라 NKVD 국가보안총국 방첩부장 A. M. 미나예프치카놉스키와 등록기록부장 V. E. 체사르스키로 구성된 ‘2인조’가 검토했다.
두 사람이 검토한 사건은 사법결정과 함께 의정서 형식으로 정리되었다.
예조프와 비신스키 또는 그들의 부관은 아무런 확인도 하지 않고, 때로는 읽어보지도 않은 채 서명했다.
검토하지 못한 보고서는 계속 쌓였다. 1938년 봄에는 약 10만 건에 이르렀다.
이에 국가보안총국의 다른 부서장들도 업무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이 임무를 불필요한 추가부담으로 생각하여 저녁 한 번에 수십 건, 때로는 수백 건을 처리하려 했고, 부하에게 넘겨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체계로도 올라오는 신청을 제때 처리할 수 없었다.
1938년 여름은 무더웠다. 과밀한 미결수감방에서는 판결을 기다리던 많은 수감자가 죽어갔다.
1938년 5월 말 예조프의 요청으로 폴란드계·독일계와 그 밖의 ‘반혁명 민족계층’ 사건을 간소절차로 처리하는 기간이 8월 1일까지 연장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작업을 끝내지 못했다.
9월이 되었을 때 NKVD 중앙기구에는 민족노선별 탄압신청 12만 6천 건이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422]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단순했다.
NKVD 중앙기구에서 본래의 직무가 아닌 일을 덜어내고, 남은 ‘민족계층’을 명령 제00447호의 대량작전을 처리했던 것과 같은 지방 사법 ‘트로이카’에 넘기는 것이었다.
1938년 가을이 되면 이 트로이카들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다.
이제 이를 다시 만들어 짧은 기간 안에 남은 일을 끝내기로 했다.
정치국은 1938년 9월 15일 관련결정을 내렸다.
새로 구성되는 ‘특별 트로이카’에는 1938년 8월 1일 이전에 체포된 ‘반혁명 민족계층’ 전원의 사건을 심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보다 늦게 체포된 사람은 통상절차로 재판해야 했다.
특별 트로이카의 활동기한은 두 달이었다.
따라서 모든 일은 1938년 11월 중순까지 끝나야 했다.
앞질러 말하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특별 트로이카들은 모스크바에서 내려보낸 수사보고서 가운데 대부분인 10만 8천 건을 그 기간 안에 처리했다.
7만 2천 명에게 총살형을 선고했고, 나머지는 수용소나 교도소 수감형을 받았다.[423]
NKVD에 들어온 베리야는 인민위원부의 지도간부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취한 조치부터 많은 체키스트는 자신들의 두려움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예조프의 부인민위원 S. B. 주콥스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L. P. 베리야가 제1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된 뒤 어느 날, 그가 국가보안총국의 직원과 조직편제를 파악하고 있을 때 흥분한 니콜라예프*가 내게 찾아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렸다.
제1부인민위원은 제3부 직원들을 파악하면서 그중 한 사람에게 누군가가 자신을 포섭한 적이 있느냐고 직접 물었다.
이 질문이 니콜라예프가 있는 자리에서 나왔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니콜라예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대단히 불안한 사건으로 내게 이야기했다.”[424]
* N. G. 니콜라예프주리드: NKVD 국가보안총국 제3부, 방첩부, 부장.
새 로스토프주 NKVD국장 D. D. 그레추힌을 승인하는 과정에서도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그레추힌은 동료들에게 예조프와 베리야가 함께한 면담에서 대단히 힘든 순간을 겪었다고 말했다.
베리야가 누군가 그를 반소비에트조직에 포섭한 적이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425]
이런 질문이 더욱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베리야가 대화에만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 직책에 부임한 첫 며칠 동안 작전기술부장 M. S. 알료힌과 NKVD 운수국의 한 부서장 A. P. 라지빌롭스키 같은 유명한 체키스트들이 체포되었다.
일주일 뒤에는 야고다 시절 임명된 NKVD 소방총국장 M. E. 흐랴펜코프가 체포되었다.
이어 NKVD 운수국장 B. D. 베르만, 스탈린그라드주 NKVD국장 N. D. 샤로프, 몰다비아 내무인민위원 I. T. 시로키와 다른 여러 NKVD 지도간부가 체포되었다.
베리야는 이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자료를 발견하고 체포를 주장했다.
예조프에게는 더 이상 부하를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예조프는 안절부절못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초조하게 집무실을 오가며, 베리야가 실시하는 조치를 하나하나 고통스럽게 받아들였다.
바로 그때 예조프는 이른바 특별문서고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1938년 7월부터 그의 지시에 따라 NKVD 지도간부와 당·국가 최고지도층을 불리하게 만드는 문서가 보관된 곳이었다.
다만 베리야, 비신스키, 프리놉스키, 말렌코프, 흐루쇼프, 포스크료비셰프와 몇몇 저명한 인물에 관한 자료는 자신의 개인금고로 옮겼다.
열쇠는 예조프만 가지고 있었다.
예조프가 NKVD의 권력이 점차 자기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혼란 속에서 지켜보는 동안, 또 하나의 영향력 있는 적이 나타났다.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를 알아챈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장 G. M. 말렌코프가 예조프에게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은 1927년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에서 함께 일할 때 알게 되었다.
말렌코프는 지도원이었고 예조프는 부부장이었다.
이후 한동안 길이 갈렸다.
예조프는 중앙위원회에서 계속 근무했고, 말렌코프는 모스크바시당위원회 조직지도부장이 되었다.
1934년 가을 말렌코프는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 부부장으로 중앙기구에 돌아왔다.
예조프가 이 부서를 이끌게 되면서 말렌코프는 그의 부하가 되었다.
1936년 2월 예조프가 부서를 떠나고 말렌코프가 그 자리를 맡은 뒤에도 두 사람은 친구로 남았다.
말렌코프는 예조프의 아파트와 별장을 자주 방문했다.
모든 일이 이전처럼 계속되었다면 이들의 동료관계가 어두워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38년 여름부터 예조프가 지도자의 총애를 잃고 있다는 조짐이 나타났다.
8월 말 베리야가 내무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자 예조프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으며, 그에게 나라에서 벌어진 불법행위의 주요책임을 떠맡을 희생양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분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말렌코프는 총애를 잃은 옛 동료와 급히 선을 긋고, 예조프와 그의 사람들이 저질렀다는 ‘당 노선의 왜곡’을 단호히 반대하는 인물로 자신을 내세우기로 했다.
말렌코프는 새로 정리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스탈린 서기국으로 보냈다.
그는 훗날 이 일을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포스크료비셰프*가 예조프와 매우 가까웠는데도, 나는 그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고서를 전달했다.
봉투에는 ‘스탈린 동지 개인에게’라고 적혀 있었으므로, 포스크료비셰프가 감히 열어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NKVD의 과잉행위를 다룬 보고서에는 예조프와 그의 기관이 당에 충실한 수천 명의 공산당원을 제거한 책임이 있다고 적었다.
40분 뒤 스탈린이 나를 불렀다.
집무실로 들어가니 스탈린은 아무 말 없이 방 안을 걷고 있었다.
그러더니 물었다.
‘이 보고서를 동무가 직접 썼소?’
‘예, 제가 썼습니다.’
스탈린은 다시 말없이 계속 걸었다.
그리고 또 물었다.
‘동무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오?’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탈린은 책상으로 다가가 보고서 위에 이렇게 썼다.
‘정치국원들에게 회람하여 표결할 것. 나는 동의한다.’”[426]
* A. N. 포스크료비셰프: 스탈린 서기국 책임자.
끝부분을 제외하면 대략 그런 일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말렌코프의 보고서 자체를 놓고 표결할 수는 없었다.
정치국의 표결대상은 아무리 올바른 내용이라 해도 글 자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에 관한 결정문 초안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표결이 있었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예조프의 해임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말렌코프의 아들에 따르면 1938년 8월에 있었다는 이 면담에서 스탈린은 내무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후보를 고르라고 지시했다.
그 순간부터 예조프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이 1938년 10월 11일 이전에 있었을 가능성에는 의문이 있다.
말렌코프의 설명에 따르면 두 사람의 대화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대화의 주제를 생각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의 크렘린 집무실 방문자 등록부를 보면, 1938년 10월 11일 이전 넉 달 동안 두 사람은 단둘이 만난 적이 없다.
따라서 말렌코프의 행동은 베리야가 임명된 지 한 달 반이 넘은 뒤, 예조프의 전망이 이미 충분히 분명해진 시점에야 이루어졌을 수 있다.
물론 그 행동이 실제로 있었다 해도 예조프의 운명에 큰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말렌코프가 알린 사실은 스탈린이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예조프의 미래도 그때까지는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상관을 제때 ‘넘긴’ 말렌코프는 물에 떠 있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이후 대단히 성공적인 당·국가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NKVD 지도간부에 대한 다음 체포물결은 1938년 10월 말에 찾아왔다.
이번에는 국가보안총국 해외부장 Z. I. 파소프, 방첩부장 N. G. 니콜라예프주리드, 교도부장 N. I. 안토노프그리추크, 경제총국 방위산업부장 L. I. 레이흐만, 전 예조프 부인민위원 S. B. 주콥스키와 다른 여러 사람이 베리야의 손에 들어갔다.
주콥스키는 1936년 말 예조프를 따라 당기구에서 NKVD로 옮긴 네 명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오래전부터 먹구름이 모이고 있었다.
예조프가 힘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부인민위원을 보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주콥스키의 전기에 ‘어두운 얼룩’이 있었다는 점이다.
1923년 당내논쟁 당시 그는 트로츠키주의 반대파의 견해를 지지했고, 트로츠키파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주콥스키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업무용 신상기록과 당 숙청에서도 이를 언급했다.
그러나 1937년과 1938년에는 과거일지라도 트로츠키주의 사상에 동조한 사실 자체가 실제 범죄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최근 스탈린도 예조프의 NKVD 측근 가운데 주콥스키와 체사르스키처럼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사람이 근무하는 데 불만을 나타냈다.
베리야가 NKVD에 들어오면서 가까운 보좌관을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예조프에게도 완전히 분명해졌다.
그는 체사르스키와 주콥스키를 늘 사람들의 눈에 띄는 모스크바에서 지방으로 보내기로 했다.
앞에서 말했듯 체사르스키는 9월 중순 NKVD 우흐타·이젬스크 수용소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주콥스키는 예조프의 제안에 따라 1938년 9월 말 카자흐스탄 리데르 다금속콤비나트 소장이 되었다.
후임자에게 업무를 넘겨야 했으므로 새 근무지로 곧바로 떠나지는 못했다.
마침내 일을 정리했을 때에는 이미 체포영장이 발부된 뒤였다.
11월 초에는 경호부의 차례가 왔다.
한 달 전 베리야는 부부장 B. Ya. 굴코의 체포를 승인했다.
굴코는 잠시 혐의를 부인하다가 전 내무인민위원 G. G. 야고다가 만들었다는 반소비에트조직의 구성원이라고 ‘자백’했다.
그리고 경호부의 다른 직원들도 음모에 가담했다고 지목했다.
경호부 안에서는 이 진술을 알지 못했지만,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가 급격히 바뀐 사실은 즉시 느꼈다.
경호부장 I. Ya. 다긴은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베리야가 더 이상 자신을 보고에 부르지 않고, 부하들을 자신과 협의하지 않은 채 체포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일할 수 없으며, 경호부의 업무를 조사할 위원회를 임명하여 자신이 짧은 기간 동안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지를 모두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다긴이 특히 불안해한 것은 10월혁명 21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 자신이 작성한 경비계획을 베리야가 변경한 일이었다.
다가오는 축제기간 붉은광장 경비책임자 인선에 관한 다긴의 제안도 거절했다.
다긴은 이를 정치적 불신의 표현이며 곧 자신이 체포될 신호로 받아들였다.
설명을 요구하러 찾아간 다긴에게 예조프는 경호부 지도부의 체포문제를 베리야가 이미 제기했지만, 지금까지는 그 생각을 말릴 수 있었다고 확인했다.
베리야 자신도 다긴을 불러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경호부의 업무에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1938년 11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밤 예조프와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 베리야는 경호부의 ‘음모자들’을 체포하는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예조프는 축제기간 질서유지가 어려워진다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도자의 동의를 얻은 베리야는 바로 그날 밤 자신이 원한 사람들을 모두 체포했다.
같은 회의에서 베리야는 작전부장 I. P. 포파셴코와 레닌그라드주 NKVD국장 M. I. 리트빈을 비롯한 다른 NKVD 지도간부를 체포할 승인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예조프는 가장 가까운 동료 M. I. 리트빈에게 11월 10일 전화했다.
지역 NKVD부장들을 승인하기 위한 자료를 가지고 모스크바로 오라고 했다.
리트빈은 호출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출발을 사흘이나 나흘 늦출 수 없는지를 물었다.
예조프는 그럴 수 없다고 답했고, 자신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는 뜻을 비쳤다.
다음 날 리트빈은 다시 전화해 조금 더 머물 수 없는지를 물었다.
예조프가 거절하자 리트빈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면 짐을 전부 싸야 합니까?”
그때 예조프는 자기 전화가 감청되고 있다고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리트빈은 스스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
11월 12일 저녁, 예정된 모스크바 출발을 몇 시간 앞두고 리트빈은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는 두 장의 메모를 남겼지만 내용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427]
그 주에 NKVD 지도간부가 자살한 것은 두 번째였다.
11월 6일 크렘린 사령관국장 F. V. 로고프는 베리야에게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체포를 예상하여 권총으로 자살했다.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A. I. 우스펜스키는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베리야가 들어온 뒤 NKVD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끼고, 9월부터 부하들에게 모스크바로 보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가짜 신분증 몇 장을 만들어달라고 지시했다.
우스펜스키는 자기 나이에 가장 어울리는 한 장을 남기고 나머지는 없앴다.
11월 14일 예조프는 우스펜스키에게 전화하여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고 알렸다.
대화를 통해 우스펜스키는 자기 차례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살하며 시신은 드네프르강 바닥에서 찾으라는 내용의 메모를 썼다.
아내에게 보로네시행 표를 사달라고 한 뒤 그날 밤 키예프를 떠났다.
보로네시에 도착하기 전 쿠르스크에서 내렸다.
어느 기관사 가족의 집에서 며칠을 보낸 뒤 벌목노동자로 취업하려고 아르한겔스크로 갔다.
그러나 서류상 직업인 노동자와 외모가 너무 달랐으므로 의심을 받아 채용되지 않았다.
우스펜스키는 칼루가로 이동했다.
그 뒤 모스크바, 다시 칼루가, 무롬, 카잔, 아르자마스, 스베르들롭스크를 거쳐 마지막으로 미아스로 갔다.
그곳에서 금광에 취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939년 4월 16일 미아스역에서 체포되면서 다섯 달간의 국내도피가 끝났다.
우스펜스키·리트빈·로고프·류시코프와 달리, 대부분의 고위 NKVD 관료는 아무런 저항 없이 베리야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1938년 11월에는 NKVD 제1특별부장, 1938년 10월까지 NKVD 서기국장이었던 I. I. 샤피로, 굴라크 총국장 I. I. 플리네르,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 M. G. 라예프와 다른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북캅카스 체키스트학교의 창설자이자 수운인민위원부의 예조프 부인민위원 E. G. 예브도키모프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때 예조프의 NKVD 내 권위는 최저점까지 떨어졌다.
그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부서장은 예조프가 아니라 베리야에게 업무를 보고하려 했다.
상황을 가장 빨리 이해한 지방 NKVD국장과 공화국 내무인민위원들은 베리야 앞으로 보내는 주민동향 정보원보고에, 예조프가 과잉행위 때문에 곧 해임될 것 같다는 시민들의 발언까지 포함하기 시작했다.
설정된 과제를 모두 수행한 대량테러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통상적이고, 즉 비교적 온건한 탄압으로 돌아가는 일을 정치적·법률적으로 어떻게 정리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1938년 10월 8일 정치국은 예조프를 위원장으로 하고 베리야, 비신스키, 말렌코프와 소련 법무인민위원 N. M. 리치코프가 참여하는 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에는 열흘 안에 체포, 검찰감독과 수사방식에 관한 새로운 방침을 담은 중앙위원회·인민위원평의회·NKVD 공동결정문 초안을 작성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위원회가 왜 정확히 10월 8일 구성되었고, 활동기간이 왜 열흘뿐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앞에서 말한 1938년 9월 15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만들어진 지방 사법 트로이카가 활동을 끝내기까지는 한 달 넘게 남아 있었다.
그전에 탄압기술에 어떤 변화를 줄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아무 변화도 없었다.
열흘이 지나고, 다시 열흘이 지나고 또 시간이 흘렀지만 새 방침은 나타나지 않았다.
1938년 11월 15일 스탈린은 크렘린 집무실에서 동료들과 또 하나의 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저녁 6시에 시작해 세 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스탈린 외에 몰로토프와 예조프만 참석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초대되었다.
논의내용은 그날 정치국이 회람표결 방식으로 채택한 결정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11월 15일 정치국은 모두 열다섯 개 안건을 다루었다.
번호가 이어지는 방식이었으므로 첫 안건은 97번, 마지막은 111번이었다.
99번은 하바롭스크변경과 연해변경의 특별 사법 트로이카 구성을 승인하는 문제였다.
두 변경은 한 달 전 폐지된 극동변경을 대신하여 만들어졌다.
이제 각각에 끝나가는 대량작전의 민족계층 수사사건을 심리할 기관을 설치해야 했다.
오후 6시 25분 전 NKVD 국가보안총국 수운·도로·통신부장 V. V. 야르체프가 스탈린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1938년 봄 사할린주 정부전권대표로 파견된 그는 현지에서 항공기 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
이제 회복한 뒤 새 임명과 관련하여 지도자를 만나러 온 것이다.
야르체프는 스탈린 집무실에 30분 동안 머물렀다.
그 결과 정치국 결정 104번으로 소련 통신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
오후 7시 30분 베리야가 도착했다.
그 뒤 국경침입자를 발견했을 때 국경수비대가 무기를 사용하는 절차를 간소화한 정치국 결정 108번이 나왔다.
마침내 오후 7시 55분 소련 검사 A. Ya. 비신스키가 스탈린 집무실의 문턱을 넘었다.
그날뿐 아니라 1938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비신스키는 몰로토프, 예조프, 베리야, 말렌코프가 함께 있던 자리에서 스탈린과 55분 동안 이야기했다.
그 결과 정치국 결정 110번이 나왔다.
결정은 다음과 같았다.
“다음의 소련 인민위원평의회와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지령안을 승인한다.
지령은 연방공화국과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주·변경 NKVD국장, 변경·주·자치공화국·연방공화국 검사, 군관구검사, 철도·수운검사, 소련 최고재판소장, 연방공화국·자치공화국 최고재판소장,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장, 군관구 군사재판소장, 민족공산당 중앙위원회·주위원회·변경위원회 서기에게 보낸다.
엄중히 명령한다.
올해 11월 16일부터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특별명령이나 다른 간소절차에 따라 트로이카·군사재판소·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에 넘겨진 모든 사건의 심리를 중단한다.
군관구·변경·주·자치공화국·연방공화국 검사에게 이 명령이 정확하고 즉시 실행되는지를 감독하도록 한다.
실행결과를 소련 NKVD와 소련 검사에게 보고한다.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V. 몰로토프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I. 스탈린.”[428]
겉으로 보면 스탈린의 결정은 즉흥적으로 보인다.
11월 15일은 앞에서 말한 민족노선별 작전을 마치도록 정한 두 달의 기한이 끝나는 날이었다.
그날 하바롭스크·연해변경 특별트로이카의 구성을 승인한 것은 앞으로도 업무를 계속하려는 뜻처럼 보였다.
불과 세 시간 뒤 전국 모든 트로이카의 활동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나오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이 결정을 내린 근거는 대량작전 과정에서 벌어진 심각한 권력남용사례였을 것이다.
국가의 최고검사가 회의에서 이를 보고했을 수 있다.
그러나 비신스키가 민감한 문제를 제삼자들 앞에서 스탈린에게 말하면서, 적어도 보고의 주요내용을 미리 합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스탈린 역시 감정에 휩쓸려 애초의 계획에 없던 원칙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도자는 검사가 무엇을 보고할지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회의에 참석한 몰로토프·예조프·베리야·말렌코프의 눈에는 자기 결정이 비신스키가 폭로한 추악한 사실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처럼 보이기를 원했던 듯하다.
1938년 11월 17일 정치국은 15일 지령을 발전시켜 소련 인민위원평의회와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체포, 검찰감독과 수사의 진행에 관하여」 결정을 승인했다.
이 문서는 이틀 전 비신스키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내용을 종합한 것이며, 그것이 당시 ‘대테러’를 중단할 형식적인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결정문의 서두는 1937년과 1938년 NKVD가 인민의 적을 분쇄하고, 국내에서 자라났거나 외국에서 침투한 수많은 간첩·테러리스트·파괴공작원·사보타주범을 소련에서 제거하는 큰 업무를 수행했다고 선언했다.
이 작업은 사회주의건설의 이후 성공을 보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앞으로도 소련의 모든 적과 무자비하게 싸우되, 더 완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정문은 이를 더욱 필요하게 만드는 이유도 설명했다.
1937년과 1938년 적대분자를 분쇄하고 뿌리 뽑기 위해 실시한 대량작전은 간소한 수사와 재판방식을 사용했으므로, NKVD와 검찰 업무에서 여러 중대한 결함과 왜곡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발견된’ 주요결함은 주민 사이의 정보원업무가 약하고 수사가 지나치게 간소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었다.
결정문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피의자에게서 유죄자백을 받아낸 수사관들은 그 자백을 필요한 문서자료로 뒷받침하는 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체포된 사람이 한 달 넘게 심문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범죄자백을 얻기 전까지 심문조서를 작성하지 않기도 한다.
기소내용을 반박하는 진술은 조서에 기록하지 않는다.
수사사건은 엉성하게 정리된다.
누가 수정하고 지웠는지 알 수 없는 연필로 쓴 진술 초안이 사건기록에 들어간다.
피심문자와 수사관의 서명이 없는 조서가 보관된다.
서명도 승인도 없는 기소결론서가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결정문에 따르면 검찰기관은 이런 결함을 없애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체로 수사자료를 단순히 접수하고 도장을 찍는 데 검찰의 참여를 한정하여, 발생한 위반행위를 사실상 합법화했다.
결정문은 NKVD와 검찰에 침투한 인민의 적들이 이 모든 상황을 능숙하게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소비에트법률을 왜곡하고 문서를 위조했으며, 수사자료를 날조했다.
사소한 구실이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람들을 형사책임에 회부하고 체포했다.
도발적인 목적으로 무고한 사람을 대상으로 ‘사건’을 만들었다.
동시에 자신들의 반소비에트 범죄활동 공범을 폭로와 분쇄에서 숨기고 구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했다……”[429]
결정문은 NKVD와 검찰에서 드러났다는 이처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결함이 발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두 기관에 침투한 인민의 적들이 그 업무를 당의 통제와 지도에서 떼어놓으려 했다.
이를 통해 자신과 공범들이 파괴활동을 계속하기 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다음의 조치가 정해졌다.
- NKVD와 검찰이 대규모 체포·추방작전을 실시하는 것을 금지한다.
- 사법 트로이카를 폐지하고 종결된 수사사건은 법원이나 소련 NKVD 특별협의회에 넘긴다.
- NKVD와 검찰은 현행법률을 엄격히 지키며 체포와 수사를 실시한다.
- NKVD 수사를 감독하는 모든 검사는 지방 당조직과 소련 검사의 제청을 받아 당 중앙위원회가 임명한다.
“소비에트법률과 당·정부의 지령을 조금이라도 위반한 NKVD와 검찰직원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한 사법책임을 져야 한다.”[430]
물론 인민위원평의회와 중앙위원회 결정에 적힌 NKVD와 검찰의 ‘결함’을 스탈린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량작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이를 문제 삼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설정한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으므로, 성과를 얻는 데 사용한 방법과 거리를 둘 때였다.
국내를 지배한 자의적 폭력의 책임을 무능하거나 범죄적인 집행자에게 넘길 수도 있었다.
이제 집행자들의 지도자도 정치적인 무대로부터 사라져야 했다.
11월 17일 인민위원평의회와 중앙위원회 공동결정에 담긴 NKVD 비판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벌어진 일의 책임을 검찰, 이를 냉정하게 지켜본 기관,과 두 기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당 지도부도 일부 나누어 져야 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예조프를 해임할 형식적인 구실로 대량탄압과 직접 관계없는 사건을 골랐다.
1938년 11월 중순 이바노보주 NKVD국장 V. P. 주라블료프가 정치국에 진정서를 보냈다.
그는 국가보안기관 업무의 중대한 결함, NKVD 지도간부 일부의 의심스러운 행동, 그리고 자신이 이전에 이 문제들을 알렸는데도 예조프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보고했다.
주라블료프는 예조프가 발탁한 체키스트들이 잇달아 공격받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닥칠 타격을 피하려고 밀고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기대를 틀림없이 뛰어넘었다.
스탈린은 매우 시기적절하게 주도성을 보인 그를 포상하여 모스크바로 전근시키고, 수도의 NKVD국장으로 임명하라고 지시했다.
직속상관을 건너뛰어 지도자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통상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주라블료프는 전문적인 업무에서도 비표준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데 익숙한 인물이었다.
예조프 이전 시기에 그는 톰스크시 NKVD부 비밀정치과장으로 일했다.
관할지역에 이렇다 할 반혁명집단이 없자, 직접 그런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지역 콜호스 농민들 사이에 자기 정보원을 침투시키기 위해 그 정보원이 콜호스위원장의 딸과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실제 아내와 이혼했다는 가짜증명서도 발급해주었다.
그리고 콜호스원들을 선동하여 반소비에트조직을 만들도록 유도하라고 명령했다.
이 모든 공작의 결과 30명 넘는 사람이 체포되어 1936년 9월 여러 기간의 징역형을 받았다.
정보원을 작전에서 빼내기 위해 주라블료프는 그에게 어머니 집으로 가서 관 속에 누운 모습을 어머니와 함께 사진으로 찍고, 그 사진을 새 가족에게 보내라고 명령했다.[431]
예조프가 NKVD에서 실시한 인사혁명은 빠른 승진의 모든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1937년 9월 주라블료프는 이미 쿠이비셰프주 NKVD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주당위원회 제1서기 P. P. 포스티셰프가 주 전역에서 부지런히 찾아내던 각종 인민의 적을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38년 2월 포스티셰프가 체포된 뒤에도 주라블료프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같은 직급으로 이바노보주에 옮겨졌을 뿐이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정력적이고 주도적인 직원이며 비표준적인 수사기법의 지지자로 명성을 쌓았다.
이바노보 NKVD국 내부감옥의 수감자들은 ‘오리’라고 불린 그의 심문방법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경비원 두 사람이 수감자를 뒤로 넘어뜨리고 손발을 묶은 뒤 이를 벌렸다.
그러면 주라블료프가 그의 입에 소변을 보았다.[432]
주라블료프의 진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예조프가 저지른 ‘오류’를 논의하기 위해, 스탈린은 거의 모든 정치국원이 참가하는 대규모 회의를 소집했다.
예조프의 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M. F. 시키랴토프,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장 G. M. 말렌코프, L. P. 베리야와 M. P. 프리놉스키도 참석했다.
토론은 11월 19일 밤 11시에 시작하여 다섯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예조프가 11월 23일 스탈린 앞으로 쓴 편지에서 알 수 있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다음의 이유로 소련 내무인민위원직에서 나를 해임해줄 것을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요청합니다.
- 1938년 11월 19일 정치국회의에서 이바노보주 NKVD국장 주라블료프 동지의 진정을 논의한 결과, 그 안에 적힌 사실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주라블료프 동지가 자신의 진정에서 말했듯, 리트빈·라지빌롭스키를 비롯한 NKVD 책임간부들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내게 알렸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자신도 반소비에트 음모활동으로 관련되어 있던 인민의 적 몇몇의 사건을 덮으려 했습니다.
특히 포스티셰프의 폭로를 온갖 방법으로 방해한 리트빈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다룬 주라블료프 동지의 메모는 대단히 심각했습니다.
리트빈은 음모활동을 통해 포스티셰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주라블료프 동지의 신호에 마땅한 볼셰비키적 관심과 날카로움을 보였다면, 인민의 적 리트빈과 다른 악당들은 오래전에 폭로되었고 NKVD의 가장 책임 있는 직책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 주라블료프 동지의 메모를 정치국회의에서 논의하면서 NKVD 작전업무의 다른,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결함도 폭로되었습니다.
정보활동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정보원·첩보업무는 형편없이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해외정보기관은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해외부가 간첩들로 오염되어 있었고, 해외주재원 가운데 상당수는 외국의 주재원이 심어놓은 정보원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수사업무에도 여러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체포자에 대한 수사를 아직 폭로되지 않은 NKVD 음모자들이 맡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사건을 전반적으로 확대하지 못하게 하고, 시작단계에서 덮어버렸으며, 무엇보다 체카기관에 있는 자기 공범을 숨겼습니다.
NKVD에서 가장 방치된 부분은 간부문제였습니다.
NKVD 음모자들과 그들과 연결된 외국정보기관이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체카 상층부뿐 아니라 중간간부, 때로는 하급직원까지 포섭했음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상층부와 가장 불리한 자료가 있는 중간간부 일부를 분쇄했다는 사실에 안주했습니다.
새로 발탁한 사람 가운데에도 현재 드러나듯 간첩과 음모자가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 내게 가장 심각한 과오는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원 경호부에서 드러난 상황입니다.
첫째, 파우케르 시절부터 남은 상당수의 미적발 음모자와 단순히 더러운 사람들이 아직 그곳에 있었습니다.
둘째, 파우케르를 대신한 뒤 자살한 쿠르스키와 현재 체포된 다긴도 음모자로 드러났고, 경호부 안에 자기 사람을 적지 않게 심었습니다.
나는 마지막 두 경호부장을 정직한 사람으로 믿었습니다.
잘못 판단했고,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른 여러 결함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인민위원부의 작전·체키스트 업무가 처한 전체상황입니다.
기껏해야 나쁜 업무의 일부를 설명할 뿐인 객관적 사정은 언급하지 않고, 인민위원부 책임자인 나의 개인적인 죄만을 다루고 싶습니다.
첫째, 내가 이 거대하고 책임 있는 인민위원부의 업무를 감당하지 못했으며, 복잡한 정보업무 전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완전히 명백합니다.
이 문제를 제때, 볼셰비키답게, 모든 심각성을 담아 중앙위원회에 제기하지 않은 것이 나의 죄입니다.
둘째, 업무에서 중대한 결함을 여러 개 발견하고 인민위원부 내부에서도 이를 비판하면서, 이 문제를 동시에 중앙위원회에 제기하지 않은 것이 나의 죄입니다.
일부 성공에 만족하고 결함을 덮으면서 혼자 허우적대며 상황을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일이 잘 고쳐지지 않으면 초조해졌습니다.
셋째, 인사배치를 흔히 실무적인 관점에서만 처리한 것이 나의 죄입니다.
어떤 직원을 정치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대체자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며 체포를 미룬 경우가 많았습니다.
같은 실무적 이유로 많은 사람을 잘못 판단하여 책임 있는 자리에 추천했고, 이들이 이제 간첩으로 폭로되고 있습니다.
넷째,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원 경호부를 단호하게 숙청하는 문제에서 체키스트에게 도저히 허용되지 않는 태만을 보인 것이 나의 죄입니다.
특히 크렘린 음모자, 브류하노프 등,의 체포를 늦춘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태만입니다.
다섯째, 전 극동변경 NKVD국장인 배신자 류시코프와 최근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이었던 배신자 우스펜스키 같은 사람의 정치적 정직성을 의심하면서도, 체키스트적 예방조치를 충분히 취하지 않은 것이 나의 죄입니다.
그 때문에 류시코프는 일본으로 도망쳤고 우스펜스키는 현재 알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수색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면 내가 NKVD에서 계속 일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다시 한번 소련 내무인민위원직에서 나를 해임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업무에 이처럼 큰 결함과 실패가 있었지만, 중앙위원회가 날마다 지도하는 가운데 NKVD가 적들을 대단히 강하게 분쇄했다는 사실도 말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업무에서 이 모든 교훈을 받아들이고 실수를 바로잡으며, 중앙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나를 사용하는 어떤 분야에서든 중앙위원회의 신뢰를 정당화하겠다는 볼셰비키의 말과 의무를 중앙위원회와 스탈린 동지 앞에 바칩니다.”[433]
편지를 읽은 스탈린은 그날 저녁 예조프를 불렀다.
집무실에는 지도자 외에 V. M. 몰로토프와 K. E. 보로실로프도 있었다.
대화는 세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예조프는 자신의 업무상 잘못이 발생한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업무가 너무 많아 부하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부하 가운데에는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온갖 방식으로 방해한 노골적인 적과 숨어 있는 적이 많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대화상대의 이해를 얻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예조프는 자신을 압도한 감정을 더 이해하기 쉬운 글의 형식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보존된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 초안이 이를 보여준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11월 23일 동지와 몰로토프·보로실로프 동지와 대화한 뒤 나는 더욱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내 기분과 중앙위원회와 동지 앞에서 저지른 죄를 조금이라도 일관된 형태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말이 엉성해졌습니다.
마음을 가볍게 하기는커녕, 다 말하지 못하고 끝까지 설명하지 못했다는 더욱 무거운 앙금만 남았습니다.
나를 향한 불신이 동지에게 생긴 것은 완전히 정당합니다.
그 불신이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쩌면 더 커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글로 쓰면 더 깊이 생각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434]
이어서 예조프는 수운인민위원으로 임명된 뒤 새 기관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써야 했으며, NKVD에는 마땅한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가 즉시 NKVD 업무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이미 과부하 상태였던 신경계를 더욱 짓눌렀습니다.
초조해지고 모든 것을 붙잡았지만 아무 일도 끝까지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동지가 인민위원부의 업무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기분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중앙위원회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볼셰비키적 용기가 내게 없었습니다.
혼자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435]
그 뒤 류시코프의 도주가 일어났다.
“그 사건은 NKVD 기구 안에 배신자가 계속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지가 NKVD 업무를 경계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늘 그것을 느꼈습니다.
당연히 기분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때로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동지를 찾아가 모든 일을 정직하게 이야기하고, 일할 수 없으며 도움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볼셰비키답게 제기하는 대신, 다시 침묵했습니다.
그 결과 업무가 피해를 입었습니다.”[436]
예조프는 이어 많은 적과 배신자가 드러난 자기 인사집단을 언급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사람들을 알고 느낀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결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토록 깊은 비열함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437]
편지 두 번째 부분에서 예조프는 베리야가 NKVD에 들어온 뒤 자신이 느낀 감정을 설명했다.
“그 안에서 나를 신뢰하지 않는 요소를 보았습니다……
그의 임명이 내 해임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438]
당시 자신에게 가장 큰 위협은 베리야와,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제공하는 정보라고 보았던 듯하다.
예조프는 가능한 범위에서 제1부인민위원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지도자가 그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도록 경고하려 했다.
이를 직접 말할 용기는 없었던 듯하다.
대신 이 문제에 관해 프리놉스키와 나눴다는 대화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비판했다.
“베리야 동지가 임명되기 훨씬 전부터 기구의 일부 사람, 특히 프리놉스키는 체카노선에서 그루지야 사건을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프리놉스키는 내게 매우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캅카스에서 한 번이라도 근무한 체키스트는 그루지야에서 나오는 어떤 진술에든 반드시 등장할 거야.
거기서는 사건을 날조하고 있어.’”[439]
예조프가 전한 프리놉스키의 말에 따르면 베리야는 자기 측근들을 모두 총살했고, 과거 그루지야에서 일한 체키스트들도 전원 없애려 하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베리야가 모스크바로 옮긴 뒤에도 프리놉스키는 예조프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베리야와는 함께 일할 수 없으며, NKVD 안에 두 개의 지휘중심이 생길 것이다.
중앙위원회와 스탈린 동지에게 편파적인 정보가 올라갈 것이다.
개별적인 결함이 전체체계의 문제로 확대될 것이다.
베리야는 모든 권력을 자기 손에 넣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예조프는 썼다.
“나는 이 말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 동의했습니다……
이 모든 비열한 행동의 결과, 나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어리석은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a) 기구의 업무에 관한 베리야 동지의 정당한 비판도 모두 객관적이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b) 베리야 동지가 내가 어떤 환경에서 일해야 했는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며, 그래도 큰 업무를 수행했다는 사실도 평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c) 베리야 동지가 나를 국가보안총국 업무에서 밀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d) 베리야 동지가 중앙위원회에 충분히 객관적인 정보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e) 이 모든 일이 개인적으로 나를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440]
초안은 이 말에서 끊긴다.
편지가 끝까지 작성되어 수신자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1월 24일 저녁, 예조프가 지도자에게 보낼 편지를 마무리하던 바로 그때 스탈린은 그의 해임을 다룬 정치국 결정에 서명하고 있었다.
“예조프 동지가 내무인민위원의 의무에서 해임해달라고 제출한 요청을 검토하고, 그 요청에 적힌 이유와 두 개의 대형 인민위원부를 동시에 지휘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예조프 동지를 소련 내무인민위원의 의무에서 해임해달라는 요청을 승인한다.
예조프 동지에게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당통제위원장과 수운인민위원 직책을 유지시킨다.”[441]
11월 25일 자로 작성된 다음 결정에서 정치국은 L. P. 베리야를 소련 내무인민위원으로 임명했다.
NKVD 지도부의 변화에 관한 공식정보는 2주 뒤에야 언론에 나타났다.
그동안 위에서 흘러나온 소문에는 믿기 어려운 각종 세부사항이 붙었다.
사진산업총국장 A. G. 솔로비요프는 12월 2일 일기에 친구인 중앙 영화·사진·음성기록보관소장 S. I. 즈반코프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즈반코프는 대단히 흥분한 채 예조프가 체포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중앙위원회 서기, 당통제위원장, NKVD의 책임자가 갑자기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즈반코프는 예조프가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베리야*와 어떤 문제로 다퉜다고 확신했다.
베리야는 그루지야의 NKVD 전권대표가 트빌리시에서 누군가를 체포하지 못하게 막았다.
격분한 예조프는 직접 트빌리시로 달려가 전권대표와 베리야 자신을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예조프가 도착하자 베리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베리야는 즉시 예조프를 체포하고 감금한 뒤, 불리한 문서와 함께 모스크바의 스탈린 동지에게 데려갔다.
지금 예조프는 구금되어 있고, 베리야가 예조프를 대신해 NKVD에 임명되었다.”[442]
* 앞에서 말했듯 베리야가 예조프의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사실은 석 달이 넘도록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8일 중앙신문의 마지막 면 ‘인사소식’란에 짧은 발표가 실렸다.
“N. I. 예조프 동지는 자신의 요청에 따라 내무인민위원의 의무에서 해임되었으며 수운인민위원직은 유지한다.
L. P. 베리야 동지를 소련 내무인민위원으로 승인하였다.”[443]
베리야는 임명된 다음 날 대량작전의 근거가 되었던 예조프의 모든 명령·회람과 지시를 폐지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현행법률의 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예조프의 시대는 끝났다.
1936년 10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이 시대의 희생자는 이른바 반혁명범죄로 유죄판결을 받거나 수사과정에서 사망한 약 140만 명이었다.
거의 70만 명이 총살되었다.
이는 앞선 2년보다 30배 많은 숫자였다.
여러 기간의 수감형을 받은 사람 가운데에도 많은 이가 교정노동수용소에서 굶주림·질병과 소모적인 노동으로 목숨을 잃었다.
36.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1938년 11월 19일, 예조프의 운명을 결정한 크렘린회의에 그가 참석하기 몇 시간 전, V. V. 보롭스키 기념요양원에서 치료받고 있던 아내 E. S. 하유티나예조바는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했다.
예조프의 가정생활은 그가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에서 일하던 시기를 다룬 장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마르크스주의 강좌에서 공부하기 위해 수도로 옮긴 덕분에, 그는 2년 반 동안 떨어져 지낸 법적 배우자 A. A. 티토바와 마침내 다시 살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예조프 부부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절과는 거리가 멀었던 예조프는 자주 한눈을 팔았고, 결국 가정은 깨졌다. 공식적인 이혼절차가 이루어진 것은 1930년이었다.
예조프가 새로 선택한 여성은 지인 A. F. 글라둔의 아내 E. S. 하유티나글라둔이었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 페이겐베르크, 첫 남편의 성은 하유티나, 둘째 남편의 성은 글라둔,는 1904년 고멜에서 태어났다. 예조프보다 아홉 살 아래였다. 1923년 첫 남편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신문 『경제생활』에서 사무원으로 일했고, 뒤에는 ‘붉은 등대’ 인쇄소와 『농민신문』 광고부에서 교정원으로 일했다. 1925년 또는 1926년에 이혼한 뒤 『경제생활』 출판사장 A. F. 글라둔과 결혼했다. 글라둔이 얼마 후 런던의 소련 전권대표부로 파견되자 함께 영국으로 갔다.
1927년 소련과 영국의 외교관계가 단절된 뒤 두 사람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글라둔은 농업·임업노동자 노동조합 문화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교정원 고급과정을 마친 뒤 ‘크니고소유즈’ 출판사에 취직했다.
글라둔 부부는 손님을 맞기를 좋아했다. 소련 국가은행 이사회 부의장 Yu. L. 퍄타코프, 문학평론가 A. K. 보론스키, 작가 I. E. 바벨 같은 유명인들이 집을 자주 찾았다. 직장에서 글라둔을 알게 된 예조프도 종종 이 집의 ‘불빛’을 찾아왔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국내정치 소식과 각종 임명·인사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직원이던 예조프는 당연히 이런 정보의 귀중한 출처였고, 그 점에서 다른 손님들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외모가 돋보이고 사교적인 안주인은 남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예조프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고 마침내 모든 경쟁자를 밀어냈다. 1929년 봄, 당시 관행에 따라 글라둔이 어느 현의 파종사업을 감독하러 떠난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생겨 있었다. 다만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당장 이혼을 청구하지 말고, 예조프와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결합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남편을 설득했다.
1930년 예조프는 마침내 A. A. 티토바와 이혼하고 새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직 독신생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 아내보다 Yu. L. 퍄타코프, F. M. 코나르, L. E. 마리야신 등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즐기며 새벽이 다 되어서야 귀가하곤 했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와 가까웠던 이사크 바벨은 “예조프 부부의 초기 결혼생활은 마찰로 가득했고, 안정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444]
부부가 입양한 딸 나탈리야가 가정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친자녀가 없었던 두 사람은 영아원에서 아이를 데려와 기르기로 했다. 어린 나타샤는 곧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고, 함께 아이를 돌보는 일은 양부모를 크게 가까워지게 했다.
예조프가 당 경력을 쌓는 동안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1935년 그녀는 화보잡지 『건설 중인 소련』의 책임편집장대리가 되었다. 이 잡지는 러시아어뿐 아니라 독일어·영어·프랑스어로 발행되어 주로 해외에 배포되었다. 1930년 A. M. 고리키의 제안으로 창간된 이 잡지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소련의 성과를 외국독자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사진·기사·르포는 소비에트 경제체제의 우월성, 과학·기술·예술·스포츠의 성취, 노동자들의 행복하고 풍요로운 생활과 민족문제 해결의 성공을 보여주었다.
잡지의 명목상 책임편집장은 Yu. L. 퍄타코프였다. 그러나 국가은행과 중공업인민위원부의 본업으로 바빴기 때문에 실제로 출판물을 이끈 사람은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였다. 따라서 1936년 말 퍄타코프가 체포되어도 편집부의 업무에는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부의장 V. I. 메즐라우크가 겸직으로 새 공식편집장에 임명되었고, 뒤에는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A. V. 코사레프가 그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실무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가 계속 맡았다.
예조프 부부는 여가를 친구와 지인들 사이에서 보내기를 좋아했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 덕분에 두 사람의 아파트는 일종의 사교살롱이 되었다. 예조프의 부하인 중앙위원회 기구직원과 뒤에는 체키스트들뿐 아니라 P. A. 포스크료비셰프, A. V. 코사레프, R. I. 에이헤 같은 저명한 당관료, 언론인, 작가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손님들 앞에는 언제나 풍성한 음식과 술이 차려졌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38년 5월 말이나 6월 초, 이 목가적인 생활은 갑자기 끝났다. 집주인들에게는 더 이상 즐길 여유가 없었다.
앞에서 언급했듯 스탈린은 예조프와의 대화 중 갑자기 그가 5년 전 탄압당한 F. M. 코나르와 맺었던 관계를 거론했다. 이 대화는 예조프를 공황에 가까운 상태로 몰아넣었다.
상황은 이러했다. 스탈린이 보기에 예조프의 아내가 1936년 총살된 전 트로츠키주의자 G. M. 아르쿠스와 의심스러운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무엇이 이 대화의 계기가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와 아르쿠스 사이에는 특별히 가까운 접촉도 없었다. 그녀는 1927년 런던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다가 베를린에 두 달 머물렀을 때 아르쿠스를 알게 되었다. 당시 아르쿠스는 소련 국가은행 대표로 베를린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그의 아내를 몇 번 만났고, 아르쿠스 본인과도 한두 차례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에게 실제사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조프를 자기 곁에서 밀어내기 시작하려면 형식적인 구실이 필요했고, 그의 아내를 이용하는 방안도 다른 구실만큼이나 쓸모 있었다.
지도자와의 대화는 마지막에 예조프에게 더욱 험악한 방향으로 흘렀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관계로 오염된 이런 여자를 옛 친구 F. M. 코나르나 뒤에 적발된 다른 간첩이 예조프에게 일부러 붙여준 것은 아닌지 물었다. 그리고 잘 생각하여 이혼하는 편이 적절한지 스스로 결정하라고 충고했다.
집으로 돌아온 예조프는 아내에게 대화내용을 말했다. 그는 특히 스탈린이 코나르와의 옛 관계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 자기 정치경력 전체에 의문을 던진다고 보았다. 부부는 이후에도 몇 차례 이 문제로 돌아갔고, 마침내 예조프는 정말 이혼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무런 끔찍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기회가 생기면 스탈린에게 그 대화를 상기시키고, 아내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라고 예조프에게 충고했다.[445]
예조프가 이 조언을 따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부터 두 사람의 평온한 생활은 끝났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남편에게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본인도 이를 확신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녀를 사로잡은 불안은 외부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래야만 잠시라도 주의를 돌리고 잊을 수 있었다.
마침 이 무렵 시작된 M. A. 숄로호프와의 관계도 고통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한 가지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관계는 부부사이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앞에서 말했듯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에게는 특히 젊은 시절 많은 구혼자가 있었고, 일부는 그녀의 호의를 얻었다. 작가 I. E. 바벨, 북극탐험가 O. Yu. 슈미트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예조프 자신도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결합하기 훨씬 전에 미래의 아내에게 호감을 얻었다.
다만 세 번째 결혼 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안정을 찾은 듯했고, 과거와 같은 자유분방함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반대로 예조프는 이 결혼에서도 상당히 자유롭게 행동했다. 눈앞에 어느 정도 매력적인 여성이 나타나면 접근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의 절친한 친구 지나이다 글리키나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시간·장소·상황을 전혀 가리지 않고 우연히 눈에 띈 여자와도 성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유티나예조바에게 들은 바로는 N. I. 예조프가 여러 차례 추악할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아파트의 여성 봉사직원 모두에게 달려들어 동거를 강요하려 했다.”[446]
글리키나는 이어 말했다.
“하유티나예조바에게 들었는데, 그는 고골대로에 있는 NKVD 비밀아파트를 여성들과 만나고 성관계를 맺기에 가장 편리한 장소로 이용했다.”[447]
예조프의 가까운 주변인물 다수도 뒤에 비슷한 관찰을 전했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할 수 있는 만큼 남편의 부정과 그 결과를 수습했다. 1936년 예조프의 여성지인 한 명이 그의 아이를 임신하자, 당시에는 낙태가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보건인민위원부의 인맥을 이용하여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남편의 경박한 행동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던 듯하다. 특히 그것이 결혼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만큼 고통스럽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8년 여름 두 사람은 역할을 바꾼 듯했다. 이제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람으로 나타난 것은 예조프가 아니라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였다.
그녀가 M. A. 숄로호프를 알게 된 것은 아마 1938년 2월이었을 것이다. 숄로호프는 고향 뵤셴스카야지구에서 체키스트들이 저지른 난폭행위를 호소하려 모스크바에 왔다. 인민위원부에서 대화를 마친 예조프는 그를 별장으로 초대했고, 그곳에서 유명한 작가와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스탈린의 인민위원 부인이 만났다.
숄로호프는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에게 호감을 느꼈다. 1938년 6월 다시 수도에 왔을 때에는 붉은 카자크를 다룬 『건설 중인 소련』 특집호에 참여한다는 구실로 편집부에 있는 그녀를 찾아갔다.
1938년 8월 중순 숄로호프는 다시 모스크바에 왔다. 작가 A. A. 파데예프와 함께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의 편집부를 방문한 뒤, 세 사람은 숄로호프가 묵는 ‘나치오날’ 호텔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날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퇴근해 있던 예조프는 그녀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 몹시 불쾌해했다. 아내의 행동을 보면 숄로호프의 구애가 그녀를 무심하게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다음 날 숄로호프는 다시 편집부에 왔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단둘이 ‘나치오날’로 갔고, 호텔방에서의 만남은 점심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호텔방 감청은 ‘나치오날’을 포함하여 작전기술부 제1과가 담당했다. 운영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관심대상이 묵는 방은 NKVD의 각 작전부서가 내리는 특별지시에 따라 감청했다. 숄로호프가 1938년 6월 앞서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의 객실을 감청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바 있었다.
그날 특별임무를 받지 않은 감청원, 속기사,들은 이른바 자유사냥 방식으로 여러 객실의 회선을 주기적으로 연결했다. 흥미로운 대화가 들리면 이를 기록했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가 숄로호프를 찾아가기 전날, 속기사 한 명이 작가의 객실에 연결했다가 목소리로 그를 알아보고 계속 감청할 허가를 요청했다. 작전기술부장 M. S. 알료힌은 비밀정치부장 A. S. 주르벤코에게 연락하여 감청이 필요하다는 확인을 받은 뒤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다음 날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은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와 숄로호프가 작가의 방에 들어오자, 두 사람의 만남은 성실하게 기록되었다. 말한 내용뿐 아니라 속기사가 보기에 그 순간 일어난 행동도 적혔다. “욕실로 간다”, “침대에 눕는다” 같은 문구였다.
다음 날 제출된 기록을 읽은 알료힌은 곧바로 예조프에게 보고하러 갔다. 돌아온 뒤 제1과장보 N. P. 쿠즈민을 불러 사건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당시 출장 중이던 과장 V. V. 유신에게조차 알려서는 안 되었다. 앞으로 나오는 모든 자료, 속기록과 속기노트,는 봉인하고 절대로 읽지 않은 채 알료힌 본인에게 직접 전달하라고 했다.
예조프가 이 사실에 보인 반응은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의 친구 Z. F. 글리키나가 목격했다. 그녀는 훗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숄로호프와 만난 다음 날 밤늦게 하유티나예조바와 나는 별장에서 자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N. I. 예조프가 왔다. 그는 우리를 붙잡아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모두 식탁에 앉았다. 예조프는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많이 마셨고, 우리는 말상대가 되어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저녁식사 뒤 술에 상당히 취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예조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가방에서 몇 장짜리 문서를 꺼냈다.
하유티나예조바에게 ‘숄로호프와 잤어?’라고 물었다.
그녀가 부인하자 예조프는 화를 내며 문서를 얼굴에 던지고 ‘자, 읽어!’라고 했다.
하유티나예조바가 문서를 읽기 시작하자 얼굴빛이 곧바로 달라졌다. 창백해지고 몹시 불안해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예조프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문서를 빼앗고 내게 말했다.
‘가지 마시오. 당신도 읽어보시오!’
그리고 읽을 대목을 가리키며 문서를 내 앞의 탁자에 던졌다.
문서를 손에 들고 일부를 읽어본 뒤, 나는 그것이 호텔방에서 하유티나예조바와 숄로호프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한 속기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자 예조프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소파 옆에 서 있던 하유티나예조바에게 달려들어 얼굴과 가슴 등 온몸을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개입하고 나서야 폭행을 멈췄고, 나는 그녀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며칠 뒤 하유티나예조바는 예조프가 그 속기록을 없앴다고 내게 말했다.”[448]
그사이 삶은 새로운 타격을 계속 가했다.
예조프가 아내의 부정에서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L. P. 베리야의 임명이 알려졌다. 그 일을 기념하듯 이어간 열흘간의 폭음에서 겨우 벗어나자 또 하나의 불행이 닥쳤다. 이번에도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와 관련된 일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예조프의 비서 S. A. 리조바는 훗날 집안일을 하던 여성의 말을 인용하여,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의 트로츠키주의 전력을 고발하는 진정서가 스탈린 앞으로 중앙위원회에 접수되었다고 말했다.[449]
아마 이 일과 관련해 스탈린은 다시 예조프에게 이혼문제를 제기했고, 이번에는 훨씬 단호한 형태였던 듯하다. 적어도 예조프는 아내에게 이제 완전히 진지하게 이혼하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그녀를 극심한 우울상태로 몰아넣었다. 정치적으로 신뢰받지 못한다면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친구 지나이다 오르조니키제에게 말했다.
1938년 9월 중순, 아내가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지자 예조프는 그녀를 크림반도의 한 요양원으로 보냈다.
얼마 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그곳에서 고백에 가까운 편지를 보내왔다. 살아온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도 반박하는 편지였다.
“콜류셴카,
모스크바에서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상태였고, 당신과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어.
그러나 정말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가 함께한 삶뿐 아니라 내 삶 전체를 결산하고 싶어.
내 인생이 끝났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야.
이 모든 일을 견딜 힘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어.
내 삶 전체와 나라는 사람 전체를 조사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해. 부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는 거야.
내가 이중행동을 했고 저지르지도 않은 어떤 범죄를 범했다고 의심받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어.
너무나 부당한 일이야.
그 때문에 완전히 무너져 내가 살아 있는 시체처럼 느껴져.”[450]
이어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살아온 삶의 주요단계를 상기시키고, 전 트로츠키주의자 G. M. 아르쿠스, Yu. L. 퍄타코프, L. P. 세레브랴코프, A. K. 보론스키 등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들이 반소비에트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정치적인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고 설명했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썼다.
“나라와 당 앞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정직하게 일했고, 모든 힘과 에너지를 업무에 쏟았어.
콜렌카, 사람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이런 고통을 나는 무엇 때문에 받아야 하는 거야?
당신을 깊이, 너무나 깊이 사랑하면서 당신을 잃고, 오점이 찍히고 수치당한 채 살아 있는 시체로 혼자 남는다니.
한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를 파고들어.
왜 살아야 하지?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런 비인간적인 고통으로 속죄해야 하지?
부탁해. 간청할게. 모든 것을 조사해줘.
당신은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 해.
나를 위해, 나타샤를 위해,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도 나에게 책임이 있잖아.
나는 당신과 함께한 뒤에야 정치생활을 의식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책을 읽고 이해하기 시작했어.
어떤 말로 내 고통과 억울함을 전해야 할까?
끝없는 외로움, 사방의 어둠.
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것을 견딜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견딜 수 있나 봐.
차라리 가장 끔찍한 육체적 고통으로 죽는 편이 나았을 거야.
나를 나쁘게 이해하지 마, 사랑하는 사람.
당신이 먼저 나를 조사했다면 옳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랬다면 내게도 더 쉬웠을 거야.
생각할 틈도 없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불태워.
그리고 당신을 잃는다는 것.
병들었을 때 어린아이처럼 간호했고,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모두 주었던 당신을 잃고, 결국에는 고통만 가져다주다니.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해주고 싶었는데.
아직 살아 있다면 당신에게 불쾌한 일을 더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야.
당신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화내지 않아.
그리고 전에는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만큼 당신을 사랑해.
당신의 겸손함과 당과 스탈린 동지에 대한 헌신 때문에 늘 당신을 숭배했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그분과 단 5분만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분이 당신을 얼마나 세심하게 돌보는지 보았고, 여성들에 관해 얼마나 다정하게 말하는지도 들었어.
그분은 나를 이해할 거야. 확신해.
느낄 수 있을 거야.
사람을 잘못 판단하여 가라앉도록 내버려둘 분이 아니야.
너무 힘들어 글을 쓸 힘도 없어.
내가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부당하게 깊은 불행에 빠졌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무서워.
방들을 헤매며 소리치고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어.
어디로?
누구에게?
누가 믿어줄까?
부탁이야. 당신이 모든 것을 조사해야 해.
제냐.”[451]
편지를 받은 예조프는 아내를 모스크바로 불렀다. 그녀의 상태를 생각하면 오랫동안 아무런 보호 없이 두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예조프 경호조 책임자 V. N. 예피모프가 훗날 전한 말에 따르면, 돌아온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몸이 매우 좋지 않았고, 남편과 그가 겪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정보는 그녀에게도 들어갔던 듯하다. 예피모프의 기억에 따르면 얼마 뒤 그녀는 예조프에게 B. Ya. 굴코와 당시 이미 체포된 경호부의 다른 ‘음모자들’을 해임해야 한다고 경고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 책망했다.
1938년 10월 29일 예조프는 아내를 모스크바 외곽의 보롭스키 기념요양원에 입원시켰다. 이곳은 신경계질환 치료를 전문으로 했다.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의사들에게 그해 여름부터 자신이 병들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흥분상태가 우세했고, 약 석 달간 계속되었다. 9월에는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잃었고 짓누르는 슬픔이 나타났다. 하루 종일 울었고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으며 생각하고 말하는 일도 어려워졌다.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 의사들은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병은 악화했다. 환각과 강박관념이 나타나 더 나빠지면 정신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38년 11월 19일 저녁 6시경 담당의사가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의 방에 들어갔다가 그녀가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이 시간에 자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보였다.
깨우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동공이 수축되어 있었고 빛에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바늘로 찔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중독이 의심되어 위세척을 실시했고, 세척액에서 루미날과 성질이 비슷한 물질이 발견되었다.
의사들은 수면을 돕기 위해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에게 루미날을 처방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연히 치료용량이었다.
예조프의 지인 I. N. 데멘티예프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약 일주일 전,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가 불면을 호소하자 Z. F. 글리키나가 집에서 어떤 강력한 수면제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이 바로 루미날이었던 듯하다.
의사들은 이틀 동안 환자의 생명을 구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1938년 11월 21일 오후 7시 55분, 예브게니야 솔로모노브나는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숨졌다.
부검결과 사인은 루미날 중독과 관련하여 발생한 양측성 폐렴이었다.
37. 올가미가 조여오다
신문에서 자신의 상관이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수운인민위원부의 예조프 부인민위원 Z. A. 샤시코프는 행동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Ya. M. 보인시토크와 E. G. 예브도키모프가 체포된 뒤 수운인민위원부에서 예조프의 부인민위원으로 남은 사람은 샤시코프뿐이었다. 그는 다음 차례가 자기에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체포된 동료들과 달리 샤시코프는 예조프가 오기 한 달 반 전, 수운인민위원부의 옛 지도부 아래에서 임명되었다. 하지만 재임기간의 대부분을 ‘나라의 최고 체키스트’ 밑에서 보냈으므로 위에서는 이미 그를 예조프의 사람으로 볼 수 있었다.
최근 몇 주 동안 예조프 주변과 그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면, 그런 친밀함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보좌관들이 체포되고 이제 내무인민위원직에서도 밀려난 사실은 ‘스탈린의 충실한 동료’가 누리던 전성기가 끝났으며, 앞으로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정치적 심연으로 추락하는 예조프와 거리를 두어야 했다. 가능하면 서둘러야 했다.
1938년 12월 9일 샤시코프는 수운인민위원부의 상황을 분석한 편지를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보냈다.
“1938년 3월 27일 소련 인민위원평의회의 결정은 수운부문에 여러 중대하고 원칙적인 과제를 제기했습니다.
파호모프*가 이끈 옛 지도부는 결정이 내려진 뒤 이를 실행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N. I. 예조프가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자 수운노동자 대중은 활기를 얻었습니다.
연간 수송계획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수운업무가 상당히 개선된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조프 동지의 취임이 인민위원부를 실제로 적극적으로 지도하는 업무로 뒷받침되었다면 그 성과는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예조프 동지는 여름 내내 인민위원부를 실질적으로 지도하지 않고 모든 일을 예브도키모프에게 맡겼습니다.
이 기간 인민위원부에 나온 것은 여덟 번에서 열 번을 넘지 않았고, 매번 두세 시간 동안 주로 일상적인 문제만 처리했습니다.
예브도키모프도 주요문제를 준비하면서 인민위원의 승인이 없다는 이유로 결정을 늦췄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소련 인민위원평의회의 3월 27일 결정은 파탄났습니다.”[452]
* N. I. 파호모프는 예조프에 앞서 수운인민위원을 지냈다.
샤시코프는 해결을 기다리는 원칙적인 문제들을 열거한 뒤 계속했다.
“최근 NKVD 간부 가운데 선발된 여러 지도직원이 인민의 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중앙보급국장 쿠린, 볼가강 상류선박회사장 리스트엔구르트, 모스크바오카 선박회사장 미헬손이 그렇습니다.
최근 들어온 다른 지도직원 집단도 제거될 것이라고 추측할 근거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중앙기구와 지방조직에서 새 지도부를 바라보는 건강하지 못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수운노동자들은 수운부문의 과제를 설명하는 인민위원의 생생한 말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예조프는 집무실에서 열린 소규모회의에서 짧은 결론을 내린 것 외에는 한 번도 연설하지 않았습니다.
예조프 동지는 아직도 인민위원부 지도업무를 맡지 않았습니다.
11월 8일 예브도키모프가 체포된 뒤 인민위원부에 세 번 들렀지만 쌓인 문제 전체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여러 차례 오겠다고 약속하고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뒤였습니다.
나는 예조프 동지가 과중한 업무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며, 날마다 인민위원부에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더 이상 참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부인민위원으로서 인민위원부의 지도에 전적인 책임을 지며, 인민위원부와 전체 수운부문의 업무를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를 모두 취하고 있습니다.
제기한 문제에 관한 지시를 요청합니다.”[453]
몰로토프는 예조프에게 여러 차례 전화하여 왜 출근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조프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당시 그를 사로잡은 절망과 막막함을 잊으려고 계속 만취해 있었으므로 달라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공식적인 방식으로 그를 훈계해야 했다.
1939년 1월 10일 소련 인민위원평의회는 「수운인민위원 N. I. 예조프 동지가 상습적으로 정시에 출근하지 않은 데 대한 징계」를 채택했다.
“수운인민위원 예조프 동지가 상습적으로 정시에 출근하지 않고,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후 3시·4시 또는 6시에 수운인민위원부에 출근하여 업무와 인민위원의 직무를 태만히 하고 있으므로 소련 인민위원평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인민위원부의 업무를 태만히 한 예조프 동지에게 견책을 내리고, 앞으로 이런 일을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예조프 동지는 정시에 인민위원부에 출근하여 정상적으로 이를 지도해야 한다.”[454]
겉으로만 보면 예조프의 행동에 대한 지도부의 반응은 자연스러웠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견책을 받는다.
그러나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에는 이런 급의 관료가 직무를 ‘태만히 한다’는 의심만 받아도, 상습적으로 지각하고 여러 차례 경고까지 받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즉시 해임된 뒤 체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실제로 불과 2주 전인 1938년 12월 28일에는 소련 인민위원평의회·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전연방노동조합중앙평의회가 공동결정을 채택했다. 정당한 이유 없이 20분 넘게 지각한 노동자와 사무직원은 무단결근자로 간주되어 해고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예조프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스탈린은 가장 가까운 측근들에게, 전날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 이처럼 깊이 추락했어도 정신을 차리고 잘못을 고치리라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는 모습을 애써 보여주었다.
예조프의 운명이 오래전에 결정되었으며 현재 벌어지는 모든 일이 최종결정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누구도 품어서는 안 되었다.
그사이 예조프의 새로운 잘못이 계속 발견되었다.
1939년 1월 초, 과거에는 예조프와 그가 지휘한 기관 가까이에 감히 접근하지도 못했을 소비에트통제위원회가 갑자기 수운인민위원부의 새 청사수리상황을 조사하기로 했다.
이 건물은 1938년 4월 테아트랄니 통로와 로제스트벤카 거리 모퉁이에 배정되었으며, 수운인민위원부 중앙기구를 이전할 예정이었다.
1939년 1월 8일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수운담당 책임자대행 A. S. 레온티예프는 위원회 부위원장 Z. M. 벨렌키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소련 인민위원평의회가 배정한 수리비는 75만 루블이었지만, NKVD 건설사무소와 수운인민위원부 기구는 합의하여 212만 3천 루블을 지출하려 했고, 공식승인도 받지 않은 이 불법적인 액수를 기준으로 실제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인민위원부 지도부가 들어갈 6층 개조과정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치가 나타났다.
레온티예프는 썼다.
“이 층의 사용가능면적은 1,100제곱미터이고 방은 23개입니다.
전체가 인민위원과 부인민위원 세 명, 그리고 이들의 서기국을 위해 배정되었습니다.
100제곱미터가 넘는 인민위원 집무실은 대단히 값비싸게 마감되었습니다.
집무실 옆에는 휴게실, 욕실, 화장실과 서기국·방문객접수용 방 네 개가 있습니다.
부인민위원들의 집무실도 매우 큽니다.
마감은 조금 단순하지만 역시 값비싸고, 각각 휴게실·화장실·세면실·응접실·서기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도부 공동서비스를 위한 별도주방과 뷔페 등 방도 몇 개 있습니다.
이처럼 공간을 사용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낭비이며, 무엇보다 아무런 필요도 없습니다.
이 면적의 절반 이상은 인민위원부 지도부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고 공동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455]
이런 사치는 물론 수운인민위원부에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모든 급의 지도간부가 편안한 생활환경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총애를 받는 동안에는 이런 검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벨렌키는 부하의 편지를 몰로토프에게 전달하며 덧붙였다.
“나는 이 건물 6층을 직접 살펴보았으며 레온티예프 동지의 보고가 완전히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조프 동지는 NKVD와 수운인민위원부 기구가 이 건물을 수리하며 저지른 추태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456]
그날 몰로토프는 레온티예프의 보고서를 정치국원 L. M. 카가노비치와 A. I. 미코얀, 자신의 부관 N. A. 불가닌, 예조프 본인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검토하기 바랍니다. 예조프 동지는 해명서를 제출하십시오. 이 사건을 논의해야 합니다.”[457]
논의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아직은 조준사격에 불과했다. 예조프를 겨냥한 주포는 NKVD 업무가 새 지도부에 마침내 인계된 1939년 1월 말에야 불을 뿜었다.
처음에는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된 뒤 며칠 안에 업무를 넘길 예정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예조프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해 절차는 계속 미뤄졌다.
1938년 12월 5일 정치국은 「NKVD 업무의 인수·인계에 관하여」라는 특별결정까지 내려야 했다.
“전 내무인민위원 예조프 동지는 NKVD의 업무를 넘기고, 내무인민위원 베리야 동지는 이를 인수한다.
업무의 인수·인계에는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안드레예프 동지와 중앙위원회 지도당기관부장 말렌코프 동지가 참여한다.
12월 7일 인수·인계를 시작하여 일주일 안에 끝낸다.”[458]
그러나 일주일은커녕 한 달 안에도 끝내지 못했다.
예조프는 여러 구실을 대며 NKVD에 나오지 않았다.
인계절차가 길어졌고, 1939년 1월 29일 인수문서가 마침내 서명되었을 때에는 베리야의 부하들이 체포된 체키스트들에게서 그동안 받아낸 예조프 고발내용이 대거 들어 있었다.
인수문서 자체는 지금까지도 기밀해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서가 예조프에게 제기한 혐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보존된 예조프의 초안메모[459]와 공개된 일부 대목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인수문서는 NKVD 업무의 결함을 보여주고, 예조프가 저지른 수많은 오류를 지적하는 증언과 문서를 모은 자료집이었다.
그 오류 가운데에는 직무범죄에 가까운 것도 있었고, 명백한 직무범죄도 있었다.
가장 자주 되풀이된 혐의 중 하나는 NKVD 지도간부를 불리하게 만드는 자료를 당 중앙위원회, 즉 스탈린,에 숨겼다는 것이었다.
지역의 이른바 작전상 과잉에 관한 정보를 은폐했다는 책임도 제기되었다.
크렘린 사령관국에 지하 테러음모집단이 존재한다는 정보도 숨겼다고 했다.
예조프는 1938년 4월 이를 알았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음모자’들은 베리야가 온 뒤에야 적발되었다는 것이었다.
인수문서 작성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예조프의 범죄적 태만 때문에 NKVD의 거의 모든 부서가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경호부는 정원이 채워지지 않았고, 업무규정과 지침도 승인되지 않았다.
직원에게 주택·제복·급여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의 물질적 형편을 도발적으로 악화”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특수부에서는 암호등록이 엉망이었고 필요한 수의 번역자가 없었으며, 젊은 간부양성도 실패했다.
예외도 있었다.
예조프는 자기 재임기에 Ya. I. 세레브랸스키의 지휘 아래 만들어진 특별집단에는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해외에서 테러·납치·파괴공작 같은 극비작전을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인민위원의 직접지시를 실행하는 테러리스트와 파괴공작원 집단을 이처럼 돌본 일은 인수문서 작성자들이 보기에 매우 의심스러웠다.
문서는 예조프가 지방상황을 통제하지 않고 현지체키스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대량작전, 특히 이른바 민족계층 작전을 실시할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아 수많은 권력남용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예조프 시기에 사용한 수사방법에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NKVD 기관에 의한 소비에트정부 징벌정책의 왜곡에 관하여」라는 항목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여러 사건에서 심문조서가 날조되었고 허위진술이 작성되어 체포자들에게 서명하도록 주어졌다.
더 많은 ‘자백’을 얻으려는 경쟁 속에서 수사관들은 체포자들을 속였다.
진술은 조건부에 불과하며 외국영사관 폐쇄결정의 실행과 영사관직원들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일에서 당과 정부를 돕기 위해 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460]
우크라이나 내무부 부인민위원 A. A. 야롤랸츠의 진술도 인용되었다.
그는 미리 만든 도식에 따라 실재하지 않는 예비중앙·병행중앙·주중앙 등 온갖 ‘중앙’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지토미르주에서는 현지 NKVD국장 G. M. 뱟킨의 단독명령으로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체포자 4천 명 이상이 총살되었다.
임신한 여성과 미성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총살자 2천 명 이상에 관한 트로이카의정서에는 위원들의 서명이 없었고, 상당수에게는 수사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461]
예조프에게 제기된 혐의만으로도 가장 가혹한 조치를 포함하여 어떤 처분이든 내릴 수 있었고, 겉으로도 충분히 정당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행동하기 이른 시기였다.
1939년 3월로 예정된 차기 당대회를 앞두고 예조프가 사라지면 대의원 사이에 원치 않는 말이 나올 수 있었다.
근거 없는 탄압은 이미 당 안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나고 그의 지방대표 대부분이 체포된 뒤, 여러 급의 당간부들이 스탈린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NKVD의 수사방법을 우려하고, 그 방법으로 얻은 결과에 의문을 표시하는 내용이었다.
지방당원들의 부적절한 적극성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스탈린은 카드 일부를 공개하고,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의 한 부분을 자신이 떠맡아야 했다.
1939년 1월 10일 모든 주위원회·변경위원회·민족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지방 NKVD기관에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주·변경위원회 서기들은 NKVD국 직원들을 조사하면서 체포자에 대한 물리적 강제의 사용을 범죄행위처럼 비난하고 있다.
중앙위원회는 NKVD 실무에서 물리적 강제를 사용하는 일이 1937년 중앙위원회의 승인 아래 허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물리적 강제는 예외적인 방법으로, 인도적인 심문방식을 이용하여 뻔뻔스럽게 공모자들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몇 달 동안 진술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남아 있는 음모자들의 적발을 늦추어 감옥 안에서도 소비에트권력에 맞선 투쟁을 계속하는 명백한 인민의 적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고 지시했다.
경험은 이 방침이 성과를 거두어 인민의 적을 폭로하는 일을 크게 앞당겼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후 실제로 자콥스키·리트빈·우스펜스키와 같은 악당들이 물리적 강제방법을 더럽힌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예외를 규칙으로 바꾸고 우연히 체포된 정직한 사람에게까지 적용했으며, 그 때문에 마땅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올바르게 적용되는 한 방법 자체의 명예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부르주아정보기관이 사회주의프롤레타리아의 대표에게 물리적 강제를 적용하고, 가장 추악한 형태로 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정보기관이 부르주아계급의 악질요원, 노동자계급과 콜호스농민의 철천지원수에게 더 인도적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중앙위원회는 물리적 강제방법을 앞으로도 예외적으로, 명백하고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인민의 적을 상대로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이는 완전히 올바르고 적절한 방법이다.”[462]
* “물리적 강제방법을 더럽히고 마땅한 처벌을 받은” 사례로 든 명단은 상당히 이상하다. L. M. 자콥스키는 실제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물리적 강제의 사용이 아니라 간첩행위와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활동 혐의였다. M. I. 리트빈은 처벌을 기다리지 않고 자살했으므로 누구도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A. I. 우스펜스키는 1939년 1월 아직 도피 중이었고 석 달 뒤에야 붙잡혔으므로, 아무리 처벌하고 싶어도 당시에는 불가능했다.
이 설명은 더욱 필요했다.
1937년 관련 정치국결정을 접했던 옛 지방지도자 가운데 자유롭게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후임자들은 예조프와 그의 사람들이 몰락하면서 그들의 업무방법도 함께 신임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방법 자체는 완전히 올바랐다.
아무에게나 적용하지 말고 ‘악질요원’과 ‘철천지원수’에게만 사용해야 했다.
누군가 또다시 실수하여 대상의 악질성과 원수다움을 잘못 판단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동안 예조프는 수운인민위원 재직의 암울한 결산을 하고 있었다.
1938년 수송과제도 이전 해들과 마찬가지로 달성하지 못했다.
블리드만 방식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문 『수운』은 항만기관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이 방식이 가끔만 사용되었다고 지적했다.
1939년 1월 14일 수운노동자회의에서 예조프는 전년도 항해계획이 무너졌다고 인정해야 했다.
인민위원부가 여전히 형편없이 일하고 있고, 수운부문에 진정한 볼셰비키적 질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업무열의가 부족하다는 혐의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예조프는 산업신문 『수운』에 자신의 인민위원부 명령을 정기적으로 싣도록 했다.
물론 이전에도 명령은 발행되어 이해관계자와 기관에 통상적인 경로로 전달되었다.
수운부문의 일반대중이 일부를 접하는 경우에도 대체로 요약형태였다.
그러나 이제는 겨울철 선박수리, 다음 항해철의 준비, 우수 스타하노프노동자의 포상 등 인민위원부 생활과 업무의 온갖 측면을 다룬 예조프의 장문의 지시가 신문 한 면 전체를 정기적으로 차지했다.
거의 한 달 동안 수운노동자들은 인민위원이 벌이는 왕성한 활동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조프도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복권하려는 시도가 헛되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던 듯하다.
2월 중순 그의 출판활동은 시작될 때만큼이나 갑자기 중단되었다.
제18차 당대회는 1939년 3월 10일 개막했다.
그 직전인 2월 23일부터 3월 10일까지 이전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가운데 아직 수사 중이던 사람 거의 전원이 총살되었다.
A. I. 예고로프, A. V. 코사레프, S. V. 코시오르, M. M. 쿨코프, L. I. 미르조얀, P. P. 포스티셰프, P. I. 스모로딘, A. I. 우가로프, N. A. 필라토프와 V. Ya. 추바르였다.
이제 탄압당한 중앙위원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수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E. G. 예브도키모프와 R. I. 에이헤, 그리고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앙’ 재판의 주요피고 가운데 한 명으로 군사합의부 판결에 따라 10년형을 복역 중인 G. Ya. 소콜니코프였다.
앞의 두 사람은 1940년 초 총살되었다. 소콜니코프는 같은 사건의 K. B. 라데크와 함께 1939년 5월 스탈린의 지시로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 수감시설에 들어간 소콜니코프와 라데크는 자신의 무죄, 재판조작과 그 조작에 스탈린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내용이 스탈린에게 보고되자 지나치게 말이 많은 증인들을 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수감 중인 전 NKVD 직원들로 처형조가 구성되어 지도자의 명령을 집행했다.
그 결과 제17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139명 가운데 다음 대회까지 비교적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은 예조프를 포함해 32명뿐이었다.
원래 구성의 23퍼센트였다.
나머지에게 운명은 덜 호의적이었다.
다섯 명은 자연사했고, 한 명, S. M. 키로프,은 살해되었다. 네 명은 자살했고 97명은 체포되었다.
체포자 가운데 세 명은 수사 중 사망했고 91명이 총살되었다. 앞에서 말한 나머지 세 명도 몇 달 안에 목숨을 잃을 예정이었다.
당이 존재한 역사 전체에서 이처럼 큰 손실을 겪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스탈린 한 사람에게만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전연방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자기 자신을 파괴했다.
그때마다 중앙위원들은 동료 가운데 상대적으로 작은 일부를 예조프의 손에 넘겼다.
그러나 이 절차가 거듭되면서 상대적 소수는 결국 압도적 다수로 변했다.
예조프는 당대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지 않았다.
예비자격심사위원회는 처음에는 그를 자문투표권을 가진 대의원 명단에 포함했지만, 뒤에 누군가의 무자비한 붉은 연필이 이름을 지웠다.
최고당대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한 사실을 예조프는 극도로 고통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앙위원회 서기였으므로 대회에 참석할 수는 있었고, 첫 이틀이나 사흘은 실제로 회의장에 나왔다.
대회에서 발언할 기회까지 기대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뒤로는 사실상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대회의 주요의제는 지난 기간 중앙위원회의 사업보고, 제3차 5개년계획, 1938년부터 1942년까지,과 당규약 개정이었다.
탄압문제는 별도로 논의되지 않았지만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었다.
당 지도부의 견해를 대의원과 전체주민에게 알리는 역할은 A. A. 즈다노프에게 맡겨졌다.
즈다노프는 당규약 개정을 다룬 보고의 「대량 당숙청의 폐지」 항목*에서, 1937년과 1938년의 사건을 암시하며 당 안에 위장한 적들이 존재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탄압조치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정직한 공산당원을 제거하고, 당대열에 지나친 의심을 퍼뜨리려 했다는 것이다.
이어 즈다노프는 지방의 ‘인민의 적’이 사람들을 당에서 제명하고 체포까지 이루어지게 한 사례를 여러 건 제시했다.[463]
* 1921년, 1929년부터 1930년, 1933년부터 1934년에 실시된 형태의 대량당숙청과 1935년 당문서검사의 형식으로 실시된 숙청을 가리킨다.
이로써 러시아의 전통적인 질문인 “누가 잘못했는가?”에 나라는 두 가지 답을 갖게 되었다.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 일은 당의 통제에서 벗어난 체키스트들이 책임자임을 암시했다.
즈다노프의 연설은 지방당조직에 숨어든 적들을 가리켰다.
누구든 책임을 질 수 있었지만 최고권력만은 아니었다.
3월 19일 저녁에는 당대회 각 대표단의 대표회의인 이른바 원로회의가 열렸다.
이곳에서 새 중앙위원 후보들을 사전논의했다.
예조프의 문제도 나왔다.
어떤 방식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는지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R. A. 메드베데프가 만들었다.
그는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에 관하여』에서 전 오데사주 당위원회 제1서기 E. G. 펠드만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회가 끝나갈 무렵, 회의가 열린 크렘린의 한 홀에 원로회의가 모였다.
앞의 긴 탁자에는 무대처럼 A. A. 안드레예프, V. M. 몰로토프, G. M. 말렌코프가 앉았다.
그들 뒤 왼쪽 구석 깊숙한 곳에는 스탈린이 파이프를 피우며 자리를 잡았다.
안드레예프는 대회가 업무를 끝내가므로 선출할 중앙위원 후보를 제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먼저 이전 중앙위원 가운데 물러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를 명단에 넣었다.
예조프의 차례가 왔다.
안드레예프가 물었다.
‘어떤 의견이 있습니까?’
잠시 침묵한 뒤 누군가 예조프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고 모두가 아는 사람이므로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 없습니까?’
모두 침묵했다.
그때 스탈린이 발언을 요청했다.
그는 일어나 탁자로 다가오면서도 계속 파이프를 피웠고 예조프를 불렀다.
‘예조프! 어디 있나? 이리 와보게!’
뒷줄에서 예조프가 나와 탁자로 다가갔다.
스탈린이 물었다.
‘자네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중앙위원이 될 수 있겠나?’
예조프는 창백해져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 삶 전체를 당과 스탈린에게 바쳤으며, 스탈린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고 있고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그래?’ 스탈린은 비꼬듯 물었다.
‘프리놉스키는 누구였지? 자네는 프리놉스키를 알았나?’
‘예, 물론 알았습니다. 프리놉스키는 제 부인민위원이었습니다. 그는……’
스탈린은 예조프의 말을 끊었다.
샤피로가 누구였는지, 리조바가 누구인지, 표도로프*와 다른 누군가가 누구인지 묻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있었다.
예조프가 외쳤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바로 제가, 제가 직접 그들의 음모를 적발했습니다. 제가 동지께 가서 보고했습니다……’
스탈린은 말을 잇지 못하게 했다.
‘그래, 그래, 그래! 자네의 손목이 붙잡혔다는 걸 느끼자 서둘러 왔지. 그전에는 뭐 하고 있었나? 음모를 꾸몄나? 스탈린을 죽이려고 했나?
NKVD 지도간부들이 음모를 준비했는데 자네만 옆에 비켜 있었다는 건가?
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어느 날 누굴 스탈린의 당직경호에 보냈는지 기억해보게. 누구였지? 권총을 가진 사람들!
스탈린 근처에 왜 권총이 필요한가? 스탈린을 죽이려고?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어쩔 뻔했나?’
이어 스탈린은 예조프가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활동하여 무고한 사람을 많이 체포하고, 정작 체포해야 할 자들을 숨겼다고 비난했다.
‘됐네. 가보게!
동지들, 그를 중앙위원으로 남길 수 있을지 모르겠소. 나는 의심스럽소.
물론 생각해보시오. 원하는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의심스럽소!’
예조프는 당연히 준비 중인 명단에서 만장일치로 제외되었다.
그는 휴식 뒤 회의장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당대회에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464]
* I. I. 샤피로는 소련 NKVD 서기국장과 제1특별부장이었다. S. A. 리조바는 예조프의 비서였고, N. N. 표도로프는 소련 NKVD 국가보안총국 특별부장이었다.
장면은 매우 생생하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다는 점이 오히려 불신을 낳는다.
첫째, 예조프가 창백해지고 스탈린이 자신을 차기 중앙위원회에 넣어야 하는지 의심한 데 놀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당대회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 최고당지도기관의 위원이 다시 될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과거 NKVD 업무, 당시 수운인민위원부 업무, 모두가 알고 있던 그의 ‘약점’과 관련하여 자신에게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둘째, 인용된 대화는 스탈린이 공개석상에서 이야기하는 방식과 거의 닮지 않았다.
형식과 내용 모두 지나치게 추문적이어서 사실이라고 믿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체포된 음모자 가운데 전 예조프 제1부인민위원 M. P. 프리놉스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완전히 황당하다.
프리놉스키는 당시 체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련 해군인민위원으로서 바로 그 당대회의 대의원이었다.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이던 N. G. 쿠즈네초프는 회고록에서 원로회의를 더욱 신빙성 있게 묘사했다.
그는 제18차 당대회 참가를 이야기하며, 자신이 구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라고 잘못 부른 한 회의에 손님으로 참석했다고 썼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면 바로 원로회의였다.
더구나 당대회가 개막한 뒤 구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릴 수도 없었다.
“새 중앙위원회의 구성문제가 나왔다.
처음에는 업무를 감당하지 못했거나 어떤 일로 신용을 잃었다고 평가된 구 중앙위원들을 제외했다.
누구의 이름이 논의되었는지는 지금 많이 잊었다.
스탈린이 예조프를 반대하여 발언한 장면은 기억난다.
그는 업무의 결함을 지적했지만 권력남용과 근거 없는 체포보다는 예조프의 음주문제를 더욱 강조했다.
이어 예조프가 발언하여 자기 오류를 인정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덜 독립적인 업무에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465]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새 업무를 줄 생각은 없었다.
1939년 3월 29일 정치국은 G. M. 말렌코프가 이끄는 위원회를 만들어 닷새 안에 예조프에게서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모든 업무를 인수하라고 지시했다.
이제 마지막 직책만 빼앗으면 되었다.
1939년 4월 2일 『프라우다』에는 「수운부문의 낙후를 극복하자」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1937년 수운부문은 작업시간의 거의 절반을 놀렸다.
그러나 수운부문의 간첩소굴을 분쇄한 뒤에도 수운인민위원부 지도자들은 1938년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고, 수송량은 1937년과 비교해도 감소했다.
수많은 사실이 항해철 준비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수운부문 전체의 업무가 달린 가장 중요한 작전문제들이 인민위원부에서 몇 달 동안 해결되지 않는다.
항해의 성공을 결정하는 선박정박지, 부두와 선박수리공장에서 인민위원부 지도간부들은 보기 드문 손님이다.
그들은 수많고 장황한 명령과 지시를 내리는 편을 좋아하지만, 그 이행을 결국 아무도 통제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은 1939년 항해철 수운업무를 심각하게 우려하게 만든다.”
이런 말이 나온 뒤라면 예조프를 수운인민위원직에서 해임하는 명령은 충분히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어차피 그곳에서도 이제 아무 쓸모가 없었다.
전 중앙해상건화물선총국 부국장 T. S. 호자인노프는 회상했다.
“4월 3일 출장결과를 보고하러 예조프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종이로 비둘기를 접어 휴지통에 던지고 있었다.”[466]
그러나 스탈린은 특별한 해임명령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지도자의 구상에 따르면 예조프는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채 흔적 없이 녹아 사라져야 했다.
1939년 초에는 인민위원부를 분할하는 운동이 진행되었다.
그해 1월과 2월 다섯 개의 전연방 인민위원부가 각각 두 개·세 개·네 개, 심지어 여섯 개의 독립인민위원부로 나뉘었다.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듯 많은 수운노동자가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수운인민위원부를 해상운수와 하천운수의 두 기관으로 나누자는 편지를 보냈다.
두 운수형태에는 뚜렷한 고유성이 있었고, ‘수상운송’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지붕 아래 묶인 것은 상당히 형식적이었으므로 일리가 있었다.
선원들이 제기한 제안과 논거는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1939년 4월 8일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수운인민위원부를 해상운수인민위원부와 하천운수인민위원부로 분리했다.
다음 날 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령이 같은 결정을 반복했다.
수운인민위원부의 분할과 새 인민위원의 이름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옛 수운인민위원의 운명은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 무렵 예조프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카가노비치 기념 모스크바산업아카데미 학생이던 조카 빅토르 바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4월 8일 집에 혼자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예조프였다.
그는 아나톨리, 예조프와 함께 살던 또 다른 조카,가 요즘 늦게 귀가하고 자신은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와달라고 하며 보드카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4분의 1병짜리 보드카를 사서 예조프에게 갔다.
함께 점심을 먹은 뒤 나는 공부하러 갔고 그는 집에 남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 1시경이었다.
몇 분 뒤 예조프가 전화했다.
집에 혼자 있고 아나톨리는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고 했다.
차를 보내며 다시 와달라고 했다.
새벽 2시경 예조프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몹시 취해 있었다.
왜 그렇게 마셨느냐고 물었더니 술을 마시고 싶어 마셨다고 대답했다.
앞에는 맥주 빈병 여덟 개가 놓여 있었다.
예조프는 더 이상 내게 말하지 않고 생선을 던졌다.
이어 맥주를 끼얹고 온갖 욕을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욕하느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다가와 주먹으로 얼굴을 두 번 때렸다.
조금 진정한 뒤 나는 자러 갔다.
예조프는 침실로 들어와 이불을 잡아당겨 빼앗고, 원칙도 의지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머리를 몇 차례 더 때렸다.
나는 소파에서 뛰어내려 당장 집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예조프가 문을 잠그고 내보내지 않았다.
얼마 뒤 진정한 그는 당과 소비에트정부 지도자들을 향한 원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467]
술에 취한 채 시작된 4월 9일은 대략 같은 방식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4월 10일 예조프는 체포되었다.
R. A. 메드베데프는 1979년 해외에서 출판한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에 관하여』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조프는 수운인민위원부 합의부회의 도중 곧바로 체포되었다.
회의장에 들어오는 NKVD 직원들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맑아진 얼굴로 말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그는 탁자 위에 무기를 놓았고 끌려갔다.”[468]
1991년에는 다른 체포설이 나타났다.
G. M. 말렌코프의 아들은 아버지와 보좌관 D. N. 수하노프가 서로 다른 시기에 독립적으로 들려주었다는 이야기를 회고록에 실었다.
“1939년 1월 말 예조프는 스탈린과의 면담을 얻어냈다.
스탈린은 말렌코프가 있는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예조프는 말렌코프가 인민의 적과 백위군출신자를 묵인한다고 비난했다.
말렌코프의 아버지가 귀족출신이라는 점을 암시한 것이다.
말렌코프도 예조프와 그의 기관이 당에 충성하는 공산당원들을 제거했다고 다시 비난했다.*
예조프는 정치국회의를 소집하라고 요구했다.
스탈린은 말했다.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가서 더 이야기하시오. 내가 결정을 알려주겠소.’
두 사람은 구광장에 있는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갔다.
얼마 뒤 베리야가 들어왔다.
집무실에서 나오면서 예조프는 체포되었다.”[469]
* 1938년 가을 말렌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의 혐의를 되풀이했다는 뜻이다.
사건의 시점을 1939년 1월이라고 한 점도 이상하지만, 스탈린의 동료 가운데 누군가가, 더구나 총애를 잃은 예조프가, 정치국회의의 소집을 ‘요구’할 수 있었다는 순진한 발상도 눈에 띈다.
예조프가 체포 직전 지도자를 만났다는 증거도 전혀 없다.
스탈린 집무실 방문자등록부에 따르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은 1938년 11월 23일이었다.
다만 예조프가 말렌코프의 집무실에서 실제로 체포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베리야의 부관 B. Z. 코불로프의 말을 인용하여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원로 P. A. 수도플라토프도 회고록에서 같은 정보를 전하기 때문이다.[470]
예조프가 체포된 뒤 크렘린 아파트는 당연히 수색을 받았다.
압수된 수많은 문서와 자료 가운데 티플리스현 헌병국이 ‘코바’, 스탈린의 당 활동명,와 자캅카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조직원들을 수배한 데 관한 서류철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서류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예조프가 이를 당문서보관소에 넘기지 않고, 업무용 집무실도 아닌 자기 집에 보관한 이유가 스탈린의 혁명경력을 불리하게 만드는 어떤 정보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조프는 그런 문서를 지도자에게 보여주기는 두려웠지만 없애버릴 결심도 하지 못했던 듯하다.
체포에 앞선 몇 달 동안 예조프 주변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최종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스탈린도 전날의 총애받던 인물이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여러 문제와 무엇보다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를 없애주는 결정을 스스로 내리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조프는 실제로 자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양녀, 늙은 어머니와 조카들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1936년 말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공산당원의 자살이 당과 싸우는 한 가지 방식이며, 당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의 책임에서 달아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당 지도부에 설명했다.
정치범의 가족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예조프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살생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떠올랐더라도 끝내 결심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모든 일이 어쩌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스탈린이 과거의 공로를 기억하여 신뢰를 잃은 다른 동료들과는 조금 다르게 자신을 처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