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파블류코프, 『예조프: 전기』 한국어 번역
PeopleNikolai Yezhov TermsYezhovshchina EventsThe Great Purge
제1부. 길의 시작에서
1. 니콜라이 예조프의 젊은 시절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온갖 소문과 억측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그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유명한 혁명가 A. G. 실랴프니코프의 가정에서 자랐다거나[1], 그의 아버지가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건물주 밑에서 수위로 일했으며 어린 콜랴 예조프는 온 동네에 이름난 불량소년이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일은 동물을 학대하고 어린아이들을 뒤쫓아가 어떻게든 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든 좀 더 큰 아이든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방으로 달아났다.”[2]
그러나 자신의 생애에 관한 정보를 왜곡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조프 자신이었다. 그 결과 그의 생애 초기와 관련된 많은 사실이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었다.
예조프는 각종 신상기록과 자서전에서 자신이 1895년 페테르부르크의 주물공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1917년 러시아에 새 권력이 수립된 뒤에는 당시 페테르부르크, 즉 페트로그라드를 가리키던 표현인 ‘세 혁명의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더구나 프롤레타리아 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이 출세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예조프가 바로 이 부분부터 자신의 전기를 손보기로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1895년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페테르부르크 출생은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야 그곳으로 이주했으며,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이반 예조프는 툴라현 볼혼시노 마을 출신으로, 리투아니아의 코브노시에 주둔하던 제111보병연대 군악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정해진 복무기간을 마친 뒤에도 초과복무로 그곳에 남았고, 군악대장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리투아니아계 여성과 결혼했다.
군에서 퇴역한 뒤 그는 이웃한 수바우키현으로 옮겨 젬스트보 경비대에 취직했다.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폴란드 지역에서는 경찰을 이렇게 불렀다.
가족에게서 태어난 네 자녀 가운데 예조프 본인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누나 예브도키야와 남동생 이반이었다.
니콜라이 예조프가 태어났을 당시 가족은 마리암폴군의 베이베리 마을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년 뒤 아버지 예조프가 승진하여 마리암폴 시내 구역의 젬스트보 경비대원으로 임명되자 가족은 마리암폴로 이주했다.
마리암폴은 인구가 4천 명을 조금 넘는 작은 군청 소재지였다. 지역의 명물로는 남자 고전김나지움, 두 곳의 제혁소, 그리고 두 공장이 있었다. 하나는 궐련용 종이관을, 다른 하나는 탄산수를 생산했다. 그러나 ‘공장’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각각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고작 몇 명뿐이었다.
도시의 이름은 그곳에 자리 잡은 마리아 수도회 수도원에서 유래했다. 마리암폴은 1795년까지 폴란드에 속했으나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에 넘어갔고, 마침내 1815년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리투아니아와 가깝다는 지리적 조건, 그리고 유대인 정착구역 안에 위치했다는 사실 때문에 도시 주민의 민족 구성은 매우 다양했다. 주민의 절반은 유대인이었으며, 그 뒤를 인구순으로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독일인, 러시아인 등이 이었다.
니콜라이 예조프는 이 조용한 지방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상당히 허약했다.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여성이었으며 빈혈을 앓았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다. 이런 ‘유전적 조건’에서 건강한 체질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취학할 나이가 되자 부모는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마리암폴에는 세 곳의 시립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그중 정교도 아동을 위한 학교는 하나뿐이었다. 예조프도 아마 그곳에 다녔을 것이다.
교육과정은 3년이었지만 예조프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겨우 1학년만 마쳤다.
“개인적으로 나는 학교 공부가 고역이었으며, 온갖 방법을 써서 공부를 피해 다녔다.”
예조프는 한 자서전에서 이렇게 주장했다.[3]
이 글이 작성된 1923년에는 이런 고백이 저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는커녕 오히려 유리하게 받아들여졌다. 어떤 ‘썩어빠진 지식인’과 달리 진정한 볼셰비키는 머릿속에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채워 넣는 교과서가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현실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예조프는 정규 과정인 3년을 모두 다닌 것으로 보인다. 훗날 그의 동생도 예조프가 학교를 졸업했다고 회상했다. 게다가 예조프는 읽고 쓰는 능력에서 많은 또래보다 두드러졌는데, 학교를 단 1년만 다녔다면 이는 가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추정이 맞는다면 예조프의 학교교육은 1905년이나 1906년에 끝났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렵 그의 인생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도 독한 술에 지나치게 빠진 탓에 젬스트보 경비대 일을 그만두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동안 군납용 가축을 도축하던 지역 주민 밑에서 일했다. 이후 마리암폴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데구체 마을에 찻집을 열었다.
그보다 얼마 전, 그가 과거 복무했던 제111연대가 코브노에서 마리암폴로 이동해 왔다. 일부 부대는 마침 데구체에 주둔했으므로 찻집의 주요 손님은 외출 허가를 받고 나온 병사들이었다.
찻집은 별다른 수익을 내지 못했다. 예조프의 아버지는 곧 파산했고, 이후 10년 동안 도장공으로 직업을 바꾸어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아직 찻집을 운영하던 시절, 그는 제111연대의 병사 니콜라이 바불린과 알게 되어 친구가 되었다. 바불린은 예조프의 누나에게 청혼했고 나중에는 그녀와 결혼했다.
바불린은 페테르부르크 출신이었다. 1906년 그의 군복무가 끝나자 열한 살 콜랴 예조프도 그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바불린의 형제 스테판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작은 재봉 작업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조프를 스테판 밑에 도제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예조프는 1923년에 작성한 자서전에서 페테르부르크 생활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열한 살 때 친척인 재봉사 밑에 도제로 보내졌다. 2년 뒤, 어쩌면 그보다도 빨랐을지 모르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 자신의 강력한 요구와 아버지의 도움으로 재봉사 밑을 떠나 기계·금속 작업장에 도제로 들어갔다. 1914년까지 푸틸로프 공장을 비롯한 페트로그라드의 여러 공장에서 일했다.”[4]
1938년 초에 집필되었으나 끝내 출판되지 않은 논문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빈곤과 투쟁의 아들」에서 소련의 저명한 작가 A. A. 파데예프는 훗날 볼셰비키당의 주요 인물이 되는 당시 열네 살 소년 니콜라이 예조프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얼굴은 솔직하고 고집스러웠으며, 때때로 소년다운 미소가 불쑥 떠올랐다. 작은 두 손의 움직임은 정확했다.
당시 공장 도제교육의 관행에 따라 어느 날 직장장이 화를 내며 니콜라이 예조프를 밀쳤는지 때렸는지 했다. 니콜라이는 집게를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변한 그의 얼굴을 본 직장장은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복자락을 펄럭이고 머리를 어깨 사이로 움츠린 채 직장장은 작업장을 가로질러 달아났다. 그 뒤에서는 작은 니콜라이 예조프가 집게를 손에 들고 가느다란 콧구멍을 분노로 떨며 쫓아갔다.
이런 짓을 했다면 도제를 공장에서 해고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직장장은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악의로 사람을 때렸다기보다는 습관적으로 때리는 편이었다. 그는 도제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다. 게다가 그 도제는 기술을 배우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리하여 예조프는 용서받았다.”[5]
예조프가 자서전에서 푸틸로프 공장을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세 차례 혁명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푸틸로프 노동자’라는 말 자체가 혁명가의 동의어가 되었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이처럼 명성이 높은 기업에서 일했다는 경력이 당이나 소비에트 관료의 전기에서 당연히 매우 유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실제로 예조프가 푸틸로프 공장이나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어떤 공장에서 일했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는 전혀 없다. 그의 청년기에 관한 동생과 조카의 회상에서 예조프가 습득한 직업으로 등장하는 것은 단 하나, 재봉사뿐이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예조프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지낸 첫 약 5년 동안 스테판 바불린에게 재단과 재봉 기술을 배웠다. 동시에 바불린의 어린 아들을 돌보았고, 당시 관행대로 가사사용인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 뒤에는 한동안 스테판의 작업장에서 재봉사로 일했으며, 어쩌면 다른 재봉 작업장들에서도 일했을 것이다.
따라서 열네 살 예조프가 집게를 들고 공장 직장장을 뒤쫓았다는 A. A. 파데예프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문학이 아니라 창작문학의 장르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예조프가 여러 시기에 작성한 신상기록에 따르면 그는 1913년 또는 1914년까지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다가 도시를 떠났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어느 지역을 잘 알고 있으며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살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어린 시절부터 1913년까지 살았고, 그 뒤로는 간간이 방문했다.”[6]
다른 문서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적었다.
“1913년 고무제품 공장 ‘트레우골니크’에서 파업으로 체포되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되었다.”[7]
마지막으로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중독사건과 관련된 파업 당시 ‘트레우골니크’ 공장에서 체포되어 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되었다.”[8]
예조프가 말한 사건은 1914년 3월 12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러시아·미국 합작 고무제품 공장 ‘트레우골니크’의 여성 노동자 약 200명이 새로운 접착제를 사용하다 중독되었다. 이후 며칠 동안 피해자 수가 몇 배로 늘어났고, 결국 공장을 일시적으로 폐쇄해야 했다.
3월 18일 볼셰비키 원내분파의 발의로 이 공장의 상황이 국가두마에서 논의되었다. 같은 시기 ‘트레우골니크’ 여성 노동자들의 중독에 항의하고, 레나 금광 학살 2주기를 기념하여 페테르부르크의 많은 공장과 사업장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푸틸로프 공장도 여기에 포함되었으며, 파업 참가자는 7만 명을 넘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혁명가를 부르며 시위를 조직하려 했지만 경찰이 이를 저지했고,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경찰국이 작성한 체포자 명단에서 예조프라는 성을 찾으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예조프가 체포되지 않았다면 추방될 이유도 없었다. 더구나 ‘트레우골니크’를 둘러싼 사건은 1914년 3월에 발생했지만, 예조프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페테르부르크를 떠난 시점을 1913년으로 기록했다.
따라서 예조프가 수도를 떠난 일은 이 중독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아마 신문을 통해 사건을 알았을 것이고, 이를 쉽게 기억했을 것이다. ‘트레우골니크’ 공장은 예조프 자신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았던 바로 그 레이흐텐베르크스카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예조프가 수도를 떠난 시기와 ‘트레우골니크’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거의 겹쳤으므로, 훗날 두 사건을 인과관계로 연결하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던 듯하다.
앞에서 인용한 자서전적 문서들을 작성하던 1920년대 초 예조프는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당 활동가였다. 그의 신상기록을 사실 그대로 적었다면 상당히 초라해 보였을 것이다. 반면 러시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과 관련되어 행정추방을 당했다는 내용을 넣으면 그의 경력은 훨씬 묵직해졌다.
예조프가 수도를 떠난 진짜 이유는 이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배경에 정치적인 이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조프는 결핵에 걸리기 쉬운 체질이었고 이후 여러 해 동안 이를 치료하려 했다. 이를 고려하면 페테르부르크의 기후가 그의 건강에 잘 맞지 않았으며, 그래서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부모의 집에 잠시 머문 예조프는 일자리를 찾아 떠났으며, 그 과정에서 외국에까지 다녀왔다. 수바우키현의 많은 주민은 현 바깥으로 계절노동을 떠났다. 그중에는 단기 취업허가증을 받아 이웃한 동프로이센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조프도 이 기회를 이용해 동프로이센의 도시 틸지트에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 신상기록에서 이 방문을 언급했다. 다만 취업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다른 도시들에서는 수공업자 밑에서 일했고, 코브노에서는 틸만스 형제가 운영하는 금속가공 공장에서도 일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큰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예조프는 계속 고향 일대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능력을 써먹을 곳을 찾던 지역은 순식간에 전선 인접지대로 변했고, 그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 위험해졌다.
예조프는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전쟁 중 나는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푸틸로프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얼마 뒤, 얼마나 지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자’ 명단에 들어갔다. 그 결과 등록에서 제외되었고[즉 군수산업 노동자에게 주어지던 징병유예를 박탈당했고] 군대로 보내졌다.”[9]
2. 제정 러시아군의 병사
1937년에 출간된 소책자 『소련의 위대한 사회주의혁명』에서 훗날 소련 역사학계의 거물이 되는 I. I. 민츠는 당시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들의 혁명 경력을 설명하면서 예조프에게도 몇 줄을 할애했다. 특히 제정 러시아군 복무 시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투쟁했다는 이유로 수백 명의 푸틸로프 노동자와 함께 공장에서 해고된 예조프는 보충대대로 보내졌다.
대대에 들어간 푸틸로프 노동자들은 파업을 조직했다. 그들은 훈련에 나가지 않았으며, 다른 병사들도 병영에 남도록 설득했다. 대대는 즉시 해산되었고, 파업 주동자들은 군사중노동 감옥과 징벌대대로 보내졌다.
장교들은 혁명적 성향을 가진 병사들을 전선에 보내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비전투근무대로 옮겼다. 전속된 사람 가운데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약 30명이 있었다.
그들은 지휘관들에 반대하는 병사들의 행동을 조직했고, 이는 하마터면 부대 지휘관 살해로 끝날 뻔했다.
1916년 포병 작업장장이 부대에 찾아왔다. 그는 선반공과 기계공이 필요했다.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예조프도 선발되었다.”[10]
I. I. 민츠의 노력 덕분에 독자 앞에는 제정 체제에 대한 확고한 반대자이자, 전제정과의 힘겨운 투쟁을 통해 다가올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승리를 준비한 인물로서 예조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민츠의 이야기 가운데 현실과 일치하는 것은 예조프가 실제로 복무했던 몇몇 군부대의 명칭뿐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예조프는 자신의 자서전이나 민츠의 서술에서처럼 페테르부르크에서 징집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툴라현 크라피벤군 볼혼시노 마을에서 입대했다.[11]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태어나 군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다. 예조프도 전쟁이 시작되어 발트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중단해야 하자 아버지 쪽 친척들이 사는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는 예조프와 함께 한 부대에서 다른 부대로 이동하며 파업을 일으키고 지휘관 살해를 선동했다는 푸틸로프 공장 출신 전우 집단이 그의 군 경력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구나 민츠가 언급한 ‘수백 명의 푸틸로프 노동자’가 해고되어 군대에 들어간 것은 1916년 2월이었다. 당시 파업 때문에 공장이 폐쇄되면서 노동자 2천여 명이 군에 징집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로 징벌대대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때 예조프는 이미 오래전부터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투쟁한 예조프’라는 신화는 그의 진짜 군 경력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실제 군 경력은 예조프가 각종 신상기록과 자서전에서 구축한 혁명적 노동자의 이미지와 거의 맞지 않았다.
예조프는 자신의 작은 비밀을 철저히 감추었지만, 민츠는 수중에 들어온 문서를 통해 실제 사정이 어떠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련한 소비에트 역사학자였던 그는 자신의 임무를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쓴 것이 아니라, 있었어야 할 일을 썼다.
문제는 예조프가 같은 시기에 군대에 들어간 또래들과 달리 징집된 것이 아니라 자원입대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표현으로는 ‘지원병’ 또는 ‘자원병 사병’이 되었다고 했다.
1915년 6월 16일 자 제76보충보병대대 툴라 주둔지 명령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크라피벤군 군사책임관으로부터 도착한 지원병 니콜라이 예조프를…… 대대 명부의 제11중대에 편입하고, 이달 15일부터 모든 종류의 급양을 지급할 것.”[12]
예조프가 복무한 모든 부대의 인원명부에서도 그의 성 옆에는 언제나 ‘지원병’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의 병역의무법에 따르면 지원병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정해진 시기보다 일찍 조국에 봉사하겠다고 자원하거나, 징집 연기 또는 면제를 허용하는 여러 특권 가운데 하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었다. 앞의 경우는 예조프에게 해당하지 않았다.
예조프가 어떤 특권을 이용할 수 있었는지는 완전히 분명하지 않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무엇 때문에 운명이 준 이 선물을 포기하고 스스로 군대라는 멍에를 짊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이 일은 평시가 아니라 전쟁 중에 벌어졌다.
그가 속했던 사회계층에서는 뚜렷한 애국주의적 분위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병사 가운데 자원입대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크라피벤군 전체에서 예조프와 함께 자원입대한 사람은 고작 세 명이었다.
어쨌든 1915년 여름 예조프는 보충대대에 들어갔다. 이후 6주 동안 병사로서의 기초를 익혔다. 군 규정을 외우고, 제식훈련을 받고, 총검술을 연습하고, 무기를 익히며 실탄사격에 참여했다.
마침내 신병을 병사로 바꾸기 위해 배정된 훈련기간이 끝났다. 1915년 7월 말 예조프는 보충행군중대와 함께 러시아·독일 전선으로 떠났다.
새로 도착한 보충병들은 제172리다보병연대의 병력을 보충하는 데 투입되었다. 이 연대는 북서전선 제10군 제2군단 제43보병사단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리투아니아의 류드비노보 마을 일대 전투진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곳에서 예조프의 고향 마리암폴까지는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최전선에서 보낸 첫날들은 비교적 평온했다. 그러나 곧 상황이 달라졌다.
1915년 8월 초 독일군이 네만강 우안에 있는 코브노 요새를 점령하면서 제10군 담당 전선에 배치된 러시아군의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군 지휘부는 코브노 남쪽에서 방어하고 있던 부대와 편제들을 네만강 방면으로 철수시키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8월 6일 밤, 철수명령을 받은 제172연대는 적에게 들키지 않게 기존 진지에서 빠져나왔다. 밤새 20킬로미터를 행군한 뒤 새로운 방어선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이 되자 독일군 선두부대는 연대 진지 바로 앞까지 접근했고,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그 뒤 사흘 동안 연대는 간헐적으로 독일군 포격을 받았으며, 적 보병이 방어선의 약점을 탐색하려 벌이는 공격을 때때로 격퇴했다.
8월 10일 아침, 연대는 군단 예비대로 전환되었다.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채 위험한 지역에서 다른 위험한 지역으로 계속 이동하며, 퇴각하는 제2군단 부대들을 언제든 지원할 준비를 갖추었다.
8월 13일 저녁, 올리타 마을에서 동쪽으로 7킬로미터 떨어진 진지로 이동하여 제26사단 소속 연대 하나를 전투 지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해당 연대의 방어구역에서는 독일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러시아군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 위험한 순간에 예조프에게 큰 행운이 찾아왔다. 최전선에서 보낸 거의 2주, 참호 생활, 야간 강행군, 포격과 그 밖의 전선 생활의 고통이 그의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그는 병에 걸렸다.
8월 14일 자 연대 명령에 따라 예조프는 다른 병든 병사 몇 명과 함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절묘한 시점이었다. 8월 14일 시작되어 나흘 동안 계속된 격전에서 연대는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를 합쳐 1천 명 이상을 잃었기 때문이다. 예조프가 편입되어 있던 제16중대에서도 50명의 손실이 발생했다.
다만 예조프 역시 약간의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병원 후송이 전투가 시작된 바로 그날 이루어졌으므로, 예조프가 후방으로 철수하기 전에 러시아군 진지가 포격을 받을 때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다.
적어도 그는 한 신상기록에서 올리타 부근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적었다.[13] 그러나 그 며칠 동안 작성된 공식 부상자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만일 예조프가 실제로 부상을 입었다면, 보정하지 않은 모든 사진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오른쪽 뺨의 울퉁불퉁한 흉터가 바로 이 부상의 흔적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1915년 8월 14일 이후 예조프의 행적은 한동안 사라진다. 그는 9월 말까지 병원에서 연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 이후 시기의 제172연대 참모부 문서는 문서보관소에 남아 있지 않다.
예조프가 병원에서 나온 뒤 다른 부대로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1916년 여름이 되면 그는 비테프스크에 있던 드빈스크 군관구 사령부 산하 비전투근무대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비전투근무대는 군의관위원회가 전투복무에 부적합하다고 판정한 병사들을 위한 일종의 배치대기소였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임시 파견을 나가거나 군관구 후방의 부대와 시설, 즉 병원, 제빵소, 창고, 작업장 등에 상시 배치되었다.
마침내 예조프의 차례도 왔다. 1916년 6월 초 그는 135명으로 이루어진 집단과 함께 비테프스크에 있던 제5이동수리작업장으로 배치되었다.
제5작업장은 포병 무기를 수리하고 그 예비부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1914년 여름 편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실제로 이동식 작업장으로 운용되었다.
비테프스크에서 몇 달 동안 작업한 뒤 1915년 초 빌나로 이동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보브루이스크로 보내졌지만, 이동 도중 목적지가 다시 비테프스크로 변경되었고 이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1916년 9월에는 ‘북부전선 제5후방포병작업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예조프는 작업장에서 어떤 중요한 업무도 맡지 못했다. 그는 ‘영내 잡무 담당 사병’이라 불리는 집단에 배치되었다.
처음 반년 동안 그는 주로 당번과 경계근무를 서며 이러한 잡무를 수행했다. 거의 하루걸러 당번병이나 보초로 근무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에게 좀 더 적합한 쓰임새가 발견되었다.
예조프는 대다수 전우와 달리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부대 문서에도 이 사실이 특별히 기재되어 있었다.
1916년 말 작업장 행정실에서 서기병 자리가 비자 예조프가 선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17년 4월 1일, 행정실에서 서기, 석판인쇄공, 제본공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다른 병사들과 함께 예조프도 다음과 같은 사유로 하급 기능병 계급을 받았다.
“품행이 양호하고 복무 태도가 탁월하고 성실하였으므로.”[14]
4개월 뒤 다시 승진했다.
1917년 7월 27일, 이전과 똑같은 사유에 따라 그는 중급 급료 등급의 상급 서기병으로 진급했다.[15]
훗날 예조프는 프롤레타리아 출신 볼셰비키의 이미지에 잘 어울리지 않는 이 서기병 경력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신상기록에는 자신이 제5작업장에서 처음에는 기능공으로, 그다음에는 상급 기능공으로 일했다고 적었다.[16]
그러나 당시 예조프의 관심사가 맡은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는 데에만 한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병영 문밖에서는 누구도 무관심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3. 예조프, 볼셰비키가 되다
전제정의 붕괴는 러시아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비테프스크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17년 3월 5일 밤, 도시의 권력은 주민의 주요 사회집단을 모두 대표하는 인사들로 구성된 시민위원회로 넘어갔다. 경찰을 무장해제하고, 구 행정부의 관리 일부를 체포하며, 인민민병대를 창설하는 등의 결정이 내려졌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온갖 정당과 운동단체가 공식적인 조직을 갖추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3월 18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즉 RSDLP 조직위원회는 노동자와 병사를 비롯한 모든 시민을 초청하는 집회가 곧 열린다는 공고를 신문에 게재했다.
호소문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 동지들이여! 언제나 여러분의 이익을 지켜온 여러분의 오랜 당이 그 대열에 합류할 것을 호소한다.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우리 도시에도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조직위원회는 여러분에게 이 깃발 아래 설 것을 호소한다.”[17]
2월혁명 당시 비테프스크에는 독립적인 사회민주주의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연계되지 않은 개별 당원과 지지자 집단만 있었을 뿐이다.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좌파와 우파, 즉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아직 완전히 결별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비테프스크의 조직은 양파가 공동으로 만든 조직으로 출범했다. 더구나 이 도시의 멘셰비키는 주로 좌파인 이른바 멘셰비키 국제주의파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여러 문제에서 볼셰비키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러시아의 다른 모든 도시와 마찬가지로, 비테프스크도 당시 국가의 향후 발전 방향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의 무대가 되었다.
수많은 집회와 회의에서 볼셰비키들은 열정적이고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들은 다른 정당의 대표들을 노동대중의 이익을 위해 단호하게 행동할 능력이 없는 타협주의자이자 떠벌이로 폭로했다.
그런 연설을 대여섯 번 하고 나자 볼셰비키들에게는 도발자와 극단주의자라는 확고한 평판이 생겼다. 결국 집회에서는 그들에게 발언권조차 주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볼셰비키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단체의 이름과 보호를 빌려 연설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조프가 현지 볼셰비키들과 알게 된 것은 아무래도 1917년 4월 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4월 3일 시립극장 건물에서 최초의 전 시민 집회 가운데 하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돌아온 볼셰비키 B. D. 핀손도 연설했다. 그는 과거 비테프스크에서 인쇄공으로 일했던 노동자였다.
연설이 끝나자 젊은 노동자와 병사 약 15명이 거리에서 그를 둘러쌌다. 그들은 따로 모여 자신들이 관심을 가진 문제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핀손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기억하기로 그 동지들 가운데는…… 수리작업장 소속 병사 바라노프, 랍킨, 예조프도 있었다.”[18]
볼셰비키의 단순하고 명확한 구호는 예조프의 마음에 들었다. 얼마 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확신하고 볼셰비키가 만든 조직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볼셰비키의 가치체계에서 입당 시기는 가장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였다.
가장 존경받은 사람은 1917년 2월혁명 이전에 입당한 이들이었다. 당시 입당은 감옥이나 유형지로 보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입당 연도도 중요했다. 당 창립 연도인 1898년에 가까울수록 더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2월혁명과 10월혁명 사이에 입당한 경우는 그보다 권위가 떨어졌다. 이 경우에는 입당한 달이 중요했고, 역시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예조프가 1920년대 초 작성한 신상기록에 따르면 그는 1917년 5월 5일 입당했다.[19]
이는 전제정이 무너진 지 불과 두 달 만에 수많은 정치적 조류를 분별하고, 그 가운데 유일하게 올바른 노선을 선택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판단하는 데 굳이 시간을 들일 필요조차 없었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조프는 자서전에서 이미 1912년부터 볼셰비키들과 알고 지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푸틸로프 공장에서 수행한 활동에도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참여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선진적인 노동자라면 두 달조차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예조프는 1927년부터 문서에 자신의 입당 시기를 1917년 5월이 아니라 3월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1917년 5월은 물론이고 3월에는 예조프가 비테프스크에서 가입할 만한 조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국제주의파의 첫 번째 조직회의는 1917년 6월 20일이 되어서야 열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 조직을 창설한 두 번째 회의는 같은 해 7월 2일에야 개최되었다.
이 조직은 멘셰비키 국제주의파에 양보하여 ‘RSDLP 국제주의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1917년 9월 비테프스크 조직이 완전히 볼셰비키 노선으로 넘어간 뒤에는 명칭의 ‘국제주의파’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볼셰비키’로 바뀌었다. 약칭은 RSDLP(b)였다. 1917년 10월 1일에는 RSDLP(b)의 현위원회 조직도 창설되었다.
그렇다면 예조프가 주장한 두 입당 날짜가 모두 틀렸다면 실제로는 언제 입당했을까?
비테프스크 RSDLP 국제주의파 조직의 문서에 따르면 니콜라이 예조프는 1917년 8월 3일 조직에 가입했으며, 96번째 당원이 되었다.[20]
젊은 당원 예조프는 현지 볼셰비키들이 수행하던 활동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볼셰비키의 주요 과제는 주민, 특히 주둔군 병사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선전조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민스크에서 대량으로 들어오는 볼셰비키 신문과 전단을 배포했다. 사업장과 군부대에서는 집회와 회의가 열렸고 당 세포가 조직되었다.
예조프는 경험 많은 당 동지들의 지휘 아래 젊은 볼셰비키로서 이 모든 활동에 직접 참여했다.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권위는 특히 병사들 사이에서 꾸준히 높아졌다. 1917년 8월 실시된 시두마 선거에서도 볼셰비키는 상당히 많은 의석을 얻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업은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선동활동으로 현지 감옥에 수감된 볼셰비키 병사들을 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7월 사태’ 때 체포되었다. 1917년 7월 4일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가 촉발한 무장시위가 해산된 뒤, 전국에서 볼셰비키에 대한 탄압이 벌어진 사건이었다.
예조프는 수감자들과 연락망을 구축하는 데 참여했고, 그들을 위한 자금 모금도 도왔다.
군 복무와 당의 지시를 수행하는 사이 1917년 8월과 9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10월이 왔고, 그 마지막 며칠 가운데 어느 날 예조프가 속한 당은 야당에서 갑자기 집권당으로 변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사건이 알려지자 당 현위원회 선전부는 모든 주둔부대에 대표를 보내 정권전복을 지지하는 집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10월 26일 열린 현위원회 긴급회의에서는 구성상 볼셰비키 조직인 군사혁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볼셰비키 지지자가 상당수 있었던 주둔군 병사들에게 의지하여 우체국, 전신국, 철도역, 드빈스크 군관구 사령부와 그 밖의 주요 시설을 장악했다. 10월 28일이 되자 도시는 완전히 군사혁명위원회의 수중에 들어갔다.
비테프스크 주민의 상당수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지지했으므로 많은 사람은 볼셰비키의 행동을 권력 찬탈로 받아들였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도시와 국가에서 벌어진 정변에 대한 태도는 결코 일치하지 않았다.
비테프스크의 한 볼셰비키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에는 가장 훌륭한 노동자들에게서조차…… 그 시절의 온갖 히스테리성 외침을 한데 모은 듯한 말을 들어야 했다.
‘너희는 헌병이다. 사회주의자들을 체포하고 있다. 너희는 모험주의자다. 인민의 의사를 무시한다. 반동과 로마노프 왕조의 귀환을 위한 토양을 만들고 있다’는 식이었다.”[21]
다른 목격자는 이렇게 썼다.
“멘셰비키의 모든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볼셰비키들은 이 일에 녹초가 되었다.
볼셰비키 한 명당 말솜씨가 대단히 날카로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수십 명씩 있었다. 모든 회의와 집회에 빠짐없이 나가야 했고, 어디에서든 더 경험 많은 연설가와 맞서야 했다.”[22]
그럼에도 볼셰비키는 현지 주둔군을 가장 강력한 논거로 내세워 모든 반대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도시에는 계엄상태가 선포되었다. 모든 주요 국가기관에 정치위원이 파견되었다.
군부대에도 정치위원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지휘관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군사혁명위원회에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언론검열을 담당하는 특별조가 만들어졌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한 시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가 발행하던 신문 『이즈베스티야』는 폐간되었다.
볼셰비키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태업한 국가기관 관리와 주둔군 장교들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군대 내부의 상황을 고려하면, 지금까지는 착실하게 작동했던 이 도구가 앞으로도 계속 믿을 만하게 움직이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여러 해에 걸친 전쟁으로 누적된 피로, 독일과의 평화와 군대 해산에 관한 끊임없는 소문, 전반적인 무정부상태의 분위기가 주둔군을 빠르게 해체시키고 있었다.
전역을 바라는 분위기는 곧 부대를 무단이탈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각 부대의 병력은 계속 줄어들었다.
도시 당조직에는 자체적인 군사력을 만드는 것이 생사의 문제가 되었다.
러시아에는 이미 선례가 있었다. 2월혁명 이후 여러 도시에서 자원자로 구성된 무장부대인 적위대가 만들어졌다. 이제 비테프스크에서도 같은 일을 해야 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모든 위원과 평당원 공산주의자 약 20명이 가장 먼저 적위대에 등록했다.
이후 철도노동자 출신 청년 약 50명과 병사 약 300명이 합류했다.
그 가운데 예조프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훗날 언론에서 때때로 주장했듯이 예조프가 적위대를 지휘한 것은 아니었다.
1938년 6월 14일 신문 『소비에트 벨로루시』에는 V. S. 로마놉스키라는 사람이 예조프의 이 시기 활동을 회상한 글이 실렸다.
그가 썼다기보다 정확하게는 신문에 인쇄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테프스크에 예조프라는 볼셰비키 기계공이 있는데, 자본가들을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 적위대를 조직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거기에 들어갔다.
어느 날 부대 집회에 갔더니 지휘관이 내게 말했다.
‘로마놉스키, 예조프의 말을 들어보고 싶은가?’
‘듣고 싶습니다, 지휘관 동지.’
‘그렇다면 여기 있는 세 동지와 함께 제5포병작업장으로 가게. 예조프가 거기서 연설하고 있네.’
작업장에 가보니 사람이 아주 많았다.
‘저 사람이 예조프다’라며 누군가 작은 키의 사람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나도 믿지 못했다. 술통 위에는 우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낡고 평범한 옷을 입고 서서 노동자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조프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직감으로, 가슴으로 깨달았다. 멘셰비키는 우리 노동자들이 자신의 대열에서 내던져버려야 할 오물이라는 것을.
집회는 내게 엄청난 인상을 남겼다. 나는 한 시간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내 철도구간으로 돌아와 선로노동자들을 모아 집회와 예조프 동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뒤 많은 선로노동자가 적위대에 가입했다.”
이 이야기를 읽은 독자가 예조프의 연설 능력에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도록, 또 다른 회상의 일부를 소개하겠다.
비슷한 시기 비테프스크의 공산주의자 A. A. 드리줄이 잡지 『당 건설』을 위해 작성한 회상이다. 그는 제5포병작업장에서 예조프와 함께 근무했다.
드리줄은 이렇게 썼다.
“예조프는 연설을 거의 하지 않았다. 두세 마디 말하고 말았다…… 그는 연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23]
편집되었으나 결국 출판되지 않은 회상록의 다른 판본에서는 예조프의 이 특징이 단순히 언급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정당화되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정치사업의 조직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예조프 자신은 대규모 집회에서 좀처럼 연설하지 않았다.
그의 특징은 ‘말은 적게, 행동은 많이’였다.”[24]
앞서 언급한 소비에트 역사학자 I. I. 민츠도 비테프스크 적위대 창설에서 예조프가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예조프는 적위대를 창설하고, 직접 대원을 선발하고, 직접 훈련시키며 무기를 조달했다.”[25]
그러나 실제로 예조프가 적위대에 속했다면 아마도 평범한 적위대원 자격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군인으로서 맡은 직무가 없는 시간에만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조프가 자신의 신상기록이나 자서전에서 이 경력을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비테프스크 적위대는 비교적 짧은 존속기간 동안 특별히 영웅적인 행동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예조프는 얼마 뒤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부대로 돌아온 뒤인 1918년 1월 6일, 그는 6개월간의 병가를 받아 전역했다.
그러나 예조프는 이후 비테프스크로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고 싶었더라도 돌아갈 곳 자체가 없어졌다.
그가 떠난 지 몇 주 뒤 완전히 붕괴한 러시아군과 함께 제5포병작업장도 존재를 끝냈기 때문이다.
예조프의 비테프스크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그가 몇 년 뒤 자신의 당 활동 지도자 B. D. 핀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비테프스크 당조직 활동에 참여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분명 1917년 비테프스크에서 우리가 함께 활동하던 일을 기억하겠지요?
나는 제5포병작업장에서 했던 활동을 떠올립니다. 『프라우다』를 배포하던 방법, 자금을 모으던 일 등을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볼셰비키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흔들리지 않는 신성한 무엇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위원회 위원이던 시프레스 동지*가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예조프 동지, 우리는 모든 부대에 세포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일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때 병영으로 걸어가면서 발이 땅에 닿는지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내게 중요한 일을 맡긴 것입니다!
그 뒤 군사집회가 열리던 시기와 10월의 다른 생생한 투쟁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어느 날 당신은 내게 다가와 위원회를 대표하여 나의 활동을 칭찬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열 번째 하늘’에 올라간 기분이었습니다.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수감된 우리 동지들과 연락망을 구축했던 일도 기쁘게 기억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위대한 10월 정변과 우리의 첫 사령부에서 있었던 만남입니다.
당신은 나를 발견하자 빠르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힘껏 몇 차례 입을 맞추었습니다.
위대하고 행복했던 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26]
- 시프레스 A. L.: 비테프스크 최초의 RSDLP 국제주의파 시위원회 위원.
우리가 보기에 이 편지의 인용문에는 작성자의 심리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세부사항들이 담겨 있다.
예조프는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은 키, 즉 157센티미터의 신장도 자신감을 높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중요하고 책임 있는 일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으면, 그는 이를 무슨 일이 있어도 정당화해야 하는 엄청난 신뢰로 받아들였다.
맡겨진 일에 대한 이런 태도는 예조프에게 일종의 집행자적 광신성, 또는 지시 수행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점차 발달하는 데 기여했다.
여러 해 뒤 예조프의 직속상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I. M. 모스크빈이 남긴 평가도 이를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예조프보다 더 이상적인 노동자를 알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가 아니라 집행자다.
그에게 무언가를 맡기면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그가 모든 일을 해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예조프에게는 단 하나의, 그러나 상당히 중대한 결점이 있다. 그는 멈출 줄을 모른다.
때로는 어떤 일을 할 수 없어서 멈추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예조프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그가 제때 멈추도록 감시해야 한다……”[27]
예조프의 광적인 지시 수행 능력이야말로, 독재자가 자신의 어떤 명령도 무조건 수행할 사람을 필요로 했을 때 스탈린의 선택이 왜 바로 그에게 향했는지를 상당 부분 설명해주는 듯하다.
그리고 예조프는 그때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신뢰’를 정당화하는 데 성공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자 예조프의 부모는 이를 피해 트베리현 비시니볼로초크군으로 이주했다.
이제 병가를 받은 예조프도 그곳으로 향했다.
건강을 회복하고 휴식을 취한 뒤 그는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비시니볼로초크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클류치노 마을의 볼로틴 유리공장에 취직했다. 정확히 말하면 ‘옛 볼로틴 공장’이었다. 10월혁명 이후 소유주에게서 공장이 몰수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공장은 러시아 유리산업 전체와 마찬가지로 좋은 시기를 보내고 있지 않았다. 군수주문과 관련되지 않은 산업이었으므로 원료와 노동력 부족, 운송 문제 등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점차 쇠퇴하면서 유리 생산량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1916년 말이 되면 볼로틴 공장에 있던 네 기의 유리 용해로 가운데 가동되는 것은 한 기뿐이었다. 1917∼1918년에도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다. 새로운 권력의 사회·경제정책으로 인해 국가 전체와 개별 사업장의 경제생활이 완전히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가동되는 용해로에서 노동자들은 이따금 전원이 함께 장작을 마련한 뒤 창유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생산한 유리를 농촌에서 빵과 감자로 교환했다.
예조프의 남동생에 따르면 그는 공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예조프 자신은 훗날 신상기록에 자신이 공장 노동조합위원회의 위원장과 서기를 맡았고, 당 업무로는 당 클럽 책임자로 일했다고 기록했다.[28]
하지만 자신의 전기를 미화하기 좋아했던 예조프의 성향을 고려하면, 이 주장들도 전기적 주제에 관한 또 하나의 환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예조프가 볼로틴 공장에서 무슨 일을 했든, 그 생활은 1919년 4월에 끝났다. 이미 1년 넘게 계속된 내전의 전선에서 또다시 존립의 시험을 받고 있던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당이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콜차크 제독의 군대가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시작하면서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4월 중순까지 인구 5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던 3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당적 동원을 실시하여 공산당원의 최소 10∼20퍼센트를 군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노동조합 조직에는 소속 회원을 재등록하고, 생산현장에서 없어도 되는 사람들을 전선으로 보내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이 모든 조건이 겹치면서 민간인 생활을 시작한 지 겨우 1년 남짓 된 예조프는 다시 무기를 들게 되었다.
1937년 당시 이미 ‘크라스니 마이’, 즉 ‘붉은 5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유리공장의 사내신문에는 예조프가 직장 동료들과 작별하는 장면이 목가적으로 묘사되었다.
한 여성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백위군과 외국 간섭군이라는 검은 구름이 러시아 전역에 드리웠을 때, 니콜라이 이바노비치는 당의 부름에 따라 우리 공장에서 가장 먼저 위대한 조국을 지키러 나섰습니다.
나는 예조프 동지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따뜻하게 말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동지들! 당이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행복한 미래를 지키러 떠납니다.’”[29]
예조프는 이런 말을, 아니면 이제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다른 말을 남기고 유리공장을 떠나 콜차크와의 전쟁으로 향했다.
4. 군사위원
계급은 계급과 맞서 싸웠고, 대지는 불타올랐다. 조국은 그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적들은 불길한 고리로 우리를 조였다. 철과 강철로, 불과 납으로.
나는 과거를 기억한다. 핏빛 노을 속에서 연기를 뚫고 예조프 위원을 본다. 강철 칼날을 번뜩이며 그는 용감히 군복 입은 인민을 공격으로 이끈다.
잠불, 「인민위원 예조프」, 1937년
예조프의 공식 전기에서는 소비에트 권력 초기 그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0월혁명과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여러 적군 부대의 군사위원을 지냈다.”[30]
알렉산드르 파데예프는 앞서 언급한 논문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빈곤과 투쟁의 아들」을 집필하면서 이런 빈약한 정보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동부전선에서 예조프가 세운 무훈을 묘사하여 공식 전기를 보완하기로 했다.
작가는 먼저 주인공의 외모와 심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직 매우 젊은 검은 머리의 청년으로, 짙고 검은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단단히 다문 입술과 대조적으로 눈에는 몽상적인 표정이 어려 있었고, 얼굴에는 정신적 고양과 강한 의지가 드러났다……
전투에서는 과시적인 영웅주의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영웅주의는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자연스러웠다.”[31]
파데예프에 따르면 예조프가 군사위원으로 배치된 적군 부대는 내전의 저명한 지휘관 M. V. 프룬제가 지휘하는 남부군집단에 속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군사위원으로 복무하던 사단은 전략적 요충지인 이바셴코보 마을을 공격하고 있었다. 적은 그곳에 정예부대를 집결시켰다.
마을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예조프는 며칠 동안 전투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결정적인 공격에서 적의 강력한 기관총과 포병 사격을 받던 예조프는 세 개의 파편에 맞았다. 그중 하나는 그의 턱을 관통했다. 마을은 적군이 점령했다.
중상으로 인해 예조프는 오랫동안 전투에 복귀할 수 없었다. 그의 턱 오른쪽에는 평생 흉터가 남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오랫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32]
앞에서는 I. I. 민츠가 예조프의 제정군 복무를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이야기에서 사실과 일치하는 것은 예조프가 실제로 복무했던 몇몇 군부대의 명칭뿐이라고 지적했다.
파데예프는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그의 논문에서 현실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은 당시 예조프의 외모 묘사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작가 또는 예조프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이바셴코보 마을의 전투 장면은 아무래도 예조프 본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다시 쓴 것으로 보인다.
예조프는 비슷한 시기에 과거 전우들에게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한 전우는 훗날 1937년 NKVD 직원들의 훈장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연회에서 술에 취한 예조프가 참석자들에게 내전 시절의 영웅적인 과거를 들려주었다고 회상했다.
예조프는 어느 전투에서 얼굴에 부상을 입은 이야기와, 중요한 전투임무를 수행하여 적기훈장을 받았던 일을 말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병원에 누워 있던 예조프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훈장 수여명령에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의장 L. D. 트로츠키가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예조프는 수훈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훈장을 바닥에 내던졌다고 했다.[33]
청중은 이를 통해 예조프가 이미 그 당시부터 트로츠키가 당의 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실제 삶은 훨씬 단순했다. 예조프는 적군에서도 오직 후방부대에서만 복무했으며, 어떠한 전투에도 참가한 적이 없었다.
그의 군복무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비시니볼로초크를 출발한 예조프와 함께 동원된 당 및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동부전선으로 가기 전 같은 트베리현의 주브초프시에 잠시 머물렀다. 이들은 각 부대에서 보내온 충원 요청에 따라 이곳에서 분산 배치될 예정이었다.
사라토프에 주둔한 적군 보충전기기술대대에서도 충원 요청이 들어왔다. 요구된 인원은 거의 모두 채워졌지만 한 명이 부족했다.
예조프에게 갈 의사가 있는지 물었고, 그는 동의했다.
주브초프를 떠나기 전 예조프는 현지 시장에 들러 먹을 것을 조금 샀다. 그를 배웅하던 전우들이 여행경비로 약간의 돈을 모아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예조프와 함께 여행할 사람들은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 사람의 후일 회상에 따르면 예조프는 인색하게 굴지 않고 자신이 산 식량을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34]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분명 쉽지 않은 행동이었다. 예조프 자신도 괴혈병 증세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신선한 식품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사라토프에 도착했다. 1919년 4월 28일 예조프는 적군 보충전기기술대대의 청음병조에 편입되었다. 이곳에서는 미래의 무선통신병들에게 무선기술을 교육했다.
이 대대는 1915년에 창설되어 처음에는 페트로그라드에 주둔했다가 이후 사라토프로 이동했다.
대대의 임무는 무선통신병, 모터 기술자, 기뢰 기술자, 탐조등 기술자 등 다양한 군사기술 분야의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1919년 봄 대대 병력은 약 1,500명이었다. 그중 약 100명은 지휘인원이었고, 나머지는 교육과 배치를 위해 수시로 들어오고 나가는 병력이었다.
1919년 5월 10일 열린 정기 당원총회에서 예조프는 대대 당조직에 편입되었다.
같은 회의에서는 볼가 군관구 군사위원이 제안한 중대와 각 작업조의 정치지도원, 즉 정치위원보 직책 신설 문제도 논의했다.
정치지도원은 매일 한 시간씩 자기 부대의 적군 병사들에게 정치교육을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후보 20명 가운데 정치지도원 11명이 선출되었고 예조프도 그중 한 명이 되었다.
아마도 그가 혁명적 전통으로 유명한 푸틸로프 공장에서 일했다는 경력과 혁명 이전부터의 당 경력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예조프가 새로 만난 당 동지들에게 이 경력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했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조프 외에도 청음병조 출신 정치지도원이 한 명 더 선출되었다. 두 사람의 합의에 따라 예조프는 다른 부서인 야전무선국 편성조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지도원들 자신의 정치적 소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정치지도원들이 독자적으로 강연하지 않고, 병사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를 골라 대화와 문답 방식으로 적군 대중을 교육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병사들이 이런 대화에 큰 관심을 보이리라는 환상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는 병사들을 대화모임에 참여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강제를 사용할 것”이 권고되었다.[35]
하지만 강제는 적군 병사들을 ‘마음을 터놓는 대화’에 끌어들이는 데 그다지 성공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결국 모든 활동은 신문 낭독과 시사정세에 관한 전통적인 보고로 축소되었다. 대대의 공산당원들도 당원총회에서 정기적으로 서로에게 같은 방식의 보고를 했다.
마침내 예조프에게도 순서가 돌아왔다.
1919년 5월 24일 자 당원총회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예조프 동지는 보고에서 사회혁명당, 무정부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등 주요 사회주의 정당들의 조직구조와 이들이 어떤 사회세력에 의지하는지, 그리고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지를 설명했다.”[36]
예조프가 대대에 들어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당조직에서 상당한 권위를 얻었다.
1919년 5월 초 다른 곳으로 떠난 공산당원들을 대신하기 위해 당 세포 상무회의 보궐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예조프는 48표 가운데 36표를 받아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다음 날 열린 상무회의에서 그는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예조프와 많은 전우는 사실상 전기기술대대에서 계속 복무하고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다른 부대의 명부에 올라 있었다.
그 부대는 제2무선전신편성기지라고 불렸다. 예조프는 이곳에서 남은 군복무기간 전체인 2년을 보내게 되었다.
무선기지의 창설은 1918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적군은 구 제정군으로부터 일정 수의 가동 가능한 무선국을 물려받았고, 또 다른 무선국들은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동시에 숙련된 무선통신병이 극도로 부족했다. 양성 규모는 계속 증가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특히 군 병력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 세워지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는 1918년 11월 22일 명령을 내려, 무선전신부대를 신속하게 편성하고 전쟁 이후 남은 무선전신 장비를 더욱 합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선전신편성기지를 만들도록 했다.
각 무선기지에는 다음 시설이 포함되어야 했다.
- 편성대대
- 무선전신학교
- 교육·실험용 무선국이 딸린 실험실
- 모든 유형의 무선국을 수리하고 조립하기 위한 창고 겸 작업장
편성대대는 창고에서 무선국을 지급받고 무선학교에서 양성된 전문인력을 배치받아, 매년 약 80개의 다양한 무선국 부대를 완전한 인원편제와 함께 편성하여 작전군에 보내야 했다.
제1무선기지는 1919년 겨울 블라디미르에 만들어졌다.
제2기지는 1919년 5월 사라토프에서 적군 보충전기기술대대의 무선기술 전문인력 양성부서들을 기반으로 창설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19년 6월 초 예조프가 복무하던 야전무선국 편성조는 편성대대 제1중대로 무선기지 정식 편제에 포함되었다.
그동안 각 전선의 상황은 복잡하고 서로 모순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적군이 콜차크군을 격파하며 우랄산맥을 향해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다. 반면 남부전선에서는 데니킨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고 있었다.
데니킨군 우익에 배치된 브란겔 장군의 캅카스군은 1919년 6월 30일 차리친을 점령하여 사라토프로 진격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7월 3일 사라토프현에는 계엄상태가 선포되었다.
이 지역에 주둔한 후방부대 일부는 철수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무선기지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아르자마스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병력과 장비를 볼가강을 따라 니즈니노브고로드까지 배로 운반하고, 그곳에서 다시 철도로 최종 목적지까지 수송할 계획이었다.
1919년 7월 31일 무선기지는 증기선 한 척과 바지선 두 척에 인원과 장비를 싣고 출발했다.
그러나 당시 아르자마스로 먼저 파견된 숙영준비요원들은 동부전선의 부대와 각종 시설로 가득 찬 도시에서 무선기지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병영 형태의 건물 몇 곳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휘관과 가족을 동반한 군인들이 지낼 곳은 없었다. 시내에서 민간 주택을 임차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모스크바의 지휘부에 긴급히 이 사실을 알렸고, 무선기지에 내려진 명령은 변경되었다.
새로운 최종 목적지는 카잔으로 정해졌다. 세 척으로 이루어진 작은 선단은 마침 그곳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잔에 도착하자마자 예조프는 새로운 직책을 받았다. 기지관리부 군사위원 휘하의 필경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혁명 이전부터 당 경력을 가진 공산당원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이 직책에 그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불과 두 달 뒤인 1919년 10월 18일, 예조프는 무선기지 소속 무선전신학교의 군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군사위원, 줄여서 군위원 제도는 당이 군 전체, 특히 구 제정군 출신 군사전문가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8년 봄 도입되었다.
임무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군사위원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 가운데 선발되어야 했다.
“가장 위급한 순간과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혁명적 의무의 화신으로 남을 수 있는 흠잡을 데 없는 혁명가.”[37]
처음에는 군사위원이 주로 중앙 군사기관과 전선·군 단위 지휘기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1919년이 되면 적군의 모든 편제와 부대에서 군사위원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들의 기능도 확대되었다.
군사위원은 병력의 정치적·도덕적 교육을 담당하고, 규율을 확립하고 강화해야 했다. 또한 군부대의 행정과 경제활동, 군인들의 생활과 복무환경 전반을 세밀하게 살펴야 했다.
1919년 1월 승인된 육·해군 당조직 지침은 군사위원에게 당 세포의 지도자 역할도 부여했다.
러시아국립군사문서보관소에 보존된 제2무선전신편성기지 문서에는 예조프가 기지 무선학교의 군사위원으로서 수행한 활동을 구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그의 업무는 당시 적군의 다른 모든 부대에서 군사위원들이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군사전문가, 이 경우에는 학교 교관들을 감독하는 일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예조프는 전문지식이 없었으므로 교육과정과 관련된 여러 결정이 옳은지를 전문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문제에는 되도록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근무시간의 대부분은 무선기지 작업장에서 보냈고, 여가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전문서적이나 일반교양서적을 읽었다.
그러나 1920년 초, 무선학교의 평온한 생활에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예조프와 무선학교장인 전 제정군 소위 A. Ya. 마그누셰프스키는 보충군 특별부로부터 학교 입학 절차를 위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 결과 과거 적군에서 탈영했던 몇 사람이 교육생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었다.
마그누셰프스키와 예조프 모두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학교 정원을 채우려 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1920년 2월 5일 이 문제를 심리한 보충군 군사재판소는 비교적 가벼운 처분에 그쳤다.
마그누셰프스키는 징역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예조프는 경고를 수반한 엄중견책을 받았다. 마그누셰프스키와 달리 예조프는 자신의 직책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38]
학교 군사위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예조프는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이후에는 상시적으로 기지 군사위원의 업무를 대행했다. 기지 군사위원이 병에 걸리거나 출장 중일 때마다 그를 대신했다.
그 자격으로 예조프는 때때로 각종 구 또는 시 단위 회의에서 무선기지 집단을 대표해야 했고, 당 구위원회가 맡긴 개별 과제도 수행했다. 예를 들어 카잔의 특정 사업장에서 정치보고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1921년 초까지도 예조프가 카잔시 당조직, 더구나 타타르주 당조직의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반적으로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상황은 1921년 2월에 바뀌었다.
2월 6일 현지 신문에는 6명의 공산당원 명의로 작성된 당 건설에 관한 테제가 토론자료로 게재되었다. 이른바 ‘6인 테제’였다.
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예조프였고, 또 한 명은 그의 직속상관인 제2무선기지 군사위원 Ya. G. 삽초프였다.
테제는 당의 기초 세포에서 주위원회에 이르는 모든 당조직 단계가 상호작용하는 원칙을 제시했다. 핵심은 각 조직 단계의 기능과 권한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었다.
주위원회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상급 당기관이 하급조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점, 지도급 당 활동가들이 다른 책임 있는 직책을 지나치게 많이 겸임하여 당 활동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는 ‘상층부’가 대중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온갖 비판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당 주위원회 상무국 구성원들을 다른 모든 직무에서 해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처럼 ‘6인 테제’는 몇 달 전인 1920년 9월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제9차 협의회에서 벌어졌던 당 건설 논쟁을 지역 차원으로 옮겨놓은 셈이었다.
- RCP(b), 즉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는 1918년에 RSDLP(b)에서 개칭된 명칭이다.
테제가 발표되자 카잔의 당조직들 사이에서 승승장구하며 확산되기 시작했다. 개별 당 세포뿐 아니라 구위원회 전체가 이를 지지했다.
1921년 2월 20일 열린 카잔 전 시 당협의회에서는 주위원회 대표가 당 건설에 관한 보고를 한 뒤, ‘6인 테제’ 작성자 가운데 한 명인 S. Z. 슬루츠키에게 공동보고의 기회가 주어졌다.
슬루츠키는 보충군 정치국장이면서 동시에 주위원회 선전선동부장이었다.
그는 제9차 당협의회 이후 당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가 하나도 취해지지 않았으며, 좋은 사업계획만이 아니라 그 계획이 실제로 집행될 것을 보장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보장책은 다음과 같았다.
공산당원을 당 지도기관에 발탁할 때 소비에트 기관에서 차지하는 높은 직위가 아니라 당 활동 능력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당시에는 높은 소비에트 직책을 가진 사람이 당 지도기관에도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당원총회가 완전한 권한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 권한이 없어 현재의 당원총회는 허구로 변해 있었다.
구위원회는 당 세포에 업무를 보고하고, 당 세포는 이에 관한 결정을 내려 주위원회로 보내야 한다.
지도급 당 활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일해야 할 의무를 무시하지 않도록, 이들이 배속된 당 세포가 매월 그 활동을 평가해야 한다.
협의회는 ‘6인 테제’를 기초로 채택하고, 주위원회의 강령까지 고려하여 통일된 입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일주일 뒤 제2차 타타르주 당협의회가 열렸다. 조직문제에 관해 채택된 결정에는 ‘6인 테제’에 담긴 주요 제안이 모두 반영되었다.
1921년 2월에 3주 동안 진행된 이 논쟁은 예조프의 이후 운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큰 인기를 얻은 ‘6인 테제’에 그의 서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받았다. 논쟁의 마지막 단계에 열린 주 당협의회에서 지도기관을 선출할 때 예조프는 처음으로 당 직책을 얻었다.
비록 주 단위 위계에서는 가장 낮은 직책이었지만, 그는 감사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두 달 뒤인 1921년 4월 21일, 예조프는 카잔시 크렘린구 당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날 열린 구위원회의 첫 조직회의에서는 무선학교 군사위원직을 유지하는 동시에 구위원회 선전선동부장까지 겸임하도록 임명되었다.
1921년 5월 13일, 제2무선기지 군사위원이 새로운 근무지로 떠나면서 그 자리가 비게 되자 예조프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권위는 계속 높아졌다.
현지 신문에는 무선기지 당조직의 활동을 모범사례로 소개하는 기사들이 실렸다.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6월 24일 열린 제3차 타타르주 당협의회에서 예조프는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타타르주위원회 상무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상무국 위원들의 업무를 분담할 때 예조프에게는 주위원회 선전선동부를 이끄는 임무가 맡겨졌다.
예조프는 소비에트 기관의 활동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초 그는 다시 한번 카잔시 소비에트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달 말 제2차 전타타르 소비에트대회에서는 전타타르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었다.
당시 진행되던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예조프는 당의 정치투사답게 무선기지 병력에게 정치적 설명을 제공했다. ‘이질적인’ 견해와 ‘소시민적인’ 판단을 적극적으로 폭로했다.
카잔시 소비에트 선거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현장 묘사가 있다.
“무선기지 클럽은 적군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활기찬 말소리와 소음에서 평소와 다른 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선거위원회 대표가 회의를 열었다……
예조프 동지의 보고가 끝난 뒤 여러 연사가 발언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포티예프 시민의 발언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충분히 교양된 사람이라면서도 ‘도무지 정당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으며,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무당파’라고 부르는 포티예프는 이런 식으로 무선기지 동지들을 현혹하려 했다.
이후 예조프 동지가 그의 진짜 정체를 폭로했다. 알고 보니 포티예프는 멘셰비키였다.
회의 참가자들은 더 이상 포티예프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무선기지 구성원들은 확고한 혁명적 결의로 전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이자 공산당원이며 기지 군사위원인 니콜라이 예조프를 소비에트 의원으로 선출했다……”[39]
이 밖에도 정치적으로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전우 몇 명이 함께 선출되었다.
예조프가 자신에게 맡겨진 무선학교와 이후 무선기지의 인원들을 정치적으로 교육하는 동안 내전은 끝났다.
적군에는 역사상 가장 복잡한 시기 가운데 하나인 동원해제와 재편의 단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발표된 지침에 따르면 당원은 현 또는 주 당조직이 요청하고, 해당 당원의 복무지에서 반대하지 않는 경우 동원해제될 수 있었다.
1921년 6월 30일, 이미 진로를 결정하고 완전히 당 활동에 전념하기로 한 예조프에 관해 타타르주위원회가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동원해제 청원을 제출했다.
다음 날 예조프 자신도 “기지에 부여될 향후 과제와 기지 재편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동시에 자신의 운명과 관련된 결정이 더 빨리 내려지도록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921년 7월 5일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기록배치부는 타타르주위원회의 청원을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정치국에 전달하고 의견을 요청했다.
같은 날 모스크바에 있던 예조프는 적군 통신국 정치담당 부국장 A. F. 보야르스키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동원해제 청원이 모든 행정단계를 통과하면서 발생할 지연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타타르주위원회에 배속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정이 있는지를 직접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예조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다음 사항을 고려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현재 나는 약 여덟 개의 소비에트 및 당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타타르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시집행위원회 위원,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주위원회 상무국 위원 및 서기국 위원, 당 구위원회 상무국 위원, 당 주위원회 선전선동부장, 당 주위원회 기관지 『이즈베스티야』 편집자, 내전과 적군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스트파트* 분과 책임자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모든 관심을 무선기지에 기울일 수 없으며, 적군 통신국의 직원으로서 현재의 경우 특별한 가치도 없습니다.”[40]
- 이스트파트: 당 역사를 연구하는 위원회.
적군 통신국 무선전신부 군사위원 P. N. 노보브라노프는 이에 부정적인 결재 의견을 남겼다.
“나는 당연히 무선통신 전문가를 보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군 무선조직은 지금도 이미 많은 공산당원을 다른 업무와 당 활동으로 분산시키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결국 군 무선조직에 공산당원이 전혀 남지 않을 수도 있다.”[41]
하지만 결국 예조프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1921년 7월 15일 예조프는 군사위원직에서 물러났다. 이 순간부터 그는 전문 당 관료가 되었다.
카잔으로 돌아온 예조프는 정력적으로 업무에 착수했다.
8월 2일 열린 주위원회 상무국에서는 선전선동부의 활동과 가까운 시기의 계획에 관한 예조프의 보고를 들었다.
보고에 따르면 선전선동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까지 조사한 네 곳의 구위원회 가운데 세 곳은 업무 상태가 불량했다.
소수민족 분과의 활동도 정지되어 있었다.
“서기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예조프는 이렇게 보고했다.
그는 상황을 설명한 뒤 이를 바로잡기 위한 광범위한 조직조치 계획을 참석자들에게 제시했다.
동료들은 예조프의 제안을 지지했고 그가 제출한 계획을 승인했다. 이제 계획을 실행하기만 하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조프는 이전부터 건강한 편이 아니었고, 지난 몇 년은 그의 건강에 더욱 나쁜 영향을 주었다.
내전으로 황폐해지고 전염병과 기근에 휩싸인 나라에서는 선천적으로 많지 않았던 생명력마저 잃지 않기가 어려웠다.
그동안 온갖 질병을 얻게 된 그는 이제 충분히 쉬면서 치료를 받을 필요가 절실했다.
예조프는 이미 3월에 지휘부에 휴가를 요청했다.
“2월혁명 이후 단 한 번도 휴가를 사용하지 않고 계속 소비에트, 당, 노동조합 업무를 수행했습니다.”[42]
당시 3주간의 휴가 허가는 받았지만 실제로 사용하지는 못했다.
이제 휴가를 갈 기회가 생겼다.
1921년 8월 20일 러시아공산당 볼셰비키 타타르주위원회 상무국은 예조프의 휴가와 보조금 지급 신청을 심의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모스크바의 요양원 가운데 한 곳에 입원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갈 권리를 포함하여 한 달간 휴가를 주고, 30만 루블의 보조금을 지급한다.”[43]
예조프가 카잔을 떠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무선기지의 공산당원들은 마치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그에게 송별 편지를 전달했다.
“우리 제2무선전신편성기지의 공산당원들은 우리 집단의 창립자이며 오랜 동지 가운데 한 사람인 당신을 보내면서, 우리 안에 공산주의 정신을 길러내기 위해 기울인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지도 아래 대화, 토론, 발표를 통해 ‘상층부와 하층부’, ‘노동조합’, ‘현물세’ 등 당내 논쟁의 문제들을 노동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명확하게 배웠던 공동회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집단의 노동자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푸틸로프 노동자, ‘책벌레 콜카’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 당 세포는 카잔 당조직 크렘린구에서 활동 성과 1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는 작별하면서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의 밝은 미래를 위한 투쟁의 장에서 다시 당신을 만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44]
현안들을 마무리한 예조프는 모스크바로 떠났다.
도착한 뒤 그는 우선 한 요양원으로 보내져 휴식과 치료를 받았다. 이후 1922년 1월에는 대장염, 빈혈, 폐카타르라는 진단을 받고 크렘린 병원에 입원했다.
2월 13일 치료기간이 끝났지만, 크렘린 병원의 담당의는 첨부 진단서에 예조프가 건강상 추가로 한 달간 휴가를 받아야 한다고 적었다.
그러나 더 이상 쉴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