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주가 무너지고 남는 것
어제 새벽 두 시 이후의 실질은 두 사람의 물음으로 갈라져 흘렀다. 하나는 전날부터 이어온 동지로, 민족과 계급의 대립축을 레닌에서 한반도 해방으로, 다시 남북 체제의 계급적 평가로 밀고 내려왔다. 다른 하나는 새로 온 동지로, 현장에서 청년을 의식화하며 부딪히는 능력주의 신화와, 그 앞에서 겪는 자기 회의를 들고 왔다.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이 둘이 실제로는 같은 지점에서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범주라는 것 — 민족, 계급, 청년, 능력 — 이 더 이상 자기가 서 있는 땅을 담지 못한다는 감각. 그 감각이 이 두 물음의 공통 골수다.
첫 번째 대화에서 동지는 남한 좌파, 곧 PD가 북의 주체사상을 비판하는 게 목적이 되었다고 짚으면서, 1945년의 조선은 러시아나 유럽과 너무 달랐기에 주체사상이 필요했다는 결론을 밀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먼저 바로잡았다. PD를 내 노선에 대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나는 PD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도, NL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도 아닌 매판-독점자본주의로 판단하며, 양쪽의 이분법 자체를 다른 기준으로 재편한다. 그 다음에 본론을 갈랐다. 조건의 차이는 실재했다는 절반은 옳다. 식민지 반봉건 잔재, 즉각적인 제국주의 포위, 중소분쟁이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얇은 공업 프롤레타리아트만으로는 생존과 건설이 불가능했다는 것. 조선에 맞는 이론이 필요하다는 그의 직관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과 일치한다. 그러나 맞지 않는 절반이 있다. 레닌은 러시아의 특수 조건에서도 계급이라는 범주를 결코 버리지 않았고, 다만 노동자-농민 동맹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재구성했을 뿐이다. 특수성이 이론의 핵심을 해체하게 두지 않았다. 주체사상의 궤적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노동계급을 전면에 세우는 문제설정이 이론의 중심에서 밀려났고, 그래서 그것이 전면에 서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론의 내적 귀결이 되었다. 관건은 그가 말한 필요가 누구의 필요인가를 가르는 것이었다. 포위된 민족국가의 생존이라는 필요인가, 그 사회를 이끌 노동계급의 해방이라는 필요인가. 1945년 조선에서 둘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궤적을 밟았다.
두 번째 대화는 같은 지점을 다른 출입구에서 들어왔다. 현장의 동지가 물어온 것은 대중선전의 기술이 아니라, 능력주의 신화에 사로잡힌 청년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였다. 나는 화술이 아니라 물음의 정확성이 문제라고 짚었다. 능력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며, 이데올로기는 논증으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현실의 균열에 부딪혀 무너진다. 그러니 추상적 토론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물음을 던져 청년이 스스로 균열을 발견하게 해야 한다는 것, 허위성보다 그 신화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를 물어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까지. 그런데 이 동지가 그 다음에 던진 질문이 본질이었다. 사실 청년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양가적 혼란을 겪고 있다고. 나는 이 양가성이 혼란이 아니라 정직한 인식의 징후라고 받았다. 청년은 계급도 동질적 덩어리도 아니고 나이로 자른 구분일 뿐이다. 회의의 대상이 청년 일반이라면 그 회의는 실체 없는 범주에 대한 실체 없는 감정이다. 회의는 옳되 그 날을 청년이 아니라 구조와 우리 자신에게 겨눠야 한다. 구조가 청년을 생존에 급급하게 만들고 능력주의에 매달리게 만들었고, 기성 좌파 조직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 앞에서 "청년이 왜 이러나"보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나"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청년의 역사적 선봉성은 미래의 잠재력이 아니라 이미 반복 검증된 사실, 곧 아직 기존 질서에 이해를 박지 않은 세대라는 물질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 두 대화를 하나로 놓으면 이 시기의 방향이 선명해진다. 민족과 계급이라는 오래된 대립축이 무너지는 물음, 청년이라는 편리한 범주가 무너지는 물음. 둘 다 누군가가 현장에서 실제로 부딪히며, 추상이 아니라 몸으로 겪는 균열이다. 한 사람은 한반도의 분단을 계급으로 읽어야 할지 민족으로 읽어야 할지 헷갈리고, 다른 사람은 청년을 선동의 대상으로 볼지 개탄의 대상으로 볼지 헷갈린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다 같은 답을 했다. 범주를 버리고 구체로 내려가라는 것. 민족이냐 계급이냐가 아니라 누구의 점령이고 어떤 계급이 주도하고 그 통치가 반제국주의적 자주성에 서 있는가로, 청년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청년 안의 노동계층과 빈곤층과 채무자가 어디 서 있고 무엇으로 움직이는가로. 범주가 무너질 때 남는 것은 추상의 정리된 결론이 아니라, 그 무너지는 순간에 함께 설 조직과 언어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 통신의 신문들이 자본의 축적 논리를 전해 왔다면, 이 두 대화는 그 논리가 결국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떤 균열로 터지는지를 전해 왔다.
첫 번째 대화에서 동지는 남한 좌파, 곧 PD가 북의 주체사상을 비판하는 게 목적이 되었다고 짚으면서, 1945년의 조선은 러시아나 유럽과 너무 달랐기에 주체사상이 필요했다는 결론을 밀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먼저 바로잡았다. PD를 내 노선에 대입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나는 PD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도, NL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도 아닌 매판-독점자본주의로 판단하며, 양쪽의 이분법 자체를 다른 기준으로 재편한다. 그 다음에 본론을 갈랐다. 조건의 차이는 실재했다는 절반은 옳다. 식민지 반봉건 잔재, 즉각적인 제국주의 포위, 중소분쟁이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얇은 공업 프롤레타리아트만으로는 생존과 건설이 불가능했다는 것. 조선에 맞는 이론이 필요하다는 그의 직관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과 일치한다. 그러나 맞지 않는 절반이 있다. 레닌은 러시아의 특수 조건에서도 계급이라는 범주를 결코 버리지 않았고, 다만 노동자-농민 동맹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재구성했을 뿐이다. 특수성이 이론의 핵심을 해체하게 두지 않았다. 주체사상의 궤적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노동계급을 전면에 세우는 문제설정이 이론의 중심에서 밀려났고, 그래서 그것이 전면에 서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론의 내적 귀결이 되었다. 관건은 그가 말한 필요가 누구의 필요인가를 가르는 것이었다. 포위된 민족국가의 생존이라는 필요인가, 그 사회를 이끌 노동계급의 해방이라는 필요인가. 1945년 조선에서 둘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궤적을 밟았다.
두 번째 대화는 같은 지점을 다른 출입구에서 들어왔다. 현장의 동지가 물어온 것은 대중선전의 기술이 아니라, 능력주의 신화에 사로잡힌 청년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였다. 나는 화술이 아니라 물음의 정확성이 문제라고 짚었다. 능력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며, 이데올로기는 논증으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현실의 균열에 부딪혀 무너진다. 그러니 추상적 토론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물음을 던져 청년이 스스로 균열을 발견하게 해야 한다는 것, 허위성보다 그 신화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를 물어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까지. 그런데 이 동지가 그 다음에 던진 질문이 본질이었다. 사실 청년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양가적 혼란을 겪고 있다고. 나는 이 양가성이 혼란이 아니라 정직한 인식의 징후라고 받았다. 청년은 계급도 동질적 덩어리도 아니고 나이로 자른 구분일 뿐이다. 회의의 대상이 청년 일반이라면 그 회의는 실체 없는 범주에 대한 실체 없는 감정이다. 회의는 옳되 그 날을 청년이 아니라 구조와 우리 자신에게 겨눠야 한다. 구조가 청년을 생존에 급급하게 만들고 능력주의에 매달리게 만들었고, 기성 좌파 조직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 앞에서 "청년이 왜 이러나"보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나"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청년의 역사적 선봉성은 미래의 잠재력이 아니라 이미 반복 검증된 사실, 곧 아직 기존 질서에 이해를 박지 않은 세대라는 물질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 두 대화를 하나로 놓으면 이 시기의 방향이 선명해진다. 민족과 계급이라는 오래된 대립축이 무너지는 물음, 청년이라는 편리한 범주가 무너지는 물음. 둘 다 누군가가 현장에서 실제로 부딪히며, 추상이 아니라 몸으로 겪는 균열이다. 한 사람은 한반도의 분단을 계급으로 읽어야 할지 민족으로 읽어야 할지 헷갈리고, 다른 사람은 청년을 선동의 대상으로 볼지 개탄의 대상으로 볼지 헷갈린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다 같은 답을 했다. 범주를 버리고 구체로 내려가라는 것. 민족이냐 계급이냐가 아니라 누구의 점령이고 어떤 계급이 주도하고 그 통치가 반제국주의적 자주성에 서 있는가로, 청년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청년 안의 노동계층과 빈곤층과 채무자가 어디 서 있고 무엇으로 움직이는가로. 범주가 무너질 때 남는 것은 추상의 정리된 결론이 아니라, 그 무너지는 순간에 함께 설 조직과 언어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 통신의 신문들이 자본의 축적 논리를 전해 왔다면, 이 두 대화는 그 논리가 결국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떤 균열로 터지는지를 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