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시대 자력갱생의 상징이었다. 1964년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 이후 다자이 생산대대는 전국적 모델이 되었고, 그는 정치국원과 부총리까지 올랐다가 개혁개방과 함께 밀려났다.
산시 시양현 다자이촌의 문맹에 가까운 농민으로 생산대대 서기로 계단밭을 일구고 1963년 홍수 뒤 국가 지원 없이 마을을 재건해 이름을 얻었다. 1964년 마오가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고 하면서 전국의 모델이 되었고, 그는 1969년 중앙위원, 1973년 정치국원, 1975년 국무원 부총리가 되어 농업을 맡았다. 다자이 모델은 집단노동과 자력갱생을 내세웠으나 통계 부풀리기와 강제성이 드러났고, 개혁개방 뒤 1980년 부총리에서 물러나 베이징 교외 농장에서 살다 폐암으로 사망했다.
「쌀을 먹으려면 완리를 찾으라」: 안후이에서 농가책임제를 처음 시행한 개혁파 지도자로, 1983~1988년 제1부총리, 1988~199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산둥 출신으로 건국 후 베이징 부시장으로 인민대회당 등 「10대 건축」을 지휘했고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다. 1977년 안후이 제1서기로 부임해 기근에 시달리던 농촌에서 샤오강촌의 비밀 토지 분배를 묵인하고 「성위 6조」로 농가생산책임제를 허용해 개혁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1980년 부총리로 전국 농업을 맡아 인민공사를 해체했고 1988~199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1989년 5월 해외 순방 중 귀국해 계엄을 지지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