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외교의 설계자
1971년 키신저와의 비밀 회담으로 길을 열어 1972년 2월 21일 닉슨을 베이징에서 맞이했고, 같은 해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으로 냉전의 삼각구도를 뒤바꾸었다.
1898년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나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한 중국의 정치가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 공산주의 조직 가입,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근무, 시안 사건과 충칭 협상의 수석 협상자 활동을 거쳤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함께 국무원 총리(초기에는 정무원 총리)에 임명되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고, 1949~1958년에는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초기 대외정책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쭌이 회의 이후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에 있었고, 문화대혁명기의 격동 속에서도 국가 행정을 유지하며 권력 균형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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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76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1949–1958외교부장
- 1971–1972키신저 비밀 회담과 미중 정상회담으로 가는 외교
산베이 근거지의 창건자, 16년 실각 뒤 광둥에서 경제특구를 열어 낸 개혁가
류즈단과 함께 산간 근거지를 세워 대장정의 종착지를 마련했으나 1962년 실각해 16년을 감금·하방으로 보냈고, 1978년 광둥 제1서기로 경제특구를 열었다.
산시 출신으로 류즈단과 함께 산간 근거지를 세워 대장정의 종착지를 마련했다. 건국 후 서북국 서기와 국무원 비서장·부총리를 지냈으나 1962년 소설 『류즈단』이 가오강을 옹호한 「반당」 작품이라는 캉성의 고발로 실각해 16년 동안 감금·하방되었다. 1978년 광둥 제1서기로 복귀해 홍콩 탈출 문제의 해법으로 중앙에 「선행일보(先行一步)」의 권한을 요구했고, 이는 1980년 선전·주하이·산터우 경제특구로 이어졌다. 1980년대 서기처 서기로 후야오방을 지지했으며 1987년 그의 해임에 반대했다. 시진핑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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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1962국무원 부총리 겸 비서장
- 1978–1980광둥성 당위원회 제1서기
1989년 5월 계엄을 선포한 총리, 「베이징의 도살자」라 불린 저우언라이의 양자
수력발전 기술자에서 1987년 총리가 되어 1989년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3~4일 군사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로 지목된 인물이다.
쓰촨 출신으로 아버지가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저우언라이 부부의 보호 아래 자랐다. 모스크바 동력학원에서 수력발전을 배워 전력 관료로 성장했고 1987년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1989년 5월 18일 학생 대표들과의 텔레비전 대화가 결렬된 뒤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4일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가 되었다. 총리 재임 중 삼협댐 건설을 밀어붙였고 1998~200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201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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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1998국무원 총리
- 1998–200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