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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개혁을 추진한 푀양파 정치가
«뒤포르가 생각하고, 바르나브가 말하고, 라메트가 행동한다»던 삼두파의 한 축으로, 1791년 푀양파 분열을 주도하며 혁명의 종결과 헌정 질서의 안정을 주장했다.
파리 고등법원 법관 출신의 국민의회 의원으로 배심제와 형사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바르나브·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고 1791년 푀양파 결성에 참여했다. 1792년 왕정 붕괴 뒤 망명해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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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8파리 고등법원 변호사로 인가받고 같은 해 고등법원 심사관으로 임명되어 1790년까지 재직했다.
- 1787–17881787년 '애국자당'을 결성해 국민 의회 소집을 요구했고, 1788년에는 삼신분 구분에 반대하는 30인회를 세웠다.
- 17895월 13일 파리 귀족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고, 6월 말 자유주의 귀족 47인과 함께 제3신분에 합류했다.
- 1789–1791제헌의회에서 바르나브·알렉상드르 드 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고, 형사법위원회 보고자로서 1790년 3월 29일 사법제도 개편안과 1791년 2월 8일 배심제 도입에 기여했다. 1791년 2월 14일부터 26일까지 의회 의장을 지냈다.
- 17917월 푀양파 분열에 앞장섰고, 9월 27일 유대인 완전 해방령을 주도했으며 24일 자유 유색인 권리 철회에 가담했다.
- 17928월 10일 왕정 붕괴 뒤 센 형사재판소 소장직을 그만두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잉글랜드와 스위스를 거쳐 망명했다.
- 1798용기병 반동 쿠데타(1797년 9월 4일) 이후 다시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가이스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혁명 초기의 삼두파에서 푀양파로 이동한 정치가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지만 삼두파와 푀양파에서 입헌군주제로 혁명을 안정시키려 했고, 1792년 왕정이 무너지자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귀족 장교로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고 특권 폐지를 지지했다. 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루다가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푀양파의 지도자가 됐다. 망명과 귀환 뒤 나폴레옹 정부의 지방관, 왕정복고기의 자유주의 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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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7–1785왕의 친위대에 들어가 근위 기병 장교로 복무했고, 1782년 로샹보 휘하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대령으로 참전했다.
- 1789페론느 귀족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제3신분에 합류했고, 8월 4일 밤 특권 폐지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1789–1791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뤄 의회 좌파를 이끌었고, 1790년 11월 20일 의회 의장에 선출됐다.
- 1791–1792자코뱅 클럽 창립 회원이자 푀양파 지도자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했고, 1792년 5월 북부군에서 준장이 되었으나 8월 10일 라파예트와 함께 적국으로 넘어가 오스트리아에 억류됐다.
- 1800–1814귀국해 바스알프·라인모젤·뢰르·포 주의 지방관을 지냈고 1810년 제국 남작이 됐으며, 1814년 중장으로서 솜 주 지방관을 맡았다.
- 1820–1827왕정복고기에 센마리팀과 센에우아즈에서 자유주의 야당 의원으로 선출되어 빌레르 내각에 맞섰다.
입헌군주제를 지키려 한 푀양파의 중심 연설가
1791년 7월 15일, 국왕의 불가침성을 옹호하며 “우리는 혁명을 끝내려 하는가, 다시 시작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왕정이, 평등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소유가 파괴된다고 경고했다.
제3신분 대표로 국민의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뒤포르·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다. 바렌 도주 뒤 입헌군주제를 지키려 푀양파를 이끌고 왕실과 비밀 교섭했으며, 왕실 문서가 발견된 뒤 반역죄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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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9그르노블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신분 통합과 머릿수별 표결을 주장했다.
- 1790제헌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그르노블 시장이 되었다.
- 1791바렌에서 왕 일가를 파리로 호송한 뒤 푀양파를 결성하고 국왕의 불가침성을 옹호했다.
- 1792–17931792년 8월 국민의회에서 고발되어 그르노블과 포르바로에 수감됐고, 혁명재판소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793년 11월 파리에서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