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9월 10일 군사합의회에서 58조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공범으로 누구도 지목하지 않았다. 당일 총살되었다.
모스크바 근교 빈농 가정 출신으로 열셋에 오부호프 공장 선반공이 된 볼셰비키 노동자였다. 1차대전 중 실랴프니코프와 함께 페트로그라드에서 당 중앙위 러시아국을 조직했고, 1917년 아친스크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내전 후 금속노동자조합 중앙위원으로 실랴프니코프와 '노동자 반대파'를 공동 지도하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와 당내 노동자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922년 '22인 서한'에 서명해 코민테른에 당내 탄압을 호소했고, 1933년 출당 후 1937년 재판에서 끝내 자백을 거부하고 총살되었다.
1937년 9월 2일 군사합의회의 비공개 재판에서 테러 음모 혐의를 끝까지 부인하고 다른 사람도 끌어들이지 않았다. 제10차 당대회 강령이 옳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다른 야권과 달리 과거가 아니라 철저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요구했다고 진술했다.
무롬의 가난한 옛의식파 집안에서 태어난 숙련 선반공이었다. 1901년 RSDLP에 입당해 1903년 분열 뒤 볼셰비키로 섰고, 프랑스·독일·영국 공장을 전전하며 유럽 노동운동을 체득했다. 1917년 2월 혁명 때 수도에 있던 최고위 볼셰비키로서 당 중앙위원회 러시아국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0월혁명 후 초대 노동인민위원으로 8시간 노동제의 기초를 놓았고, 내전 말기 콜론타이와 함께 '노동자 반대파'를 이끌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를 주장했으나 1921년 제10차 당대회에서 패배했다. 외교직으로 밀려난 뒤 1933년 출당, 1935년 징역형을 거쳐 1937년 9월 2일 거짓 기소로 처형되었다. 1963년 사법적 복권, 1988년 당적 복권.
1920~1921년 노동반대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산업의 집단적 관리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하다 10차 당대회에서 레닌 노선에 패배했고, 신경제정책과 당 관료화에 환멸하여 1924년 5월 7일 권총으로 자살했다.
1887년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루간스크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루간스크 탄약 공장의 금속 선반공으로 일했다.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아르한겔스크와 야쿠츠크 현으로 유배되어 두 차례 탈출했으며, 1907~1910년 반동 시기에는 사회혁명당에 속했다가 볼셰비키로 돌아왔다. 1917년 3월 루간스크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8월 금속노동조합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 전러시아 제헌의회 의원이 되었다. 1918년 3월 루간스크 지역 인민위원회를 이끌었고 도네츠-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이후 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과 통신노동조합 의장을 맡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04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17루간스크 금속노동조합 의장, 루간스크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1917.12도네츠-크리보이로크 지역 노동조합위원회 의장
1918.3루간스크 지역 인민위원회 의장
1918.4도네츠-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 부의장
1918.7.12–10.17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1919.1.25–1921.5.17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
1919.12.10–1920.12.31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1921.1.5–12.2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1921–1922독일 주재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 공화국 통상대표부 차석 대표
1922.9.22–1924.5.7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 통신 노동자·직원 노동조합 중앙위원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