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7월 11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초안을 국민의회에 제출했고, 바스티유 습격 뒤 국민위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1791년 샹드마르스에서 국민위병이 군중에게 발포해 신임을 잃고 중도 노선은 끝났다.
1757년 태어나 1834년 파리에서 죽은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다.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해 대륙군 소장으로 요크타운 포위전의 결정적 승리에 기여했고, 1789년 삼부회 의원과 국민위병 총사령관을 지내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작성에 관여했다. 혁명기에는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중도 노선을 택했으며, 1791년 샹드마르스 유혈 사건으로 민중의 신임을 잃었고 1792년 체포령 뒤 오스트리아에 억류되어 5년 넘게 수감되었다. 나폴레옹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복고 왕정 아래 자유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830년 7월 혁명에서 국민위병을 다시 지휘하고 루이필리프를 지지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두 세계의 영웅'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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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1781대륙군 소장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 1781년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미국군 우익 지휘
리히가 루스벨트에게 말했다. '이 합의는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 루스벨트가 답했다.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윌리엄 리히는 미 해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와 트루먼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사실상의 첫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해군작전부장과 푸에르토리코 총독, 비시 프랑스 대사를 지낸 뒤 1942년 현역으로 복귀해 전쟁 내내 연합국 전략을 조율했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그는 폴란드 합의문을 읽고 루스벨트에게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루스벨트는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라고 답했다. 원자폭탄 투하를 훗날 비판했지만 당시 공개 반대는 하지 않았고, 전후에는 핵 선제사용 전쟁계획을 거부했다.
1921년 10월 모스크바의 해스켈은 후버에게, 굶주림이 겨울에 절정에 이르러 1,600만 명을 덮칠 것이라고 타전했다.
윌리엄 N. 해스켈은 미 육군 장교로서 전후 국제 구호 행정과 군사 지휘를 결합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후버의 임명으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소련 러시아에서 미국구호행정의 작전을 이끌며, 기근 속 식량·의료품의 대규모 배급을 조직했다. 그의 임무는 볼셰비키 관료의 통제와 협조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구호의 속도와 행정적 책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후 뉴욕 주방위군과 미국 민방위 조직을 지휘하며 군과 국가 행정에서 긴 경력을 이어 갔다.
유럽 부흥을 설계하고 미군을 40배로 키운, 육군·국무·국방 3직을 모두 지낸 유일한 미국인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마셜은 1947년 6월 5일, 준비된 원고도 없이 1,200단어의 연설을 통해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에 반대하는' 유럽 원조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마셜은 육군참모총장(1939~45)·국무장관(1947~49)·국방장관(1950~51)을 두루 지낸 유일한 미국인으로, 처칠이 '승리의 조직자'라 부른 연합군 팽창의 총설계자였다.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전후 유럽의 경제 붕괴와 소련 팽창에 맞선 대규모 원조 구상을 제안했고, 이 '마셜 플랜'은 4년간 130억 달러로 서유럽 산업 기반과 통화를 안정시키며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틀을 재편했다. 국무장관 시절 이스라엘 승인을 두고 트루먼과 정면 충돌했으며, 국방장관으로 복귀해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함으로써 민간의 군대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인 출신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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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석탄·코크스 사업가의 막내로 출생
1902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육군 소위 임관 후 필리핀 배치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 기획
1939–1945육군참모총장, 미군을 18만9천에서 800만으로 팽창시키고 연합군 전략 총괄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 패튼은 실재하지 않는 제1미군집단의 얼굴이 되어 칼레를 향한 위협을 연출했다.
조지 S. 패튼은 기갑부대의 기동성과 공격적 작전 운용을 중시한 미국 육군 장군이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 전투 지휘 능력을 보였지만, 병사 폭행과 거친 발언으로 지휘권과 명성에 반복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는 허구의 제1미군집단을 지휘하는 인물로 내세워 독일군이 칼레 방면의 상륙을 믿도록 만들었고, 실제 노르망디 상륙 뒤에도 독일 예비전력을 묶어 두는 데 기여했다. 이후 제3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했으나, 전후에는 반소련 발언과 탈나치화 비판으로 바이에른 군정에서 해임되었다.
체스터 W. 니미츠는 미국 해군의 잠수함·군수 전문가에서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해상 지휘관으로 올라선 제독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직후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그는 일본군 통신정보를 작전 판단에 결합해 미드웨이에 가용 전력을 집중했고, 과달카날 공세를 승인하며 반격의 지휘 체계를 세웠다. 그의 지휘는 압도적 물자와 정보 우위를 작전 기동으로 전환했지만, 섬 전투와 봉쇄가 낳은 막대한 희생이라는 전쟁의 대가를 지우지는 못했다. 전후에는 해군참모총장으로 감군과 핵추진 잠수함 건설을 함께 추진했다.
프랭크 잭 플레처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한 미국 해군 제독이다. 그는 산호해에서 일본의 포트모르즈비 진격을 저지하고, 미드웨이에서는 전술 지휘관으로 일본 항공모함 네 척의 격침에 관여했다. 그의 신중한 항공모함 운용은 전력을 보존했지만, 과달카날에서 함대 철수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한 제독이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거느린 제16기동부대를 지휘해 일본의 항공모함 네 척을 격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신중한 판단과 침착한 지휘로 명성을 얻었으며, 전후에는 해군대학 총장과 필리핀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46년 상원에서 그는 해병대의 미래를 의회가 결정해야 한다며, “무릎 꿇는 것은 우리 군단의 전통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는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상륙작전과 방어를 결합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2년 8월 제1해병사단을 이끌고 과달카날에 상륙해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지켰고, 이 공세는 미국의 첫 대규모 지상 반격이 되었다. 전후에는 해병대 사령관으로서 육군 편입론에 맞서 해병대의 독자적 역할을 의회에 호소했다.
“그들은 병력이 부족한 나를 상륙시켜 심각한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미 육군 소장 존 P. 루카스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 복무한 직업군인으로, 상륙작전의 기획과 지휘를 맡았다. 1944년 안치오에서 미 제6군단을 지휘하며 기습의 성과를 즉시 확대하기보다 교두보를 공고히 하는 길을 택했고, 그 선택은 작전의 조건과 상급 지휘부의 모호한 명령이 얽힌 논쟁이 되었다. 독일군의 반격을 버텨 냈지만 곧 지휘권을 잃었으며, 이후에도 중국 국민정부 군사고문단과 미 제5군에서 복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1951년 5월 15일 의회 증언에서 브래들리는 전쟁 확대를 주장한 맥아더를 향해 '이 전략은 잘못된 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을 상대로 치르게 할 것입니다'라고 일갈했다.
오마르 브래들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 육군 고위 지휘관으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거쳐 노르망디 상륙과 서유럽 공세를 지휘했다. 그는 기존의 제1미군집단 본부가 연합군의 기만작전에서 허구의 지휘부로 활용되는 과정을 거쳤고, 실제 전선에서는 제1군과 제12군집단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육군참모총장과 초대 합동참모의장을 지내며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군사정책을 조정했다.
1952년 6월,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날 것이 분명하자 해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고, 남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한 채 남겨졌다.
서부전선과 벌지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기병 장교 출신으로, 1952년 5월 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가 되어 1년 넘게 판문점 회담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27일, 남일 장군과 서로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고 18부의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간의 한국전쟁 교전을 멈추었다. 독실한 복음주의 신자이자 장교기독교친목회 회장을 지낸 그는, 퇴역 후에도 '명령 아래 사는 사람'이라는 신앙의 규율을 평생 지켰다.
1953년 7월 27일, 마크 W. 클라크는 판문점 정전협정에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서명했다.
마크 W. 클라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국 육군 장성으로, 연합전의 참모 역량과 현장 지휘를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 점령과 독일군 항복을 이끌었지만, 라피도강 작전과 몬테카시노 폭격을 둘러싸고 작전 판단과 민간 유산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말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공세와 정전협상을 병행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유엔군 측 대표로 서명했다. 그의 경력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가 연합 지휘체계와 전쟁의 파괴성을 어떻게 함께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수부대 지휘관에서 냉전기의 미국 군사·외교 정책가로 변모한 장교였다. 그는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을 비판하고 재래식 전력과 유연한 대응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신임을 얻어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 군사대표를 지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에 참여해 군사 선택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이후 베트남 개입 확대를 지지하며 냉전 군사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윌리엄 H. 터너는 제2차 세계대전의 히말라야 공수와 베를린 공수에서 대규모 항공수송을 정교한 체계로 바꾼 미국 공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베를린 봉쇄 때 연합 공수임무부대를 이끌며 항공기를 일방통행 회랑과 엄격한 시간표에 배치해 임시 작전을 지속 가능한 공급망으로 전환했다. 블랙 프라이데이의 사고 뒤에는 악천후에도 계기비행을 의무화하고 착륙 실패 항공기를 되돌리는 규칙을 세워 안전과 처리량을 함께 높였다. 이후 한국전쟁 공수와 군사항공수송 근무를 지휘하며 현대 전략공수의 조직 원리를 남겼다.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1964~1968년 남베트남 주둔 미군을 지휘하며 소모전과 사살 집계를 앞세운 미국 육군 장군
웨스트모얼랜드는 베트남전에서 소모전과 ‘수색·섬멸’을 채택하고 적 사살 집계를 성과의 핵심 척도로 삼았다. 미군 병력은 50만 명을 넘었지만, 적은 손실을 보충했고 전쟁 승리라는 그의 낙관적 주장은 1968년 뗏 공세 뒤 신뢰를 잃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1936년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2차 대전 유럽 전선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64년 1월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6월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를 맡았다. 해병대 상륙 뒤 방어 위주에서 벗어나 미군이 직접 적을 찾아 섬멸하는 소모전을 주장했고, 대규모 포격과 공습을 썼다. 1967년 11월 「끝이 보인다」고 말했으나 1968년 뗏 공세 뒤 20만 명 증파 요청이 알려지면서 3월 교체되었다. 1968~1972년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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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1942–1945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34야전포병대대를 지휘하고, 이후 제9보병사단 참모장을 지냈다.
1958–1963제101공수사단장에 이어 웨스트포인트 교장을 지냈다.
1964–1968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소모전을 지휘했다. 뗏 공세 뒤 미국으로 돌아와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게일 할보르센은 미국 공군 조종사로, 1948년 베를린 공수작전에 참여해 서베를린의 생존을 뒷받침한 수송 임무를 수행했다. 템펠호프 공항 철책가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껌을 건넨 뒤 손수건 낙하산으로 사탕을 떨어뜨린 일은 Operation Little Vittles로 확대되어 공수작전의 물자 수송에 인간적 얼굴을 더했다. 이 자발적 행동은 미군의 규정과 냉전 선전의 경계에 놓였지만, 베를린 주민과 미국 어린이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며 서방의 정치적 호소력을 키웠다. 그는 이후에도 공군의 항공·우주 개발과 베를린 템펠호프 지휘를 맡았고 1974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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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미 육군항공대 입대, 조종사 훈련
1948–1949베를린 공수작전 C-54 조종사, Operation Little Vittles 창시
「나는 내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판을 원하지 않았다.」, 2005년 AP 통신 인터뷰에서
플로리다주 아팔라치콜라 출신으로 17세에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한 미 공군 조종사였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아침 쿠바 상공을 6분 동안 비행하며 촬영한 928장의 사진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확인되었고, 이 사진이 케네디 대통령의 책상에 올라가며 13일간의 핵전쟁 위기가 시작되었다.